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망갈라 숫따(길상경) 1. 제목과 배경설명 (20140715)

담마마-마까 2021. 7. 31. 09:00

https://youtu.be/TuJTIW-YxgI

* 망갈라 숫따(Maṅgala Sutta, 길상경) 1. 제목과 배경설명 (20140715)

 

오늘은 경전강독 한다고 저번 주에 공포를 했으니까, 경전을 설명도 해야 되고 또 여러분들이 읽고 외우기도 해야 될 겁니다. 그럼 나는 만날 이거 작성한다고 독수리 타법으로 밤새도록 해가지고 작성만 하고 여러분들은 감 따먹듯이 가만히 그냥 입 벌리고 있을거야? 못 외우면 다음 시간에는 퇴출시켜버립니다. (ㅎㅎㅎ) 됐죠?

(수행자 대답 : 이건 한달은 더 해야 될 것 같은데요.) (ㅎㅎㅎ)

설마 퇴출시키기야 하겠어? 그리해도 외우는 것이 전제조건이 돼야 됩니다.

 

경을 외우는 것하고 경을 이해하는 것하고는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외워보면 스님이 말한 걸 이해하게 될 겁니다. 특히 급작스런 일이 생길 때, 또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여러분들은 맨 먼저 "엄마야"하는 소리가 먼저 나오잖아. 그런데 경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경구절이 먼저 탁 떠오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굉장히 고요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판단으로 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들이 키워집니다. 그거는 경을 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강제하지는 않겠지만 외웠다고 전제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도록 할게요. 내가 떠먹여 줄 수는 없잖아. 갖다놔 줄 수는 있어도.

 

오늘 첫 시간엔 「망갈라 숫따」라고 하는 경입니다.

앞에 부분은 빨리어 경전, 그다음에 그 뒤에 부분은 그 빨리어 경전에 대한 해석, 또 그 뒤에는 각각의 구절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단계로써 넘어가지게 될 겁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망갈라경은 경 이름이 망갈라경이 있고, 또 뭐가 있죠? 그러니까 「망갈라 숫따」가 있고, 또 빨리어 경전에서는 「마하 망갈라 숫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찾아보면 「망갈라 자따까」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그 세 가지로 분류가 되어있고, 비슷한 게 「자야 망갈라 숫따」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자야 망갈라 숫따는 이 망갈라 경하고 완전히 다릅니다 이.

어쨌든 보통은 「망갈라 숫따」라고 그렇게 이름을 부릅니다.

 

자따까(jātaka) 얘기부터 먼저 할게요.

부처님이 과거전생에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과거전생에 수행했던 얘기들을 적어놓은 게 「자따까」라고 경입니다. 우리말로는 「본생경」이라고 그렇게 나오는 경입니다.

보통 부처님 일대기를 설명할 때 자따까 중에서 일부들을 뽑아가지고 열 가지 바라밀부터 먼저 설명을 하고, 그다음 부처님 출생부터 설명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그러니까 이생에서부터 태어난 것부터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생에 태어나기 전부터 무수한 과거부터 바라밀을 쌓아온 것들 그것들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고, 이생에 대한 얘기를 하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일대기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부처님 일대기 하면 부처님 과거생에 얘기들은 쏙 빼먹어버리고 부처님 탄생부터 시작이 되는 걸 좋아라 합니다. 꼭 수행할 때 계율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 수행만 수행방법만 부지런히 알려주십시오 하는 얘기와 꼭 마찬가집니다. 계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수행은 무르익지 않는데.

부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면 부처님 과거생부터 먼저 알아야되는 것이 정확한 것인데 그걸 자꾸 빼먹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를 닮아갈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내가 도저히 부처될 희망이 없다 싶은 사람은 뭐 해야 되겠어요? 바라밀 쌓는 일부터 해야 되는 거라. 바라밀 쌓는 건 아예 안 하고 부처되는 것만 자꾸 한다? 그것도 될 가능성이 있지만 거의 희박하다고 봐야 됩니다.

