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범행 수행자와 범행 수행녀의 위치설정 (20150306.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30. 09:00

https://youtu.be/AsTKCgMEC_g

* 범행 수행자와 범행 수행녀의 위치설정 (20150306. 대구)

 

프린트물, 범행수행자 보십시오.

'브라흐마짜리(brahmacārī)', '브라흐마짜리니(brahmacāriynī)' 소리는 들어봤어요? 안 들어봤어요?

그러면 '딸라신'이라는 소리는 들어봤어요? 그러면 '매치'라는 소리는? '다사 실라니'? 다 못 들어봤어? 들어본 게 뭐 있는데?

'비구(bhikkhu)', '비구니(bhikkhuni)'는 들어봤을 거고. (네)

일반 재가자들은 '우빠사까(upāsaka)', '우빠시까(upāsika)' 이렇게 얘기하죠? 우바새, 우바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브라흐마짜리니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비구, 비구니에 속하는 거라? 아니면 우빠사까, 우빠시까에 속하는 거라? 어디에 속해요? 모르겠어요? 어중간해요? 사실은 어중간한 겁니다.

 

몇년 전으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분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분명히 한국 승복을 입고 있는데 머리는 이만큼 길었어. 요즘은 하도 보살님들이 승복을 잘 입고 다니니까 보살님이 옷을 곱게 차려입고 왔구나 하고 생각을 하는데, 인사를 정성스럽게 해서 삼배를 하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는 비구니라고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그런데 그냥 비승비속(非僧非俗) 같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그러면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세속에 나가지도 못하고, 출가 스님들 집단에 속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한국에는 그런 경우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스리랑카, 태국, 버마 이런 데도 있습니다. 절 앞에 가면 이렇게 사당 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가보면 이 비승비속의 모습을 한 분들이 거기 있으면서 요즘말로 할 거 같으면 점 봐주고, 점 보는 방법이 좀 다르기는 합니다. 한국하고는. 거기는 하늘의 별자리를 가지고 점을 보기 때문에 점 봐주기도 하고, 길일 택해주는 그런 것들 하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말로 하면 부적 나눠주는 거 하고, 그런 거 해가지고 생계를 살아가고 있거든.

 

그런데 그런 분들은 보면 재가 생활을 떠났습니다. 브라흐마짜리니의 공통적인 게 뭐냐면 처음에 딱 명시하는 것이 뭐냐면 나는 재가생활을 하지 않는다하는 겁니다.

재가생활은 어떻게 해야 되요? 열심히 땀흘려서 일해가지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해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경제적인 활동을 아예 안 하는 것이죠. 돈을 벌 수 있는 활동들을 안 해야 원래 출가자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 비승비속은 그런 땀흘려가지고 일하는 사회적인 활동은 안 하는데,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죠? 점 봐주고, 기도해주고, 부적 써주고 하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거지. 생계수단이 그건 거라. 경제적인 활동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도 실제로는 먹고사는 구실로써 이걸 이용을 하고 있는 거라. 그걸 불교에서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찌 보면 한국 절이 대부분이 이 비승비속의 생활들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스님들은 일체 기도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축원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사 의식이라든지 제사 지낸다든지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다음에 뭐 백중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그런 거는 아예 없습니다.

그 대신에 부처님과 관계된 행사들은 아주 잘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든지, 부처님 성불한 날이라든지, 부처님이 열반한 날, 그건 같은 날이기 때문에 「붓다의 날」이라고 하고, 그다음에 부처님 처음 법을 설한 날이라고 해가지고 「담마의 날」이라고 하고, 그다음에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1,250인의 비구들이 만들어지고 해서 하나의 상가들이 구성돼가지고 온천지에 부처님 법이 전해지는 날이다 해가지고 그거는 「상가의 날」이라고 해가지고, 붓다·담마·상가의 날, 그다음에 또 하나가 스님들 해제하고 나면 한달 이내에 하는 「까티나 가사 공양올리는 날」 해가지고 이게 4대 행사입니다.

 

어찌 보면 그건 다 부처님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지 그것 가지고 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부처님 오신날 해가지고 연등 팔아가지고 절을 운영하고 하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담마의 날도 마찬가지고 다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사원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 그런 것들이 없으면 한국 같으면 아마 다 문닫아야 될 거라.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는 잘 돌아가고 있거든. 오히려 사원 수도 훨씬 많고, 그 속에 거주하고 있는 스님들도 훨씬 많고.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면 출가한 스님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취할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속에 100명의 스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명의 스님에게 나갈 보시금이 없어요. 테라와다 불교는. 한국에는 아마 100명의 스님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매달 그 보시금 나가는 거 충당할려고 할 것 같으면 주지스님들은 아마 똥빠질 거라.

