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탁발과 보시 (20150910.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29. 09:00

https://youtu.be/NFpg5WoaJ70

* 탁발과 보시 (20150910.대구)

 

오늘은 「탁발과 보시」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가끔씩 인터넷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그 뭐라고 해야 되나... "급한 일이 있다면서 돈 좀 빌려주세요" 하고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계좌번호 하고 적어서 올리니까 그걸 믿고 돈을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계속 그렇게 올리겠지.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싸잡아서 "저건 틀렸다" 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한국에 출가한 스님들이 탁발을 해나갈 때 종교가 다르다고 "우리는 불교 안 믿어요" 그렇게 하면서 매몰차게 거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떠 어떤 경우는 장사하는 집의 경우 "아직 마수도 못했는데 탁발하러 왔느냐" 하면서 비난을 하면서 뭘 주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탁발이라는 것은 지금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당시 또 그보다 훨씬 이전에, 역사로 보면 아리야족이 인도로 들어오면서 기원전 2000년 전부터니까 지금부터 약 4000년전부터 시작이 됐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역사적으로 보면 4000년간 지속돼서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는 거 보면 굉장히 오래된 거죠.

 

탁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하는 탁발이 있고, 또 하나는 출가하지 않은 분들이 하는 탁발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출가한 스님이 하는 탁발도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빌어먹는 거기 때문에 그것을 "비천한 일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아니면 재산이 없어서 아니면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탁발을 하는 일반적인 사람들, 거지나 그 비슷한 부류들도 비천한 일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출가한 스님들도 사실은 비천한 일을 하고 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길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출가한 스님들이 하는 탁발은 좋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이 하는 탁발은 좋게 생각을 하지 않게 될까?

왜 그럴까? 부처님은 똑같이 비천한 일이다 하고 얘기를 했는데.

 

부처님 당시 때 빤짝가다야까(Pancaggadayaka) 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빤짜(Panca)라고 하면 다섯을 뜻합니다. '항상 다섯 가지를 행할 때 먼저 그것을 떼어내가지고 탁발을 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곡식을 처음에 거두어들일 때 벼가 다 익고 나면 그중에서 맨 먼저 베는 것은 따로 남겨놓았다가 그것은 탁발을 하고, 또 타작할 때 돼가지고 우리말로 하면 오분도 백미 이렇게 벼를 깍을 때 그때 맨 처음 깍은 곡식은 탁발을 올리고, 또 곡식을 창고에다가 저장해놓을 때 맨 처음 창고에 저장하는 것들을 먼저 떼어놓고 탁발을 올리고,

또 밥을 지을 때 맨 처음 밥을 지었을 때 첫 밥을 항상 탁발을 올리고, 그다음에 자기가 먹을라고 그릇에 옮겨놓은 것도 그중에 맨 처음에 자기가 숟가락을 뜨기 전에 그걸 떼어가지고 탁발을 올리고, 이렇게 다섯 번을 탁발을 올린다고 해가지고 빤짝가다야까 라고 그렇게 이름 붙여진 분이 있었어요.

이분은 물론 출가한 스님들께 그렇게 탁발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 것들을 떼가지고 탁발을 올리려고 했을까?

