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망갈라 숫따(길상경) 3. 빤디따와 발라 (20140805)

담마마-마까 2021. 8. 3. 09:00

https://youtu.be/WFMDid87cFg

* 망갈라 숫따(Maṅgala Sutta, 길상경) 3. 빤디따와 발라 (20140805)

 

「망갈라 숫따」의 세 번째, '빤디따 세와나(Paṇḍitasevana)' 부분입니다.

스님이 태국가서 수행을 배운 게 아짠 아수바라 해가지고 마하시 스님의 직계제자였습니다. 거기서 기본적인 수행을 배우고 그다음에 몇년 있다가 버마 가서 수행을 배운 스님 이름이 뭐냐 하면 우 빤디따(U Paṇḍita Sayadaw) 스님이었습니다. 우 빤디따 스님 알아요? 몰라? 진용스님만 알아?

당대에 교학과 수행을 겸비한 선지식으로 아주 뛰어나신 스님입니다. 그 우 빤디따 스님한테서 수행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가르칠 때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이 위주가 되도록 그렇게 해서 조금 변형돼서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도 '빤디따(Paṇḍita)'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대부분 빤디따라고 하는 명칭을 붙일 때는 칭호로서 스님들에게 붙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경지를 얻어야 '빤디따'라는 명칭을 붙여줄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잘난 줄 압니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알고, 그런데 역으로 '아, 참 내가 못났다. 내가 아직 배울 것이 많다' 하고 하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자기가 모자란 줄 알면 빤디따 이름을 붙여줍니다. 쉽게 얘기하면.

 

경전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가 올바르고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기가 아직 배울 것들이 많고 닦아야 될 것이 많다 하고, 그리고 자기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하고 아는 사람은 그사람은 '빤디따'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사회하고는 반대죠? 사회에서는 자기가 최고다 자기가 올바르다 생각해야 되는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빤디따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다고 할 경우에는 적어도 완전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행위들은 선한 것들이 되도록 자꾸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아, 내가 참 잘못하는 것들이 많다' 하고 생각될 때 그것을 고칠려고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것을 바꿀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수행을 안 해본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수행이 최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는 자기가 이룬 수행의 과위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수행 잘하는 사람들은 그사람이 아라한이 됐든 수다원이 됐든 아니면 어느 정도 도와 과에 이르기 직전에 있는 사람이든 그런 사람들은 보면 "아이고,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합니다. "아직 닦아야 될 것들이 많습니다" 합니다. 눈에 보이거든. 자기가 닦아야 될 것이.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그 위에 것이 아, 내가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이 보이는 거라. 그래야만이 자기가 더욱더 갈고 닦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누가 네가 이거는 참 잘못하고 있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성질부터 바락 냅니다.

거기 구절에 보면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고 비판해주는 사람을 찾아내면 그러한 현명한, 명민한 사람들은 숨겨진 보물의 안내인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아, 내가 이것은 잘못했는 갑다 생각하고 그걸 자꾸 따르려고 해야 만이 자기가 빤디따가 될 수 있다는 거라.

설혹 그사람이 빤디따가 아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 잘잘못이 드러나집니다. 물론 거기에는 자기의 견해가 있을 수가 있지만, 설혹 견해가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 얘기를 들으면 자기는 거기에서 자기의 잘잘못을 구별해내야 됩니다. 아, 내가 더 공부해야 되는구나.

 

그래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빤디따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아, 내가 아직도 공부해야 될 것이 많다' 하는 생각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더 갖추어야 될 것이 많고 더 닦아야 될 것이 많다 하는 생각을 먼저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빤디따 웨다니요'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현명한 자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 먼저 '현명한 자'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냥 쉽게 얘기할게요. '발라(Bālā)' 그러면 나쁜놈, '빤디따(Paṇḍita)' 그러면 좋은놈 이렇게 그냥 편하게 부르도록 할게요.