그게 수행에서도 나중에 뒷받침이 되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어쨌든 그중에서 「망갈라 자따까」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수행자로 있을 때 이 보살이 사람들이 죽어서 버려둔 옷,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사람의 옷을 가지고 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바라문이 깜짝 놀랍니다. 불길하다는 거라.

아마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그사람이 평소에 입었던 거 아니면 죽을 때 관에 들어갈 때 입는 옷, 화장 안 하고 매장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가져올 사람 있어요? 가져와서 지가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거라. 지금도 이 바라문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똑같은 그런 생각들을 가질 거라. ‘이거 기분 나쁘다, 불길하다’ 그 무슨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한테 달라붙을 것처럼 그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지금 테라와다 불교권의 스님들은 돌아가신 스님이 입던 옷을 자기가 입으면 그마만큼 영광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똑같은 죽은 사람 옷인데 왜 그렇게 차이가 날까? 뭐 스님들이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가지고 영혼이 달라붙지 않는 그런 능력들이 있는 거라? 그건 아니죠!

생각의 차이입니다. 생각의 차이! 죽은 사람이 입던 옷을 가져와서 요긴하게 내가 쓸 수 있을 거 같으면 쓰면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아, 이거 뭐 큰일 날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는 거라.

나도 가끔씩 그런 생각들을 해요. 차라리 돌아가신 분이 입던 옷을 태우고 그렇게 하지 말고 깨끗하게 빨아가지고 진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가족들이 입으면 더 좋고. 그것이 가사를 만들 수 있는 천일 거 같으면 가사를 만들어서 스님한테 공양 올리면 더 좋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 보살이 그 죽은 사람이 입던 옷을 취해가지고 입는 모습을 보고 이 바라문이 그렇게 얘길 합니다. “이거 안된다. 큰일난다. 당신에게 나쁜 징조가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영혼이라고 그러나? 영혼이라는 게 달라붙어가지고 괴롭히면 어떡할 것이냐?

 

그때 부처님이 처음 얘기한 게 '망갈라(maṅgala)'라는 얘기를 합니다.

'조짐'이라는 것은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거라. 그러면서 이 여덟 가지를 잘할 것 같으면 적어도 너에게는 진짜 좋은 조짐들이 보일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죽은 사람의 옷을 취해서 나쁜 조짐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파멸에 이르는 그런 길들을 행할 것 같으면 나쁜 조짐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내가 길상에 이르는 길을 행할 것 같으면 나에게 길상의 조짐들이 나타나는 것이지 그거 죽은 사람의 옷을 가져왔다고 해가지고 무슨 나쁜 조짐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게 여덟 가지가 뭐냐 하면,

첫 번째로, 자비심을 한량없이 한번 펼쳐봐라.

자비심을 한량없이 펼치는 사람한테 나쁜 일들이 그렇게 닥칠 일이 있을까?

누가 나를 때린다고 하더라도 “아, 나는 너를 사랑해” 두드려맞고도 “아,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해” 맞는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오히려 맞아서 또 내가 그 사람을 때려가지고 더 맞는 일들이 생기는 것은 방어해줄 수가 있다는 거라. 나쁜 일들이 더 일어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들은 오히려 옷 하나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자애의 마음을 한량없이 가지는 것, 그것이 너에게 좋은 조짐을 가져오게 하는 것, 망갈라를 가져오게 하는 것, 망갈라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한번 자애의 마음을 한량없이 한번 가져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여러분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에게는 항상 좋은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 예로 든 게 겸손해라.

참 요즘 사람들이 안 되는 게, 특히 일반 재가자들보다 스님들이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겸손할 줄 모르는 것. 이렇게 보면 '마나(māna)'가 되게 많습니다. 그냥 하늘을 치솟아. 그러니까 일반 신도들 보기를 아주 뭐 묻은 뭐 보다도 못하게 보아버리는 거라. 아주 아랫것들이라고 아래로 보아버리는 거라.

