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왜 출가하는가? <후편> (20150717.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16. 09:00

https://youtu.be/1t-792pnRkg

* 왜 출가하는가? <후편> (20150717. 대구)

 

오늘은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 못해가지고 목이 안 좋아가지고 오래 하지는 못합니다.

저번 저번 시간에 왜 출가하는가 하는 거 <전편>을 프린트물하고 법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 그리고 수행하는 분들이 "자가 진단하는 열 가지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못했던 게 점점 더 수행자가 수행의 계단이 점점 더 올라가는 것, 그리고 출가한 스님들도 법납을 먹으면서 테라(Thera)가 되는, 장로(長老)가 되어가는 과정들에서 반드시 섭렵해야 될 것 열 가지, 테라담마 열 가지가 있다 하는 것들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테라담마(Theradhamma) 열 가지」는 부산에서 저번 주에 열 가지에 대해서 법문한 게 있습니다. 그걸 듣도록 하면 됩니다. 두 번 할 필요 없잖아.

 

이번 시간에는 「출가한 스님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거,

그리고 「왜 여러분들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존경을 표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것들을 아홉 가지로 간추려가지고 이렇게 적어놓은 겁니다.

 

그 첫 번째 보겠습니다. 18페이지 보십시오. 중간 중간 떼어먹고 넘어갑니다. 여러분들이 읽어보십시오.

 

“Upagato so samaṇaliṅgaṁ(우빠가또- - 사마나링강)”

「출가 사문은 조용하고 편안한 모습입니다.」

 

우빠가또(Upagato) 라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아주 조용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조용한 모습이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일 때문에 바쁘고 분주하지만 출가한 스님들이 그렇게 분주해서는 안 됩니다. 법을 위해서 이곳 저곳 다니는 것은 있다고 하더라도, 모습에서 조용한 모습이 보여야 되는 것이지 정신이 없어 놔놓으면 그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존경을 하겠어? 특히 스님들이 갓 출가한 스님들한테 지적하는 것들이 뭐냐면 이 "가사자락 펄럭거리지 마라."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하고 다른 옷이기 때문에 가사자락을 잘 여미지 않으면 뒤에서 보면 이렇게 가사가 펄럭펄럭펄럭 합니다. 그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해가지고 가사자락 펄럭거리지 못하게끔 그렇게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에 두 가지를 꼽으라고 할 것 같으면,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출가한 스님들 모습을 보면 어떨까?

부처님의 양대 제자였던 목갈라나 하고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한테 먼저 귀의를 한 것이 아니고, 앗사지 존자에게 따라갑니다. 앗사지 존자가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고 조용하게 탁발을 하러 갔다가 조용하게 다시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야! 출가한 스님이면 저런 모습이어야 된다!” 하는 생각이 미칩니다. 너무나 좋거든.

그런데 한국에서는 출가한 스님들을 볼 때, 그 모습을 볼 때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될까? 어떨 때는 좀 궁금한 것도 있어. 그래서 이 가사를 입고 가면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아,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다, 아니면 인도 요기 같다, 이런 얘기들을 가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편안한 마음이 들고 존경하는 마음들이 들어야 그게 정상적인 건데 한국은 그렇지는 못한 거 같애요. 그것은 이런 가사를 입고 다니는 스님들 모습이 많지 않고, 또 그런 모습들을 보는 것이 기회가 적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일어나는데 그런 궁금증은 이런 가사를 입고 있는 스님들이 많아지면 사라지게 되겠지.

 

단지 이런 옷을 입은 스님들이 많아지면 주의해야 되는 것은 그 모습을 보고 일반대중들이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들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스님이 이리 오면 이 모습을 가지고 궁금해하지는 않잖아. 그대신에 스님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있고, 길을 좀 비켜줄려고 하든지 그렇게 합니다.

 

앗사지 존자를 본 두 분의 뛰어난 상수제자들도 그런 마음들이 있었던 모양이라. 조용하게 가사자락을 펄럭거리지 않고 탁발을 하고 돌아가서 앉아있는 모습.

출가한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고요하고 조용해야 된다 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출가한 스님들이 장로스님들한테 처음에 많이 지적받는 게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것들입니다.

외형적인 모습이 일반인들이 봤을 때 성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게 될 때의 그 모습을 장로스님들은 처음에 잘 지도해줄려고 그럽니다.

 

저번에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출가자들은 외형적인 모습의 출가자도 있고, 또 내면적인 모습의 출가자도 있다. 외형적인 모습은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고 그리고 바리때를 들고 탁발을 하는 것이 스님들의 모습인데, 이걸 갖췄다 해가지고 그분들을 출가한 사마나 출가사문이라고 얘기를 하진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안으로 갖춰진 모습들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야 됩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장애들을 잘 극복해서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으면은 밖으로 표출되는 모습들도 그렇게 고요하고 조용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외형적인 모습도 중요하지만 내면적인 모습도 잘 갖춰야 됩니다.

내면적인 모습을 잘 갖출 때 그러한 분들을 사마나-사문, 출가사문의 첫째 조건에 놓는다 하는 얘기를 저번 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가사를 입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고, 또 머리를 깎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고, 탁발하는 방식들이 조금씩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게 이거거든. 출가한 스님들 외형적인 모습! 그래서 외형적인 모습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걸 어겨서는 안됩니다.

