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생각), 감정, 망상의 연결고리 (20140805)
오늘은 사고하는 것, 쉽게 얘기하면 생각하는 것, 그다음에 감정이 일어나는 것, 망상하는 것, 이 세 가지에 대한 연결고리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담미니! (수행자 대답 :예)
생각하는 것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수행자 대답 :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수행자 : 생각 안 하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생각은 하고 살아야 되지? 생각을 안 하면 죽은 거지? (수행자 : 네. 제 생각엔 그래요.)
음. 네 생각엔 그렇지? (ㅎㅎㅎ)
그 생각이 좋은 생각도 있고 나쁜 생각도 있고 그렇지? (수행자 : 네)
그러면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누가 날 욕했다 그러면 확 화가 일어나는 거 이런 것, 감정이 일어나는 것들은? (수행자 : 감정은 좋지 않은 거 같애요)
감정은 그러면 뭐 그러면 로보트와 같이 살면 되겠네? ( 수행자 : 그렇지는 않아요)
감정 없이 살 수는 없지? (수행자 : 네)
그것도 어쨌든 좋은 감정을 일으키도록 만들어야 되겠지? (수행자 : 네)
음. 생각하고 감정하고는 어떤 관계에 있는데?
(수행자 : 생각을 하니까, 예를 들면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겠다 생각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감정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내가 화가 난다 이런 감정이 일어나고, 또 다른 좋은 예는, 저 사람이 나한테 칭찬을 해줬다 그러면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다 이렇게 감정이 일어나요. )
음. 어쨌든 생각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그것들과 결합한 감정이 일어난다는 거지? (수행자 : 네)
그럼 생각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수행해야 되고, 감정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수행해야 돼?
(수행자 : 생각이 일어났을 때는 생각이 일어났다는 걸 알고 아, 그 생각이 옳은 건지 나쁜 건지 보고...)
책보고 말은 잘한다. (ㅎㅎㅎㅎ) (수행자 : 외웠어요. ㅎㅎ)
그게 되디? (수행자 : 안 되요 ㅎ)
그러면은 망상이 일어난다는 건, 망상은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수행자 : 망상이 일어났을 때는 망상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되요.)
거 당연히 알아차려야 되겠지. (수행자 : 네)
망상은 필요한 거야, 망상은 없어도 되는 거야?
아까와 같이 생각이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사는데 선한 것이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태인데, 망상은 어떤 거라? 망상은 없어도 살 수 있을 거 같애?
(수행자 : 네. 필요없을 거 같애요)
그럼 앞으로 망상하지마 이! (수행자 : 네)
필요없는 거면 안 해야 되는 거지.
그것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보통 생각이라고 하는 사고, 사고가 일어나면 멈추라고 얘기하진 않죠? 불교에서. 음. 생각을 멈추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기 수월하게 '생각'과 '사고'는 분명하게 다른 거지만 이해하기 쉽게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멈추라고 하지 않고 보통 뭐라고 그래요? "그 생각을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은 생각을 멈추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알아차리면 당연히 멈추게 되는 거고, 그렇게 하는 것들입니다.
망상도 마찬가집니다. 망상도 멈출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을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방치,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놔두지도 않고, 또 그것을 멈출려고도 하지 않아야 만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고들이나 망상들은 자기가 옷을 바꿔버려가지고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집니다. 그리고 내가 또 조작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라고 하는 사고들이 일어나든, 또는 망상이 일어날 때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을 없앨려고 알아차리지도 말고, 그것을 또 놓아둘려고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망상이 많이 일어나면, 망상을 빨리 없어지는 방법은 내가 고요해져 있으면 망상은 빨리 없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져서 평온한 마음이 되어있으면은 '망상'이라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려도 금방 쏙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요해져 있기가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망상들은 '망상''망상''망상' 하면서 알아차리고, 그래도 안 되면 이 망상의 원인이 뭔가 하고 뿌리를 쫓아가기도 하고 그래서 '아, 이것이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이 미치면 그때사 망상이 떨어지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겁니다.
언제 이런 생각들이나 망상들이 많이 일어날까?
