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낙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20150130.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24. 09:00

https://youtu.be/J2p3MNBu8lw

* 낙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20150130. 대구)

 

오늘은 무슨 불교방송 취재온 모양인데, 오면서 전화를 받아가지고 뭐하러 왔는지 나도 몰라. 내버려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합시다이.

한 한달너머 빠졌죠? 스님 안보고 싶었어요? (보고싶었습니다.)

큰일났네. 스님 보고 싶으면 안 되는데.

 

왁깔리가 몸이 많이 아플 때 그렇게 부처님을 보고 싶어 했거든. 제발 부처님 한 번만 와 주십시요 해가지고 부처님이 거기 가서 아픈 왁깔리를 위로해주고, 등창이 난 분이었거든. 등창도 깨끗하게 부처님이 닦아주고 그러면서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왁깔리가 얼마나 좋았겠어? 부처님이 와가지고 아픈 부위까지 닦아주니까. 그러고 났는데 그다음에 탁 부처님이 한 얘기가 뭐라고 했어요?

“여래를 보려면 법을 봐라. 법을 보는 것이 곧 나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겉모습뿐인 부처님 아무리 봐봐야 소용없는 거니까 법을 빨리 깨우치도록 그렇게 하라는 거라. 법을 깨우치고 나면은 그것이 곧 부처님 보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이해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보고 싶어 한 거는 이 못생긴 스님 얼굴 모습 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듣고 법을 또 실천하기 위해서 그게 목말라가지고 그랬을 거라 믿습니다. 그렇죠? (예) 거짓말 아니죠? (예)

그래요.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겨울도 지나가고 하니까 조금 안심은 되기는 합니다.

작년에 그런 적이 있었어요. 뇌경색으로 빠질뻔한 걸, 그때는 진짜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도 그런데도 그 정신에 그래도 법문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 올해는 그 정도는 아닌데 어쨌든 괜히 나중에 불편한 꼴을 보이는 것보다는 낫다 싶어서 스님이 부지런히 지금 치료도 하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밖에 출입을 잘 안 할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아픈 것은 살아가면서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말씀 중에 다섯 가지는 항상 기억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태어났으면 늙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라. 늙음을 막을 방법은 없다는 거라. 병드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마찬가지로 죽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그리고 내가 지은 행위들에 대해서 내가 받아야 되는 것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것들은 항상 기억을 해야 됩니다.

 

병이 있다 해가지고 병에 져버릴 것 같으면 그 병에 깊게 빠져버립니다. 또는 누군가가 돌아가셨다 해가지고 거기에 져버릴 것 같으면 그냥 슬픔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적어도 부처님 제자일 것 같으면 항상 기억을 해야 됩니다.

내가 20대의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걸 바랄려고 하지 말고 지금 있는 몸들을 잘 간수해가지고 그래도 그것을 자꾸 이겨낼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 오늘 할 거 교재 한번 봅시다.

「낙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는 얘기를 적어놓았습니다.

뭔가를 할려고 할 때 그리고 그것들이 실행이 될 때 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그걸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경행을 하면서 다리를 딱 대고 있다. 그러면 ‘걸어갈려고 한다’고 하는 마음을 먼저 내라고 그러죠? 그래서 '걷고자함' 하는 의도를 내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다리가 옮겨지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면서 알아차리라고 그러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는 걸을 때 걷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거는 아는데, 그다음에 보통 걸어가고 있을 거 같으면 의도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지를 모릅니다. 그냥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진행되는 줄 알고 있는 거지. 그러다 보니까 왼발 오른발 그대로 알아차리면 좋은데 왼발 오른발 하면서 어떤 때는 망상하고 있고 어떨 때는 엉뚱한 곳을 보고 있고 그렇거든. 그렇죠? 여러분들 실제로 수행들 그렇게 하고 있죠?

 

그런데 실제로는 걸어가려고 할 때 의도가 일어나서 발을 든 것은 있는데 들어올리면서 들어올리는데 각각의 의도가 각각 다 일어납니다. 그래서 요만큼 들렸으면 요만큼 들고나서 더 들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더 들려지는 거고, 그리고 멈추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의도가 일어났을 때 멈춰지는 거고.

그래서 의도가 없으면 어떤 경우든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어요. 말도 할 수가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의도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별로 없단 말이라.

