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20150918.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30. 09:00

https://youtu.be/VxJEoVs3L34

*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20150918. 대구)

 

오늘 할 것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생각하는 거죠? 아마 최고 잘하는 게 그걸 거라. 생각이 안 일어나게 할 수는 없는데 생각이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 계속 생각만 쭉 일으키지 그것을 실행하는 것들은 잘 안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은 습관화가 그렇게 돼버린 경우입니다.

수행에서도 생각하는 게 수행의 적이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생각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을 하는 것이 결코 도움은 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첫머리에 예를 들어놓은 게 산자야의 예를 들어놓았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을 얘기하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옛날에는 브라흐마 라고 해가지고 "범천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범천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그런 역할까지 다 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모든 것들은 그 범천 신이 모든 걸 다 관장하고 모든 걸 다 좌지우지한다 그렇게 얘기들을 하는데,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범천도 인간을 창조했으니까 당연히 사랑하겠죠.

 

그런데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가만히 보니까 "신이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거 그냥 놔두고 있는가?" "모든 걸 다 알고 모든 걸 다 창조한 분이" 그래서 그 반대적인 사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아예 반대적인 사상들이 생겨나겠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없다. 오로지 물질밖에 없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죽고 나면 사대요소 싹 흩어져버리고 나서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부르짖는 사람이 있고, 조금 더 한발 나아가면 그래서 "지금 이 몸을 지니고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사후가 없으니까 받을 결과도 없다."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다음 세상이 있지만 그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은 '나'라고 하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이 산자야 라고 하는 사상이 등장합니다.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신이 없다고도 얘기를 못하고, 그렇다고 신이 있다고도 얘기 못하고, 신이 있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거다." 이렇게 회의론적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뭔가 딱 결정돼가지고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 점심 먹었어요? 안 먹었죠? 답은 정해져 있잖아. 그런데 만약에 아침을 먹었느냐고 물어볼 거 같으면 대부분 먹었으면 “아침 먹었어요?” 물어보면 “아침 먹었습니다.” “아침 뭐 먹었어요?” 그러면 밥 먹은 사람도 있고 죽 먹은 사람도 있고 라면 먹은 사람도 있고, 갖가지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아침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기준을 '밥'이라고 정해놨다고 할 것 같으면, 밥 이외 다른 거 먹은 사람은 아침 먹은 게 아닌 거라. 그런데 아침을 안 먹은 것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먹은 것도 아니고 안 먹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그런 사상이 생각을 많이 하는 패턴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게 솔깃한 사상이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야! 어떤 것도 부정하지도 않고 어떤 것도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면서 그 논점들을 해답을 잘 제시를 하는 형태들이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 유명한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도 처음엔 그 산자야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있다고 처음에 브라흐마나에서 얘기했을 때나, 아니면 그 뒤의 여러 가지 사상들이 생겨났을 때 문제점은 뭐라?

하나도 도움 되는 게 없어! 쉽게 말하면. 서로 니게 맞다, 내게 맞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고, 어떤 경우에는 논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겁니까?

 

가끔씩 그럴 때도 있습니다. 옛날에 테라와다 세미나 할 때 상가에서 그런 걸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자꾸 재가자들이 테라와다에 대한 것들을 잘못 얘기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스님이 주제자로 나가가지고 한번 주제발표를 했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를 하더라고. 어찌 보면 그게 맞는 얘기라.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하고 나면, 거기에서 질의응답을 하다 보면 거기에 말려 들어가서, 그 말을 가지고 "맞니, 안 맞니" 해가지고 하는데 스님들이 휘말려 들어가버립니다. 그래서 그거는 아닌 거 같다. 발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어떠한 경우든지 스님들은 그런 이익됨이 없는 것, 지금 현재 그것으로 인해서 뭔가 확정적으로 탁 정해져가지고 끝나면 좋은데, 논문이든지 아니면 어떤 개념이든지 탁 제시를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기준 잡은 것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아까 아침 먹었어요? 하고 물어봤을 때 '먹었다, 안 먹었다' 하는 것의 기준이 다 다른 거와 마찬가지고. 그런데 스님들이 말려들어 갈 필요가 뭐 있느냐 해가지고 안 하고, 재가자들을 선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끔씩 그런 거 많죠? 살아가면서. 어떨 때는 이겼다 해가지고 기분좋다고 집에 올 때도 있는 거고, 어떨 때는 졌다 해갖고 기분 나빠가지고 올 때도 있고 그러는데, 가만히 한번 돌아보십시오. 그게 여러분들에게 어떤 유익한 점들을 가지는가?

