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사람의 습성에 따른 수행법 (20150410.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8. 09:00

https://youtu.be/v69oKk4aWe8

* 사람의 습성에 따른 수행법 (20150410. 대구)

 

자! 오늘은 저번 시간에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에 대한 얘기를 했죠? 이번 시간에는 두 번째로 그 「사람의 습성에 따라서 하는 수행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마 사마타 수행의 기본적인 형태들이 나와질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보면 여섯 가지 습성이라고 나와 있죠? 저번 시간에 여섯 가지 습성 이해했죠?

경전에 보면 사람의 습성을 나누는 게 참 많이 있습니다. 경전 전체를 다 뒤져보면 하나로 분류를 해서 열 가지까지 분류가 나옵니다.

그냥 간단하게 얘기를 해봅시다 이.

 

그냥 일반인이든 출가자든 간에 욕심많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욕심 없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남한테 법으로 베풀든 재물로 베풀든 마음으로 베풀든 베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딱 소유하기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거고, 분류를 하려면 여러 가지로 할 수가 있죠.

 

그리고 수행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경우도 있고, 집중이 최고다 해서 집중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여러분들같이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 위빳사나 수행하는 경우들도 있고, 수행법들도 사실은 다양합니다. 그것도 분류를 하려면 그거 다 분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분류는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다 필요한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삿다라고 하는 믿음이 없어서도 안 되고, 집중하는 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고, 또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법이 없어서는 안 되는 거고, 이것들은 다같이 이루어져야 된다 하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거 말고도 분류하는 방법이 갖가지 있습니다. 범부하고 성인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또는 수행에서도 수행의 과위에 대해서 분류하기도 할 것이고, 선정에 있어서도 선정의 분류에 대해서 1선정부터 8선정까지 분류를 해서 사람들을 구분하기도 할 것이고, 구분하는 방법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여기에서는 여섯 가지 부류로써 분류를 해놨을까?

사실은 여섯 가지 분류는 경전의 내용은 아닙니다. 그럼 경전이 아니고 어디에서 이렇게 분류를 했을까? 아비담마에 있죠. 내가 지어낼 수는 없는 거잖아.

아비담마, 특히 청정도론 같은 경우에 그런 것에 따라서 분류를 한 겁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면 이렇게 분류하는 목적이 뭐라?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수행을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주제를 받아가지고 바르게 빨리 성취를 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구분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게 있었어요.

어떤 스님이 출가를 했는데 과거생부터 어려운 거 없이 자랐거든. 부유하게 잘 자라왔는데,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손끝에 물한방울 묻히지 않고 하인들 다 부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런데다가 그런 사람들이 공통적인 것이 뭐냐면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고, 추접고 더러운 것들은 볼 기회가 없으니까, 그렇게 계속 세세생생 살아가다 보니까, 이생에서 출가를 하는데 깟사빠존자 밑에 출가를 했는데,

 

깟사빠존자가 생각하기에 저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거니까 저걸 없애야 된다. 그걸 왜 없애야 된다고 그러냐면 그것은 집착을 낳고 갈애를 낳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좋아하고 화려한 거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러대. 실컷 욕망대로 살다 보면 욕망이 끝나지 않겠느냐, 그러니 욕망대로 실컷 산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법은 없거든. 욕망의 끝이 있을 수는 없어.

 

그런데 깟사빠존자 같은 경우에는 그런 위험성을 보고 아, 저 스님에게는 수행주제를 줄 때 반대적인 성향의 수행주제를 줘야 되겠다 해가지고, 아수바바와나라고 해가지고 부정한 것들, ‘너는 참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 아니고 더럽고 추접은 것이다. 그래서 이 몸이라고 하는 것도 탁 죽고나면 참 쓸데없는 것이다’ 하는 것을 수행주제로 줍니다.

