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가르침 확립의 방법 4가지(야나와 사사나) (20141024) 붓다야나선원 개원법회

담마마-마까 2021. 3. 30. 09:29

https://youtu.be/Pj56BwokZ48

* 가르침 확립의 방법 4가지(야나와 사사나) (20141024) 붓다야나선원 개원법회

(8:48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테라와다 불교가 태동되고 나서 올해가 꼭 6년째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니까 그래도 6년 기간 지나면서 스님들이 법을 설할 자리들이 그래도 곳곳에서 생겨나고 정 안되면 남의 집살이를 해가면서까지 그래도 법을 설할려고 그렇게 해왔던 것 같습니다.

 

'담마눅카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을 설할 조건을 갖추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법을 설할 조건들은 스님들이 법을 설할 자격을 갖추기도 해야 될 뿐아니라 또 법을 들을 사람들도 모여야 되는 거고, 들을 공간들도 있어야 됩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여기 대구든 공간도 다 자기 건물 아니고 남의 거 빌려가지고 하고 그리고 공간도 협소하고, 또 법을 설하는 스님들도 아짜리야라는 그런 자격을 갖추고 법을 설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연륜이 되고 또 법을 설할 자격이 어느 정도 갖추었다 싶으면 설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것도 좀 미흡하기도 하고, 테라와다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법을 설하다 보니까 이상하게 재가자들도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단 하나 그런 것들이 다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자평하기를, 그래도 '담마눅카야'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바른 법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설했던 법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위안을 삼게 됩니다.

물론 그래서 6년 지나면서 아, 그런 법을 설할 조건들을 갖춘 것에 대해서는 진짜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 상가 스님들이 다 똑같이 그렇게 마음을 먹을 겁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 그러다 보니까 부산에도 남의 건물이지만 선원을 하고 있고 그 선원은 일체 제사나 기도나 이런 거 안합니다. 그냥 위빳사나 수행하고 법문 듣고 그게 외에는 일절 안 합니다. 서울도 마찬가지고, 또 다른 곳들도 여기 전주도 마찬가지고, 그냥 순수하게 해나갑니다.

사실은 사원이라는 것은 제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해야 재정이 돌아갑니다. 그럼 그 재정은 어디서 메꿀 거야? 스님들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거고, 그래서 재가자들이 그걸 십시일반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자꾸 모으게 됩니다.

그걸 '빳자야눅카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재정적인 지원을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와중에 여기 대구도 석화행보살을 비롯해서 여러 재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이걸 운영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재가자들이 운영하는 것이 없으면 그냥 이것도 혼자 다 해야 됩니다. 어쩔 도리가 없어. 그렇다고 해가지고 테라와다의 원칙을 어겨가면서 기도하고 제사하면서 이것을 유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스님들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은 분명하게 구분이 됩니다.

 

스님들은 딱 두 가지만 합니다. 법을 설하는 것하고 수행지도 하는 거 그리고 자기 수행하는 거. 자기 수행하는 거하고 법을 전하는 거 외에는 일절 안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붓다야나 선원 개원 때도 여기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체 신경조차도 안 씁니다.

돈을 만질 생각도 없고, 마찬가지로 여기 스님들이 머문다고 해가지고 보시금 주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일절 그거 없습니다. 단지 스님들이 현대사회다 보니까 그래도 돈이 필요하고 어디 차비라도 쓰고 이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이렇게 탁발이라는 것을 하면서 스님들이 그 용돈들을 마련하는 거라.

여기 불전함에 들어가고 그다음에 회비로 내는 거 스님들 일절 터치를 할 수가 없어. 그것은 이 선원을 운영하는 자금으로 쓰여야되기 때문입니다. 이 선원이 없으면 스님 법도 설할 곳이 없을 뿐 아니라 스님이 거주할 공간들도 안돼.

 

그래도 그걸 그래도 6년간 부산, 전주, 서울, 뭐 어디 이런 데서 줄기차게 재가자들이 그걸 담당을 해왔다는 거라. 어떨 때는 스님도 참 안타까워. 그걸 보면서. 저 뭐 가정형편들 뻔한데 그 건물들 빌려가지고 이렇게 유지하는 걸 보면 참 대견하다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다보니까 스님들도 괜히 딴짓도 못하는 거라. 가지고 있는 돈도 없기 때문에 딴짓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렵게 선원들을 운영하는 것들을 보면서 아, 참 그래도 내가 저기 머물면서 법을 설해주어야 되겠다.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여기 대구 붓다야나도 앞으로 이 두 가지는 꼭 갖추어야 될 겁니다.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또 보시로 인해서 이것을 운영해나가야 될 조건을 갖추어야 될 겁니다.

