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공양과 공덕과 지계 (20141031. 대구)

담마마-마까 2021. 4. 7. 09:06

https://youtu.be/m_JoZnOSR4c

* 공양과 공덕과 지계 (20141031. 대구)

 

오늘 처음 법회 시작하는 거죠? 실질적으로는.

저번에 약속한 대로 오전에는 일상생활 법문을 하고, 오후에는 수행법문 하고, 그리고 수행하고 수행지도하고 그렇게 진행이 될 겁니다. 그래도 스님이 부산 내려갈 시간은 좀 주어야 되겠지.

오후에는 오늘 점심 먹고 한번 해봐요. 밥 먹고 나서 바로 시작하면 좀 힘드니까 약간 20~30분 정도 텀을 주고, 그럴려면 점심 먹고 나서 설겆이 할 때 같이 도와서 해야 돼. 한두 사람이 하면, 그게 복잡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옆에서 좀 도와주고 하면 좀 빨리 끝날 수가 있겠지.

지금 내준 프린트물 이거는 오후 시간에 하는 프린트물입니다. 그래서 점심 드시고 나서 괜한 잡담 하지 말고 요거 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탁발 많이 안 해봤죠? (예) 스님 바리때가 왜 이렇게 생겼는지 알아요?

다른 그릇들은 위가 그대로 이렇게 올라가든지 아니면 위로 벌어져있는데, 스님들 바리때는 여기 중심부 나온 거보다 (윗부분이) 안으로 쏙 들어가 있죠? 왜 이렇게 해놨을까?

스님들이 출가할 때도 출가자가 가운데로 이렇게 들어와서 무릎 꿇고 앉도록 하고 나머지 스님들이 요렇게 뺑 둘러앉습니다. 바리때 모양으로. 요 속으로 쏙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너는 인제 출가한 스님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들어온 거를 다른 스님들이 증명하는 게송을 합니다. 그리고 나면 이 스님이 출가자, 상가의 이름으로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고기 잡을 때도 그렇게 많이 하죠? 쏘옥 오므려뜨려놔야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물론 빠져나갈 사람 빠져나가고, 또 환속할 사람 환속하고, 나쁜짓 할 사람 나쁜짓 하고 하겠지만, 그런 상징적인 의미들을 가지는데, 탁발하는 바리때가 이러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이거 공양받은 것들 공양물 되게 많죠? 이거 내가 다 먹기 위한 것은 아니죠? 또 다 먹으려해도 못먹습니다. 딱 한 때 먹는데 먹는 것도 항상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정해져있는데 이거 다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먹기 위한 것보다는 공양 올리는 사람들이 공덕이 되게끔 하라는 의미들이 큽니다. 그래서 공덕 쌓은 것들이 그대로 저장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 우리 부처님은 이렇게 돼있는데 정법을 설하는 상호죠!

어떤 부처님은 이렇게 해가지고 땅바닥을 요렇게 가리키는 게 있죠? 한 손은 여기 위에 올리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 그게 뭐냐면 내가 과거에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덕들을 행한 것들, 그것이 저장고에 딱 저장이 돼있다는 거라. 저장돼가지고 그게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그 어떤 위험이 닥치고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변경할 수 없다 하는 그런 뜻으로써 한쪽 손으로 “땅의 신이여! 그것을 증명하시오!”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테라와다 신자들은 항상 공덕을 짓고 나면 스님들이 축복 게송을 할 때 물을 따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따르는 것을 가지고 나무 밑에 부어줍니다. 한 나무 밑에다가. 그러면서 내가 공덕을 이와 같이 쌓았으니까 이 공덕이 계속적으로 쌓여서 나에게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게 되기를! 하는 그런 발원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탁발을 하면 여러분들에게 고마워해야 되는데 실제로는 스님들이 고마워하지를 않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이런 마음들은 가지겠지만 고맙습니다 하고 얘기하질 않고 항상 하는 게송이 이와 같이 쌓은 공덕들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기를.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는 그런 게송을 합니다.

이거 무슨 물품 주고 공양물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항상 이 고마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니고.

 

그래서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앞으로 매주 탁발이 진행이 됩니다. 탁발할 때 항상 마음에 품어야 되는 것이 공양물 올릴 때는 ‘아, 내가 이와 같은 공덕으로 내가 하루빨리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공양물을 올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니 그런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스님한테 여러분들이 고마워해야 되지. 그렇죠? (수행자 일동 : 예!)

