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왜 출가하는가? <전편> (20150703.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2. 09:00

https://youtu.be/-3cWqcbQEZA

* 왜 출가하는가? <전편> (20150703. 대구)

 

오늘은 제목이 「왜 출가하는가?」 하는 것의 전편입니다.

한 번더 프린트물이 이마만한 분량으로 나올 겁니다. 사실은 이 글을 쓴 건 여러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출가자가 아니니까.

출가한 스님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 출가의 목적이 무엇인가? 출가하고 나서 뭘 해야 되는지? 그런 것을 적기 위해서 해놓았고, 지침서로써 삼아라 하는 의미에서 적었는데, 그렇다고 여러분하고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닙니다.

출가하는 것은 이 윤회라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하는 것들, 그다음에 어떻게 하면 빨리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목적과 그렇게 어긋나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출가한 스님들이 반드시 또 해야 되는 게 뭐냐면 재가자들이 출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것, 그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잠재적으로 봤을 때는 출가자가 될 수 있는 거고. 물론 출가한 스님들을 위한 교육도 해야 되는데 출가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한테는 「출가자」라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수행자」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생각을 하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에피소드를 참 많이 겪습니다. 스님도 꼭 마찬가집니다.

한 번은 서울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옆 칸에 있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요. 출가한 스님들은 이리 해야 된다, 저리 해야 된다 하고 딱 규정을 하는 거라. 그 규정을 보니까 출가한 스님은 PC도 하면 안 되고, 전혀 그런 것들을 하면 안 된다. 그냥 수행만 해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좀 뜨끔했어. 왜 그러냐면 내 가방에는 요즘은 안 들고 다니는데 옛날에는 한창 문서작업 하고 할 때는 조그만한 노트북이 하나 있었거든. 내 가방에 노트북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아, 저 사람은 출가한 스님도 아니다” 할 게 뻔하다 싶어서 좀 뜨끔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출가한 스님들은 이렇게 해야 된다 하고 규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거는 약과입니다.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부산의 태종사에 있을 땐데, 거기는 아무래도 조계종 사찰이니까 일이 참 많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이라 하더라도. 무슨 회의가 그렇게 많은지 심심하면 회의가 있다고 오라고 그래. 그런데 대부분 이 회의라고 하는 게 오전에 하면 누가 뭐라 하나? 꼭 저녁 시간에 회의를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녁에 일반 재가인들이 회의한다고 그러면 꼭 술을 같이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항상 “난 술을 안 먹습니다. 그래도 관계없으면 내가 참석하겠습니다.”

“아이, 스님 걱정 말고 오세요.” 그리해놓고 실제로 가면 뭐라고 그러느냐면 “다른 사람들 다 먹는데 스님이라고 안 먹으면 그것도 예의 아닙니다.” 또 이래.

“거 안 먹어도 된다고 해서 왔는데 또 왜 먹으라고 그러느냐?”

“그래도 출가한 스님이라 해도 한잔 해도 괜찮습니다.” 또 이런다고.

자기들이 규정을 또 만들어.

 

그래서 그때 그런 얘기를 하고 나서 그 뒤로는 다시는 그런 모임에 안 가는데, 뭐라고 했느냐면 “그래. 좋다. 내가 이거 술 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 충족해줘야 되는 조건이 있다. 부처님은 분명히 출가한 스님은 술 먹지 마라 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처님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여러분들이 말하는 그것이 해탈로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증명해주면 나 술 먹을게.” 그랬더만 아무 소리 안 하는 거라. 그 뒤로는 아예 그런 모임에는 그 뒤로는 안 갔는데, 어찌 보면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을 규정하는 경우들도 간혹 봅니다.

 

그런데 출가자를 규정을 하는 것은 누가 규정을 해야 됩니까? 부처님이 해야지 무슨 재가자가 어떻게 그걸 규정을 해? 출가한 사람은 이리 해야 된다. 이런 것들을 해야 된다. 이거는 하지 말아야 된다. 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이외에는 어떤 경우도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걸 여러분들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출가하는 분들에 대해서 규정할려고 하고, 특히 형태들을 가지고 규정을 할려고 할 경우들도 많습니다. 가사 색을 보고 좀 어두컴컴한 색깔을 입고 있으면 아, 저 스님이 수행하는 스님인 모양이다 그러면 저 스님이 더 좋아 보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저 어두컴컴한 색을 입으니까 좀 어두워 보인다. 나는 밝은색 스님이 더 좋아 보인다. 모습이나 형태 가지고 이렇게 판단을 한다는 거라.

