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명성의 함정 (20150213.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28. 09:00

https://youtu.be/qb-ZoDEckFc

* 명성의 함정 (20150213. 대구)

 

자! 첫째 시간 「명성의 함정」이라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프린트물이 조금 모자라죠? 돌려보도록 해요.

사람들은 보통 불안하고 하면은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어느 정도 좀 해소해줬으면 하고 바라면서 얘기를 하게 되는데, 해소를 해주면 좋은데 해소를 못해주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에게 그런 불안감을 얘기할 때 해소하지 못하는 원인들을 보면,

우선 스님이라는 생각이 탁 잡혀있을 경우에, 위에서 이렇게 내려볼려고 그럽니다. 그러다보면 그 얘기를 그냥 있는 그대로 듣지를 못합니다. 뭔가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말 할려고만 자꾸 하지 들을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우선 잘 들어야만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서 원인이 뭔가, 뭐 어떻게 하면 되겠다 하는 걸 판단해서 얘기를 할 수 있는데 한마디 얘기하면 이미 자기는 그것 가지고 정립을 다 했어. 그러다 보니까 그냥 바로 얘기를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이 유명해지고 하는 것은 굉장히 경계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반드시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대접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병입니다.

경전에도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존경받을 만한 사람에게 존경하라.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단지 출가했다는 이유로 또는 부모라는 이유로 존경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또는 존경할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는데도 그걸 속이고 존경 받을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부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수행은 이것 밖에 안 되는데 요마만큼 성취했다고 얘기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뭔가 남들보다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되는 거고, 그것조차도 안되면은 어떻게 해야 돼요? 뭐 점 봐주든지 뭘 하든지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러면 기도해주든지. 그리해야 만이 어쨌든 다른 분들이 그분에게 존경을 할 거 아니라.

 

"아! 저 스님 참 기도 잘한다." 하더라도 "아! 그 스님 참 훌륭한 스님이다" 이렇게 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인제 자신이 진짜 존경받을 만한 대상이라고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존경 안 해줄 때는 다른 식으로 반응들을 하게 되는 거죠.

좀 세력이 많아지면은 새로 종단을 하나 만든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식으로 해결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이미 남들이 나를 존경을 해주든 안 해주든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그 무슨 살인가스 살포한 게 있었죠? 옛날에. 마찬가집니다. 자기 정체가 들켜버리는 상태가 되니까 이제는 그걸 다른 식으로 표출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만 존경할만한 대상이 될까? 경전에도 분명히 "뿌자 짜 뿌네이야땅" 그렇게 나옵니다. 존경할만한 대상을 존경하라는 겁니다. 무작정 존경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여러분들 경우를 예를 들어봅시다. 집에서 존경받고 있어요? 못 받아? 큰일났네. 한 일주일 전인가? 경주 스님 행사하기 전에 대구 불교방송에서도 전화가 왔었어요. 거 출연을 좀 해달라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거기에 내가 법을 설하러 가는 것도 아니야. 붓다야나 선원 선전하러 가는 거지, 쉽게 말하면. 그리고 자기 선전하려 가는 건데 굳이 내가 그거 할 이유가 있겠나 싶어갖고 안 한다고 그랬어. 그런데 꼭 자꾸 해달라고 그래. 그래서 그러면 내 말고 다른 스님을 추천해드릴게요. 그리하니까 그러면 좋겠다고 그러거든. 그래가지고 해피스님한테 야, 너 이런 10분간 대담하는 프로그램에 방송출연 좀 해달라는데 할래? 이러니까. 하죠. 시키면 하죠! 그러면서 아마 방송출연을 했을 거라. 그런데 물론 붓다야나 선원 알리고 하는 것도 좋긴 좋은 일이겠죠. 그런데 알려보면 뭐 할 거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기 회원 몇명 더 늘어나면 그건 또 뭐 할 건데? 그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아무리 인원이 많아도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나오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이익입니다.

