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생명을 관리하는 2가지 양심(히리 옷땁빠) (20141212.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13. 09:00

https://youtu.be/i8RbHoMdGQw

* 생명을 관리하는 2가지 양심(히리 옷땁빠) (20141212. 대구)

 

오늘 프린트물 두 가지 중에 오전에 해야 될 것, 「생명을 관리하는 두 가지 양심」 압니다. 나머지 프린트물은 오후에 할 겁니다.

사람들 그런 얘기 많이 하죠? “양심이 좀 있어라” 하는 그런 얘기. 보통 우리는 그럴 때 어떻게 얘기합니까? 욕심 많이 부린다든지 아니면 나쁜 짓 했을 때 양심이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건 사회적인 거고, 불교에서 말하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나쁜 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들, 그리고 그런 것들 하는 것은 참 내가 부처님 제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양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 첫머리에 「양심은 마차의 두 개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쐐기"와 같다」 그렇게 서두에 적어놓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동차로 치면 브레이크죠. 브레이크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무작정 달리는 겁니다. 그게 나쁜 건지 좋은 건지도 구분을 못하고 그냥 달려가게 돼있습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양심'을 빨리어로 '히리 하고 옷땁빠(hiri-ottappa)'라고 그렇게 얘길하는데,

히리(hiri)가 없는 자들은 지혜가 없다 그렇게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지혜가 일어나기 위한 거죠? 지혜 개발을 해서 그로 인해서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건데, 이 히리가 없으면 지혜가 없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무서운 말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해봐야 이 히리-옷땁빠가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부처님 당시 때 아난다 존자가 탁발을 한번 나간 적이 있어요.

탁발을 나갔는데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 있거든. 그 사람에게 가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야! 이렇게 고생하고 사는 것이 좋으냐? 그러지 말고 니 내 따라 가서 출가하자. 그러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뭐 출가하면 어쨌든 밥은 먹고 사니까 그러겠습니다. 하고 따라나서서 출가를 했어요.

출가를 했는데, 출가한 스님들은 탁발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직접 맛있는 거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만들어준 음식을 가지고 먹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여기 같이 탁발을 하는데, 절 안으로 누군가가 와서 탁발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내가 나가서 하는 경우도 있고, 마을로 나가서 그렇게 하는데, 마을로 나가든 아니면 여기 절 안에서 공양을 받든 받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여기 우리 도반들같이 때때옷 잘 입고 얼굴 삐까뻔쩍 하거든. 그게 부러운 거라.

‘아, 저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 거라.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이 경계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아까도 그렇게 했는데 탁발을 할 때 탁발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를 않습니다. 단지 내가 탁발을 한다는 것을 알고 탁발하는 사람 그게 어떤 누구든지 그분에게 ‘그 사람이 항상 행복하기를’ ‘그 사람이 이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주는 것들을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런데 인제 출가 해놔놓으니까 그걸 잘 몰라. 그러니까 탁발해주면 ‘뭔 탁발 했는고’ 이리 보고 또 사람 얼굴도 봐가면서, 그러다 보니까 사량분별심이 생기는 거라. ‘어제는 맛있는 거 갖다 주드만 오늘은 또 맛없는 거 갖다주는 갑다.’ ‘오늘은 많이 안 주고 적게 주는 갑다.’ 또는 ‘예쁘네’ ‘잘생겼네’ 이런 마음이 자꾸 드는 거라.

그런 마음이 자꾸 들다보면 출가한 스님들이 가져야 되는 계율을 잊어먹게 됩니다. 얼굴 보지 말고 갖다 주는 거 그냥 받아먹는 거, 그 음식을 받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니까 출가 생활하는 게 싫어지는 거라.

 

그때 불현듯 생각한 게 있습니다. 나무 밑에 가서 그럽니다.

