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법현자가 되는 과정 <6단계 레벨 측정> (20150925.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2. 2. 09:00

https://youtu.be/hzIzC7U2CAE

* 법현자가 되는 과정 <6단계 레벨 측정> (20150925. 대구)

 

10급은 유치원생 가르치는 그런 겁니다. 빨리어로. 9급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들어가는 학생 수준입니다. 그다음에 법의 영역에 들었다 그렇게 해가지고 '대법자' 이런 식으로 명칭을 부여해줍니다. 빨리어로 받는 거죠.

그렇게 해서 10단계로 나누는 경우들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2단계로 나누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2단계는 불교의 전반적인 것들, 기초 시험 1단계 2단계 해서 보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 9단계부터 9단계 8단계 해가지고 1단계까지 가는 것이 있고, 이것은 합치면 11단계가 되는 거죠? 빼면 9단계가 되는 거고.

그래서 보통 10단계 전후로 이렇게 레벨을 측정들을 합니다.

마지막 안거 해제 때가 되면 시험문제가 1시간에 한 3개 정도 볼 겁니다. 그러면 보통 10단계 9단계 8단계 이렇게까지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그러고 나서 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 단계들로 넘어가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거는 한 몇 단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이거는 통상적으로 봤을 때 한 6단계, 어떤 것 어려운 거는 5단계 정도까지 됩니다. '법현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 아래서 현명한 자가 됐다" 하고 하는 그런 수준까지 되는 겁니다.

 

자! 1번부터 한번 볼게요.

 

부처님에게 최초로 귀의한 국왕의 이름과 국명은?

아마 이것은 다 맞혔을 거라고 봅니다. 빔비사라왕 하고 마가다국이죠.

꼬살라국하고 마가다국하고가 부처님이 양대 왕국이었고, 그래서 빔비사라왕과 빠세나디왕이 부처님에게 귀의한 양대 국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인도에 16개국 중에서 가장 강대했던 나라가 이 마가다국과 그다음에 꼬살라국 두 나라였습니다.

그래도 꼬살라국 보다도 마가다국에 부처님이 점수를 좀 많이 줬던 이유가 뭐냐면 이 나라는 공화제 정치를 했습니다. 왕이 모든 걸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합의에 인해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후한 점수를 준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거는 맞았을 거라고 봅니다.

 

두 번째, 최상의 존경 예배법이 어떠한 것인가?

어떻게들 썼어요? 절하는 거? (수행자 대답 : 부처님의 담마에 따라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 잘 살아가는 것, 보통 그렇게 두 가지로 하기는 합니다.

형식적인 거 같으면 "양 무릎 그다음에 양 손바닥 그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는 것, 이 다섯 군데가 닿는 것들이 최상의 예배법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오체투지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그런데 그대신에 손바닥을 뒤집지는 않습니다. 그대로 손바닥을 땅에 대고 합니다.

 

그게 형식적인 최상의 예배법이고, 그다음에 실제적인 최상의 예배법은 아까 누군가가 얘기했지만 담마따라 살아가는 것이 되는데, 살아만 가서는 안 되고, 담마에 어긋나지 않게끔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 상태, 그래서 그것이 ‘법을 지닌 자’가 됩니다.

담마따라 살아가면서 담마를 실천하는 자, 그래서 담마가 그를 보호하는 자가 되고, 내가 담마를 보호하는 자가 되고, 그런 뜻입니다. 그걸 '담마다로(Dhammadharo)'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다로로써 살아가는 것들을 얘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든지 실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한테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담마따라서 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벗어나더라도 또다시 돌아오고 돌아오고 해서 그 법의 가르침 따라서 자꾸 살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세 번째, '앗따 히 앗따노 나토(Attā hi attano nātho)' 그렇게 돼있습니다.

실로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자신의 수호자이다.