몸이나 마음에서 스트레스가 많을 때 이런 사고들이나 망상들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 피곤하다' '아, 불만족스럽다' '아, 무섭다'하는 그런 것들이 일어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어떤 스님이 숲에 가서 수행을 했어요.
속가에서는 잘 살고 했지만 숲이 들어가서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아무도 주위에 없고 참 외롭거든. 그래서 외롭다는 망상이 계속 일어났다는 거라.
그 망상이 강해지니까 아, 나는 숲에서 생활 못하겠다 싶어서 박차고 일어나게 되고 그렇게 합니다.
그때 숲에 있던,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정령'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숲에 있는 스님이 참 부럽다. 이렇게 고요하게 앉아가지고 수행하는데 그 얼마나 부러운 거냐. 그런데 스님은 어떻게 그 부러운 몸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그 놈의 망상 때문에 수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박차고 일어나느냐"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때사 인제 정신이 바짝 듭니다.
'수행하기 싫다' 하는 것도 '외로운 것'으로, 또 무서운 것'들이 일어나가지고 그런 망상을 부림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수행하기 싫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다시 속가로 내려갈려고 했다는 거라.
또 좋은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경전에도 그런 게 있는데, 스님들이 탁발을 가다 보면 어느 집에 맛있는 것을 많이 주는 집이 있습니다. 그러면 탁발 가다가 꼭 그집에 갑니다. 그러면 항상 맛있는 거를 줘. 그럼 돌아와서 또 이걸 즐겁게 맛있게 먹거든.
만날 이리 가다가 보니까 그집에만 가면 맛있는 것들을 주고 하니까, 이 스님이 그집에는 빼놓을 수가 없게 되는 거라. 탁발을 할 때.
그래서 만약에 그집에 갔는데 그 공양 올릴 사람이 없다 할 거 같으면 괜한 걱정이 되는 거라. ‘어, 무슨 일이 있나?’ 다른 집에는 그렇게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안 나와도 그냥 ‘음, 오늘 탁발 없는 갑다’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가는데, 그 집은 만날 맛있는 거를 주다 보니까 거기에 따른 애착이 생겨가지고 그날은 탁발을 나오지도 안았는데 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딱 붙잡혀 있는 거라.
그러면서 온갖 망상을 부리게 됩니다. 아플까, 뭐 어쩔까, 저쩔까.
애욕이 강해지면 애착하는 것들이 강해지면, 망상은 더불어 강해져버립니다. 이런 경우들은 그것이 어떤 망상이든 좋은 걸 망상하는 것이든 아니면 싫은 것들로 인해서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든 그것들은 전부 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에 견디지 못하니까 숲을 박차고 일어나게 되는 거고, 괴로움에 견디지 못하니까 허락도 없이 그집에 불쑥 뛰어 들어가서 어찌 된 일인가 알아보고.
수행을 잘하면 그런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망상''망상' 하면 금방 없어집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평정심이 유지되기 전에는 '망상''망상''망상' 한다고 그게 잘 안 없어집니다.
지금 내가 뭘 망상하고 있지 하고 생각해버리면 답은 탁 나와버립니다. 내가 맛있는 거 먹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더럽다는 망상을 하는 건지, 뭘 망상하는지를 알 거 같으면 망상은 번지질 않는다는 거라. 다른 것으로서 넘어가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 망상하고 있는 그 원인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럼 놓아버리게 된다는 거라.
'망상''망상' 하고 관찰하다가도 망상이 잘 안 될 때는, 내가 지금 뭘 망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그러면은 망상을 관찰하기가 쉬워집니다.
이게 기본적인 패턴이고, 인제는 연관관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까 담미니한테도 물어봤지만은 사고라고 하는 것, 생각하는 것은 멈출 수 있는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언제 멈출 수가 있습니까? 안지정(安止定)에 들었을 때! 그러니까 깊은 선정삼매에 들어서 해탈을 체험하는 그런 선정의 상태에 들었을 때에만 이 생각이라고 하는 사고의 흐름이 딱 끊어지게 됩니다. 마음은 열반을 향하는 마음하고 그리고 그 마음을 짓는 마음, 작지정이라고 하는 그 짓는 마음들만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아라한이 됐든 아니면 일반 범부중생이든 생각은 반드시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단지 차이나는 게 선한 사람들은 생각을 일으켜도 선한 생각을 일으킬 거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생각을 많이 일으킬 거고,
부처님과 같은 아라한들은 단지 작용만 하는 생각만 일으킨다는 거라. 내가 사유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길이 두 갈래 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 갈래 중에 어느 길로 갈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길로 가고, 어떤 사람은 이 길로 가고.
