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4가지 「핫타까경」 (20150904.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28. 09:00

https://youtu.be/pfjBzNFhPNg

*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4가지 「핫타까경」 (20150904. 대구)

 

자! 「좋은 인간 관계를 만드는 4가지」 그게 오전에 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알아차림」은 오후에 할 것입니다.

이거는 「핫타까 경(hatthaka āḷavaka sutta)」이라고 하는 경에 나오는 것들을 간추려서 적어놓은 것들입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많지 않아가지고 그걸 길게 풀어 쓰지는 못했어.

 

가끔씩 이렇게 보면, 모임이 잘 되는 것들을 보면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잘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우애있게 화합해서 잘하는 경우들도 있고, 또는 그 모임을 이끄는 스승이 뛰어나서 모이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들이 있습니다.

안되는 경우는 보면 거의 딱 정해져있습니다. 아무리 스승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또는 그 모임을 인도해주는 재가자 운영위원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할혀고 하더라도, 또는 그 모인 사람들이 어느 정도 화합을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처음엔 잘되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는 해산되는 것들을 보면 법에 맞지 않을 때, 법에 맞지 않을 때는 항상 그렇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이 핫타까 경은 그런 면에서는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될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일반인들이, 일반 모임의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뒤에 나오는 것이 그 모임을 이끄는 운영위원들이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이런 모든 분들이 바른길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이렇게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되는 것은 여기에 보면 여덟 가지로 나와있습니다.

 

맨 처음에 Saddhā(삿다-)라 해서 삼보에 대해서 확신이 있다.

여러분도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대한 확신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을 겁니다. 보통 그 믿음은 처음부터 확신이 들도록 돼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강제적인 부분도 있고, 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여기 좋다 할 것 같으면 우르르 가서 듣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걸 '아물리까 삿다'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간단하게 여러분들 예를 들면, 어느 절에 가가지고 입시 있으니까 입시기도 한다, 그래서 입시기도비만 내고 여기 가서 입시기도를 한다, 어떤 믿음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기도 열심히 하면 분명 합격할 것이다 할 때, 그게 어찌 보면 맹목적인 거지. 그걸 '아물리까 삿다'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조차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비방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종교적인 것들을 아예 하지 않게끔 되는 형태들을 취하겠죠.

 

그래도 오히려 그런 사람보다는 이성적이진 않지만 맹목적인 믿음이라도 가지는 사람은 그래도 자기 애가 대학에 합격은 못했다 하더라도 뭔가 이익은 있죠?

만약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갔다 그러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지게 될 거고, 또는 그 절에 기도비를 얼마 줬다면 그 절 운영하는 돈으로 줬을 거고, 또는 자기 자신이 깨달은 게 있어서 아, 이렇게 기도해가지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고 알 것 같으면, 그것도 이익이 있는 거라. 그래서 아예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같은 경우에는 산신각이나 칠성각 아니면 기도하는 것들에 대해서 불교 개혁자들은 굉장히 반대를 했어요. 그래서 절에서 그런 거 다 없애라 하는 얘기까지 나왔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가 쏙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다 없애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까 얘기한 후자와 같은 경우라. 아예 그거 쓸데 없는 것이다 하면서 어떤 이익조차도 주지 않고, 그리고 비판만 하는 습관이 계속 들어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나중에는 아, 그게 아니다. 그래도 이것은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어느 정도의 효용성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아물리까 삿다'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도 이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거기에 대한 믿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스승이 좋다 할 것 같으면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거기 가서 법문 듣습니다. 우르르 갔다가, 또 저쪽 좋다고 하면 우르르 가고 하는 것도 거기에 다 포함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것도 포함이 되지만 그것보다는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그게 뭐냐면 '아까라왓디 삿다' 라고 해서 이성적인, 근거가 있는 상태에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조사해보고 이렇게 해보니까 ‘어, 맞네! 진짜 맞네!’ 하고 생각이 들 때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후자 쪽을 많이 강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에서 '삿다'를 한글로 표현할 때 '확신'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것은 이 후자를 가리킬 때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들이 그런 확신이 얼마나 들까? 어떤 경우에는 스님도 좀 의문스러운 경우들이 많아.

