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진실을 아는 것과 진리에 이르는 것 (20150710.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14. 09:00

https://youtu.be/7ppgb-vunfE

* 진실을 아는 것과 진리에 이르는 것 (20150710. 대구)

 

이번 주는 원래 「왜 출가하는가」 하는 것의 <후편>을 해야 되는데 아직 스님이 완성을 못했어요. 게으름 피운다고. 뒤에 문구가 조금 이상한 게 있어가지고 그거 지금 좀 다듬고 조사 비교할 것이 좀 있어가지고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진실을 아는 것과 진리에 이르는 것」 하겠습니다.

빨리어로 진실이 뭡니까? 삿짜(sacca) 그러죠? 인도말로는 사뜨야(satya) 거기다가 적어놨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그리고 진리는 빨리어로 뭐라? 담마(Dhamma)죠. 보통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

 

그런데 보통 이 삿짜(sacca) 하고 담마(Dhamma)를 혼용해서 많이 씁니다.

사성제 할 때 사성제도 삿짜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렇게 하죠. 원래 삿짜가 들어가게 되면 네 가지 성스러운 진실이라고 해야 그게 맞는데 그렇게 쓰고, 그것 말고도 혼용해서 쓰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두 용어는 다르면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진실하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이 생각나는 것이 뭐가 있어요? '거짓말 안 하는 것'이죠. 거짓말이 아닌 말을 진실한 말을 한다, 그것은 진실하다 이렇게 할 경우에는 진실한 말을 한다, 그다음에 거짓말 안 한다 이 두 가지가 해당이 되겠죠.

 

경전에는 그것은 진실하다 하고 얘기할 때 꼭 그것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르게 그거는 진실하다 하고 얘기할 때 경전에는 뭐라고 해놓았느냐면 '지혜를 가지고 있다',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실하다. 하고 얘길 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궁극적인 실재를 알고 있다' 하고 얘기할 때 진실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삿짜라고 하는 의미가 어떤 면에서 보면 담마라는 용어하고 겹쳐지는 부분도 틀림없이 있죠?

 

삿짜(sacca)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보통 빨리어 경전에 쭉 다 찾아보면

'와짜 삿짜(vācā sacca)'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 거짓말 안 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 여기에는 거짓말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진실한 말의 네 가지가 있죠? 거짓말의 네 가지.

거짓말 안 하고, 이간질 안 하고, 성내는 말 안 하고, 남을 비난한다든지 아니면 남을 헐뜯는다든지 이런 말들 안 하게 되고, 그리고 의심하는 것들도 안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다 해당이 되고 마지막에는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는다 하는 것도 해당이 되고 그래서 그런 말들을 안 하게 될 때 아, 그 사람은 말을 할 때 진실하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와짜 삿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위라띠 삿짜(virati sacc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하는데 절제하는 사람, 잘 절제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뭘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도 크게 맛있는 것에 개의치 않고 절제를 하고, 요즘 바캉스철이니까 어디 놀러가고 싶은데 놀러가는 거 절제하고 수행하러 간다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말과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잘 절제된 그런 사람들을 위라띠 삿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잘 절제돼서 진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삿짜가 들어가는 게 뭐가 있느냐면 '딧티 삿짜(diṭṭhi sacca)'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견해가 바로 확립 돼있는 사람. 옳고 그름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견해를 확립하고, 이익이 있는 것과 이익이 없는 것, 그리고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되는 것, 그리고 지금 해야 되는 것과 나중에 해야 되는 것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 그런 걸 딧티 삿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또 삿짜가 경전에 복합어로써 등장하는 게 뭐냐면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 sacca)' 라고 나와 있습니다.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 그것을 아는 사람들. 몸과 마음에 대해서 이것은 몸의 현상이고 이것은 마음의 현상이고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실재하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 삿짜라고 얘기합니다. 삿짜라는 의미가 이렇게 풍부하고 그 의미가 많은데,

 

그런데 삿짜가 꼭 사회에서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인도에서 슬로건을 이렇게 했을까? 이게 뭐냐면 인도에서의 집회에서는 다 이 글자가 돼있습니다.