욕심이 좀 많은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나쁜 생각을 많이 일으키는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가면 나에게 이익이 있을까? 어느 쪽으로 가면 더 편리할까? 더 유리할까를 생각해서 그걸 골라서 갑니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내 목적이 저기 진주에 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면 진주에 가는 빠른 길이 뭔가를 생각해가지고 그것이 혹시라도 좁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길을 따라간다는 거라.
그런데 아라한들은 두 갈래 중에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발을 디딥니다. 짓는 행위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하더라도 어떤 경우든지 아라한이든 아라한이 아니든 사고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은 이 생각하는 것들이 날조돼있다는 것을 잘 알지를 못합니다. 생각은 반드시 날조하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자, 이쪽에 뭐가 보입니까? 이쪽으로 뭐가 나오는지 빨리 한번 봐봐요. 보였어요? 보입니까? (네)
이걸 어떤 사람은 내가 손가락을 뻗었는데 손가락을 뻗었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마이크 줄이 쑥 나왔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됩니다. 인식을 하고 나서는 그 인식한 것들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개념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들은 전부 날조돼있는 것들입니다. 자기의 방식대로 날조하게 됩니다.
바퀴벌레가 있다. 그럼 우리는 그것을 볼 때 '아이 징그러워' 하고 봅니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새는 저 바퀴벌레 보고 "아이 맛있는 거' 하고 봅니다. 인식을 하고 나서 생각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거라. 바뀌벌레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나는 징그럽다고 하고, 새는 맛있다고 인식한다는 거라. 자기의 방식대로 이것을 날조해버린다는 거라.
사고가 날조되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몸에 대한 생존욕구가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날조를 하게 됩니다.
그 생존욕구는 언제 떨어집니까? 아라한이 돼야 떨어집니다. 그 이하에서는 떨어질 방법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라한만이 그것을 날조하지 않을까, 나머진 전부 다 자기의 방법대로 날조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이 사고라고 하는 것은 나의 방식대로 날조돼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설혹 어떤 사람이 징그럽다고 하든, 또 어떤 사람이 이것을 맛있다고 하든 그것은 그 방식대로 날조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해줘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만날 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난다는 거라. 니가 맞니, 내가 맞니 한다는 거라.
그건 누가 맞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방식대로 인식해서, 그것을 자기의 방식대로 날조한 것뿐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사고라고 하는 것은,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은 그 바퀴벌레라고 하는 것만 실재하는 것뿐입니다. 징그럽다든지 맛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방식대로 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질인 바퀴벌레는 놔두고 너는 왜 맛있다고 안 하느냐, 너는 왜 징그럽다고 안 하느냐고 그럽니다. 나름대로 날조한 개념을 가지고.
그래서 사고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의 방식대로 날조한 개념일 뿐이다 하고 여러분들은 정리를 좀 먼저 해야 됩니다.
• 그다음에 사고하고 감정하고의 관계입니다.
그런 데이타에 탁탁탁 입력되는 것들을 하나로 딱 모아주는 것이 '감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분리해서 정리하는 것.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각각의 인식들을 개념으로써 정리해주는 것, 이것이 '감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징그럽다고 하고 맛있다고 하는 것은 감정일 뿐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 그다음에 사고하는 것과 망상의 차이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감정이 끼어들지 않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사고하는 것은.