여러분 주위에 친구가 있다, 그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해낼 방법이 있습니까? 저번에 대충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좋고 싫음에 따라서 그사람이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건 자기의 기호도에 따라서 선호도에 따라서 나한테 잘해줄 거 같으면 좋은 사람이라 할 수는 있는데, 나한테 잘해준다 해가지고 그사람이 꼭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거라. 내 콩고물을 떼가려고 잘해주는 건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나한테 만날 나쁜 소리 꾸지람만 한다고 해서 그사람이 꼭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라. 진짜 염려가 되어서 저러지 말기를 바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라.

그래서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렇지만은 내 주위에 어떠한 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게끔 돼있기 때문에, 그것은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 방향이 많이 달라진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물론 좋은 환경조건이 되면 더 좋겠지만, 설혹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친구들이 많을 거 같으면 그래도 여러분들은 갑작스럽게 오는 괴로움들은 덜 당한다는 거라. 그걸 항상 여러분들은 명심을 해야 됩니다.

저사람이 내보다 계행을 지키는 것이나 수행하는 것이나 아니면 판단하는 것이 나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인지, 그렇지 않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잘해주고 또 어울리려고 하는 것인지 그걸 잘 판단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저사람이 생활하는 것이 반듯하고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수행하려 그러고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가까이 해야 되는 사람들이라는 거라.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말은 번지르르 하는데 그사람 행동거지를 보면 영 개차반이라 할 것 같으면 어울리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여기도 그럴 거라. 친구들이 있는데 수행하러 가자 그러면 아, 오늘 내가 집안일이 있는데, 안 갈라고 하는 거라. 가르침 듣기 싫어하고 수행하기 싫어하는 거라. 또 법회 끝나고 나면 점심 먹고 나면 수행있는데 수행하러 안가고 바쁜일 있어 쫓아 도망갈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도 같이 가야 되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는 거라.

 

적어도 그 시간들을 쪼개서 그러면 차라리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야 되는 시간일 것 같으면 다른 시간을 수행하는 시간을 만들어라 거라. 밥 먹는 시간을 수행하는 시간으로 만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법문 듣는 시간을 수행하는 시간으로 만들든지, 그래서 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가야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보니까 아, 진짜 수행하는 사람 같다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런데 그런 친구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자기 책임입니다.

자기가 옆에 친구를 그런 사람을 둬놓고 남 탓할 게 뭐 있어? 그렇잖아! 자기가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 될려고 노력할 거 같으면 현명한 사람 옆에 가 있든지 현명한 사람들이 내 옆에 오게 돼있는 거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반대가 돼버리는 거라. 그걸 친구 탓으로 하고 남 탓으로 자꾸 돌리는 것은 그건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는 거라.

아무리 남이 나에게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화를 내면 내가 화를 낸 것은 내 탓이라.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머리를 잡고 넘어졌다. 머리를 잡은 이거는 뭐 때문에 머리를 잡은 거라? 내가 화낸 것 때문에 머리를 잡은 거라. 내 탓이지 그 사람이 나를 꾸지럼 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자꾸 내 머리 잡고 혈압 올라 쓰러진 것을 저 탓이라고 자꾸 그러는 거라. 그럼 그 탓일 거 같으면 누가 화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그렇게 자기도 화를 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고요하게 유지하고 있거든. 화를 안 내고. 그러니까 머리 잡을 일도 없는 거라.

여러분이 현명하다고 할 것 같으면 아, 이것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도록 만들고, 내가 선한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진짜 화를 낸 상대방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나쁜 마음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스스로 보호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물론 자기가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주변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더운 날 땡볕에 걸어다닌다. 자기가 아무리 아이스팩을 하고 준비를 하고 뭘 어쩌고 해가지고 시원하게끔 우산도 쓰고 그렇게 하더라도 그 더위조차 어쩌지는 못합니다. 더위를 내가 물러가게 할 수도 없는 거고, 내가 그 길을 걸어가야 되는데 그 뙤약볕에 그 길을 내가 마음대로 변경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영향을 나는 받게끔 돼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지만 걸어가더라도 몸은 설혹 더워진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고요하게 시원하게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왼발 오른발 하고 알아차리면서 걸어가면. 그럼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그 길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설혹 나쁜 친구가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친구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것 같으면 이 더위가 싫어! 저 친구가 싫어! 나에게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영향을 아예 내가 다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을 내가 어쩌지도 못하고, 그 길 자체를 내가 변경할 수도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모든 것은 자기 탓이지만 그래도 그 영향을 받는 것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마음은 시원할지 몰라도 몸은 더워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럼 몸까지 시원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라.

