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행복과 불행은 자기 책임 (20141107. 대구)

담마마-마까 2021. 9. 7. 09:00

https://youtu.be/FntLoyhR7to

* 행복과 불행은 자기 책임 (20141107. 대구)

 

법문을 할 때 법문을 바로 안 하고 마음이 법문을 들을 준비가 됐을 때 법문을 하죠. 배고픈 사람이 올 거 같으면 아무리 법회라도 밥부터 먹어야 되고, 밥을 먹고 나서, 그 사람이 배고프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나서 그러고 나서 법을 설하도록 그리했기 때문에, 우선 자세가 불편하면 그거에 신경쓰여서 법문이 안 들립니다. 그러니까 의자에 앉아서 있어도 전혀 관계없어요. 그거 불편해하지 말고 최대한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법을 수 있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프린트물 두 가지죠? 오전에 지금 할 게 한 가지, 또 오후에 수행할 때 할 거 한 가지. 오전에 할 게 뭡니까? (수행자 모두 : 행복과 불행은 자기 책임)

행복과 불행은 자기 책임, 자기 책임 맞습니까? (수행자 모두 : 네.)

그런데 자기 책임 안 하고 다 남의 탓하고 있잖아.

 

부처님 일화에 보면 똑같은 일들인데 반응하는 것들이 각각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아이도 죽고, 남편도 죽고, 그렇게 해가지고 결국은 미치광이 비슷하게 다녔던 분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충격 때문에. 나에게 다쳐온 불행 때문에. 결국은 나중에는 부처님 말씀 듣고 법의 길로 들어서긴 했지만 그전에는, 그러니까 부처님이 손을 내밀기 전에는 대부분 보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하면서 그렇게 지내는 게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조그만한 일이면 괜찮은데 큰일을 당했을 경우에는 그런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인데 한 분은 남편도 죽고 또 50명이나 되는 아이들도 전부다 죽고 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나서도 마음에 동요함이 하나도 없이, 그때가 스님들께 공양올리는 때였거든. 그냥 편안하게 공양올리고 그리고 법문 다 듣고 나서 나중에, 아까 누가 나한테 그럽디다. 남편하고 아들이 다 몰살당해 죽었다고.

마음의 동요함이 없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니까 자기 일 따라 자기가 간 건데 내가 어쩌겠습니까? 또 죽은 사람 돌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러니까 나는 오직 내 할 일을 할 뿐입니다. 탁발 올릴 때니까 탁발 올리는 거고, 법문 들을 때니까 법문 듣는 것이고, 그러고 나서 남편과 아이들 장례식을 치르도록 편안한 마음에서 그렇게 합니다.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 반응들은 차이가 많이 나죠? 경전 곳곳에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불행하고 어떤 경우에 행복해질까? 이 두 가지 예를 들어봤을 때?

(수행자 대답 :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때가 행복하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대답 : 지금 자기 하는 일에 충실히 잘하고 있는 것)

그렇죠. 자기 하는 일, 지금 뭔가를 하고 있으면 그걸 하면 되겠지.

 

쉽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마음이 제어가 되는가, 아닌가?

불행이 닥쳐오고 슬픔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걸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불행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자기 할 일들을 하면서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일을 처리 안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거는 있는 그대로 처리를 하는 거고.

그런데 제어를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으면 거기에 휩싸여 들어가버립니다. 홍수가 밀어닥칠 때 홍수를 내가 견딜 힘이 있을 거 같으면 내가 휩쓸려 가지 않는데 견딜 힘이 없으면 그냥 휩쓸려 들어가버립니다.

 

세상일이 그렇게 휩쓸려 들어가버릴 것들이 한두 가지겠어요? 굉장히 많습니다. 나쁜 일만 그렇게 휩쓸려 들어가버리겠어요? 좋은 일도 휩쓸려 들어가버립니다.

