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를 다스리는 법 (20140624)
오전에는 '나짜 쿳당 사마짜레 (Na ca khuddāṁ samācare)' 라고 하는 빨리어 구절을 가지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소한 허물도 범할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빨리어 구절입니다. 사소한 것 같으니까 그냥 지나쳐 버리고 또는 그걸 해도 큰 문제는 없으니까 의식하지 않고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게 원인이 돼서 항상 높아지는 쪽으로만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명예를 바라는 것, 또는 필요 이상을 가지려고 하는 집착이 생기는 것,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로 인한 허물들을 자꾸 지우면서 그렇게 됩니다.
오늘은 분노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볼게요.
성내면 좀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나를 깐족깐족 건드렸다 그러면은 한번 확 하고 나면 뭐 그냥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있고, 그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 속이 좀 후련한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밖으로 표출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밖으로 표출되는 경우들은 좀 후련한 느낌을 가지는 경우들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르게 안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노라는 게.
편의점에 가서 내가 원하는 라면을 사러 갔는데 라면이 똑 떨어졌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왜 편의점에 라면이 없느냐고, 떨어졌으면 즉각즉각 보충을 안 해놓고 없느냐"고 이렇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는 만날 이래. 가면 항상 내가 원하는 건 없어" 하면서 자기 스스로 짜증을 내고 자기 안으로 분노를 삭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밖으로 표출되는 것보다 안으로 표출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경우들이 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안으로 표출하는 것이 표출할 데가 없으면 밖으로 한꺼번에 터져버립니다.
분노는 안으로 표출하든 밖으로 표출하든 항상 쾌감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분노는 옛날 스님들은 뭐라고 그랬느냐면 총은 잡아당기면 자동적으로 총구를 통해서 총알이 탁 나가는 자동시스템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탁 나가는 것과 같이 탁 자극만 있을 거 같으면 착 잡아당겨가지고 총알이 나가서 발화되는 이런 "자동발화시스템과 같다" 하고 여겨라고 그렇게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마만큼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항상 분노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기는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자동발화시스템에 인해가지고 착 댕겼다는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 총알은 나간 것은 항상 상처를 입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탁 댕겨지면서 총알이 나가면 다른 사람을 해치든지 아니면 자기를 겨누면 자기를 해치든지 그럽니다. 그래서 당길 때는 시원할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은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분노라고 하는 것은 끝은 꿀이 달려져 있는데 뿌리는 독이 묻혀져있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향해서 분노를 일으켜서 쾌감을 일으켰든, 아니면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공격을 해서 그 스트레스를 잠재우려고 했든, 어떤 경우든지 두 가지 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독으로써 돌아온다는 얘깁니다.
그걸 잘 알 거 같으면, 잘 이해할 거 같으면 '아,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참 내가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화를 내는 경우는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자극이 항상 있고 없고,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화로써 반응을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먼저 인식을 했다고 치자. 그래서 스스로 경각심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가지고 일어나는 화가 아, 화가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리면 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화는 분명히 알았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안 사라질까? 나는 항상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또 뭔가 욕심부리면 욕심부린다고 알아차리고, 걷는다고 알아차리듯이 그렇게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욕심부리는 것은 알아차리면 금방 사그라들 수 있는데, 성냄은 다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동발화장치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내가 당겼다고 해가지고 안다고 해가지고 이 총알이 안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총알이 나가는 시스템이라는 거라. 이 몸체가 있는 한에는 총알은 나간다는 거라. 그러면 몸체를 구부려 버리든지 몸체를 없애버려야 이걸 당기더라도 내가 화를 일으켰다고 알아차리면 이게 즉시 화가 사라져버려서 당기는 게 스톱이 돼버릴 건데, 그렇지 않다는 거라, 화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노스님들이 항상 "화는 자동발화장치와 같다."
왜? 이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나'라고 하는 것을 일으키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수행을 통해서 무아를 경험하고, 또는 아주 빠르게 변하는 현상들로 인해서 '아. 이게 괴로움이구나' 하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리하더라도 완전하게 성품들을 알아서 내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발사된 것들은 일정부분은 영향을 미치게끔 된다는 거라.
그걸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마나(māna)가 있을 거 같으면 화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감정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과 연결만 시키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감정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연관이 딱 돼서 결합이 딱 돼버릴 것 같으면 이놈의 감정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폭발력이 커져버린다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이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은, 화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것은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화'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지 '내가 화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화가 일어났음' 하고 '화'하고 '나'하고는 관계없는 상태로써 그냥 '화' 자체만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게 화가 일어나서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도 사라져버리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나'가 개입돼버릴 것 같으면 화를 일으키는 원인도 생겨나고, 화를 일으키는 나 자신도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화가 더욱더 증폭될 수밖에 없는 거라.