 

스님은 태국에 많이 살았으니까 태국 같은 경우에는 스님들 머리카락 길이가 똑같습니다. 틀린 경우는 언제냐면 인제 갓 출가한 스님들. 갓 출가한 스님은 그때 막 깍았을 거 아니라?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고 그 스님은 인제 출가했네 하는 걸 금방 알게 되는 거라.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인제 출가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정도로 엄격하게 규제를 합니다. 딱 보름에 한 번씩 머리를 반드시 깍아야 됩니다.

물론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경우가 좀 다르기도 하고, 또 버마 같은 경우에도 조금 다르기도 하는데, 어쨌든 머리카락을 깍는다고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외부적인 모습들이. 가사를 입는 것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 탁발을 하는 것도 어느 나라든지 동일합니다. 방식이 다른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비구의 필수품 네 가지를 들어라 할 것 같으면 속가사, 윗가사, 그다음에 대사가-겹가사 이 세 가지 가사 그리고 이 바리때 이게 4가지 필수품에 들어갑니다.

여덟 가지 필수품을 들어라 할 것 같으면 그 4가지에 첨가되는 게 머리 깎을 도구, 그다음에 옷 떨어지면은 옷 기울 도구, 그리고 수행할 때 앉는 방석, 그다음에 물 먹을 때 물을 걸러주는 거름망 요즘 같으면 정수기 같은 그런 겁니다. 그런 것들 여덟 가지가 비구의 필수품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깍고 탁발을 하는 것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외부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이 단정하고 조용한 모습들을 보이기 위한 거고, 추위와 더위로부터 피하기 위한 것들이지. 그 모든 것들은 뭘 하기 위한 것들이라?

수행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걸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든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행 안 하는 스님들은 그것은 출가자의 가치가 없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하고 교학을 배워야만이 그 출가자의 첫 번째 목적 단추를 끼워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출가를 하면 맨 처음에 하는 것이 학교 먼저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승려학교 가서 기본적인 것들 다 배우고, 배우는 중간중간에 방학 때는 반드시 교과 필수과목으로 수행처에 가서 수행해야 돼. 공부를 할 때도 꼭 마찬가지 수행과 교학이 병행이 돼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나면은 그러고 나서는 수행하러 갈 사람들은 더 가서 수행하고, 교학을 공부할 사람들은 교학을 더 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정해지게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이 외부적으로 스님들이 갖추어야 될 것들이다.

그것들이 보통 5년 이내에 다 갖추어져야 됩니다.

 

나중에 쭉 설명을 하겠지만 처음에 그걸 못 갖추면 나중에는 절름발이가 되는 거라.

교학을 갖추지 못하고 수행만 쭉 한 스님이다, 교학에 대해서 몰라. 그러니까 누가 수행에 대해서 질문하더라도 그걸 바르게 질문해 낼 수가 없는 거라.

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승려들의 일이 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뭐가 잘됐는지를 전혀 모르는 거라. 이렇게 절름발이가 돼버리는 거라. 자기 혼자 수행하는 것은 그건 독각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 출가한 지금 현재의 사회에서 상가의 구성원으로서 스님이 되기 위한 과정은 아니라는 거라. 혼자 독각해가지고 뭐할 거라?

 

우리 대학 때도 그런 게 있어요. 강의를 되게 못하는 거라. 그런데 그 교수의 캐리어를 보면 외국 어디 다 나오고 아주 뛰어난 인재인데 뭐냐면 자기 공부만 했지 그것을 가르칠려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지 못한 거라. 그러니까 못 가르치는 거라. 자기가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그걸 풀어내질 못하는 거라.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의 교육과정 중에 하나가 어느 정도 일정 기간 5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법문하는 연습들을 자꾸 시키고, 또 수행 지도하는 연습들을 시키고, 물론 틀린 게 많습니다. 수행지도 하더라도 틀린 게 많고, 법문을 하더라도 틀린 게 많고, 그래도 장로스님들이 봐주는 건 뭐냐면 교육과정이니까.

 

가끔 여러분들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겁니다.

출가한지 얼마 안 된 스님들이 수행지도하고 교학 가르치고 할 때 틀린 부분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그걸 지적하지는 안 해! 교학과정이기 때문에! 아직 수련과정이라는 거라.

그런데 한국 같은 경우에는 법납이 어떻게 됐든 인제 막 출가했으면 모든 걸 다 갖추었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행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걸 여러분들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출가자의 모습이 이러는데 재가자의 모습은 어떨까?

재가자들은 불환과를 얻은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모습은 아니죠? 머리를 깍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단벌 신사가 돼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오로지 출가한 분들은 출가의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재가자들은 그것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들을 다 해야 됩니다. 인간관계도 신경을 써야 되고, 가정생활도 신경을 써야 되고, 여러 가지들을 신경을 써야 됩니다. 그래서 고요하게 될 수가 없는 조건이라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표현돼있느냐면 "불환과에 이른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이제 갓 출가한 비구에게 예를 올려야 된다.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실은 그게 맞는 겁니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인제 갓 출가했다 하더라도 완전하게 나아가기 위한 첫 단추를 끼웠기 때문에 이미 첫 걸음부터 재가자들의 모습하고는 다르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설혹 잘못 설하고 잘못 가르치고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여삐 여겨가지고 그 스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지적을 하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질책하는 식으로 비난하는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아직은 무르익지 않는 스님인데 그렇게 되나? 그것은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아예 율에 규정을 해놨습니다. 불환과에 이른 재가자, 그러니까 불환과 이하는 더더구나 할 말이 없는 거고, 불환과에 이른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갓 출가한 스님에게 예경을 해야 되는 거고, 마중 나가서 맞아들여야 되는 거고, 자리를 마련해드려야 되는 거고, 존경의 예를 해야 된다 하는 것을 기록을 해놓거든.

