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맑고 깨끗한 마음이 최강의 부적이다. (20151002.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2. 3. 09:10

https://youtu.be/QQRtKqiIwvI

* 맑고 깨끗한 마음이 최강의 부적이다. (20151002. 대구)

 

오늘 오전에 할 거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최강의 부적이다.」

부적 안 써본 분 있어요? 별로 없죠?

아마 마음의 안정을 갖기 위해서 그걸 쓴다고 보통 얘기들을 하는데, 오히려 마음을 더 약하게 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스님이 자주 쓰는 문장이 있습니다. 편지를 쓴다든지 아니면 메일을 보낼 때 맨 위에 항상 들어가는 문구가 뭐냐면

「Namo Buddhāya, Dhammāya, Saṅghāya.(나모 붓다야, 담마야, 상가야.)」 이렇게 쓰고, 그다음에 누구누구 하고 이렇게 내용을 쓰고, 마지막에 가서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하고 하든지, 다른 문구를 할 때는

idaṃ me dānaṁ nibbānassa paccayo hontu.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혼뚜.)

그거 아니면 sukhi hontu (수키 혼뚜) 이런 문장들을 쓰기도 하고, 그래서 끝내게 됩니다.

 

그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대부분의 테라와다 스님들은 그렇게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맨 첫머리에, 쉽게 말하면 편지를 쓰든지 메일을 쓸 때 맨 위에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마에 귀의합니다. 상가에 귀의합니다.」 하고 나서 내용을 쓴다는 얘기거든. 보통 우리도 불교 문서들 보면 맨 위에 「삼보에 귀의합니다.」 하고 나서 쓰는 경우들이 많죠? 그건 아마 대동소이 할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마지막에 한국 같으면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이렇게 한다든지, 아니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한다든지 이렇게 끝을 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거는 어떤 불교를 떠나서 거의 기본적으로 쓰고 있는 문구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출가한 스님들도 이미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립돼있는 상태인데도 항상 그걸 먼저 쓰게 됩니다. 왜 그럴까? 왜 그걸 먼저 쓸까?

처음에 한국 와가지고 나는 예사로 생각하고 그냥 맨 첫머리에 「나모 붓다야, 담마야, 상가야.」 하고 쓰니까 다른 스님들이 나중에 다시 메일이 왔어. “그게 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용어들을 안 적어 본 거지. 그런 것도 있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은 삼보의 소중함들을 압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수행을 하고 내가 법을 가르치고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그 가르침 이외의 것들은 절대 덧붙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 그것들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들을 먼저 회상하면서 뒷 글을 쭉 써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써나갔을 때 하고 그렇지 않고 바로 그냥 "누구야 뭐 어쩌고 저쩌고" 하고 글을 썼을 때 하고는 마음가짐이 좀 더 달라집니다.

 

수행할 때도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또는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마음속에 내가 항상 부처님과 함께 있다, 내가 항상 담마따라 살아가고 있다, 상가는 우리가 보호해줘야 될 분들이고 또 상가에 의해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있다는 그런 마음이 들고, 드는 상태에서 생활할 것 같으면 뭔가 든든한 빽이 뒤에서 딱 받쳐주는 느낌이 듭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수행할 것 같으면 설혹 대상을 놓치고 하더라도 크게 걱정 안 합니다. 이미 빽에는 선한 마음이라는 자애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쁜 쪽으로는 마음이 안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갑자기 내가 악한 마음을 품는다든지 이런 것들로는 넘어가지지 않고 단지 대상을 놓쳤으니까 빨리 돌아와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거고.

 

일상생활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 자애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할 거 같으면 크게 잘못하고 하는 것들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지게 되고. 그래서 어찌 보면 그것들로 인해서 나를 보호해주는 그런 역할들을 한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메일을 쓰고 할 때 항상 맨 첫머리에다가 '나모 붓다야' 하고 '콤마(,)' 하고 그다음에 다시 '나모' 라고 안 쓰고 보통 그냥 '담마야' 하고 '콤마(,)' 그다음에 '상가야' 하고 '마침표(.)' 하고, 그렇게 해서 한 문장을 쓰고 나서 그다음 문장을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습니다.