‘야, 너 지금 마음이 출가생활 계속하기 싫지? 그럼 어떡할 것이냐? 옛날로 돌아갈 것이냐? 거렁뱅이로 살 것이냐?’ 그 나무한테 물어보니까 그 나무가 대답해주는 것은 아니지. 그런데 자신에게 돌아보니까 그거는 아닌 거 같거든.

거렁뱅이로 살다 보면 남의 음식 있으면 그거 어떻게 하면 훔쳐먹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되는 거고, 나쁜 생각도 품게 되는 거고 그렇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매일 같이 출가생활이 힘들어지면 거기 가서 그러고 있는 거라. 그 나무한테 물어보는 거라. 그러고 나서 마음을 다잡고 오는 거라.

그래서 어느 스님이 물어봅니다. “너 만날 그 나무 밑에 가서 뭐 하노?”

나무한테 가서 물어본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갑다 하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는 안 가. 그 나무 밑에.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물어봅니다.

“너 왜 이제는 안 가냐?” 물어보니까 “나는 이제 나무 밑에 가서 더 이상 훈계받을 일이 없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전에는 나무 밑에 가서 훈계, 자기 스스로 훈계하는 거지 쉽게 말하면. 훈계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나쁜 일을 했을 때, 내가 나쁜 일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안 좋은 일이구나 하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거고, 그런 것들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과보를 받는가? 얼마나 그게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갔는데 이제는 이미 마음이 딱 고정돼가지고 도와 과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는 거라. 그러니까 더 이상 가서 훈계받을 일이 없는 거라.

부처님이 그걸 보고 그래 “너는 참 잘했다!” 하고 칭찬을 해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에게 훈계를 받을까? 나쁜 일을 했을 때 훈계 받는거는 당연한 거고, 그런데 나쁜 일을 안 하기 위해서 훈계받는 거는 어디에다 내놔놓고 훈계 받아야 돼? 자기 양심입니다.!!!

‘아, 내가 이걸 해가지고는 안된다. 이걸 해가지고 내가 어쩔려고 하는가? 이거는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난다’ 하는 생각을 자꾸 일으켜야 되는 거라. 그 수밖에 없어.

 

죄를 저질렀을 때 법으로 심판을 받든지 다른 사람들한테 야단을 맞든지 하는 것이지 이미 죄를 저질러버리면 그거는 여러분들이 받아야 되는 거라. 벌을 받든 뭘 어쨌든 간에 업의 과보는 분명한 거기 때문에 그거는 여러분들 받아야 되는 것이고 어쩔 도리가 없는 거라. 그런데 가장 좋은 거는 안 저지르기 위해서 마음에서‘ 아, 내가 이런 거는 참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은 참 두려운 일이다’ 하고 생각을 자꾸 일으킬 수 있어야 됩니다.

 

인간을 빨리어로 뭐라 그러느냐면 '마누사(mānus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의미가 뭐냐면 '마음을 기를 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기를 수도 있고 증장시킬 수도 있다는 거지. 동물은 그게 안 돼서, 동물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지 마음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경험상으로 요렇게 하면 내가 뭘 많이 먹는다. 이렇게 하면 뭔가 먹이를 잡아먹는다 하는 그런 경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거는 경험인 것이지 마음이 그렇게 기울어가지고 뭐 내가 지금 배고파도 이걸 잡아먹는 것은 더 큰 과보를 받는다 해가지고 안 잡아먹는 동물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인간이라고 그러잖아. '마누사' '마음을 기를 수 있는 자'라는 뜻이라. 그런데 마음을 자꾸 증장시키질 않고 놔두면 그거는 동물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거라.

또한 이 세계가 그래도 유지돼나가는 것은 이 히리와 옷땁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라. 그게 없을 거 같으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막 하게 되는 거라. 죄인 줄을 모르고 뭘 막 하게 되는 거고.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히리와 옷땁빠를 잘못 이해를 하면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나서, 나쁜 일에 대해서 아, 내가 부끄러워하고 아, 그것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거는 히리와 옷땁빠 하고는 관계가 없는 얘깁니다.

