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 (20150403.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7. 09:00

https://youtu.be/uGQlW-AUrtY

*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 (20150403. 대구)

 

오늘은 오전만 법회하고 오후는 좀 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프린트물을 보면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이라고 돼있습니다.

이게 첫 번째 거고, 다음번 거는 「사람의 습성에 따라서 하는 수행법」에 대한 것, 어떤 것이 그 습성에 맞는 수행법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할 겁니다.

 

부처님이 제시한 게 불교의 기본이 사성제입니다. 고·집·멸·도 그렇게 돼 있죠! '고가 있다.' '그 고의 원인이 무엇인가' '고의 소멸이 있다.' '고의 소멸로 가는 길이 무엇인가' 그렇게 네 갈래로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명제에 해당이 되는 거죠. 만약에 늙는 것은 괴로움이다. 아니면 죽는 것은 괴로움이다. 병드는 것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지 이해합니다. 그거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꼭 병드는 게 괴로운 게 아니고 또 죽는 게 괴로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건 사회의 일반적인 지식인이라면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럼 그 괴로움을 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늙는 게 괴로움이면 안 늙을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성형수술을 해야죠. 그래야 안 늙어 보일 거 아니라? 조금 더 젊어 보일려고 하고 예쁜 옷들을 입든지 이런 식으로 하고. 그래서 죽는 것도 괴로움이기 때문에 안 죽을려고 열심히 노력들을 합니다.

여기서 차이가 나죠. 불교는 어떻게 해요? 늙는 것, 병드는 것,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요, 불교에서는? "사람은 당연히 병들고 늙고 죽게 되어있다"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게 불교하고 일반 사회하고의 차이점입니다.

 

만약에 병드는 것이 괴로움이다. 병들지 않는 방법이 있다. 이럴 것 같으면 사회에서는 병들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건강관리를 한다든지 아니면 병원에서 치료를 해가지고 병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그게 병들은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또 병이 안 듭니까? 또 병이 들죠. 그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병이 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것은 바른 방법은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차라리 그것보다는 병이 드는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라. 그게 사실이니까! 지금 내가 병이 들은 걸 고쳤다 해가지고 병이 안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고치는 수단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은 병이 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거라. 늙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 전제조건이 돼야 되는 것이지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을 해결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안된다는 거라.

 

그리해서 부처님이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이든지 이런 방법을 쓰지를 않습니다. 다른 종교들 한번 예를 들어보면, 죽지 않기 위해서 천국을 상정한다든지, 아니면 극락을 상정한다든지 그래서 영원히 살려고 하는것들을 하는 거고.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거하고는 반대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게 돼있는 것은 몸을 지니는 존재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런 존재인데 이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하고,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이가 좀 납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거기에다 투자를 합니다. 안 늙기 위해서, 안 죽기 위해서, 여기에다가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기에 투자하는 건 조금밖에 안 해. 나머지 부분은 어디다 투자를 하느냐면 진짜 내가 안 죽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안 늙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들을 가지고 탐구를 해나가는 과정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교에서는 자꾸 수행하라 수행하라 하는 이유가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아라한이 되고 나면 그 생사를 벗어나기 때문에! 생사를 벗어나면 다시 죽는 법도 없는 거고, 죽지 않으니까 다시 태어나지 않으니까 늙는 법도 없는 거고, 병드는 법도 없다는 거라. 그 방법을 택합니다.

그런데 일반인은 그거 참 하기 힘들죠?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하나? 늙고 병들고 죽게 돼있는 건데. 그래서 적어도 살아가면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은 자꾸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vipallāsa(위빨라사)다 하고 얘기합니다.

위빨라사가 뭔지 알아요? 한국용어로 전도몽상이라는 용어 있죠? 거꾸로 생각해서 꿈꾸고 있는 거라. 지금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잖아. 거꾸로 생각해가지고 안 늙을려고, 여기도 성형수술 한 사람들 좀 있지? 어쨌든 그런다는 거라. 그걸 거꾸로 생각한다는 거라.

