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0150821.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25. 09:00

https://youtu.be/mu_E3VOItaE

*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0150821. 대구)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될 것이 뭐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 숨쉬기 ㅎㅎㅎ)

숨쉬기? 숨쉬기,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데. 그건 포기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오히려 포기를 해야 될 부분인 것 같은데. 죽고 살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되는 부분인 거지.

 

부처님한테 천인이 와서 물은 게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가슴에 화살이 박혔다, 그럼 뭐가 급하냐는 거라.(화살 빼는 것) 화살을 뽑는 게 급하죠? 보통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가슴에 박힌 화살은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욕망이라는 겁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화살이 박혔으면 우선 급한 거는 그걸 빼는 게 우선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비유를 들어 놓은 게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머리에 불이 붙었을 때 대해가지고.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잘했다 소리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더니 딱 한마디만 합니다.

“그런 감각적인 욕망을 뽑는 것보다도 '삭까야딧티' '나라고 하는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감각적인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어떤 게 있어요? 삼매에 들어버리면 감각적인 욕망은 그때 당시에는 제거가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억눌려 있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다음에 두 번째 방법이 불환과에 이르르면 감각적인 욕망은 완전하게 제거가 됩니다. 수다원에 이르러도 감각적인 욕망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되고.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제거가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경전 얘기는 아닌데 옛날에 스님들 일화를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스님이 밤에 경행을 하다가 발에 가시가 박혔어. 밤에 가니까 잘 안 보이거든. 가시가 그냥 박힌 것이 아니고 밑에 발바닥부터 해가지고 발등까지 올라오게 푹 박혔어요.

그래서 ‘아야’ 하고 탁 앉아서 가시를 뽑을라고 하는데 ‘앗차’ 싶은 거라. ‘어, 가시 뽑는 게 급한가? 아니면 나라는 견해, 나라는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게 급한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프면 어떻게 되요? 통증이 있을 거 같으면 ‘아프다’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느낌은 누가 느끼는 겁니까? (내가 느낍니다.) 내가 느끼는 거죠?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 통증이? 통증이 없어집니까? 통증은 있는데 영향은 못 미치게 되겠지. 그래서 통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통증은 있지만 통증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 스님은 발에 박힌 가시를 뽑지 않고 밤새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런 거 하죠? 다리를 구부리고 있으면 다리가 아프단 말이라. 다리가 아프면 다리의 통증을 관찰합니다. 관찰이 안 될 때는 보면 내가 아파 죽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거 관찰을 못 해. 또는 이 통증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든지, 아니면 좋은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든지, 갈애가 일어날 거 같으면 이 통증이 관찰이 안 되는 거라.

그런데 나를 관찰하면 중요한 것은 뭐냐면 나라고 하는 관념도 떨어질 뿐 아니라 그런 갈애조차도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이 스님은 그걸 지속적으로 관찰을 합니다.

 

스님도 실제 이 다리에 유리파편으로 인해 상처가 났을 때 밤에 응급실에 가니까 의사도 없고 그렇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이걸 수술을 해야 되는데, 물로 다 씻어놓으니까 뼈가 드러나져있고 많이 손상이 돼 있더라고. 그런데 마취제를 놔놓으면 통증은 없어지는데 그대신에 마취제를 놓은 부위에 수술할 거 같으면 별로 잘 안 아물고 안 좋대. 그러면 마취제를 놓지 마시오. 밤에 어떻게 견딜라고 그러냐? 그건 내가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침에 수술이나 준비해주십시오.

실제로 통증을 그냥 관찰했거든. 그런데 이게 언제 사라지느냐, 통증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느냐 하면 평온한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다가 그리고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느냐면 해탈로 향해 나아가게 돼 있습니다.

이 통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 이거 계속 이렇게 관찰하면 나는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마음쪽에 탁 가 있을 거 같으면 관찰은 여기에 하고 있지만 이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그걸 '아눌로마 냐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제로는 통증은 있지만 그것을 ‘통증’ 하고 관찰하면 바로 사라지고 관찰하면 바로 사라지고 그렇게 되는 거라.

