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환자는 스스로 약을 먹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일 수는 없다. (20150814.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23. 09:00

https://youtu.be/1QdcgLIU_RA

* 환자는 스스로 약을 먹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일 수는 없다. (20150814. 대구)

 

··· 25일날 하니까 또 받아야 돼. 힘들어. 이게 막 바늘자국들이 있잖아. 이게 내가 부탁을 했거든. 한국에는 간호사들이 남자들이 잘 없잖아. 태국 같으면 항상 병원마다 간호사가 남자가 반드시 있게 돼있어요. 스님들을 하기 위해서, 여자들이 아무리 병이 있지만 스님들의 몸을 만질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장갑을 끼고 해주십시오” 이랬거든. 그러니까 장갑끼고 이렇게 하는 게 감각이 잘 없는 모양이라. 그래서 엉뚱한 데다 찔러가지고 링겔이 팔에 샜어. 그래가지고 혈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팔에 그냥 다 맞아버렸어. 그러니까 퉁퉁 부어가지고 그런 적이 있는데, 그렇게 가사를 입고 그냥 하도록 해달라고 했더만 그렇게 해주더라고. 그런 거는 병원측에서 조금 배려를 해줘가지고 잘 받고 왔습니다.

 

자! 오늘 할 거, 오늘은 오전에 할 거, 오후에 할 거 두 가지입니다.

오전에는 일반 생활법문이 들어가지고, 오후에는 수행법문이 들어가지게 됩니다. 봅시다.

 

「환자는 스스로 약을 먹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일 수는 없다.」 하는 겁니다.

그렇죠? 맞는 얘기죠? 아프면 자기가 약을 먹어야지 남한테 약을 먹여가지고는 되겠느냐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게 잘 안 하고 있잖아. 그런 거 많죠?

대표적인 게 화가 났다, 그게 외부자극에 의한 것이든 뭣이든 화가 났으면 화가 난건 누구라? 자기 자신이지. 그럼 자기 자신이 약을 먹어서 화를 다스려야 되는 것이지, “니가 어쩌고” 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하고 있다는 거라. 약은 어떤 경우든지 자기가 아프면 자기가 먹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먹여서는 안됩니다. 소리가 잘 안 들립니까? (잘 들립니다.) 그걸 적어놓은 겁니다.

 

새들 중에서 그래도 까마귀 같은 경우에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을 거 같으면 음식물쓰레기통을 부리를 가지고 벌려서라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음식물을 끄집어서 먹습니다.

그게 단단한 비닐로 쌌던 아니면 다른 거를 해놨든 그걸 끊고서라도 들어가서 그 음식을 먹는데, 그런 까마귀라 하더라도 날아가는 애를 얇은 그물 같은 것을 씌운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닐봉지라도 씌워버릴 것 같으면, 그냥 땅에 있을 때는 잘 쪼아가지고 구멍을 뚫는데, 이 놈은 자기가 그물에 탁 갇혔다는 생각이 들면 쪼은다는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라. 대부분 그래가지고 다 잡힌다고 얘기합니다. 까마귀뿐 아니라 다른 새들도 전부 마찬가지라는 거라.

 

왜 그럴까? 왜 일상적으로 자기 제정신으로 먹고 싶은 거 먹을려고 찾을 때는 아무리 딴딴한 것도 쪼으고 찢어가지고 그 먹이를 먹는데, 자기가 갇혔다는 생각이 들 거 같으면, 잡혔다는 생각이 들 거 같으면 똑같은 건데도 그걸 왜 못 찢고, 비닐을 가지고 이렇게 해도 그걸 뚫어가지고 나갈 생각을 못합니다.

그게 인제 까마귀 자신은 스스로 갇혔다는, 잡혔다는 생각이 들 거 같으면 할려고 하는 마음, 그걸 쪼을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무지에 갇혀버리면 더 이상 할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그게 어리석은 줄 모르고 그걸 즐기게 됩니다. 편안하다 그럴 것 같으면 편안한 걸 그냥 즐길려고 합니다. 범부 지혜 가지고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명료하게 마음이 깨어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냥 그거 즐기고 논다는 거라. 여러분과 까마귀가 사실은 별반 차이나는 것은 없다는 거라.