이것은 어디에 나오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 자주법주)

자주 법주(自洲法洲)? 자주법주 하고는 조금 다르긴 한데, 어쨌든 그거하고 비슷합니다. 스스로를 의지처로 하라는 게 자주, 법을 의지처로 하라는 게 법주라. 그거 하고는 문장이 조금 다르죠? 누가 수호자냐 하는 거라. 누가 자신을 보호해주느냐는 거라.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거라는 뜻입니다. 담마빠다에 나오는 게송이죠? 담마빠다 160번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 삼 개의 어구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이 구절이 왜 나오게 됐는가 하는 것들을 설명하라는 거라.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것도 이익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그런 뜻인데, 그 깨달음을 이룬 분을 향해서 부처님이 얘기를 했다는 그런 구절입니다. 부처님이 어떤 말을 했기에 ‘아, 내가 스스로 자신의 보호자가 되겠다’ 해서 그렇게 실천하게 됐을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몸은 사대로 이루어졌다. 지·수·화·풍 4대 요소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도록 노력하라. 그렇게 노력하게 되면은 가장 먼저 앞에 딱 부딪치는 게 무지! 무지한 것들이 드러나진다는 거라. 이때까지 모르던 사실들이 저렇게 드러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문을 열고 딱 들어가면은 그 땅에는 각각의 것들이 묻혀져 있다는 거라. 쓰레기도 묻혀져 있을 거고, 비닐도 묻혀져 있을 거고, 아니면 오물 덩어리도 있을 거고, 어쩌면 그 안에는 잠자고 있는 동물들도 있을 거고, 그런 각각의 것들이 있는데, 그걸 비유를 해놓기를 '분노가 일어나는 것들이 보인다'는 거라.

 

수행하다 보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들이 보이죠? 그래서 그 분노같은 것들을 잘 다스려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수행을 조금 하다 보면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다섯 가지 장애들, 오장애라고 하는 것들 그 장애들을 잘 극복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고,

그 장애들을 극복하다가 보면 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 그걸 오취온이라고 합니다. 색·수·상·행·식 이걸 구분해 보게 되는 거라. 느낌은 느낌으로만 알아차리게 되고, 이 몸에 대해서는 팽창하면 팽창한다는 요소로써 알아차리게 되고 그래서 색·수·상·행·식을 낱낱이 다 분해해서 볼 수 있게 되니까 그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리게 되고, 그 집착하는 것이 없게 돼버리면은 결국은 닙바나(nibbhāna)라고 하는 것들로써 나아가게 된다 하는 것을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법에 따라서 꾸마라깟사빠가 수행해서 아라한에 이르게 됐다는 얘깁니다. 아라한에 이르고 나서 자기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꾸마라깟사빠는 태어나고 얼마 있다가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꾸마라깟사빠의 어머니가 출가를 했는데 출가할 때는 임신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출가를 했느냐면 데와닷따가 있는 쪽에다 출가를 했거든. 데와닷따는 가만히 생각하니까 임신한 여자가 들어와가지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나는 데와닷따에 출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한테 출가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간다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들어가니까 부처님은 출가를 받아주면서 율의 제일인 우빨리 존자한테 이 여자가 임신한 것이 언제 했는지 정확하게 알아가지고 이걸 세상에다가 공표를 하라 하고 얘길합니다.

 

그래서 우빨리 존자가 자기가 검사를 할 수 없으니까, 여러 덕 높은 여성 재가자들을 오라 해가지고 그 여자의 배를 검사하고 이빨을 검사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면 임신 몇주다 하는 게 드러나는 모양이라. 그래서 임신이 얼마가 됐다는 걸 공표를 해서 결국 비구니가 되고 나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비구니 사원 안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별로 좋지가 않으니까, 왕이 이 아이를 데려가서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름이 꾸마라 라고 그렇게 됩니다. 꾸마라 라고 하는 것은 라자꾸마라의 준말이거든. 소년은 아이는 아이인데 라자-왕자, 왕자한테 라자꾸마라라고 그렇게 하는데, 왕자인 깟사빠다 해서 꾸마라깟사빠 라고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꾸마라깟사빠가 좀 크고 나서 자기한테 부모님이 옆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왕한테 가서 내 부모님, 내 어머님은 어디 계시냐 하고 물어보니까, 그 왕자한테 왕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너 부모들 저기에 많이 있지 않느냐?” 쉽게 말하면 궁에 있는 여자들을 가리키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많이 있잖아” 그렇게 얘기합니다. 키워줬으니까.