그 환경조건을 그런 조건들을 만들지 말아야 되는 거라. 땡볕에 그렇게 걸어가고 우산을 쓰든 뭘 하든 걸어갈 것이 아니고, 좀 시원할 때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수단을 이용해서 그 길을 가든지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몸이 더워지는 일은 없다는 거라.

 

모든 것은 자기 탓이지만 주변의 영향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거라. 주위에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있으면 반드시 그 영향은 여러분이 받게 된다는 거라. 그걸 또한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조절한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여러분들에게는 선한 사람들 좋은 도반들이 옆에 있도록 해나가야 됩니다.

 

가장 유명한 글귀가 있습니다. 아난다가 선한 선우들이 옆에 있는 것이 수행의 반이다 하니까, 부처님이 "아니다 아난다야!" "아니다 아난다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선한 사람이 있으면 수행의 전부다 하는 거라. 그마만큼 조건들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거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주위 환경조건은 자기 자신이 힘써 노력할 거 같으면 좋은 조건들은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그런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은 그 길을 따라가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를 따라가기에는 참으로 험난하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것들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을 따라가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선우들은 여러분들에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스님이 아무리 법문해도 여러분들이 그걸 귀담아 듣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거 어디에 쓸 거라? 부처님이 옆에 나타나봐. 그 말 안 들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 선우는 여러분들이 선한 것들을 행할 때에만 해당사항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여러분들이 선우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좋은 선우가 있더라도 여러분들에게는 반밖에는 영향을 못미친다는 거라. 여러분 자신이 자꾸 선우가 되도록, 현명한 자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빤디따(Paṇḍita)가 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처음 명심해야 될 것,

왜 빤디따가 될려고 하느냐. 요점은 마음의 향상에 있습니다.

마음이 향상되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라.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바뀌고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고, 마음이 항상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이 항상 일어나는 대상들을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 빤디따가 되어야 되는 거라.

현명한 자들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라. 저 사람을 보면 아, 내가 도와줄 게 뭐 없나, 정 안되면 아, 저사람이 행복하길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고, 설혹 내가 비난받고 설혹 내가 사실이 아닌 것들을 모함받고 하더라도 '아이고, 저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거 내가 해명할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내 마음은 항상 선한 마음들을 일으켜야 되는 거라. 그러면서 그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가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라. 마음이 향상되는 것에 요점이 있는 것이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냥 바보같이 살아. 바보같이 살긴 싫지?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먼저 명심해야 될 것,

빤디따(paṇḍita)들은 감정에 지배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감정에 지배당해 버리면 그 사람들은 바로 발라(bālā)로 떨어져버립니다. 어리석은 사람으로 떨어집니다.

경전에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에왕 닌다빠삼사수 나 사민잔띠 빤디따

(evaṁ nindāpasaṁsāsu na samiñjanti paṇḍitā)'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빤디따라고 하는 것은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어떠한 비난이든지 어떠한 칭찬이든지, 어떠한 이익이든지 어떠한 불이익이든지, 그런 것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번 해봐!

그러면 아. 이것이 마음이 향상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니까 나도 고요하고 참 좋거든. 그럼 그 길을 계속갈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맨날 거기에 지는 거라. 누가 뭐라 하면 '팩' 그냥 바로 반응을 해버리는 거라. 바로 감정에 지배당해 버리는 거라. 그러지 말아라는 겁니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가볍고 편안하게 자꾸 만들어야 돼. 그래야만이 그 마음이 설혹 외부적인 조건이나 아니면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망상이나 감정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거라. 금방 알아차린다는 거라. ‘음’ 하면서 씨익 웃고 내가 그걸 다스려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윕빠시단띠 빤디따(vippasīdanti paṇḍitā)' 그렇게 얘기합니다.

