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담마를 아는 자는 실천 수행하는 자이다. (20150227.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29. 09:00

https://youtu.be/hpZufKVne8U

* 담마를 아는 자는 실천 수행하는 자이다. (20150227. 대구)

 

설 잘 지냈어요? (네)

프린트물 하나는 지금 할 것이고, 나머지 두 개는 오후에 할 것입니다.

「담마를 아는 자는 실천 수행하는 자이다.」 한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프린트물 가져가면 한번 읽어보기는 하나? (네. 몇 번씩 읽어봅니다.)

읽어본다면 다행인 것이고, 그렇다고 화장실 휴지로 쓴다고 해도 뭐라 하겠노?

 

「담마를 아는 자는 실천 수행하는 자이다.」

보통 담마를 법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여러분 법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요만큼이라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가끔씩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같이 태국에 오래도록 있은 사람들은 기행물을 쓰지를 못해요. 어디가 뭐 유적지가 있고 어디가 좋고, 오래도록 살면 그걸 못 쓰거든. 그런데 한 번 딱 갖다 온 사람들은 책 한 권을 써내요. 이렇게.

 

수행처도 마찬가집니다. 한번 수행 갖다오고 나면 지가 다 아는 것 같애. 그런데 두번 가고 세번 가고 하면 어, 이거 내가 배우는 것들이 아직 한참 멀었구나 하고 생각이 드니까 감히 그걸 남에게 막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수 있을 상태가 안돼. 부끄러워지니까. 그런 입장에서 어떤 경우에는 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 그게 출가자든 재가자든 그런 경우들을 보면 속이 비면 빌수록 더 요란한 경우가 많아. 꼭 다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경우들이 참 많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 배울수록 더 잘 살아가야 되는데, 더 오히려 아만심이 높아지고 오히려 남 위에서 군림할려고 하고 그런 것들을 보면 저 사람은 법을 바로 배우기는 배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아,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알고 있다’ 하고 인식할 정도는 돼야 될 거 아니라. 그럴려면 실천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부처님 가르침은 수레바퀴 하나가 빠진 거와 마찬가집니다. 제자리에서 계속 맴돕니다. 수레바퀴 두 개가 단단히 고정돼야만이 이게 잘 나아갑니다.

 

그래서 빠띠빠다(paṭipadā) 라고 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잘 배우고 알게 되는 것, 그리고 빠띠웨다(paṭivedha) 라고 해서 그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 이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야만이 열매를 딸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담마를 아는 자는 실천 수행하는 자이다. 여러분들이 실천 수행이 되지 않으면 담마를 안다고 하면 안 돼. 적어도 여기와서 가르침을 배우면 배울수록 아, 내가 점점 변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 똑같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별 의미가 없어요. 두 번 화낼 때 한 번 화내게 되고, 또 마음이 밖으로 자꾸 향하고 들뜨고 하는 것들이 금방 좀 가라앉게 되고, 또 남들에 대해서도 자애로운 마음을 자꾸 내고 이런 것들이 바뀌어져나가야 되는 거라. 실천하니까 그렇게 되는데 그렇게 안 될 때는 그 상에 딱 갇혀버립니다.

 

'내가 수행하고 있다' 하고, 아니면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있다' 아니면 '나는 어느 스님을 스승으로 하고 있다' 요게 관념이 딱 박혀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거기서 박혀버리면은 그것을 남에게 전할려고 그럽니다. '우리 스승이 최고다' 하고 떠들게 되는 거고, '내가 알고 있는 이 법이 최고 수승하다. 이거 외에는 다 틀렸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거고.

메카니즘이 그렇게 돼있습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가지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합니다. 그럼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감각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데 그 감각이 일어나는데 그 감각이 일어나는 대로 탁 알아차리면 좋은데, 그래서 수행해나가면 좋은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일어나는 감각들을 '내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내가 봤고 내가 느꼈다' '내가 맛봤다'고 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럼 '나'라고 하는 관념이 자꾸 강해지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자아가 거기에 하나 더 덧씌워지고 나면은 그다음엔 이게 개념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 '나의 스승들', 이런 식으로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것을 밖으로 표출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한테 막 얘기해야 되는 거라. 뭔가를 밖으로 퍼뜨리지 않으면 이게 터질 것 같으니까. 그 조그만 것들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리고 그걸 가지고 있는 것들도 어떻게 보면 자기가 덧씌워놓은 것들인데 덧씌워놨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자꾸 밖으로 퍼뜨리려고 그러는 거라.

