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실천법의 방향과 부적합 (20150417.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17. 18:30

https://youtu.be/KEIdaxBNdds

* 실천법의 방향과 부적합 (20150417. 대구)

 

오늘 삼귀의 오계를 청할 때 게송을 잘못하는 부분이 있던데, 앞에는 '마양 반떼' 해놔놓고 '마양반떼 띠사라네나 사하 빤짜실라니' 그러고 나서 '야짜마' 해야 되는데 '야짜미' 하고 있는 거라. 왜 그러냐면 '야짜미'는 단수거든. 뒤가 단수이면, 앞에 '마양'은 복수거든. 그러면 앞에도 단수로 '아항 반떼' 그렇게 돼야 됩니다.

빨리어 문법은 앞에 주어가 단수이면 뒤에도 단수여야 되는 거고, 그런데 단수는 한사람이 할 때, 한사람이 계를 받을 때는 '아항반떼 띠사라네나 사하 빤짜실라니 야짜미' 이래야 되고, 여러분들은 여러 사람이잖아. 여러 사람이 같이 받을 때는 '마양' 하고 '야짜마'가 그렇게 해야 됩니다. 알겠죠.

 

자! 오늘 할 거 봅시다. 빨리어가 좀 어렵죠?

 

수행자 질문 : 저희들을 기준으로 안 하고 스님을 기준으로 해서 청할 때는 ...

스님 : 청하는 스님이 여러 사람일 때는 '실라완땃사'라고 안 하고 '상갓사' 이렇게 합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이걸 상가에 공양올립니다” 하고 할 때는 여러 스님들, 네 명 이상의 스님이 있을 때 상가가 되기 때문에 그때 '상갓사 데마'가 되는 것이지, 한 스님한테 공양 올릴 때는 그것은 어떤 경우든지 '상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마만큼 상가가 참 중요한 겁니다.

 

수행자 : 빅쿠상갓사는?

스님 ; '빅쿠상갓사'라는 것은 '비구 상가'라는 그런 뜻입니다. 지금 혼자 와있으니까 비구상가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실라완땃사' 라고 이렇게 합니다.

다음 주는 상가 스님들 오죠? 아마 네 분 이상이 오니까 그때는 '빅쿠상갓사'가 되겠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의 습성에 대한 걸 두 시간에 걸쳐서 얘기했습니다.

 

첫 번째 한 것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을 얘기했습니다.

여기서 습성이라고 하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탐·진·치가 강하고 아니면 또 다른 성향이 있고 하는 것은 그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뒤에 말하는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강하고 하는 것들도 마찬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하고 지혜하고는 또 다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성향들인 것이지 어떤 것이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쨌든 그런 습성들이 나쁜 쪽으로 형성되는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형성되는 것이 깨달음을 성취하기에는 용이하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나쁜 습관 많이 가지고 있으면 지가 깨달음에 이른다든지 아니면 좀 더 이생에서 행복하고 또 다음생에서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고 싶으면 빨리 그거는 바꾸어야 되는 것들이라는 뜻이라. 나쁜 성향들 나쁜 습관들이 많을 경우에는 그걸 빨리 바꾸고 좋은 습관으로 만들려고 자꾸 노력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예를 들면, 특히 해피스님 법회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봤을 때는 저거는 전혀 논쟁거리도 아닌데 되게 싸워요. 어떤 게 맞고 틀리고를 떠나가지고 논쟁을 좋아하는 스님이 하다 보니까 꼭 사람들이 그렇게 논쟁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모여요. 그러니까 견해가 다르면 막 니가 맞니, 내가 맞니 하는데, 그것들도 하나의 습성입니다.

 

그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좋은 성향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고, 자신이 그런 습성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좀 바꾸어주는 것들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남들을 보면 꼭 삐딱하게 본다든지 아니면 누구 보면 그 사람이 뭐라 하든 간에 그냥 믿어버린다든지, 이런 것들도 꼭 좋은 성향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나쁘다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탐·진·치에 물들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이 하나의 습성으로써 굳어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에 나아간다든지 아니면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럴 때는 바꾸어주는 것이 맞고, 나쁜 탐·진·치에 물들어 있는 것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아, 내가 빨리 눈치채고 바꾸어주는 것이 좋다는 거라.