스님들이 법을 설하는 것은 그 목적으로 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원만 자꾸 많이 모이도록 하고 무슨 큰 법회만 자꾸 할려고 하고 그럴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참 저 스님 유명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속은 비어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들이 존경받을만한 대상이 될려고 할 거 같으면 우선 갖추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삿다(saddhā) 삼보에 대한 확신! 확신들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쳐야지 뭐 어떡하겠노. 그래서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하는 상가에 대한 인식들은 분명하게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 확신이 서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매일 우리 하는 거 뭐 있어요? 여기오면 계를 받죠? 그래서 계를 지키고. 여러분들은 그 두 가지만 완전하게 하면은 자연스럽게 존경받게 됩니다. 그 이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존경해줘라 할 필요도 없고, 또 존경의 대상이 될려고 하는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이미 존경받을려고 할 경우에는 그 마음속에는 탐심이 들어가버리게 됩니다. 탐심이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존경을 받아봐야 그것은 공덕이 되지 못합니다.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존경 받을려고 하지 말고 존경받는 자가 먼저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을 비롯한 스님들도 마찬가지이고 부처님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어떨 때는 처음에 수행하고 나가서 음식 안 맞고 기후 안 맞고 그러면서 몸은 자꾸 허약해지고 몇년 지나니까 힘이 쭉 빠져요. 그때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었어요. 그것으로 인해서 다시 힘을 받게 됩니다.

 

왜 부처님을 존경하게 될까? 잘 생겨가지고? 어떤 분들은 잘생기면 막 따르고 그런다고 그러더라고. 그거는 아니죠? 아니면 부처님이 모든 걸 다 버리고 출가를 했다고? 그것도 아닐 겁니다. 부처님이 존경받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분이 가르쳐주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이끌어주는 거고,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그분을 존경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들을 때든 아니면 스님이 설하는 부처님의 말씀이든 그것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처음부터 잘못돼버리는 거라.

 

태국에 있을 때, 지금 나를 부를 때 아짠 빤냐와로(Ajarn Paññāvaro) 그렇게 부르죠? 아짠이 빨리어 아짜리야(ācariyā)를 태국에서 아짠(ajarn)이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아짜리야 자격을 따는 조건이 아주 까다롭습니다. 테라담마 열 가지를 갖췄는지 확인도 하고, 여러 가지들을 하고 이리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가 있느냐면 대중들이 많이 있는 데서 법을 설할 때나 대중들이 없는 상태에서 법을 설할 때나 동일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러니까 많이 있으면 잘 해주고 적게 있으면 흐지부지 해주고 이런 것들이 있으면 아예 아짜리야 자격을 안 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분을 대하든 저분을 대하든 아니면 여러 사람을 대하든 적은 사람들을 대하든 동일하게 내가 마음을 낼 수 있는 것, 동일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것, 물론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법을 전하는 것들이 부처님 가르침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거기다가 자기 생각 조금만 들어갔다 하면 아예 안 되고.

 

그래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뭐냐면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어떤 경우든지 자아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탐욕과 연결되고 성냄과 연결되고 그렇게 돼버립니다.

그래서 욕심이 앞서버릴 것 같으면 사람이 많이 안 모이면 안 가는 거라. 또 성냄이 앞서버리면 그 사람이 나를 비난할 거 같으면 나도 똑같이 싫은 마음들을 일으키든지 비난을 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아짜리야 자격의 가장 기본 조건 중에 하나가 자아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물론 수행에서 어느 정도의 과위에 도달하고 또 경을 공부하고 하는 것들도 있어야 되고 이런 것들도 있어야 되지만, 그게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 제목이 「명성의 함정」입니다.