 

왜? 왜 웃어요? 그리고 까마귀들이 자기가 갇혔을 때는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밖에 있는 것은 잘 찾듯이,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어리석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남이 쪼매만 잘못해도 그냥 죽일놈 살릴놈 한다는 거라. 많이 그렇게들 하잖아? 남이 조그만 거 하나만 잘못해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는 거라.

마음들이 왜 다들 밖으로 나가 있느냐는 거라.

 

자기의 어리석음이나 자기의 잘못에 대한 것들을 볼려고 생각을 안 하고 밖으로만 자꾸 볼려고 한다는 거라.

무지한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지 환자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 세상은 어리석음에 가득 덮혀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들'을 얘기합니다. 그 모든 생명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항상 어리석은 상태인데, 범부중생인데, 그 범부중생들은 자꾸 자기 자신에게 약을 먹여야 되는데 남에게 약을 먹일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도 알겠지만 머리 큰 사람들 뭐 얘기한다 해서 바뀌어요? 안 바껴요. 그거 괜히 쓸데 없는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자기자신의 마음만 자꾸 악해지고 서로 감정들만 상하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그 잘못을 보고 자기 자신이 마음을 먹고 ‘아, 나는 저런 잘못 안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을 거 같으면 오히려 자기 자신은 이익이 되는 것들인데, 그렇게는 안 하고 자꾸 남의 것만 볼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는 하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그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서만 자꾸 생각을 한다는 거라. 자기 기준에서만.

옛날에는 지구가 평평하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걸 조사를 해보니까 지구는 둥글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지구가 평평하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어리석다고 한다는 거라. 스스로 그것을 알고 증명하고 나면 그 앞의 논리는 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 사람은 자기의 견해에 갇혀버리면 그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거라.

만약에 여기 스님 손바닥에 박테리아가 많이 있다.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뭐로 봐야 되요? 현미경으로 보고 봐야 되는 거라. 그런데 이걸 망원경 가지고 보입니까? 안 보인다는 거라. 그런데 망원경으로 보는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는 천체의 별도 다 관찰하는 망원경인데, 이것도 당연히 보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봤을 때 없으면 박테리아가 없다고 얘기를 하게 되는 거라. 그 견해에 딱 갇혀버리는 거라.

그런데 이것을 볼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현미경으로 봐야 되는 거라.

반대로 별을 볼 때도 그거는 현미경으로 봐야 되는 것이 아니고 망원경으로 봐야 되는 거라.

 

무얼 가지고 볼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내가 뭔가를 알게 될 때 그 '아는 방법'이 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보는 것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예를 들면 "누구든지 죽음을 맞이한다." 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구든지'에 '나'도 포함이 된다는 거라.

그럼 그렇게 아는 사람은 ‘아, 나도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는 구나.’ 하고 알고 ‘죽기 전에 하루빨리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기 전에 내가 선한 일들을 좀 더 많이 해야지’ 그런 마음을 내야 그게 일반적으로 불교적으로 사는 건데,

아는 방법을 잘못 알아버리면 ‘아,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열심히 다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나한테 언제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냥 죽음을 기다리겠다’ 하고 판단할 수도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이 살아가는 방법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아는 방법'에 따라서 굉장히 차이가 난다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이 테라와다 불교를 믿고 또 그것을 따른다고 할 거 같으면 테라와다 적으로 그 아는 방법들을 결정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불교에서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계속하게 되고, 하라는 것은 안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불교에서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논리적인 게 확인이 되지 않는 것들, 아무리 경전에 써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도 믿지마라 라고 했는데, 경전을 보면서 "너는 틀렸다" 하고 얘기한다는 거라. 자기가 그것을 체험해보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누군가가 "아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한다. 진아가 있다."

그러면 경전을 근거하는 사람은 "진아 그거는 없다. 틀렸다."

자신은 무상한 것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면서.

그리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계속 싸움만 되는 거라. 그래서 아는 방법도 반드시 스스로 체험을 해보고, 그리고 그 체험을 근거해서 확신이 들 때 그것들이 자기 것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돼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그것이 맞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일화를 거기에 적어놨습니다. 부처님이 법문을 설하러 가면 어떤 사람들은 그거 그냥 듣기만 할려고 하지 그걸 실천할려고 안 한다는 거라. 뜬구름 잡는 얘기로만 들리니까 어떤 경우에는 부처님이 계속하다가 오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요.