일반 재가자들도 마찬가집니다. '마나(māna)'가 많으면 많을수록 성냄도 많고 탐욕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바라는 것들도 많고 명예를 바라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거 뭐 좋다고 그러는지 몰라. 욕심부리는 거 안된다. 성내는 거 안된다. 이익 바라고 명예바라는데 거기에 물들면 안된다. 만날 얘기 들으면서도 그거 그냥 가지고 있는 거라. 그 원인이 바로 이 '마나(māna)'라고 하는 것입니다.

겸손할 줄 모른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겸손해보라는 거라. 겸손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적어도 아, 참 좋은 사람이다 하고 그럽니다. 그러면은 집에 떡이 하나 생겼으면 그사람 갖다줄라고 하지 뭐 내 최고다 하는 사람한테 떡 갖다줄려고 하겠어? 그러지 않는다는 거라.

 

세 번째, 같이 생활하고 또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과 항상 화합되게 사는 사람들,

모나가지고 항상 문제를 만드는 트러블메이커가 아니고 항상 화합하고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사람들에 대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차분차분하게 진짜 자애스럽게 사람들을 잘 이끌어줄 수 있게끔. 차라리 이 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화합을 해치는 것들은 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거라.

실제 그렇습니다. 크게 그 일 안 해도 되는데 어떨 경우에는 그 일이 목적이 되어서 달리다 보면 자꾸 다툼이 있게 됩니다. 그 뭐라고 그게. 꼭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지금 해야 될 필요가 없는데도 그런다는 거라. 다툼이 있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중단을 딱 해버리라는 거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라. 화합을 해쳐가면서 뭔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화합되게끔 하라 하는 것이 세 번째로 부처님의 과거 전생의 보살이 얘기했던 겁니다.

 

네 번째, 스스로 행복하도록 할 것.

대부분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들을 합니다. 아,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하면 되는데, 그거는 어렵고 하기 귀찮으니까 안 할려고 그러는 거라. 수행 해가지고 행복을 가져온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 해야 되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간 빼먹는 거라. 또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일일 것 같으면 행해야만이 되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을 행하도록 하라.

 

그다음에, 존경해야 될 대상들을 존경하라.

여러분들에게는 존경해야 될 대상이 분명히 많습니다. 모든 대상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내가 저사람 보다도 모자라고 아직 내가 더 공부해나가야 될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질 것 같으면 존경해야 될 대상들은 굉장히 많아집니다.

 

그다음에, 업에 대한 올바른 이해.

내가 잘못한 것은 그 결과를 반드시 받게 되고 잘한 것은 반드시 그 결과를 받는다는 것.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고 내자신이 그 책임자다 하는 것. 업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거는 누누히 설명을 안해도 될겁니다. 그게 일곱 번째로 얘기한 것이고,

 

여덟 번째가, 정신적인 평화.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어떤 대상에도 흔들림이 없이 평화롭게 만들어가라.

 

이 여덟 가지를 얘기합니다. 그러면은 그 사람에게는 길상이 올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나쁜 징조가 일어날 것이다. 죽은 사람 옷 하나 가져온다고 해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 여덟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 이 여덟 가지를 자꾸 갈고 닦으면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하는 거라.

그때 얘기한 게 이 '망갈라(maṅgala)' 라고 하는 단어를 얘기합니다.