 

함정에 안 빠질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내가 조금 전에 답을 정해 가르쳐줬는데. 어떻게 하면 돼요? ''라고 하는 생각, '자아'라고 하는 것들을 제거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명성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은 나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그냥 내 갈 길을 가게 되는 거라. 엄마 입장이면 엄마의 갈 길을 가게 되는 거고, 아내이면 아내의 길을 가게 되는 거고, 자기 갈 길을 가게 될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든 안 하든 그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아라한이 됐으니까 '나'라고 하는 것들은 없어졌겠죠? 그러니 부처님은 부처님 할 일만 합니다. 참 저사람 불쌍하게 보인다, 그럼 그 사람에게 법을 설해가지고 빨리 좋은 데로 이끌어줄려고 하게 되고, 사람이 있든 없든 법을 설할 때가 되면 법을 설하게 되고,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법을 설할 줄 알 거 같으면 아낌없이 법을 설하는 거고, 누가 나에게 상담하러 올 거 같으면 아낌없이 상담을 해주고 그런 것들은 하는데, 하지 말아야 되는 건 분명하게 안 합니다. 출가한 스님으로서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여러분들 위치에서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은 안 하는 거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더욱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 거죠.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 옆에 만약에 또 다른 불교 선원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여기에 우르르 다 몰려갔다. 그럼 저쪽 스님은 아마 안달이 날 거라. 아이, 우리 신도들 다 뺏겼다. 내‘ 신도’라는 생각을 가지는 거라. 나라고 하는 관념조차도 없으면 내 신도라는 것도 없어야 되는 건데 이미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 상태에서 내 신도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내 신도 뺏겼다고 생각이 들면 어떻게 돼? 자아가 원한심과 연결이 됩니다. 저 나쁜 놈, 내 신도들 다 뺏어갔다 그럽니다.

 

부처님도 안 그렇겠어요? 부처님을 그렇게 원망하고 시기·질투하고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을 거라. 그래서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부처님을 모함을 하게 됩니다. 순다리라고 하는 여성을 시켜가지고 부처님을 모함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여러분들은 낮에 여기 선원에 왔다가 저녁 돼서는 돌아갑니다.

 

특히 스님들이 머무는 곳에는 여성들, 그리고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3일 밤을 넘기면 같이 있으면 안됩니다. 한 지붕 안에는 못 있게 돼있습니다. 여기도 만약에 한지붕이라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문이 다르면 다른 집으로 됩니다. 똑같은 지붕인데, 여러분은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갔고, 나는 이 문이 아니라 저 문을 통해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럼 2층은 별도의 것이 돼버립니다. 그럴 경우에는 아래위에 있어도 문제가 안 되는데, 그렇지 않고 한 문을 통해서 들어왔을 경우에는 그것은 같이 있을 수 없는 조건이 됩니다. 다음에 만약에 선원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걸 명심해야 됩니다.

 

대부분 절에 집중수행하는 경우가 아니면은 부처님 있는 곳으로 가서 부처님 보고 여러분 같이 탁발을 올리고 그리고 부처님 법문 듣고 그리고 수행 쪼매 하다가 그냥 다들 집에 가기 바쁩니다. 집에 가서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침에 왔다가 오후 늦게되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그런데 순다리는 거꾸로라. 오후 늦게되면 이 선원에 왔다가 아침돼서 나가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 나갈 때 들어오니까 무엇 때문에 들어오는지 궁금할 거 아냐? 지금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것도 아니고 뭣 때문에 와? 그러면 음, 나는 인자 부처님한테 볼 일이 있어. 아침엔 일반 신도들이 들어올 때 순다리가 나갈 때, 너 어디 있다가 인제 나가? 응, 나는 인자 부처님한테 볼 일 다보고 가.

이게 계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라. 여자가 뭐 하는데 부처님 있는데 밤늦게 그렇게 있느냐는 거라. 밤을 지낸 거잖아. 그러니까 사람들이 수군덕수군덕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설마 부처님이 그랬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아니면 부처님 제자라 하더라도 부처님을 따르는 분들 대부분이 아라한들이기 때문에 부처님 제자들이 그랬겠나? 무슨 일이야 있겠나? 지혼자 뭐 어디 숲에 가서 있다가 갔겠지 이리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마음 한쪽으로는 찜찜하거든.