 

또 하나, 아까 얘기했지만 이 공양물은 스님이 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립니까? 무엇 때문에 올려요? 스님 맛있는 거 많이 잡숴라고? (수행자 : 고마워서요)

뭐가 고마운데요? (수행자 : 법을 설해줘서요)

그렇죠! 이 공양을 잡숫고 우리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거짓말하지 말고, 니 얘기 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만 전해주라는 얘깁니다. 있는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변경하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전해달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스님들한테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스님들이 있어야만이 그 가르침을 여러분들이 접할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경전을 통해서 접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경전은 실제 하는 것하고는 또 다릅니다.

실제 수행하는 것, 의문 나는 것들 경전에 아무리 뒤져봐도 안 나옵니다.

또는 부처님과 같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 경전을 통해서 일으키는 감흥하고, 스님들이 전해주는 법을 통해서 일으키는 감흥하고 다릅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내가 들을 수가 있고, 공부할 수가 있고, 그로 인해서 내가 빨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스님 이 공양 잡숫고 건강하세요! 그렇게 하지 말고,

이 공양 잡숫고 스님 하루빨리 도와 과에 이르시고 우리들한테 더 좋은 법을 전해주십시오! 하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이걸 받는 스님들이 어때야 되겠어요? 청정해야 됩니다!

만날 지는 나쁜짓 다하고 돌아다니면서 공양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게 자격이 되겠어? 그래서 공양도 청정하지 않는 스님이나 상가에는 공양물을 거부하게 돼있습니다.

그걸 빨리어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아예 바리때를 엎어버린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절대 그런 스님이나 그런 상가에는 공양물을 올리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청정하지 않을 거 같면 향싼 종이에는 향싼 냄새가 나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나게 돼있습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데에다가 내가 같이 어울릴 것 같으면 나에게도 비린내가 나게 됩니다.

 

청정하지 못한 스님이나 상가에게 공양 올릴 거 같으면 여러분들에게 돌아가는 공덕은 없어.

그래서 무작정 스님이 좋고 아니면 뭐가 좋고 해서 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거라. 돌아오는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공덕을 쌓기 위해서, 또 그 공덕들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왜 공덕 부분을 강조하느냐면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 단계는 수행만으로써 이걸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쌓여진 공덕들이 있어야지만이 수행력과 결합돼가지고 한단계 탁 치고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보고 이런 공덕들을 쌓아 보면 금방 그게 드러나집니다. 그런데 공덕 쌓기 위한 것인데 공덕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소용이 없는 거라.

 

그래서 "공양을 올릴 때는 '상가다나'가 되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공양을 받은 것은 나이지만 나는 상가의 일원입니다. 그럼 여러분들도 공양올리는 것은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지만은 마음속에서는 스님에게 공양올린다는 마음보다는 상가에 공양올린다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설혹 잘못된 스님에게 공양 올린다고 하더라도 다른 스님들로 인해서 공덕이 될 수가 있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공양을 올릴 때는 항상 상가에 올리는 형태들을 취하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런 청정한 스님들이 모이는 상가에 공양을 올리기는 하는데, 잘못 올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분명히 청정한 스님들 상가이기도 하고, 나도 이와 같은 공덕으로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는 마음으로 올리기도 하고, 그리고 올릴 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올리기도 하는데, 공덕이 안되는 건 또 왜 그럴까?

여기 음식물들 많이 있는데 이거 아마 여러분들이 잘못된 부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쌀, 생쌀! 현미든 보리든 쌀이든 생쌀. 생쌀을 올릴 수 있을까? 여러분들 탁발 누군가 오면 옛날부터 생쌀을 이렇게 한 바가지 퍼주고 이랬죠? 그거 올릴 조건이 되는 겁니까? 왜그래요? 그거 물에다 며칠만 놔둬도 이렇게 싹이 트죠. 생명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식물을 죽여도 그게 살생죄에 해당이 되지 않는데, 스님들은 식물조차도 죽이면 살생죄에 해당이 됩니다. 죄가 되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저기 풀이 있어도 풀도 뽑지도 못해. 남이 그걸 다 해줘야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스님들만 있는 곳이면 아마 풀이 우거져서 난리일 거야. 풀조차도 못뽑는 거라.