「Namo Buddhāya, Dhammāya, Saṅghāya.(나모 붓다야, 담마야, 상가야.)」

 

자! 여기에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 때뿐 아니라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뭘 의지처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위들이나 그 사람에게 일어날 결과들이 참 많이 죄우를 하는 경우를 봅니다.

해마다 부적 쓰는 사람들은 해가 바뀌고나서 부적 안 쓰면 불안해. 또는 무슨 일이 있고 할 때는 항상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부적을 찾을려고 하고, 무슨 시험이라든지 뭐가 있을 때도 꼭 부적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찌 보면 거기에 딱 노예가 되어 있는 느낌들이 들 정도입니다.

다행히 나쁜 일 안 일어나고 또 원하는 일들이 잘 성취되고 하면 좋은데, 안되면 부적 탓하기보다는 부적을 지닌 사람이 마음을 잘못써서 그렇다 하고 스스로를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아예 부적 안 가지고 마음을 잘 써버리면 되지 뭐하러 그 부적을 방패막이 삼아서 해가지고, 처음부터 부적 쓰지 말고 마음을 올바르게 써버렸으면 문제가 없을 건데.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불교도라고 할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부적 같은 것을 써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업(業)을 많이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부적을 쓴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보면 자기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보다는 다른 외부적인 힘의 도움으로 인해서 살아간다는 그런 경향들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는 그걸 쓰든 안 쓰든 불교인들이 보통 가지기 쉬운 게 그 운명론 같이 ‘아이고,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이렇게 살아야된다’ 하고 숙명론 같이 받아들이는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거 큰일납니다. 불교는 어떤 경우든지 그런 숙명론이 아닙니다.

불교는 어떤 면에서는 보면 '자업자득론'입니다. 자기가 한만큼 결과가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예를 들어 살인을 했다. 요즘 모기가 많으니까 모기로 해봅시다. 만약에 모기를 하나 잡는다고 생각을 할 때, 업(業)이 몇 번 작용을 할 것 같애요? 살인하면 한번 딱 업이 작용을 하고 끝날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살생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 모기를 잡을려고 하는 마음을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강도가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처음에 모기를 잡을려고 했던 마음하고, 모기를 잡을려고 했을 때의 마음하고, 모기를 때릴 때의 마음하고, 모기가 갓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의 마음들, 어떤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잡으려고 하는 의도부터 해가지고 살인이 돼서 그게 딱 죽었다는 사실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살인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때의 마음들은 다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모기를 잡을려고 하는 살인이라고 하는 하나의 행위에는 업들이 한 번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많이 작용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업을 지었으면 그다음에는 어떤 업이 여러분들에게 결과를 낳을까? 처음에 죽일려고 했던 마음이 결과를 낳겠어? 아니면 죽이는 행위 자체가 결과를 낳겠어? 죽이고 나서 확인하는 마음이 결과를 낳겠어?

업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게 만약에 일곱 번 그런 업의 행위가 살생하는 행위가 있었다, 하나의 행위에. 그러면 그 일곱 번 다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을 하는가? 하는 거라.