그럼 일반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되느냐면 탁발로써 살아가게 되는 거라. 탁발해가지고 다행히 봉투 속에 만원이라도 들어온다, 그것 가지고 차비를 하고 자기 필요한 물품들 사고 이런 기본적인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활들을 하고 있는 거라.

 

그리고 절의 운영이라고 하는 것들은 일체 스님들이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재가자들이 하게 됩니다. 재가자들이 절도 짓고, 절도 보수하고, 어디 증개축 할 거 있으면 증개축하고, 모든 것들은 재가자의 몫이지 출가한 스님들은 설혹 거기가 무너지고 살 곳이 안 되면 떠나버리는 것이지, 그것 때문에 그걸 가지고 절을 증축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벌여가지고 기금 마련을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라.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한국 재가자들 참 행복한 겁니다. 그걸 스님들이 대행 다 해주고 있으니까. 테라와다 재가자들은 어찌 보면 불행한 거지. 그 책임 다 쌓아놓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테라와다 스님들이 그래도 이 한국 스님들보다 존경받는 이유가 자기 할 일들만 하거든. 계율 잘 지키고, 자기 수행 잘하고, 필요할 때 법문하고, 수행 지도하고, 그리고 후배들 잘 길러내고 잘 따르도록 하고, 그거 외에는 안 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사회활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활동도 합니다.

 

절의 개념이 어떤 개념이냐 하면 신도들이 모여서 법회보고, 스님들이 거주하는 장소는 당연한 것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장소가 있습니다. 교육이 안 되는 곳은 학교의 역할들을 하기도 합니다. 또 결혼식을 해야 될 때는 큰 강당의 역할들을 할 수 있는 거고, 어디 누가 돌아가셨다고 할 거 같으면 절에 시신 모셔놔놓고 스님들이 수행할 수 있는 도구도 되고, 또 스님들이 축원해줄 수 있는 그런 것도 되고, 그런 장례식 의식도 거기서 거행을 하는 거고, 그러니까 모든 사회생활 하는데 절하고 항상 연관이 돼야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도 절에 먼저 와서 스님한테 인사드리고 이름을 받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진행이 돼나갑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항상 절하고 연관을 짓다 보니까 그러면서 출가할 때가 되면 1년 중에 한번은 반드시 출가할려고 그렇게 합니다. 출가해가지고 자기도 승려생활 해보고 승려생활 할 때는 깨끗하게 잘하고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인제 사회에 나가야 되겠다 싶으면 딱 옷 벗고 사회인으로 돌아가는 거라.

그러니까 우리같이 어중간하게 이렇게 걸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는 이런 경우는 없어요. 요거면 요거고 저거면 저것인 것이지. 그대신에 그렇게 환속을 하더라도 다시 또 출가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거라. 일곱번을 할 수 있습니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런데 대부분 일곱번 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두세번 하는 경우들은 많아요. 어릴 때 한번 출가하고, 나중에 나이들어서 한번 하고, 그다음에 느지막하고 한번 출가해가지고 그다음 일생을 마치고 하는 이런 경우들도 많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출가한 스님 입장에서 스님들을 바라봤을 때 아, 진짜 존경하고 따를 선배로서 보게 되는 거고, 또 환속해서 사회로 돌아갔을 때 출가한 스님들을 봤을 때는 존경하는 스승으로서 보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찌 보면 딱 단절돼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사이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속이 훤히 비치는 거라. 그 속에 있는 것들이. 그러니까 들어와서 보고 밖에 나가서 보더라도 안과 밖이 다르지 않으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인제 출가한 스님들의 모습인데, 그걸 일러가지고 '비구', '비구니'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렇게 출가를 하고 싶은데 출가하는 조건이 안되는 경우들이 있어요.

 

만약에 내가 죄를 지어가지고 형기를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 했다 그러면 징역살이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2년 동안은 집행유예 기간이기 때문에 형기 기간에 속합니다. 그럼 그 기간 동안에는 출가를 못 해. 형기가 남아있으면. 그런데 출가하고 싶은데 어떡할 거야? 그럼 그 2년 동안 어떻게 해야 돼? 사회생활은 하기 싫고 출가는 하고 싶을 때? 그럴 때 택하는 것이 브라흐마짜리니 생활을 하는 거라.