그마만큼 출가자를 대하는 여러분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잘 서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봅시다.

“Buddhādhippāye ṭhito(붓다-딥빠-- 티또-)”

「그 출가하는 사람들 출가자의 모습은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는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소망이 뭘까? 한번 붓다의 길따라 홈페이지에 검색을 해보십시오.

「부처님의 소원」 해가지고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소원은 딱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걸 듣고 자세하게 알도록 하고, 어쨌든 부처님의 소원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설해놓은 가르침을 잘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부처님이 도달한 진리에 이르는 것, 이게 부처님의 소원입니다. 부처님이 소망하는 것들이라.

 

우물은 물이 나올 때까지 파야만이 그 우물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파다가 물이 안 나오면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포기를 해버린다는 거라. 그거는 재가자의 할 일이지 출가자의 할 일이 아니라는 거라. 그걸 팠으면 물이 나올 때까지 파라는 거라.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이 발견했지만 그것은 부처님의 소유물이 아니고 모든 이들의 소유물이라는 거라.

그러니 우물에서 물이 나올 때까지,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어떻게 해야 돼요? 배우고 체험하고 그래서 어느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우물물이 완전하게 쏟아져나오기 전에는 거기 만족하지 말고 계속 파라는 거라.

 

적어도 일반 재가자들도 테라와다 불교를 배웠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과연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모습들이 부처님의 소망에 맞는 모습들을 하고 있는가? 법하고 관계없이, 법을 배우는 거하고 관계없이, 법을 실천하고 있는 거하고 관계없이,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거하고는 관계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거 뭐 대단한 거라고 거기에 매여가지고 죽을동 살동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그걸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한다고 하더라도 중심이 되는 것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중심이 되는 것에 그거 하는 것이 방해가 된다고 할 거 같으면 방법을 바꿔야 되는 거라. 싸우면서 하지 말고 자애로써 대하고, 방법을 바꿔서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주가 돼서 그 목표를 세운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것만 해서 달려가서는 안 된다는 거라.

반드시 여러분들도 명심해야 되는 게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부처님이 소망하는 것에 맞는 모습이어야 됩니다. 그냥 일반 불교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하는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고 있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이 테라와다 불교를 접함으로 인해서 ’아, 참 내가 좋다. 이 길을 계속 가야 되겠다'는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시발점이라.

자꾸 확신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 법문도 듣고 경전도 읽고 수행도 하고, 그리고 열 가지 바라밀들도 자꾸 실천하고 하는 거라. 그 어느 것 하나도 자꾸 해보니까 좋거든. 그래서 ‘아 이 길은 진짜 좋구나.’ 이 길에 대해서 확신들을 가질 수 있그나 하는 마음이 들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하지 않으면 그런 확신이 들을 수도 없는 거라. 말은 테라와다 불자라지만 실제로는 테라와다 불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있게 되는 거라.

 

그렇게 확신들이 들 때는 그래도 내가 다른 길로 가고 있고 설혹 내가 다툼이 있고 또 욕심 부리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돌아올 수가 있는 거라.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 이것은 부처님이 소망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서 성냄이 있으면 ‘아, 성냄이 일어났다’ 분명히 알아차리고 성냄을 가라앉히게끔 되는 거라. 성냄을 가라앉히는 걸 부처님이 볼려고 하는 모습이지, 성질부리고 있는 사람을 부처님이 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이 법은 성냄이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이 아니고 성냄을 버려버린 자의 법이다. 욕심을 가진 자의 법이 아니고 욕심을 버린 자의 법이다." 만족할 줄 아는 자의 법이라는 거라.

그것들을 잊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Khīṇāsavehi so samaṇaṁ upagato(--사웨-히 소- 사마낭 우빠가또-)”

「번뇌를 벗어버린 자, 번뇌를 여읜 자, 번뇌를 파괴한 자의 모습과 같은 모습입니다.」

 

번뇌를 완전히 여의어 버린 자가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의 모습과 일반 스님들의 모습은 다릅니까? 똑같습니다.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이 앉아서 수행하고 그리고 법을 설 할 데가 있으면 법을 설하고 상가 모임이 있으면 상가 모임에 가고, 아라한의 모습과 범부일지라도 출가자의 모습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행력이 뛰어난 재가자, 설혹 불환과에 이른 재가자라 할지라도 아라한에 예경하듯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예경을 해야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모습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데 가끔씩 출가한 스님들이 아라한이 해야 될 모습이 아닌 것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경계를 해야 됩니다. "어, 내가 지금 아라한이 행해야 될 것을 행하고 있고, 행하지 말아야 될 것은 행하지 않고 있는가?"

