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팔정도) (20140701)

담마마-마까 2021. 7. 26. 08:55

https://youtu.be/zytpDHModZ4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팔정도) (20140701)

 

··· 선원 자리를 보러 갔는데, 두군데 다 안되면 더 좋고. 서울에서도 지금 보러 다닌다는데, 말을 안 들어 서울도. (수행자 대답 : 두군데 다하면 되겠죠)

내가 손오공도 아니고 뭐 왔다 갔다 못하는 거고.

 

저번에는 괴로움의 소멸의 특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보통 그걸 팔정도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팔정도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감사해? 대부분 보면 “아이고, 고맙다” 이러고 있어요?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사람들이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좋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윤회를 뛰어넘는 길로 가지 않고 오히려 윤회하는 길로써 계속 쳇바퀴를 돕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게 있었어요. 출가한 스님들은 일곱 번 출가했다가 환속하고 출가했다가 환속하고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한번 출가 해갖고 환속하고 나면 다시 출가를 못하는 게 아니고 일곱 번까지 그렇게 할 수가 있거든.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재가생활을 하면서 너무 힘들고 하니까, 출가한 스님들은 만날 놀고 먹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아, 저거 너무 좋다. 거기 가보니까 아이고, 먹는 것도 영 형편없고 차라리 내가 속세로 나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속세로 나가면 또 출가하고 싶고, 출가하면 또 속세로 나가고 그렇게 일곱 번 왔다갔다 합니다.

그래서 출가의 조건에 일곱 번까지는 출가와 환속을 반복해도 된다 하고 부처님이 허락을 하게 됩니다.

 

참 우스운 얘기지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행하는 행위들은 전부가 업을 쌓는 것들이라고 하는 거라. 뭔가에 집착하고 뭔가에 의해서 번뇌가 일어나고 이러면서 그게 업이 돼가지고, 그 업이 결국은 또 다른 결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 거라. 끊임없이 그렇게 되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금방 알 겁니다. 왜 "살아있는 것이 수행이다" 하는 것을. 살아있으면서 생각하고 또는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은 모든 걸 알아차리면 적어도 거기에 업을 쌓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업을 쌓지 않으니까 당연히 윤회하는 흐름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는 생각을 가져야만이 그에 맞게끔 내가 여러 가지들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끄달려 들어가버립니다.

온갖 불만들이 일어나고 온갖 집착들이 일어나고 그거 안 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살아가면은 그런 윤회를 끊는 길들을 걸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르게 걸어가는 길인데 그 길로 안 갈려고 그러는 거라.

 

물론 예류과에 이르고 불환과에 이르고 또 아라한과에 이르고 하는 것이 출가를 하면 좀 더 집중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빨리 갈 수 있는 길일지 몰라도, 그것도 자기가 안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안하고 엉뚱한 짓하고 있으면 재가생활보다도 더 못하게 되는 거고, 또 재가생활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열심히 할 것 같으면 출자가 보다도 훨씬 빨리 그 길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사카 같은 경우에는 일곱살에 예류과에 이르렀어요. 재가생활 하면서.

그러면서 열아홉살인가 스무살인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결혼해가지고 스무명이나 되는 아들 딸을 낳았거든. 그러면서 장수를 누렸어요. 수행으로 인해서 에류과에 이르렀다고 해가지고 재가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예류과에 설혹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재가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못하는 것은 아닌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수행하는 것은 출가하든지 절에 가서, 이런 선원에 와야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크게 오해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 하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팔정도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가장 좋은 게 이 윤회의 흐름을 탁 끊어버리는 게 가장 좋습니다.

간단합니다. 12연기가 어떻고 저떻고 다 몰라도 됩니다. 여러분들이 모르기 때문에 윤회를 하는 겁니다. 이 몸에 대해서 모르고 이 마음에 대해서 모르고, 그러니까 몸과 마음에 대해서 모르니까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러다보니까 업을 쌓게 되고 윤회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되면은, 그걸 분명하게 보게 되면은 윤회의 흐름을 탁 끊어버립니다, 거기서.