 

또 내가 지금 고위관직에 있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 조금 쉬고 싶다, 수행 좀 하고 청정하게 좀 살고 싶다, 그대신에 고위관직을 탁 내놓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사표를 쓰지는 못하고 휴직계만 내놔놓고 그 기간동안 출가생활을 하고 싶다, 그런데 출가를 할려면 그 회사를 그만두어야 되는 거라. 그만둘 형편은 못되는데 어떡할 거라? 그럴 때도 마찬가지 브리흐마짜리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또는 문신이 많을 경우에도 안됩니다. 어릴 때 뭘 잘못해갖고 많이 했다 치더라도 지금 뉘우치고 잘살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출가를 못한다, 그 문신을 다 없앨 때까지는. 요즘은 그 문신을 잘 없애주는 기술도 있던데, 어쨌든 그게 다 없어질 때까지는 출가를 또 못하는 거라.

 

또는 몸에 지병이 있어가지고 등창이 많아가지고 그게 전염할 가능성이 있다, 그럴 때도 그 병이 다 나을 때까지는 이 브라흐마짜리니 생활을 해야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데 출가자와 같은 생활을 합니다.

 

그대신에 출가생활과 똑같습니다. 바리때 들고 탁발해서 먹고 살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이 옷도 걸칩니다. 그대신에 이 옷을 똑같은 걸 걸치면 어떻게 되겠어? 어떤 게 스님이고 어떤 게 청정수행자인지 모르게 되잖아. 그래서 이 규정은 반드시 두어야 됩니다.

그 규정이 뭐냐면 우리 가사는 보통 길이가 180 아니면 210센치, 그리고 요쪽 폭이 240에 300센치 까지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짧아도 길이가 180센치란 말이라.

그런데 청정 브라흐마짜리가 입는 옷은 이게 아무리 길어도 50센치가 넘을 수가 없습니다. 50센치 아니면 40센치. 그대신에 이 길이도 160센치. 그렇게 되니까 직사각형 천이 되잖아. 직사각형 천인데 가사처럼 둘러야 되니까 어떻게 돼? 요렇게 쭉 펴고 요렇게 가사처럼 두르는 거라. 그래서 미얀마 같은데 딸라신 같은 경우들을 보면 가사 같이 요렇게 두르고 있죠? 그런 규정들입니다. 그런데 그리해도 어쨌든 몸을 거의 감싸게 되니까 별 차이가 없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색깔에 규정을 두게 됩니다. 비구스님들이 입는 가사색을 제외한 나머지 색. 그러다 보니까 각 나라별로는 그 색을 태국이나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흰색으로 통일해버렸어요.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분홍색으로 통일을 했고. 어쨌든 분홍색이든 흰색이든 가사의 색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허용이 가능한 겁니다. 가사의 색을 제외한 색이기 때문에.

그리고 똑같이 머리를 깍아요. 삭발을 해요. 그리고 똑같이 탁발을 나가야 되고.

 

똑같이 계를 지키는데 계를 지키는 것이 조금 차이가 납니다.

사회생활 안 하는 것은 똑같은데 출가자의 계는 소계, 중계, 대계로써 구분이 돼있습니다. 그런데 브라흐마짜리의 계는 8계, 9계, 10계를 지키게 돼있습니다.

여러분들 일반 재가자들이 포살일 때, 불재일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때 가면은 8계를 지킵니다. 그날은 오후불식 해야 되는 날이라. 그날은 일체 성관계를 부부간이라고 하더라도 가져서는 안 되고, 높고 넓은 침상 같은 데서도 잘 수도 없고, 이런 규정이 돼있습니다. 그리고 노래들리고 하는 그런데도 갈 수도 없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런데다가 9계가 되면 화장품 바르고 이런 것조차도 안돼.

10계가 되면은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게끔 돼있습니다.

그게 사미계하고는 좀 차이가 나는 거죠. 예비 출가자인 사미, 사미니 하고는 계율이 똑같이 10계라고 하더라도 항목에서 차이가 나는 거죠.

쉽게 말하면 출가자와 똑같은 오후불식을 하고 일체 성적인 관계를 맺지를 않고, 검소하게 살기는 사는데, 그대신에 규정이 언제든지 자기가 집에 가고 싶으면 집에 가는 거라. 집에 가서 생활할 거면 집에 가서 생활할 수도 있고 집에 일을 봐줘야 할 거면 봐줄 수 있고, 출가자들은 일체 그걸 못합니다.

 

집에 못 가는 것이 아니고 집에 일을 봐줄 수가 없는 거라.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출가자들이 가서 그 일을 봐주지는 못해. 그러니까 아무리 출가 전에 내 아들 딸이 있다, 그리하더라도 내 출가 전의 아들 딸을 위해서 내가 보조금을 준다든지 아니면 내가 그 아이를 키우는 양육의무를 행하든지 이런 것들을 일체 못해. 출가자들은 못하게 돼있거든.

