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 (20150313.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1. 09:00

https://youtu.be/lZlKAYhMFPA

*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 (20150313. 대구)

 

오늘은 법회를 하기 전에 하나 먼저 정리 조금 하고 시작할게요.

게시판에 보니까 '상가(saṅgha)'라는 개념을 '스님들을 상가라고 한다' 이렇게 나와있는 게 있던데, 게시판에 그런 게 하나 있죠? 홈페이지 안 봤었어요?

그런데 그거는 틀린 겁니다. 보리수선원 어디 밴드에서 인용한 거라고 하면서 그렇게 있더라고요.

 

어느 나라든지 '상가'를 '스님들'이라고 얘기하는 적은 없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위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잖아. 그런데 상가를 스님들로 얘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건 잘못된 겁니다.

 

지금 스님들이라는 용어는 미얀마 같은 경우는 '우' '아신' '빤디따' 이런 용어를 쓰고, 태국 같은 경우에는 '프라' '아짠' 이런 용어를 씁니다.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함두르' 그렇게 씁니다. 그런데 그거하고 상가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란 용어는 따로 있는 거고, 상가라는 용어는 따로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스님들을 상가라는 개념으로 부르고 있는 것들은 굉장히 잘못된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상가라는 개념은 '아리야상가(Ariya-saṅgha)'하고, 그다음에 '삼무띠상가(Sammuti-saṅgha)'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성인의 경지에 이른 분들을 사쌍팔배라고 그러죠? 수다원향부터 수다원과, 아라한과까지 해서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다 상가라고 그럽니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그걸 '아리야상가', '성스러운 상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출가자도 포함되고 재가자도 포함되는 도의 경지에 이른 분들 전체를 통칭하는 거고,

 

그다음에 또 하나 개념이 '삼무띠상가'라는 개념을 씁니다. 그걸 보통 '지금 존재하는 상가'를 얘기합니다.

존재하는 상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그 안에서 상가의 고유한 행사들을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의식을 해야 되고, 포살의식을 해야 되고, 결제를 해야 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잘잘못을 구분하는 그런 회의들을 해야 되고, 이런 것들을 '상가 고유한 행사'라고 해서 '상가깜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상가깜마를 하는 무리들'을 얘기합니다.

 

그 상가깜마를 하는 무리들은 지금 현재는 출가자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출가비구상가', '출가비구니상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상가는 엄밀하게 얘기하면 출가자들 중에서 상가 갈마를 여법하게 하는 무리들을 얘기합니다. 그 상가의 구성요건은 언제든지 네 명 이상이 돼야 그 상가깜마를 할 수가 있거든.

 

그래서 여러분이 조금 전에 그 게송 외울 때도 '빅쿠상가'라고 안 하고 '실라완따상가'라고 합니다. 지금은 여기 있는 스님은 나혼자 뿐이다. 그럼 상가가 아니라. 개인의 비구인 것이지. 그럴 때는 상가라는 용어를 안 씁니다. 두 명의 스님들 세 명의 스님들이 있다고 해서 상가라는 이름을 쓰지를 않습니다.

상가는 어떤 경우든지 네 명 이상이 돼야만이 상가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조건을 다 충족시킬려면 적어도 '네 명 이상의 출가한 스님들이 한 곳에서 상가깜마를 하는 무리가 모여있는 것' 그걸 '상가'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스님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너무 폭이 넓어져버립니다. 상가깜마를 하든 말든 아니면 출가자들은 다 거기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거하고는 개념이 반드시 틀린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협소하게 볼 것 같으면 '출가한 스님들 중에서 도와 과에 이른 사람들만' 상가라고 합니다. 협소하게 붙일 때는 그렇게 합니다. 아무리 넓게 한다고 하더라도 '출가한 스님들이 네 명 이상이 모여서 상가깜마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그걸 상가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개념 자체가 '스님들'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걸 여러분들한테 조금 지적을 하고, 그게 전통적인 테라와다의 상가에 대한 개념입니다. 괜히 개인의 생각들이나 이런 것들을 남긴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오해를 하도록 하면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그거를 먼저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됐죠? (예)

 

그래서 스님이 자꾸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한 곳에 스님들이 4명 이상 모여서 서로 수행하고 수행지도도 하고, 또 상가깜마도 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만들어져야만이 그게 진짜 상가가 된다 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가 되도 그게 되겠지’ 하고 바라고 있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께 여쭤보고 싶은게 있는데요, 지금 보리수선원이든지 호두마을 선원이라든지 이런 데가 있는데, 저는 스님 테라와다에 대한 책을 보고 그 상가가 빨리 구성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참 크거든 예. 큰데, 그럼 그런데서는 그런 행사를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 저는 모르는데, 제가 그냥 가서 봤을 때는 스님 책에서와 같이 그런 모습이 안 느껴져서...