 

그런데 쌀은 생명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쌀을 그냥 생식하는 경우는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대부분 조리를 해가지고 먹어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내가 그 쌀을 조리를 해먹어야 됩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쌀을 조리를 해줘야 돼. 그럼 나는 무슨 죄를 짓게 돼요? 생명력이 있는 거를 내가 직접 조리를 하면 죽여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살생죄에 해당이 되는 거라. 내가 직접 조리를 안 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 조리를 할 것 같으면 간접적으로 시켜가지고, 그것도 살생죄에 해당이 됩니다.

 

살생죄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가지고 죽이거나 이 두 가지가 다 살생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 이 생쌀 올려가지고는 저 스님은 살생죄 짓게 되고 나는 그 살생죄를 짓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 때문에 그건 공양 올릴만한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것뿐 아니라 조리하지 않은 것, 쉽게 말하면 생고기라든지 특히 여러분들 좋아하는 회, 이런 것들 절대 공양올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뭐 식당에 가서 먹는 건 괜찮다? 그것조차도 안돼. 그거는 어떠한 경우든지 해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먹을 게 많은데 왜 그걸 먹을라고 그래?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공양 올릴 때 주의해야 될 것, 또 공덕이 안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오늘 스님한테 탁발 올릴려고 생선 사와가지고 생선요리를 해가지고 가져왔다. 죽어있는 생선을 사와가지고 하면 괜찮은데 맛있게 먹는 활어가 좋다해가지고 살아있는 거 가져와갖고 내가 직접 죽여가지고 먹었다.

스님이 그걸 모를 경우에는 전혀 문제가 안 되는데 그것을 알았을 경우에는? 그게 맛이 틀리다메? 먹어보면. 그럼 지나치게 맛있었다, 어 이거 뭐 어떻게 조리했어? 예. 내가 살아있는 거 사와가지고 내가 조리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즉시 그 스님은 그걸 먹는 걸 중단해야 되는 거라.

 

보거나 듣거나 의심이 되는 육고기, 살아있는 생명체는 스님들은 먹을 수가 없거든.

그러면은 그 사람이 입으로 아, 내가 맛있는 생선가지고 요리했습니다. 동태가 아니고 생태 가지고. 그러면은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단 말이라. 그러면은 내가 먹을 수가 없고, 또 지나치게 맛있는 거면 의심을 스님이 해볼 수가 있는 거라. 어, 이거는 전에 먹었던 생선하고 맛이 틀린데? 이거 혹시 살아있는 거 가지고 조리한 거 아닐까? 하고 의심이 되면 그것도 먹을 수가 없는 거라. 안 그러면 직접 그렇게 조리하는 모습을 봤든지.

보거나 듣거나 의심되는 것들은 그게 아무리 일반적으로 여러분들 먹는 거라도 그거는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을 탁발했으니 그것도 좋은 경우는 아니죠. 그래서 그런 경우도 탁발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탁발 할 때는. 고기 종류를 한다고 하더라도 죽어있는 것들로 가지고 조리를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생(生) 것이 아니고 조리된 것들이어야만 반드시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뜻이 됩니다.

 

그리고 또 스님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이 개, 아무리 죽어있는 것을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개 같은 것, 아마 여러분들에게 해당 되는 것은 그것만 있을 겁니다.

그다음에 열 가지 고기 종류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돼지고기 소고기 이런 것들은 전혀 해당이 안 되고 개 만이 해당이 될 겁니다. 그런 것들은 먹을 수가 없게 돼있습니다.

(※ 십종 부정육 : ① 인육 ② 코끼리 ③ 말 ④ 개. ⑤ 뱀 ⑥ 악어 ⑦ 사자 ⑧ 호랑이 ⑨ 표범 ⑩ 곰 등의 특수한 10가지 고기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전부 먹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일부러 채식주의자가 아닐 것 같으면 먹는데 장애를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대신에 먹는 시간은 반드시 있다.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 음식 먹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내가 몸을 유지해서 내가 수행하고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기 위한 겁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많이 먹어가지고도 안되는 거고, 또 삼시세끼 먹어가지고 소화시킬 수가 없어 다른 데다가 힘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점심 때 열두시 되기 전에 음식물 먹는 것을 끝내라 하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공양올리는 것들은 대충 어떻게 하는지는 알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공양들을 올렸는데 이게 스님만 먹는 게 아니니까 당연히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먹어야 되겠죠?