루삐라고 해서 인도의 학교가 있는데, "사뜨양 에-와 자얀떼-(Satyaṁ eva jayante)"

jayante 승리한다, 진실은, eva 오직 그것만이, 진실만이 승리한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되고.

「진실은 항상 승리한다.」 라고 그랬는데,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또 그 진실을 지키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난이나 이런 것들도 감수를 해야 됩니다. 요즘은 그거 하려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수모를 당하기도 하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데 나중에 결국에는 보면 진실만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사실은 진실만이 승리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하는 의미로써 적어놓았습니다. 다른 것들이 승리를 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거짓이 승리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되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진실만이 승리를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게 인도의 아소카 왕이 각문들을 썼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성도하고 한 그런 곳에다가 아소카 석주를 세워놓았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는 굉장히 오래된 거죠? 이 문구를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인도 국기에도 아소카왕의 석주, 사자머리 형태를 국기에도 그려놓고 있는 실정인데.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진실에 대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데, 담마라고 하는 것들, 진실한 것은 아는데 진실만 추구하려다 보면 담마에 대한 것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무상하다’ 그건 알거든. 무상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라. 누가 돌아가셔도 무상하다고 알고, 계절이 바뀌어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나는 병이 든다, 그것도 진실한 겁니다. 병 안 들고 어떻게 해. 내가 늙는다 하는 것도 진실한 겁니다.

그런데 진실한 걸 안다고 해가지고 진리에 이르렀다고 얘기는 못하는 거라. 무상하다 해가지고 무상한 성품을 거역할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안 늙을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도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담마의 토대가 되긴 하지만 담마·진리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토대가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수행할 때도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만이 수행에 진척이 있습니다.

또는 진실하다는 척도를 보통 뭐로 하느냐면 삼보에 대한 믿음으로 진실의 척도들을 재기도 합니다. 가만히 여러분들도 한번 보십시오. 부처님을 딱 보고 부처님을 회상하면서 아, 부처님만이 승리한다. 부처님만이 오직 위대한 성자이다. 하고 마음에 탁 들 수 있가?

또는 그 가르침인 담마, 담마는 우리에게 해탈에 이르게 한다. 또는 담마를 실천하면 내가 행복해진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거라.

적어도 삿짜가 있다는 것은 그런 확신들이 들어야 됩니다. 담마 따라서 살아가는 자, 담마를 지닌 자들을 우리가 보호하고 존경해야 된다. 그런 확신들이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보통 삿짜 바라밀들이 어느 정도 완성됐느냐 하는 것을 측정하는 것들이 이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자기 스스로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들을 가지고 측정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가끔씩 이 「진실 바라밀」을 닦을려고 할 때 이 삼보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측정의 도구로 삼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항상 지혜와 같이 일어나야만이 담마가 일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진실만으로, 진실을 아는 것, 그것만으로는 윤회를 벗어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풍랑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설혹 그 사람이 신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동일하다는 거라. 마찬가지라는 거라. 흔들리는 것에서는 똑 마찬가지라는 그런 뜻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1차 결집을 할 때 천신들이 생각합니다. 아난다 존자가 그전까지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가 1차 결집하기 전에 깨달음을 이루어서 아라한이 됐어요. 아라한이 됐다는 것은 붓다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때 천신들이 뭘 주의해서 보느냐면, 아난다 존자가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는 틀림없다는 거라. 과연 저기서 부처님의 말씀을 송출해나갈 때 어떻게 시작할 것이냐 하는 것이 굉장히 관심사였어요.

여러분 같으면 부처님 말씀을 전할 때 어떻게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자기 말 같이 얘기합니다. “이것이 진리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라.

 

그런데 아난다 존자가 첫머리에 뭐라고 그러느냐면 에왕 메 수땅(Eevaṁ me sut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진리에 이른 자의 공통적인 특성이 그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했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이 들었다는 거라.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한 거라는 거라.