'저놈 때문에 내가 화가 일어났다' 그러면 화가 다시 '미움'으로 바뀌어버리는 거라. 그 화가 일어나는 것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내자신에 대해서 '원망'하는 것들도 일어나게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명칭을 붙이든 명칭을 붙이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화면 화가 일어나는 것만, 거기에는 화를 일으키는 나도 없는 거고, 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 저쪽 상대방도 없는 것들입니다. 단지 일어나는 화만 있다고 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화가 오래 지속 안하고 좀 있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라고 하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조금씩은 있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금방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동안에는 증폭하는 것은 잘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일정부분은 유지가 돼나갑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원인이 있습니다.
화가 지속되고 화가 일어나는 것이 또 화가 자동적으로 발화되는 데에는 그 '마나(māna)'라는 것 외에 또 다른 원인이 하나가 더 있다는 거라.
'상요자나(saṁyojana)'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박이 돼버렸다'.
자유롭게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몰라. 자유롭게 되는 것들을.
예를 들어볼까요. 새가 여기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그물을 탁 던져서 그 새를 탁 잡았다, 그 그물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새가 과연 그중에 있을까? 대부분은 보면 날개짓을 파닥여가지고 그물을 빠져나갈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빠져나갈 수 있는 그물을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날개짓을 퍼덕여야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부리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부리로써 그 그물을 쪼아가지고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못 일으키는 거라. 그런데 새는 그물에 탁 갇혀놓으면 열마리면 열마리 다 파닥거릴 생각을 하지 그것을 쪼을 생각을 못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속박되면 안 그럴 것 같아요? 탁 어디에 속박되고 나면 지가 속박된 줄을 몰라요. 좋은 줄 알지. 그리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고 하면서도 바른길로써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요.
거의 매일 한 두통화씩 전화 오는 분이 있어요. 정신 요양원에 계시는 분인데, 올 때마다 똑같은 말을 합니다. 힘들어 죽겠다는 거라.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는 거라. 그래서 남들 하듯이 '관세음보살' 하면서 절하고, 염불을 하고 이렇게 한다는 거라. 그래도 스님 나는 힘들어 죽겠다는 거라.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한번 전화가 왔었어. 전혀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 거기서 그렇게 힘드니까 스님들이 기도해라 하고 시켰겠지. 그러다가 안 되니까 누군가를 통해가지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그거 하지 말고 지금 부처님을 떠올린다고 해도 부처님에 대해서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으로 인해서 환희심을 일으키지도 못할 거고, 관세음보살도 꼭 마찬가지일 거고, 그러면 지금 괴로우면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생각만 가져라. 딱 그거 하나만 가져라. 밥을 먹을 때든 걸어갈 때든 뭐를 하든 어떤 때든 항상 '아,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거기에만 딱 빠져있어 봐라는 거라.
그런데도 매일 두차례씩 전화가 와요. 방법을 가르쳐줘도 그 방법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왜 그럴까? 실제로 내가 그렇게 얘기했거든 "딱 일주일만 해보십시요" 그런데 지금 벌써 2주일이 넘었는데도 매일 같이 똑같은 말만 나도 하고, 그분도 똑같은 말만 해. 자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얘기해준 것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이거는 그냥 스페셜로 하고 있는 거라.
그러다가 이거 해가지고 도저히 안 되면 힘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한두번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방법을 알려줘도 그 방법대로 하지를 않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방법조차도 모릅니다. 잘못된 방법들만 계속 쫓아가는 거라.
그걸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방식,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들에 딱 얽매여 있기 때문에.
얼마 전에 떼자니야 스님이 와서 수행을 하러 많이 가서 수행들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있는 떼자니야 스님을 모시고 있는 스님이 하루는 전화가 왔어요.
전화가 와가지고 “스님, 사람들이 많이 와가지고 참 환희심이 납니다” 하는 거라.
“그래? 그럼 수행 열심히 해라. 어쨌든 이판에 도와 과에는 이르러라 이!” 그러고 말았어.
“도와 과에는 이르지 못해도 어쨌든 지혜 몇 단계는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빵빵 큰소리를 치더라고.
그래서 “그래, 그렇게 한번 해봐라.” 하고 잊어버렸는데, 또 며칠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어요.
전화가 와서 “아이고, 스님 사람이 많으니까 수행이 더 안됩니다.”
