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보디 라자 꾸마라 숫따」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 (20140715)

담마마-마까 2021. 7. 29. 09:00

https://youtu.be/JKo_ZsdRPkU

* 「보디 라자 꾸마라 숫따」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 (20140715)

 

오늘은 「보디 꾸마라 숫따」 라고 하는 중부경전에 나오는 것 중에 일부만 설명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 Bodhi Rāja Kumāra Sutta [MN 85] 】

 

편하게 앉아요. 방석 뒤에 좀 접어갖고. 그렇지.

부처님께서도 법문을 할 때 사람들이 먼저 편안하게 되도록 기다리거든. 그래서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해야 법문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법문을 자기식대로 듣게 되니까 항상 법문 들을 때는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이죠.

 

보디 꾸마라 왕자는 경전 상에서 부처님한테 세 번 귀의한 사람으로서 유명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부처님한테 가가지고 애기를 대신해가지고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하면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렇게 하고, 나중에 크고 나서 유모가 기를 때 유모가 또 애기를 데리고 가서 부처님한테 가서 말도 못하는 애를 대신해서 삼귀의를 하고,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삼보에 귀의를 하는 게송을 하게 되는 게 지금 이 경을 부처님이 설하고 나서 인제 귀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 세 번 등장을 해서 삼귀의를 한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경에서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목표하는 바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대부분 부처님 가르침 배우는 사람들은 목표하는 바가 닙바나에 이르는 것, 열반에 이르는 것,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해탈하는 것, 해탈에 이르는 것이 중요한 목표들입니다.

그래서 이 경에 다른 부분 다 제쳐두고 그 부분만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도에 이르기 위한 방법, 과에 이르기 위한 방법,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뭐가 있습니까? 하고 부처님한테 물어보게 됩니다. 이 보디 꾸마라 왕자가.

 

그때 부처님이 다섯 가지를 얘기한 게 있습니다.

이걸 하면, 이걸 갈고 닦아서 딱 네 것이 되고 나면 너는 이 세상에서부터 해탈한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경전에는 조금 어렵게 써져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첫 번째가 믿음있는 사람이 되어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믿는 것!

 

두 번째는 큰 병도 없고 작은 병도 없고 조화가 잘 잡혀있고, 너무 차가워지지도 않고 너무 뜨거워지지도 않고, 치우치는 일 없이 소화기관을 잘 갖추고 있는 것! 그것이 두 번째로 되어있고.

 

세 번째는 교만하지 않고 심술 궂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스승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또 다른 지혜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법을 실천하는 도반들에 대해서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분명하게 보는 것! 그것은 세 번째로 되어있고.

 

네 번째가 좋지 않은 행동은 버려버리고 좋은 행동은 갖추기 위해서 노력해서 사는 것, 선한 바른 가르침에 대해서 확실한 결의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책임을 놓아버리는 일이 없이 살아가는 것!

 

다섯 번째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찰하고, 생멸하는 것들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서 관찰하는 지혜를 갖추는 것!

 

"이 다섯 가지를 하면 해탈에 이른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조금 어렵죠? 그래서 스님이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올바른 일을 믿는 것.

그 내용들을 딱 정리해 보면 올바른 일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다는 것, 믿는 대상이 뭘까?

붓다·담마·상가에 대해서 믿는 것이겠지!

붓다·담마·상가에 대해서만 믿는 것이 아니고,

업의 법칙! 좋은 일을 했으면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일을 했으면 나쁜 결과를 낳고 하는 것들을 믿는 것.

또 더 나아가서 윤회하는 것에 대해서 믿는 것.

그리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믿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예류과가 존재할 수 있고, 일래과가 존재할 수 있고, 불환과가 존재할 수 있고, 아라한 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믿는 것.

또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

이런 순서로 믿는 것들은 진행이 돼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 지나쳐버리면 맹신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믿어서는 안됩니다. '아, 내가 이걸 실제로 해보니까 진짜 맞네' 하고 알게 됐을 때 그 믿음은 중심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경에서도 믿음과 지혜는 발란스를 맞춰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에-히빳시꼬-(Ehipassiko), 오-빠나이꼬-(opanayiko)"

부처님께서 와서 보라고,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내가 그걸 직접 확인하는 것.

수행에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다가 보니까 아, 진짜 여기에는 어떤 곳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됐을 때.