그래서 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상가 스님들이 누구든지 와서 머물 수가 있어야 되고, 상가 스님들이 누구든지 편안하게 여기서 밥을 먹을 수가 있어야 되는 거라.

여기 오늘은 보니까 탁발을 했는데 음식물이 별로 없어. 그럼 스님들이 원칙대로 할 것 같으면 요거 가지고 밥을 먹을려면 오늘 좀 힘이 드는 거라.

왜? 직접 스님들이 조리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지 못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스님들이 여기서 머물려고 할 것 같으면 많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한끼입니다. 열두 시 전에, 열한 시나 열한 시 반 되어서 스님들 공양 올려줄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기 스님이 머물 수가 있는 곳이 되는 거고, 그래야 스님들이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들이 되는 거라.

 

지금 당장은 매주 금요일날 법회를 시작하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내가 시작을 하겠지만 매달 한 번씩 스님들은 상가회의를 여기서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매달 한 번씩 상가 스님들이 한 열명씩 여기 오기로 되어있어요. 그러면 똑같이 탁발하고 스님들을 먹여살려야 되는 거라.

그럴 수 있겠어요? 대구에서? (수행자 모두 : 네!)

안되면 우리 다른 데 가지.

그런데 참 좋은 조건이 스님들이 편하게 담마에 대해서 토론하고 또 머물 수 있는 공간이 2층에 확보가 돼 있다는 게 그나마 참 다행입니다.

 

이렇게 확보돼있을 때는 당연히 스님들이 머물 조건들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머물 조건이 되면 법을 설할 때도 만날 나만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고 인제는 돌아가면서 설할 수가 있는 거라.

물론 금요일 날은 내가 법을 설하고 수행지도를 하겠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모일 때는 또 내보다도 더 뛰어난 스님들이 법을 설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맛의 법을 들을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달 한 번씩 할 때는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미리 준비를 해가지고 법을 설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거 하나는 약속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들도 하나 약속을 해야 돼.

스님들이 편안하게 거주할 공간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수행자 모두 : 네!) 진짜? (수행자 모두 : 예!)

그럴 거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고 그럴 겁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났는데 왜 다툼이 없겠어? 그리해도 항상 그 생각들을 하십시오.

아까 공양 올릴 때 뭔 말하고 공양 올리라고 그랬어요?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자요 호뚜 그렇게 합니다.

'내가 이런 공양 올리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닙바나 열반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올리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열반으로 나아가고 있는 길인가 아닌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다툼을 하고 있는 게 이게 깨달음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생각을 하면 됩니다. 다퉈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욕심부려가지고 또 '나'라고 하는 걸 내세워가지고 해탈에 이를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자기는 중단해야 됩니다.

그게 나를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게 하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다가가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목적에서 벗어난 거라.

 

이 선원이 존재하는 목적이 그겁니다.

뭐 단순히 그냥 경전 배우고 수행 조금 하기 위해서? 거 어디다 쓸 거라?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하고.

또 그 경전 공부한 것이 일상생활화 되지 못하면 그거 어디다 쓸 거라?

배운 것들은 실천이 되어야 되는 것이고, 실천된 것들은 내가 경험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스님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목적에서 벗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중단을 하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할 거라고 보고 인제 법을 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선원 이름이 뭡니까? (수행자 모두 : 붓다야나 선원입니다.)

붓다야나(Buddha yāna)! 붓다(Buddha)는 알죠? 야나(yāna)는 뭡니까?

(수행자 대답 : 지혜)

예? 지혜? 지혜가 무슨 야나에요? 아, 그거는 야나(yāna)가 아니고 냐나(ñāṇa).

여기 보니까 저기는 빤냐가 돼야 되는데 빤야로 돼있어요. 빤야가 되면 다른 의미가 돼버립니다. 빤냐(paññā) 할 것 같으면 지혜(智慧)가 되는데, 아마 스님 법명이 좀 어려우니까 잘못 쓴 것도 있겠지만은, 냐나하고 야나하고는 다릅니다.