적어도 출가한 스님들이 그것만 조금 생각해도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뭘 하고 하진 않을 거라.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 경우든지 아라한과 동일한 모습이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라한의 모습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아라한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들을 띠어야 됩니다.

 

경전 자따까(Jātaka)에 보면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왕이 길을 가다가 망고나무들을 봤어. 그래서 ‘저거 아주 참 맛있게 익었네. 나중에 돌아오면서 저거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볼일 보러 갔어. 갔다가 돌아올 때 보니까 망고나무에 망고가 하나도 없는 거라. 그 사이에 누가 다 따먹어버린 거라. 얼마나 성질이 날 거라. 사람들이 그 망고나무를 그냥 따나? 높은데는 가지를 부러뜨려가지고 망고를 따기도 하고, 잎을 훑어내기도 할 거고, 망고나무도 많이 상할 뿐아니라 망고 열매도 다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런데 딱 한 망고나무만은 나무가 상하질 않았어. 뭐 때문에 나무가 안 상했을까? 망고 열매가 없었으니까! 망고가 안 열렸으니까 그걸 사람들이 건들 이유가 없는 거라.

 

여러분들이 번뇌가 없으면 그렇게 다칠 일들이 없어져버립니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가지가 꺽이고 잎이 떨어질 가능성들이 커져버린다는 거라. 망고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듯이 여러분들이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번뇌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느 것으로부터도 해침을 받지 않는다는 거라. 살아가는 모습은 틀린다고 하더라도 번뇌를 여의고 살아가야 되는 것은 동일한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더 노력을 해야 되고.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그런 해침이 없는 삶, 그런 번뇌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더 빨리 이르기 위해서 출가한 삶을 사는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하고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거라. 그래서 내가 지금 속세에 살고 있고 이 망고나무 숲에 살고 있으면서 열매가 맺히지 않아서 누구의 해침도 받지 않고 번뇌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든지 열리게 돼있는 거라. 그 망고나무는 지금 열매가 없다고 해서 망고가 안 열립니까? 망고는 열리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 위험성을 아는 사람들은 출가할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 아무리 지금 내가 불환과에 이르러서 번뇌라는 열매가 없다고 하더라도 출가한 스님들, 번뇌가 주렁주렁한 출가한 스님이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나보다도 이미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봐야 된다는 거라.

 

밑에 보면 출가자는 아라한과 같은 모습과 행실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모습에서 아라한이 행해선 안 될 것은 행하지 말고 아라한이 행할 것은 자신도 행해야 한다. 항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번뇌가 소멸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굉장히 출가한 스님들은 경계를 해야 됩니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주렁주렁 매달려서 자신도 흠집날 뿐아니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또한 번뇌들이 열리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Aggaparisāṁ so upagato(악가빠리상- - 우빠가또-)”

「고귀한 사람들, 아라한들의 모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악가빠리사 - 가장 수승한 자의 모임. 가장 수승한 자인 아라한자들의 모임에 들어갈 수 있다.

출가한 스님들은 수행만하고 또 교학만 배우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임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떨 때는 귀찮을 정도로 많아요. 뭔 모임이 많은지, 한번 대표적인 거 볼까요? 우리나라는 적지만 출가하는 사람들의 횟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거의 어떨 때는 결제기간에는 매일 출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출가할 때 출가자는 반드시 3명 이상 한꺼번에 계를 줄 수가 없게 돼있거든. 열명이 출가한다고 하더라도 3명에게 누군가가 계를 줘야하고, 3명은 또 다른 스님이 줘야하고, 그래야 이게 같은 시간에 하더라도 시간을 단축할 수가 있지. 한번 계를 주는데 보통 두시간씩 걸리는데, 한 스님만 할 거 같으면 이게 몇시간 걸릴 거라?

 

출가하는 사람이 있을 때 스님들을 보통 열 분을 초청합니다. 그래야지 빨리 끝낼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 누가 출가한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떨 때는 막 불려다녀야 돼요. 스님들이. 자기 수행하고 뭐하는 거 시간을 빼서라도 그거는 해야 되는 거라.

 

그것만 있습니까? 보름에 한번씩 빠띠목카 해가지고 포살을 해야 되지, 또는 무슨 상가회의 한다고 해가지고 무슨 역할 맡는 게 있습니다. 역할 맡는데 그걸 그냥 누군가가 임명하는 게 아니고 상가모임에서 결정해가지고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가스님들이 또 다 가야 되는 거라. 상가 어른 스님들이 그냥 역할 결정해가지고 탁 분담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법이 없는 거라. 스님들이 다 모였을 때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의견을 내고 다른 스님들이 다 동의해야 돼. 그러니까 어차피 또 상가모임도 해야 돼. 그게 3개월에 한번씩 역할들이 바뀌게 돼 있거든.

 

그런데 그 역할이 한 역할만 있는 게 아니고 가사분담하는 스님, 그다음에 탁발하고 오는 거 음식 분담하는 스님, 누군가 객 비구가 왔을 때 그걸 담당하는 스님, 각각의 역할이 다 있습니다. 청소하는 스님, 뭐 부서졌으면 부서진 거 보수하는 스님, 뭐 무슨 감독하는 스님, 이런 것들 역할들을 주게 되는데 할 때마다 해야 되니까 거의 일주일에 두번씩은 그런 모임들을 하는 거라.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한번 아니면 두번씩은 꼭 그런 모임들이 있어요. 또 한번 모임을 하면 보통 두시간씩은 하게 되는 거라.