더 쌓을 게 없는데 업을 짓지 않는데 그게 끊어지지, 안 끊어져? 끊어져버리지. 다른 거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윤회의 흐름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 하는 생각들을 항상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여섯 가지 문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팔정도를 "완벽한 적멸(寂滅)에 이르는 이륜마차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 선원에 올 때 지하철을 탔든 버스를 탔든 타고 오면서 이렇게 보면 시끄럽습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얘기하고, 그러니까 나 외에 여러 사람들이 같이 공유하는 곳에는 항상 그런 시끄러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적멸이라고 그랬습니다. 고요하다는 거라.

그 차 안에는 고요하다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 배우는 사람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고요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보고 왕들이나 사람들이, 우째 저렇게 부처님이 뭐라하지 않아도 저렇게 떠드는 소리 하나 없이 숨소리 하나 안 나고 저렇게 고요하냐 합니다. 왜 그렇게 적멸함이 유지가 되겠어요? 바른 마차를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차를 타고 있을까? 지금 살아가고 있으면서.

항상 집에 가면 다툼이 있고 하면 여러분들은 다툼의 마차를 타고 있는 겁니다. 또는 항상 사람들하고 모여 있으면 자기 자랑하기 바쁘면 자만심이라는 마차를 타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마차는 그런 마차가 아니라는 겁니다. 고요하고 완전하게 쉬어버린 그런 마차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그 속에서 잡다한 것들이 일어나지를 않고, 단지 일어날 때는 내가 그 진리를 알면 아, 내가 진짜 이 진리 좋다는 마음이 일어나서 말을 하는 거, 그 정도밖에는 없다는 거라.

 

가끔씩 한국에도 그런 거 있죠?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오도송(悟道頌) 하는 거. 부처님 당시 때 뿐아니라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르면 오도송이 떠오릅니다. 오도송이라 해서 오동나무가 어쩌고 저쩌고 해서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 이 진리가 진짜 나를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아! 이것에 대해서 내가 확신을 가졌다. 더 이상 나는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그냥 이 길로 간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아! 이제 내가 해야 될 것을 다했구나.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집을 짓지 않는구나. 나는 이제 이 살아있는 이 몸으로써 해야 될 일들을 전부 다 마쳤다." 하는 그런 말들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패턴들로 합니다. 거의 비슷한 얘기들을 합니다. 오도송이라 해서 이 오도송, 저 오도송 틀린 것이 아니고.

그런 소리들만 들릴 뿐이지 그 속에는 어떤 것도 들리질 않는다는 거라.

 

말을 해야 될 때는 법에 맞게끔 말을 해야 되는 거고, 행동할 때는 법에 맞게끔 행동을 해야 되는 것이고, 생각을 할 때도 법에 맞게끔 생각을 해야만이 그것이 부처님의 마차를 탄 겁니다.

어떤 모임에 있든, 그리고 가족과 같이 있든, 어떤 상황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법에 맞게끔 행해야만이 그 속에서는 오도송과 같은 것들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법에 맞지 않으면 침묵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바른 마차를 탔을 때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 보내고, 오욕락에 빠지는 일들을 자꾸 하고 그럴 것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 마차를 버려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팔정도를 걷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완벽한 적멸의 마차를 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빨리 그 마차를 버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팔정도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맛을 좀 봐야됩니다.

이게 맛있는지 안 맛있는지를 알아야만이 그 길을 확신을 가지고 갈 수가 있습니다.

집중수행을 여러 차례 해본 사람들이나 또 그렇지 않고 수행에서 아, 진짜 이 수행이 나에게 좋다 하는 것을, 그런 기쁨들을 맛보고 행복감을 맛본 사람들은 그 맛으로 인해서 다시 또 끌리게 됩니다. 이때까지 맛보지 못한 맛을 봤으니까. 그래서 더욱더 수행하려는 마음들을 일으킬 수가 있고 또 거기에 맞게끔 생활들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팔정도의 길을 걸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맛들을 보도록 해야 됩니다. 그 맛은 이때까지 내가 맛본 것보다도 훨씬 맛있는 비교할 수 없는 맛들입니다.