진리를 듣는 것들을 기뻐할 줄 아는 자.

그거는 여러분들도 잘하는 것들도 있대. 법문 들으면 되게 기분 좋고, 그런데 법문 안 해주면 또 성질 바라락 내고, 아마 오늘도 안 해주면 벌써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 그런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기쁨이 아니죠? 감정에 폭삭 지배당한 거죠!

진리를 알게 될 때, 진리를 체험하게 됐을 때 그 기쁨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법을 듣더라도 아, 그 법이 진짜 좋은 법이구나. 진짜 내가 따라야 될 법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는 기쁨이 일어납니다.

 

진리를 듣고 진리를 실천하는데 기쁨이 일어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길을 계속 갈 수가 있습니다. 수행도 재미있어야 할 거 아니라? 재미 하나도 없고 괴롭기만 하는데 어떻게 계속할 거라? 그런 기쁨이 일어날려고 할 거 같으면 스스로 수행해서 체험을 해야 만이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오래도록 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아, 이 법을 듣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 이해를 하고, 또 이 수행해보니까 참 좋구나 하는 것들을 아니까 계속 다닐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만날 몇개월 안 와서 또 바뀌고 또 바뀌고 계속 바뀝니다. 새로운 거 들으러 왔다가 듣고 나서 뭐 별거 아니네 하고 가버립니다. 왜? 그걸 이해하고 체험해서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거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세 번째, 어떠한 경우든지 네거티브가 아니고 포지티브 인간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고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하고, 또 나쁜 행위들을 하지 않고 선한 행위들을 하고, 나쁜 말들을 하지 않고 좋은 말들을 할 수가 있을까?

 

말하는 걸 예로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봅시다. 말을 하는데 내가 마음을, 여기 우리 보살님 이름이 뭐지? (수완나) 수완나님을 향해서 수완나님에게 뭔가 자꾸 도움이 되기 위해서 좋은 말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치자.

그러면 마음은 수완나님한테 향해져 있습니다. 물론 좋은 얘기 많이 하고 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저기에서 반응하는 것에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이 달라져 버립니다. 점점 바뀌어집니다. 처음에는 선한 마음으로 뭘 자꾸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저기서 반응이 없으면 나도 시큰둥해지고, 이렇게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수완나님한테 말을 하면서, 말을 할 때 어디다가 알아차리느냐면 내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해보십시오. 입술이 부드럽고 아주 달콤하고 그럴 것 같으면 아, 내가 바른 말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말이 쎄지고 억양이 높아지고 할 것 같으면 이게 딱딱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부드러운 것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들을 가질 것 같으면 말라버리고, 말은 빠르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말하는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할 것 같으면 부드럽고 촉촉하고 가볍게 만들려고 합니다. 입술의 느낌들을. 그럼 말을 할 때도 억양도 그렇게 거세지 않고 평온하게 하고 선한 말들을 지속적으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 수완나님 하고 관계없이.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일으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계가 있죠? 이미 생각한 것들을 뱉어내는 것만 하는데, 뱉어내는 것이 나쁜 것이 자꾸 안 나가도록 만드는 역할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거라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 저기에 있는 수완나한테 영향을 안 받을 거라.

 

그런데 공부가 좀 더 잘되면 인제 가슴을 관찰하는 거라. 내가 말을 할 때 선한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말을 할 때 어떠한 말들을 잘 구성해가지고 하는 건지를 가슴의 느낌들을 관찰을 합니다. 그러면 아예 의도부터 생각하는 것부터 바르게 쭉 계속 해나간다는 거라. 저거하고는 전혀 영향을 안 받습니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한 두 번째, 세 번째 것들은 저 밖의 대상, 내가 말하는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것은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할려고 하더라도 밖에 대상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악한 것들을 하지 않고 선한 것들로 전환시켜주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선되어야 됩니다. 어떠한 것에도 집착을 하는 것들이 없어야 됩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관찰할 때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변하는 것들을 관찰을 합니다.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의 느낌들을 관찰할 때도 그것이 변하는 속성들을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집착하질 않습니다. 어떤 생각에 집착해있든, 아니면 내가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든, 집착하는 순간, 그 순간 바로 악한 것으로 변해버리게 되는 겁니다.

