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위험은 꼭 껴안지 말라. (20150724.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18. 09:00

https://youtu.be/JyeXMnNodrM

* 위험은 꼭 껴안지 말라. (20150724. 대구)

 

오늘은 두 장 밖에 안 되죠? 간단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이 안 풀리네, 잘.

제목이 「위험은 꼭 껴안지 말라」 그렇게 돼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누구든지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병 없는 것이 최고의 이익이다 하고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로갸 빠라마 라바(Ārogya paramā lābhā)" 라고 얘기합니다.

 

"음식으로 고치지 못할 병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음식은 잘 먹어야 됩니다. 잘 먹어야 되는 것이지 맛있게 먹어서는 안됩니다. 잘 먹을려면 어떻게 먹어야 돼요? 적당한 양을 분명하게 자기 자신이 알아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적당한 양을 모르면 항상 배부르게 먹게 돼있습니다. 밥을 먹는 것은 배고픔을 제거하기 위한 겁니다.

 

여기 스님 위는 어떻게 생겼냐면 다른 사람들 위는 요렇게 밑으로 내려가는데 스님은 위가 요렇게 올라갔다가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고픈 느낌이 안 일어나. 그게 위가 그렇게 생긴 사람들이 공통적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배고픈 느낌이 안 일어난다 해가지고 밥을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안 먹고 나면 그다음에 수행을 한다든지 수행지도를 한다든지 하면 힘이 좀 없어.

그래서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해야 되는데 맛있게 먹지는 마십시오. 맛있게 먹어버리면 그 위험성으로 인해서 내가 그것을 탁 붙잡아버립니다. 그래서 맛있는 걸 찾아 먹으면 계속 맛있는 걸 찾는 위험에 빠진다는 거라. 먹는 양의 적당함을 모르면 항상 배부른 상태에서 끝나게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에도 배부르다는 느낌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먹을 때는. 아마도 여러분들 먹는 것의 반 정도는 줄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먹는 것을 잘 먹을 수 있도록 해야지 그걸 배부르게 먹고 아니면 양을 모르고 먹을 거 같으면 항상 그 위험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탐욕하는 것들! 그것에 빠져서 그것을 꽉 붙잡아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다음에는 실제로는 몸에서 배고프다는 신호가 안 오는데도 밥을 먹어야 되는 거라.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내가 지금 금방 밥을 먹고 나더라도 또 누가 맛있는 거 가지고 왔으면 그거 먹고 싶은 마음에 탐욕이 일어나는 거라. 그럼 또 그걸 먹게 되는 거고. 어떠한 경우에도 먹고 나면은 아무리 맛있는 게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걸 먹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그 위험에 딱 붙잡혀버리는 거라.

그걸 자기 자신이 꼭 붙잡는 형태는 띠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먹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먹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숟가락을 들면 숟가락을 든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씹으면 씹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삼키면 삼킨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한번 그러고 나서는 조금 쉬는 타임을 가져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씹음’ 하면서 그것을 쭉 알아차리고, 한참 동안 씹고 나서 다시 숟가락 드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래서 모든 동작들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하라는 거라.

