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현명한 자의 길 (20150515.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22. 09:10

https://youtu.be/ayC6rDOBcs4

* 현명한 자의 길 (20150515. 대구)

 

자! 오늘 어쨌든 카네이션도 이렇게 다발로 받고, 이제는 스님도 스님 일하면 되죠?

교재, 오늘은 페이지가 좀 많죠? 제목이 뭐죠? 「현명한 자의 길」

오늘 좀 숨이 조금 가빠. 며칠 전에 이 가사가 색깔이 많이 빠져가지고 염색을 했거든. 염색하다보니까 염색약이 코로 좀 들어왔드만,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그래서 이해를 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전에 언젠가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 라는 프린트물을 아마 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거는 망갈라숫따(Maṅgala sutta)의 첫 부분에 나오는 부분을 가지고, '아세와나 짜발라낭(asevanā ca bālānaṁ)' 하는 부분 있죠? 그 부분 가지고 그때 글을 쓴 거고, 그거는 아무래도 '어리석은 자'에 초점을 맞춘 거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은 오롯이 '현명한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자따까(Jātaka)에 보면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개하고 인간하고 논쟁이 붙었어요. 그래서 인간이 개한테 그럽니다. 야, 우리가 너보다는 훨씬 뛰어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개가 물어보니까 인간이 그럽니다. 생각을 해봐라, 우리는 빌딩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뭐도 만들고이렇게 해가지고 편리하게 쓰고 있는데 너는 그런 거 아무것도 못하지 않느냐? 하니까, 그래 그건 맞다. 그렇지만 왜 그걸 만드느냐는 거라.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때 개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쌔가 빠지게 노력해야만이 먹고 사는데, 우리는 꼬리만 살랑살랑살랑 흔들면 먹고 산다. 먹고 사는 건 똑같은데 뭐가 너희가 잘났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라. 아무리 뭔가를 만들어내고 재산을 많이 모으고 명예가 높아지고 어쩌고 저쩌고 해싸도 개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똑같다는 거라. 먹고 사는 것은.

 

그래서 현자한테, 현명한 분한테 가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 얘기가 맞다. 인간이면 개하고 다른 게 있어야 되는데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냥 그거 하는 거라고 할 것 같으면 방법의 차이가 나는 것뿐이지 개하고 차이가 나는 거 없다는 거라. 꼬리 살랑살랑살랑 흔들어가지고 밥을 먹는 것이든 아니면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먹는 것이든 그게 뭔 차이가 나느냐? 그 대신에 인간이 그래도 뛰어나고 우수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 말고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뛰어나다고 그런다. 그 뛰어난 것들을 하지 못하면 별반 차이나는 거 없다.

 

어떤 게 뛰어난 것들이겠어요? 어쨌든 먹고 싶을 때 먹는 거 참는 것도 개보다는 뛰어날 수가 있는 거고, 또는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다 싶으면 가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뛰어난 것이고, 성이 나더라도 왈왈 짖을 게 아니고 화를 다스릴 수 있는 것도 개보다 뛰어날 수 있는 건데, 그런 것들 할 줄 모르면 별반 차이 안 난다는 거라. 자따까(Jātaka)에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이 가사를 이렇게 입기 때문에 어떨 때는 가끔씩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가사가 어떨 때는 쭉 내려가거든. 이게 그냥 천조각이니까 어디 매여져 있질 않습니다. 가사는 한국에서는 고리가 있어서 매게 되어있는데 이 가사는 못 매게 돼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내려가면 이걸 치켜올리고 이렇게 해야 돼.

밖에 나가면 돌돌돌 말아가지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지 않게끔, 통견이라고 해서 이렇게 되는데, 그래도 왼쪽 어깨에 돌돌 말린 게 있는데 이게 나도 모르게 내려가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러면은 얼른 다시 해가지고 매야 돼.