 

부산에서 이렇게 해보니까 가장 그래도 기쁘게 먹는 게 그리고 여기에 운영하는 운영진들 부담을 덜하게 하는 방법이 탁발하는 방법입니다. 안 그러면 이거 여러분이 다 먹여살릴려고 해봐요? 여기 있는 사람들 어마 어제 밤부터 준비해가지고 오늘 아침부터 내내 조리 다 해야 돼. 그거 얼마나 번잡스러워? 먹는 거 먹기 위해서 여기 모이는 것도 아니고 먹어야 어쨌든 수행하는 거니까 먹는 건데 그거 그렇게 부담스럽게 해가지고 어떻게 할려고 그래?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중에 일부분은 스님 먹고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먹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탁발한 음식들을 스님이 먹고 나머지 부분들을 먹을 수 있는 조건들을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사중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들, 쉽게 말하면 그 사중에서 사중 일을 돌보는 사람들, 그다음에 가난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먹을 조건이 되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으면 가축들에게 먹여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버리는 경우가 없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먹을 거니까 맛있는 걸 싸올려고 하지 말고 이 먹는 게 스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먹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정성스럽게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이 할려고 하지 말고. 여기 보면 아마 대부분 양들이 많을 거라. 오늘 다 먹어도 이게 남을 거라. 남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도 처치 곤란하고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양들을 조금씩 알아서 가져와서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부처님 법을 듣고 수행하기 위한 거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 서로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서두에 살생에 대한 얘기들을 꺼낸 것은 뭐냐하면, 왜 부처님이 살생하지 마라. 죽이지 마라 하고 얘기를 했을까? 여러분들이 안 죽이고 살 수 있나? 아마 없을 걸. 이생에서 안 죽였다 하더라도 그 전생에서조차도 안 죽였다고 보장할 수 있어요? 아마 그러진 못할 거라.

그런데도 부처님이 죽이지 마라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그런 걸 자꾸 지킬려고 해야만이 마음이 내가 수행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계를 지키지 않고 수행을 한다? 그거는 어불성설입니다. 또 계를 지키지 않고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다? 어불성설입니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뭐 개차반으로 할 거 같애요? 그건 순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될 조건이 안됩니다.

누가 죽는 모습만 봐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나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거고. 또는 죽는 모습을 보고 나는 죽기 싫다는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고. 그런 겁니다.

 

계를 어겨보니까 저 생명체가 죽듯이 나도 죽는다는 생각을 할 거 같으면 죽기 싫어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계도 지킬려고 할 뿐 아니라 아, 나도 그러면 이런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또 내가 영원히 안 죽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수행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보니까 인제는 남을 죽이지도 안 할려고 하고 남을 해코지 하려는 마음들도 안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수행이 완성되면 그게 완전히 끊어져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런데 수행 완성됐는데 지는 맘대로 행동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모든 생명들은 항상 평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그 생각들을 잘 안 일으킵니다.

한 두달 전인가 길을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막 사진을 찍고 있어. 그래서 뭔가 하고, 뭣 때문에 사진찍지 해가지고 가보니까 고양이가 뱀을 잡아갖고 막 놀고 있는 거야. 뱀은 죽지도 않고. 사람들이 그 모습이 되게 좋았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막 깔깔거리며 사진찍고 있는 거라. 참 못 할 짓이라. 고양이가 그 뱀을 먹는 것도 아니고 지가 가지고 노는 놀잇감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데, 고양이는 인간보다도 못한 동물이니까 그럴 수 있다 쳐. 그걸 보고 좋다고 깔깔거리면서 사진 찍는 사람들은 그게 뭐야? 지가 그렇게 되고 있을 거 같으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 건데.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일 거 같으면 고양이 보고 이놈아 그거 죽이지마 하고 뱀을 잡아서 다른 데에다 살려주어야 되는 게 그게 인간된 도리인 거지, 그걸 깔깔거리고 사진찍고 있더라고.