그게 지금도 테라와다 불교권에 가면은 그렇게 합니다. 아침 공양을 음식을 하면서 맨 처음 것들을 항상 먼저 빼가지고 "이것은 탁발할 거다" 하면서 탁 빼놔놓고 나서는 자기들이 아침을 먹을 거 같으면 아침을 먹고, 그렇지 않으면 아침을 먹지 않고 탁발 올릴 것만 가지고 가서 먼저 탁발 올리고 나서 자신들이 공양을 하고 그런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맨 처음 게 성스러운 그런 뜻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죠! 밥 지을 때 맨 위에 밥이 성스럽다 그런 것도 아닐 거고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관념적으로 사람들이 '처음 것들은 때가 묻지 않았다'는 거죠. '깨끗하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탁발을 그렇게 올릴 때는 깨끗한 분들한테 탁발을 올린다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탁발을 받는 분들이 깨끗한 일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지. 출가한 스님이든 아니면 거지든 그것을 받은 사람이 깨끗하게 수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깨끗하게 살아간다든지 남에게 도움되는 일을 한다든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자신이라도 청정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돼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출가자이든 일반인이든 그 탁발을 올린 것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게 그날은 밥을 먹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온 줄을 몰랐어요. 부인이 방해를 해가지고. 그래서 한참 밥을 먹다가 부처님이 온 것을 알고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내가 이때까지는 내가 먹지 않은 거, 아무도 그걸 건들지 않은 거, 맨 처음 것만 탁발을 올렸는데 지금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거라도, 먹고 있었던 오염된 것이지만 이거라도 반 떼어내서 드릴테니 부처님 이거 드시겠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당연히 먹지.

그래서 반을 떼가지고 부처님께 드리니까 부처님이 그걸 잘 잡쉈어요.

 

오염된 것들을 설혹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들로 인해서 오염되지 않을 거 같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음식이라 해도 어떤 사람들은 그걸 먹고 탈이 나는데 어떤 사람들은 탈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에 대해서 자생력이 있든지 그것을 이겨낼 힘이 있을 거 같으면 그걸 먹고 탈이 안 납니다. 설혹 탈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 탈이 난 것이 오염된 것을 줘가지고 먹은 것 중에서 탈이 났다고 여기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오염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이렇게 먹다 남은 것이라도 드시는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몸과 마음 그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일도 없는 자, 그런 자들을 일러서 빅쿠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어느 것에도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물질적인 것 오염된 것을 줬다고 해가지고 내가 탈이 났다고 해가지고 그 탈이 난 것은 오염된 것들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원인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여기는 것뿐인 거죠.

 

그렇게 봤을 때는 탁발하는 사람이 그것이 설혹 사악한 방법으로 그것을 탁발해서 그것을 나쁜데 쓴다고 하더라도 탁발 주는 사람이 탁발을 못해야 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아까 얘기했듯이 인터넷에서 "아, 지금 당장 급합니다. 아니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했을 때 ‘아, 이것은 틀림없이 사기다’ 하고 생각이 드는데도 그것들을 못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그것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사람은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인 것이지, 내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성을 일으키면서 주지 말아야 되는 조건조차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물론 준 것들에 대해서 돌아올 것들을 생각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틀림없이 나에게는 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덕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기브 앤 테이크" 아니고 "기브 앤 리시브" 입니다. 내가 주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공덕이 돌아오든 안 돌아오든 그냥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인터넷에 그런 것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왜 이렇게 자꾸 선악을 구분하게 되는가?, 자기 기준에서 선악을 자꾸 구분할려고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 몫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하는 선악은 견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들로 사회적인 조건들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에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불교적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진리에 맞게끔 그것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자신이 안 준다고 해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사기다 주지 말아라" 하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탁발을 나온 출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설혹 아직 마수도 못한 상황이고 또는 자신도 아직 밥을 먹지도 못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 탁발을 나온 사람들은 출가자이든 일반적인 거지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그럼 그런 분들은 나로 인해서 내가 주는 탁발로 인해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설혹 내가 아직 마수도 못하고 내가 아직 밥을 먹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줘가지고 문제가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드리는 것이 그게 맞다는 겁니다.

 

자신의 조건을 자꾸 따져서 탁발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법을 받아들이는데도 조건에 따라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법은 어떤 것에도 조건에 걸리지 않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스님에게 탁발을 올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이거 스님이 콜레스테롤이 높다든데 이거 기름에 볶아서 톨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건데 이걸 줘서 어떡하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할 거고, 어떤 경우에는 아, 내가 주는 게 김치쪼가리 밖에 없어서 참 빈약하다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할 거고, 어떤 사람은 잔뜩 가져와가지고 만족한 마음에서 주기도 할 거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받은 스님은 그걸 압니까?