집착하지 마라. 누가 이걸 주라 그럴 거 같으면 그냥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줘버려. 적어도 물건은 잃어버릴지 몰라도 내 마음은 잃어버리지 않는 거라. 여기에 매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경전에서 뭐라고 그러느냐면 "요술망치를 버려도 선우는 잊지 말아라."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붙잡아라는 거라. 내 가진 것, 내 명예, 이런 좋은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친구는 잡아라는 거라. 마찬가지로 내 거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마음은 적어도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집착함이 없도록 딱 그것은 잡고 있어라는 거라.

 

그게 인제 선우에 대한 일반적인 얘깁니다.

두 시간에 걸쳐서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에 대한 얘기를 개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그것의 구별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을 해주겠습니다.

이런 자는 어리석은 자니까 멀리해라(Bālāsevana). 이런 자는 현명한 자니까 가까이해라(Paṇḍitasevana). 또 내가 그렇게 따르도록 하라. 하는 뜻입니다.

그걸 구분해야 되는데, 구분 잘못하면 어떻게 돼? 평생 고생을 해야 됩니다. 내가 판단 잘못해놔 놓으면. 이걸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끼고 가지도 못하고, “아이고, 저 웬수덩어리!” 그럽니다. 뭐 가족만 그런 웬수덩어리 있겠어? 친구도 꼭 마찬가집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보면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나의 지갑에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현명한 자는 나의 지갑을 채워줍니다. 그렇게 보면 딱 맞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를 스님이 여기서는 이해하기 쉽게 '나쁜 친구'라고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경전에 어떤 게 나쁜 친구(Bālā)인지 한번 봅시다.

도박하는 사람들(dhuttā), 여러분들 주위에 없죠? 자기도 안 하죠? 간단한 그걸 뭐라 그래요? 아, 고스톱. 고스톱 모여서 하는 그것조차도 하면 안된다는 거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에 젖어들어버리고 즐길려고 합니다. 그거 뭐 좋다고 즐길 것이 없어서 그것가지고 즐길려고 해? 그게 병폐가 없고 영향을 안 미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영향은 틀림없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심심하다. 모르는 사람 셋만 있어도 그러면 그 심심한 것을 풀기 위해서 그냥 고스톱 합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

심심한 것을 풀기 위해서 내가 부처님 법에 대한 이야기를 갖다가 잔잔하게 할 수도 있잖아. 왜 좋은 거는 안 하고 꼭 그런 것들을 가지고 풀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도박은 조금도 하려고 하면 안 되고,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당장 끊도록 해야 되고, 그리고 못하도록 해야 되는 거고. 안되면 그건 내쳐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방종자(soṇḍā). '손다'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자, 심약한 자'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엇에 쉽게 팍 빠져버리는 자들. 쉽게 말하면 남자면 예쁜 여자만 보면 눈길이 돌아가는 거라. 마음이 거기 끄달려버리는 거라. 그걸 절제하지 못하는 거라. 맛있는 음식 보아도 그거 그냥 정신 못 차리고 먹어. 술도 마찬가지라. 안 먹고 싶은데 누가 조금만 부추기면 그냥 먹으러 가는 거라. 그걸 거의 대부분 여러분들은 해당이 되는 거라. 쉽게 빠지는 습성들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방일하게 놓아버리는 친구, 또 자기 자신은 만들지 않도록 해라.

 

그다음에 삐빠사(pipāsā)라고 해서 그건 술꾼으로 스님은 풀어놓았습니다. 갈증, 갈망이 많은 자. 아, 오늘 한잔하고 싶다. 그거 못 참는 거라. 마누라 들들 볶고 뭐 어쩌고 너는 뭐 어쩌고 놀고 있는데 나는 술 한잔 잠깐 하는 것도 못하느냐, 어쩌냐. 그거 갈망이 많으니까 그런 거라. 괜한 일을 가지고 생트집 잡는 거라.