 

스님 : 아직은 그 어느 곳에도 4명 이상의 스님들이 모여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가깜마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고, 단지 여러 군데 선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선원에서 네 명 이상의 스님들이 상주를 하면서 상가깜마를 할 경우에는 그거는 하나의 상가가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보면 부처님 상가, 또는 사리불 존자의 상가, 그리고 우빨리존자의 상가, 우빨리 존자를 중심으로 거기에 4명 이상의 스님들이 모였을 때 그게 하나의 상가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상가, 하나의 상가는 겹쳐지지 않도록 하게 되고, 하나의 상가의 범위는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30km이내에 존재하는 스님들은 이 하나의 그룹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꼭 안 머물더라도 30km 이내에서 거주하고 있으면 이 상가의 무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30km 이내에 있는 스님들은 보름에 한번씩 와서 상가깜마를 해야 되고, 그리고 무슨 여기 행사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참석을 해가지고 일을 해야 되는 거라. 그걸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가들은 여러 군데 생기는 것이 좋습니다.

단지 그렇게 여러 군데 생기더라도 상가 구성이 안된 상태에서 개인의 독립된 꾸띠 형식으로 토굴 형식으로 지어지는 것은 조금 지향하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 누군가 한사람이 있다가 나중에 인원이 또 늘어나고 하면은 네 명의 무리들이 만들어지고 이렇게는 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상가가 구성되는 상황이 되도록 처음부터 가람들을 일구도록 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절을 지을 때 어떤 경우든지 테라와다에서는 최고 먼저 짓는 것이 스님들 방부터 먼저 짓습니다. 네 명의 스님들이 묵을 방이 돼야 그것이 하나의 상가가 구성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방부터 먼저 짓고 수행처 짓고 그다음에 스님들이 상가깜마를 할 수 있는 포살당 짓고, 그러고 나서 맨 마지막에 법당을 짓는 형식을 취합니다.

 

우리하고는 정반대죠? 그래서 법당에 부처님 모시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스님들이 거주할 공간을 마련하는 게 최우선적으로 사실은 돼야 되는 거라. 그런 겁니다. 이해됐습니까?

수행자 : 예,

 

수행자 질문 : 스님. 그러면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그럼 그 상가에 소속된 스님들은 각각의 상가에서 같은 호두마을 상가의 스님, 보리수선원의 상가의 스님들이 다 중복이 돼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다 소속은 분명히 해야 되는 겁니까?

 

스님 : 그거는 분명히 소속이 돼있습니다. 대신에 내가 만약에 여행가서, 호두마을에 여행을 갔는데 그때가 마침 상가깜마를 하는 때다. 그럼 똑같은 테라와다 스님들은 그 상가에 그때는 소속이 되게 됩니다.

그대신에 내 거주처는 여기 대구라면 대구인데, 지금 현재 내 몸이 어디가 있느냐는 거라. 그 상가깜마를 할 때. 만약에 내가 호두마을에 가 있으면 호두마을의 일원이 되는 거고, 거기서 상가깜마를 해야 되는 거고, 그걸 '현전상가'라고 그럽니다. '현재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 머물고 있는데 그 상가를 현전상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개념입니다. 됐습니까? (예)

자! 그다음에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돼 있는 걸 먼저 펴보십시오.

저번에 언젠가 한 번 이 비슷한 걸 하나 내준 적이 있죠? 「지금 이 순간을 살자」 하는 것으로. 거기에 내용들이 어떤 거였어요?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계속 이어져야 되고 그게 안 될 때 그걸 숙달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급한 게 계를 지키는 것, 그다음에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응급처방약으로써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에 항상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계를 지켜야 된다. 그거 두 개는 필수조건이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갖추어졌을 때 알아차리는 것들도 능숙하게 되고 점점 더 알아차려서 지금 이순간을 살게 된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죠? (예!)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하시면서 마지막에 한 말씀이 있습니다. 뭐라고 했어요? 사띠하라고 했어요?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압빠마--나 삼빠---(appamādena sampādethā)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삼빠-데-타-(sampādethā)는 열심히 노력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압빠마다(appamāda)는 조금 의미가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그 용어가 나올 때는 어떻게 했어요? 아난다가 부처님이 이제 열반에 든다고 하니까 “부처님 열반에 드는 것은 좋은데 아무 말씀 없이 열반에 들겁니까? 뭐라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아난다야,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내가 손아귀에 감춰놓아 비밀스럽게 감춰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설해야 될 것은 이미 다 설했다.” 설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러면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그렇게 얘기했거든