 

그러다 보면 자꾸 다른 사람들한테 법을 전해준다는 명목으로 어떻게 보면 자기의 생각들이나 아닌 것들을 자꾸 강요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번 말을 하면 계속 그 사람이 듣기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 사람에게 이익이 있든 없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계속하게 되는 거라.

이게 인제 기본적인 사람들의 패턴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거는 그만두어야 되겠지.

 

게송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Adhicetaso appamajjato, 아디쩨-따소- 압빠맛자또-,

Munino monapathesu sikkhato; 무니노- -나빠테-수 식카또-;

Sokā na bhavanti tādino, -- 나 바완띠 따-디노-,

Upasantassa sadā satīmato. 우빠산땃사 사다- 사띠-마또-.

초월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불방일하고,

적묵의 길을 걸어 묵자(성자)가 되어 있네;

평안에 이르러 항상 알아차리고(sati) 있는,

그러한 사람에게 슬픔은 없다.

 

초월한 마음상태를 가진다는 건 뭘 얘기하는 거라?

아디쩨-따를 초월한 마음상태라고 풀어가지고 썼는데 어떤 게 초월한 마음상태입니까? 두 가지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고 출세간에서 일으킬 수 있는 마음들을 내면 그건 초월한 마음 상태를 뜻하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선정삼매에 들어서 일으키는 마음들 이것은 초월한 마음 상태들입니다.

또는 다른 하나는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 대상에 관계 없이 마음이 항상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그것도 초월한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직접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어 버렸다는 겁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런 마음의 상태는 돼야 될 거 아니라? 남이 나를 욕하든 칭찬하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듣고 또는 거기에 대해서 일으키는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쭉 돼고, 그렇게 하려고 불방일하라는 거라. 끊임없이 노력을 하라는 거라. 적어도 그거라도 안 되면 삼매에 들어가지고 초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쭉 있으면서 기쁨의 상태에서 이렇게, 아니면 즐거움의 상태에서 고요함의 상태에서 그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야 될 거 아니라?

둘 중에 하나는 해야만이 아, 내가 이 즐거움이 참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내가 세간에서 욕심부리고 성질내고 하는 것들이 진짜 쓸데없는 거구나. 이 좋은 게 있는데 왜 그거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탁 뛰어넘어 버린다는 거라.

 

수행 안 하면 이게 가능하겠어요? 실천하지 않으면 이게 가능하겠어요? 경전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또는 내가 아무리 많은 것들 경전들을 달달달 통달하고 암송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이라. 이런 마음들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 그거는 해야 되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어떠한 대상이든 대상으로서만 바라보고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벼운 상태로 만들어 줄 것. 그리고 때때로 내가 깊은 삼매에 들어서 아, 참 좋은 즐거움이 있구나. 수행 조그만한 것으로 또 이마만큼 즐거움이 있는데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그 즐거움은 얼마나 더 클까? 하는 마음을 빨리 일으켜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두 가지를 자꾸 해야만이, 그리고 그걸 끊임없이 해야만이 부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뿐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할 수 있죠? (네) 한번

보겠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적묵의 길을 걸어 묵자가 되어 있다.

적묵은 침묵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니(muni) 라고 하는 것, 수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말하면서 수행합니까?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수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수행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고요한 상태에서 말을 하지 않고 수행을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인도 때부터 해서 옛날에는 성자(聖者)라고 할 거 같으면 일절 말을 하지 않고 세속하고 등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자라고 얘기했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성자라는 명칭을 옛날에는 붙여줬습니다.

 

그런데 이게 부처님에 의해서 깨지게 됩니다. 아무리 뭐 저 무문관에 가서 말 안 하고 세속하고 등지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오만 욕심 다 부리고 오만 성질 다 부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 뭔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 그거 무문관 그렇게 3년 보내고 나면 나오고 나면 뭔가 바뀌어져야 될 거 아니라? 좀 있으면 도루묵 되는 거라. 수행처에 가서 한달간 수행 열심히 하고 왔을 때는 뭔가 많은 것을 안 것 같고, 거기서는 말도 안 하고 그냥 수행만 하고 있다가 세속에 집에 돌아와가지고 일주일만 지나고나면 그냥 도루묵이 돼버리는 거라.