그런데 브리흐마짜리는 이게 가능한 거라. 사회에서 사는 건 아니지만, 사회를 떠나서 경제활동을 안 하고 있지만 집에 일들이나 이런 것들을 봐 줄 수가 있는 거라. 어찌보면 대외적인 폭이 굉장히 넓어지게 되는 거라.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이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회적인 약자들이나 아니면 병자들이나 이런 분들을 간호하고 치료하고 이런 것들을 스님들이 해야 되는데, 비구 스님들은 남자밖에 못하는 거라. 여자 손 잡아가지고 따뜻하게 위로를 해줄 수가 있나, 못하는 거거든. 그럼 누가 그걸 대신해야 돼? 그럼 브라흐마짜리니가 대신 해주게 되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이 갈 때는 브리흐마짜리니를 대동해가지고 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상호 보완적인 관계들을 취하는 겁니다.

 

그대신에 브라흐마짜리니도 꼭 마찬가지로 서원을 해야 됩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생활을 하겠다' 하는 그런 서원을. 평생 하려면 평생 해야 되는 거고, 5년 하려면 5년 하고, 서원을 꼭 다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서원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이런 규정들을 뒀느냐 하면 경전에 보면 「수행체계」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경전 중부경전이나 아니면 상응부경전이나 그런데를 중심적으로 보면 「수행이 진행돼나가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 부처님 법이 있네’ ‘! 저게 진짜 부처님 법이네’ 하는 것들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한 거거든. 그래서 아, 저게 진짜 부처님 말씀하신 것이고 저걸 따라 할 것 같으면 나는 ‘아! 그래도 마음이 깨끗해지고 뭔가 길이 보이겠다’ 하는 것들을 알고, 그러고 나서 ‘아! 내가 저렇게 청정한 생활을 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된다는 겁니다.

몸도 청정하게 하고, 말도 청정하게 하고, 그다음에 생각하는 것도 청정하게 할려고 하고. 신구의를 자꾸 청정하게 하려고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걸 통틀어서 뭐라고 하느냐면 '브라흐마짜리니'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쉽게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법문을 통해서 듣고 아! 부처님 말씀 참 좋고 내가 저 길을 따라서 가야되겠다 생각해서 실천 안 하면 어떻게 돼? 말도 함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죠. 그리 안 하고 ‘아, 내가 그러면 안되지’ 자꾸 실천하려고 그러고, 그래서 그걸로 자꾸 어느 정도 길들여져 가는 거라. 그게 수행의 첫 번째 단계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될까?

 

그러고 나면 딱 두 번째가 되는 것이 뭐냐면 확고하게 믿음이 딱 드는 것. ‘! 이게 맞다 그러니까 어떤 걸 해도 인제는 거기 안 흔들리는 거라. 내가 법대로 하다 보니까 잘살게 되는데 다른 거 따라갈 이유가 없는 거라. 그래서 그냥 그 길만 그냥 가는 거라. 그러니까 법문이 있든지 없든지, 아니면 절이 있든지 없든지, 스님이 있든지 없든지, 법문을 해주는지 어쩌든지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냥 나는 그 길을 간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오늘이 만약에 포살일이다, 여기 같으면 법회날이다, 스님이 와서 법문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거 전혀 신경 안 써. 여기도 보니까 매주마다 "스님 내일 법문 있습니다." 하고 알리고 공지하는 게 있든데, 내가 그정도 아직 믿음이 안 생겼다는 얘기지. 그걸 탓할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걸 아직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가서 법문이 없으면 조용하게 수행하고, 아니면 녹음된 걸 듣고 그러면서 자기는 하루 동안 청정하게 마음을 깨끗하게 청정하게 살면 되는 거라. 그러고 나면 아, 내가 이 생활이 참 좋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 그럼 계속해보고 싶거든. 그럼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요? 아, 내가 집중수행 좀 해야되겠다, 그래서 집중수행 하는 곳들을 찾아가는 거라.

 

그래서 '삿다(saddhā)'가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뭐냐면 청정한 생활을 계속 지속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거기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집중수행 해가지고 내가 이 기간 동안에 청정수행녀, 브라흐마짜리니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일반 재가자의 입장에서 청정한 생활을 할 것이냐 그때 결정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남자 같으면 단기출가를 한다든지, 여자 같은 경우에는 비구니가 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청정 브라흐마짜리니 생활을 한다든지 이렇게 하고, 안 그러면 그냥 나는 도저히 매일 8계 지키면서 밥 안 먹고는 못 살겠다 싶으면 그냥 5계 지키면서 5계라도 잘 지키면서 수행 열심히 하고 어느 정도 힘을 기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그냥 재가자로서 집중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집중수행처가 생기면 그런 이익들이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확실하게 다릅니다. 그게.