 

그래서 그 확신이 들기 위한 방법들을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뭐냐면 오늘 같은 날 여러 사람이 모여가지고 법을 듣는 것, 그리고 경전 독송들을 하는 것, 그리고 법에 대해 서로서로 얘기하는 것, 그러고 나서 오후에는 뭐합니까? 수행을 해보는 것, 이런 것들이 가장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확신이 안 들 것 같으면 우선 해보는 거라.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해보고 나서 법을 들어보고 아, 부처님 법이 맞다. 또는 내가 수행을 해보니까 이게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주는구나. 그런 확신이 점점 들어가는 거라. 한번 해갖고 그렇게 들겠어? 그나마 꾸준하게 해야만이 가능해지는 거라. 그래서 이런 법을 들을 자리나 수행할 자리가 있으면은 그나마 다행인데 그거 없으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혼자서 하는 방법들도 경에서도 설명을 해놨습니다.

인터넷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맨 처음 시작하죠? 스님이 법문하면 누군가가 홈페이지에 법문 올립니다. 아니면 유튜브라고 그러나? 거기다가 누군가 올리면 그걸 다운 받아서 듣습니다. 그러니까 법을 많이 듣는 형태들을 취합니다.

꼭 여기 안 오더라도 자기 집에서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든지 그 법을 자꾸 듣는 연습을 합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그 법을 듣는다고 해가지고 그 법대로 실천하는 것은 참 소수밖에 안됩니다. 거의 대부분은 듣고 또 목마르니까 또 들을라고 그러고 빨리 올려주지 왜 안 올려주느냐고 그러고.

부산에서 한번 그런 적이 있었어요. 1년간 아니 2년간인가 너머 법문을 아예 안 올렸었어요. 그때 되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습니다. 그 항의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알아봐라 그러니까 우리 선원 식구들도 몰라. 모른다는 거라. 한번도 선원에 오지도 않고 한번도 회비를 낸 적도 없는데도 안 올려준다고, 올려주지 안 올려준다고 막 해가지고, 실제로 선원다니고 하는 회원들은 답답하면 자기가 와서 듣는 거지. 법문을 안 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 경우도 있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때 인터넷에 올려지는 것이 결코 이익된 것만은 아니다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오히려 갈망들을 더 부추김 하는 그런 형태를 띠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걸 올리는 것은 법은 공평하기 때문에! 설혹 듣는 사람이 갈망을 일으키는 것은 그건 자기 문제지 올리는 사람은 문제가 아니다 라는 거라. 법은 누구든지 어떤 조건에 한해서든지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들이니까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 법문도 사람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 왜 대구 법문은 유튜브로 안 올려? 그렇게 얘기들을 하더라고. 그건 여러분들이 판단하면 되는 거고.

 

그래서 그렇게 듣는 방법이 한 가지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경전을 독송하는 것들입니다.

처음에 스님이 경을 독송할 때는 경의 내용을 모르고 그냥 독송했습니다. 한국에서 강원에서도 그랬고, 태국가서 빨리어로 외울 때도 그랬습니다. 빨리어 내용을 알아서 그걸 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그냥 읽으라고 그랬어요. 읽고 암기하라고 그랬어요. 한국에서도 강원에 가면 처음에 가면 꼭 한자를 알아서 의미를 깊게 이해를 해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무조건 그걸 외워야 돼요. 외워야 진도가 나가. 요즘 생각을 해보면 그 방법이 맞는 방법이라. 빨리어 같은 경우에 한참 독송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비판합니다. 내용도 모르고 왜 그거 읽느냐는 거라.

 

그런데 내 마음은 확신이 듭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누가 말했어? 부처님이 말했잖아. 부처님이 틀리게 말했다는 생각을 요만큼도 하질 않는 거라. 무조건 좋은 내용이다는 건 아는 거라. 뭔지는 몰라도.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경을 읽으면서 부처님에 대한 확신들은 점점 더 든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 법을 설할 때는 그 경 내용이 빨리어 내용이 어디로 인도하는 거라? 닙바나로 인도하기 위해서 설해놓은 거라. 그러니까 나는 이걸 읽으면 자동적으로 닙바나에 이르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라.

 

어떤 면에서는 그게 맹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방면으로 부처님과 법에 대한 확신들을 심어줄 수가 있다는 거라. 아무 내용도 없는 거겠지. 실제로 그렇게 외우다 보니까 그것을 완전하게 외워지고 나니까 그 뒤부터는 이게 내용이 보여요. 거짓말 같겠지만 그 내용이 보여요.

