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중생은 무엇에 의지하면 안전한가? (20141219.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16. 09:00

https://youtu.be/5EO5gyLcJik

* 중생은 무엇에 의지하면 안전한가? (20141219. 대구)

 

스님이 동동구르므를 안 바르거든. 아무리 냄새가 없어도 바르면 냄새가 굉장히 독해. 그래가지고 겨울이 되면 막 손이 터. 그래서 겨울이 되면 보기가 좀 싫어. 어쩔 수가 없어. 스님들한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크림을 사다주는 사람, 그거 사다주면 안됩니다 이. 스님들은 그거 못 바르게 돼있습니다. 일절 몸에 지니는 것도 안 될 뿐 아니라 몸에 바르는 것도 안 되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안타깝다고 그거 할 생각하지마.

 

스님 가고 나면 다들 어디 도망가버리고 없다며? 수행하러 와가지고. 물론 스님 법문 듣는 것도 좋은데 너무 그런 쪽에만 의지해도 안됩니다.

 

수행은 항상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법수념이라고 있고, 신수념이라고 있습니다.

법을 관찰해서 자기가 스스로 수행하는 방법이 있고, 그다음에 내가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법문을 듣고, 아니면 여러 가지 경전을 읽고, 또 성지순례를 한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신심을 돋아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을 해탈에 이르도록 닦아나가는 방법, 두 가지 방법뿐인데 한쪽으로만 치우쳐도 안됩니다. 한쪽으로 하나만 한다 해가지고, 첫 단계는 이를 수가 있는데, 어떠한 경우든지 신수념은 첫 단계 이상은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꾸 노력해가지고 내가 수행하고 내가 또 부처님이 깨친 담마를 내가 스스로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없는 시간이든 그것에 관계없이 와서 항상 수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프린트물 나간 것은 원래 오후에 하려고 했던 건데, 이번 주에도 스님이 오후에는 여러분들하고 같이 못할 거 같애. 빨리 이게 한국에 정착이 돼야 되는데.

여러분들 가족 중에 누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한국식으로 49제 지내고 할 건가? 교리적으로는 죽음에 이르고 나면 바로 다음 생을 받는다는 건 아는데,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데 그 방식대로 그냥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스님들을 초청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돌아가시는 임종의 순간에 가족들이나 스님이 있어서 그 임종 모습을 지켜보면서 호흡을 시킬 때 그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그게 한국에는 참 잘 안 돼요. 그래서 돌아가시고 나면 스님들을 초청하는데 우리나라만 그렇게 잘 안되는 게 아니고,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도 그게 사실은 잘 안됩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초청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그래도 다 누구든지 하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돌아가시고 나면 스님들을 초청하는데,

초청하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을 해두십시오.

 

첫 번째가 스님을 초청해가지고 법문을 듣는 방식이 있고,

그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거냐면 '아, 나도 이와 같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돌아가신 분들한테 천도시켜줄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스님이든 스님이 아니라 부처님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돌아가신 분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항상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봐라. 이렇게 죽음이 있다. 죽음은 항상 네 곁에 있는 것이니까 너도 죽음을 맞기 전에 항상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바르게 수행해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올바르게 죽음을 맞도록 하라」 하는 얘기를 하게 되는 거고. 이게 첫 번째 방식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어떤 거냐면 스님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올리는 형식들을 취합니다.

스님들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 공양 올리는 거, 그다음에 입고 있는 가사 올리는 거, 그다음에 필요한 게 스님들 앉는 좌복, 그리고 아픈 스님들에게는 약을 공급하는 것,

그러니까 약은 특별한 때가 아니면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대부분 할 수 있는 게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는 것과 이 가사나 좌복을 올리는 것, 이게 주가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게 두 번째 방식입니다.

 

그 공양을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발원들을 합니다.

"이 공양 올리는 것은 내가 올리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분을 대신해서 스님께 공양올립니다. 이와 같은 공덕으로 돌아가신 분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돌아가신 분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돌아가신 분이 내가 지금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을 냈을 때 그 마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천상에 태어났다든지 아니면 축생에 떨어졌다든지 지옥에 떨어졌다든지 할 것 같으면 거기에는 먹이가 다릅니다.