밥을 씹고 있으면서 또 숟가락이 가서 다른 반찬을 집어 먹는 우는 범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다 씹어먹고 나서 다시 숟가락 든다 해서 다시 숟가락 들고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위험에는 빠지지 말고, 그걸 꼭 붙잡아버리면 그것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굉장히 많아져버립니다. 탐욕이 일어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다음에 여러 가지 갈구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진다는 거라. 그래서 감각적인 욕망에 빠지기 쉬워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위험성들이 있기 때문에 먹는 것들을 주의해서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두 번째 경제적인 거 뒷받침이 안 되면 위험이 반드시 따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돈 벌지 말고 다 출가하라고 했다고. 아니면 다 수행하러 가라 했다고. 그건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은 반드시 '소유의 낙(樂)'들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재가자들의 네 가지 낙(樂)'들을 지적을 해놨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었을 때 일어나는 기쁨들이 있다. 그걸 '소유의 낙'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정당한 방법이 아닐 경우에는 안 일어납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닐 것 같으면 남의 물건을 훔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고, 그리고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먹는 것이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지 않게끔 되는 거고, 그래서 그런 것들은 아예 안되는 것이고, 어쨌든 정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취했을 때 거기서 오는 기쁨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 기쁨들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낙들이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유지하는 낙', 그렇게 모은 재산들을 잘 사용하는 낙들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어디에 쓰고, 이것은 어디에 쓰고 하면서 내가 정당한 방법으로 잘 모은 재산들을 올바른 데에다 잘 쓸 것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오는 기쁨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가 있냐면 '의무의 낙'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빚이 없는 기쁨입니다. '의무의 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빚지는 삶을 살게 되면 괴롭게 됩니다. 그래서 없으면 쓰임새를 줄여야 되는 것이지 쓰임새는 그대로 하면서 빚을 져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빚이 없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것들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빚지는 삶을 살지 말아라 하는 거고.

 

그다음 네 번째가 '허물이 없는 기쁨'. 그렇게 모은 재산들을 내가 좋은 곳에 보시함으로 인해가지고 오는 기쁨들이라. 그런 보시하는 것들은 허물이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나의 기쁨을 찾기 위해서 나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쓴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허물이 되지만 그것은 탐진치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남들을 위해서 뭔가를 행하게 될 때 그건 허물이 없는 기쁨이라는 거라.

이런 것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네 가지 재산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이 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것까지만 하면 되는 거라. 그 이상이 되어버리면 재산은 이건 애물단지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애물단지로 인해서 그 위험을 내가 꽉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자꾸 돌아보도록 해야 돼.

 

그다음에 세 번째 가정에서의 각각의 관계,

부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시부모와의 관계, 이런 관계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관계들이 원만해야만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원만하지 못하면 또 다른 위험이 반드시 따라오게 돼있다는 거라.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모로서 해야 될 의무만 하면 되는 것이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저번 시간에 그런 얘기를 한번 했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네 가지' 해가지고 그 프린트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부모로서 해야 될 의무만 행하는 것이고, 또 자식은 부모에게 의무만 행하는 것이고, 부부의 관계라든지 아니면 시부모와의 관계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돌아올 걸 생각을 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아니다. 그래서 항상 기브 앤 리시브(give and receive)다 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항상 해야 될 의무만 하고 그러고 나서 뭔가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것은 그대로 받으면 돼.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그냥 받아벌이면 되는 거고, 주면 주는 대로 그냥 그대로 받아벌이면 되는 거라. 그래야 마음에서 탐·진·치가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사회하고의 관계.

여러 가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각각의 행사나 사회에서의 관계들, 이런 것들도 원만해야 되는 것이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화합하는 것들입니다.

자신을 내세우려고 할 것 같으면 사회하고의 관계, 아니면 동료들하고의 관계가 원만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화합이 우선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다툼이 없는 삶이 훨씬 좋습니다.

물질적인 거 조금 내가 손해보고, 아니면 남에게 조그만한 비난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그럴지언정 다투는 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뭔가를 쟁취할려고 하고 나의 의견대로 할려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을 항상 내세우게 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번뇌는 지 혼자서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조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번뇌는 반드시 조합하는 그 고리를 끊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탐욕하고 조합을 하든지 아니면 미워하는 것과 조합을 하든지 나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조합을 하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고 화합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면은 이런 사회하고의 관계에서 원만해지게 돼서 그런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뿐 아니라 각각의 위험들이 있습니다.

급작스럽게 닥치는 위험들, 그런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다든지 뭐 어떻게 된다든지, 그런 위험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무상한 성품에서 비춰볼 거 같으면 그런 위험들도 위험으로 다가와지지 않습니다. 현실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 위험들로부터 잘 피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마음속에서 가지는 위험이다, 그게 오히려 더 큰 위험이 있다.

거기 밑에다가 적어놨을 거 같은데,

비록 작은 악이라도 행하지 말아라. '나 짜 쿳당 사마짜레(Na ca khuddaṁ samācare)' 합니다.

