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악에 대한 저항력은 자애를 바탕에 둔 지혜이다. (20151016.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2. 27. 20:07

https://youtu.be/6bHVEm97gvU

* 악에 대한 저항력은 자애를 바탕에 둔 지혜이다. (20151016. 대구)

 

혹시라도 스님들한테 뭔가 까티나 가사든지 아니면 다른 때 공양올리고 싶을 때, 아래 것은 가사 밑으로 내려오면 안 돼요. 가사 밑 밖으로 보여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한국에 그런 것이 잘 없습니다. 그리고 밑에 것들이 어떠한 경우든지 안에 있는 것들은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벌어지면 안 되고, 몸에 붙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밑에 거는 가장 좋은 게 뭐냐면 양말 긴 거 있잖아. 요만큼 올라오는 거, 그거 좀 두꺼운 거 신으면 그런 것이 오히려 훨씬 좋아.

괜히 한국식으로 바지를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이걸 어떻게 만드느냐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들 하지 말아라는 거라. 거 왜 타이즈 같은 거 두꺼운 거 그런 것도 있고, 가끔씩 그런 것도 나오더라고. 전에 사서 나도 지금 가지고 있는데 다리에 끼우는 토시 같은 거 그런 것도 괜찮고, 그리고 신발 같은 것도 되도록이면 가죽으로 된 거 그런 거는 하지 말아. 그거는 별로 따시지도 않고 뽄은 날지 몰라도 되도록이면 레자? 레자로 만들어져 안에 털들어 있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따뜻하지.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착용하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할 거 같으면 자꾸 밖에 형태만 찾게 되는 거라.

 

위에 옷도 마찬가지, 스님들이 가사를 홀쳐 입어야 되거든. 홀쳐 입을 거 같으면 카라가 있는 것들은 카라가 밖으로 삐지고 나온다는 거라. 그래서 카라가 있는 것은 보기 싫고, 그리고 옷도 위에 옷도 팔 같은 데가 이렇게 우리 한복 식으로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이게 홀칠 때 안 홀쳐져. 그리고 그거는 따뜻하게 하기 위한 것들은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요. 따뜻하면 되는 거지, 뽄질려고 하면 안 돼. 뽄질 것 같으면 아예 환속해가지고 나가지 뭐하러 이 옷 입고 살아?

추운 지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을 입어야 됩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되는 네 가지 물품 또 여덟 가지 물품 거기에 속하지는 않는데 추울 때는 빵모자라든지 양말들 이런 것들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어야 됩니다. 입어야 되는데 뭣 때문에 입는가 하는 것들을 잘 생각을 해야 돼. 그걸 목적에 벗어나버리게 할 것 같으면 그건 안 되는 거라.

 

자! 오늘은 「악에 대한 저항력은 자애를 바탕에 둔 지혜이다.」 하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독감백신 맞았어요? 안 맞았어요? 요즘 나이드신 분들 공짜로 준다든데? 나이드신 분들은 저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맞는 것이 좋다고 그럽니다. 왜 독감백신을 맞을까? 독감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거죠? 독감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에 저항할 수 있게끔 하는 힘들을 키워주는 겁니다. 그게 나이가 들면 힘이 약하지. 그래서 맞는 것이 좋다 하고 그렇게들 얘기합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악한 것들이 뭔가 나에게 들어올 때 그거하고 싸워가지고 이길 수 있는 힘들은 뭐로 가지고 할 것이냐는 거라.

악에 물들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끝머리에도 나와 있지만 손가락에 상처가 나지 않은 사람은 독을 만지더라도 독이 내 몸에 침투하지 못합니다. 손가락에 상처가 있을 거 같으면 독을 만지면 당연히 내가 독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상처가 없는 것은 독에 대한 저항력이 형성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물들지 않게끔 하는 게 가장 좋은데, 않게끔 하기 위해서 그런 저항력들을 자꾸 키워야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애만 가지고 저항력이 커질 것 같으면 참 좋은데 이게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 자애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모든 것들을 행하면 되긴 되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 가지고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집착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갈애들은 언제든지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저항력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지혜인데, 모든 것들을 지혜롭게 생각할 수 있고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돼야 되는데 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자애가 바탕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지혜도 나쁜 방향으로 쓰이게 되는 거라. 꼭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그 공부를 유용한데 쓰면 좋은데 나쁜데 쓰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자애를 바탕에 둔 지혜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개발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설혹 악한 것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물들지는 않는다는 거라. 우짜면 될 꼬,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돼요?