 

그다음에 사기꾼(nekatikā), 사기꾼과 뒤에 기만자(vañcanikā)는 비슷한 건데 사기꾼과 기만자의 차이는 뭐냐면,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사기치는 것과 남이 버젓이 알고 있는데도 기만하는 경우. 그러니까 속여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는 수다원에 이르렀다 그럽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쟤 행동으로 봐가지고는 절대 수다원이 아닌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너 수다원 아니야. 수다원은 그런 행동 안 해. 그래도 지는 끝끝내 수다원이라고 고집부리는 거라. 그럼 이 사람은 어디에 해당이 되겠어요? 기만자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사기꾼은 뭐라? 비슷하게 가는 거라. 쟤가 진짜 맞나 안 맞나? 행동하는 건 남이 볼 때는 수다원에 어긋나는 건 안 하거든. 그런데 자기는 남 안 볼 때는 오만 거 다해. 그건 사기꾼이라. 그렇게 보면 됩니다.

남이 알든 남이 모르든 속이는 행위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그거보다도 더 나쁜 놈, 폭력 휘두르는 놈들(sāhasikā). 여러분도 옆에 남편이든 누가 폭력을 휘두르는 놈들은 당장 쫓아내버려야 됩니다. 자기도 못살아. 오늘 또 이혼할 사람들 많겠네. (ㅎㅎㅎㅎ) 폭력은 신체적인 폭력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적인 폭력뿐 아니라 마음의 폭력을 가하는 것들이 전부 해당이 됩니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자, 이런 성향이 강한 자들은 나쁜 친구라고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사람은 나를 어리석게 만들고, 그사람 자신도 어리석은 자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거는 이해하기 쉽죠? 그런데 경전에 요거만 딱 해놓으면 좋겠는데, 부처님이라는 양반이 여기에서 딱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이 얘기해놓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부처님이 보니까 좀 부족하다 싶으니까 세분화시킵니다. 아주 세분화시킵니다.

 

이 여섯 종류 말고 뭘 세분화시키느냐 하면 좋은 사람으로 가장한 나쁜 놈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처님이 얘기를 해놨습니다. 네 가지 종류로써 설명을 해놓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안냐 다투하라' 라고 해가지고 눈앞의 이익을 바라는 자들. 그냥 눈앞에 있는 이익을 바라는 거라. 그걸 특징을 경전에 네 가지로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것이든 남이 것을 얻을려고만 하는 자, 쪼매 해주고 많은 걸 바라는 자, 그다음에 자신이 조금 안 좋은 처지에 빠지고 할 것 같으면 막 잘해주는 척하는 자, 그다음에 자기한테 이익이 있다 싶을 때만 가서 친한 척하는 자.

찔리는 게 있어? (ㅎㅎㅎㅎ)

이런 자들은 선우를 가장한 나쁜 놈들이라는 거라.

 

나쁜 놈들의 첫 번째, 눈앞의 이익을 바라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아, 참 저 사람은 경계해야 되는 구나 하고 판단을 해서 멀리해야 되고, 그렇다고 멀리 한다고 해가지고 그사람을 미워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사람이 진짜 잘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런 사람이 옆에 없고 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말짱 꽝이라.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라. 그래서 그거는 첫 번째 부분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나쁜놈, 좋은놈" 좀 더 구분해가지고 그 구분하는 것들을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끝!

 

아래는 아짠 빤냐와로 스님께서 정리해주신

[신들과 인간에 있어서의 38가지 길상] 부분입니다.

 

Mahā Maṅgala Sutta 망갈라 숫따 (길상경)

[신들과 인간에 있어서의 38가지 길상(吉祥)]

 

1. Bahū devā manussā ca, maṅgalāni acintayuṁ,

바후- -- 마눗사- , 망갈라-니 아찐따융,

많은 천인들과 인간들은 모든 망갈라(길상)에 대해 사유하나니,

ākaṅ khamānā sotthānaṁ. brūhi maṅgalamuttamaṁ.