혹시 죽은 사람 본 적 있어요? 스님들은 특히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생활하던 스님들은 사람들 죽은 모습을 굉장히 많이 봅니다. 각 병원마다 가면 죽은 모습, 하루 지난 모습, 이틀 지난 모습, 이렇게 해가지고 쭉 그 모습들을 그대로 박제를 해가지고 구더기 끓는 모습까지 박제를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차례씩은 꼭 스님들은 거길 가야 돼. 거기 가가지고 그 모습을 보고 아, 참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할 것이 없다, 아름답다하고 생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참 변하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도록 자꾸 훈련을 시키는데, 깟사빠존자가 그 방법을 쓰는 거라. 여기 사람들을 보면 하루가 지나면 여기에 멍든 자극들이 조금 생겨나는 거라. 딱 하루 지나고 나면. 이틀 지나고 나면 이게 문드러집니다. 삼일 정도 지나고 나면 어디서 나오는지 구더기가 나오는 거라.

이렇게 쭉 변해가는 모습들을 그대로 관찰하라고 그러는 거라. 이 스님한테.

 

그런데 이 스님은 도통 그걸 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리 깟사빠존자가 설명을 해줘도 이걸 이해를 못하는 거라. 더럽고 추한 것들을 보지 못 했으니까. 그래서 수행주제를 받기는 받았는데 그거 가지고 집중될 수도 없고, 수행이 잘 될 리가 없다고. 4개월 동안 했는데도 도통 결과물이 없거든. 아, 이거 안되겠다. 내일 돼서는 환속해야 되겠다. 출가해가지고 아무런 그게 없으니까 환속할 수밖에 없어. 그래가지고 오늘 마지막으로 부처님한테 인사나 하고 갈란다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탁 가니까 부처님이 그 청년을 보고,

 

그런데 부처님이 특별하다는 것이 뭐냐면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뿐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것까지도 다 파악을 해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걸 빨리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끔 할 수 있는가를 아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걸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아사와'라고 들어봤어요? 번뇌를 얘기할 때. 번뇌가 있으니까 성질내고 욕심부리고 할 거 아니라. 그게 툭 튀어나오는 걸 아사와(āsav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거.

그런데 성질 내는 사람들은 전에부터 성질내는 걸 계속 쌓아왔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 잠재되어 있는 것, 수면에 있는 것, 그래서 그걸 수면번뇌라고 그럽니다. 무의식 같은 거 하고는 틀립니다 이. 잠재돼있는 건데 이게 원인이 돼가지고 튀어나올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볼 수도 없을 뿐아니라, 본인도 자기 자신도 그 수면번뇌를 알 수가 없어요. 그걸 빨리어로 아누사야(anusay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원인이 돼가지고 아사와(āsava)라고 하는 번뇌들이 일어나는 건데,

부처님은 그 아사와 뿐만아니라 아누사야-수면번뇌까지도 다 훤하게 알고 과거전생들도 이렇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 분이기 때문에 이 스님을 보고 얘는 수행주제를 잘못잡았다 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도통 알 수 있는 수행주제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사실은 깟사빠 존자의 말이 맞아. 그것이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일으켜주기 위해서 했는데 접근하는 방법이 틀린 거라. 부처님은 접근하는 방법을 다르게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연꽃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연꽃이 처음 필 때 아침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되면 꽃이 오므라듭니다. 이게 며칠 가는지 알아요? 동남아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한 삼일 가고, 삼일 뒤부터는 꽃잎이 떨어져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그거보다는 조금 더 오래가겠죠. 한 일주일 간다 치자. 그리하더라도 일주일째 되는 때가 꽃이 굉장히 아름다워요. 최고 아름답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아침에 그렇게 확 피었을 때는 저녁때는 다른 때 같으면 꽃잎이 다 지는데 꽃잎이 떨어지는 법은 없는데, 그러니까 동남아 같은 경우에는 3~4일 정도,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 정도 지나고나서 마지막 꽃이 활짝 만개했을 때는 오후돼서 꽃잎이 질 때는 꽃잎이 하나씩 떨어집니다. 오늘은 한 개 떨어자고 또 내일되면 또 꽃잎이 몇개 떨어지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만개하는 꽃잎을 부처님이 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꽃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과거부터 해가지고 현재까지 온통 화려한 것들만 보아오니까 집중하기는 되게 수월하거든. 다른 사람들은 화려한 것들을 보면 그것에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키는데 이 스님은 그거 가지고 집착을 일으킬 필요 없이, 그거 다 자기 건데, 이때까지는. 그러니까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집중할 수가 있는 거라. 집중을 해보니까 실제로 꽃잎이 나중에 닫히면서 하나씩 하나씩 떨어집니다.

