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붓다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깜맛사까따 냐나) (20151113.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2. 30. 09:08

https://youtu.be/lvH8OowvGaw

* 붓다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깜맛사까따 냐나) (20151113. 대구)

 

여기에 깜맛사까따냐나 라고 하는 거는 교단 홈페이지에 옛날에 누가 질문한 게 있어가지고 그 질문한 걸 답하면서 올려놓은 겁니다. 지금 손을 조금 보는데 틀린 부분은 없는데 문맥이 조금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알아야되는 부분들이기 때문에 오늘 법문할 내용하고 맥을 같이 하기 때문에 같이 ... 하겠습니다.

 

활성 스님도 지식과 지혜라고 이렇게 두 개로 해가지고 해놓은 게 있는데, 그런데 보통 지식이라고 하면 세상에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쭉 습득하는 것들을 지식이라고 하고, 지혜라고 하는 것은 불교를 통해가지고 얻어지는, 실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을 지혜라고 얘기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꼭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꼭 세상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세상에 살고 있잖아. 출가한 거는 아니잖아. 출가하면서도 부처님 가르침 듣고 또 부처님 가르침 실천하고 그러면서 얻어지는 지혜도 있습니다. 그래서 꼭 세상적인 것만 지식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얘기할 깜맛사까따냐나라고 하는 것도 보통 경전 주석서에 분류해놓기는 세간적인 지식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출세간적인 지혜는 사성제의 진리를 분명하게 아는 것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바른 견해의 영역에 넣기도 하고.

그런데 꼭 깜맛사까따냐나를 그렇게 세간적인 것으로만 한정을 해놓지는 않고 수행을 통해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수행의 진행 사항을 얘기할 때 보통 한 다섯 가지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때 맨 첫 번째가 이 깜맛사까따냐나를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주제를 잡을 때 ‘붓다의 지혜’와 ‘세간의 지식’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세상의 지혜’라고 할까 해서 고민을 조금 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지금 설명하는 것이 깜맛사까따냐나의 경우에 ‘지혜’라고 하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겠다 싶어서 그렇게 해놔놘 것들입니다.

아마 이거는 좀 쉬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크게 무리할 것은 사실은 없습니다.

 

한번 봅시다. 살아가면서 태어나서 맨 먼저 부모님한테 뭔가를 자꾸 배웁니다.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하는 거를 계속 이렇게 배우고, 그런 의미에서는 부모님이 여러분들에게는 스승과 같다 하고 얘기를 하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부모님은 범천신과 같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범천신은 어떤 마음을 지닌 자들을 얘기합니까? 사무량심, 자·비·희·사 사무량심을 지닌 천신들을 얘기할 때 범천신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모님도 똑같다는 거라. 부모님도 그런 사무량심을 지니고 자식들을 키운다는 거라. 그래서 사실은 그 이후에 만나게 되는 스승들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맞는 부모님들이 더 큰 스승들입니다. 항상 여러분들은 그 생각을 해야됩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는 범천신과 같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존경하고 '까딴뉴따'라고 빨리어로 얘기하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뭔가하고 자꾸 생각을 해야됩니다. 물질적인 보답만 보답이 아니고 정신적인 성숙을 통해가지고 내가 사무량심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이 까딴뉴따에 해당이 됩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는 그런 것들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반적으로 부모님부터 해서 과거의 학교를 통하고 또 사회에 나와서 각각의 지식이나 이런 것들을 익혀와서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것이 필요한 것이기는 한데 꼭 그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외에 필요한 것들이 더 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불교, 부처님이 얘기한 가르침에서 필요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 여러분들이 일상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꼭 습득하고 알아야 되는 것들이 그거 말고 뭐가 있을까? 그걸 한마디로 얘기하면 사성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고·집·멸·도 하고 하는 사성제의 진리를 아는 것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러움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먹어버리면 즐거울 때는 아, 이게 즐겁다고 하더라도 괴로움으로 변해버린다 하는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즐거움에 탐욕을 해버리게 됩니다. 또는 괴로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괴로움이 변해서 괴로움이 바뀌어나간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으면 그 괴로움에 푹 빠져가지고 살아가기 힘들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괴로움들이 있는 것들을 무엇 때문에 왔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되는 거고, 그것을 탈피하는 방법들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런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스님들이 자꾸 얘기하는 것이 “수행해라. 수행해야만이 밖에서 접하는 정보들로 인해서 마음이 자극을 받을 때 그 자극받는 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적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누가 욕을 한다고 해가지고 금방 화가 일어나도록 마음이 반응을 해선 안되는 거고, 누가 나를 칭찬한다고 해가지고 금방 좋아하는 반응이 일어나선 안되는 거고, 그래서 그 반응하는 것들을 자꾸 맑히는 것들.