그냥 동일하게 똑같이 먹습니다. 그게 기름을 많이 먹은 것이든 그냥 소금기가 없는 것이든 그냥 동일하게 똑같이 먹습니다. 콜레스테롤이 높은 음식이든 그렇지 않은 음식이든 아니면 싱거운 음식이든 그것은 먹는 사람이 결정해서 먹는 일이지 여러분들이 걱정해야 될 부분은 아닙니다. 김치를 줬든 아니면 많이 줬든 그것은 여러분들의 몫인 것이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은 아니라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들을 공양 올릴 때의 마음가짐은

"이것으로 인해서 탁발을 하시는 스님께서 빨리 건강하기를", "이것으로 인해서 빨리 닙바나에 이르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좋은 법들이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하는 마음들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어떤 조건의 음식을 공양 올리더라도 가져야 될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런 "탁발 올리는 것으로 인해서 하루빨리 나도 닙바나에 이르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면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밥을 먹기 전에 탁발을 온 것이든 아니면 마수를 하기 전이든 아니면 음식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탁발 올릴 때 가져야 되는 마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빅쿠(bhikkhu)'라는 것을 서양에서 번역할 때는 '빌어먹는 자'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걸 '걸사(乞士)'라고 한문으로 음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빅쿠(bhikkhu)' 번역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번역을 잘 안 할려고 그럽니다.

'번뇌로부터 떠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 그래서 '몸과 마음이 어떠한 것이든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 나의 것이라고 하는 번뇌가 없이 살아가는 자'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해가지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을 일러서 빅쿠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한 자는 똑같이 비천하게 먹고 살지만, 일반적인 사람 거지나 일반적으로 빌어먹는 사람들 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거라. 일반인들은 설혹 그런 것들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자신의 마음을 번뇌에 휩싸여가지고 그것을 받을 수는 있지만 출가한 사람들 출가한 수행자, 비구들은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또한 그것을 얻어먹기 위해서 수단을 써서도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경우들을 봅니다. 법을 설하는 목적이 뭔가를 얻기 위한 것,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라든지 또는 금전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라든지, 그러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들을 봅니다. 그것은 대승불교 스님이든 테라와다스님이든 동일한 경우들을 봅니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을까 하는 거라.

어차피 빌어먹고 살고 있는데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그래서 수행으로써 닙바나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하고 그럴 거 같으면 적어도 명예가 높아진다든지 뭔가를 얻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은 없어야 되는데 왜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뭔가를 이용하는 경우도 꼭 마찬가집니다. 사주를 봐준다든지 점을 봐준다든지 아니면 부적을 써준다든지 뭐 기도를 해준다든지 이런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뭔가를 이용해서 재물이나 아니면 명예가 높아지기를 바란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바라문들이 그랬다고 합니다.

바라문들은 탁발을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탁발을 나가는 출가자이든 그리고 탁발을 하는 일반적인 사람이든 싸잡아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탁발을 나가는 부류들이 바라문을 비난합니다. 뭐라고 비난을 하느냐면 “너희들은 뭐 잘난 게 있느냐?” 그렇게 점봐주고 미래봐주고 그러면서 재물을 취하는 거 그것은 잘하는 것이냐? 재물을 취하는 게 도가 지나쳐가지고 그 가정의 가사가 탕진될 정도로 재물을 취한다는 거라. 천도재 뭐 천만원, 천만원이 집에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 건데? 바라문이 하는 것들을 그래서 탁발을 하는 부류에서 그렇게 또 비난을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출가한 비구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것들을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재물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쓰지 말아라." 그럽니다. 그림을 그린다든지 뭘 하든지 이렇게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얻을려고 하지도 말아라는 거라. 하물며 그런 것도 하지 말아라 그랬는데 법을 설하는 것으로 인해서 재물이나 명예를 얻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더더구나 안된다는 거라.