 

그게 첫 번째 시간에 얘기한 거고,

두 번째 한 것이 「사람의 습성에 따른 수행법」을 얘기했습니다.

사람의 습성에 따라서 수행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쁜 습성이 있다고 해가지고 깨달음으로 못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좋은 방향으로 자기가 생각을 하면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탐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 똑같이 수행했는데 남들은 삼매도 체험했다고 그러고 어떤 결과물들 어떤 지혜들도 개발을 했다 하고 이럴 것 같으면 자신이 다시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똑같이 수행했는데 나는 왜 이것 밖에 못했을까? 자신이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남은 이마만큼 얻었는데 나는 이걸 못 얻었다 할 것 같으면, 그런데다가 탐심을 이용할 것 같으면 오히려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남들이 이마만큼 좋은 일을 했는데 어, 그러면은 좋은 일 한 거 만큼 많은 결과들이 있는데, 나는 왜 그런 좋은 일도 못하고 좋은 결과들도 못 가져오는가 생각으로 분심을 일으켜주도록 하고. 마찬가지로 성냄이 많은 경우도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자꾸 유도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습성들을 알아야 되는 이유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습성들을 좋은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게 있고, 유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관계된 것들은 보면 아난다 존자는 대부분 경전에서는 비구니 스님들한테 가서 법문을 설하는 걸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하고 여자하고는 좀 차이가 나는 모양이라. 비구니 스님들은 앞에 좀 잘생기고 멋있는 스님이 올 거 같으면 거기에 폭 빠져갖고 법문이 다 좋다고 생각을 해버립니다.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런데 비구 스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구 스님들은 법문 내용이 어떻느냐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하고, 그리고 좀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고 그리고 좋은 결론들을 내서 아, 참 여러분들은 훌륭합니다 할 것 같으면 비구니 스님들은 되게 좋아하는데 비구 스님들은 그런 것도 되게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과정이 아무리 미사여구를 써놨더라도 결론 내린 것이 뭔가 좀 안 좋은 결론이면 비구스님들은 그걸 좋은 법문했다고 안 합니다. 미사여구를 많이 하는 것보다는 그냥 탁 내리쳐가지고 바로 알도록 해주는 방식으로 쓰는데.

 

그러니까 아난다 존자 같은 경우에는 그런 비구니 스님들한테 잘 어울리는 타입이니까 비구니 스님한테 가서 법문할 때 아난다 존자가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비구니스님들 중에 아난다 존자를 좋아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좋아하면 어떻게 돼요? 다들 좋아해버리면 문제가 안 생기는데 자기만 좋아할려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 다른 사람이 좋아하면 막아야 되는 거고, 자기 혼자서 그걸 좋아해야 되고 이렇게 되니까 집착하는 것이 생겨나고 탐욕이 생겨나고 그렇게 됩니다. 그 비구니스님이 그랬거든.

법문을 듣고 싶고 아난다 스님이 보고 싶은데 아난다 스님이 만날 거기 가서 법문할 수도 없는 거고, 보름에 한번씩이나 어떨 때는 몇달에 한 번씩 가는 거니까. 매일 와서 자기 봤으면 좋겠으니까 꾀병을 부려가지고 나 아프다고 합니다. 아프니까 어떻게 해요? 부처님이 야, 누가 아프다고 하는데 가봐라. 가서 거기에 맞는 법문들을 해라. 그러니까 아난다 존자가 가니까 그 비구니스님은 꾀병부리는데 얼마나 좋아? 자기 혼자서 아난다 존자를 볼 수 있으니까. 또 자기 혼자서 아난다 존자의 법문을 들을 수 있고, 독차지하게 되니까.