이미 저질러진 것에 대해서는 그건 자기가 받아야 될 것이지 그걸 자기가 두려워하고 후회한다 해가지고 될 일은 아니라는 거라.

 

그럼 두려워해야 되는 것은 뭘 두려워해야 돼? 악행 짓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되는 거라. 부끄러워해야 되는 것은 그런 것들을 내가 마음에 품었던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그 과보가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고. 히리와 옷땁빠는 그런 의미들을 가지는 겁니다.

 

경전에 보면, 「망갈라 경」에 보면 '나짜쿳당 사마짜레'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쿳다' 라고 하면 '사소한 것, 시시한 것'이란 뜻입니다. '나 사마짜레' 할 때 '나'는 부정어이기 때문에 '나 사마짜레'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이 응석부려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짜쿳당 사마짜레' 라고 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것들을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그걸 스스로 눈감아주고 그걸 용서하고 그 짓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아주 사소한 허물이라도.

 

하물며 그러한데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의 위치나 지위를 가지고 아, 내가 지금 잘살고 있다 하고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라. 아주 사소한 허물도 저지르지 않고.

 

스님들이 빠지기 쉬운 게 뭐냐면 명예! 누가 나를 대접해주기를 바라고, 누가 나를 존중해주기를 바라고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어찌 보면 참 그런 면에서는 세속인보다 더 못한 경우들이 있어요. 쪼맨한 무슨 감투 하나 쓸려고 난리를 치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네가 과연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냐?”

여러분들이 어머니고 아버지고 할 것 같으면 어머니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만이 존경받을 거 아니라. 존경은 누구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이 우러나서 해야만이 존경받을 대상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지 못할 거 같으면 의미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물어봅니다. 부처님이 계속 게송으로 합니다.

 

여러분들 마음은 청정한가?”

마음이 항상 선한 마음만 일어나는가? 하는 거라. 나쁜 마음이 안 일어나는가? 자만심도 없고 성내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자비로운 마음들을 항상 유지를 하고 있느냐 하는 거라. 그렇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사소한 허물들을 저지르는 것들에 대해서 그냥 자기가 응석 부리듯이 슬그머니 넘어갈려고 한다는 거라.

마음은 금방 물듭니다. 천에 물드는 것은 물드는 것도 아니라. 마음은 금방 바뀌어버립니다. 금방 물들어버리는 거라. 그걸 단단히 부여잡고 있지 못하면 마음을 길러주지 못하면 그건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거라.

 

마음에 탐욕이 있는가?”

마음에 분노가 있는가?”

부지런히 열심히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 물어봅니다.

너 깨달았느냐?”

거기 있는 스님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합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서 너가 앉아갖고 ‘내가 엄마입네’ 하고 나를 존중해주기를 바라고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스님입네’ 하면서 그렇게 남에게 존경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들도 잘 새겨들어야 될 것들이라. 어떠한 경우든지 사소한 허물도 저지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사소한 허물들도 저지르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또 경전에서는 이 히리와 옷땁빠를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바다에서 물에 빠졌다 그럼 살릴 수 있는 것이 뭐라? 단 몇시간이라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구명복! 구명복이 없으면 떠있을 수도 없고 오래도록 유지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나왔느냐면 생명을 유지해주는 구명복이다.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을 지금 살아있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살아있어도 나쁜 일 안 하고 좋은 일 하기도 바쁜 판에, 그리고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기도 바쁜 판에 그 구명복이 없으면 당연히 물에 빠지는 것처럼 악에 물들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 구명복들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

 