여기는 붓다 냐나(ñāṇa)가 아니고 붓다 야나(yāna)죠? 그렇게 돼있을 겁니다.

그래서 야나(yāna)라고 할 때는 보통 그걸 수레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대승불교는 뭐라 그래요? 마하야나(Mahāyāna)라고 그러죠? 거기도 야나, 똑같은 야나(yāna)입니다. 마하(Mahā)가 크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큰수레(大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실은 야나(yāna)라고 하는 것이 수레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수레도 해당이 됩니다. 오늘 스님이 부산에서 여기 올 때는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가지고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여기에 왔습니다. 그러면 그 기차도 나를 운반해줬으니까 태워주는 탈 것들이었고, 그 택시도 나를 탈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도 야나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운반해주는 수단을 얘기를 하긴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야나의 원래의 뜻은 그런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에 걸어서 여기 대구에 왔을 거 같으면 아마 오늘 중으로 못왔을 거라. 그런데 ktx를 탔으니까 금방 40분 만에 여기까지 옵니다.

나의 능력보다도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가지고 여기 태워준 거라. 쉽게 말하면 야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능력이 없으면 그건 야나라고 안 해. 내보다도 더 늦게 갈 기차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거 탈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야나(yāna)라고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나를 열반으로 인도해주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탈 것'들만 '야나'라고 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야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하게 탈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누가 합니까? 여러분들이 직접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하나의 탈 것이 됩니다.

부처님도 존경할 대상이 되고,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고, 우리 같은 상가 스님들도 여러분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법을 설할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탈 것일 뿐입니다. 동대구역에 올 거 같으면 나는 기차를 버려야 돼. 그러면 택시를 타야 되는 것이고, 또 택시 가지고 법당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으니까 이까지 오면 택시도 버려야 되는 거라.

부처님이나 부처님 가르침이나 상가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붙잡고 있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태워주고 나면 당연히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까지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야나가 뭐가 있겠어요? 스님이 여기 도착했으면 어떻게 해야 돼? 내 발로 걸어들어와야 됩니다. 내 발로 걸어들어와야 부처님을 볼 수 있고 여러분들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야나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수승한 야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

그것이 야나의 원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오면은 뭐 화난 일이 있어도 화를 여러분들이 제어해야 되고, 또 내가 욕심부릴 일이 있어도 욕심을 제어해야 되는 것이고, 불편한 것이 있어도 그거를 제어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스님들이 필요하고 이 법당이 필요한 겁니다.

인제 붓다야나 뜻 알겠죠? (수행자 모두 : 예!)

 

물론 여러분들에게는 마음에 안 들지는 모르겠습니다. 붓다야나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 말이 너무 어렵다고 그렇게 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야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그 야나를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안 되면 우선에는 부처님에 견주어가지고 부처님이 이걸 했다 할 것 같으면 나도 따라하면 되고, 부처님이 이거 안 했다 할 것 같으면 나도 안 하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기준으로 삼아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그런 선원이 됐으면 하는 그런 바람으로 붓다야나(Buddhayāna)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여기 옆에 계신 스님 이름이 뭐라고 그래요? 사사나 스님.

아마 스님들 이름 중에 최고 흔한 이름이 사사나일 거라. 사사나난다, 사사나 뭐 어쩌고 하여튼 사사나라는 이름은 이게 남성형으로도 쓰이고 여성형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여성에게 법명을 줄 때도 사사나라는 이름을 주기도 해요.

그 정도로 흔한 이름입니다.

사사나(sāsana)는 보통 우리가 가르침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나라고 하는 것은 여기 있는 스님보고 사사나라고 얘기는 안 합니다. 왜 그럴까?

또는 여기 붓다야나 선원을 두고 사사나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스님은 사사나를 전하기 위한 사람일 뿐이고, 이 건물도 사사나를 전하기 위한 건물일 뿐입니다. 그럼 사사나는 원래 그 뜻이 아니라는 뜻이라.

쉽게 얘기하면 아무리 이 선원이 잘 돼가지고 사방팔방으로 이름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게 사사나를 견고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거라.