보통 업은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살인하는 마음을 보면은 이 그래프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쭉 상승됐다가 점차 곡선같이 쭉 사라지는, 자신의 마음을 보면 그 강도가 그렇게 바뀌는 것이 분명하게 보여진다는 거라. 그러면 아무래도 강하게 작용했던 것,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런 것들이 결과로써 나타날 가능성이 커져버린다는 거라. 그럼 앞에 거하고 뒤에 거는 어떻게 돼? 그것도 똑같은 업이라고 하는 행위를 지은 건데, 이거는 결과를 낳을까? 보통은 낳지 않는다는 거라. 이것들은 대부분 보면 그걸 '기유업(旣有業)'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결과를 낳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 강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탁발을 공양 올렸습니다. 그럼 그릇에 담아가지고 나중에 밥상에 차려놓을 거라. 그러면 보통 보면 스님이 먹는 양보다 훨씬 많이들 가져옵니다. 다들 상에 안 올리겠지만 그 일부를 올렸다고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 보면 반 이상 다 남아있을 겁니다. 공양하고 나서도. 어떤 거는 손도 안 댄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업의 이론으로 따질 거 같으면 내가 받은 거니까 그건 내가 다 먹어야 되는 결과가 나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거는 먹고 어떤 거는 안 먹었어. 어떤 거는 손도 안 댄 것들도 있다는 말이라. 결과를 안 받고 끝나버리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럼 어떤 거는 결과를 낳고 어떤 거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왜 그렇게 될까?

숙명론으로 될 거 같으면 모든 것이 다 결과를 낳아야 되는 것이라. 그런데 어떤 거는 분명하게 결과를 안 낳거든. 그래서 자신이 지은 행위들로 인해서 결과를 낳는 것도 있고 낳지 않는 것도 분명하게 있다는 거라.

만약에 결과를 낳을 시점이 돼서 내가 마음을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럴 것 같으면 결과를 안 낳습니다. 웅덩이에 빠질려고 하는데 내가 부주의해져 있을 거 같으면 웅덩이로 빠지는 길로, 발을 디디고 발을 뗐으면 발을 들었으니까 당연히 그다음 차례에는 폭 빠져야 되는 게 순서인데, 탁 들어서 내려다 보니까 웅덩이가 있다고 탁 알 것 같으면 멈추던지 건너뛰든지 한다는 거라. 결과를 안 낳고 가버리는 거라.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아무리 그게 나쁜 거라고 하더라도 결과를 안 낳고 건너뛸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경우에는 불교의 업이라고 하는 것은 숙명론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자업자득에 가깝다는 거라.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것의 결과는 달라진다는 거라.

 

그런데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딱 그대로 숙명론입니다. 그런데 왜 불교의 이론하고도 맞지 않는 것들을 왜 자꾸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적을 쓰고 그다음에 점을 보고 하는 것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도 가면 점보는 데가 있습니다. 사원 바깥에. 또 태국 같은 경우에도, 얼마 전에도 태국 에라완 사원 폭파된 거 있죠? 여러분들은 거기가 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절이 아닙니다. 절 밖에 거리에 그런 신상(神像)들을 해놓고 사람들이 거기다가 기도하고 그러는 뎁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이 살고 스님들이 관여할 수 공간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스리랑카도 절 앞에 가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점보고 하는 곳들.

뭐 버마는 없습니까? 피 신앙 해가지고 영혼들을 불러오고 뭐 하는 그런 것들을 담당하는 정령숭배를 신앙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다 불교외적으로 보는 것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불교가 그 나라에 정착하면서 다른 것들을 흡수하지만 흡수해서는 안 되는 것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절 밖으로 다 밀려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쉽게 말하는 절에서 점보는 것들, 그다음에 절에서 부적을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 그건 어떤 경우도 용납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불교의 부처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척하는 것들이 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부적은 불안의 샘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적을 쓰면 쓸수록 그 샘에서 물이 나오듯이 불안이 자꾸 생긴다는 거라. 자꾸 생긴다는 거라. 자기 스스로 그 불안한 마음을 진정해서 불안하지 않게끔 만들면 그 샘이 닫혀버릴 건데 오히려 그 샘을 계속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들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하지 말아라.

그게 인제 오늘 오전에 얘기하는 주제 부분입니다.