 

그러다 보니까 뭐가 잘 안되면 그 의지력, 뭔가 할려고 하는 마음이 툭 꺽여버리게 됩니다. 어떨 때 여러분들이 그런 것이 꺽여집니까?

보통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스님, 나는 아무리 수행을 해도 별로 느는 게 없습니다.” 할려고 하는 마음이 탁 끊어져버리는 거라.

하루종일 앉아서 수행을 했는데 별로 뭐 고요하게 있었다는 것은 둘째치고, 내가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렸다고 하는 것도 못 알아차렸을 때, 그렇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나온 결과에 대해서 결과를 생각하면 의지력이 탁 끊겨버리는 거라. 또는 나는 1시간 동안 좌선을 꼭 해야되겠다 했는데 이놈 다리가 저려가지고 도저히 못앉아있어가지고 45분만에 탁 일어나버립니다. 나는 이루고자 했는데, 1시간 할려고 했는데 1시간을 못했다.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도 그다음부터는 좌선하면 1시간 하는 게 두려워. 이미 의지력이 탁 끊긴 상태라.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의지력이 약해지니까 ‘어, 나는 안돼. 45분만 해야되겠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시간도 적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그러니까 의지력이 꺽이는 것들은 보통 보면은 결과를 생각을 했을 때 의지력이 보통 꺽여집니다.

 

그리고 어떤 때 또 의지력이 꺽여질까? 장해 같은 것들이 나타났을 때.

배를 관찰하고 있는데 이놈의 망상이 탁 떠올랐다. ‘에이, 망상이 일어났네.’ 그냥 망상을 대상으로 생각해가지고 망상을 관찰하면 되는데 ‘이러면 안 돼’ 하면서 또 돌아오고 하는데, 이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다음부터는 망상이 일어나는 걸 관찰 못 하는 건 둘째치고 이 배를 관찰하는 힘조차도 떨어져버리는 거라. 힘이 뚝 떨어져버리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아무리 열심히 관찰해도 별로 느는 것 같지도 않거든.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여기서 착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안 느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게 때가 무르익어야만이 그게 드러나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스님도 처음에 태국가서 수행할 때 어떻게 수행했느냐면 그때는 한국 승복을 입고 있었거든. 태국 계를 받기 전이니까. 태국에는 한국 승복 입은 분들은 이교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님으로 인정을 안 해줍니다. 일반 재가자일 거 같으면 바로 출가를 시켜주는데 이교도는 규정상 어떻게 되느냐면 4개월 동안 거기서 열심히 수행하고 그 생활을 해야 만이 계를 주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보다도 오히려 더 못한 취급을 받게 되는 거라. 밥 먹을 때도 저 밑에 사미스님 밑에 가 있어야 되고. 일허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 있는 데서 앉아서 수행을 하는데 불뚝 성질이 나는 거라. ‘내가 니들 보다 못할 게 뭐 있노?’ 그러니까 그 더운 나라에서 장삼까지 입고 앉아갖고 수행한다고, 그 더운데 얼마나 더 덥겠어. 그러면서 나는 한 시간 동안 내내 앉아있는 거라. 다른 스님들은 1시간을 못 앉아있어요. 이 승복을 입은 테라와다 스님들은. 금방 어디 일어나 가버리고 수행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것도 모르게 되고.

어떨 때는 불뚝 성질이 일어나니까 내가 한국인이고 뭘 보여주기 위해 내가 꾸욱 앉아있고, 그러다 보니까 어떨 때는 하루종일 앉아있기도 하고 그럽니다.

 

사실은 앉아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앉아가 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다시 또 똑같은 시간대에 경행을 하면서 발란스를 맞춰줘야 되는데, 발란스 맞추는 법을 몰랐던 거라. 그런데 그렇게 4개월 수행을 했는데 그게 수행이 됐겠어요? 다른 스님들이 봤을 때는 아, 저 스님 참 수행 잘한다고 나보고 칭찬하는데 나는 실제로는 아무런 이익도 없었던 거라. 뭐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그래도 그 4개월 기간이 나에게는 참 좋았던 거라.

 

왜 그게 도움이 많이 됐느냐 하면, 뭔가 장해가 일어났을 때 그 장해에 지지 않는 거라.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망상을 관찰하든지 안 그러면 망상을 무시해버리고 내가 수행대상을 알아차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좌선하고 경행하고 하는 시간이 있으면 꼭 그 시간을 채울려고 한다든지, 그것은 어쨌든 생겨났거든.