한번 바뀌어지고 나면 그 바뀌어지는 것은 다시 후퇴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른 법은.

그런데 그렇게 후퇴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건 그냥 그 속에서 지가 놀은 거라. 그 고요함 속에서. 그걸 무니라고 얘기하진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그 무니(muni)라는 것을 세 가지로 얘기합니다.

말의 침묵, 행위의 침묵, 그다음에 마음의 침묵.

 

행위의 침묵은 어떤 게 있겠어요? 나쁜짓 안 하는 겁니다. 몸으로 행하는 것들, 쉽게 말하면 살생하지 않고 그다음에 도둑질하지 않고 삿된 음행 하지 않고, 몸으로 짓는 것들을 나쁜짓 안 하는 것이 그게 무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웠을 거 같으면 그거 나쁜 줄을 안다는 거라. 그럼 이게 나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알고, 그럼 그거 안 해. 그래서 자기가 죽이는 것을 안 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죽이려고 할 때도 그거 죽이지마. 그러면 안 돼. 그거 죽이고 나면 니한테 안 좋은 과보 돌아오고 죽일 때 니가 악한 마음을 일으켜야 되고, 왜 그거 죽일려고 하느냐? 못 죽이게까지 한다는 거라. 그게 몸의 침묵이라고 합니다.

 

말의 침묵은 어떤 것일까? 말 안하고 있는 것들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말을 하더라도 바른말을 하라는 거라. 남에게 도움되는 말, 그리고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들, 그리고 진실된 말들, 이런 말들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말들 이런 것은 하지 않고. 화내는 말들 또 남을 해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들 이런 것들은 아예 안 하는 거라. 이게 말의 침묵이라.

 

아무리 바른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에게 도움이 되고 또 상대가 그것으로 인해서 바뀌어야 되는 게 말의 효용가치인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그때는 마땅한 때가 아닌 거라. 또 사람들이 많은 데서 남에게 아무리 도움이 되는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바른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장소가 마땅한 게 아니면 또 안되는 거라. 때와 장소가 맞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 하나 염두에 두지 말아야 되는 것은 어떤 거냐면 그것이 바른말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이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단지 때와 장소는 봐야 되겠지만, 당장은 지금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음에 그것이 기억나서 ‘아, 내가 그때 참 잘못했구나’ 하고 돌이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말은 세 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하지 말아야 될 말들, 또는 자애를 가지고 하는 말들,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해야 되는 말들, 이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반드시 하지 말아라는 거라.

쓸데없는 얘기들 그리고 남을 이간질하고 화를 내고 하는 말들 이런 것들은 아예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말을 할 때는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라는 거라. 자애의 말들은 반드시 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필요한 말들, 필요한 말들은 자애가 있는 상태에서 필요한 말들을 해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 줄 수 있는 말들은 해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설혹 그 사람이 듣기 싫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때와 장소가 맞으면 그것은 해야 되는 것들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말은 이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을 잘 구분하게 될 때 말을 해야 될 때와 하지 말아야 될 때를 분명하게 아는 것, 이걸 말의 침묵이다 그럽니다. 안 좋은 말들은 그리고 도움이 안 되는 얘기들이나 싫은 소리들은 아예 안 해버려야 되기 때문에 그것은 말을 안 하게 되는 거고, 해야 될 거는 말을 하게 되는 거고.

 

행위를 할 때도 내가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른 행위가 아닌 것은 아예 안 하는 거죠. 그것이 몸의 침묵인 것이고.