또는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됐을 때.

일어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사라진다.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은 같지 않다.

또는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들은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거고, 그 대상은 물질적인 이 호흡이다.

호흡과 마음은 동일하지 않다.

몸과 마음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지혜들.

 

이런 지혜들이 하나씩 하나씩 생기면 생길수록 그마만큼 믿는 것에 대한 것도 강도가 더 강해져버립니다. 분명하게 믿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믿음을 가지게 될 거 같으면, 무조건 스님이 삼보에 대해서 믿음을 가져라 그런다 해가지고 믿음이 생겨나나? 안 생겨납니다.

'아, 이 좋은 법을 설하신 부처님 참 위대한 분이구나' 하는 마음이 딱 들었을 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에 대한 믿음들이 생겨납니다.

그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승들에 대한 믿음들이 생겨납니다.

 

부처님이 신이라서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것은 아니잖아. 똑같은 인간이면서 아프기도 하고 설사를 하기도 하고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그 부처님은 무슨 신통력이 있다 해서 그걸 믿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진짜 해야 될 일들을 한 분이기 때문에 믿는 겁니다. 그래서 아, 내가 저 분 따라 가야되겠다 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거는 법을 이해하고 법에 대한 지혜가 생기면 생길수록 믿음들은 더 강해집니다.

원인·결과에 대한 것도, 그리고 윤회하는 것에 대한 것도, 그리고 이 세상에 성인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것들도, 자기가 체험한 것에 따라서 그 믿음들은 강해집니다.

그것들이 생기도록 만들어라 하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수행해서 체험해가지고 알기 전에는 해탈에 이를 방법이 없다는 거라. 어떻게 해탈에 이를 거라?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리고 그런 지혜가 생가지 않는 한에서는 항상 헤매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믿는다는 것이 첫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 믿음은 올바른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과 올바르지 않는 일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지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구분할 줄 모르면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도 없는 거라.

지금 내가 법문을 듣는 일이다 할 거 같으면 앉아서 고요하게 호흡을 관찰해야 되는것이 아니고 법문 듣는 것에 마음을 집중해야 되는 거고, 그게 지금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듣지 않고 망상피우고 있으면 올바른 일을 하고 있지 못하는 거라.

지금 현재 내가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을 행하는 것.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발란스를 맞춰야 되지만, 그 믿음도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하고 또 아무리 삼매가 무르익었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일을 분명하게 알지 못할 거 같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스님이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처음 말한 '첫 번째, 올바른 일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적어도 그것만 할 줄 알면 해탈에 이르는 첫 단추는 끼운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문장은 길지만 정리를 해보면,

자신의 신체, 자신의 몸을 조심할 것.

믿음이 아무리 생기더라도 몸이 병들어놔 놓으면 공부를 못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중간에 수행들을 그만두는 이유가 몸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을 조심하지 않으면은 믿음은 확고해서 흔들리지 않을지 몰라도, 더 이상의 진척을 가져오기는 힘들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자신의 몸을 조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조심할 수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기후변화! 추위, 더위 그다음에 날파리, 기생충 이런 것들로부터 보호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추우면 덮어 입어야 되는 거고, 더우면 시원하게 만들어줘야 됩니다. 여러 가지 날파리들이 달려드는 곳이면 날파리가 달려들지 않는 조건들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을 보호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럴 줄 모르고 그냥 무작정 했다가는 몸을 다치게 됩니다.

 

삼매에 들었다가 삼매에서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있습니다.

몸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쓴 거라. 삼매에 드는 것만 신경 썼지. 추위가 2~3도만 차이가 나더라도 그 사람은 삼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거짓말 같죠? 실제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비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몸을 조심해서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계산해서 방어를 하고 삼매에 듭니다.

수행이 된 사람들도 자신의 몸을 조심해서 다루는 것이 힘드는데, 수행이 안 된 사람들은 조심해서 다루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그리하더라도 반드시 조심해서 다뤄야됩니다.

 

그렇게 조심해서 다루기 위해서, 부처님이 수행법을 "···"로써 설명을 한 거라.

