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자신이 만든 그물에 스스로 걸리지 마라. (20150522.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27. 09:00

https://youtu.be/lb_Hn0H85H8

* 자신이 만든 그물에 스스로 걸리지 마라. (20150522. 대구)

 

오늘은 제목이 「자신이 만든 그물에 스스로 걸리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여기 대구 왔다갔다 할려면 승용차로 오든지 아니면 버스를 타고 오든지 해야 됩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와 다르게 우리나라에서 버스 타면 스님이라도 버스비 내야 됩니다. 누군가가 대신 내주면 또 몰라도. 그러면 돈이 있어야 버스를 타는 거라. 승용차를 몰고 온다고 하더라도 기름을 넣어야 올 수 있는 거지 기름 없이 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은 돈 가지고 다니면 안된다.” 그러면 혼자서 어떻게 다니라는 얘기라? 어떤 게 맞는 거라? 돈을 가지면 안 되는 게 맞는 거야? 아니면 돈이 있어야 되는 거야? (돈이 있어야 됩니다.)

돈이 있어야 되는 거야? (예) 그럼 계율에 어긋나는데?

 

계율에는 분명히 출가한 비구스님들은 금전을 소유하는 것들은 안 된다라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거 어떻게 해야 돼? (시자가 있어야 됩니까?) 그거야 시자가 다들 있으면 몰라도 인제 출가한 스님이나 아니면 한국적인 상황에서 자기 볼 일 안 보고 시자가 따라다니면서 하는 스님들이 과연 몇이나 되느냐 하는 거라.

그거 참 어려운 부분이죠?

그런데 이걸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돈에 대해서 집착하고 거기에 속박되어 있는 것들을 우선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계율에 대한 것들을 우선으로 볼 것이냐? 부분입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게 중심사상입니까?

(계율) (집착) 계율? 집착? 왜 이렇게 다 갈립니까? (돈 없으면 이 세상 못살잖아요) 굳이 돈 없이 살려면 스님이 대구에 안 오고 여러분들이 부산에 와야 되겠지. 그렇게 방법을 만들려면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거는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 거라. 중심사상이 뭔가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들이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중심적인 사상인 거라?

 

부처님이 법을 설해준 것은 사람들이 윤회로부터 벗어나서 빨리 해탈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중심사상은 항상 어떤 것이 해탈로 향해서 나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 중심사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들이 중심사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착각을 해버리면 계율이 우선시 돼버리고, 어떤 경우에는 속박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 돼버리고, 그렇게 갈려버리게 됩니다.

속박되지 않으면 죄를 범할 일이 없습니다.

속박돼버리고 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악을 행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속박이 없으면 해탈에 이르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중심사상은 속박되는 부분들이 중심사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계율에 저촉된다, 죄가 된다 안된다 하는 것들이 중심사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보통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것에 대한 것만 자꾸 고집을 하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스님들끼리 1박2일 MT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밤새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밤을 센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그때는 사무장도 있었고, 재가자들도 몇명이 참석을 했었고 했습니다. 큰 대중 방에서 했는데 집을 하나 빌려 가지고 요쪽은 스님들 숙소로 쓰고, 이쪽은 재가자들 숙소로 쓰고, 이렇게 해가지고 했는데, 밤에 토론을 하다 보니까, 우리는 토론을 오래 못합니다.

하고 나면 이거 무의미한 걸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 정도 하고 나면 빠져버리는데, 어떤 스님들은 끝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은 빠져가지고 자고 있는데, 스님 숙소에 어느 재가자 여자분 한 분이 와서 한 스님하고 계속 토론하고 있었거든. 다른 스님이 잠을 자기는 자야 되겠는데 자꾸 떠들어싸니까 잠을 잘 수가 없거든.

 

그래서 그 스님이 하는 얘기가 뭐냐면 ‘이제 그만하고 잠 좀 잡시다’ 할 것 같으면 간단한데 뭐라고 하느냐면 “스님 밤늦게 여자하고 얘기하는 거 계율에 어긋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버리는 거라. 계율에 어긋나긴 어긋납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데, 이 스님이 계율의 항목을 가지고 얘길하니까, 이 토론하고 있던 스님이 갑자기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스님들은 계율 얘기를 하면 노이로제에 걸려버립니다. 하도 지킬 것이 많고 하니까 이거 하면 뭐 참회해야 되고 뭐 하는 것들이 많으니까 노이로제에 걸려가지고, 계율 부분 얘기할 것 같으면 아무 소리도 안 합니다. 그래가지고 결국 그게 끝났어.

