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투는 성냄보다 무섭다 (20140807)
오늘은 「질투는 성냄보다 무섭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에 가면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까지는 아침에 학교에 가면 자기가 기록을 해요. 자기 이름을 적고 그다음에 학교에 온 시간 몇시를 적어가지고 자기가 이렇게 싸인을 해. 그렇게 해가지고 쭉 오는 순서대로 그날 싸인을 하고 나면 선생님이 만약에 9시부터 수업이라고 그러면 9시에 오면 자를 딱 가지고 와가지고 자를 대가지고 9시 이후부터는 줄을 쫙 긋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밑에 있는 애들은 벌점을 먹여. 10분 늦었으면 벌점 1점, 20분 늦었으면 벌점 2점 이렇게 벌점을 먹여.
그게 통상적인 방법인데, 한번 참관할 기회가 있어서 간 적이 있는데, 다른 선생들은 보통 아침에 9시까지면 9시 되어서 자기가 딱 들어오면 그시간에 밑줄을 쫙 긋는데, 이 선생은 어떻게 된 게 한참 애들한테 뭔 설명을 하면서 좀 있다가 밑에 줄을 쭉 긋는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지각한 애들은 들어오는 거야. 문 입구에 이게 붙여져 있으니까 적고 들어오는데, 그걸 보면서 그 선생한테 한번 물어본 적이 있어. 왜 9시에 줄을 딱 긋고, 이 선생님은 9시 10분 넘어가지고 줄을 긋더라고. 왜 10분 지나가지고 줄을 긋느냐 하고 물어봤어요.
왜 그랬을 거 같애요? “나는 애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점 주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픈 거라. 그렇다고 해서 지각하는 게 올바른 것은 아니고 그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10분까지는 내가 봐주겠다 하고 자기가 마음을 먹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10분 이후에 줄을 긋는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선생들은 9시에 정확하게 줄을 쫙 긋거든.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도 교문에서 아마 그거 많이 했을 거라. 그런데 그 선생들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까? 사랑하는 마음이 있죠?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원칙이 우선이기 때문에 원칙이 사랑하는 마음을 이겨버리는 거라. 그런데 이 선생은 그 원칙보다도 사랑하고 가엽다는 마음들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10분을 봐주게 되는 거라.
어떤게 맞을까? 정답은 사실은 없죠! 그렇지만 패턴들을 보면 조금 정답에 가까운 것이 드러나집니다. 그 선생은 물론 10분 늦게 줄을 긋는다 해서 애들이 좋아할지 어떨지는 몰라도 되게 좋아해요. 애들을 진짜 자기 자식같이 잘 해주는 거라. 어디 애들이 다쳤다고 하더라도 쫓아가가지고 자기가 먼저 털어주고 위로해주고 나서 직접 데리고 양호실로 데려가는데, 다른 선생들은 넘어지면 옆에 애들 시켜. “야 빨리 가 봐” 그러고 나서 “양호실 데려가” 이렇게 한다는 거라. 선생의 의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에 대해서 연민심을 지니고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들이 앞선다는 것은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참 좋은 겁니다.
경전에 그 구절이 있습니다.
"수카 까마 부따니(sukhakāma bhūtāni)"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밑에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그렇게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행복하게 안 되는 것은 알라시얀(ālasiyaṁ) 때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바라는데 그걸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럽니다. “스님, 나는 이게 잘 안됩니다.” 예를 들면 수행하는데 “스님 앉았다 하면 만날 조붑니다.” “앉았다 하면 만날 망상이 떠오릅니다.” 방법 가르쳐줘도 만날 똑같은 걸 물어. 그러면 사실은 나중에는 말할 게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아이고, 인제는 가봐야 스님한테 할 말도 없고 뭐. 자기가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는 것은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인 줄 본인이 알고 좋은 것인줄 본인이 알 것 같으면 그것을 더 증장시키고 바꿀려고 하는 노력들이 반드시 필요한 건데 그렇지 않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로 기운다" 하고 얘기합니다.
행복하게 되는 마음, 또는 게으름 피우는 마음. 이 행복한 것하고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마음, 그렇게 기운다 하고 얘기합니다.