또는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판이판(事判理判). 수행하는 스님은 좋아 보이고, 살림 살고 이런 스님들을 또 싫어 보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탁발하는 스님들은 좋아 보이고, 절에서 밥 먹는 스님은 또 안 좋아 보이고.

왜 이렇게 모습이나 형태를 가지고 규정을 하느냐는 거라.

 

이거는 부처님이 규정해놓은 법에 맞게끔 돼야 되는데, 스님이 어떤 색을 입었든 부처님이 그걸 허용했으면 관계없는 것이고, 그리고 출가생활해서 수행만 하는 스님이든 아니면 수행뿐아니라 세속 사람들을 교화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스님이든 부처님이 허용을 했으면 관계가 없는 것이고, 탁발할 상황이면 탁발하는 스님이든 아니면 절에서 먹더라도 법에 어긋나지 않게끔 율에 어긋나지 않게끔 먹는 스님이면 관계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걸 형태를 가지고 규정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좀 주의해야 될 필요가 있지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도 스님은,

매일 출가한 스님들이 항상 기억하고 상기해야 되는 열 가지 게송이 있습니다.

다사담마 숫따(Dasadhammasutta)라고 하는 중부경전에 있는 경인데 나중에 한번 찾아보십시오. 저기 보니까 니까야 누가 갖다놨네. 중부경이면 맛지마니까야 입니다.

'다사담마'라고 하는 것은 '열가지 법'이라는 뜻입니다. 다사담마 숫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항상 상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건 나만 그리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출가한 스님이면 누구든지 그걸 해야 돼. 그러니까 내가 왜 출가했노? 하는 것을 자꾸 되새기지 않으면 까먹어버린다는 거라. 까먹어버려서 출가한 스님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구분을 못하게 되고, 또 그냥 흐리멍텅하게 그냥 시간 보내버리고 이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열 가지 법(Dasadhamma)이 뭐냐면,

 

첫 번째가 출가한 스님들은 세속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세속에 대해서 누가 뭐하고 누가 뭐하고, 요즘 바캉스 철이니까 누가 놀러간다고 할 것 같으면 ‘아유, 나도 가고 싶은데’, 아니면 예쁜 신발 누가 신고 있으면 ‘아, 나도 예쁜 신발 발 슬리퍼라도 좀 있었으면’, 그런데 매료된다는 거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집착을 놓아버리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게 첫 번째입니다.

관심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라. 쉽게 말하면 예를 들면 누가 법회에 초청할 거 같으면 몸이 허락되고 여러 가지 사정들이 허락되면 가서 법회를 봐줘야 됩니다. 그런데 가끔씩 스님들한테 야, 너 오늘 거기 가서 법문 좀 해라 할 것 같으면, 거기 안간대. “왜?” 그러니까, 가면 보시금도 안 주는데 내 돈 가지고 가야 되는데 왜 가느냐고 하는 거라. 그리고 거기 간다고 해가지고 방송 타는 것도 아니고 힘만 드는데, 명예 부분 이런 걸 자꾸 따집니다. 그거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출가한 스님이 해야 될 것이 아닌데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매일 되새겨야 됩니다. 어, 내가 지금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거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걸 첫 번째로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출가한 스님들은 뭐로 가지고 살아가요? 내 스스로 밥 해먹고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밥을 가지고 먹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뛰어나다, 내가 훌륭하다 하는 자아의식을 탁 없애버려야 됩니다.

아, 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이 재가자보다 뛰어나다? 아니면 내가 잘나고 똑똑하다? 이런 생각 아예 하지 말아라는 거라.

