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명한 자의 길 (20150515)
감정에 지배되지 말고 감정을 지배하라
인간은 감정에 지배되어 살아갑니다. 좋음, 싫음, 욕망, 꿈, 성냄, 미움, 질투, 오만, 자존심, 체면. 실망, 괴로움, 고민 등은 모두 감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사람이 사는 환경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감정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없다고 하는 마음, 불신감, 의심, 공포감, 지기 싫어하는 경향, 완벽주의,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마음, 자아의식의 과잉과 같은 여러 가지 말로 여러 가지 감정이 표현됩니다.
불교에서는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감정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대상에 매료되는 반응입니다. 이 경우는 애정, 과잉반응, 꿈, 욕망, 등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다음은 대상을 거부하는 반응입니다. 그 경우는 성냄, 질투, 미움 공포감 등이 일어납니다. 또 하나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 반응입니다. 그 경우는 불신감, 의심, 자기 불신 등이 일어납니다.
어떤 감정이든지 불교에서는 그 3가지를 기본적인 감정으로 나누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그러는 것으로 감정에 골치를 썩이고 있는 사람의 문제를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밝은 감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중심적인 애정 대신에 사람의 행복을 위해 행하는 기쁨(metta/자애), 사물을 잘 이해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panna/지혜),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밝게 살려고 하는 마음(saddha/확신)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적은 것은 유감스럽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은 감정에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판단, 행동, 등이 감정에 지배되면 위험합니다. 그 사람, 그 자신의 진보를 방해하고, 사회에도 공헌할 수 없습니다. 인생도 서서히 비관적으로 바뀌어 갑니다. 성냄, 질투, 의심, 애정, 욕망 등에 지배되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본인은 눈치 채지 못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상한 행동을 해 버립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삶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정대로 사는 것은 간단합니다.
동물은 감정대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대로 산다면 아무런 진보도 없고, 사람이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어두운 감정을 넘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자기 관찰을 하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안정될 때까지 행동을 가까이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판단도 참고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귀찮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인내, 노력, 마음을 명료하게 하는 것 등이 필요하지만, 그것에 따라 마음은 필연적으로 밝을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태로부터 서서히 현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어두운 감정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고민하는 것도 없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는 경우는 사람이 감정에 지배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상당히 침착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감정의 문제를 이해하면 안심하기에는 빠릅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순조로운 상태도 무너지는 일이 있습니다. 불행하게 되어도 침착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자의 삶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4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익(labha/만사가 잘 되는 것, 성공하는 것,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
명예(yasa/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높은 입장에 있는 것)
칭찬(pasamsa/성공해서 상을 받거나, 칭찬받거나, 유명인이 되는 것)
행복(sukha/풍요롭고, 건강하고, 가정이 원만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
이상의 4가지가 있으면 누구라도 행복을 느끼고 밝고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곧 감정적이 되어 들떠버립니다. 그것은 함정입니다. 들떠버리면 넋을 잃어 자신 과잉이 되어 불필요한 행동까지 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람이 불행을 느끼고 낙담하는 원인도 4가지가 있습니다.
불이익(dlabha/실패 하는 것, 손해 보는 것, 경기가 악화되는 것)
불명예(ayasa/인정받지 못하는 것, 비판 받는 것)
비난(ninda/실패하거나 잘못을 범하여 비난받고 부정되어 사회로부터 내쫓아지는 것, 권력 분쟁 등으로 사실 무근의 비난을 받는 일도 있다.)
불행(dukkha/가정이나 직장에서 문제가 있거나 병약해서 괴로움을 느끼는 것)
그 4가지를 만나면 낙담하고, 자신을 잃어 분노를 느낍니다. 그것은 어두는 감정입니다. 어두운 감정에 빠지면 더욱 나빠질 뿐이기에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4가지를 만나자마자 고민하는 마음이 <감정>입니다.
행복한 때에 들뜨는 일도, 불행한 때에 고민하는 일도, 어느 쪽이든 감정에 지배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이러한 8가지를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익을 보면 손해도 보는 것이고 인정받으면 비판받기도 하며, 칭찬받으면 비난받기도 하며, 즐거움이 있으면 근심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바뀌어 돌아가는 것입니다. 현자는 무엇을 만나도 침착하게 이성을 지켜 적절히 행동하여, 행복과 불행에도 끌려가지 않게 마음의 평안을 유지합니다.