 

왜 이 얘기가 나왔느냐 하면,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어른들하고는 다릅니다. 샘하지 않고 뭔가를 합니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는데 한 아이는 불자 집안의 아이고, 한 아이는 다른 종교를 믿는 아이인데, 불자 집안에 있는 아이는 항상 구슬치기 할 때 구슬을 맞출 때는 뭘 주문을 하느냐면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하고 나서 그거를 탁 맞히는 거라. 그런데 한 아이는 그렇게 안 하고 하든지, 안 그러면 부처님한테 귀의한다고 얘기를 안 하고, 자신의 신 아니면 자신의 스승에게 귀의한다고 하면서 이걸 했거든.

그런데 만날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하면서 구슬치기 하는 애는 맨날 구슬치기 하면 이기는 거라.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가 이게 왜 계속 저런가 하고 알아보니까 그러고 있거든. 그래서 자기도 항상 뭘 할 때마다 항상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그러니까 “나모 붓다야” 하든지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든지 그 애가 무슨 의미를 알아서 하겠어? 그런데 그걸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거라. 이기니까. 그렇게 하게 된 거라. 그래서 이 다른 종교를 믿는 아이가 항상 뭘 할 때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하고 뭘 하거든.

 

그 아이가 부모하고 같이 땔감을 구할려고 나왔다가 땔감을 구하는 동안에 소에게 먹이를 주려고 소를 풀어놓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열심히 땔감을 구해와서 보니까 소가 풀을 먹다가 왕사성 안으로 들어가버리게 된 거라. 그래서 부모는 이 왕사성 안으로 소를 찾아 들어갔는데 왕사성은 밤이 되니까 성문이 닫혀버리는 거라. 부모가 꼼짝없이 그 안에 갇혔거든. 아이는 소도 없는 수레에 그냥 남겨지게 된 거라. 그래서 잠이 오니까 잠을 잤어.

그런데 거기 왕사성 부근은 왜 그렇게 성문을 닫아놓느냐면 하도 야차들 악령들이 많이 출몰하기 때문에 그렇게 밤 되면 닿는다고 그럽니다. 물론 그중에는 악령도 있을 거고 도둑놈도 있을 가고 갖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수레가 멈춰있었던 곳이 그 무덤가였던 모양이라. 아이가 잠을 자는 사이에 이 악령들이 사람들을 잡아먹을려고 나오고 있는데, 아이를 보고 잡아먹을려고 그럽니다. 한 악령이 아이 발을 탁 잡으니까 아이는 습관적으로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하는 거라. 악령들이 그 소리에 깜짝 놀랍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뛰어난 분인가 하는 것은 그 무리들도 충분히 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귀의한 부류들을 해치는 것은 자신들에게 나쁜 과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아, 이거 우리가 잘못했다. 뭔가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나쁜 과보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게 됩니다. 왕이 사는 왕궁으로 들어가서 황금으로 된 접시를 가져와가지고 거기에다가 왕이 먹는 음식을 받아와서 그 아이에게 먹입니다. 아이의 부모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아이에게 먹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놀래니까. 그 아이는 자다가 부모가 깨워가지고 그냥 밥을 먹고 그냥 부모 옆에서 편하게 잔 거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데 그 다음날 돼서 왕궁은 난리가 난 거라. 왕의 접시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래서 찾아보니까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거라. 왕이 물어보거든. 너 어떻게 이 접시 가지고 있었어? 나는 몰라요. 그냥 밤에 자는데 엄마 아버지가 와가지고 밥을 먹이기에 밥 먹고 그냥 잤어요. 부모들은 그럽니다. 아닙니다. 나는 소 찾으러 와가지고 성문이 닫혀가지고 아이한테 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는 거라.

그런데 그 접시에 글귀가 써져있는 거라. 이 야차들이 혹시 이 아이한테 해가 가면 어떡할까 싶어가지고 글귀를 적어놓은 거라.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내가 밥을 먹였다 하면서.