수학문제 풀 때는 사고만 쭉 해나가도 수학문제는 풀립니다. 그런데 계속 잘 풀다가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수학문제 푸는 것이 더뎌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왜 그래요? 이 사고하는데 감정이 끼어들었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감정이 끼어들면 느려지고 변형돼고 구부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법문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냥 사고만해서 그냥 말하는데 집중해서 쭉 할 거 같으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그대로 결론이 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감정이 딱 들어가 버릴 것 같으면 이게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정 없이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참 그러기는 힘이 듭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을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표현을 하느냐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비를 안 맞기 위해서 우산을 쓰고 가는 거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산을 쓰고 가면 안 맞을 거 같죠? 그런데 실제로는 머리 쪽에만 비를 안 맞았다는 것뿐이지 옷은 다 맞았다는 거라. 안 맞기 위해서 우산을 썼는데도. 실제적으로는 사고만 하고 생각만 해가지고 쭉 정리를 해가면 참 좋은데 그게 그렇게 안된다는 거라. 비를 맞는 거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감정이 반드시 끼어들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에는 감정이 안 끼어들게끔 할 수는 있습니다. 그 일만 쭉쭉쭉쭉 해나가면. 알아차려나가면.
그런데 망상이란 놈은 감정의 충동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망상'이라는 거라.
더럽다고 봤을 것 같으면 그 더러운 것에서 내가 피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고, 또 징그럽다는 충동도 일어나고, 계속 충동질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감정이 이 개념들을 계속 만들면서 그걸 휘젓고 다닌다는 거라. 그게 바로 망상이라고 하는 것들이라.
그래서 "망상은 어떤 것이든 단언컨데 나쁜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고는 어떤 경우엔 좋은 사고도 있고 나쁜 사고도 있는데, 망상은 어떤 경우든지 그것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려서 끊어내버려야 될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명심해야 되는 것은 사고라고 하는 생각하는 것에는 반드시 감정이 끼어든다.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감정들이 휘젓고 다니면서 개념을 만들어내는 위험한 활동들이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망상 많이 피우면 엉뚱한 짓들 하게 되는 거라.
자! 그렇게 이해했으면 사고하는 것-생각하는 것에도 우리가 주의를 해야 되고, 망상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고하는 것에 적당한 수행법이 있습니다. 생각할 때.
어쨌든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우리가 똑같이 여섯 가지 인식하는 기능 중에 하나입니다. 보면 우리가 본다고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문(門)에서 뭔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기능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거 보기 싫다고 눈을 닫을 수는 있지만은 눈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안 할려고 하더라도 안 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좋은 방향으로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 기본이 나쁜 생각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라. 남을 해칠려는 생각, 또는 내가 성냄이 일어나는 생각들, 또는 내가 욕망이 일어나는 것들, 이런 것들은 빨리 끊어버려라. 그것이 먼저 못 일어나게 해야 된다는 거라.
그대신에 마음은 선한 사고를 일으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려고 하고,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질려고 하고, 남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하고, 이런 쪽의 마음들을 자꾸 가질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처음에 수행할 때 대부분 사람들이 자애수행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생각이라고 하는 사고는 죽을 때까지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그 생각이라고 하는 사고는 선한 사고가 먼저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애명상들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먼저 만들어주는 것이 일차적인 것들입니다.
또는 사고를 할 경우에 우선 내가 이 생각을 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는가 하는 것들을 먼저 염두에 둬보십시오.
또는 이런 생각으로 인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익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의 사고 나의 생각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고는 해도 괜찮습니다.
또 하나 세 번째는 그렇게 하는 사고들이 지금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반드시 판단을 해야 됩니다. 생각하는 게 지금 별 필요 없는 거 같으면 아예 하지 말아야 되는 거고, 지금 필요한 것 같으면 그리고 그것이 선한 사고일 것 같으면 지금 해야 되는 것들이라. 그것을 일부러 끊어낼 필요는 없다는 거라. 필요한 것들이고 선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 번째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이 아, 지금 내가 이 생각이 지금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반드시 염두에 두도록 하라.
적어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이 생각이라는 것이 감정에 휩싸여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 주인이 되어있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있지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되는데, 감정이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거라.
감정이 주인이 돼버릴 것 같으면 갈애는 더욱 더 증폭돼버립니다.
뭘 봤으면, 감정이 주인이 되어있으면 그것을 가질려고 하고,
뭘 봤으면, 감정이 주인이 되어있으면 아름답다고 하고,
뭘 봤으면, 감정이 주인이 되어있으면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 거고,
계속 그 식으로 살게 된다는 거라.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감정이 나의 인생을 사는 형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갈애는 더욱더 늘어나버립니다. 윤회의 사슬을 더욱더 단단하게 스스로 만들어 줄 뿐 아니라 해탈하고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자꾸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 사고하는 것들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아라는 거라. 삼가하라는 거라.