행복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참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오늘 제목이 뭐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대답 : 질투는 성냄보다 무섭다.)
질투는 성냄보다 더 무섭다 하는 것입니다. 질투나 성냄은 수카 쪽에 가까울까? 알라시양 쪽에 더 가까울까? (수행자 대답 : 알라시양)
당연히 알라시양 이지, 질투하는 것 보고 누가 좋다는 사람 없고 성내는 사람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질투가 성냄보다도 더 무섭다고 할까?
똑같이 여러분들이 성을 낸다고 해봅시다. 성을 내면 자신의 마음은 조금 안 좋습니다. 성내고 나서 좋은 사람이 어딨겠어? 나중에 후련하다고 하는 것은 그 뒤의 일이고, 성을 내고 나면 어떤 경우든지 자신은 어두운 마음 쪽으로 기울어지게끔 되어있습니다. 성내고 나서 그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바뀌었을지는 몰라도 성내는 당시에 제정신 가지고 성내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실은 성을 내고 있으면서도 성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리하죠? 애들 뭐라 할 때? 조리있게 자기는 말을 잘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을 다했다고 합니다. 성을 내면서도. 그런데 실제 그렇습니까? 자기 할 말 다했을 거 같으면 성 안 내고 할 말도 할 수 있는데 하필 성내가면서 말을 해야 되느냐는 거라.
그 얘기는, 성을 냈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가 논리적이지 못했고 그리고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했다는 거라. 그러니까 후회를 하게 되는 거라. 애한테 그러고 나서 후회 안 하는 사람 별로 없거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성낸 것에 대해서 ‘아, 내가 다시는 성내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자꾸 다른 핑계들을 댄다는 거라.
그래서 성을 낼 때는 어두운 마음이 될 뿐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되지 않고, 그리고 좋은 일들도 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것도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질투도 꼭 마찬가집니다. 꼭 마찬가지 패턴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내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성이 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질투라는 것은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야 됩니다. 상대가 없으면 질투가 안 일어납니다. 그거는 왜 그럴까? 자신에게 질투하는 사람 있어요? 없습니다. 대부분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첫 시발점이 되는 거라. 자기가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났다고 생각한다는 거라. 하기야 그게 없으면, 에고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생존 욕구가 사실은 없어지기는 합니다. 그래도 어쩔 거라? 그걸 최소화시켜야지만 부처님 가르침하고 맞아떨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을 사실은 가지지 않아야 질투하는 것이 조금 없어지기는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 그런 적이 있었어요.
경전에 보면 그 남자 주인이 여자 하인을 되게 예뻐했어. 그러니 여주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게 미워 죽겠는 거야. 남편이 만날 맛있는 거 있으면 너 먹어라 하고 갖다주고 어쩌고 해싸니까 옆에서 하니까 얼마나 미울 거라?
자기 생각에는 내가 자기보다도 더 잘난 사람인데, 내가 주인인데. 그러니까 그날 제따와나 사원에 법문 들으러 가는 때였는데 성이 나고 질투가 나니까 그 하인을 가두어버렸어. 손을 묶어가지고 딱 가두어 놔버렸어.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이?
그러고 나서 제따와나에 가서 법문을 듣습니다. 그것도 참 이상하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제따와나에 가서 법문을 들으면 그게 귀에 들어올까?
그런데 마침 그때 그 하인의 어머니가 거기에 갔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자기딸이 어쨌는데 왜 묶어가지고 가두어놨느냐고 생각해보니까, 자기 딸은 훌륭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자기 딸은 자기 할 일 하고 그리고 주인이 이뻐해주는 것이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생각을 하는 것이, 뭐 다르게 생각을 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자기 딸을 데리고 가서 제따와나 사원에 가서 설법하고 있는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을 하든 뭘 하든 간에 따지는 거라. “부처님, 저 여자가 이랬어요, 저랬어요”
부처님도 자리에서 법문하다가 참 황당할 거라. 그런 얘기가 참 많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차분하게 "악한 일 하지 말아라."
주인이 그 하인을 구속하고 가둬놓은 것도 악한 일인 것이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자기의 딸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부처님한테 고자질 한 것도 그것도 사실은 악한 일이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악한 일은 하지 말아라.