그러니까 왕이 놀랜 거라. 어떻게 야차가 그 악령이 의미도 모르는 「나모 붓다야」 하는 것 "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 하는 한마디 한 것으로 인해가지고 잡아먹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 아이에게 먹을 걸 주면서 보호해줬을까 하는 거라.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부처님, 그게 가능합니까?” 「나모 붓다야」만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다른 거 해도 똑같이 뭔가 나를 보호해주는 것들이 있습니까?

 

가끔 여러분들도 그런 거 있습니까? 뭔가 나를 위험으로부터 탁 보호해준다는 느낌.

스님은 순간순간 그런 것들을 많이 겪어봅니다. 뭔가 가려고 하는데 못 가게 해. 그런데 실제로 갔을 거 같으면 뭔가 사고가 났을 거라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겪습니다.

또는 뭔가를 하고 있는데 뭔가 뒤에서 자꾸 미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거 안 하고 싶은데 탁 가고 나면 이상하게 좋은 일들이 거기에서 탁 생긴다든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뭔가 나를 지지해주는 그런 것들.

 

그래서 그걸 물어본 거라. 그런데 사람이 갑작스럽게 살다가 직장 잘 다니다가 어느날 이상하게 직장 다니기 싫어가지고 직장을 탁 그만두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래가지고 백수생활하다가, 백수생활하면 가정에서 누가 좋아합니까? 이혼 당해가지고 쫓겨나가지고 길거리 헤매고 부랑자 같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경우도 있고.

 

그런데 왕이 물어보는 것은 그건 거라. 뭔가 급작스럽게 나를 도와주고 나를 방해하는 뭔가가 있느냐는 거라. 그런 것이 있는데 그걸 「나모 붓다야」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런 것들로부터 보호가 되느냐는 거라. 그거 하나면 되느냐는 거라. 아이는 그렇게 됐으니까.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거 하나만 가능한 게 아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만약에 그 하나만 가능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아마 부처님을 신격화하는 일신교로 빠졌을 거라. "나를 믿을 거 같으면 천국에 간다" 하는 얘기하고 꼭 마찬가지 얘기가 되니까.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 뿐아니라 「담마에 귀의한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다. 또는 「상가에 귀의한다」 해도 그게 가능하다.

또는 마음속에서 항상 자애의 마음을 품고 자애의 마음으로 살아가도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또는 우리 출가하는 스님들이 항상 출가할 때 받는 게 뭐냐하면, "께사(kesā 머리카락), 로마lomā 몸털), 나카(nakhā 손톱), 단따(dantā 이빨), 따쪼(taco 피부)" 그거 외우거든. 머리털부터 해가지고 이빨 피부 이런 것들을 관찰을 하라는 거라.

머리털이 깨끗한가? 이빨도 깨끗한가? 그러니까 몸의 서른두 가지를 관찰하면서 아, 몸은 깨끗하지 않고 항상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할 것이 어느 것도 없다 하면서 집착하는 마음을 떨쳐주기 위해서 그런 걸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몸의 서른두 가지에 대해서 부정한 것들을 관찰하면서 몸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을 여의는 훈련들을 하더라도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또는 모든 것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나가는 사띠 알아차림을 하더라도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실제로 그렇다는 거라. 그렇게 하더라도 급작스럽게 뭔가 나를 방해하고 나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고 하는 그런 것들로부터는 보호가 된다는 거라.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재산이 갑작스럽게 소실이 된다든지, 아니면 목숨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한다든지, 그런 것들로부터 보호가 된다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 어디에도 부적으로 인해가지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그런 급작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막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이 좋은 부적이 있는데 왜 엉뚱한 부적들을 자꾸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게 이것의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쉽게 말하면 불교도에게 부적은 맑고 깨끗한 마음이라는 거라. 붓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들, 담마 상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도 선한 마음들을 계속해서 일으키도록 한다는 거라. 수행하는 것도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선한 마음을 계속 일으키는 것이고, 몸의 서른두 가지 부정한 것들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도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선한 마음을 계속 지니도록 훈련하고 선한 마음을 계속 지니도록 할 거 같으면 그것이 부적이 되는 것이지 다른 외부적인 어떤 것들이 부적이 될 수는 없다는 거라.