 

그런데 어느 날 순다리가 탁 없어져버립니다. 그 모의를 끝낸 다른 종교자들이 순다리를 탁 죽여버려가지고 그 기원정사에다가 딱 묻어둬버립니다. 그리고 소문을 퍼뜨립니다. “순다리 못봤어?” 사람들한테 자꾸 물어보니까 계속 매일같이 봤던 순다리인데,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저여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소문을 뭐라고 퍼뜨리냐면 부처님이 그 순다리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가지고 그게 들통날까 봐서 죽여버렸다, 이렇게 그 사람들이 소문을 내버립니다. 부처님이 죽였든지 아니면 제자들이 죽였든지 둘 중에 하나다.

그리고 그걸 꾸밉니다. 죽이는 사람을 하수인을 시켜가지고 니가 봤다고 해라 하니까 아, 나 여자 두드려 패는 거 봤다 뭐 어쨌다 자꾸 이렇게 얘기하니까 꼼짝없이 부처님이 누명을 쓰게 되는 거라.

생각을 해 봐. 이상하게 여자가 밤에 왔다갔다 하지, 그런데다가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 여자를 두드려 패는 거를 봤다, 그래서 그 여자가 죽었는데 그 시체가 기원정사 안에서 발견됐다, 누굴 의심하겠어요?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아무리 나 안 그랬어요 해도 이거는 상황적으로 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이 이 탁발로 인해서 살아가야 되는데 마을로 탁발을 나가면 탁발을 해주질 않는 거라. 자기가 실제로 본 것도 아닌데, 이미 그렇게 소문이 퍼지고 나니까 탁발을 안 해주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이 울상이 돼서 하고 있을 때 아난다가 그럽니다. 부처님 우리 여기서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다른 데로 갑시다. 아무리 우리가 잘못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이 안 믿어주는데 어떡할 거냐? “부처님! 다른 데로 갑시다.”

 

부처님이 뭐라고 했을 거 같애요? “그리하지 말아라.” 그리하면은 거기 가서 우리가 탁발을 해가지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지는 모르고, 법을 설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지는 모르지만은 여기서 우리는 꼼짝없이 살인자 누명을 쓰게 된다. 니 그럼 살인자 누명쓰고 여기서 다른 데로 갈 것이냐? 그리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탁발하러 나가면 반드시 이 게송을 읊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탁발을 해주든 안 해주든 사람들이 주변에 옆에 있으면 딱 멈춰서가지고 그 얘기를 합니다.

그게 몇 페이지에 있느냐면 2페이지 중간 정도에 보면,

 

거짓말쟁이는 지옥에 떨어진다. 무엇인가를 범하고 나는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사람도 같습니다. 사람이 천한 행위를 한다면 사후에 천한 결과를 낳는다.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지. 거짓말쟁이는 지옥에 떨어진다 하고, 설마 죽여놔놓고 나 안 죽였다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지가 지옥에 떨어진다고 얘기하기야 하겠어? 그렇잖아? 여러분들은 뭔가 잘못해서 거짓말했을 때 지가 나쁜 결과를 받는다 라고 생각해가지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그걸 어떻게 하면 무마시켜가지고 안 들키고 잘 넘어갈 것인지, 자기한테 피해없이 할려고 거짓말하게 되는 것이지 지가 지옥에 떨어질려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어! 저 스님들이 거짓말을 안 했다는 얘기인가? 지가 지옥에 떨어진다고 얘기하지는 않을 거니까. 그럼 누가 거짓말했지? 하고 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왜 일반 대중한테 첫마디에 이 얘기를 했을까? 비난하는 사람에게 비난으로 돌려주는 것은 아니죠? 비난으로 돌려준 게 아닙니다. 그럼 그건 부처님 제자가 아니지. 비난은 어떤 경우든지 비난으로 돌려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바르게 알려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니가 확인한 것이 아니면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말아라.

만약에 니가 예를 들어서 진짜 거짓말하는 사람 말을 믿고 니가 부처님이 그걸 죽였다 하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할 거 같으면 그건 어떻게 돼요? 그것도 또한 거짓말이 돼버립니다. 사실이 아닌 것들, 만약에 사실이 밝혀지면 그건 거짓말이 돼버립니다. 그럼 자칫 잘못하면 지도 지옥에 떨어질 수가 있는 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겁니다.