악한 일을 안 해버리면 문제는 간단한데 그런데 안 하고 살려니까 참 힘이 들어. 그러면 악한 일을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더라도, 악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을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숨길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애한테 화를 냈으면 그것은 악한 일을 한 겁니다. 그러면 그거는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지, 자기가 잘했다고 깨춤 출 일이 아니라는 거라.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까 악행은 계속해서 저지르게 되는 거고, 그걸 정당화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남몰래 했든 남이 알게 했든 그 악한 일을 한 것들이 드러나게 될 때는 자기는 굉장히 불행하게 되는 거라.
불행할 짓을 왜 하느냐는 거라. 악한 일을 하지마라 해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을 가져라 해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자꾸 정당화하게 되는 거라. 바른 일인양. 그런데 그것에서 오는 결과는 어떻게 할 건데?
여기 엄마들 많으니까 많이 경험자들 일 거라. 애들 이렇게 많은 걸 하면 나중에 엄마한테 "싫어" 합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질투의 감정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냄의 다른 모습들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성내는 것이 하나가 있고, 질투하는 것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인색한 것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후회하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성냄의 다른 모습들은 이것들을 4가지 다른 모습들이라고 얘기합니다. 사실은 인색한 것도 성냄의 일종이고 후회하는것도 성냄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의 공통된 특성들은 반항할려고 한다는 거라.
자기가 방구껴놔놓고 방구 안 꼈다고 한다는 걸. 성내놓고 성낸 것들을 합리화한다는 거라. 자기가 질투 해놔놓고 질투는 정당화시키는 것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럴 수는 있는데, 그렇게 하면 자신의 능력은 점점 더 떨어진다는 거라.
그러한 사실들을, 4가지 다른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자신은 점점 더 그 능력들은 떨어지고 마음은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는다는 거라.
조그만한 자극에도 항상 반응을 하게끔 됩니다. 그럼 점점 더 해탈의 길로 가는 것들은 멀어져버립니다. 그러면 괜찮은데, 그런 성향을 가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점점 더 위축되게 됩니다.
그래서 성냄의 네 가지는 특성들은 어떤 것이든 가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알지만 성냄은 바르르르륵 하고 나면 좀 있으면 바르르륵 사라집니다. 그런데 질투는 안 그렇죠!
그런데 바르르륵 안 사라지는 성냄은 원한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가슴에 응어리져가지고 그 사람만 보면 다시 또 성냄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건 이미 성냄의 영역이 아니고 원한의 영역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런데 질투라고 하는 것은 그거하고는 다르게 성냄보다도 훨씬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설혹 성냄이 원한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을 만났을 때만 일어나지는데, 이놈의 질투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과 다른 대상을 만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질투의 성향의 자꾸 강해지기 때문에. 어떤 걸 봐도 '에이, 시시하다' 아무리 잘난 사람들을 보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거라.
예를 들어볼까요. 좀 있으면 인천 아시안게임 합니다. 대한민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그러면 되게 좋아합니다. 그런데 일본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그러면 되게 또 싫어해. 거 왜 그래? 여러분이 운동선수 그 당사자도 아니고.
또는 자기 아들이 일등 했으면 되게 좋아하는데, 남의 아들이 일등하면 되게 싫어합니다. 그거 뭐 일등 하는데 보태준 거 있어?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래.
질투하는 감정은, 어떤 것에도 관계없이 질투의 감정이 있으면 그것은 항상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성냄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거라.
머릿속에 먼저 탁 박아두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질투는 성냄보다도 더 위험하다"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그거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내세울 때도 가끔은 있습니다. 그런데 내세워야 될 때든 내세우지 않을 때든 자기를 자꾸 내세우다 보면 질투의 감정만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질투는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말을 하는 것은 방사능의 핵이 유출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라." 그것은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그거는 누구를 가리지 않습니다. 내 친구한테는 안 가고 나쁜 사람한테는 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미치는 겁니다. 그 마음을 탁 가지면 말을 할 때 되게 조심합니다. 그게 어디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데, 그게 영향을 미치는 게 밖에만 영향을 미치겠어? 자기는 최고 가까이 있는데? 자기한테 최고 먼저 영향을 미치지.