 

부적이 꼭 종이에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어떤 사람은 가끔 보면 차에 부처님 그림이라든지 염주를 이렇게, 태종사에 있을 때 참 많이 괴롭힘당했습니다. 새 차 뽑으면 꼭 와가지고 “스님, 거기다가 실하고 염주로 하는 의식 좀 해주십시오.” “그거 쓸데없는 겁니다. 조심해서 운전하면 됩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어. 아무리 해도 안 돼. 그럼 나한테 안 되니까 또 다른 스님한테 가서 끝끝내 그걸 하고 가는 거라. 나는 끝끝내 그걸 안 해줘. 그래서 저 스님한테 가면 까칠해갖고 해주라는 거 해주도 안 하고. 내가 뭐 까칠하고 싶어서 하나. 안 되는 걸 해달라고 하니까, 그걸 해줄 수가 없는 거니까 그러는데, 그거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것보다는 주의깊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운전하는 것이 오히려 운전하는데 앞에서 뭐 달랑달랑하면서 운전 방해를 안 받고 오히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방해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업의 작용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얘기를 한 겁니다. 작용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보통 한 네 가지로 크게 나눕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난 것은, 죽음의 순간에 여러분들 다음생을 결정짓는 것은 보통 네 가지로 크게 구분합니다.

 

크게 중한 것들이라 할 때 중한 악업을 지었든지 중한 선업을 지었든지, 그러니까 크게 뭔가 선한 일을 했든지 크게 부모를 죽이든지 뭘 했든지 크게 중한 업을 지었을 때 그래서 '중업'이라고 합니다. 중업들이 그다음생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되는 것들인데, 상가를 해치는 행위들, 요즘 참 많이들 합니다. 인터넷에서 하든지 아니면 뭘 하든지, 그냥 스님들 죽일놈 살릴놈 하고 하는 거라. 또는 어느 스님을 비방해가지고 그걸 다른 스님한테 비방을 해가지고 그 스님하고 다른 스님하고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거라.

그걸 파화합승이라고 합니다. 스님들끼리 화합해서 살도록 해야 되는 게 의무인데 오히려 그걸 파해버리는 거라. 부수어버리는 역할들을 하는 거라. 그거는 굉장히 큰 업 중에 하납니다. 그런 것들이 다음 생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잘못된 견해를 지니는 것.

한국불교에 대해서 얘기할 것 같으면 범아일여, 아주 나쁜 사견 중에 대표적인 겁니다. 뭔가 나가 있다고 하는 견해. 그걸 불성(佛性)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진아(眞我)라고 하든지 뭔가가 특정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 불교적인 견해하고는 정면으로 완전히 다른 것들입니다. 그와 같이 아주 나쁜 견해, 사견을 지니는 이런 것들이 다음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그것 말고도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일으키는 마지막 생각, 또는 그전에부터 쌓아왔던 습관들로 인해서 그 습관화된 업들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것들 임종 순간에 뭔가 보인다고 그러죠? 천상이 보인다든지 악마가 보인다든지 그런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니밋따들 그런 것들도 일어나겠죠.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이 중업들이라는 거라. 크게 뭔가 업을 저질렀던 것들 그런 것들이 그다음생을 거의 좌지우지 하다시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받는 생을 '금생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업의 작용면에서 맨 첫 번째가 '금생업' 이라고 합니다. 그 금생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업을 받고 태어났으면 그 업대로만 할 거 같으면 만약에 지금 현재 유산자(?) 그사람이 받은 유전자로 인해서 곰보로 태어난다든지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태어나서 몇년간 수명을 산다든지 그게 딱 정해져 있게끔 됩니다. 그게 금생업이라고 합니다.