 

그때 아난다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탐·진·치가 있는 것은 좋은 방향으로 유도를 하면 된다. 좋은 방향으로 유도를 하면 되지만 유도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어떤 거겠어요? 성욕! 성욕은 어떠한 경우든지 유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이 사람을 좋아했다가 그러면 이 사람을 내가 독차지하고 싶다, 또 다른 대상으로 옮긴다? 이것도 있을 수도 없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성욕은 지금 당장 끊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사 이 비구니 스님이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아, 내가 참 잘못 생각했구나. 그냥 그 법문을 들어야 되는데 나는 법문을 들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아난다 스님을 보게 됐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가끔씩 이 논쟁하는 경우들도 보면 논쟁하는데 논쟁거리를 가지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에 대해서 막 얘기를 합니다. 자꾸 핀트를 벗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쭉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 법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가지고 따져야 될 때는 따져야 되는 거고, 그것도 한시간 이상 하지마라 그럽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견해가 들어가기 때문에.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게 실천해나가는데 두 번째 부분입니다. 사람의 습성에 따라서 수행하는 방법이 각각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성립돼온 습성들이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습성들이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럼 그걸 좋은 방향으로 자꾸 유도를 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그러한 것들도 나중에는 탐·진·치가 없는 방향으로 다시 또 유도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는 거라. 그렇지만 나쁜 습성들, 성욕과 같은 거, 특히 식욕과 같은 거, 그다음에 나를 내세우는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은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탁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실천법의 방향과 부적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걸 내가 해가지고 바른 방법인지 아니면 바르지 않은 방법인지 그걸 판단하는 부분입니다.

 

종이 있으면 종이에다가 글을 한번 써봐요. 의식하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써오던 대로, 거기에다가 자기집 주소를 한번 적어봐요. (지금요?) 예. 의도적으로 하지 말고 그냥 평소에 쓰던 대로 그냥 한번 써봐요.

썼어요? 아직 못 쓴 분 있어요?

 

사실은 스님들이 수행지도를 할 때 맨 처음 하는 게 이겁니다. 그냥 다른 얘기도 안 해. 종이 하나 주면서 “뭐 하나 기록해라” 하면서 줍니다. 그걸 보고 대부분이 판단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느리게 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막 힘을 줘서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알아보면 되지 하고 쓰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요마만큼 간격으로 정확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각각 다 다릅니다. 습성에 따라서 쓰는 것이 각각 다 다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하는 것이 뭐냐면 “한번 걸어보세요.” 스님 앞이니까 조심스럽게는 걷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그냥 편안하게 걸어보라고 그럽니다. 걸어보는 것을 가지고도 판단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수행주제를 주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화두 타듯이 어느 스님한테 가면 처음 본 사람인데 그냥 화두 덜썩 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님 나 수행주제 주시오” 하고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주는 법은 없습니다.

출가한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5년간 그 스승 밑에서 있어야 됩니다. 있으면서 각각의 것들, 의식도 배우고, 여러 가지 생활습관들도 배우고, 경전도 배우고, 경전 잘 안되는 사람은 수행도 시키고, 그러면서 또 시봉도 해야 되고, 여러 가지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무리에서 튀는 사람이 없게끔 화합되게끔 이렇게 이끌어주는 거라. 그러면서 스승은 그 기간동안 그 제자를 가만히 관찰을 합니다. 쟤가 어떤 성향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대부분 그렇게 하고 나서 5년 지나면 그다음에 이 수행주제- 깜맛타나를 줍니다.

 

출가한 스님도 같이 한 사원에서 머물고 있는 스님한테 5년의 기간이 지나야 습성에 따라서 수행주제를 주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럼 그전에는 수행을 안 하느냐? 수행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을 수행주제로 줍니다. 호흡에 대한 관찰이라든지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멧따바와나라든지 이런 것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수행을 지도하고, 나중에 수행에서 어느 정도 한단계 탁 올려야 될 때는 수행주제를 반드시 줍니다.

 

그럼 재가자들이 올 거 같으면 그럼 재가자들은 만날 거기서 살 수도 없고,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수행주제를 줄 수 있겠어요? 어떻게 줄까? 안 줍니다! 수행주제를.