앉아만 있지 말아라는 거라. 경행하고, 서서 수행하고, 누워서도 수행하고, 이게 발란스를 맞추지 않으면 몸을 망친다는 거라. 몸만 망치는 것이 아니고 노력의 힘들도 또 집중하는 힘들도 발란스를 맞추지 못한다는 거라. 앉아만 있으면 집중은 잘될지 몰라도 노력의 힘은 떨어지게 돼있는 것이고, 열심히 또 움직이면 노력하는 힘들은 생겨날지 몰라도 집중하는 힘들은 떨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발란스를 맞춰야 되는 거라.

 

대념처경을 설하면서 행주좌와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몸에 대해서 항상 조심해야 되고, 그래야만이 마땅하게 우리가 키워야 되는 힘들을 발란스가 맞게끔 키워줄 수가 있다는 거라.

삼매에 들고 싶다? 노력의 힘도 키워야만이 삼매에 들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를 그 일을 행하고 싶다?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그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자신의 신체를 위해서 조심해야 되는 세 번째, 먹는 것에 대해서 조심할 것.

기후에 대해서 조심해야 되고, 그다음에 행주좌와의 균형을 맞추어야 되고, 그리고 또 하나는 먹는 것!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러 가지 네 가지 요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조절할 줄 모를 것 같으면 몸은 망치게 돼있습니다.

적게 먹고 또 적당량을 알고 그리고 멈출 줄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 먹는 것들을 조절할 줄 모를 것 같으면 몸은 항상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명한 것이 두 번째가 자신의 신체, 자신의 몸을 조심할 줄 알아라는 겁니다.

 

올바른 일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고 나면, 반드시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조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구분할 줄 알고,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진짜 내가 많이 바뀌고 마음도 바뀌고 생활패턴들도 바뀌고, 다른 사람들 대하는 것들도 바뀌고, 그러면서 아, 내가 이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는 것이 좋다 하는 확신들이 자꾸 들면 들수록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자기 몸을 조심하라는 거라.

두 번째가 어그러져버리면 당연히 첫 번째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구절은 길지만 딱 한 구절로써 압축됩니다.

마음을 곧게 하라. 자신의 마음을 곧게 하라.

마음을 곧게 하라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할 거 같으면 '좀 더 솔직해라'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거짓 없이 그대로 드러낼 줄 알아라'는 거라.

 

옛날에 태국에 있을 때 그런 적이 있어요. 그때도 맨 처음에 외국인들 수행지도를 한 적이 있어요. 이 사람은 오면 조부는 거라. 수행만 했다 그러면 1분도 안 가서 조불어. 거 왜 그런가 하고 물어봤더니 한참 얘기하다 보니까 원인이 찾아지는 거라.

미국에 있을 때 몸이 피곤하고 할 거 같으면 수행을 한다는 거야. 그런데 수행하는 목적이 틀려. 무슨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무슨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겠다 이것도 없고, 쉬기 위해서. 피곤하고 하니까 몸을 쉬기 위해서 앉아서 쉬는 목적으로 수행을 하는 거라. 호흡을 관찰하니까 당연히 고요해지니까, 힘이 떨어지니까 졸음에 폭 떨어지는 거라.

그게 습관이 돼있다보니까 수행만 시작하면 조는 거라. 물론 졸 때는 생각도 안 일어나고 졸고 나면 몸도 개운해지고 하니까 좋아. 안 졸고 망상피우는 것보다도 훨씬 낫지. 그런데 목적이 이미 바르지를 않으니까 앉아만 있으면 조불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수행하는 이유가 뭐냐?

말은 그럽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솔직히 얘기해라. 그냥 쉴라고 수행하는 거 아니냐? 죽어도 아니래.

그런데 그 사람은 결국 아무런 성취도 못 얻고 자기나라로 돌아가더라고. 그걸 감추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스님한테 "스님, 내가 이때까지 몸을 쉴려고 수행을 했습니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졸음 오는 길에 대해서 설명을 차분차분하게 해가지고 졸음이 오는 길을 탁 알아차려가지고 그걸 깨부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졸음이 안 온다고. 그러면 당연히 수행하기도 수월해지고 또 졸음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할 건데, 아예 그런 생각조차도 못하게 되는 거라. 시도조차도 못하게 되는 거라.