어쨌든 그 스님의 재치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가지고 잠을 잤는데, 그다음날 돼가지고 스님들끼리 앉아서 아침 공양을 하고 있는데, 그 얘기를 꺼냈던 그 스님이 또 똑같은 걸 가지고, 어젯밤 그리한 거, 어젯밤은 벌써 끝났는데 그 스님은 아직도 그걸 가슴속에 품고 있는 거라. 저 스님 때문에 내가 밤에 잠을 잘 못잤다 하는 생각 때문에, 그 계율에 대한 것 가지고 인제 또 토론이 붙은 거라.

 

내가 그 상황을 보고 있으면서 ‘참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계율에 어긋났으면 참회해버리면 됩니다. 참회할 수 있는 사항의 계율이기 때문에. 그런데 계율에 어긋났는가 안 어긋났는가만 가지고 시비가 붙어버릴 것 같으면 이것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계속적으로 마음에 탐·진·치가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뭔가 잘못돼버린 거라. 중심적인 것에서 자꾸 벗어나게 되는 것들이라.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과연 이것이 지금 내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인가? 또는 이것이 과연 내가 해탈에 이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가? 해탈에 이르는 길인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그게 두 개가 충돌할 경우에는 설혹 그게 불교에서 어긋나는 것들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회할 부분같으면 참회를 해야 되는 것이고, 참회가 되지 않는 것이면 그게 우선이 돼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해탈에 이르는 길들을 따르는 것이 중심적인 축이 되어야 됩니다.

그 생각을 버려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계속 탐·진·치가 일어나서 거기에 속박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갈애가 끓고 있으면서 죄의 부분에 대한 것들만 자꾸 시시비비를 가리게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기면 뭐할 건데? 자기는 이미 많은 죄를 또 범하게 됐는데!

그게 인제 착각을 일으키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도 떠들어 쌌기에 “시끄럽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뭐 그렇게 떠들어 쌌노” 하고 그냥 한소리하고 말았기는 말았는데, 여러분들도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은 반드시 정립을 해야 됩니다.

 

과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이게 해탈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갈애를 일으키고 속박되는 것들은 아닌가 하는 부분들을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자신이 만든 그물에 스스로 걸리지마라」 하는 첫째 대목입니다.

「불교사상과 죄의 개념」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집착·속박이라는 것이 진리를 설하는 것이고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중심사상인 것이지, 죄의 개념은 중심사상이 아니다, 속박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단지 죄를 범하고 나서는 반드시 참회해야 되는 것이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그러면은 불교에서 말하는 속박이라는 것, 집착이라는 것들이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의 두목은 뭘까? 「집착의 두목」은 뭘까?

뒷머리에 보면 그 부분이 나옵니다. 경전에 나오는 얘기인데, 거미 있죠? 거미는 집을 거미줄을 쳐가지고 먹이를 잡습니다. 이게 육각형으로 해가지고 선을 연결한다고 그러네. 거미줄 쳐놓은 걸 보면 육각형이라. 육각형이 아마 가장 안전하고 단단해서 그렇게 짓는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육각형으로 꽁무니에서 실을 빼가지고 집을 짓는데, 어쨌든 그렇게 거미가 집을 짓는 것은 무엇 때문에 짓습니까? 자기가 그 속에서 편히 살기 위한 건 아니죠? 먹이를 잡기 위한 것들입니다. 끈끈이가 있기 때문에 먹이가 거기 닿으면 먹이가 탁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걸 거미가 잡아먹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거는 참 좋은데 거미 이 놈도 거기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라. 그래서 거미도 새가 날아가다가 거미줄에 거미가 있을 거 같으면 콕 쪼아가지고 거미를 먹어버린다는 거라. 대부분 거미가 거미줄에 먹이가 걸린 것을 아는 것은 그 거미줄의 진동 때문에 안다고 그럽니다. 진동이 울리면 아, 뭔가 잡혔구나 하고 이게 단단히 붙었구나 싶으면 가가지고 잡아먹는데,

 

마찬가지로 새가 오면은 틀림없이 그 거미줄엔 진동이 있습니다.