 

선정으로 인해서 그런 맛을 봤든, 아니면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봐서 그러한 맛을 봤든, 그러한 맛을 보면 그 맛에 끄달려서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수행들을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보면 의심을 하게 됩니다.

아, 이거 내가 계속해도 될까? 아니면 수행지도 해주고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에 대해서 계속 따라가도 될까?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이러면서 자꾸 의심을 가지고 회의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본인이 그 맛을 보지 못한 것이고, 그 맛을 보지 못한 것은 그마만한 바른 방법으로 바른 노력을 하지 못한 겁니다.

 

방법이 바르고 바르게 노력을 했으면 반드시 누구든지 그 맛을 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스승도 필요없고 거기에는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적어도 스승들은 부처님이 가르친 것들만 전하지, 부처님이 가르치지 않은 것들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따로 자기의 견해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스승이 전해준 것은 부처님이 전해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그 길을 믿고 따라야 됩니다. 그래서 그 바른 방법으로 자기 스스로 노력을 하면 됩니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노력을 하게 될 때, 그리고 그것들을 놓치지 않게 될 때 적어도 그 맛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팔정도로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것 정도는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팔정도에 대해서 그 특징들을 이해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길을 걷기도 힘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조건들을 채울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4가지 특징]

이제는 「팔정도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네 가지 특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가 '니야-(niyyān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출리(出離)'라는 뜻입니다. '탈출해버린다. 해방으로 이끈다.' 하는 겁니다. 이게 더러운 줄을 아니까 더러운 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준다 하는 겁니다. 그걸 '니야-나'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실은 수행에 대해서 확신이 들 것 같으면 다시는 의심 안 합니다. 그러면 확신이 든 것이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줍니다.

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 그 상황에서 견해라는 것들을 알게 될 것 같으면 그 견해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줍니다.

또는 여러 가지 매달리고 있는 것들 아, 이것이 바른 방법이고 이 방법대로 해야 된다 하는 것도 거기에 매달려가지고 집착해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꼭 그 방법에 매달려있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고, 탈출하게끔 하는 거는 아는데,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류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수행자 대답 :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그거는 예류과에 이르렀을 때 없어지는 번뇌이고, 예류과에 이르고 나서의 결과이고.

예류과에 이르기 위한 조건을 얘기합니다.

(수행자 대답 : 보시와 지계)

보시는 필요 없습니다. 지계는 필요합니다.

(수행자 대답 : 무상·고 ·무아로 통찰하는 것)

그거는 수행할 때 언제든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확신들을 가지도록 하는 것!" 그걸 끊임없이 자꾸 해야됩니다.

 

왜 그럴까? 가끔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신장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이 신장의 힘도 커지고 작아지고 합니다. 자기 힘이 세면 신장의 힘도 그마만큼 셉니다. 그래서 나를 보호해주는 힘들도 그마만큼 강해집니다. 그래서 어떠한 위험이 오더라도 그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됩니다. 벗어나게 됩니다.

그 신장은 뭘 얘기할까? 우리 선원에는 없나? 어디 벽화에 가면 신장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담마를 얘기합니다. 법을 얘기합니다.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법을 따라서 행하다 보면 그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법에서 벗어난 것들은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런 위험이 설혹 닥친다고 하더라도 이 일로부터 피해지게 되는 거라.

 

부처님에 대한 확신들은 아주 간단합니다.

저분 이상 가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과거를 둘러보고 현재를 둘러봐도, 앞으로 미래를 또 둘러보더라도 저분 이상 가는 분은 없다는 거라. 저분 이상 가는 분이 있으면 지금 이생에는 다 그분 따르고 있겠지.