 

그것들이 뭐냐하면 그렇게 자꾸 직접적으로 반응을 하다 보면 괴로움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연결될 거 같으면 그 속에 빠져가지고 이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온다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어떤 경우든지 자기가 좋아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항상 자기에게 붙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괴로움이 싫으면은 괴로움 옆에 가기 힘들다는 거라. 다리 구부러져 있어봐요. 그거 싫으니까 다리 펴는 거고, 그런데 자기 주변에 계속 괴로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거라. 싫어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걸 탈피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 싫은 것은 아는데 그걸 탈피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이게 뭐 때문에 괴로운가 하는 것을 모를 것 같으면 그것도 문제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살아가면서 내가 평온하게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걸 부처님이 얘기한 지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프린트물) 보면 사성제를 얘기해 놓은 것에서 두껍게 글씨를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한마디로 얘기할 때 '사성제'라고 보통 얘기를 하는데, 왜 성스럽다, 고귀하고 성스럽다고 얘기하는가? 보통 빨리어로 '아리야 삿짜'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아리야 삿짜라고 하는 사성제가 고귀한 분이 가르친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부처님과 아라한들을 포함한 고귀한 분들이 깨달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든지 부처님을 포함한 아라한들은 고통을 넘어섰고 그리고 이 윤회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불교를 접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 고통스런 윤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들, 그걸 보통 해탈한다. 열반에 이르러서 해탈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인데 그분들은 그 길을 가서 그렇게 된 분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성제는 고귀하다.

왜 그러냐하면 그분들이 깨달은 것이 다 사성제이기 때문에. 과거 부처님들도 전부다 이 사성제의 진리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사성제의 진리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고, 나머지 제자인 아라한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리야- 성스러운 진리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진리 자체가 고귀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고귀한 진리라는 겁니다. 보통 진실과 진리는 분명하게 구분을 합니다. 진실은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어떤 경우든지 바뀔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흐르든 아니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이름 붙여놓은 것들은 불교에서도 크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중에 가장 으뜸이 되고, 그리고 가장 기둥이 되고 근본이 되는 것은 사성제 라고 얘기합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그 진리 자체가 성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중요한 부분, 이 사성제라는 진리가 여러분들을 성스럽고 고귀하게 인도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분이 있고 그 자체가 성스러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을 그쪽으로 데려가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남의 떡이 됩니다. 그림의 떡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그렇게 실천하면 나도 그렇게 성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사성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사성제를 이해를 못하고는 다른 것들을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 밑에 고·집·멸·도 이렇게 쭉 적어놨습니다. 마지막 도의 부분은 여덟 가지의 도- 팔정도로 그렇게 분류를 해놨습니다.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이고 여러분들이 닦아나가야 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적어도 부처님이 말씀한 이 길을 닦아갈려면 그 부처님의 지혜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 부처님의 지혜를 이해를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사성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 첫 번째 부처님의 지혜를 알기 위한 첫 번째가 깜맛사까따냐나라고 합니다.

 

보통 부처님의 지혜를 다섯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처음이 '깜맛사까따- -(kammassakatā ñāṇa)'라고 그럽니다.

쉽게 얘기하면 내가 저지른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받는다.

어제 누가 와가지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스님, 제가 지금 참회를 하겠습니다.” 뭐 때문에 그러느냐 하니까 부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오기 전에 자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였다는 거라. 그래서 불교를 아주 하찮은 것으로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도 하찮은 것으로 보고 스님들도 저 쓸모없는 인간들이라고 바라봤다는 거라.

내가 뭐 와서 직접 그걸 들으라고 했나, 뭐 자기 발로 와가지고 스님들 생활하는 모습들을 보고 그 생각이 완전히 바꼈어. 그래가지고 다시는 기독교 쳐다도 안보고 그냥 또 불교 공부하고 열심히 수행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과거에 자기가 스님들이나 불교에 대해서 욕하고 한 것들을 참회하겠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요. 진짜 참회할 거냐 하니까 진짜 참회한대. 그럼 이리 오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손을 탁 이리 대니까 왜 그러시녜. 내가 니 때릴라고 그런다 하니까, 왜 왜 때릴라고 하느녜.