그러니까 꾸마라가 아니야, 저분들은 내 어머니가 아니야. 어머니는 오직 한 분이어야 되는 것이지 여러 분이 될 수가 없다고 하니까, 그때사 왕이 아, 애가 다 컸다는 걸 알고, 어머니는 비구니였다 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러고 나서 꾸마라깟사빠가 출가를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꾸마라깟사빠 때문에 비구계의 출가규정이 좀 바뀌기도 합니다. 비구계를 받을 때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원래 비구계는 스무살 이상이 돼야 받을 수가 있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계속 지적을 하는 거라. 스무살 안 됐는데 왜 비구계를 줬는가 그렇게 하니까 부처님이 그때 얘기를 합니다.

몸 안에 임신했을 때 인식하는 기능이 생겨나는 것이 때가 한 4개월 정도 지나면 인식하는 기능이 생겨납니다. 태아가. 그때부터는 생명으로 간주를 하게 되는 거라. 사실을 4개월 지나고 낙태를 하고 이럴 땐 좀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 그 인식하는 기능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임신 기간 4개월을 뺀 나머지 기간이 6개월이잖아. 6개월을 더하니까 어떻게 돼요? 19살 6개월만 되더라도 출가할 때 스무살이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조금 일찍 출가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19살에 출가할 수도 있고, 6개월을 더하는 기간이 되니까.

그래서 지금 의학적으로 봤을 때도 2000년 전에 이미 그렇게 얘기한 것이 정확한 것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꾸마라깟사빠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출가해서 비구계를 받아서 열심히 수행하다가 부처님한테 아까 조금 전에 얘기한 그 법문을 듣고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그마만큼 4대요소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 그다음 몸에서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각각의 장애들 분노라든지 다섯 가지 장애라든지 이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가고, 그러면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 오온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고 나서, 그대로 쭉 가니까 마음이 청정해지게 되고 그리고 마음이 향상이 되어서 깨달음에 나아가고 그래서 아라한에 이르르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탁발을 나갔는데, 어머니가 있는 곳을 우연히 지나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이가 커서 보게 되니까, 어머니가 이 아이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냥 가서 다리를 붙잡고 울고불고 하는 거라.

그런데 꾸마라깟사빠가 생각을 합니다. 이 어머니도 출가를 해서 비구니가 됐는데 어떻게 하면 비구니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아, 저 집착하는 마음 저거라도 놓아버리도록 해야 되겠다’ 생각을 해가지고 어머니를 매몰차게 탁 뿌리칩니다.

뭐 하는 짓이냐? 비구니 행색에 떨어지게, 비구니면 비구니답게 살아라. 나는 이제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부처님의 아들이지 당신의 아들이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탁 뿌리치는 거라. 그러니까 어머니 입장에서는 얼마나 쇼크를 받았겠어? 저녁마다 이 아이를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부처님이 나중에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비유를 하느냐면 나중에 "개미 언덕과 같다" "개미 언덕이 불타고 있다. 낮이나 밤이나 불타고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밤에 불탄다고 하는 것은 낮에 열심히 일하고 나서, 밤에는 생각한다고 불타고 있는 거라. 머리가 쉬질 못하고 있는 거라.

낮에 불탄다고 하는 것은 밤에 생각한 것들을 낮에 또 열심히 뭘 한다고 해가지고 또 불탑니다. 그래서 개미언덕이라고 해서 낮이나 밤이나 항상 불타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마만큼 우리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이 어머니도 낮이나 밤이나 아들 생각에 사로잡혀가지고 제대로 일을 잘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거라.

 

아마 여러분도 거의 비슷할 겁니다. 자식 생각이나 여러 가지 근심걱정들이나 항상 거기에 매여있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는 안된다는 거라. 개미언덕과 같이 불타는 상태가 되어 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안된다는 거라. 마음은 어쨌든 그 불이 꺼져야만이 마음이 청정해지고 고요해지게 되는 것이지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 어머니는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 내가 저렇게 집착하던 저 아들놈이 저렇게 매정할 수가 없구나. 그러고 나서 그전에는 아들 생각하고 아들 의지해가지고 살았는데 인제 어디를 의지할 거라? 의지할 데가 인제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밖에. ‘에이, 그래. 저놈의 아들 인제 없는 셈치자’ 하고 탁 떨쳐내고 나니까 그때부터 공부가 되는 거라.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노력해가지고 결국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아들 꾸마라깟사빠는 어머니를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실은 그렇게 한 거죠.