출가했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네 가지 의지할 물품들, 가사, 먹는 것, 그다음에 거주하는 것, 내가 아플 때 병원 가고 하는 것, 이런 거 전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 의지해 나가야 됩니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 더더구나 하면 아예 안 되는 것들이라. 그런데 뭐 자기가 잘났다고 재가자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고 이렇게 하느냐는 거라. 그런 생각 아예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나는 내 법이 뛰어날 지언정 내 자신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거라. 아무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거라. 그게 출가한 스님들이 항상 되뇌어야 하는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로 해야 되는 것은 뭐냐면 출가의 삶은 재가의 삶과 완전하게 다르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이 만약에 자기 수행 안 하고 그리고 법을 온전하게 지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한 것 이런 것들을 안 할 것 같으면 출가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출가자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 엉뚱한 것들을 계속 한다고 할 거 같으면 출가할 이유가 없는 거라. 재가의 삶과는 완전하게 다른 것들인데, 재가자들은 그걸 하려해도 할 수가 없는 것들이라. 여러분들이 하루종일 수행할려고 한다 해도 수행할 수 있어요? 못해요.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할 일들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처님 가르침은 왜곡되지도 말아야 되는 거고 변형되지도 말고 그대로 존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은 대부분 보면 자기의 의견들을 거기다가 살을 더 붙여버립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 그냥 원형대로 그냥 보존해야 되고, 그 원형대로 그대로 전해주어야 되는 것들이라.

그래서 출가의 삶은 재가의 삶하고 완전하게 반대라는 거라. 완전하게 다르다는 거라. 그런데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못하고 있으면 빨리 하고 있는 패턴들로 바꾸든지 중단하든지 아니면 정 안되면 출가생활이 안 맞기 때문에 옷을 벗고 나가든지, 그걸 항상 되돌아보라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위나야, 계를 지키는데 내 스스로 양심에 꺼림칙한 부분이 없는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없는가? 내 스스로 자꾸 자기 양심에 그걸 '히리-옷땁빠'라고 그럽니다. 죄를 저지르고 나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저지르고 있는가 아닌가를 자꾸 돌아봐야 된다는 거라, 만약에 저지르고 있으면 내가 참 나쁜 과보를 받는 거고 내가 출가자로서 안 해야 될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저지르기 전에 ‘아, 내가 이것은 참 부끄러워해야 되는 것이고 이것은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자기 양심에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다른 스님들로부터 그런 계율에 대해서 비난받고 있는 것은 없는가?

자기 자신의 양심에 비춰봐가지고 돌아봤을 때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것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다른 스님들이 그 부분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러면 그거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다른 스님들이 지적하고 했을 때 아, 내가 참 잘못했구나 생각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참회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아침 저녁마다 예불 끝나고 나면 반드시 하는 것이 두 스님이 딱 머리를 맞대고 서로 삼배 올리고 나서 참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항 반떼 삼바훌라 나나왓투까요...

(ahaṃ bhante sambahulā nānāvatthukāyo...)" 하면서 쭉 참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모르게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저지른 사소한 잘못이 있으면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도 “그래 니가 잘못한 거 니가 알겠느냐” 하면 “예, 압니다. 다시는 그런 잘못 안 저지르겠습니다.” 이러고 나면 “다음부터는 이런 잘못 저지르지 마라.” 그럽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반대로 또 합니다. 또 다른 스님이 그 스님한테 “스님도 그런 잘못이 있으면 하지 마십시오.” 참회를 받아준 스님이 또 참회를 합니다. 서로 이렇게 하는 거라. 서로 이렇게 위해주는 게, 그래서 그게 승가의 화합이라는 거라.

남의 잘못에 대해서 그것을 언짢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승가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하는 것들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변해가고 있는 것들이다 하는 것들을, 그 덧없는 것들을 가슴속에 자꾸 되새기고 있냐는 거라. 누가 나를 뭐라 하든 아니면 이 붓다야나 선원이 폭삭 내려앉든 그건 당연히 덧없는 것들이고 변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해야 될 거는 지금 만약에 이걸 새로 짓는 거다 할 것 같으면 그냥 지으면 돼. 그것 가지고 이거 무너져서 어쩌나, 이러고 변해가는 것을 가지고 왜 붙잡고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 모든 것들은 변해간다고 하는 사실을, 덧없다고 하는 것들을 가슴 깊이 자꾸 알고 있는가 하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자업자득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거는 내가 받는다. 좋은 일 했으면 좋은 거 받는 거고, 나쁜 일 했으면 나쁜 거 받는다. 그걸 잊어버리지 말아라는 거라. 자기가 받을 거 좋은 거 받을려고 해야지 나쁜 거 받을려고 자꾸 해가지고 되겠어요?