여기 있는 스님들이 이름이 나가지고 방방곡곡, 오늘도 뭐 촬영을 해쌌대? 그래가지고 뭐 유튜브에 올린다? 그런다고 해서 사사나가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사사나(sāsana)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확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째 확립시킬까? 이런 스님들이 있고, 또 이런 건물이 있으면 사사나를, 그러니까 가르침을 접하기가 참 수월한데, 어떻게 해야 그 사사나를 확립을 할까? 어쩌면 좋겠어요? 잘 먹고 잘 자면 돼요? 법문 잘 듣고 수행 잘하면 되겠죠?

항상 여러분들은 마음속에 새겨야 됩니다. 이 선원의 이름이 안 나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선원이 설혹 가난해가지고 문을 닫아도 괜찮습니다.

한사람이라도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따르는 사람이 생겨나버리면 그거는 사사나가 확립이 돼버립니다.

저도 목표가 있습니다. 이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만들어지면 아, 나는 그래도 대구 붓다야나 선원에 와서 참 잘했다 하고 스스로 위안거리를 삼아야 되는 겁니다.

 

경전에 근거해서 그 사사나(sāsana)가 확립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 경전에서 네 가지로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첫 번째, 사사나를 구토약으로 만들어라.

 

오늘 점심 여기서 잡숫게 될 겁니다. 준비한 분들이 모르긴 해도 오늘 개원법회에 사람들도 좀 많이 오고 할 거니까 여러 가지 물품들도 공양 올릴려고 준비도 하고, 밥도 좀 맛있는 거 할려고 하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이 수건을 이렇게 주면 하나 안 가져가고 두 개를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고, 밥을 먹어도 맛있으면 가득 먹습니다. 나중에 수행 못할 정도로.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토해내야지 뭐 별 수 있나?

자기 몫은 하난데 하나 이상을 가져갈 거 같으면 반드시 하나 이상의 값어치를 해내야 됩니다. 그 과보를 분명히 받게 됩니다. 밥도 많이 먹으면 내가 많이 먹고 나면 꽉 차고나면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게워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몸이 소화할 방법이 없어.

 

물건과 밥도 이와 같은데 여러분들은 게워내야 될 게 얼마나 많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토해내야 될 거 아마 잔뜩 있을 겁니다. 이 중에서 내가 살아오면서 나쁜 일보다 좋은 일 많이 했다 하고 생각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플러스 마이너스 한번 따져보자. 아마 모르긴 해도 나쁜 일을 훨씬 많이 했을 거라. 그럼 나쁜 일 플러스 마이너스 해가지고 나쁜 일이 더 많으면 그마만큼 여러분들은 토해내야 될 것이 더 많은 거라. 플러스 시켜야 될 것이 훨씬 많다는 얘기라.

 

그런데 지금 내가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토해내야 될 걸 또 하도록 내버려 둘 거라? 남들이 안 본다 해서 내가 수건 하나 더 가져갈 거라? 그거 나중에 어떻게 다 토해 낼라고?

과보라고 하는 것은 1:1로 와닿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보는 훨씬 크게 미치게 됩니다. 특히 마이너스들은 플러스보다도 훨씬 더 빨리 앞당겨집니다. 과보가.

훨씬 크게 미치게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도 보름에 한 번씩 머리를 깍습니다. 머리를 깍을 때마다 머리를 만날 이렇게 만져요.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내가 지금 출가생활 지금 잘하고 있나? 어떨 때는 보름에 한번씩 깍으니까 이번 보름 동안은 괜히 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법문도 빼먹고 어떨 때는 앉아서 수행해야 되는데 그냥 조불고 막 이런 것도 있고 그렇거든. 그럼 그때마다 아, 내가 참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해야 되는데 하면서 머리만지고 있습니다. 왜? 그 과보가 두려워서.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항상 구토제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나에게 유익한 것들은 더욱 더 받아들여야 되지만, 유익하지 않는 것 탐진치를 일으키는 것들은 빨리 뱉어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걸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는 매주 금요일마다 탁발을 할 겁니다. 부산에서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탁발을 할 때 제발 스님들 먹을 걸 좀 갖다주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안 갖다줘요. 부산도 마찬가지고 다른 데도 마찬가지고, 꼭 봉투에 돈 넣어가지고 그것 가지고 스님 사 잡숴라고 합니다. 버릇 이상하게 들이고 있는 거라. 스님들 버릇을.

스님들은 돈이 생기면 안됩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 이상 있어서도 안 되고 그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들이라. 그럼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돼.

