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매하게 사는 것을 피하기 위한 4가지 원칙 (20150508)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가요? 누구라도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벼운 질문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경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봅시다.
첫 번째는 「천한 행위는 모두 그만둡시다.」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하고 알기 쉽다고 생각되겠지요. 그러나 「천한 행위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나쁜 행위를 「천한 행위」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천한 행위의 정의가 애매하게 되어 버립니다.
불교의 경우는 사람의 삶의 방법이 애매하게 안 되게 엄밀하게 말을 정의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 주장, 철학, 삶의 방법에 관계없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것은 탐·진·치가 원인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정의입니다.
하나의 행위가 좋은가 나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신앙도, 철학도, 주의도 관계없습니다. 그 행위를 한 사람의 마음이 탐·진·치의 충동으로 움직였다면, 그 행위는 천한 행위가 됩니다. 가끔 탐심으로 노력한 결과 풍족하게 되었다든가, 성냄으로 적에 대해서 반격한 결과 평화가 돌아왔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는 욕구가 있는 것이 좋다든가, 성냄이 있어도 좋다고 하는 결론에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구나 성냄으로 행동해서, 우연히 이전보다 좋은 결과를 내도,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를 「적국」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분노로 폭격하여, 그 자리에서 해결한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예측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잇달아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타나도 탐·진·치에 조종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는 천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기 관리가 됩니다.
또 세상에서는 탐·진·치의 마음과 관계없이, 다양한 행위가 천한 행위라고 결정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서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행위를 그만두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사이좋게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주의나 종교에 근거해서 올바르다고 해석하여 행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종교에서는 범죄자를 공개 처형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잔혹한 행위로 간주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경우 그 종교인들은 자신의 주의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서 공개 처형을 멈추는 편이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문화나 나라, 민족에 의해, 여러 가지 결정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경우는 그 사회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스스로도 멈추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는 올바른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천한 행위라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 2가지의 기준이 있습니다.
(1) 절대적인 기준은 탐·진·치의 충동입니다.
(2) 세상에 있어 상식으로 나쁘다고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동적입니다. 때와 경우에 따라 변화합니다. 의심이 생겼다면 (1)의 절대적인 기준에 의지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가 「전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결정할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결정했으니까 나도 사람을 죽여도 좋은 것인지 의심이 생긴다면, (1)의 기준으로 분노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결정하면 됩니다.)
두 번째의 가르침은 「게을리 해선 안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에 져 버립니다. 모르는 동안에 여러 가지 오락에 빠지거나,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잊을 때도 있습니다. 재산, 명예, 권력, 인기만을 쫓아서 그것에 눈이 멀어 아무렇게나 생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은 투쟁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순간순간의 인생을 소중히 할 것입니다. 게으름 피우거나, 향락에 빠지거나, 유혹에 지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탐· 진·치나 그 외의 감정에 지는 일 없이 항상 보다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부처님은 권하고 있습니다. 항상 깨어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혜가 일어납니다. 이 지혜가 마음의 더러움인 탐·진·치를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지워버립니다.
세 번째의 가르침은 「세상의 다양한 잘못된 사고에 조종당하지 않고 산다.」라는 것을 권합니다.
현대는 정보화 사회라고 합니다. 얼마나 빨리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비지니스가 성립되어집니다. 옛날에는 좋은 물건을 만들면 그 회사는 도산하지 않지만, 지금의 비지니스의 생명은 정보 전략에 의해 승부가 결정됩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광고를 만들고, 그 정보를 흘리면, 그 상품은 팔립니다. 그러한 이유로 정보 전달의 목적은 사실을 전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얼마나 유혹하는가 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세상의 정보를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믿고 있다고, 지금 유행하고 있다고, 최신 정보라는 이유로 그것을 판단할 수 없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세상의 정보에 쉽게 마인드 컨트롤 되지 않게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번째의 권유는 「세상의 쓰레기를 모으지 맙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쓰레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부터 사람의 삶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쓰레기를 늘리는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 재산을 만드는 것, 가족을 늘리는 것, 건물을 만드는 것, 권력이나 인기 등을 얻는 것, 지식을 늘리는 것…. 이와 같이 쓰레기의 수집가로서 노력하며 살아가도, 마지막에는 그 쓰레기만을 남기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죽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알몸으로 태어난 사람이 늙어 죽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버리지 못한 쓰레기의 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는 늙어도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을 증장시키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했다면, 혹은 선행을 하였다면 그것은 자신의 소지품이 됩니다. 인생은 쓰레기를 쌓는 것이 아니라 덕을 쌓는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천한 행위를 모두 그만두도록 항상 노력하는 것.
• 사악한 견해나 정보에 마인드 컨트롤 되지 않는 것.
• 쓰레기를 늘릴 뿐인 인생을 그만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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