여러분들에게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일억씩 갑자기 돈다발이 떨어졌다. 편안하게 그냥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아마 법문이고 뭐고 그 일억 가지고 어디 숨기기 바쁘든지 아니면 뭐 어떻게 가지고 빨리 집에 가기 바쁠 거라. 좋은 일에도 그렇게 되고 나쁜 일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걸 「세상 여덟 가지 일」이다 합니다. 그 여덟 가지 일에 동요하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게 여덟 가지일까? 조금 전에 얘기했으니까,

재산이 많아지는 것, 그다음에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

건강해지는 것, 또 병이 갑자기 들어버리는 경우,

남이 나를 칭찬해 주는 것, 또는 남이 나를 비난하는 것,

그다음에 명예가 높아지는 것, 또는 명예가 떨어져버리는 것.

그게 세상 여덟가지 일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여덟 가지는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죠? 명예가 높아지면 떨어질 때도 있는 거고,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건강했다가도 또 병이 들기도 하고, 남이 나를 아무리 칭찬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는 비난하게도 될 것이고. 똑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타게 돼있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부처님이 하는 얘기는 이렇게 변해가는 것에 뭘 그렇게 마음을 그렇게 쓰고 거기에 죽니 사니 하면서 내가 행복하고 불행하고 하는데 거기에 매여 있을 이유가 뭐냐는 거라.

 

만약에 돈이 갑자기 생겼으면 이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으면 그걸 기뻐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아 이걸 어떻게 하면 이걸 나에게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게 쓸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아주 고요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갑작스럽게 돈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슬퍼한다고 해가지고 없어진 돈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없어졌는가를 차분하게 생각해보고 그러면 내가 다시 또 열심히 해서 그 돈을 벌도록 하는 거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 바른 것이지, 그것에 반응해가지고 자기 자신조차도 감각적인 것에 그냥 끄달려들어간다든지 아니면 불행에 끄달려들어간다든지 이러지는 말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 책임이지 어느 다른 것들 책임이 아니라는 거라. 외부에서 일어난 것들로 인해서 내가 불행하고 행복하고 하는 것이 좌우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어디에다 쓸 거라?

외부 일은 외부 일인 것이지 그걸 가지고 나에게 유용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또 내가 더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반성하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휩쓸려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행복한 마음을 일으켰든 불행한 마음을 일으켰든 그것은 누가 일으켰냐는 거라. 자기 자신이 일으켰다는 거라. 자기 자신이 일으켜놔 놓고 나는 불행하다 할 것 같으면, “너 때문에 불행하다” 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라.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행복과 불행은 자기책임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럼 본인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되는지, 또 어떻게 하면 불행하게 안 되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길로 가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제 이 글의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첫 번째 보면 1페이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배움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만,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탓도 자신의 탓도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할까? 아마 자신이 경향지은 것이 많으면 그쪽으로 뭔가를 하면 행복할 겁니다. 물론 그게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일 할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도둑놈들은 남의 것 훔쳐가지고 되게 행복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나쁜일이라고 할지언정.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일 하고 나면 행복해합니다. 간혹 술 먹고 나서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은.

그래서 보통 보면 본인이 행복하는 것은 본인이 많이 해왔고 그것으로 인해서 습관지어져 왔을 때, 그것을 했을 때 행복해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도둑질해서 행복해가지고는 일반 사람들은 그걸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술 먹고 본인이 행복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불교적으로 봤을 때도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것들로 인해서 행복해지는 습관들을 들일 필요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네 가지 습관'을 들여봐라 하고 얘기합니다.

적어도 이 네 가지를 습관 들여놓으면 세속적인 행복은 그래도 계속적으로 다가온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나누는 일들을 자꾸 하도록 하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가 그것을 베푸는 것들! 그런데 그 베푼다는 의미는 뭐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짜가(cāga)라고 하는 빨리어는 어떤 의미가 강하냐면 베풀고 나눠주더라도 그게 그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여져야 되는 것이지 필요 없는 거 베풀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처음에 출가해서 해인사에 있을 때 노스님이 그런 적이 있어요. 항상 그 노스님은 사미들이나 행자들한테 과일을 줘요. 그런데 무슨 과일을 주냐면 만날 썩기 직전에 있는 과일들, 본인이 가지고 있다가 못먹겠다 싶으면 그걸 갖다 줘요. 누가 그걸 먹어? 그러니까 그 스님이 뭘 준다 할 것 같으면 다들 아무도 안 갈라고 그래. 그거 받으러. 못 먹는 거 주니까.