그럼 나머지는 스님들이 먹을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되는 거라.

어쩌다 그리 빠졌노?

 

어쨌든 스님들도 항상 탁발을 할 때는 아, 내가 이거 먹는 것에 대해서 항상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 가르침 따라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 탁발을 받습니다. 공짜로 안 받을려고.

당연히 누려야 될 권리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토해내야 될 탐·진·치를 없애기 위해서는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없애면 될까? 예를 들어봅시다.

 

불교 수행법 중에 붓다눗사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아니면 부처님을 회상하면서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들입니다.

붓다 아눗사띠를 줄여서 붓다눗사띠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 보고, 여러분들 잘하는 거 있잖아? 석가모니불이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그걸 일념되게 쭉 합니다.

또는 여러분들이 잘 하는 것 중에 멧따바와나 라는 게 있습니다.

아,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하고 이렇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또는 나에게는 언제든지 죽음이 다가온다.

마라나눗사띠를 해서 아, 그래서 나뿐 아니라 누구든지 죽음을 맞게 돼있다. 그래서 집착할 게 뭐가 있노? 하는 생각을 일으켜주고 하는 마라나눗사띠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다음에 아수바바와나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아, 이 몸은 참 부정한 것이다. 머리카락 때 봐봐. 비듬이 있고 기름끼 있고 참 더러운 것이다. 머리카락부터 해가지고 몸 전체를 쭉 그렇게 훑으면서 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토해내는, 그걸 토사제라고 그래야 되나, 뭐라고 그래야 돼? 그냥 토사제라고 합시다이. 토사제로써는 참 유용하게 쓰여지는 부분입니다.

계·정·혜(戒定慧)를 확립시킬 수 있는 것 중에서 정(定)을 확립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네 가지 수행입니다. 이걸 보통 우리가 뭐라고 그러느냐면 "예비적인 수행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계행이 확립돼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토해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테라와다 불자들은 오계를 지켜야 되는 거라.

그래서 계행이 확립되고 이 네 가지 수행들을 열심히 하고 나면 계(戒), 정(定)은 확립이 돼.

그럼 혜(慧)는 어디서 확립을 해야 될까?

여러분들이 직접 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번뇌들이 일어나지 못하게끔 만들고, 번뇌를 빨리 사라지게끔 만드는 것.

여기는 그런 토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려면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또 실천해나가야 됩니다.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데 가면 “스님, 오계 설하지 않고 그냥 바로 위빳사나 가르쳐주면 안될까요?”

그러니까 지혜 쪽만 할려고 하는 거라.

계(戒), 정(定)이 확립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혜가 어떻게 일어날 거라?

“스님, 그냥 순수 위빳사나만 해주면 안될까요?”

지금 마음집중도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순수 위빳사나가 될 거라?

살아가는 모습들이 남에게 비판 받으면서, 남들에 대한 배려들도 없이, 계행을 잘 지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수행한다고 할 거라?

계·정·혜는 항상 맞물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 와서 그런 얘기 할 것 같으면, 아예 그런 얘기하지마!

나는 이 원칙대로 여기서 가르칠 뿐이라. 계를 가르칠 때는 계를 가르칠 것이고, 정을 가르칠 때는 정을 가르칠 것이고, 혜를 가르칠 때는 혜를 가르칠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고루 받아들이고, 그것을 고루 배울려고 하고, 그걸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경험상으로 봤을 때 이것이 고루 가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비끄러집니다. 아만심이 커지든지, 아니면 남을 무시하든지, 아니면 자기는 개차반으로 살아가면서 뭐 수행 뛰어나다고 한다든지, 항상 그러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것은, 계·정·혜는 항상 똑같이 갖춰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구토제로써 사용했을 때 가능한 겁니다.

 

경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붓다수붓다따, 담마수담마따, 상가수상가따"

"바른 부처님, 바른 가르침, 바른 상가여야만이 사사나는 확립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사나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등불로 삼아야 되는 것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등불로 삼아야 되는 것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인 것이지, 왜곡되고 편협되어 있는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등불로 삼아야 되는 것은 바른 상가여야 되는 것이지 개인의 뛰어난 스님 하나 가지고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상가는 그마만큼 위대한 겁니다. 담마도 그마만큼 위대한 거고, 그래서 붓다도 위대한 거고.