 

그러다 보니까 어떨 땐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땐 옷이 한쪽으로 내려가면 다시 매기위해서 다시 돌돌돌돌 말아가지고 착 뒤로 넘깁니다. 그럼 이쪽 왼쪽 어깨에 매여지는 게 뒤로 싹 넘어가면서 뒤에 사람이 있으면 뒤에 사람한테 잠간 스치게 돼요. 돌돌돌 말 때는 사람이 없었는데 언제 왔는지 뒤에 누가 탁 붙어있다가 거기에 탁 맞았어. 그래서 그 사람이 거 왜 옷을 가지고 사람을 때리느냐고 성질을 바락 내. 그래서 아이고 미안합니다.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데 있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계속 투덜투덜투덜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러면 나는 사람이 없다고 분명히 보고 확인을 다 하고 이렇게 했는데, 하는 동안에 사람이 와가지고 그뒤에 거기에 맞았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나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과를 했는데 그 정도 했으면 충분히 내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런데,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어쨌든 맞은 것에 대해서 성이 나니까 그 성이 난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표출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그게 계속적으로 이어지면 내 입장에서도 그렇게 사과했으면 그만하지 왜 계속 저렇게 성을 낼까 하고 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고, 어떤 경우에는 그것 가지고 괜히 시비가 붙기도 하는 거고, 그렇게 됩니다.

 

조금 전의 그것은 인간이지만 개와 차이나는 것은 별로 없죠? 맞았으면 성질나서 표출을 하고 남이 사과하든 말든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은 그냥 해버리고. 여러분은 혹시 개하고 별 차이가 나는가? 차이 나는 것이 있나? 적어도 그런 길은 걷지 말자 하는 그런 뜻입니다.

 

교재 한번 봅시다.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마음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마음을 잘 쓰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잘못하면은 별반 개와 다를 바 없이 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인식을 할 때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가지고 불교에서는 감정을 세 가지로 나눠놨다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뭡니까? 대상에 매료되는 반응.

수행할 때 '감각적인 욕망', 다섯 가지 장애 중에 맨 처음이 감각적인 욕망들입니다.

그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겁니까? 좋은 거 좋아하니까 일어나는 거지.

그걸 빨리어 용어로 '수바 니밋따(subha-nimitta)'라고 그럽니다. 좋아하는 것에 착 붙잡혀있는 것.

니밋따(nimitta)라는 것은 뭡니까? 딱 일어나서 고정돼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좋은 거-수바(subha), 좋은 것에 대해서 딱 붙잡혀있는 거라. 그러니까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게 될 때까지는 거기에 붙잡혀있게 되는 거라. 맛있으면 ‘맛있다’ 하는 생각에 딱 매여있으면 고놈을 계속 먹어야 되는 거라. 그냥. 이게 맛이 없어질 때까지. 먹을 때도 그렇게 하죠? 소리 들을 때도 그렇게 하고, 보는 것도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한다는 거라.

대상에 얽매여버리면 수행 못합니다. 대상이 변해야 되는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어디 있다고, 대상을 안 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딱 매여있어버릴 것 같으면 그거 무슨 수행을 하겠어? 그거 수행 못하는 거라.

그래서 수행하는데 맨 처음에 일어나는 장애 중에 첫 번째라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마음이 대상에 매료되는 반응입니다. 애정, 과잉반응, 꿈, 욕망 등 이런 것들은 전부 그런 수바 니밋따라고 하는 것에 다 해당이 되는 그런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에 대상에 매료되는 건 또 뭐가 있을까? '의심' 부분입니다.

의심은 왜 좋아하는 대상에 딱 붙잡혀있다고 그럴까? 수행은 어떤 겁니까? 선한 마음으로 인해서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걸 알아차려야 되는 것인데, 우선 선한 것이 아니라. 의심은 선한 겁니까, 나쁜 겁니까?

그래서 '아요니소마나시까라(ayonisomanasikā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쁜 마음들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매이지만 않을 거 같으면 금방 의심이 사라져버릴 건데 사라지지 않고 그냥 그 의심을 계속적으로 하게 되는 거라.

뭔가 경험으로 인해서 확인되고 분명한 것이 될 것 같으면 의심은 사라져버립니다. 그거는 사실로써 확인돼버리게 되는데, 의심이라는 것은 확인도 안 하면서 거기에 딱 매여있는 상태라.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 생각이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면 생각은 안 일어납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탁 끊어져버립니다. 지가 그걸 좋아하니까 계속적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섯 가지 장애 중에 쉽게 말하면 적어도 두 가지는 좋아하는 대상에 탁 매여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런 것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대상을 거부하는 것.

성내는 것은 거부하는 거죠? 그걸 '빠띠가 니밋따(paṭigha-nimitta)'라고 그럽니다. 밀쳐내는데 딱 매여있는 상태입니다. ‘맛없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절대 젓가락질이 안 가는 거라. 그걸 맛봐야만이 맛없다 하고 알게 될 건데, 아예 맛없다는 생각에 딱 매여있으면, 거부하는 게 있으면 젓가락 자체가 안 가버리는 거라.