어떤 경우에는 아, 부처님이 이거 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법을 설했을 것이다. 이 경을 설했을 것이다 하는 내용까지도 이렇게 가슴속에 와닿는 거라. 그렇게 소중한 것인 줄 알고 그다음에는 그 내용을 탁 이해를 하면 안 떠나. 그 내용이. 외운 것도 안 떠날 뿐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이해도 훨씬 깊게 되는 거라.

 

그래서 빨리어를 배울 때 아홉 단계로 나누어줍니다.

태국 같은 경우에는 만약에' 담마빠다'를 배운다,

그러면 1학년 때는 담마빠다 게송을 간추려가지고 그거 무조건 외워야 돼. 외우는 거 알지도 못하면서.

2학년이 되면 그 내용 외운 것을 우리 식으로 대조해갖고 설명을 해주는 거라. 그러면 한글로, 쉽게 말하면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면 그뒤에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요렇게 요렇게 외우는 거라.

3학년이 되면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를 다시 빨리어로 자기가 전환을 해야 돼. 그래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

4학년이 되면 "붓당 사라낭 갓차미"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하는 게 비슷한 내용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을 유추해내고, 그래서 "나모 붓다야" 이런 것들을 유추해내가지고, 이 의미하고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고 어떤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대조를 해나가고.

그러니까 '사라낭' 하고 '나모'의 차이점은 뭔가 하고 그다음해에 또 하고

그러면서 점점 이게 경전 전체의 내용을 통틀어서 자꾸 연결시켜가지고 하게 됩니다.

 

그게 빨리어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똑같은 내용 똑같은 하나의 글귀인데도 그렇게 배우는 것이 차이가 납니다.

그거는 어쨌든 첫머리는 경을 자주 독송하라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경을 독송하는 시간은 참 적습니다. 스님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경을 독송하는 데는 참 많은 이익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이 삿다-믿음-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데는 굉장한 역할을 합니다.

 

경전에 보면 수행을 해나가서 깨달음에 이르르는 프로세서 진행과정을 쭉 얘기해놓은 게 있습니다. 보통 아홉 단계로 얘기합니다.

 

맨 처음이 뭐냐면 경을 독송하든지 법을 듣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는 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해요? 여기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법문 듣다가 어, 저 스님 어찌 생겼는지 한번 보러 갈까? 하고 보러오는 경우들이 있어요. 와 봐야 별로 잘생기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안 오는 한이 있어도 보러갈까 해서 거기 가가지고 직접 들어보려는 마음이 생기는 거라.

 

경전을 독송하다 보면 내용이 좀 더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거라. 그게 두 번째라.

 

그다음에 세 번째 단계라는 것은 그렇게 와서 그 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고 하니까 그 법의 소중함으로 인해서 그 대상도 소중함을 알게끔 되는 거라. 아, 스님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법에 대해서 이해를 할 것 같으면 법의 소중함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러고 나면은 그다음에 하는 게 그것을 기억할려고 한다는 거라.

적어도 이까지는 돼야만이 믿음이 어느 정도 확립되는 단계가 됩니다. 그걸 기억을 못하면 대부분 보면 그냥 불뚝 신심이 일어나듯이 일어났다가 푹 꺼져버리든지 또 다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났다가 푹 꺼져버리는 경우,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암송하고 있게 되고 또는 그 법문 내용을 분명하게 머릿속에 딱 암기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그것을 따라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실천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적어도 여러분들은 신심을 일으킬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단계까지는, 기억하고 그것을 암기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 뒤에는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기억 유지 보관하고 나서는 그것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가르침을 기뻐하는 단계, 받아들이는 단계가 되고,

그러고 나서 가르침에 따라서 실천해볼려고 하는 의욕이 생겨나고,

그리고 의욕이 생겨나면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단계가 생겨난다.

그 실천을 하고 나면 그것들로 인해서 진리에 대한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가슴에 확 와닿게 되고.

그렇게 하고 나면 더욱더 그 길을 나아가고 다른 길들은 가지를 않게 된다. 그리고 불필요한 일들은 안 하게 되고 필요한 것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깨달음의 길로 한발짝 디디게 된다.

그렇게 아홉 단계로 보통 얘기를 하게 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경을 자주 듣든지 법을 자주 들어라.

CD를 통해서 듣든지 뭘 하든지 그것을 자주 듣고 경전이든 법문이든 그것을 자주 들어라.