'쿳다(khudda)' 라고 하는 것은 '작다 사소하다' 하는 그런 의미도 있고 '나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지칭할 때 이 쿳다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뒤에 '나 사마짜레(Na samācare)' '행하지 말아라'. 'na'는 부정하는 겁니다.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악행이 되는 것은 하면 안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악행이 되는 것은 하지 말아라.

큰 잘못 짓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잘못을 지었으면 벌써 어디 잡혀들어갔지, 여기 와 있겠어? 그렇지는 않을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조그만한 것인데 그것이 악행이라고 생각들을 안 합니다. 특히 요즘 여름철이니까 모기 하나 탁 죽였다, 그게 무슨 악행이 되느냐는 거라. 또 어디 가가지고 고기 한 마리 낚아왔다, 그게 무슨 악행이 되느냐는 거라.

그것만 그렇습니까?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내가 그 사람한테 피해준 거 아니니까 내가 조금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 되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고리를 칩니다. 하나가 생겼으면 반드시 그다음 것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재해 있다가 언제든지 다시 그것이 폭발을 하게 되는 거라. 가만히 여러분들 예를 돌아보십시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금은 그 사람을 봐도 참고 있는데 10년이 지나도 그거 잠재해 있다가 폭발을 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미워하는 것들을 지금 내가 악을 써가지고 대들고 했다가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이렇게 하는 거라.

사소한 거지만 악은 어떤 경우든지 새끼를 쳐가지고 증폭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저지르는 것들은 아주 사소한 거지만 그것들을 무시해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악행도 사소한 것들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내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저지르는 사소한 잘못도 없는가.

그런 잘못이 없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런 잘못이 있을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다시 참회하고, 다시는 조그만한 것도 저지르지 말아야지 하고 반성을 해보고, 그것을 참회해서 다시는 일으키지 않도록 스스로 자꾸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무심코 넘겨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거라.

행위를 저지른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결과를 받습니다. 그 결과를 받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완전히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면 몰라도, 그러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간과하지 말아라는 거라.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악한 일들을 할 정도로 여러분들이 그거 무시하고 살만큼 성자들인가?

여기 만약에 촛불이 있다. 촛불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거 저지를 만큼, 그런데 내가 선행을 많이 해가지고 전등불이 있을 경우에 이 촛불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촛불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은 전등불이 꺼지고 나면 촛불은 탁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라. 여기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 그렇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이 악을 그런 사소한 거지만 악을 저지른 것들이 있다, 소소한 거짓말, 지금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죠. 그 정도의 상태가 돼있느냐는 거라. 그 정도로 여러분들이 선한 일들로써 이걸 덮을 수 있는 만큼, 지금 현재는 드러나지 않게끔 할 수 있느냐는 거라. 지금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생이 끝나고 나면 이건 또 드러나진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제자들이 조그만한 잘잘못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걸 본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는 참 하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거든. 싸움은 원래 작은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거 왜 하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다툼을 하느냐, 다투지 마라. 얘기를 하면서 모아놓고 그 얘기를 합니다

“네가 지금 다툼을 하더라도 존경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존경받기에 적합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조그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거라. 내가 이런 행위를 저질렀을 때 다른 어느 누구가 안 본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이 계신다면 부처님이 보고 이건 네가 잘했다고 할 수 있는 일이냐는 거라. 그건 아니다는 거라. 그러면은 빨리 알아차리고 그걸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네 마음이 청정하느냐는 거라. 또는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너의 말은 청정하느냐는 거라. 그런 행위는 또 청정하느냐는 거라.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 청정하지 않은 건데 왜 그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또는 그런 사소한 잘못을 저지를 때 마음에서 각각의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거라. 그 행위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미움이나 질투나 시기심이나 여러 가지가 일어나지 않느냐는 거라. 더불어 일어난다는 거라. 모기 하나 탁 죽였다. 죽인 행위 뒤에 마음이 안 일어나요? ‘잘 죽었다’ 마음이 뒤따릅니다. 그 죽인 걸 기뻐하는 마음도 일어난다는 거라.