 

부처님 당시 때 꾹꾸따밋따라고 하는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꾼에게 시집간 여자분을 비유해가지고 이 얘기를 부처님이 설한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 꾹꾸따밋따를 비롯한 아들과 며느리들은 다 예류과에 이르렀는데, 그 꾹꾸따밋따의 아내되는 분은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부처님이 얘기를 안 하거든. 그래서 오히려 뛰어난 사람은 꾹꾸따밋따의 아내 같은데 부처님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내가 얘기 안 한 것은 예류과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예류과에 이르고 있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인도를 해주고 또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은 꾹꾸따밋따의 아내입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 얘기를 합니다. "손가락에 상처가 없으면 악에 물들지 않는 거와 같이 자애를 바탕으로 한 지혜가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악에 물들지는 않는다"

그 일화를 부처님이 소개를 하면서 얘기를 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될꼬? 자애 개발은 꿋꿋하게 할 수 있다고 치자. 어쨌든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마음 먹어서 항상 ‘내가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뭐 이렇게 자애를 계속 형성을 하고, 모든 것을 할 때 말을 할 때도 자애의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말을 안 할려고 하고, 행하는 것도 자애를 가지도록 하는 거고.

 

자애는, 스님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태국에 있는 은사스님을 생각하면 멧따가 형성이 많이 돼. 그런데 한국에 있는 은사 스님을 생각하면 까루나가 많이 형성이 돼. 두 스승이 똑같이 멧따와 까루나 자비를 형성하게끔 만들어주게 됩니다. 내가 도움을 많이 받고 그 스승을 생각하니까 너무 좋거든. 그럴 때는 멧따가 형성되기 쉽고, 또 한 스승을 생각했을 때는 내가 못해주는 게 많고 스님이 조금 더 바른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들고 그래서 옆에 모시고 있지 못해서 참 미안하다 하는 마음이 들고 이럴 경우에는 까루나가 형성이 되기 쉬운 거라. 그런데 두 스승이 공통적으로 참 훌륭한 분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멧따와 까루나가 형성이 될 때는 그런 훌륭한 덕성들 성품들이 바탕이 됐을 때 그것이 형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형성하기가 참 쉬운 조건을 타고 난 건 틀림없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자비가 있다고 해가지고 모든 것들을 지혜롭게 해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뭐로 가지고 지혜롭게 해나가게 될까?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생각할 줄 알고 모든 것들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게 만들어져야 됩니다. 그럴려면 진짜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설렁설렁한다? 그러면 이 사회는 여러분들을 그냥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됩니다. 사회 자체가 그렇게 형성돼있습니다.