 

거꾸로 생각하는 게 그래서 부처님은 세 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saññā vipallāsa(산냐 위빨라사 : 상전도,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여기는 것), 라는 것이 맨 처음에 나옵니다.

그거는 어떤 거냐면 밤에 불을 꺼놓고 자다가 탁 깨어났는데 앞에 보니까 뱀 같은 것이 하나 있다. 그러면 깜짝 놀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까이 가서 보니까 뱀이 아니고 긴 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걸 보고 실제로는 자인데 왜 뱀이라고 착각을 해서 놀래게 될까? 왜 그렇게 돼요? 그게 산냐(saññā)의 작용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내가 접촉이 있어가지고 그걸 느꼈으면은 뭔가 봤기 때문에 느낀 거거든. 봤을 경우에는 이게 시커먼 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싫은 느낌이 든단 말이라. 싫은 느낌이 들든 아니면 좋은 느낌이 들든 둘 중에 하나가 든다는 거라.

싫은 느낌이 탁 드니까 싫은 느낌으로 인해서 이렇게 긴 자 같은 경우에는 연상되는 것이 뱀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뱀을 형상화 시키게 되는 거라. 그래서 저게 뱀이다 하고 인식을 하게끔 되는 거라. 그게 산냐(saññā)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불이 켜져 있었을 거 같으면 그걸 뱀이라고 인식하지는 않겠죠?

그걸 산냐 위빨라사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간단한 예로 뱀의 예를 들었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잘못되게 인식하는 것들이.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한번 인식해가지고 딱 관념화시키고 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미워보이는 거라. 이미 산냐가 고정돼있다는 거라. 거꾸로 고정돼가지고 돼있는 거라. 그걸 바꾸는 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게 자꾸 쌓이다 보면은 그러한 성향으로 발전이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누구 사람만 봐도 부정적으로 자꾸 보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뭘 보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산냐의 작용으로 인해서 내가 그렇게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잘못된 것으로써 내가 고정화 고착화시켜버립니다.

 

그런 상태가 딱 고착화된 상태를 빠빤짜(papañc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미 잘못된 것이 딱 고착화돼가지고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좋은 게 그럴 것 같으면 괜찮은데 나쁜 게 그렇게 돼있을 거 같으면 참 부수기 힘이 듭니다. 이게 계속 진행이 되다 보면 성격으로 딱 굳어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성격으로 굳어져버릴 것 같으면 수행해도 그와 같은 방법을 부수기 위한 수행으로써 접근을 해야 수행이 잘 되는데, 그렇지 않고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다가는 수행이 진척이 잘 없게 된다는 거라.

 

산냐 위빨라사는 무상·고·무아 부정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왜곡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인데 항상하는 것으로 자꾸 생각하고, 괴로운 것인데 즐거운 것으로 자꾸 여기게 되는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인데 자꾸 뭔가 영원불멸한 것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 몸은 부정한 것인데 청정하게 자꾸 여기게 되고 이렇게 자꾸 여기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diṭṭhi vipallāsa(딧티 위빨라사 : 견전도, 번뇌들과 집착에 의한 견해·의견의 왜곡)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전도몽상 되는 것이 그 산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딧티(diṭṭhi)도 있다는 겁니다. 견해를 가지는 것!

견해를 가질 때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만이 견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 견해에 대해서 바꿀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사람들하고 토론을 하더라도 끝이 안 납니다. 이걸 바꿀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인터넷상에서 하는 것 보면서 아, 참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왜 저리 싸워쌌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거라. 자신의 견해를 자꾸 내세울려고 하다보니 그런 거라.

 

그런데 그 견해가 맞는 견해도 내세우지 말아야 되는 것인데 만약에 잘못된 견해일 거 같으면 더더구나 문제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지는 견해들이 잘된 견해가 있을 수 있을까?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도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 가지는 견해들은 전부 잘못된 견해들입니다.