 

저번에 '수따마야' 프린트물을 여러분들에게 안 내줬는데 수따마야의 끝머리에 그런 얘기를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경을 배우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하는 것은, 그것을 논쟁하기 위한 거라든지 남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것은 잘못 배우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 기준점을 분명하게 정해놨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논쟁을 한시간 이상 하지 말아라." 하고 계율로써 딱 못박아놨습니다. 아무리 좋은 거, 부처님 말씀을 가지고 스님들끼리 논쟁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한 시간 이상 지속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한 시간 이상 할 거 같으면 감정이 개입돼버리고, '나'라고 하는 것들 나의 생각이나 나의 관념들이 투사될 가능성들이 커지기 때문에. 그래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한시간 지나고 나서는 더이상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재가자들에게는 그러면 뭐라고 부처님이 얘기를 해놨을까? 그런 논쟁이 있고 했을 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들을 무작정 ‘아이고, 저거 의미 없는 건데’ 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을 거 아니라. 그래서 그 기준점으로 잡아놓은 것이 뭐냐면,

"그걸 했을 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또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가?

또 모든 사람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도움이 되는가?"

그 세 가지를 기준점으로 잡아놓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과는 빨갛다」 하고 누가 얘기한다. 그러면 그 빨간 걸 증명을 해야 될 거 아니라.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사과를 갖다 놔놓고 그 빨간 걸 보여줘야 되겠지. 그런데 이게 조건이 달라지면 어떻게 돼요? 조건이 달라지면 빨간색이 아니고 다른 색으로 보이게 될 겁니다. 그럼 「사과는 빨갛다」고 하는 것은 확정적인 것은 아니게 됩니다. 이와 같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이 기준잡아놨던 세 가지 조건에는 들지 않는 거라.

그걸 명확하게 "A면 A다" 하고 확정을 했을 경우에는 ‘아, 그렇다’ 하고 이해를 해가지고 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게 되고 이렇게 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나쁜일 해가지고 잡힌 사람이 있다, 그럼 "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하고 확정 지을 수 있어요? 나쁜 놈 기준을 어디다 잡을 거냐는 거라. 그보다도 훨씬 더 나쁜짓 하는 놈들로 봤을 때는 이거는 참 착한 놈인데.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 그리고 사회적인 개념으로 인해서 기준 잡은 것들은, 그것도 마찬가지로 확정지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럼 어떤 게 확정 지을 수 있을까? 행위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확정지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실천되지 않는 것들이면 그것은 확정지을 수 없는 것들이고 도움을 줄 수 없는 것들이라고 불교에서는 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탁발보시를 했습니다. 그러면 탁발한 걸 스님들이 먹을 거니까 스님들한테는 이익이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들한테는 이익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익이 있을 수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익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만들 때 선한 마음으로 만들고, 공양 올릴 때 선한 마음으로 올린 사람들은 이익이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아유, 힘들다’ 아니면 ‘우리 쌀 축내진다’ 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들은 그 사람은 이익이 없을 거라.

여러분과 스님들에게 이익이 있을 거 같으면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도 선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되는 거고, 받는 스님들도 선한 마음으로 공양을 받아서, 그러고 나서 법을 설하게 됐을 때 그 법은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있게 되는 거라.

또한 마찬가지로 그 공덕들을 "아, 돌아가신 분들께 회향합니다." 할 것 같으면 그 회향으로 인해서 또 모든 분들에게 이익이 있게 되는 거라.

이와 같이 행위를 했을 때는 이익 부분을 따질 수가 있다는 거라.

 

가끔씩 한국 스님들이, 테라와다 스님들은 여자 몸을 만지지 않으니까 여자가 만약에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느냐 물어볼 때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요? 물에 빠졌을 때는. 그냥 그대로 놔둬버려야 돼? 그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둘 거 같으면 나는 이익과 불이익과 아무 관계도 없지만, 그 사람은 불이익이 있게 되는 거고, 뻔히 내가 보고 있는데 좀 잡아주면 살아날 건데, 어떻게 해야 돼? 그럼 계율 무시하고 손 턱 내밀고 잡아줄 수는 없잖아.

