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허물도 짓지 말라. (20140624)
재물과 명성을 얻는 것, 물론 그것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허물을 지어서는 안됩니다. 필수독송자애경 - 까라니야멧따 숫따에 보면 '나짜 쿳당 사마짜레 (Na ca khuddāṁ samācare)' 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짓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상가 스님들이 서울에서 모여서 법문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때까지 쭉 내가 하다가 이번 달에는 법주 스님이 법문을 하게해서 처음으로 했어요. 법문이 끝나고 나서 누가 "스님, 바퀴벌레가 있는데 이걸 죽여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인제는 여러분들은 그거 질문할 대상이 못 되는 것은 알죠?
그래서 나중에 결론은 해를 끼치는 거는 죽여도 무방하다 하고 결론을 내리는 걸 잘못됐다 하고 내가 수정을 해주기는 했는데, 거기에 든 비유가 재밌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제 일이라고 그럽니다. 미국에는 집들이 우리 같은 아파트 생활들이 아니고 전원주택 같은 단독생활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풀과 나무가 많으니까 뱀이 자주 나타나게 됩니다. 대부분 뱀은 해꼬지를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큰 피해를 입는 건 없습니다.
스님도 태국이나 동남아시아에 있을 때 새벽에 탁발을 나가다 보면 내 자신도 모르게 뱀 옆을 지나갈 때가 있어요. 어떨 때는 뱀 꼬리를 밟을 때도 있고, 그때야만이 뱀이 나를 뭅니다. 그런데 독사한테 몇번 그렇게 물려도 내가 그 뱀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물어도 크게 내가 해꼬지를 당한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뱀이 그냥 자기 스스로 발걸음 소리를 듣고 물러가 버리든지. 그러니까 겨우 된다는 게 그정도 되는 건데, 사람들은 대부분 뱀을 보면 뱀을 쫓아낼려고 합니다.
가만히 놔두면 지혼자서 돌아다니다가 나가게 되는데, 그러니까 이 집주인도 뱀을 쫓아내기 위해서 휘발유를 뱀한테 확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휘발유를 뒤집어 쓴 뱀한테 라이타 불을 붙여갖고 툭 던져버렸어요. 뱀이 불이 붙을 거 아니라. 그 풀 속에 잔디밭 부근에 있던 뱀이 달아난 곳이 어디냐면 집으로 달아나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집이 가만히 있겠어요? 홀라당 타버렸지. 휘발유 묻은 벰이 온 데를 헤집고 다니는데 집이 안 타겠어? 그래서 뱀 하나 잡을려다가 그집을 홀라당 태워먹었어요. 참 작은 허물인데, 뱀을 해치고자 마음에서 일어난 작은 허물인데, 저거 뱀하나 내가 해친다고 해가지고 무슨 일이 있겠나 했는데도 큰일이 생겨나버립니다.
경전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에는 뿌리에는 독이 있고, 끝에는 꿀이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저놈 좀 잘못되기를 바라는데 그 사람이 진짜 잘못되면 고소하거든. 꿀이 있는 거라. 그런데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에게 독이 돼버리는 거라.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는데 자기 마음은 불타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그래서 뿌리에는 독이 있는 거라.
그 독이 자기 자신한테서 생겼으니까 어떠한 식으로든 그 독은 퍼져나가게 되는 거라. 자신을 태운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사람들은 그 끝에 달려있는 고소함만, 꿀이라는 것 때문에.
조그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쾌감을 가져온다고 하는 일이 생겨납니다. 왜? 아, 나는 저 상태까지 못 이르는데 저 사람이 그 상태에 이르렀다 할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시샘하는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부러워하게 되니까 그 부러워하는 대상이 거기서 다른 상태로 될 것 같으면 기분이 좋거든.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적이 많았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법납에 인해서 선후배가 가려지게 됩니다. 그 선배들은 후배들을 가르치게끔 돼있는데, 딱 하나의 예외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두 존자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까지 이르르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출가한 스님들 입장에서는 인제 들어온 두 스님이 가르치는 스승의 위치에 있게 되니까 기분이 좀 안 좋은 거라. 샘이 나는 거지. 그래서 그런 사람들끼리 수군덕거리게 되는 거지. 그런데 수군덕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출가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깟사빠 존자라든지 앗사지 존자라든지 이런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들은 그러한 마음을 품지를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뒤에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출중하면 가르치는 스승의 위치에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한 스님들은 자기보다 후배인데 먼저 스승의 위치에서 존경을 받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시샘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누군가가 새로 출가하려고 할 것 같으면 사리불이나 목련존자에게 보내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가르칠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뒤에 온 후배들은 뭔가 조금 이상하게 보이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얘기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 시샘하는 스님들을 불러가지고 왜 그렇게 했느냐 얘기를 해봐라. 얘기를 안 합니다. 세 번을 물어봤는데 세 번째 물어보면서 그럽니다. 너희들이 말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너희들은 상가를 분란시키려고 하는 자들로 간주해서 여기에서 쫓아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얘기를 해봐라.
그때사 얘기를 합니다.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우리보다 늦게 출가를 했는데 어째서 저 둘이는 특별 대접을 받아가지고 저렇게 우리보다도 더 제자들을 많이 가르치고 또 부처님 법을 대신해서 설해주는 위치에까지 이르렀고 왜 그렇게 됩니까?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찾아서 사리불과 목련존자에게 갈 사람들을 내가 데리고 와가지고 내가 가르칩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물어본 게송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너희들이 스승의 위치에 있고 싶고 존경받고 싶다고 하는데, 너희들이 그 위치에 도달했느냐, 아니냐?