 

그다음에 여덟 번째 내가 오늘 낮과 밤을 어떻게 보냈는가?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거라. 출가자로서 해야 될 일들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거라. 낮과 밤, 낮에 해야 될 일이 있고 밤에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분명하게 잘했느냐는 거라.

 

그다음에 아홉 번째 내가 지금 출가한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여기에 만족하고 있는가?

욕망이 들끓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놓아버리라는 거라. 내가 지금 이거 생활하고 있는 거 이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느냐는 거라.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출가자로서 나아가야 될 길을 정확하게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도와 과에 이르렀든 아니면 그렇지 않고 인제 겨우 조금의 진척이 있든 향상이 있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향상이 있고 나아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바르게 나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는 지금 출가한 생활에 대해서 만족함을 느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 열 번째 출가한 스님들에게 마지막 임종 때 다른 스님들이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알아요?

스님, 마음의 향상됨이 있었습니까?

스님, 지혜를 증득했습니까?

스님, 도와 과를 얻었습니까?

죽을 때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딱 입 다물고 침묵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도 참 볼성 사나운 것이라. 임종 때 누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이 청정해져가지고 깨끗한 상태로 계속적으로 나아가는 것도 없고, 무슨 조그만한 지혜도 얻은 게 없고, 도와 과를 이루지 못했다고 할 거 같으면 야, 이거 내가 게으름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가지고 빨리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 열 가지를 출가한 스님들은 항상 되새기라는 거라.

 

'아빈냐 빱바지따' 그럽니다.

출가한 자들은 '아빈항 빳자웩키땁방(abiṇhaṃ paccavekkhitabbaṃ)' 항상 그걸 기억하고 되새겨야 됩니다.

그게 인제 출가자들이 부처님이 얘기한 항상 기억하고 회상해야 될 열 가지입니다.

이걸 잊어버리는 스님은 아마 없을 거라. 잊어버리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까 출가한 스님들은 여러분하고 많이 다르죠? 많이 다를 거라.

그런데 겉모습 가지고 출가자들을 판단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형태의 출가보다는 마음의 출가가 더 중요합니다. 물론 형태적으로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깎고 바리때를 들고 해야만이 출가자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것은 뭘 위한 겁니까? 마음의 출가입니다. 마음의 번뇌를 없애고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한 형태의 출가가 필요한 것이지 마음의 출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 저 스님이 그렇게 욕심부리는 게 있는가 없는가?

저 스님이 진짜 출가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그것 가지고 아, 저 스님을 따라야 되겠다, 말아야 되겠다 하는 것을 결정해야 되는 것이지, 형태·모습들을 가지고 자꾸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형태·모습은 언제든지 기만할 수가 있습니다.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현혹돼버리면 안 돼. 누가 뭐 유명하다 할 것 같으면 우루루 가가지고 아이고 우리 스님 하면서 난리를 칩니다. 실제 그 스님하고 같이 살아보면 그런 개망나니 같은 스님도 없는데 사람들은 거기에 열광을 하는 거라. 형태·모습으로.

 

출가한 스님들을 누가 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스님들이 아니고 빨리어 경전 중에 테라가타(Theragāthā)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로게송"이라는 뜻입니다. 저기 지금 4부 니까야가 있는데 마지막 5부에 쿳다까니까야에 보면 테라가타, 테리가타 장로게송, 장로니게송 이런 것이 있습니다.

누가 논문을 발표했는데 테라가타에 나오는 스님들 전체를 조사를 했어요.

 

이 스님들이 어떻게 해가지고 출가를 하게 됐을까 조사를 했어요.