그런데 그렇게 법을 설하고 있는데 어느 소녀가 그 부처님 법을 들었어요.

"이 세상은 참 무상한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래 무상하다.' 무상을 체험할 생각은 안 하고 '그거는 무상한 것이다' 하고만 알고 그냥 끝나버리는데, 이 소녀는 ‘어! 무상하다? 그럼 이 세상에 나도 포함된 것이니까 나도 무상한 것이구나. 그러면 나의 몸과 마음에 어떤 것이 무상한 것이냐’ 해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해보니까 내 몸도 내 마음도 항상 하는 것이 없이 변해가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부처님이 그 마을을 방문을 했는데 부처님이 법을 설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든.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왜 부처님이 지금 법을 설하지 않을까? 부처님은 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

이 소녀가 오니까 부처님이 “너는 어디서 왔느냐?” “모릅니다.”

“어디로 갈 것이냐?” “모릅니다.”

“알고 있느냐?” “압니다.”

“모르느냐?” “모릅니다.”

이렇게 선문답을 하니까 사람들이 무슨 얘긴지를 모르는 거라.

 

여러분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난지를 알아요?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어요?

내일 서울에서 법문할 것 중에 하나가 '수따마야 냐나(suta maya ñāṇa)'라고 하는 주제로서 오후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듣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는 법" 입니다.

그렇게 일어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수따마야, 그다음에 찐따마야, 바와나마야 입니다.

수따마야는 법문이나 경전을 읽고 듣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그다음에 선정삼매를 체험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고 한적하게 되는 것들로 인해서, 그다음에 수행하는 것들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꼭 수행으로만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물론 그것이 순차적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보면 법문을 들을려고 하더라도 법문을 들을만한 공덕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 하는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여기에 모인 것을 보니까 그런 공덕을 쌓았을 거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여기와서 들을 거 아니라.

또는 그 법문을 들을 때 그냥 오롯이 그 법문만 들을려고 하고 마음들을 내는 것,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어요. 그게 인제 자기가 행해온 일들 그런 것들의 차이로 인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간단하게 법문 하나 듣는 것도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

여러분들 과거생에 뭘 해왔는지 알고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형태로 해가지고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그걸 알 수 있을까? 뭔 좋은 일 잘한 일 했다고 여기 뚝 태어나가지고 이렇게 있어요? 모른다는 거라. 어디서 왔는지 모르니까.

 

그리고 나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도 모르는 거라. 죽고 나서 다음 세상에 어디로 가는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이때의 소녀는 그 상태이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로 내가 가는지.

'수행 잘했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것들을 체험해서 쭐라소따빤나 작은수다원에만 이르른다고 하더라도 "아, 나는 이제 나쁜 곳엔 절대 안 태어난다" 아는 거라. 그리고 조금 더 수행하다가 보면 "아, 나는 급작스럽게는 절대 안 죽는다" 하는 걸 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물론 좋은 세상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걸 세분화해서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여기는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자기는 확신을 할 수 있다는 거라.

 

또는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 여러분들이 언제 죽을지 알아요? 모르잖아. 그런데 수행 잘하는 사람은 자기가 언제 죽을 때를 압니다. 부처님도 그랬고, 과거의 스승들도 계속 그렇게 해왔습니다. ‘아, 내가 언제 죽겠구나.’ “내가 언제 죽을 거니까 다 모여라.” 그날 반신반의하면서 갔는데 밥 잘 먹고 나서 법문하고 나서 탁 열반에 드는 거라. 자신의 호흡 상태만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급작스럽게 죽지는 않는 거니까, 언제 숨이 끊어진다는 걸 분명하게 본인은 압니다. 3개월 전에 얘길 한다든지 아니면 1개월 전에 얘길 한다든지 이렇게 얘기해주고 합니다.