 

어쨌든 우리가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참 강하다는 거라. 그 집착을 끊어버리기 전에는 순조롭게 수행을 할 수도 없고, 또 깨달음에 이를 수도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한 것이 뭐냐면 이 "앗따 히 앗따노 낫토" "실로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수호자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자이고,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자이고, 자기 자신이 나아가야 되는 길을 나아가도록 만드는 자라는 그런 뜻입니다.

 

네 번째, 무엇을 해도 실수가 많은 사람은 무슨 법이 빠져있는가?

뭐가 빠져있을까? 뭔가 자꾸 실수한다? (수행자 : 사띠하는 것) 사띠가 빠졌고, 또 하나 뭐가 빠졌을까? 사띠와 삼빠자나가 빠졌습니다.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를 경우에는 사띠가 빠진 거고, 그러면서 그걸 의식하지 않고 그 행위를 쭉 하게 될 것 같으면 삼빠자나가 빠진 거라. 그마만큼 사띠와 삼빠자나는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실수가 없이 바르게 뭔가를 행할려고 할 것 같으면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어야 됩니다.

 

사띠라고 쓴 사람들이 좀 있는 모양이네? 사띠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삼빠자나. 사띠가 연속되는 것이 삼빠자나 입니다. 한 번의 알아차림만으로써 끝낼려고 하지 말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호흡하고 있고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가는 것들이 삼빠자나라. 그러니까 하나의 행위가 시작되어서 하나의 행위가 끝날 때까지는 삼빠자나가 연속된다고 보면 되는 거라.

사띠도 연속되는 것이지만 삼빠자나도 쭉 이어지는 상태, 그렇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자신이 행하는 행동에서 올바르게 뭘 하고 있는지를 내가 알아야 되는 거고, 그걸 아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걸 올바르게 이해해가지고 그것이 연결되도록 그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이게 네 번째입니다.

 

다섯 번째, 무상··무아가 표면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엇에 의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 수 없는 거라?

(수행자 : 무명에 가려서) 무명에 가려서? 그럴 것 같으면 무상·고·무아라고 안 하고 아예 삼법인이라고 하지 문제를 왜 무상·고·무아라고 했을까? 무상은 무엇에 인해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고는 무엇에 인해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무아는 무엇에 인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라?

 

무상한 것은 뭣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거라? 무상한 것은 뭐라? 변하는 거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못 드러나는 거라. 상속한다는 거라. 상속(相續) 산따띠(santati)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빨리어로. 항상 존재한다, 항상 연속해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자꾸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어제도 살아있었고 오늘도 살아있었잖아. 그러니까 내일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는 거라. 내일 죽는다, 아니면 당장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하고 항상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런데 그게 부서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슬픔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연속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거고, 그것이 부서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아서도 안된다는 거라. 그게 뭣 때문이냐면 무상한 성품들이 드러나지 않고 무상한 성품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걸 산따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상속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괴로움은 왜 그런가? '이리야빠타(iriyāpath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거라. 즐거움은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얘기했어요? 즐거운 것은 즐거움은 변화해서 괴로운 것으로 바뀌어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 탐닉하고 빠지지 않게끔, ‘저 즐거움은 언젠가는 끝나서 괴로움이 온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 즐거운 느낌을 계속 지속할려고 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 대신에 괴로운 느낌은 어떻게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변화하는 것으로서! 변화한다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괴로움에 빠져서 힘들어서 죽습니다. ‘아, 저 괴로운 것도 언젠가는 변하겠지’ 하고 생각해야 내가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라. 변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내가 그걸 굳건하게 극복해나갈 힘이 생기는 거라. 그걸 '이리야빠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괴로운 것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뜻하고, 그것을 '위의(威儀), 처신하는 방법'이라는 뜻합니다,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따라서 괴로운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알지 못하면 괴로우면 괴로움에 빠져서 괴로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빠지고 더욱 더 괴로움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어쨌든 무상한 것도 드러나야 되는 거고, 괴로운 것들도 드러나야 되는 거라. 그래야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다음에 무아는 무엇에 의해 그렇게 됩니까? (수행자 : 유신견) 유신견도 일견 맞습니다.