가장 큰 게 뭔지 알아요? 왜 출가했을 거 같애요? 가장 큰 게 그 논문에는 49명이라고 나왔는데 49분이 부처님 법을 듣고 “야! 이렇게 뛰어난 거!” “ 야! 내가 이 길로 가야되겠다!” 하는 마음이, 신심이 탁 일어나가지고 딱 출가하게 됐다는 거라. 여기 지금 여러분이 써놔놓은 랏타빨라 장로라고 하는 스님도 그 부류에 해당이 됩니다. 그 많은 것 중에 한 스님의 예만 가지고 지금 얘기를 해놓은 건데.

 

그래도 가장 많은 출가의 부류에는 "부처님 법이 훌륭함!" 그것들로 해서 출가했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 법이 좋아가지고 “아, 부처님 법 듣고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다!” 확신이 들지 않을 거 같으면 출가하면 안 돼.

출가한 스님들 요즘 이렇게 보면 그렇게 해가지고 출가한 스님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애. 그런데도 어쨌든 그것들로 출가한 스님들이 가장 많다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면 "부처님의 뛰어남!" 부처님을 보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야! 저렇게 훌륭한 분이 있나!” 하는 거라. 조금 전에는 부처님 법이었지만 두 번째는 부처님! 만날 한 사람이라도 법을 설하는 것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먼길 마다하지 않고 가지, 그리고 앉아서 내내 수행을 하지, 그리고 누가 올 거 같으면 수행에 대해서 지도해주고 열심히 해라 하고 독려해주고, 또 재가자들한테 법문 설하고, 또 친히 그냥 맨발로 탁발나가서 탁발하지, 부처님의 그 모습이 너무나 좋아가지고, ‘아 나도 그렇게 살란다’. ‘저런 모습으로 살란다’ 해가지고 출가한 스님들이 그다음이라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출가자들은 첫 번째 것을 갖추는 것이 가장 좋고 그게 안되면 이 두 번째 거라도 해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 모습하고 똑같이 살려고는 해야 되는데, 속에 열불이 나든 어쩌든 간에 그렇게 살려고는 해야 되는데, 그것조차도 안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출가자의 자격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다음에 이 테라가타에 많은 것들이 뭐냐면 스님,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 "스님의 법문 듣고!"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 제자 스님의 법문 듣고! 부처님의 제자들도 부처님과 동일합니다. 똑같이 아라한들이고, 부처님과 같은 법을 설해주고, 오히려 더 자세하게 부처님 법을 설해주고, 사리뿟따 존자 같은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그런 것들, 법문 듣고 나서 환희심이 일어나서! 아까 첫 번째 경우와 똑같습니다.

 

그다음에 많은 게 그런 "출가한 스님들의 모습!" 앗사지 존자를 보고 목갈라나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가 출가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걷는 모습을 보고 아! 저게 진짜 출가자의 모습이다. 하고

이게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거 말고도 누가 출가하니까 나도 출가하듯이 아무개가 출가하니까 자기도 출가하고, 친구 출가하니까 자기도 따라 출가하고 이런 경우도 있고, 또 세속생활하기 싫다, 아니면 애인이 도망가버렸다, 아니면 누가 돌아가셨다, 감정적인 그런 것들, 가정사적인 것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출가한 스님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소수라는 거라. 요즘에는 이게 바뀌어버린 거 같애. 세속에서는 도저히 내가 똑바로 못 살겠다 싶으면 출가하고,

어쨌든 출가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출가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도 적어놓았지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보다 더 많은 공덕을 쌓기 위한 것!

출가해가지고 계를 지키는 것도 여러분들보다 훨씬 많을 거고, 수행하는 것들도 여러분들보다 훨씬 많을 거고, 또 도와 과에 이르는 것들도 여러분들보다 훨씬 빠를 거라. 출가한 자들은.

굳이 그걸 얘기하지 않더라도 내가 뭔가 걸어갈 때 걸어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밥 먹을 때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그것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알아차림을 연속해나갈 수 있으면 그마만큼 선한 마음들이 더 많이 일어나집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게 원인이 돼서 선한 결과들이 있게 되고 선한 과보들을 받게 되고, 그럼 여러분보다 훨씬 공덕을 많이 쌓지 적게 쌓지는 않을 거라. 뭐 그냥 여러분들이 탁발 한번 했다고 해가지고 공덕 많이 쌓았다고 생각하면 안돼.