 

자! 여기서 보면 망갈라(maṅgala)의 의미가 대충 드러나집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이 망갈라를 '축복' '행복' 이렇게 번역합니다. 망갈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죠? '축복을 가져올 수 있는 조건들' '행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형성돼야 될 것들' 이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해봅시다. 우리 목요일날 탁발을 하면 스님이 게송을 해줍니다. 축복게송들을 해주죠.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게송으로 인해서 축복받은 거라? 그건 아니죠! 뭐를 가지고 축복받은 겁니까? 내가 좋은 행위 공양물을 올리고 하는 좋은 행위들, 그때 일으키는 선한 마음들 이런 조건들을 갖추었기 때문에 나는 스님이 축복게송을 해주든 안 해주든 나에게는 축복이 있게끔 되는 거라. 축복을 가져올 조건들을 가져오지 않고 축복게송 하나 받았다고 해가지고 축복이 온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망갈라라는 자체를 축복이나 행복으로 표현하면 안된다는 거라. 오히려 가장 근접한 용어가 '길상(吉祥)'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어느 나라라 하더라도 자기나라 말이 있는데도 자기나라 말로 표현을 안합니다. 그냥 망갈라 입니다. 망갈라 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그걸 우리말로 표현하면 '축복이 오기 위한 조건들' '축복에 이르렀을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건들' 그러니까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는 여덟 가지 조건들, 그 상태에 도달하고 나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건들, 이런 것들까지 통칭해서 다 얘기하는 건데 그걸 어떻게 표현하노?

 

그러니까 힘들기 때문에 그 나라들에서는 그냥 망갈라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스님도 되도록이면 그 용어를 쓰고 싶은데, 저번에 우리 상가스님들 회의를 통해서 이 용어를 결정할 때 아,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망갈라라고 그대로 쓰는 것보다는 한글로 하는 것이 낫겠다 해가지고 그중에 그래도 나은 것이 '길상'이라는 단어입니다. '길상'은 '상서로운 조짐이 오는 징조'라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 조건들을 얘기하는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길상이라는 용어를 써서 이름을 길상경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과거 전생에서도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이 망갈라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지금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는 남들이 “부처님 망갈라가 뭡니까” 하고 물어보는데 그거 모를 수가 있겠어? 당연히 압니다. 그런데 다들 부처님 같지가 않으니까 사람들은 망갈라의 의미들을 잘 모릅니다.

지금도 마찬가질지도 몰라. 자꾸 이런 비유를 들면 남을 비방하는 것처럼 들려서 되도록이면 자제할려고 그러는데, 스님들이 가끔 그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거 하면 뭐가 된다” 어떨 때는 그게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면 괜찮은데 외부적인 것들을 가지고 그걸 이루어진다고 할 경우엔 어떨 때는 스님이 봐도 참 황당할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백중이 다가옵니다. 백중천도제 설판제작 100만원 내면 조상들이 천도 된다. 천도 됩니까? 또는 다른 어떤 것들, 그러니까 이 망갈라라고 하는 것은 이익을 쫓는 것이 아닌데도 어떤 이익되는 일들을 행하면은 망갈라가 생긴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사실은 굉장히 안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다 멍석 펴놓고 “와서 좋은 일 생기도록 만들어줄테니까 내한테 와서 10원씩 내놔라” 하고 끝내버리지 뭐하러 그렇게 어렵게 쫓아다니면서 법을 설하고 45년간이나 그러고 다녔었겠어? 그런 일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한테 물어봅니다. 망갈라가 뭡니까? 망갈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망갈라가 생기기 위한 것이 어떤 것들입니까? 그러면 어떤 걸 망갈라라고 합니까? 하고 물어봤다고 치자.

어떤 사람들은 선원에 올 때 장의차 봤으면 오늘은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에 나올려고 하는데 새가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니까 아, 나에게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실제 그렇게 됩니까? 뭐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져서 좋은 일들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 소리가 아니면 그 모습들이 나에게 길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딱 그러고 있는 거라.

 

망갈라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누구는 보는 것 좋은 것 좋은 모습들을 보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나에게 길상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듣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감각 좋은 느낌들 좋은 맛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망갈라가 생긴다.

딱 이것으로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육근을 통해가지고 생기는 것들로 인해서 망갈라가 생긴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도 각자 다르거든. 어떤 사람은 보는 것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듣는 것으로 인한 것으로, 각자 다르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라.