수행들 열심히 할려고 갔는데 수행이 더 안된다는 거라.
“그래 며칠 전에는 아라한이 될 듯이 그래쌌드만 와 또 수행 안 된다고 그러노?”
핑계들을 자꾸 찾고 있다는 거라. 잘하면 잘하는 데에 탁 얽매여 버리고, 못하면 못하는 원인들에 탁 얽매여버려서 그것들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끔 하지를 못하는 거라. 그런데에 자꾸 매이면 버마에 가서 하더라도 꼭 마찬가지고, 태국가서 하더라도 꼭 마찬가지라. 가면 다 할 것 같지? 그러니까 오히려 거기 안 가면 여기서는 더 못해. 그러니까 평상시 때는 수행 못하고 그런 특별한 분 오면 가서 수행이랍시고 가서 하는데도 실제는 또 오히려 병만 들어 오는 거라. 크게 진척이 나아지지도 않고, 그래가지고 또 그분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고.
자신이 속해있는 것들, 자기가 해왔던 방식들, 그거 좀 버려버리면 안되나?
일러주면 일러주는 방법대로만 해보려고 하라는 거라. 저기의 방식대로 그렇게 해볼려고 하지 말고. 외부적인 조건이 어떻든 간에 그 조건 그냥 놔두면 안돼? 왜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속박돼가지고 영향을 받느냐는 거라. 내 수행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인줄은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사람들 많이 와서 환희심이 일어나면 거 뭐할 건데? 또 오는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수행이 잘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거 뭐할 건데?
그게 내 지금 수행하는 거하고 무슨 관계를 가지는데?
지금 하나를 얘기했습니다. 속박되는 것들을. 그런데 그 속박되는 것이 그거 하나만 있습니까?
속박되는 것들은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에 딱 속박이 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엷어진다고 하더라도 화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하나라도 자꾸 끊을려고 해보십시요. 속박되어 있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도 나에게는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견해, 그리고 의심하는 것, 그다음에 계금취-조금 전에 설명했던 그런 부분들입니다. 욕구, 지나친 성냄, 선정에 들고 싶어 하는 것들, 천상세계에 태어나고 싶어하는 것들,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는 것, 게으름 부리는 것들,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해서 흐리멍텅하게 지내는 것들.
이런 것들이 전부 자기 자신에게는, 수행하는 데에는 속박되는 것들입니다.
일단 거기에 속박되어버리면 대상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대상에 항상 휩쓸려버리게 됩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분노는 자기 혼자서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것에든 속박이 돼 있을 경우에는 분노는 항상 자동발화하게 됩니다.
그런 분노를 알아차릴 때 항상 우리는 주의해야 되는 것이 그겁니다.
결합되지 않도록 하는 것, 열 가지 속박되는 것에 결합 돼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것과 결합이 돼 있는지?
결합 돼 있는 것만 탁 끊어나가 보십시오.
내가 게으름 피워서 분노가 지속된다- 그러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해야 되는 거라.
내가 하는 방식으로 인해가지고 분노가 꺼지지 않고 있다- 그럼 자기가 하는 방식을 그냥 버려보라는 거라.
견해를 내세워서 그 견해로 인해가지고 충돌이 있어서 자꾸 화가 일어난다- 견해를 버려보라는 거라.
속박돼있는 걸 버려봐봐야 이걸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거라. 자기가 만날 하는 날개짓만으로는 그 그물을 벗어날 방법이 없어. 날개짓을 멈추고 그리고 자기가 잘하는 것들을 찾아내가지고 그것을 뚫고 나갈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차라리 어리석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덜합니다. 욕심을 가지는 것도 그것은 금방 자신이 잘못된 것을 알고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그런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한번 당겨지면 자동적으로 총구를 빠져나가는 겁니다. 이번에도 누군가 많이 다쳤고, 자기도 다치고 그랬대.
성냄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또는 일래과에 들기 전에는 성냄을 완전하게 몰아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끔은 만들어야 됩니다.
태국가서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새겨들었던 이야기, "성내는 자는 비구가 아니다!" 얼마나 내가 많이 울었는지 알아요? 내가 그게 성냄인 줄도 모르고 있는 거라.
성내는 자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성내는 자는 부처님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법을 아무리 듣고 아무리 수행한다 하더라도 성냄이 있을 것 같으면 부처님의 가족으로 그 품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꾸 새겨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성냄이 자아와 연결되지 않도록, 또는 속박됨과 연결되지 않도록 하고, 그 성냄이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하지 않도록,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만들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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