 

그런데 아귀계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들이 먹이로 삼는 것은 뭐냐면 살아있는 분들, 가족들이 내는 마음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돌아가신 분들을 대신 해가지고 공양올리니까 이것으로 인해서 설혹 만약에 아귀계에 태어났으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아귀계에 있는 존재들은 그것을 먹이로 삼아서 '아, 내가 아귀로 태어났지만 행복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공양 올린 것으로 인해가지고 하루빨리 그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아, 아귀계가 참 고통스러운 세계구나. 내가 빨리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거 외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아귀계에 안 태어났으면 내가 아무리 '행복하기를' '그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한다고 해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전달이 안 돼.

그래서 그런 목적으로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그다음 세 번째 방법으로 스님들에게 가사나 방석을 올리는 것,

방석도 이렇게 두꺼운 방석이 아니고 스님들이 가져 다니는 얇은 방석이 있습니다. 그걸 올리는 이유는 뭐냐면 스님들이 그걸 받을 때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아닛짜- 와따 상카-라-(Aniccā vata saṅkhārā)

웁빠-다 와야 담미노-(Uppāda vaya dhamminō)

웁빳지뜨와- 니룻잔띠(Uppajjitvā nirujjhanti)

떼상 우-빠 사모- 수코-(Tesaṃ vūpa samō sukhō)

이렇게 합니다. (마하- 빠리닙바-나 숫따, Mahā Parinibbāna Sutta)

 

누구든지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그래서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다. 이 윤회세계라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태어나고 죽음이 없는 것은 열반-닙바나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닙바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하는 것이 이 게송의 의미입니다.

그건 누가 실천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실천해야 됩니다. '아, 참 이렇게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내가 하루빨리 이 윤회고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끔 됩니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장례식을 거행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나라든지 보통 일반인들은 삼일장을 치릅니다. 삼일 동안 어떨 때는 스님 공양청을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스님 가사를 올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법문을 듣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합니다.

 

삼일 지나고 나면 뭐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화장장에 가든지 할 때, 아니면 매장에 가든지 할 때 거기 가서는 스님들이 "아찌랑 와까요 까요..." 하면서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탁 죽고 나니까 마음은 이 몸으로부터 떠나버린다는 거라. 그렇게 됐을 때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소용이 없다는 거라. 화장장에서 마음이 떠나고 나서 몸을 불태워버리고 나면 한줌 재가 남아있습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들이라. 매장해가지고 땅에 묻는다 하더라도 그거 어디다 쓸 거라? 쓸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라. 차라리 나무토막이면 어디 불쏘시개라도 하지, 이 몸은 그런 것이라는 거라. 이 몸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버리라는 거라.

살아있는 분들이 그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버려야만이 빨리 마음을 훈련시키고 마음을 증장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거라.

그러고 나면 장례식 딱 끝나버립니다.

그 뒤에 뭐 칠칠제를 지낸다든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혹 기일이 다가오면 일 년이 다가오면 그때도 스님들을 초청합니다. 가서 염불하는 것도 없습니다. 아까 삼일 동안 했던 방식 중에 하나를 택해가지고 그냥 하는 것뿐입니다. 기념하기 위한 것들. 그래서 공양을 올리든 가사를 공양올리든 이런 방식으로 합니다.

 

이렇게 공양 올릴 때 방식, 그다음에 가사를 올릴 때 방식, 그다음에 법을 청할 때 방식이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이게 테라와다의 전통적인 방식들입니다. 누가 돌아가셨을 때.

 

그런데 그런 방식들을 모든 스님들이 다 알고 있으면 오늘 같은날 내가 안 가도 돼. 그런데 그걸 다 알지 못하니까 가까운 사람들이 누가 돌아가시면 만날 내가 불려다니는 거라. 쫓아다니는 거라.

오늘도 우리 교단에 사무장, 내가 6년을 일 시킨, 고생시킨 사람입니다. 그 사무장 모친이 돌아가셨다고 급히 연락이 왔어요. 가봐야 될 거 같애. 그것은 내가 몸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내가 해야 될 일이고, 또 설혹 다른 사람들이 그 의식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난 반드시 가야 되는 곳이라.