‘싫다’ 해놔 놓으면 그 사람은 그 거부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런 법은 없죠?

 

마음이 찰나 간에 얼마나 빨리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계속적으로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 무거워? 굉장히 무거워. 그거 그냥 내려놔버리면 되고 그냥 떨쳐버리면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런데 그 경우는 보면 '성냄' '질투' '미움' '공포감' 그 뒤에 하나 더 첨가해야 되는 게 '후회' 하는 것.

 

장애 네 번째 중에 '후회'라고 하는 것이 있죠? 후회가 왜 일어납니까? 고요하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정신적으로 고요하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대상에 대해서 그걸 생각하니까 그게 좋고 싫고 하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싫은 것일 거 같으면 아,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계속 들떠있는 거라. 정신이 고요하게 안정돼있을 거 같으면 후회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또 후회하면 뭐할 거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그걸 빨리어로 '쩨따소 아우빠사모(cetaso avūpasamo)'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우빠사모(vūpasamo)' 고요하게 안정돼야 돼는데 안정돼있지 못하고 '아우빠사모(avūpasamo)' 항상 들떠가지고. 마음이 대상에 착 가 있어야만이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대상은 여기 있는데 그 위에 기름 같은 것이 둥둥둥둥 떠있으니까 이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는 거라. 거부하는 행위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성냄의 영역 4가지 중에 후회가 들어가 있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밀쳐내는 것.

 

그다음에 또 대상에 일단 마음이 반응하는 것 세 번째, 명확한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

보통 그걸 다섯 가지 장애 중에 세 번째 '티나밋다(thīna-middha)'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혼침 같은 것,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빨리어 용어로 '쩨따소 리낫땅(cetaso līnatt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폭 풀죽어 가지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거라. 뭐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뭐 수행해도 그냥 멍하게, 그게 고요하고 편하고 좋은 줄 알고, 마음이 사실은 위축돼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다섯 가지인데, 여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놨습니다.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런 반응을 일으키면 안 되죠? 이런 반응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개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과격하게 얘기했나?

그래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수행하다가도 그런 다섯 가지 장애를 만났으면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지 그거 그대로 있을 거 같으면 개와 다를 거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이 향상되는 쪽으로 일어나고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그게 인간의 특권인 것이지, 인간이면서 인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안된다 하는 얘기입니다.

 

마음에 이렇게 나쁜 부분들만이 아니라 좋은 부분들도 일어나죠?

그걸 그 밑에다 적어놨습니다. 멧따, 그다음에 빤냐, 삿다.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행하는 기쁨들(metta/자애),

사물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마음들(paññā/지혜),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밝게 살려고 하는 마음들(saddha/확신)

이걸 좀 쉽게 빨리어 용어를 쉽게 풀어서 얘기한 겁니다.

 

그런 것들은 항상 있는 게 좋습니다. 자기 갈 길에 대해서 확신이 들 거 같으면 그것을 계속 갈려고 하지 왜 안 갈려고 하겠어? 그리고 어떤 경우에 대상을 보더라도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해야 될 일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것들은 그마만큼 바른 지혜가 또 어디 있어? 그리고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신구의를 행하는 것은 그건 더 말할 나위 없다는 거라.

적어도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그래도 개에서는 벗어난 인간의 길을 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조금 전에 마음에 안 좋은 반응들 그다음에 좋은 반응들, 이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마음의 현상들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주목적인 것이지 여타 다른 것들은 불교에서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는 거라. 단지 그것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을 해야 되는 것이지 도구가 주가 돼버릴 것 같으면 안된다는 얘깁니다. 그 부분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첫머리에 뭐라고 적어놨습니까? 「감정에 지배되지 말고 감정을 지배하라」

 

자기 거,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감정들, 그것에 자기가 농락당하는 것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딨어? 그거 하나 콘트롤 못하면 그게 사람이라? 먹고 싶다고 막 먹어버리고, 성난다고 팍 성질부리고, 그거 어디 사람이 할 짓이라? 좀 뜨끔하지?

선한 감정들은 자주 일으키는 것이 좋고, 선하지 않는 감정들은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은데, 사람이 될려고 하면 참 그게 어려운 겁니다.

 

그 뒷페이지에 보면 "어두운 감정을 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하면서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감정이 일어나면 지금 어떤 감정이 일어났는가를 반드시 확인하라."