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상태에서 견해를 내세우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잘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위빨라사에 속한 견해에 속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설혹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토론을 할 때 한시간 이상 못하게 합니다. 한시간 이상이 넘어가면 계율위반이 돼버립니다. 똑같이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견해를 내세우다 보면 그것이 자꾸 고착화 돼버린다는 겁니다.

고착화 될 뿐만아니라 그 방향으로 계속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견해를 가지면 가질수록 번뇌들은 계속적으로 생겨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들은 더욱 더 많아지게 되는 거고. 망상부리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견해에 대한 위빨라사는 번뇌들과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 번뇌는 잠재되어 있는 번뇌도 있을 뿐 아니라 드러나는 번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시비를 걸어올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자기 견해를 탁 내세우는 거는 드러나 있는 번뇌입니다. 잠재돼있는 번뇌는 누가 시비를 걸어와도 드러내서 견해를 밝히지는 않는데 마음속에는 ‘꿍’ 하고 있을 경우에. ‘나는 그리 생각 안 하는데’ 그냥 받아들여버리면 간단한 건데 그걸 못하는 거라. 이 잠재되어 있는 것도 언젠가는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 표출됩니다.

그러니까 잠재돼있는 것이든 잠재돼있지 않고 드러난 것이든 번뇌들은 견해를 내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견해를 가지는 것들은 전부다 번뇌라고 봐야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다툼이 계속적으로 있는 것은 그 견해들에 대해서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그냥 조용하게 지가 편안하게 그 싸움 없는데 가가지고 그냥 편안하게 있는 게 훨씬 낫다는 거라. 그래서 다툼에는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라 해가지고 출가한 스님들은 한시간 이상 하지 말아라 해가지고 부처님이 계율로써 정해놓았습니다. 재가자들이야 뭐 니들 마음대로 살아라 이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재가자들에게는 그렇게 엄격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것도 위빨라사에 속한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얘기한 것이 뭐냐면

citta vipallāsa(찟따 위빨라사 : 심전도, 마음의 기능·인식의 왜곡) 입니다.

마음의 기능! 인식기능들인데 자꾸 사람들은 뭔가 특정한 마들이 있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게 있으니까 내가 살아있지. 마음이 있으니까 내가 살아있지. 뭔가 특정한 게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게 자꾸 발전하다 보면 내가 적어도 그것은 다른 곳으로 똑같이 넘어간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아비담마를 배우든 아니면 다른 것들을 배우든 조건에 인해서 마음의 요소들이 일어나면은 그것이 마음으로서 결정되는 거고, 그 결정된 마음도 찰나인 것뿐이지 그대로 존속돼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조건에서는 또 다른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조건이 없을 거 같으면 그 마음도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런 것인데 뭔가 잡고 있는 것처럼 자꾸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나의 마음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하고 안 맞을 때는 자꾸 그것에 대해서 사량분별을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마음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을 잘못 왜곡되게 알아놔 놓으면 항상 전도된 상황으로써 인식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찟따 위빨라사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되게 판단하는 것이 이 세 가지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거라.

내가 지금 아름답게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다.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작용을 해가지고 늙는 것이다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누가 가족 중에 돌아가셨다, 아, 사람은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게 돼있다. 나도 그럴 것이다 하고 받아들여가지고, 나는 죽기 전에 빨리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되겠다 아니면 내가 공덕을 많이 지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마음들을 탁 일으키는 거라.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작용을 했다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이익이 있으면 좋은데, 당장 내 눈에는 이익이 있는 것 같죠? 당장 내 눈에는 이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익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거라. 왜? 모든 세상의 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든 아니면 늙고 병들고 하는 것들이든 어떤 것이든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일반적인 겁니다.