 

두 번째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고 해라.

경전을 읽었으면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고 하고 법을 들었으면 법을 다시 되새겨서 그 의미를 분명히 자기 자신이 간추려라는 거라. 가끔씩 생활법문 할 때 프린트물 밑에 보면 이번 포인트 해가지고 몇 개 적어놓는데 적어도 그거는 알고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걸 안 외워서는 앞에 것들을 떠올릴 수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방법이 그것조차도 할 시간이 없다, 그러면 삼보에 대한 예배.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성스러운 제자들은 어긋남이 없습니다. 지금 2600년이 흘러갔지만 그것에 대해서 요마만큼의 티끌도 발견할 수가 없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들도 더욱 더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신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삼보에 대한 예경은 적어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거라도 할 것 같으면 신심을 일으키는 데는 굉장히 효율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개인이 할 때는 이런 세 가지 방법들을 보통 동원을 하고,

또 단체로 모였을 때는 아까 얘기하듯이 수행하고, 법문 듣고, 그다음에 법에 대해서 서로 얘기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게 서로 어우러질 것 같으면 적어도 한 사람이 갖추어야 될 여덟 가지 중에서 첫 번째 것은 갖출 수 있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첫 번째 부분에서 얘기한 삿다 부분입니다.

이제 삿다에 대해서 좀 이해가 됐죠? 그래서 맹목적인 것보다는 적어도 내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믿음, 그리고 그것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나의 마음을 성장시키든지 깨달음으로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방법들, 이런 방법들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 보면 "의례의식으로 사람을 구할 수 없다" 하고 딱 못을 박아놓습니다. 그것은 일회성 밖엔 안 됩니다. 계속적으로 일회성, 일회성 계속 그렇게 됩니다.

그걸 이용을 해 먹는 것도 좀 문제지. 초하루 되면 초하루 기도, 뭔 놈의 기도가 일년 내내 그렇게 많은지 그것도 매년 반복하는 거라. 여러분들은 어찌 보면 매번 일회성에 그냥그냥 하고 있는 거라. 나쁘다 하는 것은 아닌데 그것으로부터 좀 더 나은 방향의 믿음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Sīlava(-라와) 계율·도덕이 완전하게 몸에 베어 있다.

맨 처음 시작할 때 오늘 팔게 했죠? 12시 전에 밥 먹고 땡 치게 되면 오늘은 끝입니다. 실제로 오계 지키는 것보다 팔계지키는 것이 더 힘들죠? 아마 더 힘들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자연스럽게 지켜질 때는 오계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기회다 싶어가지고 그렇게 얘기해 봐. 오늘 저녁에 가가지고 오늘 스님이 저녁 먹지 마라 했어. 여러분도 먹지 마. 한번 얘기해봐. 자애스럽게. 우리도 한번 먹지 말자. 배는 고프겠지만 그 시간 동안을 유용하게 활용을 하라는 거라.

가끔 사람들이 아침에 되게 바쁜 사람들이 있으면 내가 항상 얘기합니다. 한 시간만 일찍 일어나라. 한 시간 일찍 일어나니까 굉장히 할 일이 많더라는 거라. 아침에 줄넘기도 할 수 있고, 아침에 체조 같은 것도 할 수 있고, 아침을 굉장히 여유롭게 보내고 편한 마음으로 그다음 일을 할 수가 있더라는 거라. 왜 그렇게 못해왔는가 하고 자신이 후회스럽다는 거라.

 

저녁 안 먹는 게 그마만큼 정신적인 안정도 가져올 뿐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뿐 아니라 수행할 때 수행하는데 굉장한 도움을 줍니다.

그게 계가 하나 더 많아지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그마만한 힘들이 더 커진 거라.