 

아, 변하는구나! 무상하구나! 그리고 저렇게 탁 떨어지고 나니까 되게 보기 싫거든.

사실은 이게 깟사빠 존자가 원했던 방식인데 부처님은 오히려 그런 습성을 알고 화려한 것들을 봐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무상한 성품들을 일깨워주는 방법을 쓴 거라. 깟사빠 존자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바로 무상한 것들을 가지고 무상한 성품을 일으키도록 만들어주는 거고, 그 차이가 나는 거라.

결국 그 스님은 그날 바로 깨달음에 이릅니다.

깟사빠 존자도 이렇게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같은 스님들이 여러분들 수행주제를 똑바로 준다? 사실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많은 대화를 통해가지고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을 해가지고 수행주제를 줍니다.

 

그래서 그걸 측정하기 위해서 평소에 걸을 때 뒷발부터 닿습니까, 앞발부터 닿습니까? 또는 옷 입는 것을 보고 평소에 꽉 조이는 옷을 입는지 아니면 수수한 옷을 입는지 화려한 옷을 입는지. 밥 먹을 때 가득 넣어가지고 빨리 먹는 건지 아니면 천천히 먹는지, 아니면 잠잘 때도 뒤척여가면서 자는지 아니면 일어날 때 발딱 일어나는지 아니면 빈둥빈둥빈둥하면서 한시간 동안 뒹굴다가 다시 일어나는지 이런 걸 쭉 물어봅니다. 물어보고 나서 아, 이 사람은 이러한 성품을 지녔구나, 이생뿐 아니라 과거생부터. 그럼 거기에 맞는 수행주제를 주고.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은 수행주제가 맞습니다. 그걸 체계화시켜 놓은 게 바로 아비담마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사실은 무리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견해, 그리고 여러분들의 판단들이 정확하다고 얘기를 못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판단들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주제를 받게 되면 자기 스스로 수행주제를 선택하려고 하지 말고 스승들에게 수행주제를 받고 또는 점검을 받으면서 수행주제를 받고 하라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잘못 받은 수행주제는 이 스님과 마찬가지로 도통 진척이 없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의 성향이 어떻는가 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또 그 성향에 맞게끔 수행법들을 배우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나는 집중하는 거 별 필요없고 그냥 위빳사나만 하겠다 그럴 거 같으면 이거 사실 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들이, 특히나 현대인들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머리 회전을 가지고 집중하는 힘들을 키우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그거는 사실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집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그래서 이런 주제들도 알고 공부하면서 나중에 수행할 때 믹스시키는 방식으로 하면은 참 좋은 결과들이 있다 하는 생각을 가지기 바랍니다.

 

자! 그래서 여섯 가지 습성, 스님은 '습성'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성향, 어떤 사람은 성격, 어떤 사람은 기질,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습성이라는 용어는 뭐냐면 과거부터 익혀온, 현재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익혀온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습성이라는 용어가 그래도 좀 더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습성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즐겨하는데, 여러분들에게 자꾸 습성이라고 하면 잘 못 알아들으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여섯 가지로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저번에 얘기했듯이

첫 번째는 탐욕(rāga-cariyā)의 습성이 강한 사람, 그다음이 성냄(dosa-cariyā), 세 번째가 무지(moha-cariyā)의 성향(습성), 이거는 탐․진․치에 해당이 되는 거죠? 이 3가지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반대되는 게 믿음(saddhā-cariyā), 그다음에 사색하는 사고(vitakka-cariyā), 그다음에 지혜(buddhi-cariyā)의 성향(습성)입니다.

붓디(buddhi)라고 하는 것은 지혜라고 하기보다는 분명하게 아는 것, 앎이라고 하는 것, 이런 의미들이 강한데, 그리하더라도 지혜가 없이 분명하게 아는 것들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지혜'라고 번역을 해놨습니다. 원래 지혜의 빨리어는 빤냐(paññā)라고 하는 용어가 있는데, 그렇게 해놨습니다.

 

이렇게 전부 6가지로 분류를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 6가지로 나누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나누느냐면, 행동거지가 어떻는가?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행하는 게 좀 빠르게 뭔가 행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되게 느릿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하기 귀찮아가지고 겨우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행할 때 가장 좋은 건 어떤 거라? 행할 때 빠르든 느리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행하면서 내가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행하는 거라.