 

의지력을 지속적으로 일으켜줬던 시간들입니다. 그 4개월 기간동안.

그러다 보니까 계를 받고 이 승복을 입고 있어도 그다음에 수행할 때는 훨씬 수월한 거라. 실제로는 앉아가지고 망상피우고 조불고 어떨 때는 앉기만 하면 졸았었어요. 그래도 그 시간 동안은 안 일어나는 거라. 조불고 있으면서도. 어떨 때는 사람들이 그래요. 나보고 삼매에 빠진 줄 알았다고 그럽니다. 조불면서도 어떻게 조불었냐면 요렇게 반 엎드려가지고 꼼짝 안 하고 조부는 거라. 그러니까 꼬빡 하고 조불었는데 남들보기 미안하니까 그냥 이대로 해가지고 그냥 그대로 딱 멈춰서가 있은 거라. 구부러지지도 않고 바로 또 세우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 시간만큼은 채울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고, 남들한테 그래도 나는 수행하고 있다는 모습 보일려고 하는 마음들이 강하니까, 의지력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못 일으키고 있는데, 아마 누군가가 와서 삼매에 들었는지 시험한다고 나를 시험했으면 내가 깜작 놀랐을 거라. 나중에는 씩 웃고 말기는 말았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래도 그 시간들이 참 좋았던 시간들이다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왜 그러냐면 그 뒤에 어떨 때 공부한다고 이렇게 하다 보면 실제로 수행할 시간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 사원에 있으니까 역할분담을 맡아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떨 때는 아주 어려운 일들도 역할도 분담을 맡아가지고 하다 보면 아, 내가 저 선방에 들어앉아가지고 공부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선방 못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뭐냐면 수행하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니까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공부하면서도 그것을 자꾸 집중할려고 하게 되고, 그리고 마음은 자꾸 산란하지 않게끔 만들려고 하고, 그렇게 되더라는 거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공부를 해도 저절로 무르익게 되는 거라.

 

낙담하는 것은 탐·진·치의 어디에 해당이 될까? 성냄의 영역입니다.

 

낙담하고 질투하고 의심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전부 성냄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성냄의 영역이 그거 지혼자 성냄만 있어가지고 그렇게 낙담하지는 않습니다.

뭐가 포함이 돼요? ''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나라고 하는 것들하고 탁 결합이 되니까, 나에게는 이런 결과가 나타나야 되는데, 아니면 나에게는 장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장해가 나타나고 다른 결과가 나타나고 하니까 낙담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성냄에다가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지」가 결합이 되니까 그런 낙담을 하게 되는 거라.

 

낙담 안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성냄을 없애든지 무지를 없애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이 두 개를 분리시키든지. 분리시키면 낙담하는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아무리 여기 이 벽을 잘 쌓아놨다고 하더라도 이 사이사이에 시멘트를 넣지 않을 거 같으면 이 집은 누군가가 밀어버리면 무너져버립니다. 번뇌가 나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이게 결합만 안 될 거 같으면 조그만한 다른 자극을 받아도 이것은 없애버릴 수가 있는 거라.

그게 인제 이 밑에 일화를 설명해 놓았는데, 설명하면서 그 부분을 얘기해드릴게요.

 

삽빠다사라고 하는 스님인데 자살할려고 했거든. 경전에 자살하는 스님들 얘기가 자주 나옵니다. 아까 얘기한 왁깔리도 자살을 하게 됩니다. 찬나라고 하는 스님도 자살을 하게 됩니다. 웨살리에 있던 30명의 비구 스님들도 집단자살을 하게 됩니다.

물론 웨살리의 경우는 다릅니다. 웨살리 같은 경우에는 그전에 부처님이 웨살리에 가서 법문한 게 있거든. 이 몸은 참 부정한 것이다. 예를 들어가지고 머리카락 하나 빼봐라. 머리카락 밑에 보니까 오만 불순물들 묻어있고 되게 더럽거든. 나는 이걸 만날 깨끗하게 한다고 만날 씻고 뭐하고 하는데 사실은 이 머리카락은 하루만 안 씻어도 기름기가 끼고 비듬도 끼고 굉장히 불순한 것들이라. 실제로는 불순한 것인데 우리는 깨끗한 것으로 착각을 한다는 거라. 남의 머리냄새 맡으면 ‘음 향기 좋으네’ 이런다는 거라. 실제로는 그게 더러운 것인데.

