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영양소(Āhara), 식사와 해탈의 관계 (20141121.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12. 09:00

https://youtu.be/INtdPYuySQg

https://youtu.be/nhRkxiefmTk

* 영양소(Āhara), 식사와 해탈의 관계 (20141121. 대구)

 

아(a)는 부정형이고, 하라(hāra) 라고 하는 명사는 하라띠(hārati)에서 온거거든. 그러니까 하라띠(hārati)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내걸 저쪽으로 가져간다는, ‘가져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가져가는 것의 반대, 아+하라띠(āhārati)가 되니까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가져온다’는 그런 의미가 되겠지.

그러니까 뭔가를 가져와야 내가 사는 것, 내가 뭔가를 섭취를 해야만이, 뭔가가 또 일어나야만이 살아가는 것들을 얘기할 때 '아-하-라(āha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뭘 먹어야 살아가게 됩니까? 음식.

그렇죠. 음식 안 먹으면 죽죠. 또 뭐 먹어야 살아갈까? 살아가는데. (수행자 : 지식)

음. 지식도 어쨌든 섭취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식은 없다고 해가지고 죽는 건 아니죠? 그래서 여기서 아하라라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이게 없으면 나는 죽는다 하는, 죽는 것을 얘기할 때 이 아하라라고 하는 겁니다. 필요한 것들을 가져온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다 아하라가 되는 게 아니고 이게 없으면 안 되는 것들, 내가 살기 위해서 이게 없으면 안되는 것들을 얘기할 때 '--(āha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얘기할 때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한자에서 번역할 때 식(食)자 먹을 식(食)자 해가지고 음식이라 할 때의 식(食)자라고 표현했는데, 그거는 꼭 식(食)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스님은 그걸 영양분이라는, "영양소"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그 영양소가 꼭 물질적인 음식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정신적인 것들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면 여러분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뭔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식하는 것이 없으면 여러분은 죽은 시체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시체와 여러분 차이가 그거잖아. 뭔가 인식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또 하나가 뭘 접해있는 뭐가 느껴지잖아. 그 느낌이 없으면 그것도 죽은 시체와 마찬가지고.

그리고 또 죽은 시체는 뭘 할려고 하는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이미 의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마음이 있다는 것은 뭔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이렇게 보면 접촉하는 것, 의도하는 것, 그다음에 인식하는 것, 이것도 똑같이 아하라(āhara)의 영역에 속한다는 겁니다.

 

아마 부처님 같이 분명하게 물질적인 영양분과 정신적인 영양분을 구분해 놓은 분도 없을 거라.

그러니까 물질적인 영양분은 몇 개라? 하나죠! 정신적인 영양분은 몇 개라? 세 개죠! 조금 전에 세 개 얘기했습니다. 4분의 3은 정신적인 영양분이고, 4분의 1이 육체적인 영양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죠?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필요한, 진짜 필요조건만 충족하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것보다도 오히려 정신적인 것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네 가지인데,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어떻게 해탈에 이르게 될까?

영양소 가지고 어떻게 해탈에 이를 수 있겠어요? 그 방법 아는 사람? 없어? 그럼 지금부터 알려줄테니까 그대로 딱 해야 돼요 이. 알았죠?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정신적인 영양소가 더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정신적인 부분부터 먼저 얘기를 하도록 할게요.

 

먼저 '팟사(phassa)'라고 하는 접촉, 접촉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경전에서는 뭐라고 했느냐면 "가죽이 벗겨진 소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죽이 벗겨져 있으면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봐요.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느낌들이 일어나겠어? 이게 만약 여기에다 탁 부딪치면 여기에 차가운 느낌이 확 일어날거고, 불 가까이 갈 거 같으면 다른 것보다도 훨씬 많이 뜨거운 느낌들이 일어날 것이고, 굉장히 느낌들이 많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팟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건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질적인 느낌들은 이 팟사의 영역에 속할까? 안 속할까?

 

이 네 가지는 뭐냐면 네 가지를 구분해 놓은 이유가 이것만 수행해도 틀림없이 해탈에 이를 뿐아니라, 해탈에 못 이르러도 그래도 아, 이것에 대해서 내가 경계하는 마음이 더 생기고 또 마음도 고요하고 깨끗해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대할 때는 어떻게 내가 대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되나, 그다음에 접촉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의도가 일어났을 때는, 또는 인식이 있을 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상가 스님들께서 오셔서 탁발법회가 진행됩니다. 탁발법회 중략)

 

계속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까 '팟사' 하다가 말았습니다.