그걸 엉뚱하게 쓰면 안 되는 거지. 엉뚱하게 배고프다고 허비한다든지 아니면 이걸 어떻게 하면 계를 어기지 않고 내 배를 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열심히 탐구해갖고 미숫가루 타 먹고 뭐하고 그렇게 해가지고 그런데 시간을 보내라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계를 설정해놨을 때는 그마만한 이익이 나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이익이 나지 않으면 차라리 안 지키는게 낫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오늘 오계를 받았으면 오계를 지키고, 오늘 팔계를 받았으면 팔계를 지키면은 그마만한 이익들을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번째 Hirima(히리마) 악행 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다음 네 번째 Ottappa(옷땁빠) 악행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악행 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악행한 것은 악한 마음을 이미 내버린 상황입니다. 악한 행위는 악한 결과가 반드시 있게 되는 건데 거기다가 더 붙여가지고 그걸 부끄러워하고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또 악행을 더하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히리마 하고 옷땁빠는 어떤 경우든지 선한 마음으로 작용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설혹 악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악행한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 일어날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고, 아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행을 하면은 나쁜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악행하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그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걸 '히리 옷땁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악행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악행에 대한, 악행을 하는 것들에 대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걸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Bahussuto(바훗수또-) 배움이 있다.(특히 불교에 대해서)

저번에 테라담마 열 가지 얘기하면서 바훗수또 얘기를 했죠? 테라와다 불자가 되기 위해서 열 가지 갖추어야 되는 것, 테라담마 열 가지를 했었습니다. 거기에도 바훗수또가 있었습니다. 자주자주 법을 듣고 그걸 배워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배움이 있지 않으면 믿음이 생겨나올 수도 없고, 배움이 없으면 히리 옷땁빠나 계를 지키는 것도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돼야 됩니다. 왜 계를 지켜야 되지? 그런 마음이 들 거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왜 내가 경전을 읽고 법을 들어야 되지?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주자주 듣고 자주자주 배우려고 해야 됩니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전부 유학(有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끊임없이 배워야 되는 거라. 불환자도 배워야 된다는 거라. 아직 할 일이 남아있을 거 같으면 끊임없이 배워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배우는 것들은 끝이 없이 죽을 때까지 실천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 대신에 바훗수또는 바른 것들을 배워야 되는 것이지 바른 것들이 아니면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바르다 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좀 더 행복해지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나에게 좀 더 이롭고 유익한 일들이 많아지는 것,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좀 더성장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런 단계가 될 때 그것을 바르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법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는 법이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하하 낄낄거리고 좋았지만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나를 행복하게 이끌어주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다음에 Cāgava(-가와) 집착을 버리고 베푼다.

밑에 지도자가 갖추어야 될 네 가지 중에 Dāna(다-나) 라고 하는 것과 좀 유사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뭐냐면 짜가(cāga)라고 하는 것은 버려버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뭘 버려야 될까? 나, 나의 것이란 것들을 버려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버려버린 상태에서 뭔가를 베풀고 뭔가를 행할 때 그걸 짜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보시할 때는 보통 그렇게 안 하죠? 다나(Dāna) 할 때는 '내가 공양올렸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공양올린 것들 중에서 ‘나는 이마만한 공덕이 생길 것이다’ 하고 바라게 됩니다. 짜가 영역에는 속하지는 않는데 보시의 영역에는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의 공덕이 많아지는 것이 있고 보시의 공덕이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좀 더 청정한 대상, 부처님이나 깨달은 분이나 아니면 도와 과에 이른 분들에게 할 것 같으면 좀 더 많은 공덕들이 생겨나는 거고, 그렇지 않고 개에게 뭔가 베풀고 거지에게 뭔가를 줬다 하더라도 공덕은 되지만 많은 공덕은 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보시는 공덕의 차이를 낳게는 되는데, 짜가라고 하는 것은 공덕을 낳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어버리기 때문에 그 부분은 염두에 두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데 공덕을 생각할 이유가 없는 거지. 그래서 나를 버려버린 상태에서 뭔가를 하게 되는데.

 

그럼 어떤 게 실제적으로는 더 이익이 있을까? "보시 보다는 짜가를 행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개인이 갖추어야 될 때는 짜가들을 빨리 갖추도록 해야 됩니다. 집착하고 나의 것, 나의 소유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관념들 이런 것들을 빨리 버려버릴 수 있도록 하고, 그리고 뭔가를 남에게 하나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베풀었다는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않는 거라. 이런 것들을 빨리 가지도록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Puṇṇaya(뿐나야) 부처님의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뿐나라고 하는 것은 충족됐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충분하게 이해를 하라. 진리를 충분하게 이해를 해서 가슴에 충만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나는 항상 가슴이 진리의 맛으로 해가지고 기쁨으로 차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다른 것들은 뭔가를 하더라도 그냥 그거 행할 뿐인것이지 그것에 대해서 일희일비를 안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Apiccho(아삣초-) 욕구를 지니지 않는다.