 

이 소리를 천신들이 듣습니다. 천신들끼리 또 이것에 대해서 토론을 해봅니다.

어떤 게 과연 망갈라일까? 왜? 왜 그럴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갈구할까?

누구든지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에! 그런거라. 행복해지려면 행복해지는 조건들을 만들든지 행복해지는 길로 걸어가면 되는 건데, 감 따먹듯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행복이 뚝딱 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러니까 무엇으로 인해서 항상 행복이 툭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거라. 좋은 거를 보면 행복이 툭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라.

천신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천신이라고 뭐 특별하게 용빼는 재주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천신들한테서 답이 안 나오니까 천신들이 자기들의 왕인 제석천왕에게 가서 물어보니까 제석천왕도 알 수 있나? 그래서 제석천왕이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답해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니고 저기 인간 세상에 있는 부처님밖에 없다. 그러니까 부처님한테 가서 여쭈어봐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이 경을 설하게 된 시발점이 됩니다.

 

경의 첫머리에는 [Evam me sutaṁ. Ekaṁ samayaṁ 에-왐메- 숫땅 에-깡 사마양...] 하면서" 에-왕메- 숫땅"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걸 한문으로 '여시아문'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이때 '나'는 '아난다'를 얘기하죠!

모든 경들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왜 이렇게 시작을 하게 될까?

그냥 부처님이 뭐라고 뭐라고 설했다 하고 하면 될 건데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부처님이 어느 때 어디에서 이와 같이 설했다.]

왜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될까? 그게 결집을 통해서 정형화되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결집할 필요성을 느끼고 깟사빠 존자가 부처님 입멸 후에 바로 그해에 제1차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때 경을 송출할 사람은 아난다, 율을 송출할 사람은 우빨리로 정해가지고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에게 물어봅니다. 언제, 어느 때, 어디에서,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했는가를 얘기해라.

만약에 망갈라 경이면 망갈라 경은 언제 부처님이 설했노?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아난다 존자는 뭐라고 답해야 돼요?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어느 때 어디에서 이 망갈라경을 설했습니다. 그 망갈라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고 얘기하셨던 거고.

 

그러면 그거는 구송으로 암송으로 이렇게 전해지는 거니까 '에왐메 숫땅'이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들은 글로써 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때 스리랑카의 알루위하라에서 이 글로써 써지게 됩니다. 그럼 그때도 왜 그냥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하고 기록을 하게 됐느냐는 거라.

글로써 써지게 될 때 주의해야 될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로 쓰다 보면 자기의 생각들이나 자기의 견해들을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교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되는 책임을 가지기 때문에 글로써 써진다고 하더라도 구송했던 방식을 그대로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4차결집 때 글로써 패엽경이라고 하는데 쓰게 됐을 때도 꼭 마찬가지로 암송의 방식으로 그대로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자기나라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빨리어로.

그게 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에-왐메- 숫땅'이라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자! 그러면서 부처님이 망갈라는 이런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굉장히 점진적으로 설명을 하게 됩니다. 아주 쉬운 것부터. 나쁜 놈 사귀지마. 좋은 말 해. 뭐 이런 식으로 하면서 가족들한테 잘해야 된다. 그게 망갈라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도 망갈라다. 이런 식으로 점진적으로 설명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 어디 어떤 것을 보더라도 감각적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뭐라고 나오느냐면 '삽베 까-마 아닛짜' 라고 이렇게 합니다. '모든 감각적인 기쁨들은 참 무상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망갈라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맛있는 거 먹고 아, 맛있다. 아, 난 참 행복하다. 그게 망갈라가 아니라는 얘기라.

그것만 조심하면 망갈라는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대신에 이 망갈라경을 설하고 나서 그 뒤에 부처님이 연이어서 설한 것이 있습니다. 뭘까? 길상에 이르는 길이 있는 반면에 파멸에 이르는 길도 있다. 너 이거 하면 반드시 파멸에 이르른다.