‘성이 났네’ 하고 알아야 뭔가 대처를 할 거 아니라. 그리고 그게 나쁜 감정이면 그 감정으로 인해서 뭔가 행하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돼. 잠자코 그냥 있어.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이 일어났네’ 하고 안 다스려지더라도, 성이 계속난다고 하더라도, 성이 난 상태에서 말하고 행하지는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 "그 감정이 안정될 때까지 행동을 가까이 두어라." 팔 하나 뻗는 것도 뻗지 말고, 말하는 것도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고, 감정이 감정인 것을 알고, 알고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그건 언젠가는 잠잠해집니다. 설혹 그걸 바라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행하는 것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먼저 감정을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 행동들을 가까이 두어라.

 

그러고 나서 세 번째 안정돼진다 싶으면 "객관적으로 이해할려고 해야 한다." 화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을 봐야되는 것들이라. 그러고 나서 마음에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고 어떤 느낌들이 사라졌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라는 거라. 변화되는 것들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다음부터는 ‘별게 아니네’ 하고 알게 되는 것이지 그게 자꾸 ‘별 것’이 될 거 같으면 그다음에도 자꾸 똑같은 조건들 똑같은 원인들이 있으면 또 같은 화가 일어난다는 거라.

 

나쁜 감정들, 나쁜 마음들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이 단계들을 따라 밟아가야됩니다.

좋고 싫은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여러분들이 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현자의 길이라는 것은.

 

그런데 그 밑에 부분이 있습니다.

........................................

사람이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4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익(labha/만사가 잘 되는 것, 성공하는 것,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

명예(yasa/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높은 입장에 있는 것)

칭찬(pasamsa/성공해서 상을 받거나, 칭찬받거나, 유명인이 되는 것)

행복(sukha/풍요롭고, 건강하고, 가정이 원만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

 

사람이 불행을 느끼고 낙담하는 원인도 4가지가 있습니다.

불이익(dlabha/실패 하는 것, 손해 보는 것, 경기가 악화되는 것)

불명예(ayasa/인정받지 못하는 것, 비판 받는 것)

비난(ninda/실패하거나 잘못을 범하여 비난받고 부정되어 사회로부터 내쫓아지는 것, 권력 분쟁 등으로 사실 무근의 비난을 받는 일도 있다.)

불행(dukkha/가정이나 직장에서 문제가 있거나 병약해서 괴로움을 느끼는 것)

............................................

 

이익, 명예, 칭찬, 행복, 불이익, 불명예, 비난, 불행,

좋은 것을 좋다고만 하고 싫은 것을 싫다고만 하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여덟 가지는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차트에 보면 「자신의 무지-어리석음을 '업'이나 '선천적', '운명'이라고 믿어버리지는 않는가?」

 

여러분 몸이 이렇게 태어난 건 자신의 업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 거죠? 뭐가 안 된다 할 거 같으면 "내 운명이 그래서 그렇다" 그거 그냥 순응해버리는 거라. 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틀렸다는 것은 아닌데, 불교의 주된 중심적인 테마는 아닙니다.

불교의 중심은 어떤 경우에든 뭡니까? 진리를 발견하는 겁니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속박과 집착에 대한 것들을 버려버리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중심 테마인 것이지 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 테마가 아닙니다.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업을 쌓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 업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고, 속박으로 인해서 죄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지, 죄나 업이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 테마가 아닌데도 이걸 자꾸 중심 테마에 올리는 거라. 그거는 굉장히 위험한 거라.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중요한 것은 죄지었으면 ‘죄지었다’ 하고 알고 다시는 죄짓지 않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이 지은 것에 대해서는 ‘아, 이건 언젠가는 받는다’ 하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되는 것이지, 죄지은 놈이 죄 안 지었다고 감출려고 하고, 방귀뀐 놈이 뭐한다고 지가 오히려 더 당당할려고 하고, 그리고 업에 대해서 그걸 부정할려고 하고, 그게 중심테마가 아닌데 왜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될 것들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의 원인이 뭔가,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서 원인을 끊는 중심 테마를 잡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두어야 되는 것이지, 운명이나 업이나 죄라고 하는 거 그걸 중심 테마로 두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두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그 고리에 딱 얽혀버립니다.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그 고리에 얽히는 순간 처음에 얘기했지만 개가 돼버리는 거라. 사람이 할 일들을 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자! 시간이 자꾸 가니까 넘어갑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안다. 지식으로 부터 지혜로 넘어가라.」

 

자꾸 알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도 사실은 그렇게 자꾸 앎만 가르쳐줘서는 안 돼. 앎만 있어가지고는 사람들이 머리로 자꾸 짓는다는 거라. 그러면은 뭔가 있으면 자꾸 그것을 알려고만 하지 그걸 실천할려고 하질 않는다는 거라. 행할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죽은 거라. 아무 소용이 없어.