 

어떨 때는 싫어. 그래서 아, 다른 데로 도망갔으면 싶어가지고 다른 데로 가더라도 출가한 스님들은 거기가면 또 거기 모임의 구성원이 돼버리니까 도망갈래야 이 지구상에 도망갈 데가 없어. 겨우 한국에나 오면 그게 없으니까. 한국에는 아직 완전하게 상가가 구성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은 그게 의무라.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것은 아라한이라고 해서 안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출가한 스님이면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던 관계없이 또는 인제 출가한 스님이든 아니면 60세 법납이 된 스님이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아픈 스님이든 어쨌든 죽기 전에는 그 일을 해야 돼. 어쩔 수 없는 거라. 그거는 의무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거라.

 

그런데 달리 생각을 해보면 아, 아라한이 참석하는 모임에 나도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거라. 여러분 할 수 있어요? 못합니다. 재가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일을 할 수가 없는 거라.

삼성 임직원 모임하는데 현대 임직원이 거기 참석할 수 있어요? 못합니다. 그건 할 수 없는 것들이라.

여러분들이 배우고 있는 이 경전들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아라한들의 모임에서 이 경전들을 송출하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전해진 것이지 그런 모임들이 없었으면 이 불교가 존재할 수가 없는 거라. 그걸 하는 스님들, 범부인 출가스님이라 하든 아니면 아라한인 출가스님이라 하든 동일하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을 대할 때는 여러분들은 항상 아라한과 같이 대해야 됩니다.

 

저번에 한번 부산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라한을 비난할 거 같으면 그 과보는 크다 하는 얘기를 했드만 누가 나한테 면담하러 쪼르르 쫓아왔어. 왜 그러느냐 하니까 누구 비난했대. 아이고, 우짜면 좋습니까? 그래서 그 스님이 어떤 스님인데 하고 내가 물어봤어. “화를 내는 스님이냐, 아니면 욕심이 많은 스님이냐?” 화 잘내는 스님이래. “그럼 괜찮다. 아라한을 비난한 거 아니다.” 그랬더만 입이 이만하게 벌어져가지고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아라한을 비난하는 것은 굉장한 과보를 받게 돼있어요. 그리하더라도 어쨌든 비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건 나쁜 겁니다. 안 좋은 겁니다. 그래서 남을 비난하는 것은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했는데, 그 스님이 뭘 잘못했다 하더라도 아, 그 스님이 그래도 그런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없기를,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가져주는 것이 그게 더 좋은 것이지, 그거 죽일놈 살릴놈 하는 그것이 뭐 좋은 거라고 그러느냐, 다음부터 비난하는 것은 하지 말아라. 혹시 네가 만약에 또 다른 누군가를 비난했을 때 그분이 아라한이면 우짤끼고, 지금은 아니지만 할 수 없이 혼내준다 하더라도 그런 위험성은 항상 있으니까 비난하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하니까, 입이 이만해져가지고 그 뒤에 소리는 안 들어가. 그냥 내가 아라한을 비난한 건 아니다 하는 것만 넣어가지고 가더라고.

 

그리했든 어쨌든 간에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아라한과 동일한 모임을 하는 스님들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의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항상 보호할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 보호막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창으로 찌르는 역할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가장 뛰어나고 고귀한 아라한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아라한들과 함께 그 상가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입니다. 그 모임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며, 그 성스러운 부처님의 제자인 상가의 일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출가자는 상가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잊는 순간에 그 스님은 이 앞에서 받을 수 있는, 그리고 뒤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을 전부다 포기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Labhati so patimokkhuddesaṁ sotuṁ(라바띠 소- 빠띠목쿳데-상 소-)”

「보름과 초하루의 포살일에 계단(시마홀)에서 율을 송출할 경우에 범부인 출가자라도 그 모임에 참여하여 율을 들어야만 합니다.」

 

맨 처음에 하는 것이 뭐냐면 보통 한 5년 지나고 나면 율(律 vinaya)을 암송하는 율 암송자의 임무를 줍니다. 그래서 "수나뚜메 반떼 상코---" 하면서 쭉 외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책 한권 분량이라. 율장 책 한권 분량. 그걸 외워야 돼. 몇분 만에 외워야 되는지 알아요? 30분에서 40분. 책 한권을 30분에서 40분 동안에 외울려면 얼마나 빨리 발음을 해야 돼? 그런데 어떡하나.

출가한 스님들은 보름마다 한번씩 이걸 꼭 한사람 누군가는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5년 지난 스님들에게는 그 임무들을 자꾸 줍니다. 외우는 스님들도 있고 못 외우는 스님들도 있겠지. 그럼 다 외웠다 할 거 같으면 점검을 받고나면 그다음날 보름은 “네가 율을 외워라” 그럽니다. 그다음엔 또 다른 스님이 외우고, 돌아가면서 율을 암송할 수 있도록 합니다.

율을 암송하면 장로 스님이 그걸 듣고 있다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을 합니다. 30분 40분이면 끝날 수 있는 것을 하나 딱 잘못 외운다, 만약에 “삼마-삼붓닷사” 이래야 되는데 "삼마삼붓닷사" 이래버렸다, '마-'가 장음인데 장음으로 안 하고 단음으로 했다. 그러면 장로 스님이 딱 지적을 하는 거라.

