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성냄은 마음의 자동 발화 장치 (20150501)

담마마-마까 2021. 11. 9. 09:00

* 성냄은 마음의 자동 발화 장치 (20150501)

 

자동 발화하는 성냄은 사람의 도덕도, 행복도, 사는 즐거움도, 태워 버립니다. 성냄의 불씨가 일어나면, 급속히 성냄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성냄은 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냄은 자신의 옷에 실제로 불이 붙은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입고 있는 옷에 불이 붙은 것을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요? 성냄을 방치하면 그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신체에 불이 붙으면 죽을 것 같은 심한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 성냄의 경우는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성냄이 폭발하면 주위에도 대단한 피해를 끼칩니다. 사람을 매도하거나 싸우거나 상처 입히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테러 행위도, 성냄의 결과입니다. 성냄에 의해 사람들은 아무 주저함 없이 범죄를 범합니다. 성냄 자체가 악행인데, 성냄에 이끌려 저지르는 행위도 또 나쁜 것입니다. 성냄에 지는 사람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냄은 신체에 불이 붙은 것보다도 위험한 감정인 것입니다.

 

성냄의 불씨가 일어나면 그 순간에 지워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좀처럼 성냄을 지우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냄이 나타난 순간에 이성이 없어집니다. 사물이 안 보이게 됩니다. 성냄의 감정이 사람을 억압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주도권을 잡는 것은 영리한 인간이 아니라, 성냄인 것입니다. 성냄에 억압되어, 생각하는 일도, 말하는 것도, 저지르는 행위도, 모두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자기를 관리할 수 없는 인간은 성냄의 불씨에 부채질할 줄밖에 모릅니다. 성냄의 불이 난 집에 부채질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 능력이 갖춰져 있습니다. 나타난 성냄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괴할 때까지 확대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인간이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성냄의 제어 방법을 알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서운 것뿐입니다. 고함치고 싶지만, 고함치는 것이 무섭습니다. 때리고 싶지만, 돌아올 것이 무섭습니다. 죽이고 싶지만, 살해당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 무섭습니다. 이 자기애의 덕분에 성냄은 관리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 이전에 약해집니다. 화나 있지만, 성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점잖게 보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냄의 불씨가 계속 불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불행하게 되어 있는 스스로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오랫동안 불탄 성냄의 결과라고 깨닫지 않습니다.

자기애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따라 자신이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애를 자각해, 성냄만이 아니라, 불행을 가져오는 모든 감정을 제어합니다.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은 한 성냄은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지가 있습니다. 무지는 이성과 반대의 감정입니다. 성냄의 불씨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무지가 겉으로 나와 행동을 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성냄의 불에 부채질을 합니다.

우선 성냄은 올바른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잇달아 상대의 결점, 실수만을 찾아 망상합니다. 그 망상이 성냄에 따르는 기름인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로 향한 성냄의 경우입니다. 내면으로 향한 성냄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약점·결점만을 떠올려 망상합니다.

내용이 무엇이라도, 망상은 무지의 증거입니다. 망상의 결과인 욕구보다, 성냄은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냄은 본능적으로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관리하기 어렵습니다. 성냄이라고 하는 것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인생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냄이 나타난 순간에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코 「성내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냄 그 자체가 극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지우기 쉽습니다.

 

성냄은 불길과 같은 것으로, 화낸 사람도, 성냄의 대상도, 파괴하는 감정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성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는 귀찮을 만큼 많이 듣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싫증 날 정도로 들었다」라고 생각하겠지요. 실은 그 감정도 성냄인 것입니다. 성냄은 좋지 않다고 들으면 화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냄은 좋지 않습니다.

 

성냄은 2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내면으로 향한 성냄.

(2) 밖으로 향한 성냄.

 

내면으로 향한 성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일로 불평불만을 가지거나, 실패나 문제가 능숙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에 낙담하거나 고민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자기혐오와 비하도 내면으로 향한 성냄입니다.

 

외면으로 향하는 성냄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화내는 것, 싫은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화낸 원인, 싫은 기분이 된 원인, 낙담한 원인은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밖에 대해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면을 향해 화내는 사람보다는 외면을 향해 화내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는 성질이 나쁘다, 이러해서 나쁘다」라고 화냅니다. 조건이 나쁘거나, 싫은 일을 만났다고 생각해서 화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각 김밥을 사러 편의점에 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삼각 김밥은 품절되었습니다. 「나는 항상 그렇다. 운이 없다.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면적 성냄입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인데 물건이 떨어졌으면 즉각 구비해놓지 않고 뭘 하고 있는가?」라는 싫은 기분이 되는 사람은 외면적 성냄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다수는 정의의 아군입니다. 자신의 희망대로 세상을 고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나쁘다, 회사가 나쁘다, 공무원이 나쁘다, 정부가 나쁘다, 세상이 이상하다,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등등을 말하는 사람은 밖을 향해 화가 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수파입니다.