 

꼭 뭐라고 비유를 하느냐면 산불이 나있는데 정중앙에 들어가 있다, 산불이 곧 나를 덮치는 상황이라. 그런데 저 멀리서 나를 구할려고 헬리콥터가 오고 있거든. 그러면 나는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어요? 그 산불에 가 있어요? 헬리콥터에 가 있어요? 산불 가운데 있지만 헬리콥터에 가 있는 거라. 그 산불에 가 있을 거 같으면 거기에서 두려움도 일어나는 거고, 아니면 그걸 피할려는 마음들도 일어나는 거고, 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는데, 헬리콥터에 가 있으면 그게 없어지는 거라. 그래서 산불은 직접 옆에 있지만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는 거라. 마음은 이미 헬리콥터에 가 있는 거라. 헬리콥터가 나에게 사다리를 쭉 내려와갖고 나를 태우고 갈 거니까 나는 안심하게 되는 거라.

 

마음이 해탈을 향해 나아가 있을 거 같으면 그런 안심하는 마음이 탁 드는 거라.

아. 이 통증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그냥 그거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라. 아픈 게 일어나면 ‘어, 아픈 게 일어났네’ 알아차리면 쓰윽 사라져버리고, 일어나면 쓱 사라져버리고, 그렇게 지속되니까 아픔이라고 하는 통증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그러다 잠 오는데 어떡해? 그럼 그냥 자버리는 거라. 나는 그렇게 해가지고 잠을 자고 있고, 나를 따라온 그때 다른 스님 한 분은 그 스님은 자기는 잠을 못 자는 거라. 여기에 스님이 피라도 계속 터져나오고 있으면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당사자는 잘 자고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못 자는 거라.

 

가시에 박힌 스님도 꼭 마찬가지라. 가시에서 오는 통증을 그대로 관찰을 하게 되니까 그 통증이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라. 딱 그 상태가 되면 아, '나'라고 하는 것이 딱 떨어져 나갑니다. 그럼 마음은 해탈에 이르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화살이 박혔는데 화살을 빼는 것, 이게 우선이 아니고, 화살이 박혔을 때 거기서 오는 통증 그거 관찰하는 게 먼저 우선이라는 거라. 그리해야 박힌 것들이 심장을 뚫은 건지 아니면 어디까지 가 있는 건지 분명하게 알아서 어, 내가 지금 이 화살을 뽑다가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화살을 뽑더라도 천천히 뽑으면 다른 장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거라.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그걸 하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단순히 그냥 감각적인 욕망을 제거하려고 화살을 뽑을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천인의 말에 부처님이 동의를 하지 않은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라는 거라.

 

이제 다시 물어볼게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뭐가 있어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거는 어떤 경우든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걸 포기하는 순간에, 물론 어떤 경우에는 감각적인 욕망도 잠재울 수가 있고, 덮어둘 수가 있고, 제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매달리게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럴 때 그 사람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 그걸 지닌 채 해탈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또 다른 비유를 들면, 오늘 탁발공양을 했습니다. 탁발공양을 했는데 내가 공양 올렸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탁발공양을 올려놓으면 ‘스님 뭐 묵노’ 하고 보게 됩니다. 쪼매 먹어놓으면 “스님 이거 왜 안드세요? 더 드세요!” 합니다. 왜? 내가 올린 거기 때문에!

보시를 하고 공양을 올렸는데도 '나'와 더불어 같이 해버리게 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을 빼내버리고 이걸 탁발했을 거 같으면 보시공덕이 훨씬 클 건데 이걸 못하는 거라.

계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고, 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나를 제거한 상태에서 그러한 행위들을, 선한 행위들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만 보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수행이 잘 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있을 거 같으면 ‘아! 내가 뭔가를 경험했다!’ 하는 거라. 거기서 끝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탁 개입하자마자, 경험했다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자 마자 거기서 그냥 끝나버리는 거라. 그 경험한 것을 자기 스스로 증폭을 시키든지 아니면 자기가 변형을 시키든지. 그리고 그것이 자기 것으로 딱 되어 있는 것이지, 그걸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으로서 보질 않게 된다는 거라.