 

그런데 이걸 탁 해결해준 분이 부처님입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비유해놓느냐면 눈이 안 보이는 장님에게 사기꾼이 와가지고 아주 낡고 값어치 없는 옷을 가지고 “야! 이거 되게 좋은 것이다.” 하고 속입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그런갑다 해가지고 그걸 비싼 돈 주고 샀어. 비싼 돈 주고 샀으니까 얼마나 애지중지하겠어? 그것에 집착이 탁 일어나는 거라. 그런데 의사가 어느날 이 장님의 눈을 탁 고쳐줬는데 고치고 나서 그 옷을 보니까 아주 형편없는 옷이거든. 여러분은 그것이 형편없는 옷이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마 그 사기꾼한테 죽일놈 살릴놈 할 거라.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받은 사람들은 그 사기꾼에 대해서 죽일놈 살릴놈 하지는 않고 그 옷에 대한 집착을 탁 버려버립니다.

 

사실은 부처님이 가르쳐 주는 방법은 그와 같은 방법입니다. 새 옷을 사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눈뜬 장님한테 미사여구를 쓰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장님의 눈을 고쳐주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부처님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

눈을 뜬 사람은 그걸 보고 자기가 집착을 버리든지 아니면 생사를 벗어나든지 그거는 지가 할 일인 것이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고 아니면 수행이 빨리 진척이 되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진척이 되고.

 

그런데 그 차이는 뭐냐면 습성들이 쌓여진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과거생부터 해서 얼마나 많은 습들을 익혀왔을 거라? 그런데 그 습이 익혀진 대로 마음은 따라가는 거거든. 그래서 성향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이 거의 좌우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증장시키기 전에는.

 

그래서 부처님이 수행법을 가르칠 때 그 사람의 습성을 여섯 가지로 나눠놨습니다.

그 여섯 가지에 따라서 이런 성격이 강한 사람들은 이런 수행을 하라, 또 이런 성격이 강한 사람은 이런 수행을 하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여섯 가지가 뭐 뭡니까?

탐·진·치가 많은 사람. 반대는 불탐은 뭐라? 탐이 없는 건 어떤 겁니까?

그래서 탐··치가 있는 경우, 그다음에 신앙-믿음이 강한 경우, 그다음에 그 사람의 마음에 사고하는 것들이 많은 경우, 그 사람의 마음에 지혜의 성향들이 많은 경우, 이렇게 해서 여섯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당연히 탐·진·치가 있는 사람은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수행을 하면 됩니다. 탐심이 많은 사람들은 남에게 자꾸 주는 것들을 하면 되는 거고, 진심이 많은 사람들은 자애의 마음을 자꾸 기지면 되는 거고, 어리석음이 강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자꾸 봐가지고 거기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말은 이렇게 간단한데 거기에 따른 수행법들이 다양하게 있다는 거라.

 

탐심이 많은 사람들은 주는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짜가누빳사나' 라고 하는 수행법을 해야 되는 거고, 또 진심이 많은 사람들은 '자애수행'을 해야 되는 거고, 아주 간단할 거 같죠? 그것만 딱 하면 될 거 같죠? 그런데 딱 그렇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탐심이 많은 거 하고 어디가 연결이 됩니까? 믿음이 많은 것 하고는 다른 것 같지만 굉장히 가깝습니다. 탐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것 같으면 탐심들은 점점 사라집니다. 가끔씩 그런 경우들을 본 경우도 있을 겁니다. 무조건적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 믿고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거꾸로 탁 뒤집어보면 탐심들이 많습니다.

 