팟사(phassa)는 정신적으로 부딪치는 것만 얘기합니다. 뭔가가 대상이 나한테 와서 탁 부딪쳤다. 물질적인 접촉 이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탁 부딪친 것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정신적인 느낌들 그걸 얘기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뭐가 있을까? 즐겁고, 괴롭고, 무덤덤한 느낌들이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은 경전에서는 뭐라고 했느냐면 "괴로움으로 관찰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즐거운 느낌 항상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될 수가 없죠.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은 항상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즐거운 것이 항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은 싫다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 자꾸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맛있는 걸 먹었다. 만약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알아차려야 돼? ‘아, 괴로운 것이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즐거운 느낌들은 계속 있을 수가 없고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변하는 것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맛있는 거 먹었다고 칩시다. 처음에 먹을 때는 입속에서 맛있는데 이게 항상 있습니까? 자꾸 씹다 보면 이게 맛있는 느낌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더 계속 씹을 거 같으면 그 씹는 것 자체가 그 느낌이 아예 괴롭습니다. 이렇게 계속 관찰을 해도 되고, 애초부터 즐거운 느낌이 어떤 것이든 '아, 이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고 자꾸 이해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즐거운 느낌이다 할 거 같으면 즐거운 느낌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여러 가지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것도 사람들은 빨리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괴로운 느낌들이 한번 일어나고 끝나는 경우가 있던가?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으면 그다음에는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연달아서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이 알아차려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느낌들이 한번 오는 것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온다는 거라. 그럼 괴로운 느낌이 있더라도 그 괴로운 느낌을 연속적으로만 알아차리면 참 좋은데,

예를 들어서 다리에 통증이 있다. 다리에 통증이 괴로운 느낌이 있는데, 괴로운 느낌이 그 하나로 가만히 있든가? 어떨 땐 무거운 것으로 괴롭게 느꼈다가, 어떨 때는 아픔으로 느꼈다가, 어떨 때는 쑤시는 느낌으로 있었다가 갖가지가 있습니다.

 

그럼 마음이 고요하게 돼있으면 쑤시면 쑤신다고 알면 되는 거고, 무거우면 무겁다고 알면 되는 거고, 또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 있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고, 그대로 그렇게 따라가면 됩니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이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빨리 지나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화살과 같이 알아차리고 괴로운 느낌은 항상 다른 것들을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 주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무덤덤한 느낌. 대부분 사람들은 무덤덤한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게을러져버립니다. 안할려고 합니다. 마음은 항상 게을러지려고 하게 됩니다! 그럼 무덤덤한 느낌이 있을 때는 빨리 마음을 활기있게 만들어줘야 됩니다. 대상을 놓쳤을 때도 무덤덤한 느낌으로 인해서 대상을 놓치는 경우들이 많고, 그럴 때는 무상한 것으로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무덤덤한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상!' 무상하게 알 것 같으면 마음에 경각심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분발심이 더욱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거 같으면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그래서 졸음에 빠진다든지 아니면 대상을 놓친다든지, 이럴 때는 빨리 마음에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게 인제 팟사가 일어났을 때 팟사를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팟사를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마음에서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방어해준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느낌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에서는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즐거운 것, 괴로운 것, 무덤덤한 것들을 그와 같이 알아차리면 악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두 번째 이익이 뭐냐면, 집착하는 것들, 계율에 대한 집착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의식에 대한 집착이나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들, 틀들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을 막아주게 된다는 겁니다. 무상하게 알아차리고, 그리고 빠르게 변하는 것으로써 알아차리고, 그리고 괴로운 것으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틀들 그리고 내가 집착하는 형식들, 이런 것들도 변하는 것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 틀들을 가지는 것들을 막아줄 수가 있는 겁니다.

팟사는 그렇게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면 해탈에 이른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마노 산 쩨따나(mano sañ cetanā)' 라고 의지력, 의욕 보통 의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의지력을 경전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증기선이 49척의 나머지 배를 끌고가는 것과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마만큼 강력하다는 뜻이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정신적인 작용은 항상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게 안 일어나면 여러분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생명은 그래서 이런 자양분 영양소를 먹고 살게 돼있는 거라.