한번 봐봐요. 좀 더 이윤을 많이 내려면 거짓말 안 하고 좀 더 많은 이윤을 낼 수가 있는가? 또는 남들에게 남들이 싫은 마음이 들지 않게끔 해갖고 이윤을 낼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것들인가. 그거 못하면 사회에서 자꾸 뒤쳐지게 되는 거고 그런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자기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해서 사회에서 용납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둑질했으면 잡혀들어가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남의 소득을 도둑질하는데도 정당화되면 그건 사회에선 정당화되는데, 개인이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그냥 잡혀들어간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사회자체는 악에 물들어져 있지만 개개인이 악에 물들 거 같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처분들을 받게 된다는 거라. 어찌 살아야 되느냐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개인이 그렇게 악에 물드는 것들을 사회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뿐아니라 불교에서도 용납하지 않는데.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물들지 않게끔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자애를 바탕으로 한 지혜를 빨리 개발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 악으로부터 적어도 자기 자신은 보호해야 되는 거라.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사회가 풍요하게 만든다? 우리 학교 다닐 때 그랬거든. 이 한 몸 바쳐가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내가 죽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짓이라.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바른 건데도. 자신에게는 행복이 없어져버리고 이로운 게 없어져버리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은 행복한다? 세상에 그런 것들은 없더라는 거라.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을려고 그러고. 얼마 전에, 한 몇년 됐네. 그렇게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은 보상금 준다 해가지고 연락이 왔더라고. 내가 보상금 받을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 필요없다. 또 내 혼자 지금 세대주로 돼있으니까 요즘은 동사무소에서 쌀을 준다고 그러네. 그러니까 독거인이라 독거인. 그래서 쌀을 준다고 그러니까 나는 쌀 부족 안 하니까 나에게는 줄 필요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게 뭐냐면 그것들이 없어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런데 그게 필요없는데 필요없는 것을 왜 가지려고 그러는데? 만약에 돈 몇푼 받았다, 그러면 그것 가지고 내가 뭘 써야 될지 고민해야 되는 거고, 뭐 엉뚱하게 쓸 수도 있는 거고, 그거 또 지켜낼려고 고민해야 되는 거고, 왜 괴로운 짓을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것도 어차피 그 돈도 언젠가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지금 그게 필요하지 않으면 그거 안 받으면 돼. 필요할 때 생기면 또 그거에 맞게끔 쓰면 되는 거고.

그래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이 그냥 형성된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면 되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바보같이 왜 주는데도 그걸 안 받느냐고, 당연히 받아야 되는 건데 왜 안 받느냐고 그럽니다. 그거는 사회적인 얘기인 거고, 부처님 제자나 출가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렇질 않다는 거라.

 

물론 그걸 받아가지고 좋은데 쓰면 될 거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이 좀 짧았나 하고 마음을 먹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참 잘했다 싶은 거라. 적어도 그런 괴로움으로부터는 내가 스스로 해방돼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즉각적으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는 뭐냐면 그 정도의 지혜가 형성이 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라. 평상시에 꾸준하게 연습해야 돼.

 

모든 것들을 보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지혜로써 보게 될 때 그게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 수행해가지고 무슨 지혜단계 올라가고, 무슨 지혜단계 올라가고? 그거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수행할 때 얘기라. 그래서 어느 단계까지 그런 지혜가 올라갔다 하더라도 다시 알아차림이 없으면 다시 또 떨어져버리는 거라. 어느 단계 이상으로 넘어갈 거 같으면 그것은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쭉 가는데, 그 단계까지는 끊임없이 반복을 하게 되는 거라.

 

수행에서도 반복을 하게 되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그것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선업공덕 지을 거 다 팽개치고, 자신이 해야 될 거 다 팽개치고, 그거 얻을려고 수행해서 어떤 지혜 얻을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는 거라. 어떨 땐 내가 봤을 땐 참 한심해.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서 얻어지는 지혜는 그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부분을 항상 명심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일곱 가지로 얘기를 좀 할게요.

 

여러분들 스님한테 궁금한 거 잘 질문합니까? 잘 안 하죠? 그거 해야 됩니다.