그 사람에게 필요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러니까 베풀고 나서는 내가 그래도 너네한테 얼마나 많이 줬는데 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대하느냐 그러거든. 베푼 거는 하나도 없거든.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자기에게도 진짜 그게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줬을 때는 오히려 기쁨이 일어나는데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에게도 별로 필요 없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나면 그 행복은 크게 안 일어납니다. 조금 일어납니다.

 

그것뿐 아니라 주고 나서 내가 너희들한테 얼마나 베풀었는데 너희가 나한테 무례하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뭐라? 돌아올 거 생각한다는 거지. 돌아올 걸 생각을 하면 안돼. 준 것으로 나의 할 일은 끝난 거라. 그리고 그 사람이 그걸 유용하게 쓰면 되는 것이고. 그걸 또 확인할 필요도 없어. 그걸 유용하게 썼는지 어쨌는지. 내 할 일은 거기까지 뿐이라. 베풀고 나서 그리고 베풀었다는 생각조차도 딱 잊어버리는 거라. 그게 짜가(cāga)의 영역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시, 다나(dāna)라고 하는 의미하고는 조금 다르죠? 짜가(cāga)라는 게? 그것이 나에게도 유익하고 나에게도 행복을 가져오는 것들이고, 그것들을 나누어 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유익하게 쓰여지고 행복하게 되는 것들, 그리고 그러한 나눠주는 것들로 인해서 마음에 집착하는 것들이 없는 것, 그것들이 첫 번째 얘기하는 베푸는 것들을 몸에 지녀라 하는 뜻으로 짜가(cāga)를 얘기합니다.

 

적어도 그게 있으면 나는 항상 행복해. 그래서 어떨 때는 저 사람 보면 저 사람에게 내가 뭐 해줄 게 없는가?

특히나 스님들을 이렇게 보면 불쌍하거든. 수행도 그렇고 일반적인 부처님 가르침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서로가 만나면 그냥 부처님 얘기 전해주기 바빠. 어떨 때는 아이고, 적당하게 전해주지, 오히려 저 사람은 그것을 그만 듣고 싶어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거를 듣고 있는 경우들을 볼 때도 있고 그러거든. 그건 뭐냐면 그 사람이 진짜 유익하고 행복이 있게끔만 해줘야 되는데, 그게 지나치다 보면 그 행복이 반감되는 때가 있는데 반감되는 때도 그냥 계속적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거라.

그럴 때는 거기에서 끝내줘야 되는 거라.

 

그래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해도 내가 여러분들한테 12시간 법문하면 여러분들 듣고 있겠어? 안 들어요. 안 들어. 그런데 스님들은 그런 훈련들을 합니다. 사람이 있든 없든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법을 설하는 훈련들을 계속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떨 때는 스님들도 그 타이밍을 놓칠 때가 있어.

나는 이렇게 좋은 법인데 왜 안 들을려고 하느냐는 그럽니다. 그건 그 스님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뭐냐면 그 사람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것을 자꾸 간과를 하니까 그 부분을 조금 등한시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무리 바른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들을 조건이 안 될 거 같으면 법을 설하지 마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친구가 지금 잔뜩 성이 나있는 상태에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성내지 마!"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오히려 성질을 더 돋군다고 막 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성내지 마! 하고 얘기해야 될 게 아니고 "그래 니가 마음이 많이 아프겠다." 뭐 이렇게 다독거려 주는 게 우선이 돼야됩니다. 우선이 되고 나서 착 가라앉고 나면 “니가 그렇게 성질내는 것이 잘못됐다” 이럴 것 같으면 “아, 그래 내가 다음부터는 안 할게” 이렇게 되는 것이지 아무리 바른 말이고 옳은 것이라고 해도 성질내는 사람한테 성질내지마 할 것 같으면 그건 안 되는 거라.

법도 그와 마찬가지라. 들을 조건,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조건이 될 때 또 법을설하라고 얘기하게 됩니다.