그러면은 사람일 거 같으면 어, 이건 내가 잡아먹힐 건지 아니면 내가 잡아먹을 건지를 안단 말이라. 잡아먹힐 거 같으면 빨리 도망을 가야 돼. 그런데 이 거미는 어리석어 가지고 그곳을 떠나지를 못하는 거라. 거미줄에서.

가끔 거미가 거미줄에서 빠져가지고 쭉 떨어지는 거 혹시 본 적 있어요? 그렇게 된 거 봤죠? (예) 그래가지고 다시 또 쪼르르 타고 올라가는 것들을 봤을 겁니다. 그거는 거미줄에서 지가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거미줄을 이렇게 치다 보니까 자기가 발을 헛디뎌가지고 떨어진 거라. 뭔가 두려움이 있어가지고, 위험이 있어가지고 지가 거길 빠져나온 게 아니라. 그래서 거미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의적으로 그 거미줄에서 빠져나올 줄 모른다는 겁니다. 지가 죽는 줄을 모르는 거라.

 

부처님이 그걸 보고 사람들이 속박되는 것들을 경전에서 비유를 해놓은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속박되는 것들 많죠? 어떤 속박되는 것들이 있을까?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인데 그것에 딱 묶여 있습니다.

내 생각, 내 견해, 그건 지가 거미줄을 친 겁니다. 거기에 딱 매여가지고 빠져나올 줄을 몰라. 또는 내 새끼, 내 재산, 거기에 묶여가지고 속박돼놓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줄을 몰라. 벗어나버리면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건데 이걸 못하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계율, 거기에 딱 속박돼버리면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라. 또는조금 전에 의식 했습니다. 의식 여기에 딱 매여놔놓으면 또 여기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는 거라. 충돌이 있을 거 같으면 다툼만 만날 있게 되는 거라.

 

속박을 상요자나(saṃyoja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상요자나의 종류들도 많은데, 그 속박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우두머리가 누굴까?

자기 자신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몸」입니다.

마음에는 그렇게, 여러분들이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속박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 몸을 잘 알거든. 자기가 늙은 줄 알고, 자기가 안 예쁜 줄 알고, 자기도 병들은 줄 아는 거라. 그래서 딱 거기에 속박돼 놔놓으면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갖가지 일들을 합니다. 거기서 갈애들이 일어납니다.

 

갈애(taṇhā)의 세 가지 종류가 어떤 게 있습니까?

까마딴하(kāma-taṇhā) 라고 맨 먼저 있었죠? 감각적인 욕망에 대해서 딱 속박되는 것, 일어나는 것.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거 여기에 전부 다 그냥 거미줄에 딱 걸려있는 거라. 한번 봐봐요, 안 그런 게 있는가? 좋고 싫음에 그냥 거기 거미줄에 딱 자기가 걸려있습니다. 지가 죽는 줄도 모르고.

 

그다음에 또 딴하의 두 번째 종류가 뭡니까?

바와딴하(bhava taṇhā) 라고 그러죠? 좋은 것이면 가질려고 하고, 지금 살아있으면 안 죽을려고 하고, 그런데 안 죽는다는 건 참 말이 이상해. 맛있는 걸 먹어보고 이게 맛있다 싶으면 더 먹고 싶다는 똑같은 걸 보면 더 먹고 싶다는 거는 이해가 되는데 자기가 죽어보지도 안 했는데 왜 안 죽을라고 하는 마음이 생기는지 몰라. 여러분들은 안 죽어봤잖아.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해? 안 해본 건데? 의심이 안 일어나? 한번 죽어볼라고 하는 생각해? (젊어서 아직 좀 그렇겠죠. 나이가 들어서 그러면) 그게 왜 그러냐면 바와딴하 라는 거라. 죽는 거 보다는 더 살고 싶은 마음들이라. 좋은 것들은 더 가질려고 하는 마음들이라. 그걸 바와딴하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뭐가 있습니까?

위바와딴하(vibhava-taṇhā) 라고 그러죠? 싫은 것들은 어떻게 해요? 안 가질려고 그러고, 멀리 벗어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안 늙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늙어가게 되고, 그러니까 안 늙기 위해서 뜯어고치려고 하는 거라. 그게 위바와딴하 입니다.