수행주제를 줘가지고 그게 맞을 경우는 많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 어떤 경우든지 스님 앞에 올 거 같으면 조금 전에 처럼 글씨를 쓰라 하더라도 의식해서 글을 쓰게 된다는 거라. 자기가 그냥 평소 써왔던 대로 쓰는 게 아니고, 만약에 이걸 제출한다고 하면 더 의식해서 쓰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 그걸 봐가지고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 똑같은 글씨 두 개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탐심이 많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또 신심이 많은 사람이고 똑같은 형태로 써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주제도 다르게 줘야 되는데 그거 보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걸음걸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수행주제를 재가자들한테는 안 줍니다!

 

그 대신에. 그렇다고 해가지고 수행을 안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선원에서 고유하게 해오는 전통의 방식을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하라고 그럽니다.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간에 거기가면 거기 방법대로 해야 돼.

 

또 다른 선원에는 다른 방법으로 내려오는 형태들도 있습니다. 거기가면 이 사람은 여기서는 이 방법으로 해야 되는 거고, 거기 가서는 그 방법대로 해야 되는 겁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 방법으로 안 맞을 거 같으면 자기가 나와가지고 다른 데 가야 되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 그 선원에서 다른 방법으로 너는 그럼 이 방법으로 하시오 하고 그 방법을 허용해주는 법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각각의 방법으로 정립되는 이유들은 그것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방법들을 정립을 해나가는 겁니다. 만약에 그게 안 맞고 성향에 따라서 맞는 사람 안 맞는 사람이 확연하게 차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방법으로 그 선원에서 정립을 할 수가 없는 거라.

 

세상에 각각의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공통적으로 어느 정도는 다 맞는 부분들입니다. 단지 그게 맞는다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사마타 수행을 하든 간에 그것으로 인해서 집중력을 키울 수가 있고, 그다음에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더 강화시켜줄 수가 있는 것들이고, 또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어떤 경우에는 삼매쪽으로 개발하게 하는 거고, 어떤 사람은 지혜쪽으로 개발하게끔 하는 거고. 그래서 그 선원에 따라서 여기는 사마타 수행장소다, 여기는 위빳사나 수행장소다 하고 정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습성을 파악을 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따라서 여기에 적어놓은 대로 수행주제를 가지고 수행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

왜 그럴까? 왜 여러분들이 파악했을 때 그걸 가지고 수행주제에 맞는 수행법을 하지 말아라고 그럴까?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자신의 견해나 나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자신을 판단하는 것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습관을 간단하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놓았지만 사실은 여섯 가지가 아닙니다. 중복되는 것들이 반드시 있죠? 탐심과 진심이 중복되는 것, 그다음에 탐심과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다가 치심이 중복되는 것도 있고, 아니면 탐심과 진심이 아니고 진심과 탐심이 그러니까 탐이 강할 경우, 어떤 경우에는 진심이 강할 경우 가 각각 다릅니다. 그런 것들도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에 곱하기를 세 가지를 할 것 같으면 6×6=36. 기본적으로도 서른여섯 가지라. 그렇기 때문에 이걸 판별할 수 있는 거는 사실은 여러분은 여러분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상은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주제는 여러분들이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 이 선원에 가면 그 선원에 맞는 수행방법을 따르는 것이 사실은 정답이라.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그리고 내가 기존에 해왔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 방법들을 따르는 것이 사실은 정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뛰어난 스승 밑에 가서 오래도록 수행해가지고 몇년 지나고 나서 거기에 맞는 수행주제를 받는 것이 그것도 정답이라는 거라. 그렇지 않고 그냥 가서 덜렁 받고 아니면 자기가 해오던 방식대로 그대로 그 선원에 가서도 하고 이럴 것 같으면 그건 어떤 경우에는 그냥 수행진척 없이 그냥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겠다는얘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경전은 보통 그것들을 내가 실제로 실천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체험해서 그것들이 알 수 있는 것들이 돼야 됩니다.