그거 좀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오후에 수행들을 좀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프린트물은 오후에 해야 되는데 저번 주에도 못해갖고 한 묶음 남아있죠? 그건 여러분들이 읽어보고 의문나는 거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사무량심」에 대한 얘기를 적어놨는데, 그거는 일차적으로 프린트물을 내준 겁니다. 다음에 이차적으로 나가야 되는 것이 사무량심은 다릅니다. 각각 다릅니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이것을 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이르는지 각각을 구분해서 그 차이점에 대한 것들을 설명하면서 수행방법에 대한 것도 자세하게 하도록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그거는 내가 따로 안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거 읽어보고 의문나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준 프린트물은 오늘 오후에 해야 되는 건데, 제목이 「수행과 장애」 라고 돼있죠? 저번에 「기초수행편」 1번 나가고 나서 이게 2번째 해당이 되는 겁니다. 연속되는 겁니다. 저번에는 「오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오력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들이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것들로써 드러나집니다.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은 사마타 방법으로 극복하기도 하고 또 위빳사나 방법으로 극복을 하기도 하고, 또는 오력과 칠각지에 인해서 극복을 하기도 합니다. 그거는 방법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거는 여기에 아직은 자세하게 설명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초적인 설명부분을 읽어보고 나서 갖가지 방법으로 이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들은 다음 수행시간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모르죠? 만약에 혼침망상이 있다, 우리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혼침망상이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될 거고, 사마타 방법으로는 어떻게 극복을 해야 돼요? 오력으로써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래서 그걸 구분해서 설명을 해줄 테니까 잘 듣고 수행에서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 때 그것을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다섯 장애가 없어야만이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도 순일하게 되고, 그다음에 사마디에 드는 초선정에도 들 수 있게 되는 거고, 그리고 다섯 가지 힘들도 고르게 수행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게끔 됩니다.

다섯 장애가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안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거는 극복해야 될 장애입니다.

마주쳐가지고 그걸 뛰어넘든지 아니면 피해서 도망을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신통력으로써 그걸 없애버리든지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극복을 해내야 됩니다. 그마만큼 다섯 장애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다섯 장애는 구분해서 설명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할 거는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이 없어요. 스님도 게으름 피우다가. 어느 정도 작성을 하다가 다 하지 못했어요. 프린트물로 나가지 못한 것은 다음에 기회되면 프린트해서 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듣기만 해보십시오.

 

오늘 오전에 할 것은 「무엇에 의지하면 안전한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의지하면 안전할 거 같애요?

의지하는 것들을 찾지 못하면 항상 방황하게 됩니다. 스승도 이 스승 저 스승 찾아다니게 되고, 가르침도 이 가르침 저 가르침 접하게 되고, 또 부처님만 믿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불보살들도 의지하게 되고.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게 될까? 불안하기 때문에!

확고하게 탁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불안하게 됩니다.

요즘 수능이 끝났으니까, 수능이 끝나고 나서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 기도나 이런 것들은 필요 없다고 안 했는데 후회가 된다는 거라. 왜 후회되냐 했더니, 애가 자기 성적보다 안 나왔대. 다른 분들은 열심히 백일기도 했는데 걔는 성적이 잘 나왔는데 나는 스님이 기도 하지 말래서 기도 안 하고 있다가 얘 성적이 잘 못 나왔다는 거라. 그래서 씩 웃고 말았어.

어쨌든 그것도 확신이 안 들었으니까 대충 어느 정도 마음에서 어, 그럴 것이다 기도한다고 해서 그게 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해가지고 생각해서 안 하고, 오히려 내가 수행하면서 마음을 평온한 상태에서 애를 돌봐주는 것이 맞다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막상 성적 나오고 나니까 후회되는 거라. 어떤 사람들은 말 안 하고 몰래 기도 다니는 사람도 있고, 그게 어떤 경우든지 결과가 나왔을 때도 불안한 것이고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불안한 것들이 항상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탁 ‘이것이다’ 하고 그것을 계속해나갈 수가 없는 거라.

 

그거 말고 뭐 의지하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대통령 뽑았죠? 잘 살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대통령을 뽑았는데 잘 살게 해주지 못했다는 거라. 회사에서는 내가 열심히 하면 날 안 쫒아낸다는 믿음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어떤 사람은 쫒겨나가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더 못살게 되고, 믿음에 배반 당해버리는 거라.