머리카락뿐 아니라 피부 이빨 모든 것들을 부처님이 낱낱이 얘기하면서 이건 참 부정한 것이다. 이건 참 더러운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아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알아들어가지고 아, 이 몸은 참 덧없는 것이다. 이 부정한 거 가지고 있어봐야 뭐하겠나 싶어가지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하죠?

 

나머지 아까 얘기한 찬나나 왁깔리 그다음에 고디까 라고 하는 이런 분들은 그거 하고는 관계없이 병이 들었을 때 병을 이겨야 되는데 이길 힘들이 없는 거라. 그래서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쁘게 얘기할 거 같으면 인내심이 없다고 할 수가 있는데, 다르게 생각할 거 같으면 그분들은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는 거라. 죽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가장 큰 고통은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뭐라? 죽음이라요?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것같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요? 아마 그럴 거라. 또는 병 걸린 거? 그게 가장 큰 고통이나 두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어.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병 걸리고 죽고 늙어가고 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니라는 거라. 단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병에 걸려가지고 이렇게 내가 고생하고 있는데 이건 도저히 나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고 판단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마지막 희망을 걸어버립니다. 아라한은 자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아닐 경우에는 그것들을 대상으로 내가 분명하게 관찰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거라.

 

스님도 옛날에 다리를 다친 적이 있습니다. 누가 유리를 들고 있다가 유리가 탁 깨지면서 내 다리의 뼈를 탁 찍었어. 그것도 높은 데서 이렇게 해놓으니까 다리 살점이고 뭐고 다 달아나고 뼈가 드러나고 해가지고 44바늘이나 꿰맨 적이 있거든. 굉장히 아프죠. 막 피가 나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걸 보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거라.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더 침착해지는 거라. 아, 지금은 이것을 씻어내야 될 때다. 씻어내니까 살점들이 실제로 막 떨어져나와가지고 나중에는 엉덩이 살을 가지고 여기 기워넣고 했는데.

 

그래가지고 병원으로 갔어요. 병원으로 갔는데 그날 당직 선생이 이걸 수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다음날 아침에 수술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안 아프도록 마취를 시키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마취를 시켰을 경우와 마취를 안 했을 경우에 그다음날 수술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하니까 마취를 시켜놔 놓으면 그다음날 수술을 할 때 이 수술 부위가 우둘투둘하게 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 마취를 시켜놔 놓으면 실제로 이 신경이 끊어지고 한 부분들을 살려내는데 의사는 잘 모른다는 거라. 그걸 내가 판단해야 되는데 내가 모른다는 거라. 그래. 그럴 것 같으면 마취를 하지 말아라. 아침에 수술을 하면 되니까.

 

밤새 이걸 관찰을 했어요. 관찰을 하다 보니까 아픔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나가거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아주 빠르게 아픔들이 진행되는 것들이 보이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느냐면 아픈 부위에 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아픔을 관찰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딱 가 있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실제 아픈 것은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잠은 오지. 탁 잠에 떨어졌어요. 밤에 나는 잘 잤거든.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잠도 못 자고 오히려 뜬 눈으로 세우고 있는 거라. 그게 뭐냐면 고통을 통해서 관찰해야 되는 방법들입니다.

 

고통이 있으면 그것들로 인해서 관찰하는 힘은 훨씬 커집니다. 통찰력이 훨씬 커진다는 거라. 그런데 그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 같으면 통찰력이 커질 뿐 아니라 마음은 오히려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만 있다고 알 거 같으면 마음은 굉장히 기뻐집니다. 그러면은 내가 있어야만이 이 고통, 아픔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도 나의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럴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이 이 고통이라고 하는 거와 결합이 안 돼버립니다. 단지 그것을 그냥 관찰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럼 무상한 성품뿐 아니라 괴로움의 성품, 무아의 성품들을 그대로 순차적으로 밟아나가면서 알아집니다.

 

그러니 출가한 스님들이 그런 조건이 될 때 얼마나 좋아? 완전하게 내가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인데. 그러니까 손목을 긋는다든지 목을 긋는다든지 하면서 거기서 오는 고통들을 그대로 관찰하는 거라. 그 짧은 찰나에.