진리에 대해서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만이 이게 지식에서 지혜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아, 이게 진짜 좋다’ 하고 알아야만이 그걸 따를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 얼마만한 기쁨을 누려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스님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구절 하나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만큼 너무 좋아.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좋으면 자기가 하게 되는 거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라.

그래야 그게 지혜로 넘어가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진리를 기뻐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으로는 무조건 진리에 대해서, 진리를 듣는 것도 기뻐해야 되고, 진리 따라 행하는 것도 기뻐해야 되는 거고, 진리 따라 그속에 머물고 사는 것들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진리 따라 하는 것에서 기뻐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지, 나머지 세간법들에 대해서 자꾸 기뻐하고 하는 것들은,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 기뻐하고 그 길을 따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자꾸 여겨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밑에 것,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관찰할 뿐, 납득시킬 필요는 없다.」

 

여러분 참 잘하는 거죠? ‘참 무상하네’ 누가 한 분 죽으면 ‘참 무상하다’ ‘아, 무상하다’ 하고 자기 스스로를 납득시킬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무상한 걸 자기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말뿐입니다. 자기는 안 죽는다 생각하고 ‘무상하다’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건 억지로 납득시킬 대상은 아닙니다. 무상은!

 

그래서 뒷페이지에 보면 "모든 고정 개념으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신의 좋고 싫음의 감정으로부터 멀어져라. 사물을 관찰해서 사실을 보려고 노력하여 그것에 기쁨을 느끼도록 해서, 이윽고 지혜가 나타나서 바르게 보이게 되었을 때, 처음 결론으로서 모든 것은 무상하구나, 그것밖에 진리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무상한 걸 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납득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호흡을 관찰해보면 호흡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변해가는 것이 너무나 빠르고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왔다가 자기 스스로 가고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진다는 걸 분명하게 봐서 ‘아,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이렇게 무상한 것이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아는 것이지,

호흡은 무상한 것이니까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다 해가지고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 해가지고 그걸로 무상한 것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냥 여러분들 그걸 관찰해야 될 뿐이라는 거라.

세상에 다른 세속적인 무상한 것도 그것은 관찰의 대상인 것이지 무상하다고 그냥 인식해야 되고 그걸 주입해야 될 대상은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진리를 아는 사람의 입장」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 현명한 자들은 이런 입장들을 취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입장이 아닐 것 같으면 빨리 그 입장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첫 번째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는다."

뭐 그게 중요한 거라고 그걸 부정하고 있겠어. 그 대신에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할까? 하고 그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하는 것들은 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걸 부정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이런 입장에서 이랬구나’ 하고 자신이 분명하게 이해를 하는 것뿐이지, “너 틀렸어! 너 맞아!” 이런 것은 현명한 자의 입장은 아니라는 거라.

 

두 번째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도 주의 깊게 조심한다."

아무리 현명한 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말할 때와 그리고 말할 위치와 그런 장소와 그런 마음의 상황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서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하려고 하게 됩니다.

성나있는 사람한테 “성질부리지 마!” 그럼 그게 성질부리지 말라는 말은 맞는 거지만 그게 그리 되겠어? 안 되는 거지. 그래서 그런 상황들은 볼 거 같으면 무조건 자신이 맞는 진리에 대해서만 자꾸 얘기를 할려고 그럽니다. 여러분도 불교 믿으라고 전혀 마음에 없는 사람한테 가가지고 “우리 선원에 와, 스님 법문도 너무 좋아, 수행하면 너무 좋아” 귀에 들어가질 않는데 그걸 왜 하고 있느냐 하는 거라.

여러분들이 진리 따라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면 그 사람이 ‘어, 내가 가볼까’ 하고 마음이 들 때 그때 얘기해도 충분한대도 그러고 있는 거라.