 

어느 날인가 수행자 한 분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옛날에는 수행 참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 그러니까 어느 강원도에 있는 도사 한 분이 있어가지고 그 분이 되게 수행을 잘하고 사람들을 잘 지도한다고 해서 거기 가서 수행을 했어요. 거기가선 뭘 하느냐면,

"자, 여러분들 마음에 새가 한 마리 있습니다. 그걸 먼저 보도록 하십시오." 그런다는 거라. 그러면 내 마음에서는 새를 보는 거라. 보고 나면 그다음에는 "아, 그 새가 숲을 자유롭게 날아갑니다." 그럼 그렇게 날아가는 것을 보는 거라. 그럼 그 새가 날아가서 어느 천상에 가서 아주 평화롭게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거라. 나중에 하다 보니까 진짜 그렇게 되더라는 거라. 자기는 너무나 수행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탁 그게 깨지는 거라. 그 모든 것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탁 자리 잡고 있는 상태에서 동일시하는 거라.

 

그런데 테라와다 스님들 어디 법문을 들어봐도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면서, '나'라고 하는 것을 가정하에서 법문을 하고 수행지도를 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거든.

그래서 의심이 생긴 거라. 어? 내가 지금 수행을 잘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 경험을 들어봐도 비슷비슷하게 하는데 똑같은 게 하나도 없는 거야. 그 경험들이. 물론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기쁨이 일어나든지,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되고 하는 것은 있고, ‘아, 나는 참 잘하고 있다’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와르륵 무너지더라는 거라.

그마만큼 수행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걸 빼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수행을 잘 못해도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알아차리더라도 수다원에 가면 그 '나'라고 하는 것이 딱 제거가 돼버립니다. 불환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아까 스님 같이 통증 관찰하는 것에서도 그 어디에도 '나'가 개입이 안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 어느 순간에 가서 그게 톡 떨어지는 것이 보여.

아주 쉬운 방법이라는 거라. 쉬운 방법을 놔두고 왜? 그거는 누구든지 그런 경험들을 하고 그 과정을 거쳐가는 건데, 그거 안 하고 계속 엉뚱한 걸 하느냐는 거라. 나를 찾아가지고. 없는 나를 어디서 찾을 거라. 그거는 오히려 떨어트려 버려야 되는 것들이지.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딱 포기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 하더라도 언제 나에게 그런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여기 써놓은 글대로 사형집행인을 50년을 한 분이 있었는데, 옛날에 사형집행인은 칼을 가지고 목을 치는 그런 일을 하는 거라. 나이가 들면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 목을 치려해도 한 번에 칠 수가 없어요. 두번 세번 이렇게 치게 되는 거라. 왕이 봤을 때는 그것도 못할 짓이라. 치는 사람도 힘들고 그 목이 짤리는 사람도 한번에 하면 될 건데 두번 세번 하니까 더 괴롭고, 그래서 이 사람은 해고 돼 버립니다. 원래 범죄자였는데 사형을 당하는 대신에 남을 죽이는 임무를 받은 거라. 그대신에 그사람도 감옥에 있는 거라. 구속돼가지고 자유가 없는 삶을 산 것인데. 이 사람 입장에서는 어쨌든 50년이 지나고 나서 해방이 됐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래서 나와가지고 맨 처음 한 게 부인한테 부인, 나 죽 한번 원 없이 먹어보면 좋겠다 그래서 유미죽을 끓여달라 했어요. 끓이는 사이에 목욕하고 와가가지고 유미죽을 먹을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선정삼매에 들었다가 멸진정에 들었다가 깨어나가지고 이렇게 보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한테 가서 내가 탁발을 하면 그 사람에게 공덕이 클까? 하고 보다가 이 사람에게 옵니다.