어두운 감정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밝은 사람이라도 인간이면 누구라도, 이러한 8가지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8가지를 불교에서는 「세상의 법칙(loka dhama)」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올바르게 보고 인식해서. 낙담하지 않고, 들뜨지 않게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무지를 ‘업’이나 ‘선천적’이라고 믿어버리지 않는가
현자라고 하는 성질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보통 사람들은 운명, 업, 선천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상태를 해석하기 십상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납득하기 위해서 그러한 해석을 사용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결정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변명으로 들립니다.
인과 법칙을 말하는 불교에서는 아무런 원인도 없이 어떤 것이 일어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금 상태도 어떠한 인연의 결과인 것은 확실하지만 노력하면 나쁜 상태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업의 이야기가 우리의 인생이 과거의 업으로 정해져 변화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악한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상의 개념과 인과론에 반합니다. 노력하는 것은 불교의 도덕의 기반입니다. 노력만 하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마침내 완전한 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특별한 인간, 선택된 사람, 아기예수, 은혜가 주어진 사람 등의 개념은 불교 안에서는 없는 것이라고 기억해 둡시다. 비록 풍족한 사람이 있어도 그것은 그만한 과거의 노력과 다른 인연의 결과입니다)
자신은 풍족하지 않기에 무지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노력을 부정하는 어두운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비록 결과적으로 될 수 있든 될 수 없든. 노력만 하면 좋아진다고 하는 생각만은 가져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안다- 지식으로부터 지혜로
현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면 좋을까요?
현자라는 말은 불교의 수행에 관한 말이지만, 그것은 지식과 지혜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지식)의 레벨로부터 (지혜)의 레벨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진리를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에만 머물고 있는 보통 사람의 즐거움은 모든 지식의 축적입니다. 그것은 다만 망상의 세계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 모든 오락, 사회적인 입장이나 권력을 얻는 것으로 그것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수집, 취미, 모험적인 경험 등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생을 그것만으로 끝낸다면 어리석은 채로 죽게 됩니다. 욕구, 성냄, 질투, 허세, 아만 등의 감정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지식은 인간의 허세와 아만을 키우고, 오락의 세계는 인간의 욕구를 키웁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진리를 기뻐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그것은 아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 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정 개념에 근거해서 말하는 지식적인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직접 진리를 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가진 부모가 교육을 말하는 경우는 아무리 공평하게 말하고 생각해도 우리 아이의 교육이라고 하는 시점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세계정세 등에 대해서도 그 말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목적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그러한 의견도 (맞다)고 결정하지 않고, 그런 입장으로부터의 의견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입장으로부터도 문제를 보려고 합니다. 진리에 의해 가까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즉 고정 개념이 머리에 있을 때는 있는 그대로 안 보인다고 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고 관찰할 뿐, 납득시킬 필요는 없다.
불교에서는 무엇을 관찰해도 올바르게만 관찰한다면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은 무상이다(anicca), 괴로움이다(dukkha), 변화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anatta), 인과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 자체는 고정 개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무상하다 라고 대상을 보세요’라고 말해 버리면 그것도 하나의 고정 개념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무상이라고 말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 모든 고정 개념으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신의 좋고 싫음의 감정으로부터도 멀어져, 사물을 관찰해서 사실을 보려고 노력하여 그것에 기쁨을 느끼도록 해서, 이윽고 지혜가 나타나 바르게 보이게 되었을 때, 처음 결론으로서 모든 것은 무상이라고 알았다면, 그 사람은 이제 현자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상이다)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입장
진리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왜 이러한 의견이 나왔는지,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떤 입장으로부터 고찰했는지, 어떤 목적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그 의견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그 의견의 보이지 않는 측면은 무엇인지, 또 그 의견에 대해 다른 의견도 가능한지 아닌지 등을 이해합니다. 상대에 대해서 대립하는 일 없이 이해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만약 유효한 의견을 듣고 자신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행합니다. (보통 사람은 무엇인가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열중하여 행하지만 그것은 위험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도 주의 깊고 조심합니다. (이것은 나의 의견이다.) (이런 이유로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다.) (목적은 이것이다.) 등의 조건부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또 상대를 납득시키고 싶다고 바랄 때는 지론이나 스스로의 설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편성(수많은 사람을 납득 시킬 수 있는 논거)의 입장을 지킵니다. 그러한 올바른 대책을 세워서 다른 사람과 대립하지 않게 합니다.