너무 강요들을 하니까 얼굴들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가끔씩 테라와다 불교를 하는 분들을 보면 어찌 보면 물론 좋은 일들도 많이 하고 또 바른 가르침을 따를려고 하는 것은 참 가상한 일인데, 어찌 보면 또 그런 분들이 "나 이거 하고 있다" 하고 딱 재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다른 경전에서는 뭐라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느냐면, 혈통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이 말을 조련하는 사람 마음대로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쓸모없는 말입니다. 혈통이 안 좋다고 하더라도 누가 채찍을 가지고 조련하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잘 할 거 같으면 그것 같이 훌륭한 것이 없다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대수가 아니라는 거라. 뭐할 건데? 그거 해가지고. 가끔씩 그런 걸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삼매 경험한 걸 장황하게 얘기합니다. 맞아. “그래 잘했습니다.” 어깨 으쓱해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행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양보하는 것도 없고, 뭐 그냥 아만심만 높아갖고 ‘내가 요 위에 있다’ 하면서 이러고 있다는 거라. 그거 어디다 쓸 거라? 그 삼매는 어디다 쓸 거라?

마음이 점점 바뀌어나가고 마음이 점점 더 부처님 마음을 닮아나가고 또 부처님이 행한 것들을 열심히 자꾸 따르는 것들이 비록 혈통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걸 해나가는 사람이 훨씬 더 좋다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은 자기 것이 최고다 하면서 다른 거 거들떠도 안 봅니다.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디다 쓸 거라?

편협돼 있으면 그 마음은 넓게 바꿀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수행을 하면서 바뀌어나가야 되는 것이지 점점더 편협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소용이 없는 거라.

 

물론 자기에게 맞는 법이 있고 자기에게 맞는 수행이 있습니다. 그걸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 것도 존중해주고 그것들을 훌륭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마음이 조련되어지면 마음이 점점 더 넓게 만들어져 나가면, 그래서 마음이 점점 더 길러지면은 그렇게 바뀌어져 나가야 되는 거라. 여러분은 안 그렇죠? 그럴 거라고 봅니다 이. 만약에 그렇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즉시 그 마음을 바꾸십시오. 마음은 찰나 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아주 찰나 간에!

 

그래서 히리와 옷땁빠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신의 결점을 고칠려는 마음이 있는 것,

그리고 나쁜 행위를 싫어하는 마음들,

맹목적으로 믿는 것들을 그만두는 행위들,

그리고 내가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들,

그리고 마음이 침착하고 고요한 상태로 되는 것들,

일어난 대상들을 반드시 알아차리는 것들,

이게 히리와 옷땁빠를 갖추면 일어나는 마음들입니다.

 

오늘 수행 열심히 했는데 밥 먹을 때 되면 사띠 안 하고 먹었다, 그러면 내가 사띠를 놓친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래서 마음이 항상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놔야 되는데, 잠깐이라도 놓칠 것 같으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처님 제자로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놓쳤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어디로 갈 줄 알아서? 마음이.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아서?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언제든지 마음은 나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상카루뻭카 냐나'라고 하는 마음이 항상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나쁜 방향으로 떨어진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 그런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더더구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움직입니다. 알아차리는 것들도 없이 그렇게 천갈래 만갈래 뛰도록 놔두면 그거 어디다 쓸 거라? 여러분들은 항상 그와 같은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이 항상 제자들에게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품있게 살아라.」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라.

탐·진·치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생명을 관리하는 양심을 가질 수가 있고 행복에 이를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점을 항상 놓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2페이지에 보면 히리와 옷땁빠는 '수카담마(sukhadhamma) 맑고 깨끗하고 행복한 법이다' 라고 불린다.

그 반대는 두려움을 모르고 부끄러움을 모르면 그것은 불선한 마음에 속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깐하담마(kaṇhadhamma), 검은 법'

 

그 밑에 경전의 구절 주석서에, 빨갛게 달구어진 철구슬을 줄 거 같으면 어린아이들은 그게 뜨거운 줄 모르기 때문에 잡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거 잡으면 내 손 데인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만약에 달구어진 철구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물이 묻어있을 거 같으면 그것이 더러운 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잡을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면은 오물이 묻은 것이든 빨갛게 달구어진 것이든 그걸 붙잡게 된다는 거라.