 

어쨌든 첫 번째, 뭔가 다른 대상들을 보면은 그 대상에게 뭔가를 자꾸 베풀어줄려고 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라는 거라. 그럼 굉장히 행복해. 그게 다른 사람에게만 베풀어줍니까? 자기 자신에게도 베풀어야 되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한 것들이 오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는 스스로 자꾸 해야 되는 거라.

법을 듣는 게 이익이 있다 할 거 같으면 법문 듣는데 자주자주 가야 되는 거고, 수행하니까 행복해진다 할 거 같으면 수행을 자주자주 해야 되는 거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이익과 행복이 있는 것들을 자꾸 베풀려고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법에 들어맞는 행동들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에 맞는 행동을 하라 하는 겁니다. 법에 맞는 행동을 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나쁜 쪽으로는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경전에 그런 내용이 있죠?

「법이 나를 보호하고, 내가 법을 보호한다.」 들어봤어요? 법이 나를 보호할려면 또는 내가 법을 보호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법에 맞게끔 살면 됩니다.

 

가끔씩 스님도 처음에 태국가서 수행을 할 때 내 주위에 신장들이 있는 것을 참 많이 봅니다. 어떨 때는 신장이 애기 같이 쪼맨했다가 어떨 때는 산만큼 크게 되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그럴 때 자기의 마음을 딱 들여다보면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 현상들을 알아차리고 그럴 때는 보면 그 신장이 굉장히 큽니다. 딱 나를 보호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다른 스님들하고 히히덕거리고 이렇게 놀고 있고 이럴 때 마음을 보면 마음이 들떠있거든. 들떠있을 때 내 주변을 보면 그 신장들은 쪼맨해.

신장들이라는 게 마음의 작용에 인해서 그 신장이 나를 보호해 주기도 하고 보호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겁니다.

 

신장이 클 거 같으면 내가 만약에 어려운 일을 당하고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할 거 같으면 그 신장들이 보호를 해주는 거라. 그런데 그 신장이 작으면 나보다 힘이 작으면 나를 어떻게 보호해 줄 거라? 보호할 방법이 없는데.

그래서 가끔씩 법회에 다니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들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을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도 나쁜 일을 당하지 않는다."

물론 남한테 욕을 먹기도 하고 돈을 잃기도 하고 그렇게는 하겠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 거라. 내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해서 있는 그대로 대상들을 알아차려 나가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실제로 스님도 고속도로를 다니다 보면 그런 일을 많이 당합니다. 이렇게 도로의 흐름들을 보다가 보면 앞에 틀림없이 사고가 나겠다 하는 느낌들이 딱 옵니다. 그러면 그 차선으로 안 가고 가쪽 차선으로, 아니면 천천히 가다보면 딱 맞아요. 앞에 바로 앞 차까지 꽝꽝 하는 거라. 나는 피해가지고 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내가 오던 차선으로 그냥 오다 보니까 자기는 거기 가서 받는 거라. 내 혼자서 유유하게 빠져나오는 거라. 그것뿐 아니라 급작스럽게 뭔가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은 피해가는 거라.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걸 공업이란 그런 얘기들을 쓰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은 자신의 힘이 약할 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들에 같이 휘말려들어가는 것이지 자신이 힘이 있을 거 같으면 그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스스로 만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뭔 일을 당하고 쉽게 말하면 갑작스럽게 내가 암에 걸린다, 갑작스럽게 내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다, 아니면 갑작스럽게 벼락이 떨어져서 내가 맞아 죽는다, 이런 일은 없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신장이 당신을 보호했다. 그럴 겁니다.

그 신장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알아차림의 강도입니다. 알아차림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런 것들은 피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보호를 받는 거라.

 

법에 따라서 법에 맞게끔 살아갈 거 같으면 그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지 않을 거 같으면 법은 여러분들을 보호를 해주지도 않을 뿐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법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안 좋은 일 당하고 슬픔에 빠져버리고, 그렇게 해가지고 뭔 법을 보호할 거라? 보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항상 하라는 거라. 법에 맞는 행동들, 법에 맞게끔 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입니다.

물론 법에 맞게끔 하는 것들 열 가지를 쭉 예를 들어놨습니다. 그건 다음에 하도록 하고, 일단 그것이 주 테마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법에 들어맞는 행동들을 하라.