마찬가지로 의도는 항상 일어나게 돼있는데, 그게 얼마나 강하냐면 다른 것들은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까지도 전부 다 끌고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마만큼 힘이 강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힘이 센 사람한테 내가 잡혀가지고 숯불 화로에 손을 갖다 대면 내가 마음대로 이걸 뺄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 숯불 화로에 손이 데이는 수밖에 없는 거라. 의도는 그와 같다는 거라. 내가 아무리 의도를 안 일어나게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바꿀려고 하더라도 바꿀 재간이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강하다는 거라. 그래서 "의도는 숯불 화로와 같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의도로 인해가지고 모든 갈애들, 세 가지 갈애들은 일어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갈망하고 원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의도로 인해서 일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에서 의도 알아차리기 힘들죠? 아마 모르긴 해도 참 힘들 겁니다. 그래도 어떡해? 그 의도를 몰라가지고는 안 되는데.

수행을 꾸준하게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아, 의도가 일어나는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일어나는 거는 알지만 의도를 멈출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그럼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알 거 같으면 그 의도로 인해서 뭔가가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것일까?

여러분들이 라고 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가 되면은 의도가 알아차려집니다.

호흡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모습들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은 마지막에 딱 끝나는 부분이 있고 그러고 나서 의도가 일어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붙잡는 마음이 없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의도는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항상 우리는 그냥 끌려들어갑니다.

수행을 해도 내가 뭔가를 하게끔 되고, 내가 또 어떤 생각이나 어떤 관념들을 가지고 있게 되고, 이렇게 자꾸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자꾸 있다고 생각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들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자꾸 그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더욱 더 단단해져버리는 겁니다.

수행의 진척이 있을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의도를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목표가 "! 의도가 먼저 앞서는구나. 의도가 일어나고 나서 뭔가를 행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아는 것"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야만이 인제는 본격적으로 수행이 되기 시작하는 거라.

 

그래서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들을 등한시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설혹 내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는 의도를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일상적으로 수행을 할 때 항상 먼저 출발할 때는 그 마음이 뭘 할려고 하는가 하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뭔가를 할려고 하고 나면 내가 분명히 뭔가를 행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의도를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는 거라.

 

삿된 견해를 가지는 것들을 없애주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 사람들하고 접촉을 해서 부딪치는 부분들이 다툼이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견해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마노 상 쩨따나'라고 하는 의도,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도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식(, viññāṇa)이라고 돼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한 번 일어나고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인식은 한번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인식은 끊임없이 일어나집니다.

여기에 중간 정도에 보면 예를 들어 귀에 감각이 있다. 소리가 접했다. 느꼈다. 청각이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는 이게 어떤 소리인가? 좋아하는 소리인가, 싫어하는 소리인가? 내용은 무엇인가, 그에 따른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가? 식은 끊임없이 그 대상에 따라서 일어나게 되는 거라.

식이 없이 그것들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다른 것들은 단수로 쓰는데 이 윈냐나(viññāṇa)는 복수로써 씁니다.

그래서 경전에 뭐라고 비유를 해놓았냐면 "백 개의 창을 맞는 사람" 이라는 비유를 합니다. 아침에 이 사람 죽이기 위해서 창을 백 번 찔렀다는 거라. 그런데도 안 죽어. 점심 때 또 백 번을 찔러. 그럼 또 안 죽어. 저녁에 또 백 번을 찔러. 그래도 안 죽는 거라. 그마만큼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그 식(識)을 가만히 한 번 보십시오. 앞에 일어나는 식하고 뒤에 일어나는 식이 같은 식인가? 다르죠! 여기에 여기에도 있지만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식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아는 것도 식입니다. ‘무슨 소린가’ 아는 식하고 ‘소리가 들렸다’고 아는 식하고는 분명히 다른 식입니다.

식은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그 식은 각각 다른 식이라는 거라. 식을 알아차릴 때는 그와 같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것은 이 조건하에서 일어나고 사라진 것뿐이고, 그리고 이 식이 원인이 돼가지고 또 다른 식이 일어난다"는 거라.

 

식은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도 마지막에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다른 또 생명을 만드는 식이 또 만들어지는 거고, 하물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식은 각각 다 다릅니다. 그래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죽음의식이라는 식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은 또 다른 결생의식이 일어나고, 그렇지만 그것은 각각 다른 것이라는 거라.