소욕(少欲)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욕을 얘기할 때는 보통 칸띠(khanti)라고 하는 '인욕'이라는 용어를 많이 대조를 시킵니다.

그런데 아삣초를 얘기할 때는 위뭇띠(vimutti), 그러니까 아예 버려버린다는 거라.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아예 욕구를 가지지 않는 것' 욕구를 가지지 않는다 하는 것은 돈을 벌지 않는다든지 뭔가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 욕구가 없을 거 같으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바뀌더라도 전혀 문제삼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런 뜻이 됩니다.

설혹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한다, 아니면 나의 재산이 큰 불행으로 인해서 없어져버렸다. 그러더라도 아삣초를 지니고 있을 거 같으면 지금 내가 해야 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서러워하고 그것에 매달려있지는 않는다는 거라.

 

어제 부산에서 법문하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옷이 한 벌 뿐인 바라문 부부가 있었는데 오늘 부처님한테 법문을 들으러 갈 때는 남편이 옷을 입고가서 법문을 듣고 집에 돌아와가지고 부인한테 그 법문 내용을 전해주고, 내일은 부인이 그 옷을 입고가서 법문 듣고 와서 남편에게 그 법문을 전하고, 그래서 부부가 공통적으로 법문은 한사람이 들으러 가지만 똑같이 법문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 남편이 어느 날 그 옷을 입고 있는데 어느 스님이 지나가면서 탁발을 하는 거라.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는 탁발할 것이 없어. 자기 자신이 입은 옷밖에 없어. 그래서 자신이 입은 옷을 벗어가지고 그 스님한테 드렸어. 그러면서 외치는 소리가 “나는 이겼다! 이겼어!” 그 소리를 합니다.

무엇에 이긴 거라?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것,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버리고 그것에서 이겼다는 거라. 그게 욕구를 지니지 않는 형태에 해당이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그 소리가 온 사방으로 퍼지니까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이 이겼을까? 가진 것은 그것밖에 없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이길 만한 것이 없는데, 그래서 알아보니까 그 옷을 보시하고 “이겼다” 하고 외친 거라. 그래서 그것에 감동 받아서 왕이 그 사람에게 재산을 또 내어주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은 그렇게 한번 이겨버리고 나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욕구라고 하는 것은 한번 탁 끊어지는 것을 자신이 알고 나면 그 욕구는 다시는 달려들지 않습니다. 이게 뱀이다 하는 것을 안 사람들은 뱀한테 손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거라. 가져가면 물리고 나에게 해로운 게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가져가지 않는 거라. 그런데 물리지 않는 사람들은 이걸 자꾸 손을 가져간다는 거라.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욕구는 뭔가를 하나 떨어뜨리고 나면 그것은 다시는 자기 것이 아니게 되는 거라. 또 하나 더 떨어지고 나면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은 그 욕구들을 자꾸 하나씩 떨어뜨려나가야 됩니다.

 

그것들을 작게 가지면 되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적게 가지는 것은 형평성의 문제인 것이지 그건 언제든지 다시 커질 가능성은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소욕지족(少欲知足)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지족(知足)을 해야 돼. 만족할 줄을 알아야 되는 거라. 작은 것을 가졌든 아니면 가지지 않았든 그것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런 상태들을 아삣초라고 하는 겁니다.

 

그 여덟 가지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개인적으로 자꾸 갖춰야 될 것들입니다.

쉽죠? 갖추기! 노력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좋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모임들이 화합되고 바른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걸 이끄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되는 것들을 네 가지로 적어놓았습니다.

 

첫 번째가 Dāna(-) 布施(베풂), 보시하는 것.

두 번째가 Peyyavajja(뻬이야왓자) 愛語, (상냥한 말을 하는 것),

세 번째가 Attha-cariya(앗타 짜리야) 利行(이로운 행위, 가치가 있는 일을 한다)

네 번째가 Samānattatā(사마-낫따따-) 同事(평등·동료의식), 평등한 마음을 가지는 것.

 

이걸 한국에서는 사섭법(四攝法)이라 해가지고 얘기합니다.