실제로 우리와 같은, 똑같은 눈을 지니고 귀를 지니고 코를 지니고 마음을 지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에 도달한 분입니다.

그 위에는 없습니다. 외부 세계에 온 것도 아니고, 저 멀리 있는 신도 아니고, 우리를 조정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분도 아니고, 딱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우리와 똑같은데, 부처님이 코가 네 개가 아니었고, 우리가 코가 네 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똑같은 부처님과 같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내가 가야 될 아주 이상적인 표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보다 더 뛰어난 표본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때 그 길을 따라갈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확신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상가도 마찬가집니다.

상가는 개개인의 스님들을 얘기할 수도 있지만, 도와 과에 이른 성인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 성인이 되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그분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야 되는 것이지, 그분들이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붓다·담마·상가에 대해서 확신들을 자꾸 가지게 될 때 예류과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러기 위해서

내 몸과 마음과 그리고 말들을 조절해주는 '오계'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법회든지 여러분들 법회할 때 여러분들에게 오계를 줍니다.

그거 그냥 읽고 말아라고 하는 게 아니고 그거 지키라는 뜻입니다. "술 먹지 말아라" 할 거 같으면 술먹지 말아야 됩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할 것 같으면 어떠한 조건이 돼도 거짓말을 해선 안 됩니다. "생명들 죽이지 말아라" 할 것 같으면 기어다니는 개미 하나도 섣불리 죽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갖추지 않고 자기가 니야나(niyyāna), 고통스러운 것으로부터 해방하겠다? 아니면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겠다? 이 문제로부터 답을 찾겠다? 그건 요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 팔정도의 길을 따르게 될 때, 삼보에 대한 확신도 가지고, 오계도 지키고, 또 배워야 될 것들은 열심히 배울려고 하고, 또 수행해야 될 것은 수행을 하게 되고, 이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은 팔정도의 특징이 탁 나타나게 됩니다. '아, 내가 여기서부터는 벗어났구나!'

 

처음에 스님이 태국에 갔을 때, 왜 이 탁발을 이렇게 해야 되는지 몰랐어요.

탁발을 하면 바리때 안에 모든 음식이 섞여버립니다. 그럼 이게 무슨 맛인지 몰라. 그리고 뭐 따뜻한 것들이 없어. 만날 찬밥에 섞여있는 것들을 먹어야 돼. 그러니까 아, 하루 한끼 먹는데 좀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는 거라, 탁발을 하면. 그런데 탁발을 안 나갈 수가 없거든. 아픈 스님들 외에는 주지스님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탁발에 예외가 될 수가 없어요. 다 나가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나가는 건데.

그런데 섞여서 먹으니까 처음에는 그걸 일일이 또 골라냅니다. 그걸 또 맛있는 거 먹을 거라고. 맛없는 거는 또 안 먹고. 처음에는 비린 것도 못먹고 하니까 비린 것도 안 먹을려고 하고, 나중에는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골라내고 하다 보면 아이, 귀찮아 그냥 먹어버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음식에 대한 탐욕이 탁 끊어져버립니다. 섞어먹으니까, 음식에 대한 탐욕이 탁 끊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지금도 음식이 반찬들이 그릇별로 나오더라도, 이게 맛있고 이게 더 맛없는 거라는 건 알지만 맛있는 거라 해서 더 먹고 맛없는 거라 해서 안 먹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똑같아집니다. 이미 탐욕이 탁 끊어져버립니다.

탁발이라는 걸 통해서 꾸준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 탐욕이 탁 끊어집니다. 그러다가 음식량을 조절하는 것도, 탁발해온 걸 처음에는 안 돼. 내가 먹고 싶은 게 요만큼 있으면 거기에서 3분의 1 탁 뗍니다. 처음에는 아까워. 3분의 1 못 떼어내. 그런데 3분의 1을 과감하게 떼어내고 나서 나머지 3분의 2만 먹고도 하루 생활이 충분히 가능하거든. 3분의 1이 더 많아지면 이것으로 인해서 훨씬 번뇌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아, 이거 나한테 적절한 양이 3분의 1을 떼어내는 것이구나 하는 걸 압니다.