 

인식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무상한 것이다. "이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인식할 때 그렇게 알아차려야만이 그 대상에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발을 들어올린다고 인식하고, 나아간다고 인식하고, 내려놓는다고 인식할 때는 각각 다른 식이라. 들어올릴 때 아는 식하고, 나아갈 때 아는 식하고는 다른 것들이라는 거라. 그럼 들어올릴 때 들어올린다고 인식하고 나서는 놓아버려야만이 나아간다는 식이 일어나는 걸 알게 되는 거라.

물질적인 몸도 끊임없이 변화해 가듯이, 식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이고, 그것들은 단지 찰나 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식을 인식하지 못하면 식은 영구불변하다고, 그러니까 죽고 나면 뭔가 변하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사실은 그 죽음의 마지막 식이 또 다른 태어나는 새로운 식을 만들어낸 것뿐인 것인데.

그래서 식에 대한 것들도 무상하다는 것으로 자꾸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육체를 살리는 음식, '까발린까라(kabaliṅkāra)' 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프린트물은 마지막 네 번째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 중점을 두어가지고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밥 먹을 때는 여러분들 어떻게 수행하면서 알아차립니까? 먹는 거 모든 걸 알아차리죠? 일반 수행자들은 그렇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먹는 거 씹으면 씹는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젓가락을 들으면 젓가락을 든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먹는 것들 동작들 먹는 것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이런 모든 것들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십시오. 그래야만이 먹는 것이 여러분들 수행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먹었다가는 이거는 수행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해탈에 이르는 좋은 도구들 대상을 만났는데도 그걸 또 놓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음식이라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들입니다. 음식을 먹었을 때는 먹는데 대한 수고스러운 것도 해야 되고 먹고 나서 그것이 위장에 들어가고 나서 유지되고 다시 또 대변으로 나오고 하는 것들은 전부 다 혐오스러운 것들입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밥을 먹을 때는 아홉 가지로 구분해서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표적인 거 한번 얘기를 해볼게요.

여러분들 위장은 지금 나이가 오십이면 오십면 동안 한번도 청소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속에 내용물이 들어가는데, 아마 여러분은 그걸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자지러질 거라. 그렇게 혐오스러운데 들어가는데도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런데도 먹을 때는 맛있다고 먹는다는 거라. 음식은 그렇게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음식을 먹고 씹어가지고 그걸 한번 뱉어내보라고. 그 맛있는 게 맛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그래서 이걸 아홉 가지로 경전에서는 나눠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본격적으로 그런 음식에 혐오감을 주는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스님들은 보통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하십시오. 그래야만이 음식물을 먹는데 내가 집착하면서 좋고 싫은 것들을 가지고 먹을려고 하지를 않게 됩니다.

 

이거는 여러분들한테 얘기해야 될 부분은 아닌 거 같은데, 쉽게 얘기하면 음식을 구할 때까지의 과정도 힘들고 혐오스러운 것들이고, 그리고 음식을 구하는데 구하지 못하는 것들도 마찬가지고, 먹는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것이 위에 저장되는 곳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거기에 저장되어서 소화되는 것들도 마찬가지고, 소화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것이 배출되는 것들도 마찬가지고, 배출될 때의 모습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이빨 사이나 아니면 손이나 이런데 묻은 모습들도 마찬가지고, 이런 모든 것들은 혐오스러운 것이지 결코 그것이 청결하고 아니면 좋은 것들은 아니라는 거라. 그 생각을 하고 음식을 항상 먹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늘 탁발을 했습니다. 스님들이 탁발을 하는 이유는 물론 여러분들에 의존해가지고 공양을 하는 거지만 여러분들에게 의존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이 하나의 바리때에 담는 것은 음식에 대해서 좋고 싫음을 가지지 않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또한 음식을 받으면 한 자리에서 먹고 끝내버리는 이유들도 그 음식의 적정량을 알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탁발할 때도 탁발만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고, 또는 가리지 않고 먹는 수행이 있고, 또 하나의 자리에 앉아서 먹는 수행도 있고, 그게 인제 스님들의 두타행의 종류에 들어갑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몸을 유지를 해야만이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그 의외에 다른 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스님들과 같은 탁발할 때의 여러 가지, 다섯 가지 경우들을 가지고 수행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음식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이 몸을 유지해가지고 수행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고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 배고프다는 느낌만 제거할려고 해야 되지 배부른 느낌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배부르지 않게끔 적정량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경전에서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숟가락으로 네 숟가락이나 다섯 숟가락을 뺀 양을 적정량이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네 숟가락 다섯 숟가락을 다 먹고 나면 당연히 배가 부르게 됩니다. 그때까지 먹지 말아라는 거라. 필요한 양만큼만 최소한 양만큼만 먹는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게 수행에 방해가 된다 싶을 거 같으면 안 먹어야 되는 거라.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해탈로 나아가는 도구로써 자꾸 써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이 이 네 가지 영양분 영양소들이 해탈에 이르는 도구로써 쓸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이 영양소는 단순히 그냥 영양소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살아있게끔 하고 언제든지 항상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자꾸 등한시한다는 거라. 밥 먹는 것도 그냥 먹게 되고, 인식하는 것도 그냥 인식할려고 하고, 수행이 그게 수행인데 자꾸 엉뚱한 것들을 할려고 한다는 거라.