 

수행 문답을 할 때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되듯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자신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마음을 곧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이 형성되고 신체가 건강하다 하더라도, 마음이 바르지 못할 거 같으면 수행은 더 이상 진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 대상은 뭐로 알아차리는가?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 수행대상은 어떻게 알아차려야 되는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걸 곡해해서도 안 되고 그걸 더 알려고 용쓸 필요도 없고, 싫은 대상이라고 밀쳐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있는 그대로 봐야 됩니다. 그래야 그 대상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이 올바르게 딱 서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걸 못해나간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뭔지, 또 자신이 잘 못하는 것이 뭔지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하는데 진척이 없다? 내가 뭘 갖추지 못해가지고 이렇게 진척이 없나 하는 걸 분명하게 봐야 됩니다.

마음이 정직하게 올곧게 서있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것은 잘 돼있는데 내가 뭔가 닦아야 될 것들을 아직 닦지 못해서 그러는 건지,

결정심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계행공덕이 부족한 건지,

뭔가가 부족하니까 진척이 있지를 않는 거 아니라.

그럼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거라. 내가 평소에 뭘 잘못하고 있는가?

남에게 인색한 건지,

아니면 남들에 대해서 비교할려고 하는 것들이 많은 건지,

그럼 그걸 없애야 되는 거라.

 

마음의 청정함을 유지하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은 있는 그대로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굉장히 많은 문제들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문제에 부딪쳐서 나아가지 못할 때는 딱 거기서 중단을 하고,

자신의 지금 마음의 상태 '내가 지금 마음이 고요한가' '내 마음이 부드러운가, 가벼운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라는 거라.

그거는 어떤 대상도 붙잡고 밀치고 조작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마음이 훈련되고 준비됐을 때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게 인제 세 번째입니다. 마음이 올곧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그 내용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하면

올바른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노력!

특히 수행자들은 올바른 노력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수행이 잘돼나가고 있다, 올바른 노력을 아는 사람은 지금 급한 일이 아닐 거 같으면 내버려두고 수행 계속해버립니다.

지금 수행 잘 못하고 있다, 그럼 수행하고 있는 것들을 중단하고 잘못된 것들을 먼저 찾아서 고치고 나서 다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어리석게 그냥 끙끙대고 그걸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노력의 네 가지는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선한 것들은 더욱 더 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선한 것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일으킬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악한 것들은 일어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되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악한 것들은 아예 드러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는 항상 선한 쪽으로 움직이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악한 쪽으로 움직이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평상시 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바른 노력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올바른 노력은 줄기차게 노력할 줄 아는 것들입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지면 수행은 더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잘되고 있는데 나태와 게으름에 빠지지 않을 거 같으면, 다른 일들은 다 제쳐두고 그냥 그 수행을 하게 됩니다.

좋은 일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왜 중단을 해? 남들이 꼬신다고? 빨리 나가자고 한다고? 아니면 무슨 해야 될 일이 생겼다고?

지금 당장 안 하고, 지금 당장 나가야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지금 잘 듣고 있으면 수행을 계속하면 됩니다.

 

수행을 하다가 막혀버릴 것 같으면 포지션을 바꾸든지, 아니면 수행대상을 바꾸든지, 바꾸어야 되는 것이지, 지금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 망상이 일어나고 졸음에 떨어지고 또 안된다고 성질만 부려쌌고 하는 것들, 악한 것들을 왜 계속 일으키고 있느냐는 거라.

이게 네 번째 올바른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올바른 지혜를 얻도록 하라.

네 번째까지가 여러분들이 줄기차게 해야 될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1번부터 4번까지 줄기차게 하고, 다시 또 1번으로 돌아가지고, 어떤 경우에는 건너뛰고 세 번째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이게 사이클이 돌듯이 또는 서로 섞이듯이 해가지고,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줘야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기 자신은 모든 것들을 판단할 때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써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

그리고 모든 걸 판단하는 것이 삼법인에 맞게끔 판단들을 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날 여지가 없어져버립니다. 설혹 다른 사람들이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올바른 지혜라는 거라.

 

세상의 이치를 따르다 보면, 세상의 옳고 그름에 따르다 보면, 세상법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세상법 하고는 다릅니다.

그속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거고, 그속에서 도와 과의 길로 확 들어갈 수 있게끔 돼야 됩니다. 그럴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지혜를 얻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게 "해탈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도와 과에 이르고 해탈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이런 것들은 반드시 갖춰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지금 부족한 것들은 메꾸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