그렇게 시작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사-두(sādhu)” 하고 얘기합니다. 잘했다는 거라. 왜 그랬을까? 아난다가 그 경을 송출했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담마를 듣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담마를, 부처님이 열반하고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 직접 들려줄 수는 없는데, 아난다가 부처님 말을 전해주는 거라. 이거는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 하면서 부처님이 한 말을 그대로 하는 거라.

그러니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다가 다시 환생해가지고 그냥 법을 설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게 너무나 고마운 거라. 이젠 다시는 부처님을 뵐 수도 없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부처님에게 법을 들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비로소 “에왕메 수땅” 으로 시작함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거라.

 

담마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나더라도 법과 율이 여러분들의 의지처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경전을 읽으면 항상 그걸 부처님이 설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 항상 주의를 주는 게 그겁니다.

“그게 네 말이냐?”

“왜 거기다가 네 의견을 붙이느냐?”

그냥 부처님의 말씀만 전하라는 거라. 그게 완전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부처님의 말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환희를 하는 것이지, 부처님 말이 아닌 다른 의견들을 더할 경우 그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반증일 뿐 아니라 그것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왜? 깨달은 자들은 자기들 의견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깨달은 자들은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법을 전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 법을 전하는데 지금 현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상태만 생각해서 법을 무작위로 전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에왕메 수땅” 그렇게 시작을 하게 됩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그 대목들을 생각하면 참 환희심이 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을 보면 '에깡 사마양(Ekaṁ samayaṁ)' '어느 한 때'

그 얘기는 뭐냐면 '에깡'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거라. 지금 여기서 부처님 법을 듣는다는 거라. 경전에는 어떤 경우에는 순서대로 2천 몇년 몇월달이라고 시간을 명시하지 않고 '에깡 사마양'이라고 했을까? 그건 진짜, 진짜 잘한 선택입니다.

법은 지금 여기에 나타나야 되는 것이고, 지금 여기서 들어야 되는 것이지, 과거라고 생각해버릴 것 같으면 과거에서 그냥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가 '에깡 사마양' '지금 여기 이때' 법을 설하는 때, 법을 듣는 때가 직접 부처님이 지금 여기 나타나서 나에게 법을 설하는 때라는 거라. 2600년 지났지만. 그래서 '에깡 사마양' 그럽니다.

 

그러고 나서 나오는 게 '바가와(bhagav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라항(arahaṃ)'의 특색이 뭐냐 하면 '아, 라하(a + rahā)'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짓이 없다.' 삿짜라고 하는 거짓이 없는 자. 어떠한 경우든지 거짓됨이 없다는 거라.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들, 그가 행하는 모든 말들, 그런 것들은 거짓됨이 없다는 거라.

'바가와(bhagavā)' 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의미는, 여러분들은 「세존」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잘 오셨다가 잘 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뭐냐하면 바가와 라는 것은 '삿짜'와 '라가'의 합성어입니다. 진실되게 법을 설하시는 분, 그리고 집착됨이 없는 분들을 얘기할 때 '바가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을 설하는 처음부터 해가지고 이 삿짜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법을 설할 때는 진실하게 부처님 말만 전할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설법의 기준 조건에 충족되지 못한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이 삿짜라고 하는 것,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진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게 사실이고 이게 사실이 아니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데, 문제는 그것만 알고 끝나버릴 것 같으면 ‘아, 무상한 것이다’ 알고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무상한 것을 알면 해탈한 거라? 그건 아니잖아! 무상한 성품을 분명하게 관찰해서 알아야만이 그것을 아는 것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거짓말의 반대말은 진실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비법·위법(adhamma) 이라는 말입니다.

법에 맞게끔 살아가고, 법을 지닌 자가 될 때 그 사람은 담마 따라서 살아가게 되고, '담마를 지닌 자'라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이 강가로 탁발을 나가야 되는데 강가에서 사람들이 막 목욕을 하고 있거든. 그것도 일주일 동안이나 막 하는 거라. 하루 씻어내는 것으로는 이 더러움이 안 씻기는 모양이라. 여러 바라문들이나 사도들이 거기서 막 목욕하는 거라.

