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마음의 백신 (20141114.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9. 09:00

https://youtu.be/23CwiIR71Hw

* 마음의 백신 (20141114. 대구)

 

아직 빨리어로 독송하기 좀 힘들죠? (수행자 : 예)

그래도 어떡하나. 스님한테 법회 할려면 어차피 해야 돼. 그거 안 하고 법회할 방법은 없어요. 그러니까 빨리 외우는 게 상수라.

한글로 할 수도 있고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원칙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원칙이 삼보에 대해서 예경하는 것, 그다음에 계를 받는 것, 이런 것들은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건 빨리어로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쉬운 대로 한글로 “죽이지 마라”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도 이해하기가 좀 수월한데 그게 빨리어가 가지는 힘들도 있기도 하고, 또 그거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까, 어떤 경우든지 어디 가더라도 테라와다 스님들 법회하는 곳에선 그건 반드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보면 조금 하다 보면 익숙해져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단지 방식이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 버마 방식, 태국 방식, 스리랑카 방식, 방식에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이지 지금 하고 있는 삼보에 대한 거 "붓당 사라낭 갓차미" 이거 안 하고 할 방법이 없고, 오계 또 안 주고 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빠나띠빠따..." 하는 거는 어느 나라든 꼭 마찬가지로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기본적인 것들은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할 것 「마음의 백신」 입니다.

 

겨울 되면 여러분들 잘하는 게 뭐 있어요? 감기, 독감 바이러스 예방주사 맞죠? 그거 맞고 나니까 잘 안 걸리든가요? 안 맞는 사람보다 좀 낫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감기를 다 예방하는 건 아니죠? 어떨 때는 그거 맞아도 걸리기도 합니다.

육체의 병을 예방하는 건 그렇게 예방하기도 하고, 또 육체에 병이 걸렸으면 요즘 의학이 하도 발달 돼 있으니까 요즘은 암까지도 정복하는 시대니까 크게 문제 될 건 없어요.

그런데 마음의 병은 뭐로 가지고 예방할 수 있을까?

독감백신 같이 백신을 뭘 하나 맞아야 될까? 마음의 병을?

(수행자 : 사띠해야 됩니다.)

음. 사띠, 알아차림, 교재 읽어봤구만.

 

그런데 사실은 일반적으로 문제 생기는 게 육체의 병에서 문제 생기는 경우는 오히려 마음에 병이 있어가지고 문제 생기는 경우보다 좀 덜합니다. 거의 대부분이 보면 육체적인 병들은 매일 걸리지는 않습니다. 가끔씩 걸리고 그리고 그거는 요즘 같은 의학에서는 대부분 나을 수 있는 것들이고,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데 마음의 병은 가만히 보면 매일 걸려있습니다. 히루종일 짜증 한번 안 부리고 사는 사람 없을 거고, 성 한번 안 내는 사람들, 아니면 뭘 보고 ‘아, 예쁘다’ ‘싫다’ 하는 마음 안 내고 사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라. 그러니까 마음의 병은 매일같이 걸리고 있다고, 매일이 아니고 매번 걸리고 있다고 봐야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중요도에서 따지면 육체적인 병보다는 마음의 병이 오히려 훨씬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게 일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병은 왜 치료를 해야 될까? 육체적인 병 걸린 거는 왜 치료해요? 그렇지. 육체가 괴롭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마음의 병도 치료하는 게 걸려있으면 내가 힘들고 괴로우니까 그런 거라. 안 괴로울려면 그거 치료를 해야 되는 거라. 다른 도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마음의 병에 대한 얘기를 오늘은 좀 하겠습니다.

 

마음에 병이 걸려 있으면 괴롭고 힘드니까 그래서 그것들을 치료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잘 몰라. 그게 문제라는 거라.

감기에 걸리면 감기 걸렸다고 금방 아는데, 그것도 둔한 사람들도 있어가지고 감기 한참 진행되고 나서 감기 걸렸다 하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걸렸으면 걸렸다고 나중에라도 알게 되는데 육체보다도 마음의 병은 걸리면은 걸렸다고 아는 사람이 참 드뭅니다.

 

그마만큼 우리가 일상생활 할 때 내가 뭘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서 하는 경우가 참 드물다고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적어도 내가 뭘 하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으면 화를 내고 있으면 아,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알 거 아니라. 그럼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괴로우면 지가 괴로운 짓을 왜 할려고 그래? 그럼 화를 안 내게 되는 거고, 그리고 욕심 부려가지고는 ‘이거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알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괴로우니까 욕심 안 부리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자기가 뭘 하는지만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마음의 병도 알기가 참 수월합니다.