 

재가자의 입장에서 집중수행을 하는 거하고, 청정수행자의 입장에서 집중수행을 하는 거하고, 또 출가자의 입장에서 집중수행을 하고 하는 것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청정수행자가 됐다고 할 거 같으면 어쨌든 탁발해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뭐 내가 안 갖춰진다고 하더라도 불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어.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가 뭐 밥을 안 갖다줘도 ‘하루 굶지 뭐’ 이래버리고 말지 ‘밥도 안 준다’고 이렇게는 안 한다는 거라.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오늘 부엌에 일손이 부족하니까 일손 좀 도와달라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수행하러왔지’ 이렇게 돼버립니다. 마음 자세가 이렇게 딱 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한달 이상을 집중수행을 들어갈 때는 되도록이면 청정수행자의 입장이나 출가자의 입장으로 들어가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은 하는 것들이 뭐냐하면 '상와라 빠띠목카(saṁvara-pāṭimokkhā)'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빨리어로는, 내가 청정자로서 8계를 지켰다, 아니면 재가자로서 5계를 지켰다, 아니면 비구로서 227계를 받았다, 그러면 그 계의 중요성을 압니다.

 

여러분도 5계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이걸 지킴으로 해서 얼마나 내가 평온하고 이것이 얼마나 나를 보호해주는가? '상와라'라고 하는 것은 보호해주고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지 않게끔 해준다는 겁니다. '계목'이라고 하는 것이 '빠띠목카'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오늘도 5계 받았죠? 그럼 5계를 자꾸 지킬려고 해야지 받기만 하고 ‘내용이 뭐였더라?’ 이래버리면 안 되는 거고. 여러분이 따라할 때는 반드시 그 밑에 한글로 된 내용들을 자꾸 숙지하고 아, 오늘은 내가 도둑질하는 마음이나 아니면 나쁜말을 안 해야지 자꾸 마음을 먹고 그렇게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아, 이게 참 나를 보호해주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라. 남을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들 때도 ‘아, 이런 계를 지켜야 되는데,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돼’ 하고, 그러면서 위험으로부터 내가 스스로를 보호하게 되는 거라.

 

수행의 진행과정들입니다. 그렇게 바뀌어버립니다.

자기에게 맞는 것에서 그 계가 자기들을 보호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수행체계 칠청정의 처음이 딱 시작 되는 거라.

그전에는, 지금은 '수행''' 자도 안 나왔어.

이 상태가 되기 전에는 수행의 단계에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가 없는 거라.

그거 안된 상태에서는 수행해봐야 진척이 없다는 거라. 그리고 진척이 잘 안돼.

 

그다음에는 뭐냐하면 '아리야 식카칸다'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생활들을 지속을 해나감으로 인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하고 안락하고 평화롭구나’ 하는 것을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 이게 진짜 좋구나!’ ‘내 수행 안 해도 이렇게만 살아도 참 좋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자꾸 경험을 하게 되는 거라.

 

그 경험이 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인제는 본격적인 수행으로 들어갑니다.

아! 내가 좀 더 뛰어들어가가지고 수행을 해봐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

그러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통일시키는 훈련들을 자꾸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게 칠청정이라고 그러죠, 우리나라에서는? 뒤에 있는 프린트물 요거만큼 내준 게 칠정정의 계청정에 대한 거 내준 겁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칠청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해놓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이 수마나사라 스님이 쓴 게 칠청정에 대해서는 잘 나와있기 때문에 그걸 일부 해준 겁니다.

다음에 그거 자세하게 해줄테니까 보지 말고 그냥 말만 들어요.

 

, 그래서 인제 수행할려는 생각이 들어서 인제 스승에게 찾아가는 거라. “스님, 나 좀 수행하게 수행방법 좀 가르쳐주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을 통해가지고 수행방법을 알고, 그걸 '깜맛타나'라고 그렇게 합니다.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라고 그러면 수행의 주제를 받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알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하는 뜻입니다.