그럼 주변에 적당한 거 골라서 나무라도 던져줘가지고 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내가 한쪽 끝 잡고, 그쪽이 다른 한쪽 끝 잡고, 아니면 뭔가 스스로 올라올 수 있는 줄 같은 것이 있으면 줄을 던져주든지, 아니면 내가 주변에 다른 사람을 빨리 불러가지고 급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사람이 구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러면 서로에게 이익이 있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걸 "손을 잡느냐, 아니냐"만 가지고 따질 거 같으면 이건 답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건 왜 그래요? 그건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개념에 자꾸 빠져버리면 안 됩니다.

 

불이 났어요. 그럼 당연히 불을 봤으면 불을 꺼야 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그런데 불난 집에 누군가 안에 갇혀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돼요? 들어가야 돼? 말아야 돼? 들어가서 꺼내왔을 때 내가 다치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으면 들어가서 꺼내와야 되겠지. 그런데 내가 다칠 거 같은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되요?

불끄는 이익으로서만 그쳐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방호복이 있다든지 아니면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추어진다면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꺼내와야 되는 것이지, 그걸 꺼내와가지고 그 사람은 살렸다 하더라도 나는 다친다든지 나는 죽어버린다고 할 거 같으면 나에겐 이익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게 기준점이라는 거라.

 

이익 부분도 어느 한쪽이 이익이 없어버리면 그것은 실행하는 것들을 잘못하는 것들이 돼버리는 거라. 이익만 그러겠어요? 여기 예를 들어놨습니다.

'이익'은 '도움'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행복한가, 아닌가?

내가 지금 하는 게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고 다음생에서도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들이라? 그러면 자신이 행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하는 거고, 그래야 되는 거고, 그러면 그것은 나에게만 행복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거라.

또 그 행복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고, 마음이 향상되는가?

법을 들으면 법에서 뭔가 여러분들이 도움을 얻고 그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행복해지는가 하는 거라. 또 그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실천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게 되고 마음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 그게 바른 법인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바른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 전해주는 거라.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거라.

 

하물며 실행하는 것도 여러분들에게 부처님이 기준점을 정해놓은 건데, 그리고 출가자들에게도 기준점을 정해놓았는데, 그냥 토론하는 거? 그거 되도록이면 하지마. 이익이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옛날 처음에 '위빳사나'가 들어왔을 때 '비파사나'가 맞는가, '위빠사나'가 맞는가, '위빳사나'가 맞는가? 또는 '사띠'의 정의가 '알아차림'이 맞는가, '마음챙김'이 맞는가? 속으로 ‘아이고, 참 할 일이 없는 놈들. 누구 말처럼 개념인데 어차피’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어떻게 해야만이 내가 빨리 깨달음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거 하고 있다는 거라. 학자들도 그렇고 일반인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자꾸 대승불교하고 테라와다 불교하고 비교해가지고 뭐 이렇게 합니다. 쓸데없는 짓들이라는 거라.

 

실행되지 않는 것들, 실천돼서 나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하고 그리고 마음을 향상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지 않는 것일 거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이 분명하게 제시해놨듯이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로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시간낭비하는 쓸데없는 어리석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아이가 이번에 성적이 좀 떨어졌어요. 어떻게 해야 될까? “너 왜 이렇게 성적 떨어졌어?” 죽일놈 살릴놈 하는 게 맞는 거라?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되는 거라? 어떻게 해야 되요?

뭔가 원인을 찾아야 될 거 아니라? 뭔가 자기가 게으름을 부렸든 아니면 집중하는 것이 떨어졌든, 뭔가 원인을 찾아야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 그래서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 원인을 찾도록 하고, 그 원인을 찾고 나면 해결점을 향해 나아가야 됩니다.

해결점은 어떻게 해야 돼? 그 원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게 해야 될 일인 것이지 자신의 기분이나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아이에게 말만 하고 그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똑같이 이익이 없어져버립니다. 그 원인이 아이일 수도 있고, 엄마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원인일 수도 있는 거고, 원인을 알았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 원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됩니다.