 

결정적으로 부처님은 얘기합니다. 그게 깨달음에 이르는데 무슨 도움을 주는가? 생사윤회를 벗어나는데 무슨 도움을 준다고 그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 참회하지 않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거라.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거라. 그런 행위를 한 자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한다.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다는 거라.

물론 경전에는 네가 그럼 아라한이냐? 네가 완전하게 해탈했느냐? 해탈하지 않았을 거 같으면 지금 현재 네가 저지른 것들로 인해서 서로 참회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가지고 다투어서는 안된다. 그마만큼 사소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내가 되새겨보아야 할 것들은 굉장히 많다는 거라. 그런데 그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그걸 넘겨가지고 어떻게 되느냐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일으키는 행위들 그것들은 바이러스, 사소한 악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세균과 같다 하고 판단해라."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한번 감염이 되면은 지속적으로 그것이 상태를 악화시키지, 좋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거라.

몸에 세균들이나 바이러스만 자꾸 씻어낼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바이러스들도 반드시 몰아내도록 하라. 침투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침투가 되고 나면 그것은 일정 부분은 항상 증폭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소소한 것을 저질렀을 때 아, 내가 잘못했다 하고 빨리 참회해서 털어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걸 놔둬버리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모든 부처님의 말씀에 "삽바 빠빳사 아까라낭(Sabba pāpassa akaranaṁ)"

"일체 모든 악행을 저지르지 말아라."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저지르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을 저지르는 순간에 반드시 큰 위험들을 내가 껴안게 되는 형태를 띠고 있게 되는 거라.

 

경험상으로도 여러분들이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겁니다. 나는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누군가가 내가 한 말이 가시가 돼가지고 한참 뒤에 나에게 그걸 되갚아줍니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참회를 하고, 내가 참회했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아, 내가 그런 것은 잘못 말했다고 해서 털어버렸으면 문제가 없었을 건데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까먹어버리는 거라. 나쁜 행위를 하고도. 그러니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거라. 그런 불상사는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밑에 보면 "악은 독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독을 마실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라. 그 독을 피할려고 하듯이 사소한 것이라도 악은 피해라 하는 거라.

그 피하는 열쇠가 뭔지 알아요? 뭐로 하면 피할 수 있겠어요? 어찌하면 될까? 선한 마음 계속 일으키면 되겠지. 항상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그래서 부처님이 그다음에 얘기한 것이 "항상 모든 선한 것들을 자꾸 일으켜서 행하라"는 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은 항상 선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되고, 기억을 해야 됩니다. ‘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거 선한 일인가?’

그래서 부처님이 "행복의 열쇠는 자···사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무량심이 행복으로 가는 열쇠다. 이 열쇠를 가지고 좌물쇠를 열지 않으면 이 속으로 들어가질 못한다는 거라. 마음속에서 항상 자비희사라는 것이 가득 해야만이 이걸 열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행복의 열쇠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자·비·희·사가.

 

신구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항상 선한 것이 되는가 하는 것들을 체크하려면 나에게 자비희사가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만 가지고 체크를 하면 됩니다. 아, 내가 행복으로 가는 열쇠를 쥐고 있구나. 쥐고 있으면 뭐해? 빨리 열고 들어가야 되는 거지. 그럴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제일 밑에 한번 봅시다.

• 행복을 잡으려는 사람은 인생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 마음이 악으로 오염되면, 위험을 피하는 능력을 잃습니다.

• 행복을 만드는 것은 지혜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 일어나는 맑고 깨끗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맑고 깨끗한 마음을 자꾸 지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내가 하는 것들 어떤 것이든 그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위험은 그거 위험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껴안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주위를 돌아보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런 위험을 내가 꼭 껴안고 있지 않은가 잘 생각해가지고 껴안고 있다면 빨리 버려버려야 돼. 뭐 좋은 거라고 그걸 껴안고 있어? 버려버리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