무엇 때문에 목욕하냐? 하니까 업(業)을 그거로 소멸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업장소멸 얘기 많이 하잖아. 꼭 마찬가지라. “물로 씻어내면 업이 소멸된다. 그리고 더러운 것들이 없어지기 때문에 나는 청정에 이른다” 하고 얘길합니다.

 

객관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가지고 깨끗해지겠어요? 안 깨끗해집니다! 다른 경전에 보면 그렇게 해가지고 깨끗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벌써 그냥 다 극락왕생 했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다 청정해져 있으니까, 항상 살고 있는 걔들이 더 깨끗해지지 뭐.

 

말미에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로 인해서는 청정해질 수가 없다.” 어떠한 경우든지 물로 인해서는 청정해질 수가 없다는 거라. 기도로 인해서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는 제사로 인해서 사람들의 다음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똑 마찬가집니다.

 

“진실하게 담마에 머문 이가 청정해진다.” 그 담마에 머물러있어야만이 청정해지는 것이지 담마를 알지 못하고 담마에 머물지 못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청정해질 수 없다는 거라. 번뇌가 일어나면 번뇌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번뇌가 제거하는것이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 있으면서 번뇌가 제어됐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는 거라. 물로 아무리 깨끗이 씻지만 그건 안 더러워져? 그건 더러워지게 돼 있어 하루 지나면. 그런데 물로 번뇌를 더러움을 제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진리를 안다고 해가지고 그 진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머무는 자가 돼 있을 때 진리에 머무는 것이지, 아는 것과 머무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일어난 사건을 얘기해줄게요.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의 얘기입니다.

담마라마 라고 하는 스님이, 대반열반경에 보면 부처님이 4개월 전에 열반을 예고합니다. “나는 4개월 후에 완전하게 이 몸을 버리는 반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하고 같이 지내다가 부처님 법을 듣고 환희심을 얻고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의기소침할 거야? 그러면 아마 여러분 같아도 부처님 곁에서 안 떠나려 할 거라. 4개월 동안에는 같이 있고 싶어가지고. 부처님한테 못 해준 게 있으면 좀 더 잘해주려 할 거고, 한마디라도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더 묻고자 할 거고, 그러면 그 4개월 동안은 부처님이 이동할 동안에 오만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을 뵈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담마라마 스님은 부처님 뵈러 갈 생각도 안 하고, 누가 “너 왜 부처님이 옆에 계시는데 부처님한테 가서 뭐 물어볼 거 물어보고 예경조차도 안 하느냐?” 하니까 대답도 안 하고 자기 혼자서 그냥 벽 쪽에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수행을 하는 거라.

 

부처님이 그 담마라마를 불러서 얘기를 합니다. “너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았느냐? 의문나는 것이 없었느냐?” 부처님이 그 담마라마에게 물어보니까.

부처님께서는 4개월 후에 열반에 드시지 않느냐? 더 이상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없다는 거라. 그때사 어, 내 곁에 스승님이 없어지는구나 하는 강박관념이 딱 생기는 거라. 아, 나는 부처님 있을 때도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나면 내가 어떡하냐?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

좋은 스승 있을 때 법을 듣고 수행할려는 생각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 그게 맞는 것이지, 스승 떠나고 나서 후회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 수행한다고 해가지고 법을 들을려고 한다고 해서 진척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오히려 느리면 느렸지 빠르지는 않다는 거라. 그래서 시간이 급한 거라. 담마라마 스님은.

부처님한테 가서 예경드리고 부처님한테 질문할 시간이 어딨어?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데. 그래서 나는 못간 거라.

부처님이 그 얘기를 듣고 “참 잘했다! 나한테 와서 예경하는 것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법을 알고 법을 지닌 자가 될 때 그 사람이 나를 예경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밑에 이 게송을 얘기합니다.

 

Dhammārāmo(담마---) Dhamma를 지주·주처로 하라.