믿을 대상이 아닌데 그걸 믿어버리는 것들입니다.

그거 말고 재산을 믿기도 하고 명예를 믿기도 하고 각각의 것들을 믿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 불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럼 적어도 내가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줄 수 있는 것들은 반드시 그것을 의지해야 될 거 아니라? 그래야 그거라도 보고 그냥 불안함 없이 쭉 살아갈 수 있는데, 뭘 그럼 여러분들은 의지해야 될 거라?

 

뭘 의지해야만이 그 불안한 것들을 없앨 수가 있어요?

경전에는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경전 내용 전체를 통틀어가지고,

붓다·담마·상가가 의지할 대상이다. 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자등명 법등명은 들어봤죠?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이고, 이 두 가지입니다.

어떤 게 맞아요? 어떤 걸 의지해야 돼요? 자등명 법등명?

 

부처님 당시 때 일화를 얘기하면서 한번 알아봅시다.

부처님한테 처음 귀의한 사람이 누굽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7주째 될 때 따뿟사와 발리까라고 하는 두 명의 상인이 부처님한테 가서 공양을 올리고,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다음에 「담마에 귀의합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도 틀림없이 부처님이 그 사람들에게 뭔가 말을 했을 거라. 자기가 깨달은 진리에 대해서.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귀의를 했지만, 겨우 꼴라당 한 게 “부처님, 징표하나 주십시오.” 해가지고 부처님 머리카락이나 뽑아와가지고 쉐다곤인가 어딘가에 모셔다 놓은 거 그것밖에 한 게 없어. 그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렀다든지 이런 것도 전혀 없어.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야사가 출가하고 야사의 부모들이 와서 부처님을 찾아뵀을 때 야사의 부모들에게 똑같이 했습니다.

 

똑같이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 했는데 그때 야사의 부모는 야사가 출가를 했기 때문에 삼귀의를 하게 되죠.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고 이렇게 하게 됩니다. 삼귀의를 했는데 그 야사의 부모들은 앞에 따뿟사와 발리까와 다르게 예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부처님이 두 그룹을 차별해서 법을 설하지는 않았을 건데,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문답 중략)

 

이렇게 비유를 해봅시다. 만날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오늘도 삼귀의와 오계 안 했네. 맨날 맨 처음 하는 게 삼귀의와 오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삼귀의를 할 때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렇게 할 때 과연 여러분들 마음이 어떨까?

 

그냥 부처님이 좋아서, 법과 승가가 좋아서 그렇게 귀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스님이 독송하라 하니까 선창하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 부처님이란 분은 깨달음에 이른 분이구나. 담마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법이구나. 승가도 깨달음에 이른 자들이 있구나. 그래서 진짜 존경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그 게송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게송을 하는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라. 마음들은 완전히 다 다르죠? 그걸 할 때. 그건 왜 그렇게 다를까?

 

자신의 마음이 그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 상태에 맞게끔 "붓당, 담망 상강, 사라낭 갓차미"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할 때 겨우 인제 부처님 가르침 조금 알고 그래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할 거 같으면 자기 마음에는 그것만큼의 감응밖에는 안 와.

아니면 억지로 할 것 같으면 그 빨리어 따라하기도 바빠. 그런데 아,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고 그것을 하게 되면 그만큼 감응은 커지게 되는 거라.

그 차이입니다. 두 그룹의 차이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류과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떤 경우든지 삼귀의-삼보를 의지할 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왜? 그 삼보는 깨달음하고 관계돼있기 때문에! 내가 가야 될 길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그다음에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하는데 그거는 틀린 겁니다 이. ‘스님들께는’ 하면 안됩니다.

「상가」라고 해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가는 뭐냐 하면 적어도 예류과 이상의 깨달음에 이는 성자들을 얘기합니다. 모든 스님들이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되지를 못해. 왜? 나쁜짓 막 하고 엉뚱한 짓들 막하는데 어떻게 그런 것들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을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붓다·담마·상가라고 하는 거는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깨달음에 이르렀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오직 유일한 길이고, 또 깨달음에 이른 성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의지할 대상으로 삼는 것들이라.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이 거기 가기 위한 것들이라.