 

한 일주일 동안 해봤어요? 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열심히 하고 있어요? 조금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 참 내가 이 몸 받고 태어나길 참 잘했다. 내가 이 몸 안 받고 태어났으면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들을 누릴 수 있겠는가? 알아차리면서 일어나는 행복들은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내가 이 몸 안 받고 어디 짐승으로 태어났든지 아니면 천신으로 태어났으면 이 행복을 이렇게 다이나믹하게 알 수 있을까? 몰라! 그래서 아, 참 내가 이 몸 받고 태어난 게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을 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나와 똑같습니다. 이 몸을 받고 태어난 거기 때문에 이 몸을 받았을 때 빨리 끝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조건을 만들어 줄 필요성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인간의 모습으로 깨달음을 이루었죠? 부처님도 눈이 두 개이지, 우리와 틀리게 눈이 네 개인 것도 아니고,. 코로 숨쉬고 눈으로 보고 한 건데 우리는 똑같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이와 같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들을 가끔 하게 됩니다.

그 행복은 더욱더 길러야 되는 것이고 내 주위에 있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 빨리 더 자꾸 그 행복을 누릴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몸의 병은 대부분은 보면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아니면 내부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감기 같은 건 외부에서 들어오는 거죠? 그런데 어디 뭐 간염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병은 외부나 내부에서 일어날 수가 있는데, 마음의 병은 그렇지 않죠? 어떤 경우든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저기 신통력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치자. 그러면은 저 사람이 나를 뭐 어떻게 하겠다고 해가지고 마인드 콘트롤 해가지고 뭘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은 내가 거기 조종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이것도 마음의 부분이 내가 영향을 받기는 하는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저 사람이 아무리 마인드 콘트롤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저 영향을 안 받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그런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마라들이 여러 가지 장난들을 쳐싸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마라의 장난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어떤 장난을 하든지 간에 내가 자기 하고 있는걸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 장난을 치더라도 나한테 영향을 안 미치는 거지.

 

가끔 신통 부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통 부릴 때 아, 저 사람이 뭐하고 있나 하는걸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읽어낼 수 없을 때는 왜 못 읽어냅니까? 저 사람이 알아차림 하고 있을 때! 저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단속을 잘해서 저 마음을 내가 읽을 수가 없는 거라.

 

여기 있는 마음하고 저기 있는 마음하고 분명하게 다릅니다. 여기 마음은 여기 조건에서 일어난 것이고, 저기 마음은 저기 조건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저기 조건을 읽어낼 수 있는 조건이 될 때는 내가 아무리 신통을 부릴려고 해도 저 사람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고 이렇게 외부적인 조종을 받는 경우는 아, 내가 마음을 콘트롤 하지 못하고 내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자기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전혀 그것들에 영향을 안 받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병들은 안에서 생기는 것이지, 나한테서 생기는 것이지, 밖에 인해서 생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거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건 부처님이 나를 어떻게 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은 어떻게 보면 육체의 병보다도 다스리기가 좀 수월합니다. 육체의 병은 안팎으로 정신없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 다스리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마음의 병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라. 자기가 하고 있는 것만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마음의 병은 생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먼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 대신에 「아, 지금 내가 마음의 병이 걸렸다」 하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수행을 지도하다 보면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앞부터 먼저 닿고 어떤 사람은 뒤에부터 먼저 닿고 어떤 사람은 평평하게 닿고 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 거 같애요?

좌선을 이렇게 시켜보면 앞에 먼저 닿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앉아가지고 수행은 열심히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망상하고 있습니다. 망상. 마음이 바삐 움직이는 거라. 그러니 발이 걸어갈 때 앞이 먼저 닿는 거라. 빨리 딛고 싶어가지고. 그러니까 앉아 좌선을 하더라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재미가 없어. 나는 마음이 바삐 움직여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이게 재미가 없으면 어떤 게 재미가 있어요? 요술 부리는 게 재미있는 거라. 그럼 요술 부리고 있는 거라.

 

뒷발이 먼저 닿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앉아서 조붑니다. 힘이 떨어지기도 했겠지만,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그것이 심심하지는 않습니다. 심심하지는 않는데 힘이 약하니까 그냥 대상 자체를 잃어버립니다. 그럼 아무 대상이 없으니까 마음이 뭐하겠어요? 게으름 부릴 수밖에 없는 거라. 게으름 부리면 조불게 돼있는 거라.