-깡 카마-- 솟타-낭 브루-히 망갈라뭇따망.

부처님이시여! 간절히 바라고 행복을 가져오는 으뜸가는 망갈라가 무엇인지 설하여 주옵소서!

 

2. asevanā ca bālānaṁ, paṇditānañ ca sevanā,

아세-와나- 짜 발--, 빤디따-난 짜 세-와나- ,

어리석은 자를 멀리 하고, 지혜로운 자와 어울리며,

pūjā ca pūjanīyānaṁ, etaṁ maṅgalamuttamaṁ.

-- 짜 뿌-자니--, -땅 망갈라뭇따망 .

존경해야 할 분들을 존경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1) Bālāsevana 어리석은 자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2) Paṇditasevana 현명한 자와 친하게 지낸다.

(3) Pūjaneyyapūja 존경해야 할 분들을 존경한다.

 

3. patirūpa desavāso ca, pubbe ca katapuññatā,

빠띠루-빠 데-사와-- , -- 짜 까따뿐냐따-,

적당하고 즐거운 장소에서 살아가고, 전생에 쌓은 공덕들이 있으며,

atta sammāpaṇidhi ca, etaṁ maṅgalamuttamaṁ.

앗따 삼마-빠니디 짜, -땅 망갈라뭇따망.

자기 자신 올바르게 확립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4) Patirūpadesavāsa 적당하고 즐거운 곳에 산다.

(5) Pubbe-katapuññatā 전생에 쌓은 공덕들이 있다.

(6) Attasammāpaṇidhi 스스로 올바른 서원을 일으킨다.

 

4. bāhusaccañ ca sippañ ca, vinayo ca susikkhito,

-후삿짠 짜 십빤 짜, 위나요- 짜 수식키또-,

널리 배우고 바른 기술 익히며, 몸과 마음 계율로써 잘 다스리며,

subhāsitā ca yā vācā, etaṁ maṅgalamuttamaṁ.

수바-시따- 짜 야- --, -땅 망갈라뭇따망.

선한 말로 의미 있게 말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7) Bāhusacca 널리 배운다.

(8) Susikkhita-sippa 바른 기술을 몸에 익힌다.

(9) Susikkhita-vinaya 바른 계율을 지켜 예의범절을 몸에 익힌다.

(10) Subhāsita-vāca 선한 말로 의미있게 말한다.

 

5. mātā pitu upatthānaṁ, putta dārassa saṅgaho,

-- 삐뚜 우빳타-, -따 다-랏사 상가호-,

부모님을 효도로써 잘 모시고, 처자식을 사랑으로 보호하며,

anākulā ca kammantā, etaṁ maṅgalamuttamaṁ.

아나-꿀라- 짜 깜만따-, -땅 망갈라뭇따망.

안정된 직업으로 평화롭게 일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11) Mātāpitu upatthāna 부모님을 효도로써 모신다.

(12) Puttadārassa saṅgaha 처자식을 사랑으로 보호한다.

(13) Anākula kammanta 안정된 직업으로 평화롭게 일을 한다.

 

6. dānañ ca dhammacariyā ca, ñātakānañ ca saṅgaho,

-난 짜 담마짜리야- , -따까-난 짜 상가호-,

널리 베풀고 담마따라 살아가며, 형제친척들과 화합하며 서로 돕고,

anavajjāni kammāni, etaṁ maṅgalamuttamaṁ.

아나왓--니 깜마-, -땅 망갈라뭇따망.

비난 받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14) Dāna 널리 베푼다.

(15) Dhammacariya 법에 맞게 살아간다.

(16) Ñātaka saṅgaha 형제친척들과 화합하며 서로 돕는다.

(17) Anavajja kamma 비난받지 않는 일을 한다.

 

7. āratī viratī pāpā, majjapānā ca saññamo,

-라띠- 위라띠- --, 맛자빠-- 짜 산냐모-,

악한 행위들을 피하고 삼가하며, 술과 약물 자제하고 멀리하며,

appamādo ca dhammesu, etaṁ maṅgalamuttamaṁ.