그걸 빨리어로 '산딧티꼬(sandiṭṭhiko)' 그렇게 얘기합니다. 직접적으로 내가 체험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호흡을 관찰할 것 같으면 예를 들어서 코끝의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관찰한다, 그러면 왜 들이쉬고 내쉬고 관찰하라 그럽니까? 마음을 여기 대상에다가 모아라는 뜻입니다. 대상에다가 갖다 붙이고 그리고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성품들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겁니다. 그걸 자기가 스스로 체험하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이 호흡을 관찰할 이유가 없는 거라.

그래서 예전에 몰랐던 거를 ‘아, 호흡이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내가 스스로 체험해서 아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돼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체험할 수 없는 것일 거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하고 이 불교하고의 차이점이 바로 그런 거라.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거라. 아, 가르쳐주는 대로 이렇게 하다 보니까 마음이 고요해지네. 마음이 평온해지네. 스스로 경험하고 체험해야 되는 거라. 체험해야만이 그것이 나쁜 것이면 ‘어, 내가 이거 안 해야지’ 좋은 거면 ‘어, 더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게 시간이 걸리는 겁니까? 금방 되는 것들이라. 호흡만 제대로 관찰하고 있어도 금방 그걸 할 수 있는 거라. 시간을 기다려주는 게 아니라는 거라. 자기가 안 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걸 '아깔리꼬(akāliko)'라고 그렇게 합니다. 금방 알 수가 있다는 거라.

 

태국에 갔을 때 내가 이 글귀에서 딱 걸려가지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산딧티꼬 아깔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하는 겁니다. 직접 내가 체험해서 알 수가 있고, 경험해서 알 수가 있고, 그리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고 바로바로 내가 알 수 있는 것들이고,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들은 아, 내가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현자들도 현명한 사람들 성스러운 사람들도 아, 그 길을 가고 그걸 칭찬했던 거구나. 수행해보니까 그게 가능한 거라.

그래서 그 구절에 탁 걸려가지고 내가 왜 이 좋은 것들을 가지고 모르고 살았던가 하는 것에 딱 걸려가지고 하루종일 울은 적이 있어요. 그 구절에서.

그 정도로 부처님 말씀은 분명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하다 보면은 각각의 경험들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이 모여가지고 사마디에 대해서 얘기할 것 같으면 똑같은 형태들을 띱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사마디에 대해서 얘기한 것을 들을 거 같으면 각각 경험한 것이 다 다릅니다.

그 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얘기했으면 그 사람이 맞는다 치고, 또 요사람은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지만 요사람이 맞는다 치자. 그런데 이것도 맞고 요것도 맞다고 치자.

그렇게 친다고 하더라도 그럼 이 사람이 나는 완전하게 그 사실에 대해서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고통받는 일도 없고 이것으로 인해서 다시 또 돌아갈 일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거라.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불교수행자들은 그 상태를 경험했으면 지금은 그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그걸 또 다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뿐아니라 그 경험된 것들이 어느 정도 쌓여가지고 도와 과에 이르르게 될 것 같으면 아예 그 밑으로 떨어지지를 안 해. 동일하게, 누구든지 동일하게! 그래서 내가 만약에 예류과에 이르렀다. 나는 절대 예류과 밑으로는 안 떨어져. 일상생활 하는 그 자체가.

만약에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혜를 알고 있다. 그럼 나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혜를 다시 또 개발할 수가 있는 거라. 똑같은 경험을 또 하게 되는 거라. 이 스님도 마찬가지고 요 스님도 마찬가지고 저 스님도 마찬가지고 동일하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압니다. 음, 나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어! 그래서 그 밑으로는 안 떨어져! 나는 어느 지혜를 개발했어! 나는 어떤 삼매를 몇 선까지 자유자재로 해! 나는 언제든지 그걸 할 수가 있어! 자기가 스스로 아는 거라.