 

작용적인 면에서 그런 '금생업'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그걸 지탱해주는 '지탱업'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탱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하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 이거 하기 싫은데’ 하는데도 뭔가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불현듯이 탁 일어났을 경우 그런 것들이 지탱업이 일으키는 행위들이라는 거라. 그렇게 해서 그 일을 하게 되면 좋은 결과들이 있기도 하고,

 

그와 반면에 '방해업'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든지 아니면 재난을 당한다든지 뭔가 갑작스럽게 아무런 이유없이 변화를 일으킨다든지 이런 것들이 방해하는 방해업들이 작용을 하는 거라.

 

그래서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지탱업하고 방해업들입니다.

태어난 업은 우리가 어쩔 수가 없는데 지탱하고 방해하는 것들은 우리가 하는 행위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다는 거라.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할려는 의욕들은 강하게 일어날 거고 그다음은 지탱업들은 자동적으로 생겨나게 됩니다. 또는 방해업들이 생겨나더라도 내가 선한 마음을 지니고 정신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방해하는 업들이 그것들이 나타나지 못하게끔 하는 거라.

 

또는 작용적인 부분 네 번째가 '살해업'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갑자기 죽음을, 자살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그와 반면에 그런 업들이 작용을 하더라도 그것들을 어떻게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이것들을 좌지우지 할 수가 있다는 거라.

이 몸을 받아서 태어난 업은 내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탱하고 방해하고 살해하고 하는 업들은 내가 얼마든지 지금 하는 행위에 따라서 바꾸어나간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업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상 스님이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내가 살인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파리를 죽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선한 업들을 더 많이 쌓고 그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이것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라.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일어날 때 일어나지 못하면 이미 그것은 업으로써의 영향력은 사라져버리는 거라.

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영향력이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 효력이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 업은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걸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기유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결과를 낼 수 없는 업.

그걸 아호시 깜마(ahosikamma)라고 그럽니다. 아호시(ahosi)가 Be동사의 과거형입니다. 그러니까 '있었다' 라고 하는 건데, 그걸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행위에 대해서 결과가 나타나버렸고 그 나타난 것으로 인해서 사라져버렸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결과를 나타낼 시점에 그 결과가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효력이 상실돼버린 것들입니다.

 

아까와 같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는 행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는 업이 발생을 했는데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거라.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기유업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걸 사실은 모르고 있는데 그렇게 넘어가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그런 기유업들은 내가 충분히 피할 수가 있게 되는 거라. 부적이 아니라도.

 

그게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아까도 얘기했지만, 삼보에 대한 믿음을 확립하는 것, 자신의 몸에 서른두 가지 부정한 것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 자애의 마음을 지니는 것, 그리고 항상 모든 행위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

그래서 부처님은 "그 여섯 가지가 자신을 방해하고 지탱하는 업들을 효력을 상실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에 하나의 결과가 난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의 행위에는 무수한 결과들이 나올 수도 있고, 또는 그 결과들이 나타나지 않게끔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 잘하고 아라한이 아니라도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했거든.

“흙을 한 주먹 쥐어가지고 이 흙이 많느냐, 이 대지에 흙이 많느냐?” 이 손안에 쥔 흙은 그것에 비하면 진짜 얼마 안 되는 겁니다. 그때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이 손안에 쥔 흙과 마찬가지로 예류과에 들 거 같으면 네가 받아야 될 업은 이것밖에 없다는 거라. 네가 실제로 받아야 될 업은 이 대지에 있는 흙만큼 많은데 결과를 낳아야 될 업들이 이마만큼 많은데, 다른 건 다 효력을 상실해버린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일곱생 이내에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게끔 된다는 거라.

