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천법의 방향과 부적합 (야사와 아누사야) (20150417)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어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 빠르게 최종적인 해탈에 이르렀다고 하는 일화는 많이 있습니다. 경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것은 흔한 일입니다. 오히려 드문 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도 해탈에 이르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를 수가 없었던 이유를 경전에서는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만났으면 해탈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실증 할 수 있는(sanditthika, 산딧티까) 것입니다. 또 수행에 일생을 걸고 힘쓸 필요도 없습니다. 결과는 빠른(akāliko, 아깔-리꼬-) 것입니다.
불교는 이 포인트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강조합니다. 절대적인 신이라는 초월한 개념을 신앙해 수행하는 경우는 「지금 여기서 각자에 의해 경험하고 확인된다(dittheva dhamme sayaṁ abhiññāya, 딧테-와 담메- 사양 아빈냐-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일신교의 교리를 참고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또는 그 신을 신앙하는 것으로 영원한 경지에 도달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들이 자주 말하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능력이 한정된 인간에게,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창조주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도 신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논리란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이 주장은 논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또한 명상 등을 실천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이러한 신비 체험이 있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알았다고는 말할 수 없고, 생명으로서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좀 더 노력하면 다른 경험을 체험하거나, 수행 방법을 바꾸면 또 다른 경험을 체험하기는 합니다.
각 종교의 가르침도 여러 가지 각도로 해석·해설하면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시대에 다른 종교인들은 일관해서 영혼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습이 어떠한지 질문받으면, 사람에 따라서 해설은 달리해 버립니다. 그것에 따라 가르침도 바뀌어 버립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가르침에 따라서 명상 체험도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나는 최종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약점을 지켜본 부처님께서는 모든 주관을 내려놓고, 엄밀한 객관성을 가지고 관찰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도, 제자들도, 수행에 의해 동일한 깨달음에 이릅니다.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서 끝냈다. 수행을 완료했다. 이제 더 이상 다시 태어나는 것는 없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립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최종적인 해탈은 애매함, 의혹은 티끌만큼도 생기지 않는, 확실한 경험인 것을 중부경전 소상적유경(Cūlahatthipadopama sutta)으로 논증되어 있습니다.
불도는 결과가 빠르다(akāliko, 아깔-리꼬-)고 하는 것도 강조하는 포인트입니다. 중부경전 22, 대념처경(Mahāsatipatthāna sutta, 마하-사띠빳타-나 숫따)에는 사띠를 실천한다면 7일 이내에 최종적인 해탈(아라한과)이나 불환과의 경지에 이르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명언하고 있습니다.
상응부경전 아쩰라깟사빠 경(acelakassapasutta)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재가자 찟따 거사에게는 아쩰라깟사빠라는 편력 수행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찟따 거사가 살고 있는 마을에 왔습니다. 찟따 거사는 즉시 친구를 방문하여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출가한지 몇 년 지났습니까?」 「3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 30년 동안, 인간을 초월한 성자의 지혜라고 말하기에 적당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어떠한 지혜를 경험하였습니까?」 「아니오,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나체행과 삭발행과 털 뽑기행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현대인이 하고 있는 편한 삭발과는 다릅니다. 머리카락을 한 개씩 뽑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재 등의 가루를 바릅니다. 그것을 월 1회나 2회 실행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찟따 거사는 「너무나 이상합니다! 희유합니다! 30년이나 수행해도 인간을 초월한 성자의 지혜에 적당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아무런 지혜에도 도달하는 일 없이, 알몸이나, 삭발행, 털 뽑기행만으로 끝나는 것인데, 이것을 좋게 설해진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음에 아쩰라깟사빠가 질문합니다. 「거사여! 당신은, 부처님의 재가신자가 되어 몇 년이 지났습니까?」 「나도 30년이 지났습니다.」 「이 30년 동안, 당신은 인간을 초월한 성자의 지혜라고 말하기에 적당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어떠한 지혜를 경험하였습니까?」 「재가자이면서, 나는 뜻대로, 마음을 욕구로부터 떼어 놓고, 불선한 법으로부터 떼어 놓고, 떼어 놓는 것으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대상에 대한 주시(위딱까)와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이 있는 첫선에 도달해 머물고 있습니다. ……제2선, ……제3선, ……기쁨도 즐거움도 넘어 평온함(우뻭카)을 갖춘 제4선에 도달해 머물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부처님보다 먼저 죽는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거사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번뇌를 끊어버려서, 불환과(불환자)가 되어 있다」라고 나를 인정할 것입니다」.