죽어야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안 죽고 싶은데 죽어야 되니까 죽을 운명이니까 어떻게 해요? 영원한 천국을, 극락을 찾는 거라. 그게 위바와딴하입니다.

 

위바와딴하라는 걸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자기 목숨을 끊는 것들, 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들을 얘기한다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거는 아닙니다 이! 잘못 착각하면 안 됩니다.

싫어하는 것들을 내 것이 안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찾는 것들이 쉽게 말하면 영원한 생명들, 그리고 그것들을 거역하려고 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위바와딴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까? 무엇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겁니까? 이 몸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 몸에 육근이 없을 거 같으면 감각적인 욕망도 일어날 수 없을 건데. 그리고 이 몸이 없을 거 같으면 사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도 없고, 또 벗어날려고 하고 영원한 생명을 찾는 그런 것들도 없을 건데, 이 몸이 문제인 거라 이 몸이. 그래서 항상 집착의 종목은 이 몸이라는 거라. 몸에 대한 집착만 버려버리더라도 집착하는 것들은 많이 없어져버립니다.

 

아까 불교의 중심축이 뭐라고 그랬어요? 집착하고 속박되는 거라! 그럼 무엇에 대한 집착들을 먼저 벗어야 돼요? 이 몸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 몸에 대한 것들! 이 몸에 대한 것들을 벗지 않으면 다른 거 아무리 잔잔한 것, 뭐 음식 먹는 것, 음식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다? 그거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는 거라.

물론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또 속박되고 갈애가 일어나는 것들은 또 없어지기도 하지. 그렇지만 그 굴레밖에는 안돼.

 

그래서 경전에는 이 몸은 어떻다고 관찰하라고 그래요? 더러운 것이라고! 부정한 것이라고! 그래야 여기 이걸 집착 안 할 거 아니라. 여러분 몸은 더러운 거 맞습니까? 더러운 것으로도 되고 또는 좋은 것에 이용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으로 이용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몸이 없으면 수행도 못하고...) 그렇지. 몸으로 인해가지고 행하는 선한 일들을 할 경우에는 좋은 일들을 하는 겁니다. 또 뭐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티벳 같이 죽고 나서 새 먹이로 해줄 것 같으면 그것도 좋은 일 하는 겁니다.

몸으로 인해서 좋은 것들도 하게 되지만 나쁜 것들도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좋은 것들을 할려고 해야 되는데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몸에 대한 집착하지 말아라! 그래서 이 몸은 항상 참 덧없는 것이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고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 몸은 항상 더러운 것이다! 하는 생각들을 가져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좀 있다 밥 먹을 땐데 좀 미안하긴 한데, 화장실 가서 똥을 안 싸고 여기에서 똥을 쌌다고 치자. 그러면 이게 방안에 이 똥이 있을 거 같으면 되게 불편하겠지. 그런데 똑같은 똥인데 이 똥이 저기 화산쪽으로 갈 것 같으면 되게 유용하게 쓰여지는 것들이라.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게 좋은 것으로도 쓰여지고 나쁜 것으로도 쓰여진다는 거라. 이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선한 일들도 하고 악한 일들도 하게 된다는 거라.

 

그 밑에 보면 「케마왕비의 일화」라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빔비사라왕의 부인, 왕비죠? 왕비인데 아마 이 일화는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모양이라. 대부분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런 자부심들이 좀 있는 모양이라. 나는 잘생겨보질 못해가지고 그런 자부심은 없는데 잘생긴 사람들은 그런 자부심이 있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가진 것들이 많은 사람들도 그런 자부심이 있고, 명예가 높은 사람들도 그런 자부심들이 있습니다. 항상 행복한 것들이 있는 것도 그런 자부심들이 있는 겁니다.

세속의 여덟 가지는 뭐와 같다고 알아라고 했어요? 파도와 같다고 알아라!

그런데 그렇게 알지를 못하니까 항상 자부심을 가지는 거라.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해서.