 

아라한이 될 거 같으면 그런 업들은 다 효력을 상실해버립니다. 그럼 딱 남는 것들은 뭐냐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탱해주는 업과 방해하는 업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부처님도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 거고, 어쩔 수 없이 부처님도 발에 상처를 입게 되는 거고, 그것들이 나타날 시기가 돼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게 되는 거라. 또는 아라한인 목갈라나 존자도 과거 전생에 지은 업들로 인해서 그게 방해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몽둥이에 맞아서 죽는 일도 있게 되는 거고,

그렇지만 업은 이미 다 상실돼버렸기 때문에 업을 쌓는 일은 없어요. 저 분들은.

그래서 아라한이 됐든 아라한이 아니되고 범부중생이 됐든 지탱해주는 업과 그리고 방해하는 업들은 자기 스스로 조절도 가능한 것이고, 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되는 것들이 있다는 거라.

 

그러면 보통 어떤 일들이 뭔가 이루어지는 것들은 내가 태어난 업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고, 지탱해주고 방해하는 업들로 인해서 뭔가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럼 그걸 조절하고 지금 나타나지 않게끔 만들고 하는 것들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여섯 가지라는 거라.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라. 그거 이외에 다른 것들이 이것들을 없애고 나타나지 않게끔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참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 오히려 불안의 샘을 더 강화시켜주는 역할들을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항상 여섯 가지를 항상 마음속에 지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번에 얘기한 것들의 포인트는

• 불교도에게는 미신·점 등은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여섯 가지의 길 그게 불도입니다.

• 불도의 실천은 최강의 부적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 불교도의 인생은 순조롭습니다.

• 불교의 실천에 익숙한 인생은 해탈로 향합니다.

그러한 실천에 익숙한 인생은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해탈에 이르기도 하고, 인생도 순조로워지고, 또 다른 외부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될 필요성도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마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여섯 가지, 그래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실천방법들을 열심히 자꾸 닦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수행자 질문 : 진언은 어떻습니까?

스님 답변 : 진언은 저번에도 그런 얘기 했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진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거는 주술과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내용을 알 때, 그 의미들을 알 때, 그리고 마음에 진언 게송들을 외울 때, 자애의 마음들을 지니고 할 때, 그럴 때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모르는 진언이다, 그것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인도 주술사 같이 그런 것들을 믿고 해? 말도 안 되는 것들이라. 진짜 의미를 모르게 한다? 부처님은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 것이 어디 있어? 그거는 진짜 의미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내용을 알지 못하게 하고 내용을 모르는 진언들, 만다라 같은 그런 것들은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나물을 다듬다 보면 벌레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거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밖에 화단에 살아라고 채소잎하고 같이 던져주거든 예. 아파트니까 높은데 사는데 밑에 화단으로 던진단 말입니다. 그런데 물이 있어야 살고 뭐가 있어야 살텐데, 어차피 죽을 거 아닙니까? 아파트에서 그걸 키울 수도 없고, 그거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고, 그런 것도 살생업이 될까요?

 

스님 답변 : 채소를 다 먹을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채소잎 하나를 떼서 같이 던져주면 됩니다. 그래서 그 채소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분명하게 살게 되는 거고.

그리고 살생업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는 것이지, 그래서 그것 가지고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단지 욕심부리고, ‘나는 모르겠다’ 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고 던진다는 것은 죽으라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있습니다. 아까 업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축생들이나 이런 부류들은 어떨 때 갑작스럽게 일찍 죽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히 벌레 같은 경우에는.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그 세계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탱해주는 업이 작용해가지고 빨리 죽음을 맞게 하는 경우들도 있어요.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좋은 작용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바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버릴 것 같으면 그건 내가 살생업을 짓는 것이고,

오히려 일정 부분은 거기 살다가 그리고 자신의 먹이가 떨어져서 자기가 죽음을 맞게 될 때, 다른 먹이가 풍부했을 때보다 빨리 죽는 것은 있지만 그렇게 죽음을 맞을 때는 어떤 경우에는 그게 그 축생에게는 지탱업이 작용을 하는 것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그보다 더 좋은 조건들로 태어날 가능성들이 더 커지는 것이죠. 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