찟따 거사가 이렇게 말하자 아쩰라깟사빠는 「너무나 이상합니다! 희유합니다! 법이 얼마나 좋게 설하여졌기에, 재가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인간을 초월한 성자의 지혜에 적당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지혜에 도달하였단 말인가!
나도 부처님 아래에서 출가하겠습니다!」. 그 후 찟따 거사에 의해 인도되어 부처님의 제자로서 출가한 아쩰라깟사빠는 얼마 되지 않아 최종 해탈에 이르렀습니다. 윤회를 끝내고, 해야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결과가 빠릅니다.
경전이나 주석서에서 사람을 금방 깨닫도록 이끄는 능력은 정자각자인 부처님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자기 자신을 무상의 조어장부(anuttaro purisadammasārathi)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satthā deva manussānaṁ)인 것을 명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나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도 성공할 확률은 부처님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부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수행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도망갈 길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포인트를 생각해 봅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은 āsava(아-사와)와 anusaya(아누사야)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āsava(아-사와)란 번뇌입니다. 번뇌의 리스트라면,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은 그 번뇌가 어떠한 구조로 사람의 마음을 관리하는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욕구라고 하는 번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뇌는 모든 생명에 똑같이 기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욕구의 기능이 바뀝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때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욕구가 일합니다. 가끔 「이것은 욕구다」라고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욕구가 너무 강해, 움직일 수도 없게 되고, 말할 수도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침착하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는 욕구가 적다」라고 판단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냄, 질투, 무지 등의 다른 번뇌도 관련되어 지면, 번뇌의 기능을 해명할 수 있는 것은 붓다 이외에 아무도 없다고 납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겉으로 나오지 않는 번뇌의 층도 있습니다. 겉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발견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도 그 번뇌가 숨어 있어 발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층을 구성하는 번뇌는 겉에 나오지 않지만, 겉에서 기능하고 있는 번뇌의 토대가 되므로, 영향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심층의 번뇌를 anusaya(아누사야)라고 합니다. 수면 번뇌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번역어는 아닙니다. 수면하는 것은 눈을 뜨면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anusaya(아누사야)의 의미는 「마음의 심층의 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토대는 겉으로 나오거나 건물의 지붕이 되지는 않습니다.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건물은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까지 관찰할 수 있지만, 건물이 있는 한, 토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물의 운명을 토대가 좌우합니다.
anusaya(아누사야)라는 심층 번뇌는 āsava(아-사와)라는 표층 번뇌로 바뀐 것이기에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능을 명확하게 아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표층 번뇌, 심층 번뇌, 또 그 기능을 손바닥 보듯이 명확하게 압니다. 사람을 조련하는 것에 대하여는 부처님이 신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보다 우수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거나 감정을 제어하거나 하면, 그만한 능력이 몸에 익게 됩니다. 자기 것이 됩니다. 속세의 과학·기술·예술·스포츠 등을 배울 때도, 지식이 증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제어라고 하는 능력도 어떠한 형태로든 자기 것이 됩니다.
번뇌를 없애기 위한 계기가 되는 것은 그 능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과거부터 어느 능력을 계승해 왔는지, 또, 어느 정도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손에 잡은 것처럼 압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약한 면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사용해야 할 방법까지,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단 한번 만난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최종적인 해탈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이상한 것은 부처님을 만날 기회가 있어도, 함께 생활할 기회가 있어도,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중부경전 12, 대사자후경(Mahāsīhanādasutta, 마하-시-하나-다 숫따)에 기록되어 있는 수낙캇따는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부처님에게는 초월한 지혜가 없다, 완성한 논리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비판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데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면 결과가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능력이 없었던 수낙캇따조차 비록 조금이라도 수행의 결과가 있었습니다.
방법이 맞는다면, 번뇌를 끊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안 계시더라도 번뇌를 끊는 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목표가 아니라, 손을 뻗으면 손에 들어올 정도의 목표라고 이해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자아를 붙잡지 말고, 속세의 지식으로 오염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면, 결과는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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