“스톱! 처음부터 다시!”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은 죽어. ‘아이고, 저놈의 자식 좀 똑바로 외우지’ 그러니 잘 안 외워가지고 그 자리에 설 수 있겠어? 다른 스님들한테도 미안하고, 그러니까 하루 종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내내 경전 외우는 거라. 그래서 각 사찰마다 가면 일정한 때가 되면 그 경전 외우는 소리가 진동을 해. 온 데.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5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빠띠목카(Pātimokkha)를 외워라 하고 얘기합니다. 율을 알고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암송하게끔! 그래서 그렇게 암송했을 때는 '위나야두라(vinayadhura)'라고 하는 명칭을 줍니다. '위나야에 대해서 암송하는 자'다 하는 거라. 그렇게 한 단계씩 밟아나가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경전 디가니까야 암송하는 것, 맛지마니까야 암송하는 것, 이런 식으로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그게 스님들이 하는 일이라.

 

율(律)을 암송까지 해야 되는데도 율에 대해서 모른다, 그거는 출가자의 자격이 없는 거라. 반드시 알고 있고,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방법들을 율에는 자세하게 써놨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반드시 다 알고 있어야 됩니다.

가끔씩 어떨 때는 스님도 귀찮을 때가 있어. 심심하면 “스님 이거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물어보거든. 그럴 때 저게 10년 넘은 스님인지, 그건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되는 건데 모르는 거라. 공부를 안 하는 거야. 그걸. 출가한 스님이면 반드시 해야 되는 건데. 그래서 그리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출가자들의 율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이해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 그 율에는 여러분들이 또 담당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결정할 수 없는 것일 때는 재가자들이 그 율을 결정하도록 돼있습니다. 모르면 어떻게 결정할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반드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출가자는 더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귀찮고 하더라도 보름에 한번씩은 반드시 빠띠목카를 출가자들은 해야 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그 율도 이해하고 그리고 암송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So aññe pabbājeti upasampādeti jinasāsanaṁ vaḍḍheti(- 안녜- 빱바--띠 우빠삼빠--띠 지나사-사낭 왓데-)”

「범부인 출가자라도 정해진 법납에 이르면 다른 사람을 출가시켜 구족계를 줄 수 있고, 그들에게 부처님(승리자)의 가르침을 교육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법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할 일들이 많아집니다. 더 오히려 힘들어져요. 10년이 지나고 나면 출가한 스님들을 대상으로 내가 스승이 될 수가 있고, 출가한 스님들에게 가르칠 자격이 주어지고, 또 출가한 스님들을 훈계할 수 있는 자격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10년이 됐는데도 그 자격을 못 따면은 어떻게 하겠어요? 자꾸 돌놈이 돼. 왜? 그 자리에는 법납이 많은 스님 10년 이상 된 스님 3명이 반드시 가야 되는데, 한 스님은 15년이 돼도 그 자격을 못 갖췄다 그러면 그 스님은 못 가는 거라. 인제 10년 아니면 11년 된 스님이 거기 갈 거 같으면 자기보다 법납이 많은 스님이 그 상수자리에 앉을 수가 없으니까.

거기만 돌놈이 돼? 다른 것도 꼭 마찬가지라. 다른 스님들은 출가자들이 아니라 재가자들한테 막 교육하고 아니면 수행지도 하고 하는데 그 자격을 못 땄으니까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그 스님은 저기 혼자 돌놈 서는 거라. 다른 스님들 다른 재가자들한테 존경을 받을지는 몰라도 해야 할 일들을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출가생활을 오래 지속을 하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되지 않을려면 이 좋은 길을 들어갔으면서 빨리 환속하고 또 기간이 굉장히 짧게 환속을 하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환속을 해야 될 경우에는 해야 될 때 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것은 나중에 지나면 지날수록 압박감이 굉장해집니다. 그것은 위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해야 될 일이 그마만큼 많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출가한 스님은 법납에 맞는 연수에서 해야 될 일들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1년차에 해야 될 것 두탕가 하는 것, 그다음에 습 익히는 것, 2년차에 해야 되는 것, 3년차에 해야 되는 것, 이런 식으로 쭉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 길을 가야 되는 거라. 아무리 내가 수행이 좋고 또는 교학을 공부해야 된다, 그 기본을 하지 않고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방법은 있지.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는 그 스님은 거기에서 계속 있을 수가 없어. 한국으로 들어오든지 아니면 다른 외국으로 가든지 해야 돼.

 

여러분들은 안 그런 거 같습니까? 테라와다 불자가 되어가지고 5년 지났는데 또 10년 지났는데, 5년 지날 때 해야 될 것이 있고 10년 지났는데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럼 그것들을 해야 됩니다.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지도 않고 ‘에이, 저게 무슨 테라와다 불자라고’ 오히려 업신여기게 됩니다.

테라와다 공부하면서 오히려 더 고집만 세어지고 자기 아만심만 세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재가자는 법납이 없지만 어쨌든 그 햇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거 무슨 의미가 있어?