삽빠다사 스님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25년 출가생활을 해봤는데 별로 내가 도와 과에 든 것도 아니고 삼매를 개발한 것도 아니고 맹숭맹숭 지낸 것 같거든. 그런데 환속할려고 하니까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는 거라. 아이, 내가 그래도 출가해갖고 내가 세속생활이 번잡한 것이 싫어가지고 출가했는데 그걸 환속을 할려니까 환속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출가생활할려니까 지금 내가 이룬 것도 없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거라.

여러분은 그럴 때 어떻게 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이 몸을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거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래서 이 삽빠다사 스님도 자살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때 절에 코브라가 돌아다녀가지고 누군가 스님이 코브라를 잡았어요. 잡아 죽인 게 아니고 다른데 풀어줄라고. 그걸 보고 ‘아이고, 좋다. 내가 코브라한테 물려 죽으면 되겠다’ 해가지고 내가 그거 버릴테니까 그 코브라를 나한테 주시오. 이렇게 해가지고 코브라를 가져가게 됩니다. 그래서 조용한데 가가지고 코브라가 들어있는 항아리에다가 손을 쑥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코브라는 뭅니다. 그런데 안 물어. 이 코브라가. 이 스님을. 하도 안 물기에 입을 일부러 벌려가지고 그 안에다가 손을 집어넣었거든. 그런데도 코브라가 안 무는 거라. 왜 안 물게 될까?

 

스님도 뱀한테 참 많이 물렸거든요. 그런데 독사한테 물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새벽에 탁발을 나가다 보면, 특히 우리 수행처는 민가하고 굉장히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스님들이 바리때를 들고 손을 탁 이렇게 합니다. 해는 아직 안 떠올랐는데 손금이 어렴풋이라도 보이면 탁발을 나가도 되는 시간이거든. 그거 기다리고 있는 거라, 밖에 절 문 앞에서. 아직 어두운데도. 왜 그러냐면 그때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은 탁발해서 와가지고 점심공양을 12시 전에 다 끝내기가 힘이 드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밤에 이러고 있는 거라. 그러다가 조금 보인다 싶으면 누군가가 “야, 인제 보인다” 이러면 쏜살같이 나가는데 어두우니까 밑에 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나가다 보면 길가에 뭐가 있는지 알아서? 물컹한 게 있으면 어떤 때는 콱 물기도 하고 이러거든.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독사한테 물려가지고 굉장히 고생한 스님들도 많이 있고 하는데 난 한번도 독사한테는 안 물렸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아, 그래도 내가 뱀한테 물리더라도 독사한테는 안 물린 거 보니까 내가 과거 전생에 뱀을 죽이고 한 거는 없는 모양이다. 내가 그 동물 죽이고 한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삽빠다사 스님도 꼭 마찬가진 거라. 여러분들 지금 남의 생명 죽이지 마라라는 계율 지키고 있죠? 아까 맨 처음에 한 계. 그것만 지키더라도 그래도 다음생에서는 그런 것들로 인해서 내가 해코지 당할 염려는 없는 거라. 그래서 삽빠다사 스님은 에이, 독사인 줄 알고 했드만 해가지고 절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합니다. 독사인 줄 알았드만 순 물뱀을 갖다 줘가지고 물지도 않는다 하니까, 뭔 소리 하는 거냐? 그건 코브라다. 몸도 이렇게 부풀리고 해서 잡는데 애를 먹었는데 그러냐? 하다가 넘어갔어요.

그런데도 이 스님은 이 몸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라. 수행의 진척이 있어야 계속하든지 할 건데 그것도 아니고 하니까 다시 스님들 머리깍는 삭도를 가지고 이 손목을 그을려고 생각을 합니다. 손목인지 목인지 나도 잘 기억을 못하겠어요.

 

그런데 탁 대는 순간에 어! 자기가 출가생활 25년 동안에 해왔던 것을 되돌아보게 되는 거라. 나는 25년 동안 아무런 결과가 없어도 난 부지런히 수행했다는 거라. 틈만 나면 수행하고 열심히는 했다는 거라. 열심히는. 그리고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다른 스님들한테? 잘못한 거 없거든. 오히려 다른 사람들한테 아, 저 스님 참 좋은 스님이다 하는 소리를 들었지 내 자신을 보더라도 내가 계율을 어겼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출가한 스님으로서 수행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뭐 다른 사람들한테 모르는 것 있으면 내가 가르쳐주고 하는 거 그런 거 안 한 것도 아니고, 잘 살아왔거든.