압빠마-- 짜 담메-, -땅 망갈라뭇따망.

선한 행위 따라서 방일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18) Pāpa-ārati 악한 행위들을 멈춘다.

(19) Pāpa-virati 악한 행위들로부터 멈춘다.

(20) Majjapānā saññama 술과 약물을 삼가고 멀리한다.

(21) Dhamma-appamāda 법에 따라서 방일하지 않는다.

 

8. gāravo ca nivāto ca, santuṭṭhi ca kataññutā,

-라오- 짜 니와-- , 산뚯티 짜 까딴뉴따-,

존경할 줄 알고 겸손하며,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며,

kālena dhammasavanaṁ, etaṁ maṅgalamuttamaṁ.

--나 담마사와낭, -땅 망갈라뭇따망.

적당한 때에 담마를 듣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22) Gārava 존경할 줄 안다.

(23) Nivāta 겸손하다.

(24) Santuṭṭhi 만족한다(지족).

(25) Kataññuta 감사할 줄 안다.

(26) Kālena dhammasavana 적당한 때에 법을 듣는다.

 

9. khantī ca sovacassatā, samanānañ ca dassanaṁ,

칸띠- 짜 소-와짯사따- 사마나-난 짜 닷사낭,

인내하고 공손하게 경책들을 받아들이며, 수행자를 찾아뵙고,

kālena dhamma sākacchā, etaṁ maṅgalamuttamaṁ.

--나 담마 사-깟차-, -땅 망갈라뭇따망.

적당한 때에 법담을 나누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27) Khantī 참고 견딘다.

(28) Sovacassatā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인다(온유하다).

(29) Samana dassana 출가 수행자를 찾아뵙는다.

(30) Kālena dhammasākacchā 적당한 때에 법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10. tapo ca brahmacariyañ ca, ariyasaccāna dassanaṁ,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 짜, 아리야삿짜-나 닷사낭,

부지런히 노력하고 청정범행 수행하며, 성스러운 진리들을 분명하게 통찰하고,

nibbāna sacchikiriyā ca, etaṁ maṅgalamuttamaṁ.

닙바-나 삿치끼리야- , -땅 망갈라뭇따망.

닙바나에 이르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31) Tapa 부지런히 노력하여 오욕락을 억제한다.

(32) Brahmacariya 청정범행을 실천한다.

(33) Ariyasacca dassana 성스러운 진리들을 분명하게 통찰한다.

(34) Nibbānasacchikiriya 닙바나(열반)에 이르른다.

 

11. phuṭṭhassa lokadhammehi, cittaṁ yassa na kampati,

풋탓사 로-까담메-, 찟땅- 얏사 나 깜빠띠,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asokaṁ virajaṁ khemaṁ, etaṁ maṅgalamuttamaṁ.

아소-깡 위라장 케-, -땅 망갈라뭇따망.

슬픔없이 번뇌의 오염없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35) Citta alampāna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36) Asoka 슬픔이 없다.

(37) Viraja (마음에) 더러움이 없다.

(38) Khema 평온하다.

※ 세상일(세간법, lokadhamma) : 윤회하는 세계에서 명백히 존재하는 8가지 법(세간팔법),

①이익(lābha) ②손해(alābha) ③명성(yasa) ④치욕(ayasa)

⑤비난(nindā) ⑥칭찬(pasaṁsā) ⑦즐거움(sukha) ⑧괴로움(dukkha)

 

12. etādisāni katvāna, sabbattha maparājitā,

--디사-니 까뜨와-, 삽밧타 마빠라-지따-,

누구라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잘 실천해 나아가면, 어디서나 실패하는 일이 없고,

sabbattha sotthiṁ gacchanti, taṁ tesaṁ maṅgalamuttaman' ti.

삽밧타 솟팅 갓찬띠, 땅 떼-상 망갈라뭇따만 띠.

어디서나 행복을 얻게되니, 이게 바로 으뜸가는 망갈라이네.

 

Sādhu sādhu sād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