어느 스님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어느 스님이 얘기하다가 팔을 이렇게 했어. 그러고 나서는 다시 천천히 이렇게 합니다. 조금 전에 이렇게 한 거하고 그뒤에 이렇게 한 거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죠? 말하면서 이렇게 했을 때는 말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팔을 이렇게 한 걸 자기가 인식을 못한 거라. 아차! 한 거라. 그러고 나서는 말하는 걸 중단하고 팔을 한번 다시 굽혔다가 펴는 거라.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경행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빠르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거는 수행자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빠르게 해야 될 사람은 빠르게 하면 됩니다. 빠르게 하더라도 그 움직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파악을 하고 그리고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4대요소에 대한 것들을 변하는 특성들을 분명하게 파악을 할 것 같으면 경보수준으로 빠르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이렇게 해보면 경행을 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아, 내가 알아차림의 강도가 얼마만큼 강한가 하는 것을 걸으면서 측정을 합니다. 아주 천천히 걸어도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그걸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엔 그렇게 빠르게 하더라도 완전하게 다 알게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 보고 걸어보라고 그럽니다. 여기서 저기까지. 그러면 자기 딴에는 안 넘어지려고 되게 조심해서 걷는데, 큰스님들이 보는 입장에서는 보면 참 한심하거든. 그런다 해가지고 지금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거라.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일상속도로 그냥 저리갔다가 이리 오더라도 스님이 “참 잘했다” 하고 그럽니다. 그 행동거지에 얼마만한 알아차림을 지니고 있는가? 완전하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하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리고 있을 경우에는 설혹 그 사람이 과거부터 익혀온 습성들이 성냄이 많은 사람이다, 아니면 탐욕이 많은 사람이다, 하더라도 그 습성대로 그대로 걷게 돼있어요.

 

저번 시간에 얘기했죠? 아라한이 되더라도 그 습성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남아있다는 거라. 초콜렛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 사람은 초콜렛 좋아해요. 그걸 좋아해가지고 집착하고 갈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성품들은 남아있다는 거라. 몸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것들이 남아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습성대로 그대로 걷게 되는 거라.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가지고 걷는 경우에는 게 빠르든 느리든 “아, 참 잘 걸었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걸음을 보면은 보통 이 사람이 어떤 습성들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표가 납니다.

 

그다음에 하나 또 분류하는 게 뭐냐면 일하는 것들을 어떻게 일하는가에 따라서 표가 납니다.

 

뭔가 바쁘게 일을 하는 경우들도 있고,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느긋하게 일을 합니다. 일하는 속도가 만약에 오늘 여기에 못을 쳐가지고 스님들 옷걸이를 하나 만든다, 재단해가지고. 어떤 스님은 이걸 하루종일 해요, 꼼꼼하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딱 재보고 그냥 금방 뚝딱 해가지고 마칩니다. 일반에서는 후자를 더 선호하죠? 그게 효율성이 있으니까.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고하는 것들이 발달돼있으니까 금방 치수 어느 정도 재고 하면 머릿속에 데이터가 딱 나오니까 짜를 거 짜르고 해가지고 똑 똑 똑 똑 똑 해버리면 되지. 그런데 그분은 사고의 성향·습성이 강한 것이지 그래서 그 습성대로 그렇게 빨리하는 것뿐인 것이지 사고의 습성이 있다고 해가지고 혼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힘드는 거라. 또 그런 사람이라고 해가지고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한다고도 얘기를 못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이 일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일하는 것들을 보고 아, 어떤 습성이 있다는 것이 표가 납니다. 일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빠르고 느리고 어떻게 일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고의 개념이 없는 사람은 이걸 하루종일 그럴 수가 있어요. 짜르는 걸 몇번 짜르기도 하고 해가지고 할 수도 있는 거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거라. 뭐라고 그랬어요? 거기에 온 마음을 집중해가지고 일하는 데다가 투자를 하는 거라.

그런 사람은 설혹 내가 아둔한 습성, 무지한 습성들이 있다고 해가지고 하루종일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 습성은 바뀌어나갑니다. 어떻게 바뀌어나가겠어요? 이거 만드는 걸 한 서너번만 해봐. 그럼 요령이 생겨가지고 금방 하게 됩니다.