 

그런데 만약에 출가한 스님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럼 뭐하러 출가했어?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켜가지고 선한 결과들을 더 낳기 위해서 그게 더 용이하기 때문에 출가를 해놓고 왜 그거 안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 의미가 없어져. 출가한 의미가. 출가의 목적 첫 번째부터 어긋나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출가한 스님들은 모든 행위들은 반드시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다음에 출가의 목적 두 번째가, 그냥 내가 계율 잘 지키고 삼매 조금 체험하고 그리고 번뇌 일으킬 수 있는 것들 그냥 대충 끊어내고 그럴려고 출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윤회하는 것은 똑 마찬가지라는 거라.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러가지고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윤회하는 것은 꼭 마찬가지라.

설혹 아라한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류과에는 이르러야만이 윤회를 끊는다는 확정되는 것들이 있는데,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할 거 같으면, 계 조금 잘 지킨다? 그것 가지고 출가한 목적을 이루었다? 그거는 계율 항목만 다른 것뿐이지 세속 사람들도 오계 지키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많습니다.

내가 수행 좀 잘 해가지고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다? 세속 사람들도 수행 잘하고 있는 사람들 얼마든지 많습니다. 뭐하러 출가했느냐는 거라. 차라리 그냥 세속에 있지.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반드시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되는 것이 목적이. 거기에 이르지 못했을 거 같으면 그 어떤 것에도 만족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더욱 더 자꾸 노력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출가의 목적은 이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머리를 깎았다고 출가한 것이 아니다."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만날 엉뚱한 거짓말이나 해쌌고, 그리고 속가 사람들한테 세속 사람들한테 뭐 이거 좀 가져와라, 저거 좀 가져와라 요구하는 것은 많고, 욕심은 디룩디룩 쪄가지고 남에게 베풀려는 마음은 하나도 없다? 그럼 너는 출가를 왜 했느냐는 거라. 경에 그렇게 써져 있는 것을 내가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얘기하는 겁니다. 너 왜 출가했느냐는 거라. 그런 자는 출가자라고 안 부른다 하고 부처님이 딱 단언을 해버립니다.

 

보통 출가자들을 사마나(samaṇa) 아니면 빱밧자(pabbajja) 이런 용어를 씁니다.

'사마나'는 '사마네띠'라고 하는 데서 온 용어인데 쉽게 얘기하면 '집을 떠난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집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있는 이 하우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하우스를 떠나가지고 절에 있는 하우스에 갈 거 같으면 그게 무슨 집을 떠난 자라고 그래? 그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자, 떠난 자'를 '사마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속 집에 앉아가지고 공양하고 밥을 먹고 있어도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을 떠난 자는 그것은 출가자인 것이고, 저기 절간에 앉아있더라도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그대로 남아있는 자는 집을 떠나지 못한 자가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그럽니다. 너는 집을 떠난 자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집을 떠나지 못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새가 이 물에서 박차오를 때 미련없이 놓아버리고 탁 박차야만이 이것에서 날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탁 놓아버려야만이 착 날아올라 갈 수가 있습니다. 그게 출가자의 가는 길이라는 거라.

 

그래서 경에는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사미땃따 히 빠빠낭 사마노(samitattā hi pāpānaṃ samaṇo)"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악한 것들이, 아니면 악한 마음들 이런 것들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끔 하라는 거라. 일어나려 하면 탁 알아차려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라는 거라.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끔 하라. 그걸 억제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출가자다.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고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색·수·상·행·식 몸에 대한 집착, 느낌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을 끊어버리고 느낌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알아차리고, 몸에서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면 좋고 싫은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래서 몸이 변해가든 몸이 병이 들던 그거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알아차리라는 거라. 단지 지금 해야 될 것들을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더 병이 들지 않게끔 자기가 스스로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지, 그 병에 안 들려고 막 집착해가지고 난리를 쳐버리면 안된다는 거라.

 

그냥 쭉 넘길게요. 저기 뒤에 9페이지, 부처님이 이 말을 했을 때 이 랏타빨라 장로는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출가한 스님은 반드시 이것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첫 번째 구절은 ...

“Upaniyati loko addhuvo(우빠니야띠 로-- 앗두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항상 머무는 법이 없다. 견고하지 않다.