질투가 꼭 마찬가집니다. 차라리 한번 바르르륵 하고 성내고 탁 끝내라. 그게 차라리 낫지, 질투의 마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게끔 된다는 거라.
질투를 빨리어로 잇사(iss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잇사(issā)의 반대말은 무디따(mudit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언제 한번 무디따에 대해서 법문한 적이 있지? 무디따를 이루면 가장 좋은데 참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쉽게 얘기하면 여기에 산향님이 있다, ‘산향님이 원하는 거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진짜 실제 이루어지고 나면 내 기도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내 기도 때문에. 산향님 자기가 했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래서 “아, 참 잘했다” 이렇게 안 하고. 무디따를 실천해놔놓고도 실제로는 실천을 한 게 아니라. 말로만 “니가 원하는거 잘 이루어지고 니가 행복해라이” 이러고 있는 거라.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게 해로운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 해로운 줄을 알 거 같으면 아, 이거는 질투는 다시는 일으키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먼저 가지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방법과, 다른 이에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까 질투는 빨리어로 잇사(issā)라고 그랬죠.
잇사(issā)의 반대말이 무디따(muditā)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할 때는 먼저 스스로 기뻐하는 법들을 익히도록 해야 됩니다.
자기 몸을 이뻐해라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만날 찍어 발라라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기뻐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스님한테 탁발했죠? '아, 내가 참 좋은 일 했구나' 생각하고 자꾸 기뻐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고, 그래서 다음에도 어두운 마음이 있으면 '아, 그때 내가 탁발한 거 참 좋은 일 했고, 참 기쁘다' 하는 마음을 또 일으킬 수가 있는 거라. 내가 쌓은 공덕들 '아, 내가 참 공덕들을 많이 쌓았네' 하는 마음을 자꾸 일으켜서 기쁜 마음들을 자꾸 일으키는 훈련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알게 모르게 여러분들은 굉장히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기쁨을 일으킬만한 일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킬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오늘도 우리 에시니가 이 방석을 깔더라고. 그런데 에시니가 아니라 누군가가 방석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좋은 일 해놔 놓고도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킬 줄을 모르는 거라. 그래서 다음에는 기뻐할 일을 찾지 않고 귀찮으니까 안 하게 되는 거라. 마음이 알라시양으로, 게으름 부리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거라. 싫은 마음들로 자꾸 바뀌게 되는 거라.
계행으로 인해서 또는 수행으로 인해서 또 그리고 바른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바른 판단은 어떤 걸 바른 판단이라고 하는지 알아요? 그걸 보통 지혜라고 얘기하는데, 생각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행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은 보면 바른 판단 지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골똘히 생각해가지고 뭔가 결정내리고 한 것들은 거의 지혜 쪽에 가까운 것이 아니고 세속의 여덟 가지 일에 얽혀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조금 더 이익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명예롭게 되기 위해서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 그런 쪽에 자꾸 얽히게 됩니다.
화요일 저녁인가, 화요일 저녁인가 그 법문을 조금 한 것 같은데 아마 녹음되어 있을 거라.
어쨌든 자기 스스로 무디따의 마음을 자꾸 일으켜라. 한 일들에 대해서 무디따의 마음들을 자꾸 일으키도록 하라.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행한 공덕에 대해서, 자신이 행한 계행에 대해서, 자신이 행한 보시에 대해서, 자신이 행한 수행에 대해서 이런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선한 쪽으로 마음을 기울인 것들은 다 자신의 공덕이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공덕들에 대해서 자꾸 숙고해보는 것.
그다음에 두번째 해야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무말 안 하고 있으면 그거 안 힘들어요?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은 만날 내 방에 혼자 있으니까. 어떨 때는 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거 같으면 하루 동안 한마디도 안 하고 삽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못견뎌 하는 거라. 그러니까 보로로로 친구 찾아가고 조잘거릴 데 있는 데를 또 찾아가게 되는 거라. 고요함을 즐길 줄 모르는 거라,
고요함이 가져오는 기쁨은 자신의 공덕에서 오는 기쁨보다도 훨씬 큽니다. 특히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대상으로 인해서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습니다. 여러분들 뭐 하러 집중수행처에 들어가는데? 뭐하러 또 버마 들어가고 하는데? 그 대상들로부터 일정부분 떨어트리기 위한 겁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자기 방에 있는데 그게 얼마나 좋은 조건들을 가졌느냐는 거라? 그런데 그것들을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아무리 집중수행처를 가든 버마를 가든 그냥 똑같애. 왔다갔다 왔다갔다.