 

쉽게 말하면 이미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들은 다 설해놨다는 거라. 그럼 그 뒤에 후대에 나오는 경전은 뭐라? 뭐 화엄경, 금강경, 그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건 아니죠? 그거는 부처님이 일부러 비밀스럽게 감춰놓은 건가? 비밀스럽게 감춰놓은 비밀스러운 것은 없다고 했는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어떠한 경우든지 다 설했다고 그랬거든.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하고 치부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유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유언이라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전제조건이 두 개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이때까지 할 말을 다 못했을 때, 뭔가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그런데 부처님은 처음부터 뭐라고 그랬어요? 설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그랬어요. 모든 건 다 까발려가지고 다 공개하고 다 설해버렸다는 거라. 그러니까 더 이상 설할 것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유언을 남길만한 조건이 처음부터 안 돼.

 

그다음에 유언을 남기는 두 번째 조건은 자기가 남긴 것 중에서 뭔가 싹 뒤집어야 될 경우에는 유언을 통해서 뒤집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앞뒤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설할 때의 형식들이나 중간에 설할 때의 형식들이나 마지막에 설할 때의 형식들이나 형식들은 전부 다 동일합니다. 전부 다 이익이 되고 좋은 것들만 하나의 길로만 쭉 설해놓았기 때문에 뒤집을 만한 상황들이 없어. 안 돼.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이 안 돼.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은 유언은 없다!

쉽게 말하면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임종게 남기는 것은 그것은 불교적인 것은 아니다 하고 치부를 하는 겁니다.

어떤 테라와다 스님들이라도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임종게를 남기는 법은 없습니다. 단지 이때까지 쭉 자신이 해왔던 거 반복해가지고 법을 설하고 열반한다든지, 아니면은 “그래. 그래도 너희들은 참 잘 살아왔으니까 열심히 노력해라. 그래야 우리 간 길을 따라올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하고 열반에 들게 됩니다. 우리하고는 완전히 좀 틀리죠? 테라와다 스님들이 임종할 때는.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이 마지막에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그렇게 얘기합니다.

 

삼빠데타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는데, 「힘써 노력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압빠마다는 잘 이해를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보통 「방일하지 않는다」 하고, 「불방일」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견 맞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얘기합니다.

 

그럼 아무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압빠마다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을까?

여러분들 사회에서 열심히 산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바르게 열심히 사는 그것도 압빠마다에 속할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저걸 훔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훔치는 것, 그걸 열심히 노력하는 것, 나쁜짓을 하는 것도 그것도 압빠마다라고 할 수 있을까? ('잊지않음'이요) 예? 뭐가 잊지않음이요? (압빠마다가 잊지않음이요)

압빠마다는 '잊지않음'이라는 용어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그거는 사띠의 기능에 속하는 거고.

 

그래서 압빠마다는 그런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죠? 어떤 경우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뭔가 결과가 나타나야 돼. 어떤 결과가 나타나야 될까? 뭐 열반에 이른다든지 아니면 뭐 불사의 몸이 된다든지, 아니면 내가 천상에 태어난다든지, 뭔가 그런 결과들이 있는 경우에 압빠마다라고 씁니다.

그래서 '압빠마다'라고 하는 것은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열심히 마음을 갈고 닦고 노력하는 것들!" 이걸 압빠마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냥 아무거나 나쁜 일들 열심히 노력하는 거,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사회생활 열심히 하는 거, 사회생활 열심히 하는 것은 재산을 많이 모으고 명예는 높아질지 몰라도 그것은 변하는 성질의 것들입니다. 변하는 성질의 것들을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 가지고 그것들을 압빠마다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럼 압빠마다는 뭐라? "깨달음이라고 하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들만" 압빠마다라는 명칭을 붙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다시는 죽지도 않고 다시는 태어나지도 않는 불생불사의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계도 지키고 보시도 하고 수행도 하고...)