'가나 산냐(Ghana Saññā)' 라고 해서 '두께'입니다.

뭔가 우리가 뭔가를 사왔다, 이 두께가 느껴지죠. 이 두께가 느껴지면 무아인 것을 모르는 거라. 이 두께는 실제 존재하는 겁니까? 조건에 의해서 형성돼있는 것뿐입니다. 이 조건이 없어져버리면 이 두께도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 두께가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나는 존재를 하는 거고, 책상은 존재를 하는 거고, 뭔가 대상들은 존재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두께를 자꾸 느끼려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형태로써 자꾸 느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 형태라고 하는 것은 조건 따라 형성된 것이다. 조건이 사라지면 당연히 그 형태들도 사라져버린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무아를 극복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나가 없다고 하는 것, 무아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형성된 것들은 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것뿐이다" 하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을 "무아를 분명하게 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뭔가 재산이 100원이 있다, 100원이라고 하는 두께로 있다. 100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00원을 만드는 조건에 의해서 100원이 만들어진 것이지, 그 조건들이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 100원도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알 거 같으면 100원이 있는 두께에서 10원이 되는 두께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여섯 번째, 수행하는 이유가 뭔가?

여러분은 왜 수행해요? 죽지 않는다면 수행할 것 같아요? 수행 안 합니다. 천상에서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만 죽음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수행을 안 합니다. 닙바나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늙지 않으면 수행할 것 같애요? 안 합니다. 병들지 않으면 수행할 거 같애요? 안 합니다. 또 뭔가 파괴되는 것이 없으면, 쉽게 말하면 가족이나 친척들이 죽음을 맞는 것이 없으면 수행 안 합니다. 또는 자기 재산들이나 가진 것들 그것들이 파괴되고 없어지는 것이 없으면 수행 안 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수행하는 거라. 그런데 이런 것들은 여러분 옆에 있는 거죠? 여러분 옆에 있는 겁니다. 다른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동물이나 아니면 천상신들이 소유물이 있어? 아니면 늙음이 있어? 아니면 병듦이 있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부류들은 그것들이 있는 줄조차도 모릅니다. 인간의 수명은 그것들을 알기에 적당한 것이고,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알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었다는 거라. 그래서 인간일 때 수행해야 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나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수행하는 겁니다. 어쨌든 그런 조건들은 누구나 다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조건들을 감출려고 하는 것들이나, 아니면 그런 조건들을 거부할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 그런데 거부하고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거라?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지 않으면 그러한 조건들이 내 곁에 왔을 때 나는 그것들을 넘지 못하는 거라. 누가 죽는다고 할 것 같으면, 실제 그런 경우들을 봤어요. 해운대에 있는 분이 자기 아들이 갑자기 목을 매가지고 죽었어요. 그런데 이걸 못 넘어가지고 결국은 집도 팔고 뭐도 하고 하더니 결국 그 사람은 종적을 감춰버렸어요.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안 듣는 거라. 그 슬픔에 잠겨있으니까.

 

가족이나 친척의 파멸을 못 견디는 거라. 아니면 재산이 갑자기 소실됐다, 아니면 돈을 누구한테 떼였다, 못 견디는 거라. 그걸 평소에 수행을 통해서 연습해놓지 않으면 이걸 못 넘어가지는 거라.

늙음도 마찬가지고 병듦도 마찬가지고 죽음도 마찬가지라. 여러분 곁에 항상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자꾸 수행을 통해서 그걸 놓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거는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계속 오는 것들입니다. 끊임없이 계속.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수행을 해야 되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는 겁니다.

 

일곱 번째, 경율론 삼장에 대해서 그 내용 요점을 하나의 빨리어로 나타내라. 그리고 그 빨리어가 들어간 문장이 뭐가 있는가?

그러니까 불교를 한마디로 말하면 뭐가 되나 하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 : 담마) 담마? 그럼 담마가 들어가는 문장이 뭐가 있어요?

이거는 사실은 정답이 없습니다. 경율론들을 다 배워야 되는 이유가 뭐냐면, 담마면 담마에 들어가는 문장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됩니다. 담마의 조건들을 분명히 갖춰야 되는 거고.