그래서 그걸 바른 붓다·담마·상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바른 붓다·담마·상가일 때 이 사사나가 '사사나 삼빳띠(sāsana sampatti)' 라고 해서 '사사나가 구족되어진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흡족하게 채워진다' 하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사나를 채우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되는 것은, 그 사사나는 반드시 구토제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계를 확립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네 가지 예비수행도 반드시 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도 해야 되는 것이라.

 

그다음에 두 번째, 사사나는 설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하고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예. 똥싸는 얘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들하고는 별 관계없습니다.

실제로 수행을 해서 어느 정도 지혜가 열리고 도와 과에 이른 사람들은 설사제를 금방 이해를 하게 됩니다.

스님들 간에도 앉아가지고 얘기를 하면 그 사회생활을 할 때 잘한 것들에 대해서 막 얘기를 합니다. 뭐 지금 스님들만 그럴 거 같애요?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 제자들도 그랬어요. 어떤 경우는 아라한인데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왜 그럴까? 또는 수다원인데, 불환과에 이르는 성자인데도 그런 얘기를 막 합니다. 이미 번뇌가 소멸되고 꺼져버리고 없는데도 그런다는 거라.

 

그걸 경전에서는 뭐로 비유를 해놓느냐면 나무를 태워 숯덩이가 되어있잖아요. 그러면 나무가 다 타고나면 다 타고나도 불은 분명히 없는데 온기가 남아있다는 거라. 또는 불은 이미 꺼져있는데 숯은 아직 따뜻해서 그대로 남아있다는 거라. 그래서 현명한 사람일 거 같으면 그걸 어떻게 해요? 내가 여기 있지 않고 다른 데로 가야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재라도 물을 끼얹어야 되는 거라. 아니면 그 나무토막이라도 다 분질러가지고 없애버려야만이 이게 불씨가 남아있지 않게 되는 거라.

내가 도와 과에 이르렀지만 그 습이 남아있으면 그짓 하고 있어요. 내 뭐 잘했니, 뭐 어쩌니, 자랑할려고 한 건 아닌데 그 습이 남아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사실은 설사제로 쓰이는 것은 여러분들하고는 별 관계 없기는 한데, 그래도 간혹 그 도와 과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조그만한 성취한 것 가지고 난리가 납니다. 이 선원이 떠나갑니다. 자기 문답하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또 문답 안 해주면 저 스님 죽일놈 살릴놈 합니다.

그럴 때는 이 설사약과 같이 빨리 빼내버려야 됩니다. 자기 속에 있는 나쁜 것들 그리고 그런 남아있는 찌꺼기들은 빨리 빼낼수록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일반인들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뭔가를 했을 때 자기가 하고도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럽니다. 습관돼왔기 때문에 그게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사실은 잘못된 거는 잘못된 거라. 그걸 잘했다고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여러분들은 빨리 눈치채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습관되어져 있는 것들이 나쁜 습관들이 들어있다. 앉아 얘기만 하면 남의 험담하는 사람, 아니면 앉아만 있을 거 같으면 뭐 얘기만 하면 언성이 높아지면서 꼭 화를 내는 사람, 자기는 몰라. 그런데 습관되어져 있거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업이 안되는 거는 아니잖습니까?

그거 다 업이 되는 것들이라. 그럼 하루빨리 그것들 바꿔야 돼. 인간 개조해야 돼.

습관지어진 것들이 바른 방향이 아닐 거 같으면 빨리 바꿔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빼내는역할을 하는 것이 이런데 와서 자꾸 법문 듣고 수행하고 그리고 도반들하고 어울리면서 화합하고 하는 법들을 배우고.

 

그다음에 또 부처님의 가르침 사사나라고 하는 것은 독약과 같이 사용하라. 합니다.

 

독약은 먹는 즉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를 만큼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부산에 있을 때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말을 할 때는 방사능이 유출되는 것으로 생각하라. 그냥 나는 한마디 뱉었지만 방사능이 유출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두고두고 그것에 피해가 남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 어떤 한마디가 10년 20년이 가도 여기 가슴에 멍울이 져 있는 거라.

말만 그렇겠어요? 행동하는 것도 그럴 것이고 마음에 뭔가를 원한심이든 뭐든 품고 있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여러분들이 독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죽이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독을 먹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오죽했으면 부처님이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이 생각하라고 그랬겠어요.