지혜가 형성돼서 모든 것들을 지혜롭게 보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의문들이 생겨나는 것들을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것들은 항상 스승들에게 자꾸 질문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태국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태국에 처음에 계를 받고 나서 몇년간 은사스님 시봉을 했어요. 은사스님 시봉을 한 게 뭐 때문에 시봉을 했느냐면 다른 애들은 계를 받고 나서 내몰라라 하고 그냥 자기 처소에 가서 수행을 하든지 이리 하는데, 나는 하기야 뭐 의문나는 것도 많았으니까 그렇지. 새로운 것들을 봤으니까. 나는 자꾸 스승님한테 가서 이게 뭐냐, 저게 뭐냐, 자꾸 질문을 해쌌거든. 그러니까 찾아오는 것도 귀찮고 하니까 너 그냥 여기 있어라. 내 시봉하면서 마음껏 질문해라.” 그러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 덕을 굉장히 많이 봤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까 인제는 그렇게 질문 안 해도 내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진리에 대한 것들을 그리해야 되는데, 세상살이에 대한 것을 스님한테 물어보면 그거는 스님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사회생활을 해봤어, 뭘 해봤어? 아이를 어떻게 키웁니까?? 뭘 어쨉니까? 아이를 낳아봐야 뭘 알지. 사회생활을 할 때는 뭘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면 그건 경전에 비추어봐서 그렇게 얘기해주는 것이지, 그것은 그렇게 따랐을 때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해주는 것이었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경험 안 된 것들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대신에 그 진리에 대한 것들은 몸소 직접 체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자꾸 질문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이 일은 참 잘하면서 자신의 주변 정리는 참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몸도 잘 안 씻고, 어떨 때는 주변 보면은 주변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많고, 또 어떨 때 보면 저 사람들 곁에 꼭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이 생활하는 것을 보면 밖에서는 잘하는데 집에 가보면 돼지 마굿간 같이 이렇게 돼 있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마음에서 깨끗함을 유지해야 됩니다. 주변에 자신에게 이익된 거라든지 아니면 자신이 일하는데 편리한 사람들만 계속 있어가지고는 안됩니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바른 진리로 이끌어 줄 사람, 그리고 같이 수행할 사람, 그리고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자꾸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를 얻을 될 방법이 없어. 여기 선원이 하나 있지만 여기 선원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사람이 있어? 몰라.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다행히 그걸 알아가지고 왔다, 왔다가 가더라도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보다도 서로 이용하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 같으면 그것도 나중에는 흩어져버리는 거라. 또. 조그만한 뭔가 자신에게 안 맞는 트러블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못견디고 그냥 진리따라 나아갈려고 하지 않고 그냥 또 돌아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게 두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올바른 알아차림, 올바르게 노력하고, 올바르게 집중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뭐든지 대상이 일어나면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한 번 알아차리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이 ‘아, 요게 어떻게 변하는가?’ 하고 계속적으로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알고 나면 끝나버리는 경우들, 또는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결과가 없는 거라. 수행할 때는 좋은데 수행 끝나고 나면 다른 것들은 힘들어 죽겠는 거라.

그거는 이 세 가지가 공통적으로 개발이 안 돼서 그러는 거라. 사띠와 위리야 그리고 사마디 이 세 개는 공통적으로 다 똑같이 개발되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개발되어질 때 현상의 성품들이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집니다. 현상의 성품을 봐야만이 지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 현상의 성품들을 뿌리까지 완전하게 보질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도 대상을 알아차렸다, 거기서 만족해버리면 안됩니다. 대상을 가지고 알아차려서 뭐할 건데? 여러분들한테 어떤 결과를 주는데? 알아차림만 있어가지고는 안 돼! 그것들이 변하는 성품들을 볼 수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 대상들이 집중했을 때 다른 어떤 외부적인 자극이나 이런 것들로부터 보호막이 형성되는 것들도 해야 되는 거고, 적어도 그걸 해야 누가 싫은 소리를 할 거 같으면 마음속에서 호흡 '들이쉼' '내쉼' 하고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 소리가 전혀 안 들릴 거 아니라. 집중돼있으니까. 외부적인 자극이 오는데 그 자극에 내가 손가락이 베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냥 악에 물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일 거 같으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 세 가지는 반드시 개발을 하고.

 

그다음에 네 번째 자신에게 친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아닌 경우에는 되도록이면 피하라는 거라.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언젠가 프린트 한번 내줘서 한 게 있습니다. 그 조건에 맞지 않을 거 같으면 되도록이면 피하라는 거라.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거 떼고 저거 떼고 나니까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계속 이렇게 해도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잘하고 있는 거라. 없으면 어때서? 자기 혼자 그런 즐거움을 누리고 살면 되지. 그 대신에 떨어져나가면 나갈수록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대상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안 하니까 떨어져나간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여섯 번째 깊이 있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하나를 알더라도 그것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완전하게 알 때는 그때의 마음 상태는 항상 고요합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그래서 적정(寂靜)의 상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런 맛들을 자꾸 들여야만이 자신이 나가는 방향에 대해서 확신이 드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 그래도 수시로 무너지는 것이 내가 지금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마음입니다. 항상 자꾸 체크를 해야 됩니다. 그 마음이 지금 사라졌는가, 아닌가?