그거는 바라밀을 쌓는 것이지. 바라밀은 좀 더 좋은 조건에 태어나기 위한 좋은 조건이 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안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윤회의 세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거는 그러면 압빠마다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라밀의 영역에 속합니다.

 

압빠마다의 영역에 속할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해탈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그거 외에는 압빠마다에 해당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을 탐진치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이게 압빠마다라. 그게 열반의 경지인 거고. 그렇게 계속해가지고 쭉 그냥 자동적으로 진행이 될 때 그거는 열반의 경지에 있는 거라. 죽음이 열반이 아니고.

 

그래서 압빠마다의 용어를 여러분들이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됩니다. 간혹 불교TV에 보면 “사회생활 하는 것을 열심히 노력하라” 그것도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건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거는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지 그걸 두고 방일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하지를 않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에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하는 것은 뭐하라는 얘기라?

압빠마다로 열심히 노력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열심히 살아가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제자들에게 남기는 말 중에 그것같이 좋은 말이 어딨겠어? 그거 이상 가는 게 어딨어. 그렇게 하면 반드시 열반에 이른다는 거라. 그래서 제자들에게 남길 수 있는 말 중에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최고인 거라.

 

그래서 대부분 지금도 테라와다 스님들은 마지막 임종 때 거의 대부분 법문을 합니다. 우리 같이 정신이 혼미해가지고 돌아가시는 경우는 없어. 그건 어린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그러는 거지, 큰 장로스님들은 정신이 해이해져가지고 돌아가시는 경우들은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보면 임종하는 날이 되면 어느 정도 내가 어느 때가 되면 임종할 것이다 하고 예언을 하고, 그러고 나서 제자들이 다 모이게끔 하고 나서 마지막 법문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하루 뒤에 돌아가시는 분도 있고, 그러고 나서 바로 그냥 돌아가시는 분도 있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냥 평상시 법문하는 내용들을 구구절절이 얘기하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다 하고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내가 가르치는 수행법 따라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라. 그것밖에 너희가 할 일은 없다. 그 얘기밖엔 할 얘기가 없어. 부처님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도 아닌 거고, 부처님이 그 말한 거라. 그래서 임종게라는 것은 없지만은 마지막에 한 말씀은 여러분들 자꾸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 되는 거라.

 

Appamādena sampādethā.(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열심히 노력하라!

 

가슴 찡 안 해요? 나는 가끔씩 경전 구절을 빨리어로 읽으면서 꼭 딱 걸리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몇 개가. 그중에 하나가 이 마지막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여기 보면 ‘아, 참 저 속에 다 함축되어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 그래서 '압빠마다'를 다른 말로 표현을 할 때 "압빠마도 아마따 빠당(appamādo amatapad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압빠마다(appamāda)'는 인제 무슨 뜻인지 알죠? (예)

'아마따(amata)' - 불사(不死).

죽지 않는 사람은 없죠? 부처님도 돌아가셨는데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죽지 않는다는 거는 뭘 의미해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할 일들을 다 마쳤다는 거라!

 

그래서 더 이상 태어남을 짓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다시 재생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불사(不死)는 곧 불생(不生)을 얘기합니다. 다시 태어남이 없다! 여러분도 할 일을 다 마쳐야 될 거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인간으로 태어나서 더 이상 이 이상 해야 될 일이 없게끔 만드는 것, 그걸 '아마따(amat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마따(amata)'하고 비슷한 용어로 쓰는 것들이 한글로 하면 '적정', '안온의 경지', '평온한 경지', 평온한 경지는 선정을 열심히 개발해가지고 멸진정 상태에 들었을 때 '케마(kema)'라고 하는 안온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다음에 똑같은 용어가 '닙바나(nibbāna)·열반'이라는 용어입니다. 더 이상 탈 것이 없는 거라. 꺼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생을 받을 것들이 없고, 내가 행위하는 것들은 선과 불선을 떠난 행위 자체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업을 쌓아야 될 일들을 하지 않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것들이 아마따(amata)와 동일한 언어로 쓰는 그런 것들입니다.