 

담마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거라.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담마라고 하는 것들에 머물러 있도록 자꾸 노력하라는 거라. 담마가 아닌 아담마(adhamma), 삿담마라고 하는 것들은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것을 실행하고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 아, 이게 법에 맞는 거다 할 것 같으면 그건 행하고 있으라는 거라. 그대로 따라 하라는 거라. 거기에 머무르려고 왜 하느냐는 거라. 적어도 진실을 아는 자일 할 것 같으면 거기에 머무르려고 자꾸 노력한다는 거라. 그걸 담마라모라고 합니다.

명상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런 자들을 Dhammārāmo(담마-라- 모-)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얘기한 게

Dhammarato(담마라또-) Dhamma에 대해서 기뻐할 줄 알아라.

 

'수행하는 거 기쁜 일이다' 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즐거운 일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행하면 수행하면서 자꾸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야 되는 거라. 담마를 기뻐할 줄 모른다는 것은 담마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기뻐할 줄 모르는 거라. 그래서 담마를 자꾸 기뻐할 수 있도록 해야 돼.

'아, 이 법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알기만 할 거 같으면 담마를 기뻐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담마를 실천하게 될 때 담마를 기뻐하게 됩니다. 내가 진리를 안 것, 진리를 실천한 것, 있는 그대로 앎으로 인해서 모르는 사실들을 알게 될 때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반드시 체험을 했을 때 기쁨들은 일어납니다. 그래서 담마에 대해서 기쁨들을 아는 자들이 될려고 자꾸 노력을 하라 하는 것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기쁨을 아는 자는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담마를 체험한 자입니다. 그런 자들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지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무시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겠어? 그래서 말을 할 때도 항상 조심합니다. 말을 할 때도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마음이나 아니면 악한 마음이 일어나면 어떡할까 하는 것을 주의해서 보고 말을 합니다. 내가 기쁨을 느끼듯이 다른 사람들도 선한 마음 기쁜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지 그 반대적인 것들을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아는 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남하고 싸울 일 안 합니다. 의견들을 무시하는 것도 없어.

그래서 담마라모가 되고 나면 담마라또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Dhammaṁ anuvicintayaṁ(담망 아누위찐따양)

Dhamma(진리)를 반복해서 사유하는 것, 생각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의미 있는 것, 의미가 없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을 할 줄 알게 됩니다.

담마에 익숙한 자들은 세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게 압니다.

'이것이 행복하게 되는 것인지 아닌지',

'이것이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렇게 세 가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익이 없는 거라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안 하는 거라. 나한테는 이익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익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어주지 못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그거 안 한다는 거라.

그리고 마지막에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똑같이 그런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잘 생각하고 잘 사유한 자들의 공통적인 게 그런 겁니다.

이익이 있고, 행복하고, 청정하게 되는 것!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이 세 가지 조건을 항상 충족해나가는 것들입니다. 그걸 담마 아누위찐따양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에 대해서 자주자주 반복해서 생각하고 사유하는 자.

 

그다음에 네 번째

Dhammaṁ anussaraṁ(담망 아눗사랑)

Dhamma(진리)를 거듭 거듭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관찰해야 될 대상이 뭐가 있습니까? 신·수·심·법 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 사념처를 계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그것인 것이지 다른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 아닙니다. 신·수·심·법이라고 하는 것에 일어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 자체가 수행하는 상태가 되는 것, 이걸 담마 아눗사랑 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게 담마라고 하는 진리를 지니는 자가 되기 위한 것들입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Saddhammā na parihāyati(삿담마- 나 빠리하-야띠)

바른 Dhamma(진리)로부터 물러나 퇴보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담마, 그것도 그냥 담마가 아니고 바른 담마, 삿담마! 바른 담마로부터 물러나서 퇴보하지 않는다. 그것으로부터 절대 물러나서 퇴보하지 않는다는 거라.

자기가 가진 재산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재산이 아니고 법의 재산입니다. 그 법의 재산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고, 자기 소유라. 이생에서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생에서도 소유를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거기서부터 퇴보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이 주제입니다. 마지막 프린트물에 보면

진실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진리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진리는 모든 생명 특히 여러분들, 인간들이 도달해야 될 목표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진짜 공양이다.하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진실을 아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을 아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진리에 이르도록 자꾸 노력해야 된다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