 

또한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들을 자꾸 우위에 둘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설혹 밥을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굶주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정신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탁발을 가서 아무것도 못 받았을 때 마라가 다시 가봐라. 그러면 탁발을 받을 것이다. 안 가는 거라. 다시 가서 탁발해가지고 받아먹는 것보다는 그것보다는 정신적으로 고요함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라.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수행의 도구로써 자꾸 써야된다는 거라.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 이것들은 여러분들이 알아차릴 대상인 것이지 그 위에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는 이 네 가지 영양소를 가지고 해탈에 이를 수가 있게 됩니다.

 

이걸 하면 좋은데 이걸 못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세 가지만은 해보십시오.

처음에 "난 항상 죽을 수 있다." 난 항상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거기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항상 일으키도록 해보십시오.

그다음에 두 번째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깨끗하지 못하고 항상 부정한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다음에 세 번째, "자애를 가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것들도 행하지 않겠다" 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해야 됩니다. ? 이 네 가지 영양소들을 영양소로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그 어리석음을 제거해주는 데는 이 세 가지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이 세 가지들을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어리석은 것들이 잘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뭐라? 또 다른 영양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영양소들을 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먹어야 될 거는 그리고 알아야 될 거는 알지 못하고, 그걸 보통 다섯 가지 장애라고 그럽니다.

오장애라고 알죠? 뭐 뭐가 있어요? 감각적인 욕망, 악의, 혼침·망상, 들뜸, 그리고 의심. 그걸 왜 먹는데? 그게 어리석음을 키우고 어리석음에게 영양을 주는 영양소인데.

이걸 먹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조금 전에 한 네 가지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되는 것들이고, 그리고 항상 그것은 일어나야 돼.

일어나야 되는 것들이고 그리고 알아야 되는 것은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고, 하지말아야 되고 일으키지 말아야 되는 것은 일으키지 말아야 됩니다.

 

어리석음이 떨어져나가 버릴 것 같으면 조그만한 번뇌들은 붙질 않습니다.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항상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거라. 그래서 조그만한 감정들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내가 어리석음을 키울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지 않고 그 영양소를 먹지 않고,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버리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이 접착제는 먼지와 같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떨어져버리는 거라. 먼지는 틀림없이 있는데 그것은 나한테 붙지 않고 떨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고 극복해야 될 것들이고,

네 가지 영양소는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것들을 수행 도구로써 써야된다는 거라.

그게 지금 이것(프린트물)의 내용입니다.

 

그마만큼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루동안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냥 알아차리지 못하고 백 년을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여기 왔으니까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겠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거라.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항상 이런 자리가 있을 수도 없는 거고, 항상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그런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알아차릴 거는 알아차리고 버려야 될 거는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알겠죠?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기 지금 내보낸 게 1탄입니다. 식사와 해탈의 관계! 그래서 2탄은 또 언제 한번 더 영양소에 대한 것들을 다시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길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이걸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영양소가 있다는 거는 아는데 이것이 어떻게 수행하고 연결돼는지 아니면 이것이 어떻게 중요한지 하는 것들은 한국에도 잘 소개가 안 되어있고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거니까 여러분들은 그래도 이것들을 소중하게 자꾸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