 

또한 "탁발을 받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조리한 것들을 받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조리하지 않은 생쌀, 생야채 이런 것들은 반드시 조리를 하라."

이게 빤짝가다야까에게 부처님이 얘기한 게송 부분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4000년간 탁발이 이어져왔다는 것은 그마만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는 부패해가지고 잘못되게 악용되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그렇지 않고 탁발하는 것이 출가자뿐아니라 일반인들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은 그거 전체를 다 허용을 했다는 거라.

출가자에게만 하는 것이 탁발은 아닌 거고, 또는 그것을 악용해서 탁발을 할려고 하는 사람들도 탁발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은 못 된다는 거라.

 

단지 그 탁발을 받은 사람들은 진리 따라 살아가는 사람일 것 같으면 반드시 그 조건에 맞는 탁발들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탁발 받을 만한 것들을 탁발 받아야 되는 것이고, 탁발을 해서 먹고 살면 그마만한 가치를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거라. 번뇌를 여읜다고 하는 것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나가는 것들, 법을 법답게 설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는 것들, 그런 것들을 갖추어라 하는 거라.

 

또는 설혹 그런 것들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탁발을 못할 조건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일반인들도 그렇게 탁발하는 사람들을 자신이 안 하면 그만인 것이지 그걸 다른 사람을 종용한다든지 그것을 비난할 성질은 되지 못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하는 사람들을 설혹 그것이 자신이 먹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탁발하는 것들을 허용을 했습니다.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인 것이지 탁발 주는 사람이 비난할 부분은 못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게송에 보면 만약에 더럽혀진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집에서 탁발을 하는 것만으로써 진짜 빅쿠는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다든지, 아니면 법을 설할 목적이 아닌 상태에서 탁발을 한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역해서 그것을 배워나가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할 목적으로 탁발을 한다든지, 그런 자는 틀림 없이 빅쿠는 되지 못한다. 올바른 출가자는 되지 못한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탁발을 못하는 조건은 되지 않는다 하는 거라.

 

자이나교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출가자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모든 것을 아는 지혜로운 자이다. 일체지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자이나교 교주가 "나는 눈을 뜨고 살아갈 때도 모든 것을 알고 눈감고 있을 때도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자다" 하고 선언을 합니다.

 

부처님이 그 얘기에 반대를 합니다. "일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오온이다."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다. 일체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런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거라.

왜 이런 번뇌가 일어나고, 왜 이런 마음이 일어나고, 몸에 대해서 물질적인 현상이 어떤 것이고 하는 것들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거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자가 일체지자인 것이지, 일체지자는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것이 일체지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자이나교 교주는 왜 길을 몰라서 이 길은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어보느냐는 거라.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안 간 길도 알고 있어야 되는데, 왜 그 길은 어디로 가는지 몰라 갖고 물어보느냐는 거라. 그것을 일체지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거기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는 자, 그것을 일체지자라고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남들이 설혹 나쁜 음식 또는 하찮은 음식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자, 그것이 출가자들이 해야 될 일이라는 거라.

탁발을 하는 사람이 모두 그와 같이 되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을 비난할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탁발이라고 하는 것은, 걸식이라고 하는 것은 4000년간 이어져 온 문화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탁발해서 그걸 보시를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맑고 또는 수행해나갈 의무는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꾸 탁발 받는 사람들이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출가자들은 보시받는 것을 목적으로 탁발을 하지 말아라.

보시받는 것을 완성하는 것은 깨달은 아라한일 뿐입니다. 그 완성자는 부처님과 아라한과 같은 분들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해서 탁발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단지 출가자들은 반드시 나도 그와 같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수행해나가고 바른 법을 설해나간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탁발을 올리는 사람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제한을 두면 안 됩니다.

법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지 않듯이 남에게 베푸는 것들도 제한을 두면 안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