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 (20150403)

담마마-마까 2021. 10. 30. 09:00

*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람의 습성 (20150403)

 

부처님은 모든 생명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신들이나 범천도 가르침을 청하는 「천인사(satthā devamanussānaṁ)」입니다.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사람들을 닙바나로 이끄는, 행복으로 이끄는, 더 이상 없는 능력을 가지신 「조어장부(anuttaro purisadamma sārathī)」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께서 「병은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아무도 반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계속하여 「병을 완전하게 넘은 상태와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라고 가르치면, 「사회의 소망」과 「붓다의 가르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겨 버립니다. 일반 사회 사람들은 「병을 완전하게 넘은 상태」라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는 완전히 건강한 육체」를 상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육체는 망가지는 것이기에, 육체가 있는 한 무병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병의 경지란 「육체로부터 멀어지는 것, 육체에 집착하지 않는 것, ‘태어남’을 넘는 것」입니다. 「신체는 망가지는 것이다」라는 것이 구체적·논리적인 대답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회 사람들은 신체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신체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붓다는 행복하지 않게끔 괴로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사람들은 망상, 관념, 희망, 신앙, 좋아함, 문화, 습관 등의 감정으로 자신의 사고가 관리되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사고를 「객관적이다」라고 믿거나, 객관적인 사고를 「무책임한 생각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일반 사회의 사고를 왜곡(전도)라고 하시며, saññā vipallāsa(상전도,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여기는 것), ditthi vipallāsa(견전도, 번뇌들과 집착에 의한 견해·의견의 왜곡), citta vipallāsa(심전도, 마음의 기능·인식의 왜곡)를 명확하게 구별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어쨌든 「일반 사회의 사고」와 「붓다의 사고」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수법은 훌륭합니다. 듣는 상대는 아무 저항도 없이 솔직하게 이해해서 납득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개념·사고를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정정합니다. 붓다는 누구의 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아군」이기에, 그 가르침을 모두 인정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현상을 재미있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사기꾼이 와서, 낡고 오래된 옷을 비싼 값으로 강매하려고 시도합니다. 「아무에게나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옷이다. 당신에게 몹시 어울립니다!」 사기꾼의 교묘한 거짓말에 넘어간 맹인은 낡고 오래된 옷에 집착이 생겨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사가 나타나 그를 불쌍히 여겨서 눈을 치료해줍니다. 눈이 나은 그는 색채가 풍부한 세계를 처음으로 봅니다. 그것과 동시에 낡고 오래된 옷에 대한 지금까지의 집착은 사라져 없어집니다. 그는 두 번 다시 사기꾼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붓다가 세상에 대해서 하고 있는 일은 이 좋은 의사와 닮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 찢기 위해서, 괴로움을 행복하다고 오해하는 것을 고치기 위해서, 마음의 고민 괴로움을 없애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연민심과 자애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 중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이끄는 능력에서 붓다와 동일한 존재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부단하게 노력하신 원인은 분명히 「학생들의 능력」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지식인이나 인격자들은 빨리 해탈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있어도,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학문과 인연이 없는 하층민들에게도 설법하시어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왕, 장군, 상인, 농민, 타종교의 출가자들도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신들이나 범천들도 설법을 듣고 조언을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상대를 선택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반 사회의 지식이나 삶의 방법과 거의 맞물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모두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납득이 가도록, 행복에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초월한 진리를, 누구라도 조금의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스승, 지혜의 완성자, 범천·신들의 지도자가 지금도 우리의 옆에 계십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법(담마)이 세상에 있는 한, 붓다는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이끈 기적적인 기술은 지금도 경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교를 배우면 붓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실천하면 붓다의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노력해 봅시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설법하셨습니다. 불제자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집중해서, 의미를 이해하면서, 존경의 마음을 안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는 앉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설법의 감동은 고사하고, 부처님 앞으로 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어떤 이는 아래를 보며 손가락으로 흙을 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나무와 교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 진지하게 설법을 듣고 있던 이들도 있지만, 어떤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난다존자는 경악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에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데, 왜 어떤 이들은 집중할 수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부처님에게 실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불교도이므로 설법을 들을 생각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닫은 채로였던 것입니다.