또 성냄이 많은 사람들은 그냥 자애수행 하면 될 거 같지만, 자애수행 해가지고 성냄이 너무 강한 사람들은 이걸 다스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고하는 것들의 수행들을 지속적으로 해줄 것 같으면 아, 내가 성내고 하는 것들이 사그라듭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이 불뚝 올라왔다, 그리하더라도 ‘어 내가 왜 성내지?’ ‘내가 쟤한테 성내야 될 이유가 있나?’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도 그 진심은 줄어드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는 수행들을 하면 될 거 같지만 딱 그렇게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지혜 개발하는 심념처 수행들을 강하게 한다든지 이렇게 할 거 같으면 그 어리석음에 대한 것들은 어느 정도 해소가 돼나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딱 이 하나의 성격으로 굳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성 잘내는 사람이 욕심도 많고, 좀 어리석은 사람들도 어떤 경우에는 성도 잘내고, 또 어떤 사람은 어리석어도 베푸는 것들을 잘하는 사람들도 있고, 2개 3개씩 같이 돼있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복잡하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자기의 성향들을 잘 파악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법을 듣고 그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그랬다고 그럽니다. 사람들 모아놓고 부처님은 공양하고 나면 법을 설합니다, 일반 대중들한테. 저녁때 되어선 스님들한테 설하고, 낮에는 일반 대중들한테 법을 설하는데. 법을 설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꼬물락꼬물락 조불고, 어떤 사람은 먼 산 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망상하기 바쁘고, 어떤 사람은 지루하니까 뭔가 자꾸 움직이는 거라. 손가락을 까딱거리든 뭘 하든지. 아마 여러분들 모습하고 거의 비슷할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아난다가 그걸 보고 경악을 합니다. 저 좋은 부처님 말씀을 어째서 저렇게 듣느냐는 거라.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못 듣고 있다는 얘기거든. 들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중에 지나고 나면 뭐 했는지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왜 저렇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는 그 시간이 아까워갖고 눈을 쫑긋해가지고 하나라도 놓칠까봐 막 이러는데 왜 저사람들은 저러느냐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그럽니다. “야, 아난다야, 내 말이 쉬운 거 같냐?” “쉽죠!” 지는 다 알아들으니까. 그런데 일반인들은 그거 안 쉽거든. 안 쉬워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병이 들었으면 병을 말끔하게 치료하면 그게 병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인들한테는 그게 맞는 것이지, 병에 대해 집착하는 것들을 놓아버리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잘 알아들을 거라. 쉬운 거 아니라.

 

그렇게 물어봅니다. 아난다한테, “아난다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내 말을 알아듣는 거, 그게 쉬운 게 아니다. 세상의 이치 하고는 안 맞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다는 거는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되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얘기들이라는 거라.

그러면서 부처님이 그럽니다. 그래도 그중에는 꼭 들을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과거에 익혀온 습성들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만날 앉으면 부처님 법문하고 있으면 꼬박꼬박 조부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과거생부터 만날 겨울에 동면하는 동물들 곰, 뱀 요런 것들로만 만날 태어나놓으니까 조금만 기회가 되면 조금만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 같으면 고 짧은 찰나에 고마 꼬불락 조부는 거라. 이게 자꾸 습관이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뭐만 하면 그냥 조불어.

 

그리고 만날 먼 산 보고 이렇게 있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는 거라. 점 잘보러 다니고 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 내가 과거부터 해가지고 만날 그런 주술적인 것에 자꾸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거라. 뭐 조금만 하면 안 좋은 일 있다 그러면 점보러 가고 이렇게 한다는 거라. 뭐 어쨌다 할 거 같으면 기도하면 소원성취 되는 것처럼 그런 거 하고, 외부적인 것에 자꾸 의지하는 사람들인 거라. 지가 뭘 해결할려고 안 하고 외부적인 것에 자꾸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렇게 앉아있으니까 재미가 없지. 그러니까 먼 산이나 자꾸 보고 딴생각이나 자꾸 해쌌고 그러는 거라. 그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다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서 말미에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마만큼 자기가 탐·진·치에 젖어있는 줄 모르고 쌓아온 습성들이 그렇게 자신을 만들었는데도 그게 나쁜 줄을 모른다는 거라. 그러면서 말미에 얘기하는 네 구절이 있습니다.

 

욕구와 동일한 불길은 없다.그렇게 얘기합니다.

욕심이 일어나면 마음에 불길이 일어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손을 불 속에다가 집어넣어봐봐. 어떻게 돼요? 화상 입죠! 신체도 화상을 입는데 마음에 불길이 일어난다고 해가지고 마음에 화상을 안 입을 거 같아요? 마음도 똑같이 화상 입습니다. 욕심부리면.