 

'빠다(pada)' 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는 뭐라고 번역을 해놓았어요? '말, 도, 길, 걸음'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여러분들 말도 빠다에 해당이 됩니다.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빠다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걸어가야 될 길이 아니라. 그러니까 해야 될 말이 아닌 거라.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선한 말들 바른말들 이런 것들을 할 때, “아, 내가 부처님이 걸어간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하고 얘기할 때 빠다(pada), 그 말도 빠다에 속하는 거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을 걸어갈 거 같으면 도와 과에 이르기 때문에 도를 의미할 때도 빠다(pada)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리고 걸어가는 것은 어떻게 걸어가야 돼요? ‘휴웅’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한발짝 한발짝 한발짝 걸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발짝 한발짝 한발짝 떼는 것들도 빠다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발짝 한발짝 떼는 것들을 지가 모르고 걸어갔다? 그럼 그거는 빠다에 들어가지를 않는 거라. 내가 걸음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내가 그 걸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알아차리면서 옮기면은 나는 그 빠다의 길을 가고 있는 거라. 불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거라. '아마따 빠다(amatapada)' 그럽니다. '죽지 않는 길!'

 

경행할 때 그래서 알아차리면서 걸어라 그러는 거라. 뭔가 행위를 할 때 알아차리면서 행위를 하고 있으면 불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거라. 지금. 죽지 않는 길을.

죽지 않는 길을 걸어가면은 압빠마다(appamāda)라. 죽지 않는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은 그거는 빠마다(pamāda)가 되는 거라. 이해하겠죠? (예)

 

그러니 '압빠마다'라고 하는 의미 자체는 어떤 의미가 돼요?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을 탐··치 없이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때!'

 

여러분 아까 탁발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이렇게 와가지고 여기에다가 공양물을 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어요.

처음에 출발할 때의 마음하고, 넣을 때의 마음하고, 돌아갈 때의 마음하고 똑같은 알아차림을 가지고 그렇게 한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이 공양물 올린 것은 온전하게 여러분들 것이 되는 거고,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이 공양물 올린 것은 여러분들한테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불사의 길을 걸어가라고 마련해준 것들인데,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오면서 망상부리고, 넣으면서 넣은 줄도 모르고 툭 집어넣어버리고, 가면서 ‘아휴! 인제 다 끝났다’ 하고 싹 가버렸다, 그러면 공양올린 거 이거는 그냥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냥 하나의 음식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거라.

공양물 하나 올릴 때도 이러는데, 여러분들 행위 자체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게 딱 정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외에는 할 방법이 없는데 으짜꼬? 다음에 뭘로 태어날지 어떻게 알아? 만약에 윤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 끝이다 할 거 같으면 더더구나 소용없는 거고. 지금밖에 없어! 지금 밖에는! 그런데 헛되게 시간 보낼 것이 어디 있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빨리 발심해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되고, 그런 것들을 그렇게 걸어갈 때 우리는 “아, 참 저 사람은 부처님 걸어가신 길을 걸어간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코끼리가, 코끼리 수명이 몇살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한 50년 정도 되나? 인간보다 좀 작게 삽니까? 아마 인간보다는 조금 적게 살 거라. 보통 태어난지 한 50년 너머 됐으면 인제는 우리 인간으로 치면 한 80살 정도 됐겠죠. 기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을 겁니다.

전쟁터에서 한 50년 용감하게 싸우던 코끼리니까 인제는 폐물 처리를 받아가지고 있다가 늪에 딱 빠졌어. 그런데 워낙 덩치가 크니까 늪에 빠진 코끼리를 건져낼 방법이 없습니다. 코끼리는 옆으로 누워버리면 죽어버립니다. 일어나지를 못해. 특히 늪 같은 데에 빠지면. 그런데 아무리 밧줄로 당기고 하더라도 나올 방법이 없거든.

 

어떻게 해야 나올까? 코끼리는 전쟁터에서 북을 울리면은 열심히 나가서 싸웁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나이로 치면 80이 된 늙은 코끼리지만 북소리가 들리니까 아! 내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던 때를 생각을 하는 거라. 그래서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서 앞으로 나아갈려고 해서 그 늪을 빠져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선한 일도 행해오고 악한 일들도 행해 왔을 거라.

그런데 좌절감에 탁 휩싸였을 때 지나온 나쁜일 해온 거를 회상할 거 같으면 더 좌절감에 빠져버립니다. 그럼 빨리 그 상태에서 탁 넘길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요? ‘아! 내가 이런 것도 참 잘했지’ 그래서 ‘내가 참 잘 살아왔다’ 하는 생각이 들면은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그 힘이 없으면 그냥 좌절감의 상태가 계속 오래도록 가는 거라.

 

수행이 쭉 진행이 되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어느 정도 탁 뛰어올라야 되는데, 이걸 못 뛰어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돼?