 

한 해 지났을 때 한해에 해야 될 일을 반드시 닦아야 됩니다. 그다음 해가 될 때는 그다음 해에 닦아야 될 일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자들을 출가시키는 바라밀이 따로 있고, 출가자들이 계속 출가생활 할 수 있는 바라밀이 따로 있다는 것은 그런 이유들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바라밀, 여러분은 10바라밀을 하면 되지만, 그 10바라밀 외에 다른 바라밀들을 반드시 닦아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잊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세월은 멀지 않으니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하고 얘기를 적어놨습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

“Appamāṇesu so sikkhāpadesu samattakari(압빠마--수 소- 식카-빠데-수 사맛따까리)”

「출가자는 수많은 학처를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습니다.」 하는 겁니다.

 

이 많은 학처 상가깜마(saṅghakamma) 그다음에 깜마와짜(kammavācā) 이런 것들, 모든 것들을 다 갖추어야 됩니다.

뭘 하고 나면 스님들이 하는 게송이 마지막에 가서 "다라야미(dhārayāmi)" 하고 얘기합니다. "완전하게 이제 내가 갖췄습니다." 하고 확인하는 겁니다. 딱 그게 끝나고 나면 "다라야미" 하면서 딱 끝납니다.

여러분들은 계를 지킬 때 뭐로 끝납니까? "사마디야미(samādiyāmi)" 하고 끝납니다. 그것도 똑같은 '미'로 끝나는데 '사마디야미' 하고 '다라야미' 하고는 다릅니다.

'다라야미'는 완전하게 구족해서 갖췄다는 거고, '사마디야미'는 지키겠다는 거라. 구족해서 갖춘 게 아니고, 지킬려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재가자들은 그래서 출가자들 하고는 다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다 갖출 수 있는 것들은 출가자들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재가자들도 반드시 갖추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사원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은 누가 담당해야 됩니까? 재가자들이 담당해야 됩니다. 붓다의 날이다, 붓다의 날을 준비하고 하는 것들은 누가 해야 됩니까? 까티나 가사법회다, 까티나 가사 준비하고 행사준비 하는 것은 누가 준비합니까? 재가자들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거 갖추어나가고 있느냐는 거라.

많은 것들을 여러분들도 갖추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갖추어나갈 때 아, 재가자로서 보람도 느끼고 아, 내가 한단계 조금씩 성숙했구나 하는 그런 마음들이 들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 여덟 번째

“bhikkhu sikkhapako vaṁsadharo(빅쿠 식카빠꼬- 왕사다로-)”

「범부라도 출가자들은 불교를 오래도록 수호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스리랑카에 그 보리수나무를 어떻게 지켰는지 알아요? 재가자들이 보리수나무를 지킬 때, 지금 스리랑카의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보리수인데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부처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붓다가야에 있는 나뭇가지를 상가밋따라는 비구니스님이 가져와가지고 거기에 이식을 했거든. 지금 인도에 있는 거는 그러고 나서 죽어버렸어요. 지금 있는 거는 훨씬 후대의 겁니다.

원래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렀던 보리수나무의 아들 뻘이죠. 그게 스리랑카에 지금 있는 건데 지금 보리수나무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입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귀중하겠어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던 나무니까.

 

그런데 그 아누라다뿌라는 옛날에 그냥 벌판이었어요. 허허벌판, 밀림 속에 있거든. 그러니까 코끼리나 이런 동물들이 그 보리수나무를 자꾸 먹을라고 하는 거라. 그래서 지금 보면 보리수나무 주위에 보면 펜스를 쳐놨습니다.

그러니까 재가자들이 펜스를 쳐놔놓고, 팬스를 쳐놔도 코끼리나 동물들이 와서 거기에 대소변도 하고 그걸 먹고 이러고 하니까 매일 밤 횃불을 들고 그 마을 사람들이 보리수나무를 지켰다고 그럽니다. 아마 그건 노력이 없었으면 지금 스리랑카에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보리수나무는 이미 벌써 죽고 없어졌을 거라. 인도하고 마찬가지로.

 

재가자들은 그런 노력을 한 반면에 출가자들은 경을 지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암송을 해가지고 전해져왔거든. 기근이 들어놓으면, 출가한 스님들은 자기가 요리를 못 해먹기 때문에 탁발로 살아가야 됩니다. 탁발하러 가도 먹을 것을 탁발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해서 지냈는지 알아요? 모래주머니에다 물을 집어넣는 거라. 그럼 되게 무거울 거 아니라? 그걸 누워가지고, 움직이면 에너지 소모가 되니까 누워가지고 그걸 베어버리는 거라. 그러면 느낌상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일어난대. 그러면서 그 배고픔을 참아가면서 그 삼장을 암송했다는 거라. 이게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가지고 나중에 패엽경에 글로 써지게 됩니다.

 

그런 노력들이 없었으면 여러분들이 경전을 볼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게 뭐냐 하고 물어보면, 부처님이 말한 말씀을 온전하게 그대로 지켜왔다는 겁니다!

온전하게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뒤에 23페이지 보십시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서 오래도록 수호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여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출가자는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압빤냐땅 나 빤냐뻬이야(Apaññattaṁ na paññāpeyya)'

정하지 않는 것 새로운 원칙을 새로 만들지 말아라. 경을 새로 만들지 말아라는 거라. 율장에서 규정한 거 외에 무슨 새로운 거 무슨 법칙이라 해서 또 만들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이 한 거 그대로 더 보태지 말아라는 거라.