사람마다 걷는 것들을 보고 아, 저 사람은 그래서 어떻게 수행지도를 해야 되겠다, 저 사람은 또 어떻게 수행지도를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대부분 표가 나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 이복동생인 난다라는 왕자가 있었어요. 난다 어떻게 출가했는지 알죠? 아난다가 아니고 난다. 부처님의 시자가 아난다고, 그 말고 난다라고 하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결혼식 당일 날 부처님이 탁발 나가가지고 공양 잡숫고 법문하고 나서 바리때를 난다한테 맡깁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이 수행처로 가거든. 그러니까 바리때 들고 쫓아가야 될 거 아니라. 부처님을. 졸졸졸졸 따라가다가 그 선원까지 이르게 됐어요. 그때 부처님이 너 출가할래? 이렇게 물어보니까, 난다는 부처님께 거역을 못하니까 출가 안 하겠다는 소리를 못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출가를 하게 됐는데 결혼식 당일 날 출가를 하게 됐으니 그 신부될 사람이 얼마나 눈에 밟힐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한 꾀를 내가지고 천상의 선녀들을 보여주면서 너가 만약에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은 저 선녀들을 상으로 주겠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선녀가 훨씬 자기 와이프 될 사람보다 예쁘거든. 그래가지고 열심히 수행을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이 보기에는 참 우스운 얘기잖아. 그래서 그걸 뭐라고 얘기하냐면 '일용의 잡부' 그럽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을 일용직이라고 그러죠. 잡부 아무거나 해서 하루벌이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루 벌어가지고 하루 먹고 삽니다. 벌 게 없을 거 같으면 그날은 그냥 굶어야 되는 거라. 천녀를 얻기 위한 거니까 그걸 얻기 위해서 대가를 바라고 수행을 하게 되니까 그 일용잡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 내가 그걸 바라고 수행해선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바라는 마음을 딱 없애버리고 수행을 딱 해서 깨달음에 이르렀거든.

 

마음의 병도 그와 같습니다. 뭔가를 집착하고 또 뭔가를 떨쳐내고 뭔가를 바라고 할 거 같으면 이러한 병이 생겨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바라볼 수가 있어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 그래야 병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을 한번 봐봐요. 보입니까? 어떻게 보여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거라. 오늘 스님이 좀 핼쑥하네. 아니면 오늘 스님이 뭐 어떻네, 저떻네, 사람마다 다릅니다. 왜 그렇게 다르지?

그 인식하는 것은 여러분들 육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죠? 여러분들 마음이 인식하는겁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스님은 가만히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다 인식하는 게 왜 달라요?

 

마음에 뭔가 다른 게 끼여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하는 거라. 뭔가 자기의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각각 보는 것이 다 다르게 되는 거라.

그런데 나를 안 보고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이·비·설·신 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없이 여러분이 살 방법이 없어. 눈·코·입 이 감각기관이 없이 어떻게 살 거라? 살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경전에서도 감각기관에 손상이 생기면 깨달음에 이르기 굉장히 힘들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경전에서는 아예 안 된다 까지도 나옵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거라. 감각기관이 다 있으니까.

 

그런데 이걸 있는 그대로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걸 못 본다는 거라. 어차피 감각기관을 갖다가 내버릴 수도 없고 어차피 감각기관을 통해서 마음으로 내가 인식해야 되는데 인식하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될까?

 

그걸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상깝빠(saṅkappa)라고 그럽니다. 바른 사유!

나를 인식할려면 뭔가를 생각해야 그걸 인식을 할 거 아니라? 그럼 이왕 생각할 거 같으면 좋은 쪽으로 하자는 거라. 내가 마음에 자비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면 스님이 부처님 같이 보일 거고, 내가 마음에 악한 감정을 가지고 스님을 바라보면 저 나쁜놈 하고 보일 것이고, 어떤 게 좋아? 좋은 마음을 가지고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라. 이왕 볼 거 같으면.

 

그래서 사유의 방법을 부처님이 세 가지로 얘기했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을 가지지 않고 사유하라.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할 거 같으면, 그거 딱 이끼 끼여가지고 그것으로 보이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성냄없이 악의없이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사유하도록 하라.

악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성내는 마음이 없이 나를 보고 듣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그다음에 세 번째가 해치려는 마음없이 사유하도록 하라.

아, 저 사람이 참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보라는 거라.