말의 침묵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말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을 말의 침묵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침묵은 어떤 것일까요? 마음은 아마 여러분들이 모르긴 해도 항상 머리는 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언제든지 뭔가를 갈구를 하게 돼있고, 가만히 이 머리가 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두 개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침묵을 지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마음이 뭔가 일을 하게끔 만들어주면 됩니다. 바른 일을 하게끔. 그럼 그 일을 하고 있을 동안에는 머리 뱅뱅뱅 굴리지는 않는다는 거라. 내가 하고 있는 행위들을 알아차리고 있게끔 마음이 일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거라. 그럼 내가 팔을 뻗고 있는 동안에는 머리 굴리지 않는다는 거라. 내가 말하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도록 마음이 일하도록 만들어주면은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거라. 하는 일들에 대해서 대상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은 그것은 마음의 침묵을 바로 지켜버리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은 보면 거의 쓸데없는 것들, 아무리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들이고 계획한 것들이고 미래에 대해서 뭐 어떻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보면 거기다가 덧칠을 씌운 것들이라는 거라. 자기의 견해, 또 자기의 생각들을 거기에 덧칠을 씌워가지고 그것을 딱 개념화해서 딱 못박아둡니다. 그거하고 다른 거하고 부딪치면은 화를 내게 되는 거라. 지가 만들어 놓은 세계라는 생각은 안 하고 이게 맞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도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침묵을 반드시 지키라는 거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만이 마음의 침묵은 가능해집니다.

 

이 세 가지를 했을 때 적어도 여러분들은 침묵하는 자가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싑죠? 쉽잖아! 거짓말 하지 말아라 하는 거고, 그리고 마음속에 항상 자애를 가지고 말하라는 거고, 나쁜짓 하지 말아라는 거고, 그리고 지가 뭐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라고 하는 건데 그것보다 쉬운 게 어딨어? 아주 쉬운 거라.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는 거라.

여러분들이 성자로 갈 수가 있는 길이고 성자의 길을 닦는 길이 그건 거라. 그게 '무니'라. '석가모니' 그러죠? 그 '석가족의 성자'는 '무니'를 의역한 게 '모니'라. 여러분들도 그 길을 갈 수가 있다는 거라.

 

이 분도 마찬가지라. 그렇게 적묵의 길을 걸어 묵자가 되었다. 그렇게 말과 마음과 몸의 침묵을 지켜가지고 그 길을 쭉 따라가다 보니까 그게 하루 이틀에 되겠어? 아마 이생에 안되면 다음생에라도 해야 되는 거고, 아니면은 부지런히 진짜 닦고 그 길을 가야만이 진짜 무니가 되는 거라. 그런데 무니가 탁 되고 나면 진짜 그 길은 안 해. 아예 일어날 수가 없는 거라. 그럼 고민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행위가 잘못될 거라고 염려할 필요도 없고, 말하는 것들이 나쁜 말을 할 거라는 것도 아예 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항상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라.

 

그런데 생각하는 것까지 탁 없어져 버리고 나면은 이제는 선하고 악한 것을 탁 떠나버립니다. ‘아웨가따’라 해가지고 성자들이 하는 행위들이 그대로 돼버립니다. 행해야 될 때는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될 때는 행하지 말아야 되는 거고. 말을 해야 될 때는 말을 하는 거고 침묵해야 될 때는 침묵해야 되고, 그게 여러분들이 가야 될 길입니다.

선도 짓지 않고 악도 짓지 않는 행위, 선도 짓지 않고 악도 짓지 않는 말들, 그러한 마음들 그것들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들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항상 청정해집니다.

여기는 '평안'이라고 번역을 해놓았는데 '우빠산따(Upasanta)'는 그걸 '평안'이라 해도 되고 '청정'이라 해도 됩니다. 항상 마음은 청정한 상태가 됩니다. 말도 청정한 상태. 행위들도 청정한 상태.

그럼 청정한 상태에서는 알아차림이 없어도 되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지금 부처님이 뭐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부처님은 왔다갔다 수행을 하면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고, 고요하게 앉아가지고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경전에서 설명을 안 해놔야지. 자동적으로 알아차려집니다. 자동적으로.

 

내가 하는 행위들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대로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게 됩니다. 청정한 상태가 되면 자동적으로 됩니다. 알아차림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대상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여야 되는 거고, 또 일부러 선한 행위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말도 가려가면서 예쁜 말들을 할려고 하는 거고, 되고 나면 그것들이 자동적으로 그것들이 알아차려지면서 해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한테 무슨 슬픔이 있겠노? 무슨 괴로움이 있겠어?