케마왕비가 부처님을 뵙지 않을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면 부처님은 만날 이 몸을 어떻게 보라고? (더러운 것으로. 부정한 것으로..) 더러운 것이다. 덧없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자기는 지 몸이 좋아 죽겠는데 이게 안 맞는 거야. 그래서 그 일화를 여기에다가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보면 이 몸은 진짜 덧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번 보십시요. 40, 50, 60 되고 나서 지금은 옛날하고 많이 다를 겁니다. 옛날엔 나도 예뻤는데,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예쁜 게 항상 지금까지 있을 수가 있나? 지금보다도 더 나이가 들면 더 추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

그렇게 변하는 것들인데 변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 같으면 자꾸 문제가 생기는 거라. 항상 아름다운 것이 항상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것에서 생기는 자부심들로 인해서 항상 충돌이 있게 되고,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 최고가 될 수가 없는 것들인데 그런 것들을 가지고 위세를 할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세속의 여덟 가지들은 위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이 케마왕비에게 그럽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도 변해가는 것이다.그거 탁 받아들여버리면 아주 간단한 부분인데, 못 받아들이고 자기 몸에 대해서 딱 집착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는 아무리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그걸 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라.

그 밑에 보면 케마여! 신체는 부정한 것을 모아 구성된 것이다. 신체로부터는 항상 부정한 것들만 흘러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부정한 육체에 집착한다! 하고 나와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죠?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을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여러분들은 몸에 대한 집착은 버리도록 해야 됩니다.

 

자! 그런 집착, 속박은 왜 생겨나는 걸까?

 

몸에 대한 집착이 왜 생겨나요? 감각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감각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그럽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 전부 감각입니다. 감각없이 여러분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감각이 없는 것은 곧 죽은 자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감각으로 느껴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각이 항상 문제인 거라. 감각만으로 살아가면 좋은데 이 감각으로 인해가지고 다른 것들로서 바뀌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 그것에 속박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수행해요?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온다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면 배가 꺼진다고 알아차립니다. 마음을 이 대상에다가 집중해가지고 알아차립니다. 그때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알아차려요? 배가 불러올 때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배가 꺼질 때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게 수행의 답입니다.

느낌만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성자라. 더 이상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 원인을 줄기차게 아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걸 못하면 느낌으로 인해가지고 다른 것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집착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느낌이 출발점이 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느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의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느낌이라는 거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할 때 사대요소, 4가지 요소를 각각 분해해놨습니다. 뜨거우면 뜨겁다, 시원하면 시원하다, 팽창하면 팽창한다, 움직이면 움직인다, 이것들은 다 뭐로 아는 겁니까? 느낌으로 아는 것들입니다. 그 느낌으로만 알아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들을 얘기하는데, 다른 종교들도 그와 같이 자기들도 안다고 그럽니다. ‘우리도 속박에 대해서 얘기한다, 속박되지 마라 라고 한다.’ 그런데 그걸 명확하게 얘기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는.

한번 보십시요. 불교를 제외한 다른 어떤 종교, 또는 한국에서 하고 있는 불교의 형태들, 그걸 명확하게 분해해가지고 얘기해주는 데들이 있는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뒤에 얘기합니다. 것이 속박은 전부 몇 개인가? 속박은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속박의 단점과 장점은 무엇인가? 속박을 벗어나서 완성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되는데 다른 종교들은 그거 못하는 거라. 그냥 속박에서 벗어나라고만 합니다.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이 몸에서 속박이 일어나니까 속박으로부터 이 몸을 분리시키라고 그럽니다. 사람들 많이 있으면 많이 얘기해야 되니까, 얘기하다 보니까 집착하고 속박하는 것들이 일어난다, 그럼 말하지 마라 그러는 거라. 이걸 벗어나는 길을 얘기해주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요거를 딱 단절시켜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무문관 가서 공부해라 그러는 거고.

또는 이 몸으로 인해서 속박이 일어나고 하니까 어떻게 해요? 이 몸에 걸치는 거 하나도 없이 발가벗고 수행하라고 그러는 거라. 이런 방법들을 얘기하는 거라. 전혀 그거하고는 관계가 없는데.

 

이 몸이 속박의 가장 큰 주체인데도 그 속박된 것들을 아는 것들은 마음이라는 거라.

느낌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증장시켜서 마음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길들을 제시를 해주어야 되는 것이 정답인데도 이것은 아예 터부시해버리고 속박이 일어나는 이 몸에 대한 것들만 자꾸 얘기한다는 거라. 하루종일 좌선하고 앉아라고 그러든지, 마음하고는 관계없는 무슨 개념을 가지고 그것만 내 하라고 한다든지 이러고 있는 거라.