그러니까 3분의 2만 먹으면 번뇌도 없고 몸도 가벼워지고 수행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는 거라. 하루를 지내더라도 몸에 이상이 없고. 자기의 적정한 양을 딱 알게 됩니다.

그럼 그다음부터는 누가 많이주든 아니면 바리때에 많이 있더라도 자기 먹을량 외에는 딱 덜어내버립니다. 그 이상 쳐다보지도 않는 거라. 적정한 양이 딱 정해져버리는 거라. 그게 탁발의 효과라는 거라.

"출가자들은 이러한 길을 가라. 탁발을 하면서 살아라." 하면서 그 길을 가르쳐줬습니다. 그게 바른길이라고. 그럼 그 길을 따르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나는 음식에 대한 집착, 탐착으로부터 탁 벗어나게끔 되는 거라.

 

팔정도의 길은 그와 같습니다.

"재가자들은 삼보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오계를 지키도록 하라"

그럼 그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냥.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그거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내가 탁 벗어나 있는 거라.

 

그게 팔정도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특징, '헤뚜(hetu)'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원인들 얼마나 만들고 있어? 필요한 원인들을 반드시 만들어야 됩니다.

바르게 노력하는 원인들은 짓고 있습니까? 선한 행위 자꾸 더 열심히 할려고 하고, 선한 마음이 아직 안 일어났으면 아, 선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애의 마음을 자꾸 가지고, 또 남에 대해서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도 가지고, 평온한 마음들 이런 마음들을 계속 유지할려고 해서 선한 마음들을 일으킬려고 하고, 그러고 있습니까?

악한 것들은 자꾸 끊어낼려고 하고, 일어나지 않는 것들은 안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되고, 바른 노력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 노력들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한 원인들을, 그러한 조건들을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음을 증장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들이 있습니다.

그걸 '다섯 가지 힘'이라 해서 '오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도 필요하고, 확신도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고, 또는 집중하는 힘도 필요하고, 알아차리는 힘들도 필요하고, 그것들을 기르고 있느냐는 거라. 그 원인들을 그 조건들을 자꾸 만들고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 다섯 가지 조건들이 균형이 맞게끔 하고 있느냐는 거라.

 

만날 법문만 듣고 수행은 안 할려고 한다? 그러면 뭐 우짜겠다는 얘기라?

또 어떤 사람은 법문은 안 듣고 수행만 할려고 한다? 그건 또 어쩔려고 그러는 거라?

믿음이 강하면 지혜는 더불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지혜가 강하다고 해서 믿음도 더불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열심히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들은 필요하지만,

노력하는 힘들이 용을 쓴다고 과하게 될 것 같으면 집중하는 힘들도 같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발란스가 깨져버립니다. 집중은 오히려 안 돼버립니다. 붙잡을려고 할 거 같으면 집중은 안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하는 힘들이 필요한 것이지, 그래야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중과 노력은 발란스를 맞춰줘야 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힘, 마음을 향상시켜 주는 능력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들이 팔정도의 길을 간다고 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건 하고 있어야 될 거 아니라.

 

또는 칠각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곱 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조건들은 개발시키고 있느냐는 거라. 얼마나 많아, 조건들이. 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이. 그러면서 그냥 책으로만 붙잡고 있는 거라. 그걸 실제 자기가 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헤뚜(hetu)라고 하는 것은 실천했을 때 일어나고 갖추어지는 것들입니다.

아라한에 이르기 위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은 반드시 갖추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은 팔정도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팔정도의 두 번째 조건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는 간단하게 얘기하면

세 번째는, '닷사나(dassana, 관찰)',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를 관찰하는 힘이 생기는 것.

 

그다음에 네 번째, '아디빠띠(adhipati)',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간다. 그게 네 번째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