이 게송을 이 스님은 항상 숲에 있으면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보름에 한번씩 포살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보름에 한번씩 스님들이 가까운 곳에 모여가지고 잘잘못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다음에 잘못한 게 있으면 청정하게 만들고,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을 얘기를 하고, 그래서 가는 시간이 보름에 한번씩 포살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포살을 하더라도 혼자 하는 포살이 있고, 둘이 하는 포살이 있고, 셋이 하는 포살이 있고, 넷이 하는 포살이 있습니다. 혼자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곳까지 스님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가질 못합니다. 왔다갔다 하루가 지나버리기 때문에. 그럼 혼자서 지내야 됩니다. 그러면은 뭘 하느냐면 혼자 있을 때는 보름에 한번씩 음, 오늘은 우뽀삿타(Uposattha) 날이다. 오늘 포살일이다. 하고 먼저 고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청정합니다. 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를 돌아봅니다.

아, 내가 청정하게 살아왔는가? 청정하게 안 살아왔으면 아, 내가 이거 잘못했구나 하면서 그거 잘못에 대해서 참회하는 거고, 그렇게 혼자서도 하는 거라.

 

이 스님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 포살일에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스님들이 자기가 포살을 하고 나서 해야 되는 것이 큰 스님한테 법문 듣는 것, 그리고 자기가 때가 되면 다른 스님한테 법문을 하는 것.

어떤 때는 그 포살일 되면 죽을 맛이라. 순번을 딱 정해가지고 법문을 하라고 그러거든. 그런데 법문하는 능력이 안 생기는 스님들, 그리고 수행에 대해서도 잘 진척이 안 됐고, 경에 대해서도 알듯말듯 하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법문하라고 할 거 같으면 그 한시간 동안은 죽을 맛이라. 그런데도 해야 돼. 순번이 다가와지면. 안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럼 한 시간을 해야 되는데 어떤 스님들은 한시간 동안 못하고 한 10분 하고 끝나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고 하지. 빨리 끝나니까. 그런데 법을 듣는 스님들의 입장에서는 바른 법을 전했을 때는 그 10분도 참 좋다! 시간에 관계하지 않고 그렇게 됩니다.

 

이 스님도 마찬가지라. 음, 오늘은 포살일이다. 나는 인제 청정하다. 돌아봐도 항상 깨끗했거든. 그러고 나서는 이 게송을 독송을 합니다. 숲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이 게송을 탁 하고 나니까 어디서 “사두!”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우렁차게. 조금 전 같이 그렇게 마음을 담아가지고, 이게 무슨 의미인가를 분명히 알면서 이 게송을 독송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이 게송 독송하면

초월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불방일하고,

적묵의 길을 걸어 묵자(성자)가 되어 있네;

말은 할 수 있고 독송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의미를 몰라 놓으면 듣는 사람이 그것 가지고 "사두!"를 안 하는 거라.

 

항상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 숲에 어느 스님 두 분이 마침 찾아오게 됩니다. 그날도 마침 포살일이라. 그래서 마찬가지로 오늘은 두 사람이 왔다, 그럼 “오늘은 스님이 법문하시오.”

그 스님은 “아무도 없는데 뭘 법문해?”

 

저도 처음에 혼났던 게 그겁니다. 사람이 적을 때, 사람이 없을 때, 법문하는 버릇들을 안 들여놔 놓으면 명예와 이익을 쫓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법문하려 하는 거라. 또는 사람을 가려가면서 법문을 하게 되는 거라. 아주 나쁜 버릇이 들어버리는 거라. 그거 쫓지 말라고 테라와다 스님이 되어 놓고 그걸 하고 있는 거라. 큰스님한테 “스님! 사람도 없는데 이제 그만 하죠?” 그 소리 했다가 크게 혼나버리게 됩니다.

 

부처님과 같은 천인사가 될려고 출가한 스님들이 인간 사람들 몇 명 밖에 안되고 그 인원이 적다 해가지고 너는 천인들의 스승은 될려고 생각도 안 하고 있느냐? 합니다.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될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냐는 거라. 그럼 이 자리에 이 법을 듣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천인들이 왔느냐는 거라. 그건 대중이 아니냐는 거라. 사람 없다고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어디다가 쓸거냐는 거라.

사량분별을 한다는 거라. 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자에게는 법을 설하라는 거라.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사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천인들도 해당이 된다는 거라.

 

그러니 이 스님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이 게송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걸 하니까 천인들이 "사두!" 하는 거라.