자신의 평온함에서 오는 기쁨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정에서도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보다도 사선정이 훨씬 더 크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실제 수행에서 그걸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여러분들이 고요함에서 오는 기쁨들은 자꾸 가질려고 해야 됩니다.
마음이 아무것도 일하지 않을 때, 그때 오는 그 기쁨들 그거는 참 좋습니다.
경험으로 여러분들도 그런 것들 하잖아. 오늘 것도 밥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 얼마나 좋아!!! 그런데 정신적인 그런 쉬는 것들은 왜 못하느냐는 거라. 그게 오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또는 말 안 하는 것에 대해서 오는 기쁨들을 왜 자꾸 간과하느냐는 거라. 몸만 편히 쉬면 되나?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누릴 방법들을 자기 스스로 자꾸 일상생활에서 찾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질투의 해독제의 두 번째 방법, 다른 것들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
여러분들 잘하는 거 있죠? 염불하는 것, 경전 외우는 것 그런 것들이 해당이 됩니다. 또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하는 것,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그걸 자꾸 되돌아봄으로 인해서 '아, 참 내가 이 법을 만나서 너무나 좋구나' 하는 마음들을 자꾸 일으켜야 됩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오히려 부정적이고, 네거티브 쪽으로 자꾸 흐르면은 그 방법을 동원하라는 거라. 다른 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키는 것들.
그래야 질투의 성향들이 감소되어 나가집니다.
그다음에 가장 대중적인 겁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자꾸 만나려고 하는 것. 자기보다도 계정혜에서 뛰어난 사람들하고 자꾸 어울리도록 하라. 그것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들은 큽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다른 것들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키기에 더없이 좋은 것,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하다' 자기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거 필요 없지. 그런데 관계를 가지면서 살게 될 거라.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른다는 거라. 그 고마운 것들을.
내 자식이 아무리 애를 먹이고 하더라도, 언젠가 한번 들은 얘긴데, 아들이 진짜 애를 먹였대. 애를 먹였는데 만날 부모님 돈 타서 쓰고 이렇게 했는데, 이 아들이 어느날 죽었다는 거라. 경찰한테서 연락을 받았어. 그런데 가서 보니까 그 아들이 택시 일을 하다가 택시가 다른 차하고 부딪쳐가지고 죽은 거라. 부모님한테 얘기는 안 했지만 그 아들은 자기 딴에는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을 했다는 거라. 자기 가지고 있던 좋은 차 가지고 가가지고 그 택시회사에 세워놓고 택시 끌고 가서 일하고 했다는 거라.
부모 입장에서는 쟤한테 좋은 얘기 안 해주고 만날 싫어하는 말만 자꾸 한 것에 대해서 얼마나 후회될 거라. 죽고 나면 그렇게 후회한다는 거라. 설혹 내 아들이 말썽을 부리고 애를 먹인다고 하더라도 ‘아, 참 내가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마음을 한번 가져보라는 거라. 달리 보인다는 거라. 걔의 장점이 보여.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입니다.
무디따 수행들을 지속적으로 자꾸 해나가면 됩니다.
자기 자신의 기쁨을 얻는 방법과 다른 것들로 인해서 기쁨을 얻는 방법들에 좀 익숙해지면은 빨리 무디따 수행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질투라고 하는 것들은 더 이상 뿌리내릴 데가 없습니다.
질투는 어떤 경우든지 외부적인 요건들에 대해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행복해지고 그리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자기가 기쁨을 느끼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할 거라. 빨리 질투를 뿌리 뽑도록 해야 됩니다.
점차 낮은 단계부터 기쁨을 누리는 방법들을 해서, 나중에 더 높은 차원으로 기쁨을 누리는 방법들, 무디따 수행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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