 

그다음에 세 번째, 친족들을 외호하도록 하라.

쉽게 얘기하면 여러분들의 가족들, 가족들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밖에 나가서는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밖에 나가서는 잘못하는데 가족들한테 와서는 지극정성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둘 중에 어떤 걸 택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볼 거 같으면 가족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밖에 가서 잘해봐야 그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남입니다. 나와 같이 살을 섞고 평생을 같이 가야 되는 사람들은 내 가족입니다. 가족들한테 잘못하고 다른 것들 잘해봐야 그건 헛깨비 잡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여기 올 때도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아침에 가족들 밥도 안 주고 스님 도시락만 싸가지고... 그건 뭐야? 밖에만 잘하고 안에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차라리 스님 도시락을 안 쌀지언정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진짜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밥을 하고 밥을 먹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항상 접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게 될 때 나에게는 행복함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설혹 그게 나를 애먹이는 애물단지라고 하더라도, 자식들을 애물단지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애물단지라고 하더라도 그거는 자기가 애물단지든 간에 나에게 애물단지가 아니면 돼. 나는 최선을 다해서 자애를 가지고 그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돌보게 될 때 그 애물단지는 보물단지로 바뀌게 된다는 거라. 똑같이 내가 애물단지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 애물단지는 안 바껴.

그래서 친족, 자신들의 가족과 친족들에 대해서 보호하고 애정을 가지고 자애의 마음을 항상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걸 해야만이 자연스럽게 밖에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거꾸로 됐을 경우에 밖에 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익을 위해서 아니면 나의 자리를 보전을 위해서 그런 것들에 매여서 잘하는 겁니다. 그거는 헛깨비입니다. 그거는 언제든지 날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잘해보면 뭐 하노? 그거 나중에 또 바뀌게 돼있는데.

그런데 가족까지 등한시한다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설 자리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든든한 집이라는 버팀목이 있어야만이 자기가 설혹 밖에서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버팀목으로 해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 바람불면 넘어갈 것들을 버팀목으로 해가지고는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에 올 때는 가족들한테 따뜻한 밥 해주고, 그러고 나서 스님 공양도 준비해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법을 위해서 또는 수행을 위한다고 하지만 가족을 불편하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들입니다.

가끔씩은 일주일 수행 들어가야 된다. 그럴 것 같으면 일주일치 반찬 해놔놓고 그리고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놔놔놓고 나서 가족들한테 나 이렇게 해놨으니까 나는 일주일 동안 가서 엄마 지신을 위해서 수행해도 되겠는가 했을 때 가족들이 “아, 그래 갖다오세요” 이랬을 때 가는 것이지 가족들 다 반대하고, “당신 없으면 뭐 우짜라고” 이렇게 할 것 같으면 그럼 차라리 집에서 일주일 수행하는 것이 낫다는 거라.

 

수행의 장소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수행의 장소이고, 여러분들의 몸이 수행의 장소입니다. 장소만 따로 찾을려고 할 거 같으면 항상 핀트가 잘못되게 됩니다. 나중에 오후 시간에 수행에 대한 얘기를 하겠지만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장소, 그다음에 행위, 이런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 바로 수행의 대상이고 수행의 장소이고, 수행할 때 일어나고 알아차리는 것들을 해야 될 대상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꼭 멀리 가서 고요하게 있는다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게 여러분들에게 병을 가져오게끔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님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저놈 또 버마병 걸렸다 그럽니다. 때 되면 버마 갔다오는 거라. 몇개월씩. 갖다 오면 뭔가 도와 과를 얻어오든지 뭔가 성취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없어. 별반 차이나는 것들도 없어. 처음에는 차이나는 것이 보이는데 한 일주일만 지나면 도루묵이 되는 거라.

얼마 전에 우리 선원에 스님 시봉하는 남자애가 마헤시라고 하는 애가 하나 있습니다. 버마를 갔다왔어요. 갔다오고 나서 지금 한 일주일 됐는데 굉장히 그리워하고 있어요. 다시 또 거기 가고 싶어 가지고. 너무 좋았거든 수행하니까.