뭔가 일을 도모할 때는 일을 도모하는 데만 빠져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은 더렵혀진다는 생각도 안 하는 거고. 그럴 필요성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게 맞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부정적인 인간으로부터 긍정적인 인간으로 바뀌어라.」

 

수행을 하다 보면 만날 지혜, 지혜, 지혜만 강조하다 보니까 지혜가 다인 줄 압니다.

그런데 현명한 자는 지혜만 있는 자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는 당연하게 있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은 수행을 하다 보면 지혜는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얻어진다 해가지고 현명한 자라고 얘기하질 않습니다.

뭐가 또 필요하게 될까? 인격적으로 갖추어지는 것!

현명한 자는 반드시 지혜로운 자임과 동시에 인격적으로 완성이 된 자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측면에서 격렬하게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지혜로운 말들을 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안들을 제시해주고 한다고 하더라도 격렬하게 화를 내고 싫어하는 것들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사람은 현명한 자의 영역에 속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그것이 정당한 방법이 돼야 되는 것이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부정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는 성격이 있는데, 그러지 않을 경우에.

오늘 탁발할 때 이런 이런 이런 것 탁발했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한다, 자기 자신이 먹을 것들을 요구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요구할 수도 없고, 그리고 여기 있는 것 중에서 내가 먹을 것들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똑같이 동일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도 그렇게 한번 해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는 것, 굉장히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불교에 있어서의 현자의 길은 지혜를 기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혜와 동시에 번뇌로부터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해탈을 체험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고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이해하겠죠?

 

그 밑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일 (불선행)은 그만두고, 긍정적인 일 (선행)을 실천하라.

여기까지는 이해할 거라고 봅니다.

 

그다음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의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하라.(oka anokam agamma).

의존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마십시오. 스님에게도 의존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의존해야 되는 것은 뭡니까? 수행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걸 「스스로를 의지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숨쉬고 있고 보고 있고 듣고 있으면, 보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의지하는 길입니다.

 

그 대상은 뭡니까? 법입니다. 법에서 얘기하는 이것 이것 이것이 수행의 대상이다. 관찰해야 될 사띠의 대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수행의 대상이 곧 법의 대상입니다. 나의 대상이 바로 법의 대상이고 법을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 법이 아닌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법을 의지하고 스스로를 의지하라. 그것이 여러분들이 의존해야 될 것이지 어떤 것도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일어난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다른 것들을 의지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반드시 그것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밑에 거,

더러움으로부터 자기의 자신을 맑게 하라.(pariyodapeyya attanam).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그 밑에,

집착을 버리고 (adana patinissagge) 이 세상에서 빛나는 현자가 되어라.

어두운 곳으로부터 빛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현명한 자의 길입니다.

 

어려운 부분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그게 여러분들이 가야 될 길입니다.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깍가(ekagga)' 라고 그럽니다.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을 거 같으면 그 길을 가라고 그러지 왜 구구절절이 스님들이 이런 것만 자꾸 얘길할려고 그러겠어? 그거 외에는 없는데 어떡할 거라. 스님들이 가야 될 길일 뿐아니라 여러분들도 똑같이 가야 될 길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번에는 포인트가,

• 감정대로 사는 것은 간단하지만, 감정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노력할려고 하는 마음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 항상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 욕구를 늘릴 뿐인 지식을 얻는 것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게 하라.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 다른 의견에 대해서 중도적인 입장을 지켜라.

자신의 것, 자신의 바른말도, 그것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 하게 돼있는데,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틀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도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으면 취사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입장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라.

• 예의범절이 좋은 행동을 하는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안정하는 일이 있다.

계를 잘 지키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안정될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행위들로 인해서 마음이 안정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는 것들은 도덕적인 행위로 인해서 마음이 안정되기도 하고, 또 마음이 안정되면 도덕적인 것들은 지켜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됩니다.

• 마음이 평안한 상태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모범적인 것이 된다.

그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 비록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부정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부정한 일을 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감정의 물결에 따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길이다.

뇌리에 딱 집어넣도록 하십시오,

•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마음은 언제든지 평온하고 고요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평안하게 해야만이 그것이 현자의 길이다.

• 욕구에 빠져있는 세상에서 현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그 길을 걷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

세간법 여덟 가지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보통 그것으로 세상을 사람들은 삽니다. 그것을 하지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반드시 여러분들이 마음에 담아두어야 되는 것은 '세간법 여덟 가지는 파도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파도는 왔다가, 치고, 가게 되는 겁니다. 그 파도의 물결에 휩싸이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알겠죠? 자!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