 

밖을 향해 화내는 사람에게는 자각하지 않고 있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탓은 아니다, 나는 올바르다」라는 마음입니다. 「나는 올바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향상시켜도, 능력을 개발하여도, 보다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자기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말할지 몰라도, 잠재의식은 완고합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 더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다른 사람의 결점만 보고 있기에, 인간관계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혼자 있어도 환경조건에 불평하므로 정신적으로 괴로워합니다. 인간으로서 아무 성장도 없고,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괴로움에 빠져 살게 됩니다.

 

내면을 향해 화내는 소수파의 사람의 경우는 자기 파괴력이 급속합니다. 뭐든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우 어둡습니다. 행동력은 없습니다. 도전하려고 하는 자세도 없습니다. 이미 몸에 붙어 있는 능력마저도 줄어들어 갑니다. 생명력은 자신을 향해 공격적으로 일하므로 사는 것은 매우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이 인내의 한계를 넘으면, 폭력적이 되어 다른 사람을 파괴하든지, 자살을 꾀합니다. 어느 쪽으로 행해도 결과는 자기 파괴입니다.

 

이와 같이 성냄은 2종류이지만, 성냄이 나쁘다고 알아도 보통 사람들은 화내지 않고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버릇이 되어 있습니다. 화내는 것은 자연스럽고, 화내지 않고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느낍니다. 성냄은 끓어 넘치는 물과 같이 마음대로 솟아올라옵니다. 관리하려고 생각해도 결코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컨트롤 하다가 실패에 끝납니다. 왜 성냄은 마음대로 솟아올라 오는 것일까요? 싫은 기분 없이, 즐겁게 생활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왜 성냄에 져 버리는 것일까요?

 

마음속에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만(māna, 마-나)」라고 합니다. 마-나는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재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이라는 자각이 있습니다. 굳이 나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의식인 자각은 자아의식으로 변합니다. 사람은 무지한 탓으로 모든 것은 순간순간 변화해 가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라고 하는 자각은 끊임없이 일어나므로, 변함없는 자신이 있다고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자신(자아)을 평가하고 잽니다. 이것이 마-나인 것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평가하는 것은 「고만(ati māna)」입니다.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하만(hīna māna)입니다. 「만병」으로 고민하고 있는 한 성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다릅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도 같다, 평등하다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것도 자아의식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동등만(sadisa māna)」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등만의 사람은 분별없게 화내지 않습니다. 폐렴에 비하면 감기는 경미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감기에 걸려도 좋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감기가 악화되면 폐렴으로도 됩니다. 동등만의 사람도 다른 사람의 차별적인 삶의 방법을 보고, 자신을 너무 무시한다고 화내 버립니다. 그 말은 마-나(자아의식)가 있는 한 성냄은 붙어 다닙니다.

 

성냄을 완전하게 퇴치하고 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혜를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함없는 자신이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모두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고 있으므로, 자신이라고 하는 의식도 순간순간 변해가는 것이다, 실체·나·영혼, 세상에서 말하는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라고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나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모두 성냄을 가볍게 보고 있습니다.

 

성냄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경솔하게 부탁합니다. 그렇게 부탁하는 사람들은 자아의 평가가 너무 높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고만(ati māna)입니다. 성냄은 맹독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냄은 사람의 기쁨도 행복도 파괴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부수고, 단명하게 합니다. 체력도 재능도 지식도, 그 외의 능력도 줄어들고 파괴됩니다. 성냄에는 한 가지도 좋은 결과가 없습니다. 결코 화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에는 어떤 예외도 없고,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성냄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누구도 성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반드시 발병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냄은 HIV와 같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감염되어도 발병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바이러스가 번식해 활동을 시작하면 생명은 끝납니다. 깨달음을 이루지 않는 이상 모두 성냄이라고 하는 맹독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성냄이 폭발해서 발병하지 않게, 주의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성냄을 제거하는 방법도 2종류입니다.

상대의 성냄을 제거하는 것과 자신의 성냄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상대의 성냄을 제거하는 방법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예를 들어, 상사가 화내며 자신에게 고함치고 있다면 그때 상사를 향해 자애를 가지고 「상사가 미남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사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고함치고 있던 이유도 잊어버립니다. 어쨌든 조심스럽게 자애의 마음으로 칭찬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화내면 「화내면 얼굴이 추해진다」라든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대로는 사용할 수 없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은 것인지 그 자리 그 사람에 맞추어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항상 밝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있으면 지혜는 얼마든지 솟아올라 옵니다.