 

가슴 깊이 그것들을 자꾸 되새겨야 됩니다. ‘아, 진짜 그렇다. 머물러 있는 법이 없구나’ 머물러 있는 법이 없는데 왜 지는 그것에 머물러가지고 집착하고 있느냐는 거라. 놓아버리라는 거라. 그냥 버려버리라는 거라.

그러려면 지금 현재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래서 그 밑에 붉은 글씨로 하루가 지나면 죽음의 날에 하루가 가까워진다.

여러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병·사(老病死)를 향해서 그냥 나아가는 겁니다. 오늘 하루 지나고 나면 죽을 날짜 하루가 더 가까워집니다.

죽음의 왕이 나를 잡아갈 날짜가 하루가 더 땡겨지는 거라. 죽음의 날로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는 거라. 하루 지나는 거 안 아까워?

 

뒤에 10페이지, 두 번째 구절은…

“Atano loko anabhissaro(아따노- -- 아나빗사로-)”

이 세상 생명은 지켜 주는 사람이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의지할 대상이 어디 있고 지켜줄 게 어디 있어? 내가 아무리 아파 봐봐. “아이고, 우리 스님 아파서 우짜노” 위로는 해줄지 몰라도 내 아픈 거 가져갈 수 있어? 못 가져가! 만약에 병이 들어가지고 내일 죽는다. 나 지금 안 죽고 싶으니까 니들 목숨 일년씩 나한테 줘 해가지고 그거 가져올 수 있어? 아무것도 의지할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뭐 이마만큼 쌓아놨다 해가지고 그거 가지고 저세상 갈 수 있어? 못 가져가! 아무것도! 그럼 뭐하는데 그걸 가지고 의지하려하고 집착하고 할 게 있느냐는 거라. 그거 전혀 없다는 거라.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지은 행위들입니다. 자기가 지은 행위들로 인해서 다음 과보를 받았거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선한 행위를 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지만,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가지고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결과를 받지만 그것도 거기서 끝나는 거라. 결과 받고 나면. 또 윤회하는 것은 똑 마찬가지라. 그럼 빨리 그 윤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선한 것만 자꾸 할려고 한다?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의 목적은…

“Assako loko, sabbaṁ pahāya gamanīyaṁ(앗사꼬- -, 삽방 빠하-야 가마니-)”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없다.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한다.

 

그것 버리고 그대로 가야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다려 주는 법이 없습니다. 재산 이마만큼 쌓아놨다 해가지고 재산이 자기를 기다려주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 쌓아놓은 것으로 인해서 내가 천상세계에 간다? 그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나하고는 별개의 것입니다. 단지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선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쓰이게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 하지 말아라는 거라.

 

마지막 네 번째의 목적은…

“Ūno loko atitto taṇhādāso(-- -- 아띳또- 딴하---)”

이 세상 중생들은 항상 부족해 한다. 만족함이 없다. 갈애의 노예이다.

 

백원 벌면 이백원 벌고 싶어 하는 거는 틀림없는데, 만족하고 채워줄 수 있는 게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 왜? 갈애가 항상 일어나기 때문에!

갈애는 세종류다 하고 얘기합니다.

감각적인 것을 자꾸 찾을려고 하는 것, 살고 싶어 하는 것, 그다음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

그 갈애들은 여러분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갈애들은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 이것은 끊어지고, 일래과에 이르렀을 때 이것은 끊어지고, 불환과에 이르렀을 때 이것은 끊어지고, 점차적으로 끊어지는 것이 다른 것뿐인 것이지 완전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라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설혹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만족해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직 완전하게 갈애의 노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거라.

하물며 그런데 조그만한 갈애도 내가 완전히 탁 끊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럼 뭐하러 그걸 해? 안 부끄럽느냐는 거라.

내가 여러분들을 출가자라 생각하고 공부를 못 시킨 것 같아가지고 미안키는 한데,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수행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똑바로 하라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 대로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라는 거라. 그냥 교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아, 이거 조금 어겨도 되겠지’ ‘아, 오늘은 하기 싫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할려느냐는 거라.

 

자! 오늘은 왜 출가하는가 앞에 부분을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출가자가 해야 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