 

이렇게 사유의 종류를 세 가지로 얘기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딱 뭉뚱거려가지고 얘기하면 뭐가 되느냐면 자·비·희·사!

"자 비 희 사의 마음으로 사유를 하라." 하는 것입니다.

 

이왕 사유를 해야 되는 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유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되도록이면 내가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보고듣고 냄새맡고 할려고 하라는 거라.

음식 누가 해왔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음식 맛을 볼 거 같으면 그게 설혹 맛이 없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성질은 나진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자애의 마음 없이 그 음식을 먹을 거 같으면 누가 이딴 걸 해왔느냐고 얘기합니다. 나쁜 마음이 탁 물들어버리는 거라.

 

···사 그걸 "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 그게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그걸 빨리어 경전에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그렇게 얘기합니다. '바르게 사유해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바르게 대상을 알려고 하라.

바르지 않는 마음으로 대상을 향하도록 하지는 말아라는 거라. 그걸 아요니소 마나시까라(ayoniso manasikār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항상 네 가지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유를 하는데 바른 사유는 할 수 있다는 거라.

마음의 병을 없애기 위한 일차적인 방법이 그거라고 했습니다.

 

수행에서도 안 그럴 것 같애요? 수행에서도 사무량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할 경우와 사무량심이 없는 상태에서 수행을 할 경우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사무량심 중에서 만약에 멧따바와나, 멧따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밑바닥에 베이스에 탁 깔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거 같으면 편안하게 대상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멧따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할 것 같으면 다른 데로 도망을 잘 가. 하다가도 도망을 가버리고.

실제 수행에서도 그 네 가지가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마음을 쓸 때도 그게 밑바탕이 되는 것이고.

 

생각은 없앨 수가 없죠? 어떠한 경우든지 사유하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하는 것은 없앨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은 일차적으로 여러분들은 항상 이 네 가지 자·비·희·사라고 하는 것을 항상 자꾸 닦아야 됩니다. 그게 딱 밑바탕이 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 바라고, 고통이 없기를 바라고, 아 참 다들 기쁜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고, 저 마음들이 전부 다 평안하고 고요하고 편안하기를 바라고 이런 마음들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키우는 것들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멧따바와나, 까루나바와나, 무디따바와나, 우뻭카바와나 그걸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그 네 가지 수행을 먼저 하라는 거라.

인제 그게 됐다고 칩시다 이.

 

그러면 그게 됐으면 다 끝난 거라? 병 생겼으면 병 생기기 전에 내가 독감백신 예방접종을 맞는다고 해가지고 병 다 낫는 거 아니죠? 그래도 걸리는 사람은 걸린다고.

사무량심을 갈고 닦고 그래도 완전하지 않아도 하고 있다고 해가지고 마음의 병이 안 생겨? 안 생기는 건 아닙니다. 또 생깁니다. 생기는 게 좀 덜하다는 것뿐이라. 육체의 백신을 맞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럼 가장 좋은 게 뭐라? 사실은 사무량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생각하는 것 사유하는 것은 전부 쓰레기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건 더더구나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래서 쓰레기이기 때문에 전부 휴지통에 집어넣어버려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길을 가다가 두 길을 만났다. 그럼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될지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가 더 낫겠다 싶으면 이 길로 가는 거고 아니면 이 길로 가는 거고. 그런데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아무 데나 갑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그런데 바른 사유를 하는 사람들, 사무량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 이 길은 위험할 거 같다. 아니면 이 길은 편안할 거 같다 하고 판단해가지고 바른 길을 택해 가는 거라. 그래도 사실은 바른지 안 바른지 사실은 잘 몰라.

 

그런데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두 길을 만나면? 곧은 길로 그냥 갑니다. 이 길로 가다가 한쪽 길이 샛길이다 그러면 이 길로 안 가고 그냥 곧은 길로 갑니다. 판단하지를 안 해. 설혹 곧은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서 내가 그것을 장애라고 생각 안 할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행복하게 걸어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두 길을 만나더라도 두 길에서 선택을 안 해. 쉽게 말하면 아라한이 되고 나면 사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예 없어져버립니다. 보이는 대로 행해버리게 됩니다. 그게 사실은 가장 좋은 건데 여러분들 그렇게 살라고 할 거 같으면 만날 낭떠러지에 떨어질 거라.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아라한이 아니라도 있습니다. 뭐하면 되요?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만 분명하게 할 것 같으면 아라한과 다름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리는 것이 바른 사유가 그러니까 사무량심이 밑바탕이 돼있는 상태일 것 같으면 두 길이 보일 것 같으면 부처님과 똑같이 행동하게 됩니다. 바른길로 그냥 가버립니다.