 

말에는 4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짓말하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비방하는 것, 쉽게 말하면 이간질하는 것, 그다음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하는 욕설들, 그다음에 마지막이 쓸데없는 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말, 이것들은 다 거짓말의 범주에 들어가버립니다. 사실을 확인 안 하고 남을 비방한 것도 거짓말의 영역에 속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일반 대중들이 해야 될 거는 뭐라? 그것이 확인되기 전에 딱 죽였다는 증거가 드러나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 그것 많이 하죠? 누구한테 들었다 그러면 들은 대로만 얘기하 게 아니고 거기에다가 또 부풀려갖고 막 얘기합니다. 지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확인도 안 한 건데. 그럼 여러분들도 지옥에 떨어지는 거라. 거짓말한 것이 돼버리니까.

 

그다음에 두 번째 얘기한 것이 무언가를 범하고 나서 나는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사람도 똑같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거라. 속이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데 여러분도 그런 속이는 일들을 가끔씩 합니다. 누가 부모님이 암판정을 탁 받았다. 그럼 부모님한테 뭐라 그래요? “의사가 괜찮다고 그래. 밥 잘 먹고 하면 살아날 거래. 걱정하지마.”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거는 거짓말에 들어갈까? 들어갑니까?

거짓말의 영역에 들어가는 4가지를 한 번 가만히 보십시오.

남을 해칠려는 악한 마음이 없이 거짓말하는 4가지가 있는가? 또는 그 4가지를 할 때 나에게 뭔가 이득이 있는 것들을 바라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이 있는가? 공허한 말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그 시간이 공허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쓰잘데기 없는 얘기들을 해야 내가 편안해지거든. 나한테 이득이거든. 남을 해친다든지 아니면 나한테 이득이 없이는 이 4가지 범주의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님한테 얘기한 거는 이 범주에 속합니까? 속하지는 않죠? 그건 거짓말에는 해당이 안 되지만은 그래도 사실이 아닌 것은 틀림없잖아. 그래서 바른말에는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삼마와짜(sammā vācā)라고 해서 바른말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습니다. 그럼 바른말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차라리 침묵해야 되는 거라. 때가 되면은 그리고 받아들일 상황이 되면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갖춰지면 그때 바르게 전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삼마와짜에 들어가는 것이지 괜히 그 상황가지고 거짓말에는 안 속한다고 하더라도 삼마와짜가 아닌 말들을 할 경우에는 그것은 바르지 못한 거라는 거라.

하물며 그런데 뭔가 지가 해놔놓고 “나 안했어” 하는 경우 그거는 굉장히 나쁜 겁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왜 그럴까? 자신이 한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 이미 그거는 결과는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하지 않았어” 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없어지나? 오히려 또 다른 결과를 또 하나 더 낳게 됩니다. 한 것에 대한 결과도 받아야 되는 거고, 거짓말 한 것에 대한 결과도 받아야 되는 거고, 이중으로 결과를 받아야 되는데 왜 그 짓을 하느냐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자기가 한 행위들은 반드시 결과를 받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비록 부모님한테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결과를 받게 됩니다. 차라리 그럴 때는 침묵을 하는 것이 맞는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사람이 천한 행위를 한다면 사후에 천한 결과를 낳는다.

천한 행위를 하면 천한 결과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이 천한 행위를 할 리가 없잖아. 지가 나쁜 결과 받는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서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됩니다. ‘어? 아니다’ 이거는 부처님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화를 낸다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진리를 전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때사 사람들이 ‘아, 이거 뭔가가 잘못됐다’ 하고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왕이 뒷조사를 해보니까 사실은 저 옆집에 살고 있는 스님이 누굴 시켜갖고 그렇게 한 것이었거든. 왕의 입장에서는 그 옆집 스님이 얼마나 미울 거라? 아마 옛날에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일 거 같으면 당장 그 스님을 쫓아내버렸을 거야.