 

모든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은 선한 것들이 아닐 경우에는 나머지 것들은 전부 독약을 마시는 거와 같다고 생각을 하라. 선한 행위 안 하고 어떻게 살 거라?

그럴려면 일차적으로 해야 되는 것은 나쁜 일들을 안 하도록 하는 겁니다.

나쁜 일을 안 할 뿐 아니라, 내가 행하는 것들이 공덕이 되는 일들을 자꾸 행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나의 마음을 더욱더 증장시켜 줘가지고 해탈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들.

그리고 어떠한 상황이든 내 안에서 내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외부에서 하는 자극에 인해서도 항상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

그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라.

 

한자로 제악막작-중선봉행-자정기의-시제불교라고 합니다.

그렇게 세 가지 하는 것이 시제불교라는 거라.

이것이 부처님의 사사나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사사나를 확립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확립을 해야 된다는 거라.

계·정·혜입니다. 그게 바로!

 

그럴려면 여러분들은 나쁜 일들 나쁜 행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은 나쁜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독약을 마시는 거와 같다고 생각을 하고 반드시 끊어야 됩니다. 사사나는 항상 독약을 마시는 거와 같다는 생각을 하고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목숨을 구하는 약과 같이 사용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을 구할 수 있는 것들은 뭐겠습니까? 보시? 지계? 선정? 아니면 여러 가지 바라밀들? 그게 여러분들을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애요?

구해주는데 도움은 주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조차도 여러분들을 구해주지 못하는데 나머지 것들이 여러분들을 구해줄 수 있을 거 같애요? 목적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를 행하는 것은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것도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모든 것들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기 위한 것이지, 그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벗어날 때는 반드시 자기가 중단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가끔씩 스님한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뭔가 보시를 해줍니다. 그럼 스님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날 그것만 먹고 있을 수가 있나? 어떨 때는 요마만큼 쌓여져 있습니다. 어떨 때는 다른 사람한테 주기도 하고. 그럼 준 사람이 꼭 물어봅니다.

“스님, 그거 다 드셨어요?”

“안 먹었는데.”

“왜 안 먹었어요?”

아니, 기껏 보시해놔 놓고 꼭 그러고 있다니까.

보시한 목적이 뭔데? 무엇 때문에 보시했어요? 공덕 쌓는 건 당연한 거고, 공덕 쌓는 건데, 그 공덕 쌓고 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잊어버리니까, 내가 보시한 거 안 드시니까 섭섭한 거고, 그거 남 준거 섭섭한 거고, 아마 이것도 탁발도 계속하면 그리 되겠지. 꼭 탁발하고 나면 누가 와서 이렇게 밥 먹는 거 지켜봅니다. 자기 거 먹나 안 먹나.

보시한 것은 닙바나에 이르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거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잘한 일도 그렇게 하는데 그 나머지 일들이야 말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명예를 바라고, 이익을 바라고, 여기서 돈 많이 생기면 뭐할 건데?

누가 운영 잘한다고 아, 석화행보살 무슨보살 아, 참 훌륭합니다, 잘합니다, 어깨 으쓱해지면 뭐 할 건데? 어디다 쓸 거라? 그거. 필요없는 것들입니다. 좋은 것들도 잘하는 것들도 해탈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인데 나쁜 것들은 더더구나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네 번째 여러분들 목숨을 구하는 약입니다.

 

여러분들을 구하는 것은 그겁니다.

이렇게 4가지, 사사나를 쓸 때는 이런 용도로 써야됩니다.

알겠습니까? (수행자 모두 : 예!)

 

오늘은 어쨌든 좋은 날입니다. 길상스러운 날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런 도량을 만든 것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그리고 이 좋은 곳에서 나도 인제 수행도 좀 하고 부처님 가르침도 배우고, 그러면서 한번 멋지게 살아봐야 될 거 아니라?

 

자! 오늘은 우리 스스로 다들 잘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익과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해로운 것과 두려운 것들 위험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스님들이 축복게송을 독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이러한 여러 가지 공덕들,

보시한 공덕, 선원을 마련한 공덕, 동참한 공덕, 수행한 공덕,

기타 여러 가지 공덕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이와 같은 인연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고 몸도 마음도 부유로워지며

부처님의 위신력과 담마의 위신력과 상가의 위신력을 입어

어려움이 없이 모든 위험과 장애가 사라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