그런데 이 스님은 와가지고 법문을 한시간 동안 열심히 했어. 처음에 이 스님이 사람도 없는데 안 할려고 하니까 그 숲에 있던 스님이 그럽니다. 여기 사람들 많아. 나는 법문만 하면 "사두!" 하는 소리가 온데서 들렸어. 여기 많아. 그러니까 해. 실제로 했거든. 그런데 이 스님이 한시간 동안 했는데도 사두! 소리가 안 들리는 거라. 끝났는데.

 

왜 그럴까? 왜 그래? 왜 그 소리가 안 들려? 지가 그 소리를 실천을 안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게송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여기에 있지만 초월한 마음상태를 가지고 방일하지 말아라는 거라. 게으름 만날 피우고 초월한 마음 상태를 만들지 못하는 거라. 어떤 대상이든지. 그러니까 사람이 많으면 법을 설할려고 하고 사람이 적다는 조건이 될 거 같으면 법을 설하지 않을려고 하고. 마음이 초월되지 못하는 거라.

애가 1등해왔으면 아이고 예뻐 죽겠는데 꼴등해왔으면 죽일놈 살릴놈 합니다. 조건에 딱 그냥 매여버리는 거라. 부모가 해야 될 것은 사랑하는 마음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라.

 

그런데 이 스님은 그렇다는 거라. 이 게송을 달달달달 외우고, 앞에 스님은 이 게송을 하나 하는데 1분도 안 걸리는데 한시간 동안 내 했는데도 사두! 소리가 안 들리는 거라. 그러면서 생각하는 게 뭐냐면 자기의 견해에 딱 매여버리니까 나는 부처님 게송을 다 외우고 있고 다 알고 있는데, 이만큼 설했는데 왜 사두! 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저 천신들이 미친놈들이다.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고 편애한다는 거라.

천인들이 그런 게 어딨어? 누굴 편애하고 편애하지 않는 게 어딨어? 인간들이나 편애하는 것이지 천인들은 그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라. 자기 견해에 딱 매여져 있으니까.

 

여러분들은 안 그럴 거 같애요? 담마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고 수행을 아무리 오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로 인해서 내가 바뀌고 실천되지 않는 것이면 그것은 이 비구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거라.

여러분들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말고 한 게송 한 구절을 알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할 수 있죠?

 

붓다야나 선원도 개원한지 인제 한 세달 됐습니까? (삼개월 지났습니다.)

한번씩 돌아보십시오. 내가 여기 와가지고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 법문 들은 이익? 그거는 호주머니에 넣어놓은 구슬과 같습니다. 그거 구멍 뚫려놓으면 그냥 소르르 흘러버리는 겁니다. 자기 것이 되어야 됩니다. 그 보배들은 자기 것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돼야 됩니다. 마음껏 꺼내 쓸 수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 아무리 장롱 속에 담아 둔 보배는 쓰임새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그것은 바른 쓰임이 되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가지고 내가 거기에 맞게끔 자꾸 쓰게 될 때 나도 좋은 거라. 어, 참 내가 많이 바뀌었네. 더욱 바뀌어나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들을 낼 수 있어야 되는 거라.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 저 붓다야나 선원 다니고 나더니 참 그래도 좋아지고 있네. 여기 와서 한시간 수행하고 두시간 수행하고 집에 가면 땡? 또 여기 와서 한시간 법문 듣고 두시간 법문 듣고 나서 집에 가면 또 땡? 그것도 소용이 없는 거라. 반드시 실천하는 자가 돼야 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담마다로(dhammadharo), 법을 지닌 자, 법을 아는 자」가 되는 거라.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아, 담마라고 하는 것이 이마만큼 좋다 하는 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될 거 아니라. 그것대로 하다 보니까 내가 좋아지기 때문에 그래서 담마가 좋은 것이지, 담마가 무슨 보물이라서 가만히 놔두면 그걸 쓸 수 있다 해가지고 그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라.

내가 실천했을 때 이 담마가 좋은 쪽으로 가는 거라. 그때야만이 그 담마가 여러분들을 보호해주게 되는 거라. 담마를 따라 실천할 때.

 

여러분들은 항상 담마따라 살아가도록 담마다로(dhammadharo), 법을 지닌 자, 법지자(法持者) 가 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때야만이 스님도 보람이 있습니다. 법을 전해준 보람이 있고, 또 스님의 존재할 가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