여기 어머니 있고, 아버지 있죠? 어머니 아버지 위치에 도달해있는 상태입니까? 어머니의 위치에서 아버지의 위치에서 자식에게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걸 처음에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존경받을 위치에 도달해있는가? 아무 소리를 못하는 거라.
그러면은 너희들이 사용하는 말이 존경받기에 적당한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아닌가? 가르칠려면 뭔가를 말을 해야 되는데 그 말이 존경받기에 적당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거라.
또 물어봅니다. 너희들의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 도달해있는가, 아닌가?
청정한가, 아닌가? 욕심을 부려서 가르칠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건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뭔가를 보여주는 건지, 그렇지 않고 마음이 깨끗하고 고요하고 부드럽고 가벼워서 항상 청정한 마음의 상태로써 행하고 있는가 하는 거라.
마음에 탐욕과 분노가 있느냐, 없느냐?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있는가, 아닌가?
또 물어봅니다. 너희들은 올바른 수행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어봅니다. 네가 깨달았느냐, 아니냐?
아무것도 대답할 말이 없는 거라. 왜 대답할 말이 없겠어요? 남을 시샘한다는 거는 이미 깨달음 하고는 관계없는 거고, 시샘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마음이 성장하지도 못한 거고, 그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행하고 말하는 것들은 바른 방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른 거라.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또 마음의 일들 모든 것들이 바른 방법이 되지 못하는데, 오로지 다른 사람이 나를 존경해 줬으면 하는 마음, 존경받기를 바라는 것 때문에 지금도 행하고 있는 거라. 선배라는 이유로, 부모라는 이유로.
존경받는다는 것은 내가 존경받기를 바란다 해서 존경받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하는 것이지 내가 상대방에게 나에게 존경하시오 한다 해가지고 그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든지 존경하는 행위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자신이 존경받을 만큼 갈고 닦아서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존경하게 되는 거라. 그것이 법랍이 적든 아니면 늦게 출가한 사람이든 아니면 공부를 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든 아니면 가진 게 없는 사람이든 존경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겸손하고 모든 것들을 평등하게 대할려고 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게 될 때는 존경받게 됩니다. 존경받기를 바라게 되면 자신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고 존경받기를 바라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와 같이 일이 번진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아주 사소한 질투, 사실은 그 사실을 자기 자신은 질투로써 바꿔버린다는 거라. '나보다 늦게 출가한 사리불과 목련 존자다' 그거는 사실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저들이 존경받고 있는데 내가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질투를 하게 되는 거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될 것 같으면 자식한테 원망을 받게 되는 거고, 자식이 따르지 않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인데, 자기 자신이 그 위치에 도달할려는 마음을 먹어가지고 거기에 도달하려고는 하지 않고 어머니로서의 위치만 자꾸 내세우게 되는 거라.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반역했을 때 데와닷따를 따르던 스님들을 데려와서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재물과 명성은 출가한 수행자들에게는 불타오르는 불덩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재물과 명성을 탐하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가면 그 마을이 불타는 거와 같이 돼버린다."
마을에서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비구 자신이 지켜야 될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허물인 줄을 모르고 허물을 범해버리게 된다는 거라. 이 정도 허물이야 뭐 어떻겠나 하면서 그냥 범해버린다는 거라.
재가자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명성을 쫓고 재물을 쫓으면서 행하는 것들이 소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소소한 것들이 독이 돼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망치게끔 됩니다. 감당하기 힘든 상태에 도달하면 그 나무는 말라죽어버립니다. 위에 칡넝쿨이 가득 얹혀진 나무는 그 나무는 시원할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그 나무 자체가 칡넝쿨에 인해서 말라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재물과 명성을 바란다는 거라. 그러면서 지금의 조그만한 시원한 것 조그만한 단맛들을 볼려고 한다는 거라.
그렇게 저지른 사소한 것들은 여러분들에게는 독이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나짜 쿳당 사마-짜레- (Na ca khuddāṁ samācare)' 그렇게 얘기합니다. 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짓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쿳다(khudda)'라고 하는 것은 '작은, 시시함'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별 볼 일 없는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런 것 정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도 '나 사마짜레(Na samācare)' '그러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허물이 되는 것들은 하지 말아라'. 자기 자신에게 조그만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허물이 될 경우에는 행하지 말아라는 거라.
오계를 지켜라 할 것 같으면 오계를 지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거짓말은 괜찮겠지. 오히려 다른 편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주기 위해서 괜찮겠지 하고 저지르려고 한다는 거라. 그게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허물은 허물일 뿐이지 허물이 선한 것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법문, 아주 작은 시간의 수행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되게 해주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해야 된다는 거라. 한시간 동안 지금 좌선수행 할 시간이 없다고 지금 단 10분이 남아있다면 그 10분 동안 아주 소소한 시간이고 소소하게 선행을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걸 그냥 놓쳐버린다는 거라. 뱀을 해꼬지 할려는 사소한 허물이 집을 태워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집을 새로 짓게 만들어줍니다.
남들을 부러워하고 또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릴 때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경시하게 됩니다. 허물이 되는 것이면 사소한 것이라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이익은 수행에서의 이익 닙바나에 도달하기 위한 이익들을 얘기합니다. 그 이익이 되는 것이면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그것은 행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조금의 시간이 날 때, 조금의 선행을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 기회들을 놓치지 않도록 하고, 조그만한 허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는 큰 해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은 행하지 말아야 됩니다. 바르지 않은 것은 바르지 않은 법과 어울려지게 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드러나게끔 됩니다.
바른 법은 바른 법들과 어울려지게 됩니다. 그건 자신에게 큰 선물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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