니 보따리를 풀어봐라 하니까 별거 없어. 그런데 그 병에 걸려있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가 뭔가 돈을 또 모아야 되겠다는 거라. 뭐할건데? 그러니까 모아가지고 또 버마 들어갈려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 그래도 병은 걸리지 마라.

거기 갔으면 거기서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뭔가를 얻어가지고 와야되는 것이고, 얻어왔을 거 같으면 적어도 다시 거기 갈려고 하는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는 거라. 이 자리에서 얼마든지 내가 그와 같은 것들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안 해오면 거기 가서도 얻어오지도 못하고 와서는 거기 그리워해갖고 고기 또 가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해마다 때가 되면 거기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좋고 싫음에 끄달려 들어가는 거라. 그럼 또 거기 가야 되는 거라. 못견디는 거라. 여기 있으면. 십년이 아니라 백년을 그렇게 해도 별 의미없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병이라는 거라.

 

집중수행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집중을 수행해서 딱 힘을 얻어와야 되는 것이지 거기 가서 얻어오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편안하게 있고 좋았다. 좋은 것만 하면 그거 뭐 할 거라? 오면 이 화탕지옥에 같이 살고 뭉쳐 살아야 되는데. 그 화탕지옥에서도 항상 마음을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는 와야 될 거 아니라.

물론 그게 안 되니까 자꾸자꾸 가서 한다고 하지만 그래서 집중수행은 일정한 부분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꾸 힘을 얻을려고 하는 부분은 필요한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다른 것을 다 팽개칠 만큼 그리고 욕을 먹어가면서 거기 갈 정도는 아니라는 거라.

대상은 항상 여러분들 몸과 마음입니다. 여러분들 있는 장소가 바로 수행의 장소가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라.

어떠한 경우든지 남에게 비난받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수행도 전혀 안 해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동남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가지는 게 뭐냐면 남에게 비난받는 일들은 안 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남에게 간섭해가지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거 같으면 간섭조차도 안 할려고 그럽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방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차라리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지지고 볶고 싸울 바에야 차라리 나는 비난받지 않는 행위를 하겠다는 거라.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은 거기는 더운 나라이니까 생각이 뭐냐면 집에, 집 앞이라든지 이런 데다가 물이라도 떠다놓을려고 하고,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걸 마실 수 있도록 하고, 그리고 나무라도 한그루 심어가지고 사람들이 그늘진데 쉴 수 있도록 하고, 그런 것들은 참 잘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비난받지 않는 행위라는 거라. 적어도 그거 누가 누릴지는 몰라도, 누가 물을 떠먹고 누가 나무그늘에 쉴지는 몰라도 그거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할 일들만 하고 있는 거라. 그게 비난받지 않는 행위라고 보면 됩니다. 그거 해놓는다고 그걸 비난할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거라.

또한 계를 자꾸 지킬려고 그럽니다. 어떨 때는 어기기도 하고 하더라도 그다음에는 내가 돌아서고 나면 아, 내가 계를 또 어겼다. 다음에는 안 해야지 하고 계를 자꾸 지킬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비난받지 않는 행위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비난받지 않는 행위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적어도 마음이 불행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부처님이 얘기한 세속생활 하면서 그래도 행복해지려면 적어도 이 네 가지는 생활화되도록 하라 하고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적어도 그게 생활화되면 그래도 행복해지는 쪽으로 자꾸 뭔가를 하게 되고, 설혹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불행에 빠지는 일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하냐? 첫 페이지 하고 그냥 시간이 다 가버렸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또 배움이 없는 사람은 ‘아, 내 탓이다’ 자신의 탓으로 하고. 자기 탓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탓도 아닙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자기 탓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탓도 하지 않고.

 

행복과 불행은 자기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에 자기 탓을 해서 불행에 빠질 일도 없는 거고, 남의 탓을 해가지고 그렇다고 불행에서 벗어나지지도 않습니다. 그 부분을 분명하게 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일에 휩쓸리지 않고 내 마음은 항상 평온하고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상태를 자꾸 유지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읽어보십시오.

항상 세속적인 일들로써 행복과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