 

스님은 뭐라고 정의를 했느냐면, 부처님 마지막 가실 때에 뭐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 방일하지마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문장들을 ‘어, 이게 어디에 나오지?’ 하는 것들은 적어도 여러분들이 해야 됩니다. 노력하고, 그다음에 끊어야 될 번뇌들은 끊어내고, 그다음에 방어할 것들은 방어하고, 뭐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법에 따라서 살아가게 되고, 법이 그 사람을 보호하게 되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압빠마다(appamāda)'를 스님은 했는데 그건 각자 다릅니다. 그래서 노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 하는 것들을 빨리어 구절을 자꾸 떠올려가지고 ‘아, 내가 이래선 안되겠다’ 하는 것을 떠올리고, 경율론을 배우는 것들은 그런 의미입니다. 뭣 때문에 자꾸 배울려고 그러는데? 그 문장만 외워가지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여덟 번째, 경전만을 학습하는 사람, 경전을 학습하고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 이 두 명에 대해서 부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쉽게 말하면 실천 안 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 또 한 사람은 공부는 쪼금만 하더라도 실천하는 사람, 이걸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소를 세는 거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소를 세는데 "자기 소를 세는 자와 남의 소를 세는 자"

경전만 아무리 공부한다고 해도 남의 소를 세는 거와 같다, 남 좋은 일을 시켜주고 있다는 거라. 남의 소 센다 해가지고 그게 자기 것이 되나? 아니라는 거라.

 

자기 소를 세도록 해야 됩니다. 설혹 한 구절밖에 모른다고 하더라도 법에 따라서 자꾸 실천하는 생활들을 해야만이 탐 진 치를 제거할 수 있는 거라. 탐·진·치를 제거해야 만이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는 거라. 이 세상에서도 집착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더 떨어뜨려 나가고, 그것은 저세상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 사람들이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지, 남의 소 세는 사람은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수행주제도 자기 자신이 돼야 되는 것이지 밖에 것들이 돼서도 안 되는 거고, 실천하는 것들도 자기 자신이 실천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남의 것들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려서는 안 되는 거라. 남이 잘하고 못하고 하는 그것들을 자꾸 관심 사항으로 두어서는 안 되는 거라.

특히 테레비를 보면 우리는 재미가 없는데 왜 사람들은 연예인들 무슨 가십거리 뭐가 재미있다고 그걸 보고, 그거 남이 일 알아서 뭐할 건데? 그러고 있는 거라. 그걸 보고 나서 뭐 어느 연예인 어쨌다 저쨌다 하고. 남의 소 세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자기 소를 자꾸 세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만큼 탐·진·치를 소멸시키고 있느냐? 수행대상을 얼마만큼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만큼 내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져 있는가? 그래서 번뇌들이 얼마만큼 제거돼서 다신 안 일어나게 됐는가? 스스로 자꾸 파악을 하도록 해서, 그래서 어느 것들이 떨어지고 나면 아, 내가 이것들에 대해서는 다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악에 물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뭘 시켜도 뭘 어째도 이것으로 인해서 악에 물들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자꾸 영역들을 넓혀나가서 해탈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덟 문제 다 맞힌 사람? 그래도 한 절반은 맞혔을 거라고 봅니다. 수업하는 것들 쭉 따라오면서 또 잘 배우고 또 수행도 열심히 하고 하면, 조금은 그래도 반 정도 어떤 경우에는 3분의 1 정도는 맞혔지 않았을까 스님은 기대를 해봅니다. 자신이 만약에 그렇게 쓰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부족한 게 뭔가 하는 걸 반성해가지고 조금 더 할 수 있도록 하고, 경전 공부하고 하는 것들 배우는 것들이 좀 부족한 것들은 보충할려고 하고, 또 수행하는 것들이 많이 떨어지면 수행하는 쪽으로 자꾸 보충할려고 하고, 해서 자꾸 발란스를 맞추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한 달 남았습니다. 한 달 남은 동안에는 더 열심히 해서 마지막 안거 해제할 때 ‘아, 그래도 내가 이번 안거석달 동안은 알차게 잘 보냈다’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하고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