(불교를 공부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다른 종교 철학 등의 비평, 사회 현상의 분석 등도 불교의 개념을 용이하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상대를 부정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불교 개념을 납득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이 상대와 대립하지 않으려는 넓은 마음을 가져 주었으면 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이 태도는 결단코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사물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은 사람이나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견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만, 진리를 아는 사람은 제대로 사물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중도라고 하는 극단을 초월한 도이기도 합니다. 초월한 도를 실천합시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합시다. 그런 것에 기쁨을 느끼려고 생각하면 마음이 번뇌(감정)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깨달음을 이루고 현자로도 될 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인간으로부터 긍정적인 인간으로
현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혜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인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훌륭한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격을 형성해 나갈 뿐만 아니라, 말은 조심하거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계속하면, 신경이 피곤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스트레스가 쌓여도, 예의범절을 지키듯이 행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서서히 마음도 거기에 따르기 때문에 그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또 반대로 마음이 성장해서 안정되어 있다면, 인격이나 예의범절이라는 것은 무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완성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의범절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기르든지, 아니면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격이 뛰어난 사람이 되든지, 어느 쪽을 따라도 괜찮습니다.
현자는 인격적인 측면에서 격렬하게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나는 이것이 싫다)든지, (이것을 좋아한다)든지, (이것을 갖고 싶다), (이것을 갖고 싶지 않다) 등 강하게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기분에 관계 없이(당신은 이렇게 해주세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하거나 합니다. (그 좋고 싫음의 기분은 <자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이 격렬한 사람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물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는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러한 성격으로 상대하면 인간관계도 트러블 뿐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갑작스럽게 말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좋고 싫음도, 다른 사람의 상태도 함께 잘 이해하여, 주관적인 감정이 사라지도록 하고 나서,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행동을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항상 다른 사람의 기분도 생각하고 이해해서 행동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현자가 된 사람의 마음에는 좋고 싫음이 모조리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에 대해서 몇 푼 안 되는 자아를 내세워 주장하며 문제를 만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괴로울 때, 만사가 잘되지 않을 때, 사람은 누구라도 낙담하거나 어두워지거나 합니다. 때로는 자신감마저 사라져 없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사가 잘 될 때는 밝고 건강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넘쳐 기고만장하게 되어 다음에 씁쓸한 경험을 할 우려가 있습니다. 어쨌든 감정이 너무 격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자는 이러한 감정의 물결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행복한 때도 불행한 때도 평안인 마음으로 있습니다.
현자에게는 하나 더 훌륭한 성격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부정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는 성격입니다. 보통 사람은 재산을 얻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보면 좋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뇌물도 받고, 직권남용도 서슴없이 합니다. 또 재산뿐만 아니라 사람은 명예도 갖고 싶어 합니다.
상사에게 의지해 진급을 도모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폭로해 명예. 명성을 더럽혀 자신이 명예를 얻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이 훌륭해지려고 하는 행동은 세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더욱 더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권력입니다. 권력을 위해서 엄청난 살인, 학살 등도 일으킵니다.
현자는 이러한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도 재산도 명예도 어떤 것이든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먹고 사는 것보다는 법을 지키며 굶어 죽는 편이 훌륭하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재산, 명예, 권력 등, 무엇이나 차면 불안해서 제대로 살아 갈 수 없는데도, 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해서라도 그것들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약점인 것입니다.
부정한 일까지 해서 재산, 명예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까? 라도 생각하는 것이 현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부정을 버리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강함을 필요로 합니다.
불교에 있어서의 현자의 길은 지혜를 기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동시에 번뇌로부터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해탈을 체험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현자의 길은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실천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작심삼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도와 과를 완성할 때까지 노력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리석은 자로 인생을 끝마치는 것은 재미없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지혜가 능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달리기도 하지 않고 지는 것보다는, 달려서 실력의 차이로 지는 편이 후회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일 (불선행)은 그만두고, 긍정적인 일 (선행)을 실천하라.>
의존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의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하라.(oka anokam agamma).
더러움으로부터 자기의 자신을 맑게 하라.(pariyodapeyya attanam).
집착을 버리고 (adana patinissagge) 이 세상에서 빛나는 현자가 되어라.
어두운 곳으로부터 빛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현자의 길입니다.
불도는 현자의 길입니다.
● 이번 포인트
• 감정대로 사는 것은 간단하지만, 감정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 항상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 욕구를 늘릴 뿐인 지식을 얻는 것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게 합시다.
• 다른 의견에 대해 중도적인 입장을 지킵시다.
• 예의범절이 좋은 행동을 하는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안정하는 일이 있다.
• 마음이 평안한 상태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모범적인 것이 된다.
• 비록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부정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 감정의 물결에 따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길이다.
•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마음은 평안해야 현자이다.
• 욕구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현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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