 

생명에 대해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못일으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저 뱀은 죽여야 될 동물이고 나보다 더 하찮은 동물이다 생각을 하는 거라. 그 뱀조차도 살 권리가 있고 뱀조차도 행복하게 생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겁니다. 그걸 누가 함부로 뺏을려고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건 그래선 안 된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에도 경전에 보면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뱀을 가지고 막 놀고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아이들한테 되게 혼을 냅니다. 생명을 빼앗지 말아라.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을려고 하지 말아라. 그 과보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는 거라. 다른 과보들은 조금씩 나타나고 또 한번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생명을 빼앗는 과보는 두고두고 나타난다는 거라.

경전에 그걸 보통 500생이라고 그럽니다.

500생 동안 그 과보를 또 받고 또 받고, 한 번 죽인 건데도 그렇게 받는다는 거라.

왜 그럴까?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은 그마만큼 마음에 심하게 물든다는 거라.

 

악한 마음들을 일으킨다는 것, 다른 종류가 많이 있는데 실제 죽이는 행위가 됐을 경우에는 죽일려는 의도도 있어야 되고, 죽일려는 행위도 있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실제 죽여야 되는 거고, 그리고 죽이고 나서도 그것에 대해서 가엽다는 그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야 되는 거고, 악의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 하나의 죽이는 현상에 대해서.

 

그러니 그 애들한테 부처님이 야단을 치는 거라. “생명을 빼앗을려고 하지 말아라. 네 생명이 소중하듯이 다른 생명들도 소중한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지 해칠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

그러면서 부처님이 얘기를 하는 것이 항상 모든 생명들에 대해서 자애로운 마음들을가지도록 하라.

 

죽이지 마라는 것은 두 가지를 기르기 위한 겁니다.

모든 생명들은 평등하다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 그리고 모든 생명들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이걸 기르기 위해서 우선 급하니까 안 죽일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안 죽일려고 하고 스스로 방어하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킨다는 것은 그래서 '극약처방'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당장 손을 딱 붙잡아두지 않을 거 같으면 뭔가 딴짓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딴짓 못하게 이렇게 손을 꽉 붙잡아두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손을 붙잡아둔다고 해가지고 남의 물건을 훔칠려고 하는 마음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죠? 언젠가는 손이 풀리고 나면 남의 물건 훔치기는 하겠지만 이것조차도 잡아두지 않으면 당장 훔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당장 죽이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계를 지키는 것을 극약처방이라고 그럽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계를 지키는 것을 보면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화를 내지 말아라는 계가 있어요? 없죠! 왜 화내지마 하는 그런 계는 없을까? 화를 내고 안 내고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물건을 훔치지 말아라. 죽이지 말아라. 술 먹지 말아라. 하는 것은 그것은 실제적인 대상이 있는 겁니다. 밖에 있는 실제적인 대상. 그 대상에 대해서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평등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딱 붙잡아두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해서 계를 지키는 것을 극약처방이라고 그러는 거라.

 

그렇지만 어떡하겠어? 만약에 훔치면 어떻게 돼요? 사회법으로 쇠고랑 차게 되죠. 그리고 생명 이런 조그만한 것 죽인 것 가지고 쇠고랑 차지는 않겠지만 실제 사람을 죽일 거 같으면 쇠고랑 차게 됩니다.

부처님이 한 정해진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법으로도 통용이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일반적인 사회법뿐 아니라 마음의 법에도 통용이 된다는 거라. 그걸 안 할려고 자꾸 하다가 보면은 마음은 선한 것들을 할려고 하고, 마음은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으로 기울어진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계율(戒律)이라고 할 때 스님들이 받는 것은 율(律)이라고 그럽니다. 스님들이 뭘 어겼을 경우에는 당연히 벌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이 하는 것은 율이라고 안하고 계(戒)라고 그러죠. 그래서 계를 어겼다고 해가지고 다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죽였을 때도 사회법으로는 처벌을 받지만 개미를 죽였을 경우에는 사회법으로 처벌은 안 받죠? 다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미를 죽였을 경우와 사람을 죽였을 경우 경중을 따질 경우 어떤 것이 큰 죄가 될까? 사람을 죽인 것이 훨씬 더 죄가 클까? 그렇진 않습니다.