뭔 힘이 받쳐준다고 그랬어요? 바라밀이 받쳐주는 거라!

선한 행위를 지은 것들이 탁 받쳐주어가지고 그 단계를 뛰어넘게끔 하는 거라. 그런 바라밀의 힘이 없으면은 그냥 좌절감에 계속 오래도록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수행의 진척이 없는 거라 계속!

수행 아무리 해도 진척이 안 되는 거라. 뭔가 울궈내먹고 그걸 탁 박차고 넘어갈 힘이 없는 거라. 만들어 놓지를 않으니까 그게 안 되는 거라.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열심히 알아차리면서 살아가야 되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거 안되면 뭐라도 해야 돼요?

바라밀이라도 자꾸 쌓아놔야 되는 거라! 바라밀이라도 쌓아놨을 때 바라밀의 힘으로 인해가지고 알아차리는 힘들도 생기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 단계로 탁 뛰어넘어 갈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그 바라밀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기간까지만 그렇게 북받쳐주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런데 일정한 지혜 이상에서는 바라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라밀도.

그때는 바라밀의 힘이 받쳐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받쳐나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수행해온 힘들로 인해가지고 그 힘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그냥 쭉 밀어주게 됩니다. 바라밀이 밀어주는 게 아니고.

그래서 그거는 수행이 자동적으로 쭈욱 진행이 돼나갑니다. 내가 알아차림을 할려는마음을 먹든 안 하든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이 유지돼나가도록 해줍니다.

적어도 그런 상태까지는 돼야 될 거 아니야? 먼 얘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스님들 그리고 수행한다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갑니다.

 

여러분들도 그걸 자꾸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라.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뭔가? 또 부족한 것들이 뭔가? 내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어떠한 경우도 알아차림을 놓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라밀의 힘이 설혹 부족하든 아니면 내 스스로 헤쳐나갈 힘이 부족하든, 그것은 부족한 것들은 채우면 되는 것들이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부족하다 해가지고 내가 지금 띄엄띄엄 알아차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알아차리는 것마저 포기해버리면 안됩니다. 포기해버리면 이 힘도 부족한데다가 알아차리는 힘도 부족하면, 당연히 그냥 홍수에 휩쓸려버립니다. 당연히 그냥 휩쓸려 가버리게 됩니다.

 

성냄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냄이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힘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성냄이 사라져버리는데, 그 힘도 스스로의 힘도 없고, 성냄에 대해서 막아줄 바라밀들도 부족해서 그걸 막아줄 만한 것들도 없고 할 거 같으면 성냄이 일어나면 그냥 쭉 밀려가버리는 거라.

보고 듣고 냄새맡고, ···설 이 4가지는 그래도 바로 휩쓸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느끼고 하는 것들은 바로 휩쓸려가고,

그다음에 생각으로 가지는 것들은 그냥 휩쓸려가는 게 아니고 그냥 홍수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들은 그마만큼 알아차리는 힘이 없으면은 안되는 거라. 차라리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들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해. 예쁜 소리 들렸다고 하더라도 ‘어, 그럼 안되지’ '소리들림' '소리들림' '소리들림' 할 것 같으면 그냥 소리만 들을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크게 영향 안 받고.

 

그런데 접촉하는 것은, 한번 봐봐. 사회적인 문제 되는 것들. 예쁜 여자 손 잡으면 접촉했다고 알아차리는 것보다, 바로 잡자마자 그냥 바로 "갈애" 바로 생겨나버립니다.

그런데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갈애가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갈애의 덩어리" 바로 생겨나버리는 겁니다. 생각이 그마만큼 무서운 겁니다. 생각은 일으켜놔 놓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로써 그치는 법이 없어.

 

그래서 여러분들은 가장 쉬운 거 지금 하는 겁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걸 분명히 알고, 밥을 먹으면 밥을 먹는다는 걸 알고, 보면 본다는 걸 알고, 가장 쉬운 겁니다.

안·이·비·설 그 4가지부터 먼저 하라는 거라.

그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못하면은 느낌을 어떻게 갈애 없이, 그다음에 생각을 어떻게 그런 폭류 없이 막아낼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설혹 바라밀이 부족하고 내가 힘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알아차리는 것조차도 중단을 해버리면 그냥 그 사람은 죽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마만큼 일상생활하면서 내가 어떤 일이든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해하겠죠? (예)

자! 오늘은 대충 오전에 이 정도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