알아차리면서 그냥 그 길로 가버립니다. 여러분도 아라한과 진배없이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사유하고 생각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게 설혹 나쁜 거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가는 거라.

장애가 나에게는 장애가 되질 않게 되는 거라. 그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마음의 백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보면 번뇌라는 비! 생각하고 사유하고 망상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전부 번뇌입니다.

"번뇌 라는 비가 스며들지 않게 잘 이은 집의 지붕처럼 끊어짐 없이 사띠하는 알아차림하는 마음을 제대로 두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되죠? 일회성으로 할 것 같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하다 보면 자꾸 끊어집니다. ‘어 끊어졌네’ 하고 다시 또 하면 돼. 그러다 보면 그 이어지는 속도가 그리고 이어지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는 거라. 그러면은 잘 이은 지붕에 비가 안 새는 거와 같다는 거라. 마음의 병이 생길 여유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그러지 못할 거 같으면 비가 새듯이 마음의 병이 자꾸 생겨버린다는 거라. 이어주도록 하는 접착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무량심 입니다. 그런데 그 접착제만 있다고 해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가야만이 이걸 이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외부의 정보를 마음으로 접촉할 때 이렇게 생각해보라" 하고 얘기를하는 게 있습니다. 그렇게 이 원칙대로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의 병은 조금씩 해결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생각을 하고 사유를 해야 됩니다. 그거 없이 살 방법이 없습니다. 감각기관이 없이 살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럴 때 되도록이면 좋은 사유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습관화되기 위한 방법들이 경에 설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게 뭐겠어요? 사무량심의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혹 내가 가다 길에 부딪치는 한이 있어도 내가 마음속에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각오로 탁 부딪쳐도 별로 안 아파. 사실은 그래도 부딪치면 안되지. 그리하더라도 오히려 사무량심 없이 부딪치는 거 보다는 사무량심을 가지고 부딪치는 게 훨씬 낫다는 얘깁니다.

그런데다가 그 사무량심을 가지고 알아차리면서 갈 것 같으면 부딪칠 일조차도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게 가장 좋은 거고. 그런데 그렇게 할려니까 여러분들이 생활이 바쁘단 말이라. 뭐도 해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할 일이 많은 거라.

 

그러기 위한 전제 작업들이 있습니다.

그게 경전에서 뭐라 그러느냐면 첫 번째 '삼리 사산 세와' 라고 해서 '좋은 스승과 가까이 지내는 것'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 지낼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나를 만날 멍청한 데에다 집어넣고, 나를 나쁜 일을 만드는 쪽으로 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빨리 버려야 됩니다. 그게 친구든 아니면 뭐든 간에. 그것보다는 나를 자꾸 공부시켜주고 나를 좋은 쪽으로 수행하도록 하고 또 선한 일을 자꾸 하도록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하고 자꾸 친하게 지내라는 거라.

 

우리 교단 홈페이지에 올려놨나?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에 대한 것, 올려놓은 게 있을 겁니다. 교단 홈페이지 주소는 알죠? 그걸 한번 참조를 해서 그것에 맞게끔 좋은 친구를 자꾸 가까이 사귀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친구 가까이 해야 되는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배우고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벗어나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 '삿담마 사와랑' 오늘 같은 걸 얘기합니다. '법을 자주 듣는 것'

삿담마라고 하는 것은 담마! 그것도 계정혜와 관계된 담마! 꼭 수행에 대한 담마가 아니고 선정에 대한 담마든 계율에 대한 담마든 그래서 계정혜에 관계된 법을 자주 듣도록 해야 됩니다. 정 안되면 녹음해놓고 심심할 때라도 자꾸 듣고. 그리고 프린트물 내준 거 있으면은 한번 보고 읽는 것보다는 두 번 읽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마나시까라 니야낭 담마낭 마나시까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해도 뭘 해야 되요? '바른 사유를 실천하는 것!'

바른 사유를 자꾸 실천하는 것, 그래서 사무량심을 자꾸 닦아야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아, 내가 이 글을 읽었다.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이거 글을 읽음으로 인해서 내가 참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으로, 또는 이 글귀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들려주는 마음에서 아, 저 사람이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그 읽고 법문 듣고 한 것들을 바른 사유로써 실천하라.

 

그다음에 네 번째 '담마누 담마 빠띠빠따' 그렇게 얘기합니다.