얼마만한 죽이려는 마음들이 지속되었느냐? 지속시간이 많으면은 그리고 그 의도가 훨씬 많았으면, 죽이는 시간이 훨씬 길었으면, 그럼 죄가 큰 거라. 왜? 그마만큼 내가 나쁜 것에 물드는 시간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사람과 개미가 어떤 것이 중요성이 뛰어나고 덜하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단지 그것을 죽일려고 했을 때 악한 마음들 악한 행위들이 어느 것이 더 길었느냐는 거라. 그래서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일년 벌을 받지만, 내 집에 있는 벌집을, 저 벌을 죽여서 부단하게 노력해서 벌집을 떼어내서는 사회법으로는 관계가 없지만 죄가 훨씬 크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명을 죽일려고 하는 마음들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가끔 이렇게 얘기하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어쩌다가 내가 죽인 건 그건 좀 용서해주면 안 될까요? 내가 용서해주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부처님조차도 용서해주고 자시고 하지를 못하는 건데, 자기가 지은 행위는 자기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해주고 자시고 할 게 있는 게 아니라.

 

계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겁니다. 99개는 잘 지켰는데 1번 어겼다? 그럼 이것은 계를 지킨 것이 되는가? 절대 아닙니다. 어긴 것은 어긴 겁니다. 그때 당시에.

그리고 이게 큰 걸 어겼을 거 같으면 99개를 아무리 잘 지켰어도 그 어긴 것들에 대한 과보들을 분명하게 받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맨 처음에 오계를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지킬려고 해야 됩니다. 어기면 안 되는 거라. 딱 붙잡아서 그것들은 지켜야되는 것이지 어쩌다 실수했다. 변명이 통용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 하나 더, 경전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가 지키는 계가 최고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도둑질을 안한다. 나는 사음 안한다. 나는 거짓말 안한다. 나는 살생 안한다. 자기 계 지키는 것이 최고 어렵다고 하는 거라.

여러분 오계 중에 어떤 것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까? 아마 나이드신 분들한테 가장 지키기 쉬운 계가 뭐냐고 할 것 같으면 불사음계라고 그럴 겁니다. 뭐 이미 성적인 접촉 할 일이 없으니까 아마 최고 하기 수월할 거라. 아파트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볼 거 같으면 거의 살생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살아있는 거 안 죽이고 할 거 같으면 거기 개미가 있어 모기가 있어? 살생 안 하고 그거 지키기 수월하다 그럴 거라. 쉬운 것이 있고, 어려운 것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계는 나름대로의 의미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탐·진·치를 소멸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들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지키니까 탐심이 없어지고, 이것을 지키니까 진심이 없어지고, 이걸 지키니까 치심이 없어지고, 그 탐·진·치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억제하는 수단으로써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억제를 하다가 보니까 아, 내가 이걸 영원히 없애버려야 되겠다 싶으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해질 때 수행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오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다섯 가지는 온전하게 다 지켜라.

다 지킬 수가 있겠어요? 어려워요? (수행자 대답 : 노력해봐야죠.)

노력해서 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쌓아야 될 바라밀 열 가지 중에서 '결정심 바라밀' '아딧타나' 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딱 결정해버려야 됩니다.

이것은 반드시 지킨다!

지키지 않으면 나는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고 깨달음으로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들이라. 안 그러면 그냥 깨달음하고 관계없이 살려고 할 거 같으면 안 지켜도 돼! 그 대신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나쁜 과보를 받게 됩니다. 나쁜 행위를 했으니까 나쁜 과보를 받게 돼있는 거라.

 

내가 좋은 과보도 받고 내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왜 지키지 못할 이유가 뭐 있어?

그래서 부처님도 '결정심 바라밀'이라고 하는 걸 얘기를 합니다. '아딧타나!'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나에게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나에게 공덕을 쌓게 하고, 나에게 닙바나에 이르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건 내가 반드시 한다! 하고 딱 결정을 해야 됩니다.

 

수행할 때 결정심을 내고 수행하는 것과 안 내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내가 한시간 동안에는 반드시 내가 수행한다.! 딱 결정하고 나서 수행하면 어쨌든 거기서 졸음이 오든 다리가 아파서 통증이 오든 대상하고는 관계없이 막 망상부리고 해도 한시간을 채울려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심을 안 내고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면 그거 못참고 일어납니다.

 

그러면은 수행 한시간 동안 결정심을 내가지고 한시간 동안 한 사람은 여러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면 그 장애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똑같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을 수 있는 힘들을 기르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장애를 못이긴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오는데도 또 못이기게 되는 거라. 그럼 그게 습관화돼버립니다. 그러니까 앉으면 그냥 조불고 앉으면 그냥 망상하고, 그게 나쁜 방향으로 넘어간지조차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 아무리 수행해도 수행에 진척이 있을 수가 있나?