 

어쨌든 화낸 사람은 그 시점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도 어느 정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냄을 받은 자신이 성냄으로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떤 손해도 받지 않게 됩니다. 상대에 대해서도 성냄의 연료를 공급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도 최소한의 해로움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성냄에 대해서 성냄으로 돌려주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성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선행을 한 것이 됩니다. 더구나 자애로 되돌려 주면 성냄은 급속히 사라집니다.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의 성냄을 거두는 것 쪽입니다. 「이 성냄에 져 버리면 자신은 참으로 어리석다. 왜 내가 화내며 괴로워해야 하는가!」 라는 사고로 바꾸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은 「성냄은 맹독이다. 극악이다. 자기 파괴이다」 「성냄에 이기기 위해서는, 화내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냄은 사람의 행복을 순간에 파괴하는 무서운 것이지만, 사람의 행복을 없애고 괴로움을 낳는 원인은 그 밖에도 있습니다. 불교는 모든 괴로움을 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성냄만 어떻게든 거두면 행복하게 된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화내지 않는 사람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동등만으로 전혀 화내지 않는 사람도, 회사나 가정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이를 꾸짖는 것을 할 수 없게 되고, 후배를 가르치는 일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화를 내지는 않지만,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이 능숙하게 진행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다음의 문제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 문제는 빨리어로 「집착(saññojana)」라고 말합니다. 결박이라는 의미입니다. 유신견·의심·계금취·욕구·성냄·색계탐욕·무색계탐욕·만·도거·무명이라고 하는 10가지 종류의 족쇄가 있습니다. 그 리스트 중에서 다섯 번째가 성냄입니다. 깨달음의 제1 단계인 예류과에서 처음 3가지의 족쇄가 사라지고, 두 번째 단계인 일래과에서 4와 5의 족쇄가 약해집니다.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에서 4와 5의 족쇄가 사라집니다. 네 번째 단계인 아라한과에서 남아있던 나머지 5가지가 사라집니다. 깨달음의 제3 단계인 불환과에 이르지 않은 이상, 성냄과 욕구는 항상 따라다닙니다.

오해해선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류과에 오른 사람도 성자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일반인과 같이 욕구와 성냄에 빠져, 죄를 범하면서 야무지지 못한 삶의 방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냄과 욕구가 지혜의 공격을 받고 있기에,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결코 발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10가지 종류의 족쇄로 속박되어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돈을 갖고 싶다, 가족을 사랑하고 있다, 일이 즐겁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건강하고 아프지 않고 병이 들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등의 감정이 족쇄입니다. 이것들은 족쇄인 것입니다. 목적에 이르지 않을 때, 행하는 것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때는 낙담하거나 고민하거나 합니다. 굳이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러한 감정은 사람을 괴로움에 속박합니다.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모든 족쇄를 찢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이 있어서 아이의 재롱잔치에 참관할 수 없다거나,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회사에 나갈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갑작스런 이혼으로 지금까지 익숙해져 온 안정된 삶의 방법이 망가져 버리기도 합니다. 아내가 쇼핑에 빠져 불필요한 고액의 물건을 사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족쇄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한다고 해도, 진리를 실천하고, 스스로 수행을 할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은 몹시 불행합니다. 무지한 채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다가, 무지한 채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얻는 것은 전무한 상태인 것입니다. 속세에서 살아가더라도, 여러 가지 속박에 완전하게 붙잡히지 않게 주의하며, 진리를 구하여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성자는 10가지 종류의 족쇄를 파괴했습니다. 완전하게 자유롭습니다. 이 위없는 평온함을 실감하며 살아갑니다. 그 상황을 다른 말로 표현해 봅시다.

「붓다는 nāma(나-마)와 rūpa(루-빠)에 걸릴 것이 없습니다.

nāma(나-마)란 마음입니다. 감정, 망상, 사고, 개념 등입니다. 붓다는 자신의 감정, 망상, 개념 등은 가지지 않습니다. 모두 버려버렸습니다. 세상의 사고, 감정 등에도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rūpa(루-빠)란 물질입니다. 자신의 육체도 물질이고, 밖의 모든 것도 물질입니다. 물질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무상이어서, 집착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물질에도 일체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않는 완전한 지혜를 획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완전하게 넘기 위해서는 무상한 존재의 모든 것에 대해서(nāma와 rūpa)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착을 버린다」 이 말을 들으면 일반인은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어두운 가르침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가 있기 때문에 그처럼 느껴 버리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사기꾼이 접근하여, 낡고 더러운 오래된 옷을 세상에서 제일 비싼 아름다운 옷이라고 상대를 속여 고액으로 팝니다. 그것을 산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자랑스럽게 그 옷을 입습니다. 그 옷에 집착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지 않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본 뛰어난 안과 의사는 그에게 치료를 베풀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볼 수 있게 된 그 순간에 자신이 지금까지 속고 있었던 것, 고집이 있고 고만하여 친절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알아차립니다. 금방 옷에 대한 집착을 버립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 이번 포인트

 

• 성냄은 극악입니다.

• 성냄으로 행하는 사고, 말, 행위도 악입니다.

• 비록 불합리하거나 불행을 당해도, 화내면 패배자입니다.

• 성냄은 행복을 파괴하는 맹독입니다.

• 자아의식이 있는 한, 성냄은 솟아올라 옵니다.

• 성냄을 알아차려 발병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 모든 족쇄를 찢은 사람이 최고의 행복을 성취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