유미죽을 몇숟가락 떠먹지도 못했는데 사리뿟따 존자가 오니까 자기가 그 모습을 보고 ‘아, 참 저렇게 성스러운 성자들이 있구나’ 자기는 이때까지 만날 나쁜 놈들만 보고 왔거든. 나쁜 짓만 해온 사람들을. 그래 내가 인제 사회로 자유롭게 됐으니까 저 성자한테 이 죽을 드리자 해가지고 사리뿟따 존자한테 죽을 드립니다. 생에 처음으로 잘한 일을 딱 한번 한 거라.

 

한번도 잘한 일이라고는 없었는데, 남 죽인 일이 잘한 일일 거야, 아니면 남을 죽이는 일이 잘한 일일 거야? 갇혀가 지내는 그게 잘한 일일 거야? 뭐 잘하는 게 있었겠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가지고 부채질해주면서 사리뿟따 존자가 공양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사리뿟따 존자가 나혼자 먹기 뭐하니까 “같이 먹읍시다.” 하면서 죽을 나눠주거든. 좋은 일 한번도 안 해보고 누구한테 그런 것을 받을 일이 있었겠어? 남이 뭐 하나 자기한테 주는 게 있었겠어? 너무 좋은 거라. 그 부채질하는 것도 “나 이제 괜찮으니까 당신도 더운 거 같으니까 당신에게 부치시오.” 하는 거라. 참 배려를 해주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참 기쁨에 차 있는데, 항상 스님들은 공양을 하고 나면 법문을 하는 형태들을 취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이 사람을 향해서 사리뿟따 존자가 법문을 하는데 이 사람 마음에 지금 그게 들어가겠어? 법문이라고는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그 사람 마음에는 자기 살아온 게 너무 후회되는 거라. ‘참 내가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렇게 조그만한 선행을 하더라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이렇게 있는데, 이 좋은 일들이 있는데 내가 왜 그거 못하고 살아왔느냐는 거라. 남을 죽이는 일, 나쁜 짓 하는 거, 그런 후회하는 마음이 드니까 이 법문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라.

 

그걸 사리뿟따 존자가 알아차리고 그럽니다. “당신 50년동안 사형집행일을 했다면 당신이 그걸 하고 싶어서 했느냐, 아니면 왕이 시켜서 했느냐?”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잖아. “왕이 시켜서 했습니다.”

“당신이 의지대로 한 것도 아니고 왕이 시킨 것이고 그리고 한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이미 지은 것을 어쩔거라고 그거 후회하고 있느냐는 거라. 물론 그것은 방편입니다. 그 말에 이 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때부터 사리뿟따 존자의 말이 귀에 들어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평온한 상태가 되면, 그 말이 그냥 그대로 들리게 됩니다. 통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통증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관찰하게 됩니다. 그냥 관찰하면서 관찰하는 상태로 그것으로만 보이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은 이미 해탈로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이 분도 그런 수순의 지혜를 닦게 되는 거라. 도와 과는 얻지 못해도 그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가장 편안하게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을 그냥 그대로 듣게 됩니다.

 

전에 서울에서 법회 할 적에 프린트물 나눠준 것이 있었는데 "수따마야 냐나(suta maya ñāṇa)" 우리 홈페이지에도 올라가 있죠? 그냥 그대로 듣기만 하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이 사람이 지혜가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가 떠나고 나서 이 사람은 죽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어디 태어나게 될까? 딱 한번 좋은 일 했는데, 나쁜 일은 이마만큼 그것보다도 훨씬 많이 했는데, 도솔천에 태어납니다.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제자들이 “부처님! 저렇게 나쁜 짓 많이 해가지고 딱한번 공양 올린 것 그것 때문에 어떻게 도솔천에 태어납니까?”