 

다리가 구부러져 있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원인은 다리가 구부러져 있다는 거라. 그러면 다리가 구부러져 있어서 고통스러운 걸 알아차려가지고 안 아플 수 있는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괜찮은데, 그런데 계속적으로 다리는 아프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원인을 알았으면 원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됩니다. 다리를 펴는 행위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 ‘다리야 펴져라 펴져라’ 한다 해가지고 다리가 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원인을 발견하고 원인을 제거해 나가는 것. 그래서 "부처님은 고의 원인과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들의 길을 가르치는 분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그 부분을 주의해서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자! 끝부분 좀 봅시다.

여러분 인생관으로써 이렇게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철학적 종교 사상이나 개념, 관념적 사고 속에 시비를 가리는 등의 어리석은 행위는 경고합시다. 혼란의 원인을 만들 뿐입니다.

 

• 어떤 주의·주장에 집착하는 것보다 모든 주의·주장의 실천적 측면을 고찰합시다.

그것들을 할 거 같으면 그거 어떻게 실천하는가 그것만 생각하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시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시 한번 하는 것이 낫다는 거라. 그냥 살아가는 것보다도 한번 알아차림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라.

 

• 몸, 말, 뜻의 행위에는 우선 (1) 자신을 위해 도움 될까 (2) 타인을 위해 도움 될까 (3) 자타의 모든 것에 행위에 도움이 되는지를 체크해서 실시합시다.

 

• 좋은 행위는 즉시 실행하자(선은 서둘러라!).

이것이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할 것 같으면 서둘러서 하라는 거라. 미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미룰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필요가 없는 것들은 미뤄도 되고, 또는 내가 악한 행위들을 해야 될 것은 그것은 미루어도 되지만 선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서둘러 행하라는 거라.

그것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가끔씩 보면 오후에 수행 안 하고 도망가는 분들이 있어. 배웠으면 뭐할 거라? 그 시간 수행하고 가라는 거라. 실천해서 자기에게 이익이 있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금하라. 그것이 완전하게 확고하게 정립이 되고 나면, 견해가 확립이 되고 나면 시시비비에 몰려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견해가 확립되지 않았다고 할 거 같으면 지금은 내가 해야 될 것은 실천해야 되는 것들을 해야 되는 거라. 바라밀을 실천하든 아니면 수행을 더 실천하든 그래서 마음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든, 그래서 견해가 확고하게 되고 나면 어떠한 다른 견해들이 오더라도 그것들을 소화시킬 수가 있다는 거라.

 

견해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하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확립이 되지 않았을 때는 우선 먼저 실천하라는 거라. 그것이 이번에 포인트입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꿇어앉고 합장하고 오늘 공양 올린 것들에 대해서 스님을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Saṅghassa dema.

(상갓사 데마.)

상가에 공양올립니다.

 

idaṃ me dānaṁ sukhi hontu ca nibbānassa paccayo hontu.

(이당 메 다낭 수키 혼뚜 짜 닙바낫사 빳짜요 혼뚜.)

이와 같은 공양공덕으로 행복해지고,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음을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내가 지은 행위들은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러한 공덕들을 모든 이들에게 회향합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주시면 됩니다.

 

sabbītiyo vivajjantu, sabbarogo vinassatu.

(삽비-띠요- 위왓잔뚜, 삽바로-고- 위낫사뚜.)

mā te bhavantvantarāyo, sukhi dīghāyuko bhava.

(마- 떼- 바완뜨완따라-요-, 수키 디-가-유꼬- 바와.)

abhivādanasīlissa niccaṃ vaddhāpacāyino,

(아비와-다나실-릿사 닛짱 왓다-빠짜-이노-,)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bhavatu sabbamaṅgalaṃ, rakkhantu sabbadevatā,

(바와뚜 삽바망갈랑, 락칸뚜 삽바데-와따-,)

sabbabuddhānubhāvena,

(삽바붓다-누바-웨-나,)

sabbadhammānubhāvena,

(삽바담마-누바-웨-나,)

sabbasaṃghānubhāvena, sadā sukhī bhavantu te.

(삽바상가-누바-웨-나, 사다- 수키- 바완뚜 떼-.)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이러한 공양공덕들이 끊임없이 흘러가서

부처님의 위신력과 담마의 위신력과 상가의 위신력을 입어

살아있는 존재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고 몸도 마음도 모두 부유로워지며

천신들이 여러분들을 보호하고

이러한 공덕들이 모든 분들께 회향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