그러고 나서 더 높은 단계를 갈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자기 스스로 분명하게 확신이 딱 들어서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런 상태를 쭉 하다 보면 완전하게 아라한이 되고 나면 자기 스스로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아라한이 되고 나서 뭐라고 그랬어요?

인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나는 더 이상 해야 될 거 없다. 모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들은 이미 다 끝났다!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도 이미 다 소멸돼버렸다. 나는 내 할 일은 다 끝났다고 탁 알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아라한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럼 그런 상태에 이르른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 있는 자들의 행위들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아무리 깨달음에 이르렀다, 아니면 어떤 선정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다시 또 그 선정체험을 하려면 못해. 또 선정체험을 할 때 또 다른 체험들을 하게 되는 거라. 또 아니면 내가 어떤 상태에 깨달았다, 그러면 깨달은 자의 행위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게 안 일어나지는 거라. 그게 인제 다른 수행법 하고 불교적인 수행법 하고의 차이라.

 

부처님 당시 때 재가자 중에 부처님이 칭찬한 두 명의 재가자가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찟따라고 하는 거사입니다. 이분은 어떤 분이었냐면 스님들이 법문을 안 할 때 자신이 나서서 법사자격으로 법을 설합니다. 다른 스님들한테도. 일반인들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도 법을 설하고 하지만 그렇게 겸손할 수가 없는 거라.

전혀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없이. 청소할 것이 있으면 다 똑같이 청소하고, 그리고 법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스님들이 있을 거 같으면 스님들한테 탁발올릴 때 탁발을 다 올리고, 스님들한테도 인제 갓 출가한 스님들한테도 삼배를 깍듯이 하고 이렇게 하는 거라.

 

그 친구 한 사람이 이 찟따거사에게 찾아와서 물어봅니다.

찟따거사가 “너는 어디 다른 데 가서 그 밑에서 출가해서 수행하드만 얼마만큼 이뤘냐?” 하고 물어봅니다. 적어도 니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안온하게 우뻭카의 경지에 이르른 상태는 됐냐? 과위는 둘째치고.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나 그거 아직 못했어.” 삼십년이나 했는데.

“그럼 이때까지 뭐했냐?” 하고 물어보니까,

“나는 한 게 뭐 그냥 우리가 가르친 대로 옷 홀라당 벗고 나체수행 하라 하면 나체수행하고, 그다음에 털을 뽑는 게 있습니다. 몸에 있는 털 이런 것들을 한 가닥씩, 얼마나 아파? 그거 뽑아라면 그거 뽑고 이런 수행들을 했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거 하죠? 겨드랑이 털인지 이런 것 여자들 제모한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무슨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얘기할 수 없는 거 아니라? 아픔을 견디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켰다고 얘기는 못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아이고, 너는 삼십 년이나 수행을 했는데 겨우 그것밖에 못했냐?”

그런데 지금 현재 인도의 요기들이 대부분 하고 있는 게 그런 형태들입니다.

그러자 이 외도가 찟따거사한테 “그럼 너는 삼십 년 동안 뭐했냐?”

“나는 한 거 많지.” 나는 수행해가지고 선정에 들려면 선정에 얼마든지 들었고, 선정에서는 이런 상태들을 경험하고, 1선정 2선정 3선정뿐아니라 쭉 이렇게 하고, 그리고 수행과위에서도 어느 지혜들은 일어났고, 그런 얘기를 쭉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가서 결정타를 날립니다. 만약에 내가 먼저 죽는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나보고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저 찟따거사는 인제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불환과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천상세계에서 수명이 끝나면 그대로 소멸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해탈을 보증하진 못했지만 다음 세상에서 해탈을 보증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외도가 그럽니다. “아, 내가 삼십년 했는데 이 재가자보다도 더 못한 상태가 됐구나.” 이 재가자는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거는 그거는 기본적으로 하는 거고, 선정에 드는 것은 얼마든지 자기가 선정에 들고, 또 수행과위에서 아라한과에 못지 않는 마지막 최종적인 해탈을 앞둔 자가 돼있는 상태가 됐다는 거라. 어떻게 재가자가 저렇게 할 수 있는데 나는 출가해가지고 삼십년 동안 뭐했느냐는 거라. 그래가지고 부처님한테 나는 다시 출가하겠다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금방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바른 방법으로 하면은 그게 재가의 신분에 있든 출가의 신분에 있든 관계없이 반드시 그것은 자기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거라.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그 길은!