용타스님이 설한 게 뭐죠? (동사섭) 그 네 번째가 동사섭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것들을 용타스님이 하시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스님이 용타스님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스승이고 지도자입니다. 또는 이 모임에 오면 뒤에 오는 초보자들을 인도해나가야 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분들도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베푸는 것 중에 뭐가 최고 좋습니까? 법에 대해서 베풀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법에 따라서 인도해주는 것. 가족들도 법에 따라 인도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안 온다고 성질 파락 내면서 팔 잡고 팍 땡기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옳지 못한 거라.

그래서 베풀고 인도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법에 따라서, 내가 화를 내지 않고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그것을 인도해 줄 때 그것이 좋은 다나(Dāna)가 되는 거라.

 

두 번째 Peyyavajja(뻬이야왓자) 상냥한 말을 하는 것.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항상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자비의 말을 하는 것. 그래서 남에게 대할 때, 남하고 얘기할 때는 나에게 자애가 없으면 말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까루나가 없으면 말을 하지 말아라.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고 그 사람을 연민하게 여겨서 그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줄려는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지니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거라. 그게 가장 좋은 겁니다.

 

그다음에 Attha-cariya(앗타 짜리야) 가장 좋은 것은,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자비가 있는 상태에서 뭔가를 행하게 될 때 그것은 이로운 행위가 되고 그것은 이익되고 가치가 있는 거라.

거기에 덧붙여서 지금 해야 될 것이면 반드시 하라.

그런데 지금 해야 될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은 구분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법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금 해야 될 것이고, 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지금 하지 말아야 되는 거이라. 밥을 먹을 때 어떤 게 이로운 행위입니까? 법에 맞게끔 인도하려면? 그걸 알아차려서 먹어야 되는 거라. 알아차리고 먹지 못할 거 같으면 밥 먹지 마. 그게 여러분들한테 이로운 행위라는 거라.

 

네 번째 Samānattatā(사마-낫따따-)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중에 우뻭카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는 사무량심과 동일시 합니다. 그래서 사섭(四攝)과 사무량심은 동일하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물론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평등하게 자꾸 대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여러분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고요하고 평온해야 됩니다. 어떤 조건을 만나더라도 고요함을 잃어버릴 것 같으면 평등한 마음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대상이 일어났으면 대상이 일어난 것을 즉시 알아차려라. 그것이 나쁜 대상이든 좋은 대상이든 즉시 그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고요한 상태에서 내가 뭔가를 하게끔 됩니다. 봤으면 그 본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고, 말을 할 경우에는 그 말을 하는 것들이 항상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연륜이 차고, 또 집에서 누군가를 이끌어야 될 때, 또는 이런 모임들에서 동료들을 이끌어야 될 때 가져야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에 덧붙여가지고 뒤에 보면,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미한 일들은 생각하지도 말고·말하지도 말고·행동하지도 말아라.

의미없는 것들을 왜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망상부리는 거 의미있는 거 아닙니다. 말을 하더라도 쓸데없는 말들은 그거 의미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리고 뭔가 행동하더라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의미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분명한 알아차림을 가지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욕심부리지 말아라는 거라.

제발 좀 욕심부리지 말아라는 거라. 뭐 할려고 그렇게 욕심 부리느냐는 거라. 그거 별 의미없습니다. 나중에 가가지고 ‘내가 그럴 동안에 딴 거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백명이면 백명 다 그렇게 후회합니다. 그런데 욕심 안 부리는 사람은 나중에 가더라도 자기 할 일들은 다 했기 때문에. 그때 가서 뭔가 할 일들이 있다고 생각해야 될 것들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망상을 멈추고 순간순간의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말을 하든 생각을 하든 행동을 하든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들, 그 대상들은 대상으로서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괴로움을 벗어날려고 쫓아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해라.

괴로운 것이면, 다리 구부리고 있어서 괴롭다고 하면 탁 다리 폅니다. 그럴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라. 탈출할려고 하라는 거라. 그걸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괴로움은 싹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버리는 거라. 그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괴로움은 죽을 때까지 이 몸을 지니고 있으면 항상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려고 용을 써야 되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이 오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하게 탈출하는 법을 알 것 같으면 그렇게 알아차려가지고 탈출해버리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괴로움의 끝이 보이게 된다는 거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잠이 오면 잠이 오는 길을 알고,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 오는 길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길을 분명히 알 것 같으면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게 되는 거라. 늙고 병들고 죽음도 여러분들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차피 여러분들에게 맞닥뜨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법들을 익혀야 되는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자! 이것이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4가지 입니다.

오늘 오전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