부처님 가르침 아무리 들어봐야 내가 마음이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고 내가 행하는 것들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로 가지 못할 거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는 것들이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예류과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세 가지 보물!!! 삼보를 의지할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예류과에 이르고 나면 어떻게 해야 돼? 삼귀의 안 해도 돼요? 해야 돼요? 이르렀는데 뭔 필요가 있어? 이미 확신이 든 상태에서는 그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귀의할 대상은 그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를 등불 삼아서,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고, 단지 세 가지 보물이라 하는 것은 그것들이 나의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존경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이 의지하는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는 거라?

자귀의라고 하든 자등명이라 하든 말장난에 놀아나지 말고, 그거는 뭐 등불이라 하든 섬이라고 하든 아니면 의지처라고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그냥 스스로를 의지하라고 하지,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라"고 했을까?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어서 뭐로 비유를 할까?

위염이 있다, 그러면 두부 같은 것이 좋대요. 위염이 있다고 누군가가 나한테 얘기할 것 같으면 스님이 그러면 「두부 드세요」 이렇게 얘기할 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위염이 있다고 얘기할 때 단백질이 있는 것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세요」 이렇게 얘기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두부에만 식물성 단백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도 있으니까 「두부 드세요」 하는 사람은 그냥 두부 찾아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식물성 단백질을 드세요」 하는 경우에는 식물성 단백질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지고 자기가 알아서 먹어야 됩니다.

 

스스로의 수행적인 면을 얘기할 때는 '자귀의'가 됩니다.

그런데 법의 측면에서 얘기할 때는 '법귀의'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이 수행 방법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자귀의는 어떤 것에 해당이 될까? 사념처 입니다.

몸에 대해서는 이렇게 관찰해서 알아차려라. 느낌에 대해서는 이렇게 관찰해서 알아차려라. 법에 대해서는 법의 현상에 대해서 관찰하고 알아차려라. 그것만 따라하면 돼. 몸에서는 요렇게 관찰해서 수행하라. 느낌은 어떻게 하라고 자세하게 해놨어요. 그냥 다르게 생각할 거 없이 「두부 드세요」 하는 거야. 그거 그냥 따라하면 돼요. 그러면 자기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거라. 그러면 자귀의가 되는 현상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법의 측면에서 볼 거 같으면 깨달음에 나아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법을 배워가지고 법을 자주 듣고, 그것을 통달해가지고 확신이 섰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맑고 고요하게 되고, 그다음에 그거로 인해가지고 내가 깨달음에 이를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가지고 내가 좀 더 선행들을 많이 쌓을려고 하고 그러면서 조금조금씩 수행해나가고 그런 점진적인 방법들도 있는 거고,

또 어떤 경우에는 만날 법만 들어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딱 확신이 들어서, 아 인제 다른 가르침은 도저히 틀렸다 하고 확신이 딱 들었을 때 그것만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거고. 각각의 방법들이 있는 거라.

법에 대한 확신들만 들어도 예류과에는 이릅니다. 그게 법귀의 입니다.

 

스스로 삼보의 대상이 되기 전에는 삼보를 의지할 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경우에는 자귀의 법귀의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해주는 방편이 돼버립니다.

 

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까? 왜 의지할 대상을 찾아? 이때까지 쌔가빠지게 설명을 해줬는데 못 알아들어?

우리는 해탈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은데, 그것들을 해탈하지 못하게 막고 그 자유를 부숴버리는 것은 "불안한 것들" 입니다.

적어도 살아가는데 불안하지 않고 평온하게 할 일들을 쭉 해나갈려고 할 것 같으면 의지할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 의지할 대상들은 처음에는 삼보! 그래서 삼귀의가 여러분들이 의지할 대상입니다.

 

배를 타고 건너고 나면 그 배는 버려둬버려야 됩니다. 내가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가버리고 나면 그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그 배에 대한 고마움조차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있지만 이제는 스스로 부처님이 가르친 방법대로 사념처를 수행하든 아니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닦아나가든 닦아나가서 더 나은 단계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스스로를 의지하든 법을 의지하든 그렇지 않으면 삼귀의 삼보를 의지하든 의지할 대상을 반드시 찾아라는 겁니다.

그럴려면 여러분들은 그마만큼 바쁘게 이것저것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스스로가 확신이 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