 

또는 본인이 죽고 나서 어디에 묻힐지 알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죽고 나서 여러분들 후손들이 화장을 할지 매장을 할지 아니면 어디 산에다 냅다 버릴지 그거 모르잖아요. 그런데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결정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경전 곳곳에 보면 본인이 죽고 나서 본인이 직접 그 몸을 태워버린다든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살아있는 생명들에게 그 몸을 바쳐버린다든지,

어느 정도 수행해야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다섯 가지는 모른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위따(jīvita)'라 해서 몇 살에 죽을 것인가? 갑작스럽게 죽을지 아니면 천수를 누릴지 그런 것들.

그다음에 '브야디(vyadhi)' 죽을 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병으로 죽을 것인지, 급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재난을 당해 죽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깔라(kāla)' 라고 해서 언제 죽는가?

그다음에 '데이니카 빠다' 라고 해가지고 죽음 후에 이 시체가 어떻게 될 것인지?

또는 '가띠(gati)' 라고 해서 죽고 나서 어디에 태어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중생들은 알 수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지가 어느 정도 걷힌 사람, 또는 무지가 완전하게 걷혀진 사람들은 이 부분을 알 수가 있다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렇게는 알 수가 있어야 됩니다.

수행하고 공덕을 쌓는 것이 그것 정도도 못 한다면 되겠어?

그래서 이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는 거라. 왜 그렇게 이 소녀는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까? 무상하다 할 것 같으면 무상한 것을 스스로 체험해야 되는 것이지, 무상한걸 남 죽는 걸 보고 ‘아 무상하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본인은 모르는 거라. 그 무상한 것은 죽은 사람이 무상한 것이지 나 하고는 관계없는 거라.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이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나는 환자라는 생각을 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약을 먹을 수 있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다" 하고 강하게 알고 있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될 거 같애? 그것도 여러분이 약을 먹을려고 하는 겁니다.

죽음은 항상 내 곁에 있어서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세속의 여덟 가지 행·불행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조그만한 이익이 있고, 아니면 불행한 것이 있고, 아니면 남에게 비난 받고 하는, 여러 가지 여덟 가지 일들에 대해서, 곧 죽을 사람인데 그거 해서 뭐할 거야? 남이 비난하면 뭐할 거야? 내 죽을 건데. 그건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라.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별 영향을 안 받게 되는 거라.

[세상 여덟 가지 일 : 이익, 명예, 칭찬, 행복, 불이익, 불명예, 비난, 불행]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여덟 가지 빼고 나서 별 거 있는가? 그거 크게 영향 안 받는다 하더라도 마음은 참 고요할 것이라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여러분들은 본인 스스로 그 여덟 가지 일들에 대해서 자꾸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렇게 닦아야 됩니다. 또는 그런 것들을 당했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라.

 

이것(링거수액)도 줄줄줄줄 옆으로 새면 되게 아프거든. 몸 안으로 안 들어가고 여기 팔로 가면, 아프긴 아픈데 차마 말을 못하는 거라. 간호사는 얼마나 미안했겠어? 자기 딴에는 그래도 잘 놓는다고 열심히 땀 뻘뻘 흘려가면서 놨는데 그게 잘못됐으니까 또 그거 빼고 또 땀 뻘뻘뻘 흘려가면서 놔야 될 거 아니라.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이고, 이것도 몸에 들어가는 건데 이게 어디 가겠노. 언젠가는 이게 사라지고 흡수되겠지. 지가 어디 밖으로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아픈데도 그냥 놔둬버렸어. 나중에 팔이 퉁퉁 부어 있으니까 간호사가 깜짝 놀래거든. 아이고, 되게 아팠을 건데 그거 어떻게 참았느냐고 그러는 거라. 가능한 거라.

 

고통스러운 게 오더라도 이것을 견딜 수 있는 힘들이 있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안 받는 거라. 물론 혈관 속을 타고 들어갔을 거 같으면 빨리 몸을 회복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이게 근육 속으로 들어갔든 뭐로 들어갔든 어쨌든 회복하는 데는 좀 더딜지 몰라도 그거는 내 거잖아. 밖으로 빠져나간 게 아니니까. 내가 먹는 건데 뭐 어때?