그래서 그걸 자꾸 마음을 강하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의지라고 하는 것은 바른 것들을 해나갈 때 그리고 내가 그런 것들을 행한 것들을 회상함으로 인해가지고 의지력은 생겨납니다.

가만히 한번 돌아보십시오. ‘오늘도 팔계를 잘 지켰다.’ 얼마나 마음이 좋아. ‘난 그래도 이번에 탁발도 하고 선한 일들을 많이 했다’ 그거 회상하면 마음이 참 좋은 거라. 그걸 자꾸 해야만이 이걸 할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지는 거라. 의지력이 자꾸 생겨나는 거라.

 

그래서 의지력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것들을 행한 것들이 있을 때 의지력이 생겨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 선한 것을 행한 것들이 없을 경우에는 의지력은 내가 일으켜 세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지속해나가지 못하는 거라.

여러분이 "지혜를 개발해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겠다" 그럴 거 같으면 반드시 그 의지력을 계속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나가야 되는 거라.

열 가지 바라밀을 자꾸 행하려고 하게 되고,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공덕이 되는 일들을 자꾸 하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것들이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실천하는 것들, 수행이라든지 이런 실천하는 것들이 자꾸 돼나가도록 해나갈 때, 그런 것들이 쌓여질 때 의지는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지속돼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반드시 해나가라는 거라.

앞에 여섯 개가 자꾸 쭉 이루어져 나가도록 의지력이 꺽여버려서는 안됩니다.

 

보통 이렇게 일곱 부분들을 계속적으로 해나가게 될 때 그 사람 마음에는 어느덧 지혜로운 것들이 형성돼나갑니다.

 

스님도 처음에는 그걸 잘 몰랐어요. 어떨 때는 수행하기 싫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은사스님이 어디 간다고 그럴 것 같으면 따라나가기 싫을 때도 있고, 그리고 거기 가서 어떨 때는 스님 법문하고 무슨 행사가 있을 때 다 아는 내용이다 싶어가지고 조불기도 하고, 그런데도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돼. 그렇게 쭉 해나와야 돼.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전혀 그런 게 부담이 되지를 않는 거라. '나'라고 하는 성품들이 점점 더 엷어져버리고 나를 내세울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적어도 다툼이 일어나지는 않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항상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써 자꾸 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 내가 인제 지혜가 형성됐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거라. 거기에다가 자애가 바탕이 돼 있다, 그럼 금상첨화인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 주위에는 전부다 바이러스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숨만 쉬었다 그러면 바이러스가 들어온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필터를 코에다가 만들어두지 않을 거 같으면 당연히 산소나 이런 걸 타고 같이 들어오게 되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주위는 전부 다 악에 물들어있을 거라. 악에 물들기 쉬운 조건이 되어 있고 여러분들을 유혹하기 쉬운 상태가 돼있는 거라. 그럼 반드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에게 필터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을 행한 것들을 사회에서 용서해주는 것도 아닌데, 여러분 스스로 그걸 만들지 못하면 그거 어떻게 되겠느냐는 거라.

 

그게 오늘 얘기한 「악에 대한 저항력은 자애를 바탕에 둔 지혜이다」 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상처가 없으면 독에는 해를 입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는 악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행하는 것들이 지혜를 바탕에 둔 선을 실천하기 때문에 행복도, 마음의 평안도 실현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 길을 쭉 가다 보면 괴로움을 넘는 해탈의 길로 나아게끔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에 대한 항체, 지혜라고 하는 저항력입니다.

 

인간의 사회는 다양한 악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사회가 악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개인의 악행이 변명으로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악은 불행과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선한 행위들은 행복과 평안을 만들어 냅니다. 악에 물들어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에를 바탕에 둔 「지혜」라고 하는 악에 대한 저항력이 필요합니다.

가볍게 듣지 말고 자꾸 몸에 그런 항체들을 형성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