 

대부분 절이라고 하는 걸 용어를 뭐라고 쓰느냐면 위빳사나 수행처라고 할 것 같으면 '위빳사나깜맛타나'라고 씁니다. 사마타 수행처면 '사마타깜맛타나'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빳사나'나 '사마타'를 자기들 말로, 태국 같은 경우는 '빠띠빳탐' 그렇게 얘기합니다. ‘빠띠빳띠(paṭipatti)’라는 빨리어 말을 태국말로 하면 ‘탐’은 담마라. 법을 따라서 '실천하는 그런 곳'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실천하는 수행의 장소'라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하는 장소, 절이라는 개념은 그런 뜻이라는 거라.

그게 인제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곳인지 사마타를 수행하는 곳인지에 따라 그 앞에다가 '위빳사나빠띠빳탐깜맛타나', '사마타빠띠빳탐깜맛타나'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뭘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받아야 그걸 자기가 하는 거라. 그 대신에 이미 법에 대한 확신들이 있고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내가 안락을 경험하고 계율을 지키고 하면서 안락을 경험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스승이 어떤 수행법을 가르쳐주어도 그냥 따라가는 거라.

괜히 내가 책보고 들은 것 때문에 ‘그거 나하고는 안 맞는데’ 뭐 어쩌고 하면서 반항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니면 다른 수행법 하면 그거 아니야! 아니야! 이러지도 않는다는 거라.

 

수행주제를 받을 때는 그 어떤 수행지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설혹 안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나중에 내가 세월 지나고 나면 안 맞으면 스승이 또 바꿔주겠지 하고 믿게 되는 것이지 며칠 해보지도 않고 “스님, 나 이거 안 맞는데요” 이렇게 하지를 않는 거라.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하라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책에서 이렇게 배웠는데요” 하면서 이렇게 하지도 않는다는 거라. 이건 쉽게 말하면 그런 마음을 이미 가진다는 건 “나는 수행 안 하겠다” 하는 말과 마찬가지라.

 

절에 왔으면 그 절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 배워야 됩니다. 그게 어떤 방법이든 똑같습니다. 그 어떤 스승이든 가르치는 것은 그냥 100프로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떤 스님들이 와서 그분 방법대로 법문하고 그분 방법대로 수행지도를 해줄 때도 있을 겁니다. 나만 계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럼 여러분들은 그냥 따르면 돼. 그것은 다 수행에 이익이 있고, 또 보조적인 역할들을 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가끔씩 그런 얘기합니다. 나는 심념처를 배워서 그냥 일반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걷는 게 아니고 그냥 편안하게 걸으면서 하는데, 여기오니까 스님이 자꾸 천천히 걸으라고 그런다, 그거 나하고는 안 맞는데 나는 그냥 내 하는 대로 하겠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하면 안 됩니다. 심념처의 방법에서는 그 방법이 맞을지 몰라도 그 스님이 가르칠 때는 그 스님 방법대로 해줘야만이 그게 맞는 방법인 거라.

그게 인제 됐다 치자!

 

그러면은 인제는 대상에 대해서 '사띠마 삼빠자나(satimā sampajāna)'

해피스님이 만날 강조하는 거죠? 그렇죠?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분명한 앎을 지니는 것! 어떤 대상이든지 밥 먹었으면 밥 먹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말할 때는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물며 대소변을 볼 때도 그걸 알아차리고, 모든 행위, 모든 일상생활, 모든 생각들, 모든 것들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갈려고 하는 것! 인제는 그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행주제가 필요한 것이지, 그래서 수행주제가 어떤 것이든 관계가 없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알아차림을 계속해나가면서 그걸 사마타 방법으로 하든, 위빳사나 방법으로 하든 그게 중요한 부분이 절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힘이 들 경우에는 사마타 방법으로 해야 되는 거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가볍고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 방법으로 해야 되는 거고.

 

그러고 나면 그뒤부터는 하는 것이 뭐냐하면 '인드리야 상와라(indriyasaṃvara)'라고 그럽니다. 탁 감각기관을 제어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수행 잘되는 사람들은 걸어가더라도 뒷모습 보면 표가 나요. 스님들 같으면 수행이 안 되는 스님들이 걸어가는 모습 보면 가사자락이 찰랑찰랑 찰랑찰랑 합니다. 가사 자락이 다른 여러분들 옷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또는 쭉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삐뚤빼뚤빼뚤 걸어간다든지, 아니면 오만 거 다 보고 가면서 얘기 다 하고 가고 그러고 가는 거라. 감각기관을 제어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라.

걸어갈 때는 그냥 걸어갈려고만 하라는 거라. 그러려고 하다 보니까 옷이 걸어가는 것만 알아차리는데 불편하다 싶으면 옆에 싹 모두어가지고 딱 잡고 걸어가는 거라. 감각기관을 제어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되는 거라.