그 공양 한번 올린 것 가지고 도솔천에 태어났겠어? 공양 올리고 법문을 들으면서 내가 도달한 경지, 수순의 지혜를 딱 얻은 상태로 인해가지고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수순의 지혜"라는 것은 마지막 죽음의 상태에서도 해탈을 향해 마음이 나아가 있고,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 특히 내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항상 평온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나가고, 원인·결과 원인·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나쁜데 떨어질 이유가 없는 거라. 딱 그 일순간이었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안 된다는 보장을 누가 해? 어떻게 여러분들이 바뀔지 어떤 상태에 놓여질 지는 누구도 몰라.

 

그래서 마음에서 오늘 내가 행복하고자 할 것 같으면 행복한 일을 열심히 해야 되는 거라. 오늘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뭔가를 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나는 죽고 나서도 천상세계에 태어나려고 한다는 마음을 가질 것 같으면 지금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려나가야 되는 거라.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숨 쉬는 걸 포기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숨을 쉬고 있으면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말을 하고 있으면 말을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뭔가를 행하고 있으면 행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에게 지혜가 열릴지 누구도 모른다는 거라.

 

왜? 살아가면서는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범부중생이면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래도 좋은 일 좀 많이 하고 나쁜 일 안 할려고 해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꼭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은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될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모든 생명들은 평등하게 대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 지은 행위가 나쁜 것이지 그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 잘한 행위에 대해서는 칭송해줘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아니면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받아야 되는 것이지 내가 가져가는 것은 아니라.

 

그러면 내가 해야 될 것은 그 어떤 중생이든 어떤 생명이든 평등하게 대해야 된다는 거라. 똑같이 대하는 것. 왜?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 특히 인간들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린아이든 아니면 나이든 분이든 어떠한 부류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평등하게 대해야 됩니다.

평등하게 대할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과 연민심을 항상 지닌 채,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고, 자·비·희·사의 마음을 지니고 그 생명을 자꾸 대하도록 해야 됩니다.

 

두 번째가 끝까지 자신을 포기해선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포기하는 순간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은 악에 물들어버립니다. 마음은 항상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항상 선행을 하겠다 할 거 같으면 선행하는 것을 포기해선 안되는 거라. 오늘 팔계를 지키겠다, 팔계를 지키겠다는 그걸 포기해서는 안되는 거라. 내가 해탈을 향해 나아가겠다, 그럼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포기해선 안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그걸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업의 법칙은 분명하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선한 결과를 받게 되는 거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악한 결과를 받게 돼있습니다. 그 사형집행인이 수순의 지혜에 도달해서 도솔천에 태어났지만 빨리 죽어야 하는, 업의 결과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은 거를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건 반드시 내가 받아야 되는 거라.

 

그리고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자의 말을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성자의 말에는 항상 내가 선한 것을 실천하게끔 하고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말들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말은 그냥 그대로 들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지, 그걸 피해버리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경우들도 있어요. 자기는 만날 나쁜짓 하고 있는데 스님은 자꾸 나쁜짓 하지 마라 하니까 그 법문을 들으려니까 힘들다는 거라. 힘들어도 그거 들어야지 우짜겠노? 그래도 들어야만이 ‘아이고, 내가 또 나쁜짓 했네’ 하는 마음이라도 일으키지 그것조차도 안 들어놓으면 자기가 나쁜짓 하든 나쁜짓 하는지조차도 모르게 되는 거라.

부처님의 말을 전하는 스님들은 그런 성자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항상 그 말에는 선한 쪽으로 마음을 이동하게끔 만들고,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끔 자꾸 인도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말들을 듣는 버릇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 듣는 방법에 대한 것은 수따마야 냐냐(suta maya ñāṇa) 부분을 참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포인트는

•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너무 늦었다」 하는 생각들, 세상에 생명이 붙어있는 한은 늦은 것은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은 항상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 그다음에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든 생명에 대해서는 자애로 평등하게 대해야 된다라.

• 세 번째는 성자의 말은 진리를 실천하게 한다 하는 것입니다. 실천 아무나 할 것 같으면 할 수 없는 건데 그래도 그 말을 자꾸 들음으로 인해서 실천할 수 있게끔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