 

누구든지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그 길을 따라가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에까야노 담모(Ekāyano dhammo)' 라고 그렇게 합니다.

법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에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미래에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과거에 있는 사람이든 오직 그 하나의 법의 길만 따라가게 돼 있는 것이지, 그 법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똑같고, 그 법에 인해서 일어나는 지혜도 똑같고, 그것에서 일어나는 도와 과도 똑같다는 거라. 그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는 것이지 다른 길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재가자의 몸이든 출가자의 몸이든 동일하다는 거라.

바른방법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길을 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게 실천법의 방향이 바르면은 똑같다는 거라.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번뇌들이 다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번뇌는 '아사와(āsava)'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는 번뇌들은 '아누사야(anusaya)'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는 번뇌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수면번뇌'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번역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잠자는 번뇌는 잠에서 깨어날 것 같으면 그 번뇌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누사야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어. 당연히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착각해가지고 수행하다가 모르는 번뇌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할 것 같으면 ‘아, 이게 수면번뇌가 아닌가’ 하는데, 그거는 수면번뇌가 아니고 그냥 아사와라. 그냥 번뇌일 뿐이라. 사용하지 않는 번뇌인 것뿐인 것이지 그건 아누사야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누사야란 뭐냐면, 예를 들어봅시다. 이 집이 있다. 요거는 철근 다 해서 밑에 바닥 다 해놔놨어요. 이 집이 무너지기 전에는 이 바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뭐로 했는지 세멘을 했는지 아니면 흙만 그냥 다져 넣었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 안에 철근을 다섯개 넣었는지 일곱개 넣었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걸 아누사야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게 없으면 어떻게 돼요? 이 집을 유지를 못합니다. 이 바닥하고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없으면 어떻게 이 집이 유지되겠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라. 단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데 이것에 영향은 미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속에 심층 구조로써 있는 것들을 '아누사야'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고, 그것이 마음으로 표출되는 것을 '아사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해야 되는 것은, 지금 아누사야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내 잠재적인 번뇌들 그거 몰아낸다?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할 거라. 그런데 아누사야 번뇌까지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자신의 습성들을 정확하게 판단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는데! 스승이라고 알 수 있어요? 모릅니다. 봐가지고는. 그래서 오랫동안 경험을 해가지고 같이 있어야만이 그걸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들을 알 수 있는 통찰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알 수 있는 거라. 심지어 사리뿟따 존자 조차도 그걸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수행법으로 지도를 했다는 거라. 저번 시간에 얘기했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그게 적합한지 부적합한지 모른다고 해가지고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번뇌들이 아사와든 아누사야든 번뇌가 있으면 번뇌를 없애기 위한 계기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면은 그 번뇌를 없앨 수 있는 길들이 열리는 거고, 그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그걸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 능력은 어디서 올까?

여러분들 돈 잘 모으는 사람들은 돈 모으는 능력이 있다고 그러죠? 사람 잘 모으는 사람들은 그 능력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 능력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으로 인해서 뭐만 봐도 그건 돈이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그걸 행하는 거라. 오랫동안 쌓아오지 않으면 그 능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번뇌를 없앨려고 할 것 같으면 번뇌를 없애는 길들을 오랫동안 해야 만이 그 능력이 키워집니다. 그래서 자꾸 마음을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마음들을 자꾸 만들어라는 거라. 그걸 길러라는 거라. 그래야 그게 능력이 생겨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보시도 하고, 계도 지키고, 수행도 하고, 선정삼매도 들고 그렇게 하는 거라.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가지고.