뭐로 가지고 바꾸는 거라? 훈련으로 인해가지고.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면서 해나가는 것으로 인해서 이걸 빨리하는 일의 효율성도 올릴 수가 있다는 거라. 지금은 느릴 수가 있는데 그 느린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그렇게 바뀔 수가 있다는 거라.

 

수행하는 것이 밥을 먹을 때 모든 것을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 느리다고 그럽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느립니다.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먹는 것들이 훈련이 되고 나면, 그다음엔 정상적으로 먹는다고 하더라도 아주 바른 방법으로 먹고, 그리고 정상적으로 먹어도 일반적인 속도하고 똑같은 속도로 유지가 돼나가는 거라.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이 먹는 거 하고는 분명한 차이가 나는 거라.

그래서 늦더라도 어떤 경우든지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일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면서 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어리석은 행위든 아니면 욕심많은 행위든 그것들을 바꾸어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먹는 것에 따라서 분류를 한다고 그럽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먹을 때 그냥 대충대충 씹고 넘기고, 이렇게 했을 경우에는 이게 푸고 나서 밥이나 음식물 같은 것이 완전히 안 떨어진다고 인식하고 나서 가져와야 되는데 그냥 가져오니까 중간에 툭 흘려버린다든지 아니면 입에 넣으면서도 밑으로 툭 흘려버리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천천히 먹어도 되는데 그리해도 충분한 시간이 있는데도 뭐가 급한지 그냥 막, 어떨 때는 보면 쑤셔넣기 바쁘다 하는 정도로 그럽니다. 그렇지 않으면 밥만 먹으면 뭔가 허전해. 그러니까 밥을 먹으면서 리모컨 가지고 테레비 조물락 조물락 하든지 안 그러면 옆에 사람들 하고 수다떨고 있든지 그러게 된다는 거라.

 

대부분 탐·진·치가 많은 사람들은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먹을 때 밥을 참 맛있게 잘 먹는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탐·진·치의 성향들이 좀 적어. 그래서 먹을 때도 바른 방법으로 자꾸 먹을려고 그러는 거라.

 

여섯 가지 성향들을 만드는 걸 구분하는 이유는 뭐냐면, 앞에 3개는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불선한 마음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또 불선한 결과들을 낳기 때문에, 수행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분들 공덕 쌓는데도 여러분들 살아가는데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여러분들 자신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한테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그걸 빨리 바꾸라는 얘기라. 바른 방법으로.

먹는 것도 항상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해야 됩니다. 처음에 늦게 먹어도 괜찮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하지 말고 먹으라고 얘기는 못하겠어요. 여기는 집중 수행처가 아니니까. 그런데 단지 먹으면서 입안에 음식물이 있는 상태에서는 말하지 말아라는 거라. 음식물을 먹고 나서 얘기를 할 경우에는 얘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그치고 또 밥을 먹고, 이런 식으로 자꾸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면 됩니다. 가장 좋은 거는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어라. 밥만 먹는 것이 최고 좋다는 거라.

 

그다음에 보는 것에 따라서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 스님이 이 시계를 봤을 때 뭔 생각을 일으키는 줄 알아요? ‘음, 이상한 거네.’ 이렇게 하니까 이렇게 시간이 가고 요렇게 하니까 또 요렇게 바뀌고 신기하죠? 나도 처음 봤거든. 그러면서 이거 보면서 수행할 때 이거 사람들한테 하나씩 있으면 수행하기는 참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걸 볼 때 자기한테 없는 거거든. 어, 저거 석화행보살한테 빨리 물어봐야지. 그거 자기 하나 가져가도 되느냐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보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보는 것은 각자 다 다릅니다. 어떻게 보는 게 맞겠어요? 그냥 봐. 그냥 보면 돼. 그게 답이라.

볼 때는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냥 이게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 작용은 끝내야 돼. 그러고 나서 내가 돌이켰을 때 아, 이게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이거 어디서 구했습니까? 하나 구했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고, 그거는 보는 거하고는 다르게 다른 작용들이라.