그런데 부처님이 그럽니다. “쫓아내지 말아라. 단지 사실을 말하도록 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 스님한테 “나 거짓말 했다” 하고 동네방네 외고 다니라는 거라. 그것으로 끝내버립니다. 그러면 그 스님은 다음에는 다시는 그런 거짓말 안 하게 됩니다. 아, 내가 거짓말 했다가는 큰일나겠다 하고, 자기 생활을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 그다음부터는 남을 모함하고 사사로운 일들 때문에 거짓말하고 하는 것들을 안 하게 됩니다.

 

이 일화를 보더라도 부처님은 참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진짜 죽일 놈으로 만든 사람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고 자애의 마음을 가집니다. 단지 사실을 사실로써 그대로 드러나게끔 하라 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이렇게 명성이 있으니까 이런 일들을 당합니다.

하물며 일반 스님들은 더한 일들도 당합니다. 그래서 명성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서 항상 위험성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럽니다.

인제 3월달부터는 법문하는 데가 두 군데가 더 늘어났어요. 양산에 한 군데, 진주에 한 군데. 아마 모르긴 해도 이게 좀 낳고 나니까 또 온데 또 그렇게 하는 거라. 안 간다 소리를 못하잖아 스님이. 비는 시간을 찾아갖고 하는데 어떡할 거야? 어떨 때는 아이고 참 가만히 놔주면 난 최고 좋은데, 내 혼자서 있으면 그렇게 좋거든. 내 수행하고 내 혼자서 수행의 즐거움에 있으면 그마만큼 좋은 게 없는데, 또 귀찮은 일이 또 만들어지는 거라.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그걸 해야 되는 거라. 조금 법을 잘 설하지 못하고 수행을 안 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건데, 그래서 어떨 때는 아이고, 재주 많은 것도 병이다.

 

그 생각들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재주 많은 것을 드러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위험성이 항상 있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여기 오든 아니면 진주에 가든지 어디 가더라도 나의 고요함은 항상 유지하려고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 딱 함정에 빠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항상 조심을 해야 되는 거라.

여러분도 그 생각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 좀 많이 생겼다, 그것도 항상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지금 내가 건강하다, 아니면 내 가족이 행복하다, 그것도 항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위험을 볼 줄 알아야만이 거기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건강하게 살게 되고, 가진 것들에 대해서 집착함들이 없어지는 거고,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그 상황에서 항상 고요함을 유지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여덟 가지는 세속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돈이 없어지든 돈이 많아지든, 명예가 있어지든 비난을 받든지, 남이 나를 칭찬하든 비난하든, 아까는 명예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위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그게 두 번째고, 세 번째 항목이 칭찬하든 비난하든 그다음 또 두 가지는 뭐지? 두 가지가 더 있는데, 그 여덟 가지는 세속적인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세속적이라는 것은 항상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는 것들입니다. 그대로 존재하고 항상 있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불행에 빠지기도 하고 함정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거라. 그 생각을 항상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라?

세속적인 행복이 아니라 출세간적인 행복들을 자꾸 얻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하니까 좋아요? 이거는 바뀌지 않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지금 그것을 안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떠올리기만 하더라도 나는 그 행복을 다시 찾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것보다 더 큰 행복들은 또 뭐가 있어요? 삼매가 자유롭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도 더 큰 행복들이라. 또 그것보다 더 큰 것은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런 행복들은 출세간적인 것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고 자기 것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명예나 이익이나 지위나 이런 것들에 대한 함정에 빠지지 말고, 그것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 이것들에 자꾸 치중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선한 마음을 지니고 선한 행위를 하게 될 때, 그 과보들은 무르익게 됩니다. 바라밀을 쌓았으면 바라밀을 쌓을려는 마음들을 내고 그것들 바라밀들을 계속적으로 실천하게 될 때 그 결과들은 반드시 받게 됩니다. 또는 대상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그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나는 닙바나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조건들은 여러분들이 이생에 살아가면서 항상 해야 될 것들입니다. 바라밀을 닦아야 되고, 수행을 해야 되는 것, 이 두 가지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서로 상호관계에 있는 겁니다. 서로 받쳐주고 한 단계 올려줄 수 있는, 여러분들 좀 더 큰 행복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