 

알아차림이 없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것이 오물이 묻은 것인지 달구어진 것인지도 모르고 그걸 붙잡고 있는 거라. 다행히 그게 오물이 안 묻었고 달구어지지 않았을 거 같으면 다행인데 그 보장을 누가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 붙잡고 있는 자신은 모르고 있는데. 적어도 여러분들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어린아이 때의 마음하고 지금의 마음은 분명하게 달라져야 됩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도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라. 마누사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누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과 함께 살아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럴 때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 말을 할 때도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될 말들을 분명히 구분을 하게 됩니다.

행해야 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 할 수 있게끔 되는 거고, 그리고 지금 해야 될 것과 나중에 해야 될 것들도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히리와 옷땁빠가 한 번에 갖춰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이걸 갖춰야만이 적어도 여러분들은 지혜의 입구에는 들어갈 수가 있는 거라. 지혜의 입구에 들어가야 그다음에 뭐 무슨 야나를 알든지 아니면 도와 과를 알든지 할 거 아니라.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게끔 딱 스스로 막고 있을 거 같으면 방법 없습니다.

히리와 옷땁빠가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쉽게 얘기하면은, 요즘 테레비에 유행하는 게 뭐지? 뭐 어떤 드라마가 유행을 한다 그러면 그 드라마 볼려는 욕구도 생기고, 그럼 그 드라마 보고 나서 사람들끼리 만나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거 얘기하기도 할 거고. 사실은 쓸데없는 것들이라. 수행하고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라. 갖추어져도 그러는 판에 안 갖춰져놓으면 누구 밥해줘야 되는데 잊어먹고 그거 보고 앉아있는 거라.

 

이렇게 원이 있으면 그 원을 연결해 주는 실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실이 있어야만이 이 원이 계속 돌아갈 수 있고 밖으로 튕겨나가질 않게 되는 거라. 이 실이 뭐냐면 히리와 옷땁빠라. 세간적인 것에 살고 있으면서 그 원이라고 하는 출세간적인 것들을 계속적으로 공부를 하고 그 길을 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이 실이라. 이 실이 없으면 출세간적인 것들은 해당사항이 없어요, 여러분들에게는.

 

뭐로 가지고 이걸 연결해 줄 거라?

그 부분에 대해서 4페이지에 쭉 적어놓았습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 두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 네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있다 하는 것들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리와 옷땁빠가 갖춰져야만이 이 세상이 유지를 합니다.

경전에서는 이 세상을 지탱하고 유지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봤을 때, 부처님은 히리와 옷땁빠다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탱해줄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지탱해주는 것들입니다. 그 지탱하는 실이 있어야만이 여러분들은 출세간의 법을 지속적으로 수행해나가고 출세간법의 이익을 여러분들이 얻을 수가 있는 거라.

 

여기 오전에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적어놓았기 때문에 크게 여러분들이 의문이 나는 것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항상 악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알고 그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져가기를 바랍니다.

바나나 나무는 왜 죽는지 알아요? 열매가 많이 열리면 바나나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바나나 열매들이 많으면 열매도 제대로 성글지 못하고 제대로 잘 하지도 못하고 열매뿐 아니라 나무조차도 죽어버립니다.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명성이나 이익이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을 오히려 죽이는 일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수행하는 사람일 것 같으면 그것들은 세간적인 일이라는 거라. 세간적인 일에서 출세간적인 일로 지탱해주는 실을 붙잡고 있으면서 출세간적인 것으로 뛰어넘어가야 되는 것이지 세간적인 열매 많이 열린 것 가지고 즐거워하고 그거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거라.

 

이익이 있든 이익이 없는 것이든, 명예가 있든 명예가 없는 것이든, 남이 비난하든 아니면 칭찬하든, 부유롭든 가난하든, 그것들은 열매와 같습니다. 많아도 열매고 작아도 열매인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신경써야 될 것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넘어야 됩니다. 그걸 뛰어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히리와 옷땁빠 입니다.

그것들을 잘 생각해서 항상 악에 대한 두려움들 악에 대해서 무서워할 줄 알고 그것들을 저지르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 오전에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