 

그 생각이 탁 미치니까 내가 아무런 결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줄기차게 공부해왔던 게 자랑스러운 거라. 자기 자신에게 고마워하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몸에서는 기쁨이 일어납니다. 아, 그래도 내가 참 잘 살아왔지.

기쁨이 일어나는데 그 기쁨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 기쁨을 관찰하는 집중하는 힘이 갑자기 확 커지는 거라. 그래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스님이 다리 통증을 관찰했듯이, 그 기쁨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상태를 보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기쁨의 현상들은 사라지고 관찰하는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그대로 관찰하게 되는 거라. 평온한 마음이 되면서. 그러면서 자동적으로 이렇게 되는 거라. 눈 깜짝할 사이에 탁 아라한이 돼버리는 거라.

 

아까 뭐라고 했어요? 아라한이 되면 자살할 수가 없다고 그랬죠?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도 그것도 살생죄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남을 죽이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가지고 절에 돌아와가지고 다른 스님들이 “니 어디 갔다 왔노?”

내 죽을라고 했는데 안 죽고 왔다고 그럽니다. 왜 안 죽었냐? 하니까 나는 인제는 이 칼을 가지고 번뇌라고 하는 것들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는 죽을 필요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른 스님들이 깜짝 놀랩니다. 삼매에도 들지 못하고 아무런 결과도 없었던 스님인데, 번뇌를 끊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이 됐다는 얘기거든. 어떻게 저렇게 되느냐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다는 거라.

 

, 가능한 것은 뭣 때문에 가능하냐?

결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내가 해왔다는 거라.

낙담하지 않고 굴하지 않고 어떤 결과가 오든지 관계하지 않고,

어떤 장해를 만나더라도 그 장해를 이기든 못 이기든 어쨌든 계속 해왔다는 거라.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탁 순간에 부딪쳤을 때 싹 깨달음을 이루게 된 거라.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도와 과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뭔가를 하면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뭔가에 져가지고 내가 낙담해버린다든지, 아니면 장해를 만나면 그 장해를 장해가 아닌 것처럼 도망을 간다든지 이런 것들은 그것에 져버리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가지고 「죽은 시간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법문을 듣고 있으면 법문을 분명하게 듣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시간이 됩니다. 내 것이 됩니다. 그런데 법문을 듣고 있으면서도 망상을 피우고 있으면 나중에 지나면 무슨 얘기하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럼 그 시간은 여러분들 것이 아니고 죽어있는 시간들이라. 알아차림이 없이 살아가는 시간들은 전부 죽은 시간이라는 거라. 여기서 부처님이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백년을 살더라도 알아차림이 없이 사는 것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알아차리며 사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그렇게 살았을 경우에는 내가 도와 과에 이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 시간은 분명하게 내 살아있는 시간이라는 거라.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그 문제는 여러분들을 한 단계 성숙시켜줄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기가 죽어야 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병에 걸렸든 아니면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든 아니면 내가 늙어가는 모습이든 그것을 싫어하고 낙담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거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은 그것들은 고통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 좋은 수행의 도구가 됩니다. 그 생각을 항상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낙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러면은 나는 다시 또 할려는 마음을 또 일으키면 되는 거라. 수행대상을 놓치면 ‘아, 대상을 놓쳤다’ ‘그래. 내가 아직 그것밖에 안되니까 놓칠 수 있다’ 하고 다시 또 수행대상을 찾으면 돼. 옆길로 빠졌으면 ‘음 빠졌다’ 하고 이해하고, 다시 또 돌아오고 하고. 그게 여러분들의 몫이라는 거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그렇게 해나갈 때 언젠가는 탁 계기가 만나지면, 그래서 수행의 단계는 이렇게 가는 게 아닙니다. 요렇게 가가지고 툭 뛰어오릅니다. 또 한단계 툭 뛰어오릅니다. 그래서 그걸 보통 사람들이 마음이 180도 바뀐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몇 번 그렇게 바뀌게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할 몫이라는 거라.

이해하겠죠? (예)

 

마지막 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목적은 의지를 지속시킨다. 어떤 목적으로 노력하여도 침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침체해지지 말고 이루어야 할 일을 해나가면 반드시 성공한다. 장해를 만났다고 해서 게으름 피우고 낙담하는 삶은 의미없는 삶이다."

 

항상 명심하고 계기를 만날 때까지 여러분들 할 일은 다른 거 없습니다. 결과도 볼려고도 하지 말고 장해에 굴하지도 말고 그냥 꾸준하게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오늘 오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