그래서 파멸에 이르는 길도 스물다섯 가지로 설명을 해놓습니다. 길상에 이르는 길은 보통 서른여덟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길상에 이르는 길에서 쭉 설명을 하고, 파멸에 이르는 길 스물다섯 가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다음 시간까지 조금 외우고 올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다 외우라고는 안 할게. 다 외우라고는 안 할테니까 다음 시간에 할 것 5번줄에 두 번째 아세와나 돼있는 거 있죠?

 

2. asevanā ca bālānaṁ, paṇditānañ ca sevanā,

아세-와나- 짜 발-라-낭, 빤디따-난 짜 세-와나-,

pūjā ca pūjanīyānaṁ, etaṁ maṅgalamuttamaṁ.

뿌-자- 짜 뿌-자니-야-낭, 에-땅 망갈라뭇따망.

 

하는 거 두 번째. 그다음에 빠띠루-빠 부터 해서 세 번째, 실제로 여러분들이 외워야 되는 것은 2번부터 12번까지 이거는 반드시 외워야 되는 것들이라.

몇개 안 되잖아? (수행자 대답 :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다고? 그러면 다음 시간에 2번 3번 4번까지는 할 거니까 2번 3번 4번은 외워와. 그거는 가능하겠지? (수행자 : 예)

그래서 2번에 대한 해석은 뒤에 보면 또 2번에 보면 해석이 나와있습니다. 그 줄 그대로 해석해놓은 거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직역입니다 이. 직역된 것이니까 그대로 그냥 이해를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외워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부터 이 2번 항목 '아세와나'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리석은 자와 어울리지 마라 하면 어떤 놈들이 어리석은 놈들이야? 자기가 어리석은 놈일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일 수도 있고, 해서 자기가 반드시 그 기준을 딱 정해서 자기도 어리석지 않아야 될 뿐아니라 어리석은 자들과는 되도록이면 어울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쉽게 예를 들면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놓는 놈들은 안 어울리는 게 좋아. 구렁텅이는 어떤 게 구렁텅이입니까? '삽베 까-마 아닛짜' 감각적인 것에 자꾸 빠지도록 만드는 것. 나를 도박하게 만들고 나를 술 먹게 하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에 해당됩니다. 그 이외에도 또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설명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맨 처음에 앞에 그거 한번 읽어주십시오. 빨리어로.

스님 : 예. 한번 읽어들 보십시오.

수행자 : 저희들이 읽을려니까, 빨리어로 한번 읽어주시면 억양이...

스님 : 그거 지금 읽어줘도 여러분들 다 까먹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내 같이 운율을 줘가지고 하려고 할 것 같으면 못 외웁니다. 그냥 '(천천히 글을 읽듯이) 아 세 와 나 짜 발 라 낭' 이런 식으로 외우도록 하십시오. 그걸 전부 다 외웠으면 평성으로 길고 짧은 걸 생각하지 말고 쭉 다 외웠을 때 그때야만이 스님이 운율을 주면 운율을 따라 할 수가 있습니다.

걸음마도 안 하면서 운율 배울려고 하면 되겠어요?

 

수행자 : 운율로 외우면 훨씬 수월할 것 같아서요.

스님 : 안 그렇습니다. 다 까먹습니다. 그러니까 외우는 방법은 쭈욱 평성으로 그걸 몇백번 몇천번 반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냥 '아세' 할 것 같으면 입에서 그냥 '아 세 와 나 짜 발 라 낭' 이런 식으로 쭉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게 외워졌을 때 '아세-와나- 짜 발-라-낭~~' 이렇게 운율이 들어가면 그걸 따라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그냥 '아 세 와 나 짜 발 라 낭' 이런 식으로 다 외우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죠?

(수행자 : 외울려고 그러는 게 아니구요,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요)

됐습니다.

자!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