그래서 볼 때는 볼려고만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여기에서 탐·진·치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보는데 그렇게 안 보거든. 보면 예쁘다, 좋은 옷이네. 이렇게 보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자기의 갈애에 인해서 조종당하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심리현상에 따라서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심리현상은 참 많이 있습니다. 사기치는 성향이 강한 사람, 또는 욕심부리는 걸 잘하는 사람, 아니면 남한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건 다 심리현상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잖아. 여기 매주마다 탁발하는데, 탁발 올릴 때는 되게 기분좋게 ‘아, 스님 이거 잡숫고 몸 건강해져가지고 좋은 법 많이 설해주세요’ 하면서 집어넣는데, 이 많은 음식을 스님이 다 먹을 수가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스님은 그리 안 할려고 하는데도 어떤 경우에는 스님은 똑같이 먹는다고 했는데 자기 눈에 보이기는 자기 거 작게 먹거든. 그러면은 베푸는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금방 다른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그게 심리현상들입니다.

그런데 그 심리현상도 습성에 따라서 강한 것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 심리현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바꾸기가 힘들어진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수행에서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아라. 마음이 먼저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볍게 되는 것을 만들어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의 상태가 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탐진치에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대상을 보더라도 이거는 그 심리현상에 따라서 수행을 하게 되는 거라.

사람들은 무조건 기술만 익혀가지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한다, 그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이것만 알려고 자꾸 사람들이 먼저 대듭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먼저 마음이 그런 악한 심리현상으로부터 떠난 상태가 돼있을 때 이 대상은 저절로 마음에 비춰집니다. 드러나지게 됩니다.

마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뭐든지 대상을 찾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강한 대상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몸에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오로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배밖에 없는데 마음이 고요하게 돼있을 거 같으면 마음이 배를 알지 그걸 모르게 돼있겠어요?

 

그렇게 대상으로 다가가야 되는 것이지 지가 먼저 이렇게 탁 움켜쥐면서 대상으로 다가갈 것 같으면 그건 자기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는 거라. 대상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드러나집니다. 드러나진 걸 그냥 알면 됩니다.

내가 지금 알아차림의 강도가 요마만큼밖에 안된다, 그럼 그냥 움직임만 알면 돼. ‘나는 느낌을 왜 모를까?’ 자기 강도가 그것밖에 안되는 걸 어떡할 거라. 알아차림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면 느낌의 변화까지도, 미세함까지도 다 알 수 있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알아차려지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그러기 위해서는 나쁜 심리현상들이 축적되어서 습성으로써 굳어진 것들은 빨리 바꾸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여섯 가지 습성을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이거는 경전상에 있는 얘기들이고,

 

스님들은 여러분들을 측정할 때 어떻게 측정하느냐면,

 

호흡할 때 호흡 몇번 하는지 체크해보라 그럽니다. 1분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1번으로 했을 때, 이거는 편안한 상태에서 호흡하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금방 일하고 나서 설겆이 하고 나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편안한 상태 밥 먹고 나서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 가만히 앉아가지고 아니면 누워서든지 해가지고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1번 했을 때 1분 동안 몇 번 하는가?

우리도 처음에 수행 배울 때 그렇게 했거든. 그때는 성냥개비를 손에 쥐고 있다가 한번 숨 쉬면 하나 툭 떨어뜨리고, 또 하면 툭 떨어뜨리고 이러다 보니까 이게 인위적으로 되는 거라. 요즘은 좋은 게 있잖아. 타임워치라는 거. 요즘은 핸드폰에서도 그게 된다면서.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측정을 해보라는 거라. 그거 측정을 해가지고 그거 나오는 숫자에 따라서 습성들이 어느 정도 드러나집니다.

 

그다음에 걸을 때, 발을 끌면서 걸어가는지 아니면 발을 앞발 먼저 닿는지 아니면 그냥 평평하게 닿는지 뒷발이 먼저 닿는지 이걸 가지고 측정하는 거라. 그 두 가지 가지고 대부분 측정해가지고 아, 나는 어떤 수행이 어울린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다음에 할 때는 이 두 가지를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측정해와가지고 나는 이렇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수행법이 맞겠다 하고 얘기해줄 수가 있습니다.

 

자! 시간이 벌써 다 돼버렸는데, 요거는 시작도 못하고,

거기에 따라서 수행하는 방법들을 나누는데 여기서는 여섯 가지 습성들에 따라서는 보통 한 30가지 수행법들이 적용이 됩니다. 나머지 10가지 들은 대부분 그 습성에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누구에게든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물론 습성에 포함이 돼있지만 그것도 공통적으로 해도 무난한 것들입니다.