부처님이 추천한 수행, 부처님이 추천한 계행, 부처님이 추천한 선정, 그것은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계정혜를 행하지 않고 아니면 그 계정혜를 다른 말로 하면 팔정도, 팔정도를 행하지 않고 능력을 키운다? 그거는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그런데 여기 수낙캇따의 얘기를 예로 들어놨지만 수낙캇따와 같이 뭐 그냥 '그거는 좋은 얘기일 뿐이고' 이렇게 하는 사람조차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실천 안 해도 그거로 인해서 좋은 결과는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수낙캇따는 “부처님은 그냥 사변적인 말만 늘어놔쌌지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은 부처님 가르침 그 방법대로 하니까 쪼매 이익이 있드라.” 하고 얘기하고 다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수낙캇따 이놈의 자식, 이 미친놈 살릴놈 이렇게 하는데 부처님은 그렇게 안 하고 그래. 수낙캇따가 그래도 말 참 잘했네. 자기가 부처님이 궤변론자든 아니면 이론만 빠삭한 사람이든 뭐라고 하든 간에 그거하고 나하고 뭔 관계가 있느냐는 거라. 실재하는 나하고 그거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거라.

 

그대신에 수낙캇따가 그래도 부처님이 가르친 방법대로 따라하다 보니까 쪼매 이만큼 이익은 있다, 그걸 부처님은 칭찬하는 거라. 그래도 수낙캇따가 그걸 따라하니까 그정도 이익이 생기니까 있다고 얘기한 것은 바른말 했네. 그 참 좋은 사람이네. 하고 얘기합니다. 남이 나를 욕하고 칭찬하고 하는 것은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부처님은 내가 할 일은 그 방법 가르쳐주고 나서 그걸 실천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있으면 되는 거라. 그럼 그 사람 참 잘하는 사람이고, 실천 안 하는 사람이면 그거 참 잘 못하는 사람인 거라.

 

여러분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 방법대로 실천해서 조금만 이익이 있으면 그거면 되는 거라. 너는 왜 몇년간 공부하고 몇년간 수행해도 요것밖에 안 되느냐? 그거는 부처님 관할이 아니라. 그건 그 사람의 관할인 것이지 그래도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요만큼 이익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음, 참 잘했어” 그렇게 얘기하는 게 부처님이라.

 

아무리 부적합한 수행법이라고 하더라도 자기한테 맞지 않는 수행법이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방향이 맞으면, 방향이 맞으면 그것이 해탈로 나아가는 방향일 거 같으면 수행방법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에게는 그마만큼 조금의 이익은 있다는 거라.

 

설혹 내가 자기의 성향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또 가르치는 스승이 그 습성들을 분명하게 파악해가지고 알려주지 못해서 다른 걸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맞는 방향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얘기한 탐·진·치를 소멸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팔정도의 길을 가는 방향이기 때문에, 수행법이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하면 자신에게는 방향이 맞기 때문에 그것이 큰 이익은 없다고 하더라도 조금의 이익들은 분명하게 있게 된다는 거라. 그게 딱 맞아떨어지면 얼마나 좋겠어? 그렇게 안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방향이 맞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은 그냥 해볼만한 가치들을 지닌다는 거라.

 

그래서 그 마지막에 보면

방법이 맞는다면, 번뇌를 끊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안 계시더라도 번뇌를 끊는 것은 결코 실현할 수 없는 목표가 아니라, 손을 뻗으면 손에 들어올 정도의 목표라고 이해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자아를 붙잡지 말고, 속세의 지식으로 오염되지 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실천하면, 결과는 확실합니다.

 

그게 사람의 습성에 따른 수행법, 그리고 그 습성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방해할 때, 그리고 이것이 나한테 맞는지 안 맞는지 하는 것의 주요한 개념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부처님이 가르친 것, 그게 자기에게 맞고 안 맞고 그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라. 방향이 맞을 거 같으면 그냥 하라는 거라.

이 수행처에서 이렇게 가르칠 거 같으면, 그거는 방향이 맞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따라 하라는 거라.

쓸데없이 거기에다가 자기 걸 덧붙이지 말아라는 거라.

이해하겠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