'바른 견해가 증대되도록 하라'는 건데 그렇게 바른 사람을 가까이하고 바른 법을 듣고 바른 사유를 함으로 인해가지고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딱 견해가 생겨버리게 됩니다.

아, 이것은 바른 것이다. 저것은 틀린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는 것들이 견해가 딱 서게 됩니다. 견해가 서지 않으면 수행의 첫 번째 단추를 끼울 방법이 없습니다.

 

나중에 오후에 할 부분이지만 수행의 첫 번째 단추는 뭡니까?

바른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은 견해가 바로 서지 않는 상태에서는 바른 믿음을 확립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좋다고 다 허허 할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서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서지 않으면 확신이 없어.

 

경전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가 만날 있다가 탁 넘어지고 이렇게 할 때마다 "나모 붓다야" 이렇게 하는 애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는 뜻이라는 거라. 여러분들 그리합니까? 아마 넘어지면 “엄마야” 하기 바쁠 거라. “아이고 부처님”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그런데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딱 견해가 서가지고 부처님 외에는 자기 스승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부처님 외에는 안 따라. 딱 견해가 서있으니까 "나모 붓다야" 하는 거라. 전부다 넘겨 가지고,

 

이 아이가 밤에 자는데 나쁜 나찰이 와서 이 아이를 잡아먹을라고 합니다. 아이 발을 탁 잡으니까 아이가 뭐라 그래요? "나모 붓다야"

그 나찰이 깜짝 놀래가지고 어째 쪼맨한 꼬맹이가 “아이고 부처님” 하는 얘기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는 얘기를 하느냐는 거라.

그래가지고 이 아이를 보호해줬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아이는 어떠한 경우든지 견해가 선 상태에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들을 버린 적이 없다는 거라. 나찰이 나를 잡아가든, 아니면 그 중간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둑이라고 몰았든, 아니면 부모를 다 잃어버렸든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도 그 어떤 경우에도 견해를 세운 상태에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는 거라. 그러면 견해가 서버릴 것 같으면 믿음은 자동적으로 확립이 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들이 바른 견해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어요? 조금 전에 그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거라. 그 방법으로 해야 만이 그래서 사무량심을 실천하는 상태가 돼야 만이 아, 이게 참 좋은 거구나 하는 것이 딱 견해가 선다는 거라. 서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수행에 단초가 되는 믿음을 확립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게 인제 보통 바른 사유를 실천하기 위한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것, 그리고 업에 대한 것, 그리고 윤회나 해탈에 대한 것, 이런 것들은 자주자주 듣고 그것에 대해서 견해를 딱 세워야 됩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하는 것을 딱 세우고,

부처님 가르침이 뭔가 하는 것을 딱 세우고,

그리고 스님들이라고 하는 상가가 뭔가 하는 게 딱 견해가 서고,

그리고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것들이 딱 바르게 견해가 서고,

그리고 해탈하는 것이 어떤 것이고.

 

그러니까 해탈이 필요없다는 그런 얘기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이 어떤 이익들을 가져오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딱 세워야만이

이 여섯 가지들이 갖추어져야만이 견해가 딱 바로 서게 됩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이 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도 확립이 될 뿐 아니라 나는 어떠한 경우든지 인제는 마음의 병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것들이 덜해집니다. 그리고 점점 더 없어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알아차림의 힘은 더욱 더 강해지는 거라. 오력에 대해서 오후에 얘기하겠지만 믿음의 힘이 강하면 더욱 더 노력을 할려고 하고 노력의 힘이 강해지면은 사띠의 힘들도 강해지고 그리고 집중하는 힘들도 강해지고 그래서 지혜의 힘들도 서로 보조적인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잊지 말고 여러분들은 적어도 여러분들이 괴롭지 않을려면 마음의 백신들을 반드시 맞도록 하라.

 

백신 없이 살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라는 거라. 뭐하러 그러면 아플 때 병원 가? 육체에 약은, 주사는 딥따리 맞으면서 마음의 약들은 안 먹을라고 해가지고,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라. 마음이 몸을 유지를 하고 몸이 또 마음을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항상 조화로운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것 하나도 등한시할 수가 없습니다. 병에 들어놔 놓으면 아무리 지가 마음의 백신을 맞았다고 하더라도 별수가 없는 거고. 또 내가 아무리 마음을 잘 쓸려고 하더라도 육체 없이 마음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몸도 청결히 하고 깨끗히 해야 될 뿐 아니라 마음도 청결히 하고 깨끗이 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자!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 오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