그거 얻을려고 목마른 게 마음에 얼마나 강하게 남아있겠어. 마음도 화상 입는 거와 마찬가지로 타고 화상입게 돼있다는 거라. 신체적인 화상 입은 거는 치료하면 되는데, 마음 이놈은 지가 다시 바꾸거나 개조를 해가지고 증장시키기 전에는 그 화상 입은 거는 안 없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욕심내는 사람은 마음에 입는 화상을 안 없애니까 욕심부리는 거는 계속 욕심부리는 거라. 그거보다 심한 불길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가 분노와 동일한 얽매임은 없다.

성 많이 내는 사람들은 나중에는 말도 잘 못합니다. 뭔가 말을 하고 싶기는 한데 그냥 어 어! 어! 합니다. 그렇게 말 잘하던 사람들이.

왜? 딱 매여있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날 거 같으면 몸도 딱딱해질 뿐아니라 마음도 딱딱해집니다. 딱딱해지면 움직일 수가 없는 거라. 화가 많이 일어날 때는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경직돼가지고 움직이지도 못해.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똑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나오는 거고,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니까 성이 나있을 때는 누가 뭔 말을 해도 이게 안 들어가. 굳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다른 것들을 집어넣을려고 해도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니 아무리 틀렸다, 뭐 어쩌고 저쩌고 해도 그게 귀에 안 들어가는데 어떡할 거라.

그마만큼 분노라고 하는 것은 딱 나를 얽어매버리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 분노가 자꾸 일어나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딱딱해지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분노를 일으킨다는 거라. 그러니까 굳어져 있으니까 미운 사람에 대해서는 십년이 가도 이십년이 가도 미운 거라. 안 보고 사는데도. 그 굳어진 것들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다음에 어리석음과 동일한 그물은 없다.

그물은 탁 얽매이는 겁니다. 오히려 성내고 욕심부리고 할 때는 조그마한 움직임은 있습니다. 아예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고 어! 어! 까지는 한다는 거라.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걸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그걸 분별할 수도 없어져 버리고, 그냥 그물 속에 갇혀있는 새와 마찬가집니다.

전에 그런 얘기 했었죠? 원숭이 잡을려면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항아리 하나만 해가지고 항아리 안에다가 열매만 넣어놓으면 원숭이가 손을 딱 집어넣어놓고 그걸 탁 움켜쥡니다. 사람이 탁 달려가면 그냥 놔버리면 손이 빠지고 도망갈 건데 안 놓아 이걸. 그걸 움켜쥐고 있으니까. 그러면 사람한테 잡히는 거라. 안 놓고 지가 도망갈려고 발버둥쳐도 손이 안 빠지는데 어떡 할거야 이걸. 딱 그물에 갇힌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현명한 새들은 그물에 갇혀도 그걸 보고 비집고 나가는데 어리석은 새들은 만날 그속에서 파닥거리기만 하는 거라. 그러다가 그냥 죽는 거라.

 

자신이 행한 어리석은 것들이 얼마만큼 자신을 얽매여가지고 죽인다는 사실을 알면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탐 진 치가 강한 성향의 사람들은 그것이 지금 현재 다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거라. 과거부터 그렇게 쭉 해왔다는 거라. 그거 빨리 바꾸지 않으면은 그거 나중에는 진짜 불길에 타고 그거 얽매여가지고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까지 간다는 거라. 그러기 전에 빨리 바꿔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갈애와 동일한 강물은 없다.

갈망하는 것들이, 그마만큼 그 갈망이 일어나면 멈추지도 못하고 그냥 쭉 흘러가버리는 거라. 어떻게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래서 그 갈애가 원인이 돼서 윤회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신이 집에서 곰곰히 생각을 해봐요. 아, 내가 지금 뭐가 지금 성향이 좀 강하고 뭐가 지금 잘못돼 있는가? 그럼 빨리 그걸 바꿔라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부처님이 제시해 놓은 게 이 습성에 따라서 성격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여섯 가지 성향들을 진단을 해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따라서 너는 이런 수행을 하라, 너는 이런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수행법에 대한 얘기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질문이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