선하고 좋은 것들, 닙바나에 이르는 것이라면 반드시 내가 이것은 한다 하고 결정해버려야 됩니다.

 

오계도 그와 같습니다. 나를 이생에서뿐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건데 그걸 못할 이유가 뭐 있어? 그럼 딱 결정하라는 거라. 결정해도 그것을 할동말동 하고 그것을 어기는 경우가 태반인데, 결정조차도 안 해놔놓고, 그거는 안 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결정심 바라밀들도 쌓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 이것은 오늘부터는 반드시 하겠다! 또는 매일 수행하는 시간을 두 시간은 반드시 하겠다! 딱 정해버리라는 거라. 결정해버리고 그 시간동안은 거기서 조불든 망상하고 싸우든 뭘 하든 어쨌든 간에 그 시간은 반드시 채울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이 무르익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들 일주일에 한번씩 여기와서 꼴랑 조금 하고, 집에 가서는 헤벌레 하고 계율도 지키지도 않고, 수행도 안 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온다고 해도 그거 별반 차이 안 납니다.

어떤 게 습관들여진 게 많아? 그럼 당연한 겁니다.

 

좋은 것들 해야 될 것들은 결정 해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해야 될 것과 그리고 필요한 것들은 분명하게 구분을 하라는 거라.

지금 해야 될 것은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닐 것 같으면 이것이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 해가지고 그것을 갖추어 놓을 필요는 없는 거고, 또는 내가 미리 그 일을 할 필요도 없는 거라.

하물며 할 필요도 없는 것들? 아니면 나에게 도움도 안 되는 것들? 그걸 해서 어떡할려고 그래? 남에게 화내는 거? 여러분들에게 도움 됩니까? 도움 안 되는 거 하려고 하면 안 돼.

 

나에게 이익도 없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이익이나 행복을 주지도 못하는 것들을 왜 할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럼 그러한 것들도 아, 이거는 내가 반드시 안 하겠다 하고 딱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지금은 조금 어려울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들이.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 그렇게 결정 해놔놓고 또는 계율을 지킬려고 자꾸 하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켜지게 됩니다.

 

처음에 스님이 벌써 27년 전 일인데 처음 태국가서 이 테라와다 가사를 입었을 때 하루 한끼 먹으니까 얼마나 많이 먹을려고 할 거라? 나중에 저녁에 배고플까봐 가지고, 잔뜩 먹어요. 배가 꽉 찰 때까지. 계는 어겨서는 안 되겠고, 그런데 이때까지 하루 세끼 먹어온 습관이 있으니까 세끼 분을 한꺼번에 먹을려고 하니까 얼마나 몸이 부대낄 거라?

 

처음엔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큰스님들이 보면 씨익 웃고 가. 그래도 나는 그래도 그건 먹어야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 끼 그것도 여러분들 먹는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을 가지고도 충분히 살아가는 거라. 그런데도 그렇게 못하는 거라. 할 수 있는데도 못하고 있었던 거라. 나중에 세월이 지나니까 그게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더라고. 줄어들어가지고 지금은 딱 양이 정해져있어요.

우리 부산 선원에서도 내 양을 딱 만들어서 찍어갖고 와요. 그것보다도 많으면 딱 남겨버리고 하기 때문에. 적으면 말을 안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눈대중으로 아, 스님 요정도 먹겠지 하고 주면 대부분 많아. 많이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즘은 아예 조그만한 종지가 있어요. 종지에다가 똑 찍어가지고 요렇게 딱 끄집어내가지고 갖다 줘.

 

양이 일정해지니까 먹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이 없어져버립니다. 전혀 불편함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인제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져버리는 거라. 전혀 장애가 없어. 설혹 한끼를 안 먹고 하루를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장애가 되지를 않아. 자연스러워져버리는 거라. 그게 처음에는 하루 한끼를 세끼만큼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 한끼를 열두시 전에는 먹고 끝내야 되겠다 하는 계를 지킬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 어쨌든 열두시 전에는 먹었으니까. 그걸 지킬려고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양이 많았다가 했는데,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내가 일정한 양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양만큼만 먹게 되는 거라.