 

왜? 감각기관은 그 찰나에 그것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볼 때는 보는 것만 아는 것이지 보면서 말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정도 수행이 쭉 진행이 돼나가면은, 그리고 진행이 안 돼나갈 때도 감각기관을 자꾸 제어할려고 해야 됩니다.

‘아, 이번에는 내가 걸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걸어가는 것만 내가 알려고 하겠다.’

‘이번에는 말을 할 것 같으면 말하는 것만 알려고 하겠다.’

‘들을 때는 듣기만 하겠다’ 하고 해야 되는 것이지, 들으면서 생각하면 금방 말이 튀어나와 버립니다.

 

그다음에 수행이 진척이 되면 여러분들 '소욕지족'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죠. 그래서 재가자이든 출가자이든 가진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면서 그것을 활용하면서 도구로써 쓰고 그러면서 그냥 살아가게 되는 거라. 일부러 더 욕심낼려고 하지 않고, 만약에 뭔가가 더 하나 생겼으면 그냥 그거인 거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더 욕심을 가지고 아, 내거 뭔가 생겼다 하면서 탐욕심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거라.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것이 거의 사라지는 상태가 됩니다. 치심은 어쩌지를 못하는 거고. 그런데 치심은 탐심과 진심을 제어하게 될 때 치심도 자동적으로 제어돼지고, 마음을 항상 치심을 제어할 때는 자애의 마음, 사무량심의 마음, 이런 것들로 항상 향할 것 같으면 치심은 사그라들고 약해져버립니다.

그런데 어쨌든 수행에서는 탐심과 진심이 먼저입니다. 치심은 뒤의 부분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해결될 때 자연스럽게 지혜로운 것이 일어나면 치심은 반대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만족한다고 하는 것은 탐심과 진심들이 많이 사그라졌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그것이 되고나면 실천해나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딱 제거해버립니다. 보통 수행에서 일어나는 것은 뭐에요? 다섯 장애 그러죠! 졸리고, 게으름 부리고, ‘아, 이거 그리해도 되나 어쩌나’ 하고 의심하고, 그다음에 뭔가 형식에 맞게끔 딱 그 형식대로 따라가야 되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망상 부리고 하는 것들도.

아! 이번에는 내가 이것이 좀 강하게 일어난다. 그러면 요 한시간 동안에는 요걸 한번 내가 제거를 해보자. 졸음이 오면 그걸 제거를 해보자 하고 마음을 탁 먹고 졸음을 관찰하면 그전에 관찰할 때보다 훨씬 강도가 커집니다. 몰아내기 쉬워집니다. 그래서 그 장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몰아낼려고 그럽니다.

그게 내 수행하고 내가 바르게 실천해나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나갑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하고 나면 또 다른 장애들을 제거할려고 합니다. 이렇게 서서히 만들어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어느 정도 장애가 수행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하면, 그다음에 대부분 떠올리는 게 원하는 것들이 뭐냐면 선정에 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 선정이 필요한 것이지, 그 이전에 처음부터 수행하자마자 나는 선정수행을 할려고 한다이러면 안 돼.

어느 정도 장애가 제거되는 법을 알고 나면 선정을 통해서 장애를 완전히 눌러버리게 되는 것이지, 제거하는 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기가 힘이 드는 거라. 그러고 나면 선정에 들기가 수월해지는 거라.

장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대상에 대해서 몰입하게 되면 선정이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조그만한 경계들, 니밋따라고 하는 경계들이 나타나는 것에 마음이 크게 휩쓸리지 않는다는 거라. 수행주제가 뭔지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장애인 것뿐인 것이고, 하나의 현상인 것뿐인 것이지 그것 가지고 내가 좋아하고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러면 계속적으로 그냥 수행주제에 맞게 하게 되는 거라.

 

그러고 나면 선정을 1선정에 자유롭게 들어가지고 나오고, 원하는 시간만큼 있고, 또 어느 때 내가 1선정에서 깨어나는 때를 알고 이런 것들이 자유롭게 돼야 되고, 다섯 가지가 자재롭게 자유롭게 되는 상태, 그게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2선정으로 넘어가집니다. 2선정도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되고 나면 3선정으로 넘어가지고, 그렇게 돼나갑니다.