 

그 뒤에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말아야 하고 '빤냐땅 나 사뭇찐데이야(Paññattaṁ na samucchindeyya)'

부처님께서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부처님께서 잘 설하신 행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 '야타빤냣떼수 식카빠데수 사마다야 왓떼이야(Yathāpaññattesu sikkhāpadesu samādāya vatteyya)'은 출가자의 의무입니다.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따라 하면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거라. 변형하지도 말고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라는 거라.

 

그 원칙이 있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옛날에는 지금 같이 그렇게 자유롭게 왕래한 것도 아닌데, 경전들이 싱할라 빨리, 시암 빨리, 버마 빨리, 깜부자 빨리, 네 가지 빨리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네 가지 빨리어를 나중에 1800년도에 리즈 데이비드 라고 하는 분이 빨리어성전협회에서 로마나로 적었는데, 각각의 나라에서 한 건데도 동일하다는 거라.

어느 책 하나 없어진 것도 없고 글자들이 틀린 것도 없다는 거라. 물론 각 나라의 체질적인 차이 때문에 발음에 약간 차이나는 것이 있습니다. '짜'를 버마에서는 '타'로 읽는다든지 발음상의 구조 차이 문제, 그런 거는 있지만 권수가 틀린다든지 아니면 내용이 틀린다든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거라.

이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출가자들은 그걸 굉장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스님들이 각 나라끼리 모여서 같이 찬팅을 하여도 그냥 같이 찬팅할 수 있는 거라. 동일하기 때문에! 자기들 나라에서 자기들 방식으로 해온 건데도 동일하게 찬팅을 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은 변형을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견해를 붙인다? 그것은 부처님의 출가제자가 가는 길이 아니라. 그래서 사실은 좀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기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리니까 좀 어여삐 봐주고 있는 거라. 그게 원칙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 원칙을 버려서는 안 되고 그 원칙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전령이다, 부처님의 시자, 사자다 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부처님의 말씀만 전해야 되는 것이지, 나의 견해 나의 생각을 덧붙이지 말아라.

장로스님들이 바로 지적을 합니다. 훈련받을 때, “그게 어디 있는 거냐?” 하고 물어봅니다. 우물우물우물 대답을 못한다, “니 생각이냐?” “예! 제가 했습니다.” “누가 니 말 니 생각 전하라 했냐? 부처님 말씀 전해라” 하고 얘기합니다. 딱 할 말 없습니다. 그냥 그러면 수정해서 다시 해야 돼.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거든.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법을 설하고 또는 수행을 가르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고 부처님의 가르친 수행법을 그대로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수행법을 만들어낸다든지 아니면 다른 견해로써 자기의 견해로써 그 부처님의 말씀을 조합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아홉 번째

“Āsavakkhayaṁ pana appatvā, 'sukhisomhiti cittaṁ na uppadetabbaṁ

(-사왁카양 빠나 압빠뜨와- 수키솜히띠 찟땅 나 웁빠데-땁방)”

「번뇌가 아직 소멸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아직 번뇌가 소멸되지 않았다. 완전하게 끊어지지 않았다. 번뇌가 소멸된 것은 자기가 압니다. 탁 끊어지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딱 알게 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한꺼번에 확 되는 게 아니고.

그래서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된 것이 아니다 할 것 같으면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조그만한 성취를 했다? 내가 선정에 잘든다? 아니면 신통력이 있다? 아니면 내가 예류과에 이르렀다? 거기 멈춰가지고 뭐할 건데? 그거는 윤회의 고리에 없는 건가? 다 윤회의 고리에 있습니다. 좀 더 좋은 조건에 태어나는 것뿐인 것이지.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돼. 깨달음을 완전하게 성취할 때까지는 ‘아, 내가 지금 이 상태가 참 행복하다’ ‘좋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이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서 좋다’ ‘아, 나 행복하다’ 그 행복한 느낌 알아서 뭐할 건데? ‘아, 행복한 느낌이 있구나’ 알고 나서 내가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되는 거라. 더 나가려고 그래야 되는 거라. 그래서 내가 완전히 번뇌가 소멸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전에는 그걸 멈추지 말아라는 거라.

출가한 스님이든 재가자든 똑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밑에 25페이지에 보면 부처님이

비구는 계를 지키고 의식을 익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탁발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교육과 학문의 지식이 풍부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조용한 숲에서 혼자 수행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이제 불환과에 이르렀다고 해서 만족하지 말아라. 아라한이 되고 나서 그때 비로소 안심하고 만족하라.”

 

여러분도 똑 마찬가집니다. 윤회하는 세상에 아직 있을 경우에는 지금 해야 될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끝난 것이 아닐 때는 더욱 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뒤에 위빳사나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을 적어놨습니다. 27페이지부터는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

생긴 채로 반드시 알아차려라.

동작, 장소, 위의,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려라.

 

위빳사나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입니다.

 

그것에 대한 것들을 쭉 적어놨으니까 잘 읽어보고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어떠한 것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나가도록 하라.

그 알아차리는 것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아차리면 위빳사나로 전환될 것이고, 하나의 대상에 몰입할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이 될 것이고 그렇습니다. 그 방법들을 잊지말고 쭉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