그런데 말이 쉽지, 그걸 안 할 방법이 어디 있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 하게 돼있는데.
그런데 적게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처음 수행을 할 때 자애수행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부정관 같은 것을 하게 됩니다. 또는 백골관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뭐냐면 견해에 대해서, 대상에 대한 견해를 바꾸기 위한 것들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사고가 전부 날조를 하기 때문에 보면 예쁘면은, '예쁘고 아름답다' 하고, 그냥 '보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에 '아, 가까이 보고 싶다' 이렇게 자꾸 바뀌게 된다는 거라.
그럼 이 대상을 봤을 때 예쁘고 아름답다고 보지 말고, 더러운 것이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것 같으면, 그 다른 이면을 볼 거 같으면은, 적어도 이것에 대한 집착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아무리 오늘 깨끗한 옷 입고 깨끗하게 씻고 와서 예쁘게 보일지라도 아, 저 사람 하루라도 아니면 이틀이라도 안 씻고 있어봐봐. 옷은 꾀죄죄해지고 얼굴은 금방 더러워지지. 이 모습을 보고 그걸 떠올려야 된다는 거라. 부정하고 깨끗하지 못하다는 걸. 그걸 떠올려야만이 적어도 이 사람을 보고 내가 아름답다 아니면 추하다 하는 생각들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대상에 대한 견해들을 바꾸어라.
또는 화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화의 다른 것들, 자애의 생각으로 바꾸어주어야 됩니다. 이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화가 일어났다. 그럴 것 같으면 화를 일으켜야 될 것이 아니고, 이 대상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가지라는 거라.
또는 이 대상이 항상 내 옆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 같으면, 이 대상도 반드시 부서지게 돼 있고 무너지게 돼있다는 무상한 성품으로 보라는 거라. 그래서 이것이 누가 가져가든 아니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부정한 성품으로 보고, 자애의 성품으로 보고, 무상한 성품으로 봐야만이 이 대상에 대한 견해를 바꿀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감정의 노예로 살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야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고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정리를 좀 해보면,
생각이 일어날 때, 안 좋은 생각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것을 선한 생각으로 바꿔라. 그리고 그 안 좋은 생각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내가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아, 이것은 날조된 것이다' '이것은 감정의 노예로 살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이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 위험성을 자꾸 떠올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들은 큰 생각들이 아닐 것 같으면 무시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니면은 그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좋고, 그리고 수행 중에 일어나는 자잘한 생각들 그거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아예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안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무시해버리고 놓아버리면 돼. 다른 대상에다가 마음을 기울여버리면 돼.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 배를 관찰하는데 그냥 마음을 기울여버리면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수행을 안 하는 사람일 거 같으면 그 잔잔한 생각들 별 필요 없는 생각이 일어날 거 같으면 경전을 암송하면 됩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환희심이라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이 생각은 어떤 원인으로 일어났는가 하는 것들을 잘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여기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탁 강하게 일으키고 내가 지금 좌선수행을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좌선수행 동안에는 배를 관찰하는 것이 나의 일이지 이 생각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다 하고 딱 판단하고 강한 노력을 갖다가 기울여야 됩니다.
나의 힘이 강하면 생각은 사그라들어 버립니다.
이게 인제 오늘 한 대략적인 것들입니다.
첫 번째, 사고라고 하는 생각은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그 개념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인식에 따라서 날조하게끔,
자기의 방식대로 생존욕구에 인해서 날조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개념들은 감정하고 딱 결합을 한다는 거라.
그리고 망상을 계속 즐기고 망상을 하는 것은 이것들이 번뇌를 일으켜서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하고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가 있다는 거라. 선한 사고, 선한 생각들로. 그리고 그렇게 길을 들여가야 만이, 내가 나의 주체가 되어서 살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감정의 노예가 돼서 그것이 지배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은 사고와 망상 또 감정에 대한 연결고리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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