여러분 음식 먹을 때도 맛있는 거 하나씩 먹는 것이나, 아니면 맛없는 것이든 맛있는 것이 있으면 비벼가지고 먹는 것이나 먹는 것에 대한 집착만 버려버릴 것 같으면 똑같습니다. 그것이 몸 안에 들어가서 산화되고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위장이 그것을 맛있는 걸 알고 맛없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크게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조금 해본 사람들은 결코 맛있고 맛없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거라. 적게 주면 어때? 좀 덜 먹으면 될 거 아니라.

 

그다음에 언제 죽을지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당장 나가다가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알 거 같으면 경각심을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지금 바빠 나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자식 챙겨야 될 일들도 많고 뭐 할 일들이 태산 같을 거라.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할 거 같으면.

 

우리 모친이 암선고를 받고 1개월 전에 선고를 받았어. 한 3개월 너머 사셨는데 처음에 1개월 동안은 되게 바빠요. 1개월 뒤에 죽는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할 일들이 되게 많은 거라. 챙겨야 될 것들도 많고. 병원에 있으면서도 직접 본인이 못해도 항상 그런 얘기들을 하는 거라. 그런데 1개월 지나고 나니까 그걸 탁 포기를 하더라고.

 

그리해도 나는 지금 1개월이 지나고 나더라도 안 죽는 건 아니잖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라. 그렇게 생각이 드니까 본인이 자기가 해야 될 일을 하는 거라. 죽을 때는 잘 죽어야 되겠다는 거라. 그래도 볼성 사나운 꼴 보이면서 "나 살고 싶어" 이러고 죽는 거보다는 참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거라.

지금 여러분들이 코앞에 죽음이 닥쳤다 할 거 같으면 그 세상사 돌아볼 겨를이 있어? 지금 자신이 죽기도 바빠 죽겠는데.

자신이 할 일들을 아는 거라. 자신이 할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호흡 관찰하면서 편안하게 죽어야만이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 생에 좀 더 선한 곳에 태어날 수가 있는 거라. 또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자꾸 가지도록 해서, 그래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 더 열심히 뭔가를 자기 자신에게 이익되는 일들을 할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수행 안 하는 사람들이 테라와다 불자들이 병원에 가면 스님한테 “스님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 선업공덕 쌓을랍니다.”하면서 이렇게 돈뭉터기를 툭 주는 경우도 있어요. 죽고 나서는 그걸 못하니까, 죽기 전에 적어도 그 일을 하고 싶다는 거라.

자신이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아는 거라. 내가 지금 선업공덕을 쌓아야 되고, 바라밀을 쌓아야 되고, 또는 수행으로 인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되고, 자기 자신이 할 것들을 하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럴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이 병들은 여러분들 자신을 치유하는 힘들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않는다 하고 경전에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방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 때가 지나면 그 할 일들은 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하겠지?’ 그게 언제 죽음이 올지 알아서 언젠가는 해? 그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들은 반드시 여러분 자신이 해야 됩니다.

 

그게 공덕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고,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는 거라.

지금 뭐 해야 돼? (수행해야 됩니다.)

만날 수행만 할려고? 수행은 별 진척도 없는 것 같은데? 수행은 해야 됩니다!

수행하는 자의 마음을 지니고 계를 지키는 것,

수행하는 자의 마음을 지니고 공덕을 쌓는 것,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항상 뭔가를 하고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할 것 같으면 그 공덕들은 훨씬 더 커진다는 거라.

 

마지막에 보면은 이번 포인트를 읽어보겠습니다.

• 다른 사람이라면 지혜가 보이지 않는다고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눈에 들어간 티끌은 잘 안다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 자신의 일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라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리고 실천되지 않고 자신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라. 아무리 경전을 많이 공부하고 하더라도 그거 알고 있고 진리가 뭔지를 알고 있으면 뭐할 거라? 자기 것이 확신이 들어서 그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그거는 의미가 없는 거라.

 

• 존재 등에 대해 생각해도 대답은 찾아낼 수 없다.

여기서는 '존재'라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면 그걸 대답을 찾을 수 없는 거라.

• 자기 관찰하지 않으면 무지는 깨지지 않습니다.

• 자기 관찰하는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여러분들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내는 사람한테 약을 먹일려고 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려고 하고, 어떠한 경우도 자신이 탐·진·치에 물들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오전에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