어떤 게 있을까? 위빳사나 수행할 때 수행의 예비단계 해가지고 네 가지 배운 거 있죠? 맨 처음 멧따바와나, 그다음에 붓다눗사띠, 그다음에 아수바바와나, 그다음에 마라나눗사띠 이 네 가지가 예비수행 단계라고 했습니다.

 

그중에 누구에게나 해도 무방한 게 뭐겠어요?

아수바는 조금 안 맞는 사람들도 있겠지. 아까 얘기했듯이. 아수바바와나는 부정관을 얘기하는 겁니다. 죽고 나서 몸이 변하는 상태.

그다음에 마라나눗사띠는 이 몸을 서른두가지로 나눠가지고 머리털 이거는 참 더러운 것이다. 이거는 내 것이 아니다. 이러면서 몸의 전체를 서른두가지로 분해해가지고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런데 몸을 서른두가지로 분해해서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마라나눗사띠인데,

그거 말고 몸의 부분부분을 사대로 분별해서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빨은 딱딱하죠? 그럼 딱딱함의 요소로써 알아차리는 겁니다. 호흡은 뭔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공기의 흐름이 있죠? 그럼 이걸 바람의 요소로써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요소로써 알아차리는 사대분별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여러분들한테는 부담이 없겠어요? 사대분별관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수월하겠죠? 그래서 앞에 얘기하는 마라나눗사띠라고 하는 것들은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의 예비단계 중에서 두 가지는 누구에게든지 해당이 됩니다.

부처님 떠올리라고 하는데 그거 안 맞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 그것도 누구에게나 맞는 겁니다.

이 두 가지는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조금 전에 얘기한 사대분별관에 대한 것도 누구에게나 맞는 것이고,

 

그다음에 하는 것들이 뭐냐면 빛, 빛을 대상으로 해서 하는 경우, 광명관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도 누구에게나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게 하고 집중할 수 있는 도구들 중에 하나로 그런 것들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이 여섯 가지 성품에는 포함이 안 돼있지만 누구에게나 맞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나빠나사띠,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행지도할 때 이 사람이 무슨 성품이다 하고 헷갈릴 경우에는 요 서너가지 중에서 주제를 줍니다.

호흡 알아차려라. 아니면 자애수행을 하라. 그렇게 해서 집중하는 법들을 먼저 익히도록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초기에는 누구에게나 맞는 수행법들을 적용을 하는 것들이 큰 도움을 줍니다.

만약에 처음에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호흡을 바로 알아차리는 데 호흡을 위빳사나 방법으로 알아차리는 것보다는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이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 수 있도록 먼저 해서, 대상이 드러나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을 알려고 하는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사마타 수행에서 위빳사나로 전환이 됩니다.

 

또는 자애수행을 한다, 자애수행을 할 때도 자애의 게송 ‘행복하기를’ 하는 데다가 마음을 두면서 진짜 행복해지는 상태를 떠올려야 되는 거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마음의 상태를 보면서 위빳사나로 전환이 돼야 되는 거라. 자애수행을 하더라도 이렇게 사마타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을 시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그 방법들을 동원을 하는 것이 훨씬 수행을 하는 데는 용이하게끔 됩니다.

 

어쨌든 여기는 40가지 수행법이라고 돼있는데, 실제로 적어놓은 것은 여기 여섯 가지 성향(습성)에서는 30가지만 적어놓았고 그 나머지 부분들은 생략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걸 자세하게 읽어보고 ‘아, 내가 이런 습성도 있구나’ 그러면은 나쁜 것들을 빨리 고치려고 해야 됩니다.

이걸 하는 이유는 여기에도 적어놓았을 겁니다.

 

[사람은 습성이나 기질에 따라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수행법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를 제대로 활용했을 때 그 효과 또한 큰 것입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하는 이유는 나쁜 것들을 좋은 것으로 먼저 바꾸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좋은 것으로 바꾸고 나중에는 그 습성과 관계없이 어떤 경우든지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 연결되는 형태들을 띠고,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바르게 해나가는 것들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