그것은 해탈에 이르는 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거라. 일시적으로 그것을 눌러줄 수 있고 일시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는 있지만 돌아오면 어떡할 건데? 또 똑같이 되는데.

 

그래서 「악의 주축」이라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육근에서 일어나는 감각이 속박을 일으키는 범인입니다. 그 속박으로 인해서 악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감각으로 인해서, 그 느끼는 것으로 인해서 악한 것들을 저지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각·느낌들을 항상 주시를 해야 됩니다.

12연기의 고리를 끊는 것은, 느낌에서 느낌만 관찰하고 있을 거 같으면 고리는 끊어져버립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가 끊어지면 순차적으로 쭉 끊어져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똑같은 속박이 돼버립니다. 몸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의식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행할려고 한다든지 그걸 마음에 딱 품는 순간에 그것이 속박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하는 겁니다.

 

그게 「자승자박을 넘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승자박을 넘는 길은 거미가 그 거미줄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속박돼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러면 속박의 원인을 분명히 여러분들이 압니다. 이 몸이 속박의 주체이고, 이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그 느낌들은 마음으로 관찰하는 겁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그 느낌들만 줄기차게 관찰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속박되어 있는 거미줄로부터 벗어나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정답인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마지막에 보면 「밖의 세계에 대해서 속박이 생긴다고 해가지고 밖의 것들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밖의 것들이 속박을 끊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 • 죄의 개념은 불교 사상의 중심축은 아니다.

무엇이 중심축입니까?

• 속박·집착(갈애)이 불교의 중심축이다.

어, 내가 계율을 어겼네. 내가 죄를 지었네. 계율을 어기고 죄를 지었으면 그거는 참회해야 됩니다. 참회할려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딱 묶여있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보다는 내가 어떤 것을 하든지 그것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속박되지 않는 것들을 취하는 것들이 바른 방법이라는 거라.

• 집착의 두목은 자신의 육체이다.

• 집착은 감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느낌들이다.

• 괴로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반드시 여러분들은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이게 중심축입니다. 그래서 그마만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공부할려는 마음이나 아니면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마음들을 일으켜야 되는데 참 안 일어나죠?

폭탄이 있으면 폭탄이 터지기 전에는 그게 위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폭탄은 터져버리면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 폭탄을 터지게 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는 게 뇌관입니다. 뇌관을 치면은 그것이 기폭제가 돼가지고 폭탄이 터지게 됩니다.

 

마음을 해탈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기폭제는 뭘까?

히리 옷땁빠(hirī-ottappa)!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

내가 악행 저지르면 내가 나쁜 결과 받는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려고 합니다. ‘내가 이리 살다가 죽으면 우짜노? 아무런 그것도 없이’ 그것이 두려워서 공부할려고 합니다.

히리-옷땁빠는 선한 마음의 작용이죠?

자기가 죄 저질러 놔놓고 아, 내가 저지른 것에 따라서 받을 결과가 두렵다든지 이것은 히리-옷땁빠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해탈에 이르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히리-옷땁빠의 영역인 것이지, 악한 것을 저질러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것은 히리-옷땁빠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 알면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정신의 기폭제는 어떤 경우든지 선한 마음을 폭발시킬 수 있도록 하는 히리와 옷땁빠 다. 그게 마음을 빨리 해탈에 이르도록 팍 증폭시켜주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아, 내가 요로코롬 살다가 죽으면 우짜노?’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고 나면 저 용광로 가서 뼈마디 다 녹아버리고 아무것도 남는 거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내가 다음 세상에 가져가지도 못하는 것들인데,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선한 일을 한 것처럼 공덕들인데 그 공덕 하나도 지으지 못하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하노?’ 하는 그런 생각들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마음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공부를 할려고 하고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켜서 내가 선한 행위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래서 그 두 개가 더 있어야만이 이 세상이 유지되는 중심축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없을 거 같으면 사람들은 막 나쁜 짓하고 그냥 막 살지 그나마 그게 있으니까 안 하는 거라. 그래서 이 세상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증장시켜주는 기폭제의 역할도 하는 것이 히리-옷땁빠입니다.

 

그래서 잊지 말고 마음을 빨리 해탈에 이르도록,

마음을 빨리 선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