 

옛날에는 부처님 당시 때 기록들이나 부처님 당시 때 사람들을 보면 어느 정도 바른쪽에서 수행들을 해왔고 또 그런 사회적인 바탕이 됐기 때문에 선정에 드는 게 금방 쭉 1선정에서 4선정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참 힘듭니다.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밟아나가는 게 시간이 조금씩 걸립니다. 그게 얼마 차이가 아닌 것 같애도 굉장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유롭게 되기 전에는 그다음 단계로 요즘은 거의 안 넘어가집니다. 그래서 그걸 자유롭게 활용을 하는 상태가 되고 나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집니다. 그렇게 해서 선정을 어느 정도 개발을 하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은 관찰을 통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내가 부족한 게 뭔지, 내가 또 어떤 방법으로 지금 해야만이 합리적인 방법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게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입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고, 모든 것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인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버리는 연습들을 하게 됩니다.

 

지금 얘기하는 것들이 뭐냐하면 도와 도가 아닌 길, 내가 가야 될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됩니다. 칠청정의 네 번째 부분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뭐 어떤 길로 가야 될 지를 아는 거라. 내가 지금 피곤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그럼 선정삼매에 드는 거라. 어느 선정삼매에서 이 피곤을 몰아낼 수 있는지, 또는 내가 어느 정도 밝은 눈을 갖고 싶다, 그럼 얼마만큼 선정에 익숙해야만이 내가 밝은 눈을 가지게 되는 건지를 아는 거라.

그래서 자기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수행에서도 그렇게 구분할 뿐 아니라 일상수행 외적인 것도 이것은 내가 전혀 가야 될 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아는 거라.

출가한 스님이다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내가 해야 될 것과 하지말아야 될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된다는 거라. 지가 하지 말아야 될 것 같으면 하지를 안 해.

 

여기까지가 뭐냐 하면 브라흐마짜리니의 생활들입니다.

 

그러고 나면 브라흐마짜리니에서 계속 수행해나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아니면 내가 출가해서 출가자의 입장이 될지를 결정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뭐냐하면 도와 과의 단계로 넘어가집니다.

 

그래서 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 도의 길을 쭉 수습해나가고, 그다음 단계의 도의 길을 가게 되고, 이렇게 바뀌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게 보통 수행의 공통적인 체계입니다.

 

그런데 브라흐마짜리니라고 하는, 지금 브라흐마짜리니 하다가 이렇게 나왔죠?

브라흐마짜리니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출가자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출가자는 아니다! 그러면은 재가생활을 안 한 것이기 때문에 재가자인가 하면은 재가자는 아니다고 할 수 있는데, 구분을 짓자면 재가자에 속해버립니다!

왜? 여러분도 재가생활 하면서 하루 동안은 브라흐마짜리니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거라. 8계 지킬 때는. 단지 브라흐마짜리니는 평생 동안을 하고, 몇년 동안을 하고 하는 것의 차이가 있는 것뿐이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적어도 오늘 여기에 왔다, 오늘 하루 동안은 브라흐마짜리니의 생활을 해야 되는 거라. 쓸데없이 화내고 욕심부리고 할 것이 아니고 그 수행체계에 따라서 쭉 진행되어나갈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하루 동안은 반드시 청정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범천과 같은 생활들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항상 마음에는 범천들이 지니는 사무량심들을 지니고 있어야 되는 거라.

 

그렇지만 여러분들을 일러 출가자라고 안 하잖아. 재가자라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쉽지만은 똑같이 탁발도 하고, 가사 비슷한 것도 수하고 했지만 출가자가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비승비속이지만 '속해(속한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재가자에 속해버립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은 비승비속이라고 할지 모르지만은, 출가자와 다름없는 계를 지킨다고 할지 모르지만은, 삭발을 하지 않고, 또 출가자가 가져야 되는 계율을 지니지 않고, 또 출가자가 해야 되는 상가에 속해있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재가자입니다. 아무리 모습은 출가자의 옷을 입고, 아무리 행은 출가자의 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출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얘길 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 스님은 이해를 하더라고. 그러면서 내가 다시 출가하겠다 하면서 미얀마 가더니 딸라신이 돼가지고 다시 왔더라고.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그 옷을 입고 생활하기가 참 힘들어. 그랬지만은 본인은 진짜 청정녀의 생활을 해보니까 참 좋거든. 그전에 나는 스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비승비속 같이 살 때보다 훨씬 좋았던 거라. 그런데 출가의 모습을 인제는 알게 되는 거라.

 

여러분도 재가자이지만은 청정수행자의 모습을 자꾸 늘려가도록 해야 됩니다. 일주일 중에 하루는 그러도록 하고, 그러다 보면 일주일 중에 이틀 또 삼일 이런 식으로 자꾸 늘려가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안 되면 적어도 오늘 단 몇시간 동안 어떠한 경우든지 탐심과 진심에 젖지 않고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항상 청정한 생활, 말과 행동과 생각을 가지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