나중에는 계를 지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져버립니다. 그러면은 계를 지키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은 항상 수행하는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마음이 선한 쪽으로 흐를 수 있도록 그리고 악한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딱 방어할 힘들을 키워야 됩니다.

 

이제 열한시가 넘어 됐으니까, 그렇게 다 잘할 수 있겠죠? (수행자들 : 예!)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거 스님한테 공양물 올리기 위해서 온 거 아니죠? 그럼 필요한 양만큼만 해야 됩니다. 또는 여러분들이 법문만 듣기 위해서 온 건 아니죠? 물론 법문만 들어도 그게 또 기억에 남고 또 조금 유익하긴 하겠지만 실천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계를 지키라고 했는데 ‘음 그래야지’ 안 하고 다 파계해버리고 다 할 거 같으면 그게 뭔 의미가 있어?

 

그래서 불교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배우는 길, 그리고 실천하는 길, 그 두 가지입니다.

배우는 것은 반드시 실천해야 되는 것이고, 실천한 것들로 인해서 나는 도와 과에 이르게 됩니다. 그거 외에는 없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어떠한 것들도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거라.

내가 뜬구름 잡는 얘기, 어 저기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뜬구름 잡는 얘기, 실천되는 것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듣지 말아라는 거라. 들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실천되지 않는 것들을 뭐하러 들어?

그래서 여러분들은 두 가지는 반드시 해야 됩니다. 실천할 수 있게끔 배워야 되는 것이고, 그 배운 것들은 반드시 실천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또 내가 아, 이래서 참 좋구나 하고 자연스러워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가끔씩 그런 때가 있습니다. 누가 얘기를 하면은 얘기를 들을 때 듣기만 이렇게 하거든. 그러다 보면 그냥 그 얘기를 그대로 듣습니다. 그러다 어떨 때는 그 소리가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 싫은 소리라고 알아차리고, 그 말을 단락을 탁 나눠버리게 됩니다. 그럼 의미가 전달이 안 돼. 그 사람이 하는 얘기는 들리기는 하더라도. 그러면은 들리는 소리로 인해가지고 내가 화를 일으킬 조건이 안 생겨버리거든. 그럼 적어도 내가 저 사람이 하는 얘기로 인해서 내가 거기에 화를 내는 반응들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계를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화를 냅니다. 왜? 마음을 제어하고 마음을 수행해야 되겠다는 것으로는 되기는 했는데, 그것을 그대로 다 완성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완전하게 제어하지도 못했고 수행을 닦아나가서 그것을 다스려나갈 능력이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공덕을 쌓는 것들, 계를 지키고, 보시하고 여러 가지 공덕을 쌓는 것으로서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그것은 힘이 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은 그것이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럼 깨달음에 이르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 스스로 바른 법을 가지고 자꾸 그것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후에 하는 법문이 꼭 위빳사나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도 가르치고 위빳사나 수행도 가르치고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만은 경전을 벗어난 수행법을 가르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 외에 나머지 조사 스님들이 가르친 것 아니면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많이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딱 정해져 있습니다. 사마타는 40가지의 방법, 위빳사나수행은 네 가지 몸의 자세, 네 가지 방법, 신·수·심·법. 그 이외의 것들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딱 정해놨을까? 수행도 부처님이.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할 것 같으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기는 할 수 있을지언정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는 거라. 지가 수행에서 그걸 제어할 능력이 되고 할 거 같으면 관계가 없는데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거라.

 

가끔씩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아, 저 스님은 수행 참 열심히 했고 어느 정도 경지에는 이르른 거 같은데 아, 이건 마 자만심이 엄청 높아. 왜? 그 스님은 자기가 해온 방법을 잘 해왔어. 잘 수행해왔는데, 그 방법이 부처님이 설한 방법이 아닌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작용이 드러나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아만심도 높고,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했는데도 화는 벌컥벌컥 내고,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했는데도 욕심은 자꾸 부리게 되고.

 

그걸 버리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부작용이 없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계속해서 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르게끔 하는 방법으로 딱 제시를 해놓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만을 여러분들에게 얘기를 하고 같이 수행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됐죠? 질문 있는 사람? 질문은 여기 법문한 내용에 관계된 것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관계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계속 그렇게 진행이 될 것이기 때문에 뭐 그냥 부끄러워할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을 그냥 그대로 드러내면 됩니다. 네. 질문하십시오.

(이하문답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