 

아난다존자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습성이 어떻다고 해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흥미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들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듣지 않는가요?」라는 아난다존자의 물음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난다야!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가 듣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다. 생명은 한량없는 과거부터 잡담만을 들어 왔다. 욕구, 성냄, 무지를 증폭시키는 이야기만을 들어 왔다. 불탐, 불진, 불치의 이야기, 인과율의 이야기는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결국 붓다가 최고의 능력을 구사해 가르쳤다고 해도, 진리에 눈을 뜨는지 아닌지는, 듣는 상대의 그릇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랫동안 성내며 살아온 사람에게 분노를 끊는 것은 어렵습니다. 분노에 빠지는 것은 편하고 자극적입니다. 질투에 익숙한 사람은 개와 고양이에게도 질투합니다. 싫은 소리를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해 주어도 싫은 소리를 말합니다. 옷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은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어도 촌티가 나는 것입니다. 가족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사람은 학교에 가도, 어른이 되어 직장에서 일을 해도 트러블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는 「성격」이라고 하는 습성이 있는 것을 기억해 둡시다. 좋은 성격의 사람도 있고 나쁜 성격의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성격의 사람 중에도, 고치려는 마음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나쁜 성격을 고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강한 인내심으로 굴하지 않고 오래된 나쁜 습성을 새로운 좋은 습성인, 성격을 고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밝은 사람이라면, 「간단하지 않지만, 도전할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성격은 논리, 이성, 이해의 관할이 아닙니다. 만약 이성적이라면 선행을 억지로라도 하면 되는데, 의지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6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신앙형, 사고형, 이성형, 욕구형, 분노형, 무지형입니다.

 

이것은 좋은 성격과 나쁜 성격이라는 분류가 아닙니다. 신앙형의 경우 간단하게 믿고,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다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경향은 있지만, 그것도 또한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대상이 자꾸 바뀝니다. 돈을 믿는 사람, 돈이 없어도 인간관계가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 예술, 과학, 기술을 믿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앙을 하나의 방법으로 확립시키는 사람, 무언가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로 믿는 사람, 잘 모르기 때문에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형」 안에도 사고형, 이성형 등이 나타납니다. 어떠한 성격이라도, 악 쪽으로 향하면 나쁜 성격, 선 쪽으로 향하면 좋은 성격입니다.

 

성격은 이성이나 논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감정의 관할이 됩니다. 나쁜 감정은 번뇌라고도 합니다. 탐․진․치라는 악의 감정으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악감정은 우리의 마음을 침식해서, 성장을 방해하고, 유연성을 없애어 딱딱하게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욕구와 동일한 불길은 없다.」

 

마음에 욕구가 일어나면 마음이 화상을 입습니다. 신체도 화상을 입으면 원래의 모습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음도 욕구에 의해 화상을 입으면 형태를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이 성격이라는 것을 쌓아 올립니다. 「화상」은 문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욕구에 빠지면 사람은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화재이므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사고가 안쪽을 도는 노선으로 폭주해서, 밖의 정보나 조언 등은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분노와 동일한 얽매임은 없다.」

 

욕구와 달리 분노가 일어나면 동작 불능이 됩니다. 화낸 사람은 「체포된 상태」인 것입니다. 마음은 확실히 딱딱해지고, 분노의 대상과 딱딱하게 연결되어, 화낸 상대를 결코 잊지 않게 됩니다. 상대가 싫은데도, 그 싫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 수도 없고, 다른 정보는 들어가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실패해 버립니다. 성장하지 않는 마음은 여윕니다.

 

「어리석음과 동일한 그물은 없다.」

 

무지라고 하는 파괴할 수 없는 그물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올 수 없습니다. 분노보다 더욱 더 움직임이 없어집니다. 화낸 사람은 상대에 대해서 어떻게 공격하면 좋은가 정도는 생각합니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망상에 갇혀서 그 속에서 머리를 회전시키게 됩니다.

 

이 3가지를 가진 사람은 나쁜 성격을 쌓아 올립니다. 이런 성격은 밖의 정보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안쪽을 도는 노선으로 마음이 폭주하고 있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갈애와 동일한 강물은 없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부족하다, 만족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욕구로도, 분노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도 더 살고 싶어 합니다. 싫은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윤회의 원인입니다.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사는 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강물과 같이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려고 해도 또 다시 흐릅니다. 단순하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해도, 다시 태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해도,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획득한다고 생각해도, 생명은 강물과 같이 윤회하며 계속 흐릅니다.

 

● 이번 포인트

 

• 붓다와 동일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 어렵다고 생각해도 불교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 마음의 성장의 방해는 성격입니다.

• 당신의 성격에 맞는 붓다의 말씀은 반드시 있습니다.

• 배우는 사람의 옆에는 붓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