잘못한 것에 대해서 뭔가 그 과보가 돌아올 것 같으면 그걸 달게 받는다는 생각을 가져야만이 그게 참회가 되는 것이지 잘못했다 하고만 하고 다시는 그거 안 저지른다고만 한다고 해서 그게 참회가 되느냐? 그때 인제 그분이 “아, 예”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참회가 아니구나 하는 걸 알았다고 그럽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참회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저지른 것에 대해서 뭔가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돌아온다고. 그럼 그거 지가 달게 받아야 되는 거라. 그건 내가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받는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내가 그전에 불교를 비방하고 스님들을 쓸모없는 인간들이라고 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거 아니라. 그럼 돌아올 거 같으면 그거 받아야지 어떡하겠어. 그런데 그거는 안 받고 싶은 거라. 인제는 생각이 완전히 바꼈으니까 다시는 불교하고 스님들 욕하고 그러지는 않겠다 하고 다짐을 하고 알리고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겁니다. 뭔가에 대해서 돌아오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조금 전의 일이든 아니면 먼 일이었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돌아오더라도 그것을 달게 받겠다 하고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부처님의 지혜 첫 단계는 들어갈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게 사실은 깜맛사까따냐나 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인제 부처님의 지혜 첫 단계라고 하는 거고.

 

그다음 두 번째 단계가, 그것을 나누는 '담마 와왓타-나 냐-(Dhmma vavatthāna ñāṇ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의 지혜가 어떤 것이구나 하는 걸 일일이 분석해서 분명히 그것을 아는 상태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지혜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머리가 탁 트이기도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다가. 이때까지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들이 잘못됐다는 걸 분명하게 탁 아는 거라.

만약에 스승의 손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것이 없다 하는 걸 탁 알았으면 어, 그러면 그전에 내가 뭔가 내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거는 뭔가? 그전에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부처님 가르침에서 아,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전에 것들 하고 분석을 해서 아, 그 전에 것들이 틀렸다. 아, 이것은 분명하게 진리다, 아니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수행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을 하다가도 대상들이 나타납니다. 대상에서 새로운 느낌들이 일어나면 그것에 그냥 쏙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거 같으면 아, 이 대상도 내가 집착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고 집착하고 있는 것을 탁 놔버려야 됩니다.

그것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 인해서 거기서 내가 분명히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들을 놓아버려야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도, 담마에 대한 지혜를 내가 분석해서 나아가는 길을 바르게 잡아가는 겁니다.

빛이 나타난다든지 부처님이 나타난다든지 아니면 항상 평정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든지 이런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다 보면 단계적으로 그런 것들이 쭉 나타나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게 좋은 줄 알고 그걸 또 잡고 있어요.

또는 선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그 했다는 마음을 다시 또 일으켜가지고 마음이 항상 좋은 마음 선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나타나는 열 가지 좋은 일들도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수행에서 일어나는 이런 것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들이고, 또 했으면 일으켜야 되는 것들이기도 하고 그렇지만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은 놓아야 되는데 그걸 하지 못하는 거라. 이게 끝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걸 안 놔도 되겠지.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닐 때는 분명하게 그걸 놓아버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이 쉽게 말하면 담마와왓타아냐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빳짜야- 와왓타-나 냐-(paccayā vavatthāna ñāṇ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과관계. 인과관계의 지혜를 분명하게 분석해보는 것.

아,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저것이 있게 되고, 또 저것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이것도 사라지게 되고, 원인·결과 원인·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게 나중에 수행에서 쭉 지나치면 깔라빠 있는 데까지 넘어가지고 과거의 것들도 전부다 회상을 하게 되어서 원인·결과 원인·결과로 쭉 연결돼 나가집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락카나 빠띠웨-다 냐-(lakkhaṇa paṭivedha ñāṇ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 가지 특성 무상·고·무아. 그 무상·고·무아가 생겨나는 것들,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때도 어떤 대상이든 무상 고 무아로써 보게 되는 것. 그런데 무상 고 무아는 자기가 잘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상한 특성을 잘 아는 사람이 있고, 고의 특성을 잘 아는 사람이 있고, 무아의 특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다 알 필요는 없고 한 가지를 알 것 같으면 나머지들도 마찬가지로 알게 됩니다.

무상한 것은 무상한 것을 보면은 그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것이 괴로움으로 어떤 것이든 무상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게 무상한 것들을 열심히 관찰하다 보면 그 속에는 어떤 것도 내가 없다는 사실을, 내가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아의 특성으로써 알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것이든 하나를 알더라도 나머지 두 가지는 동시에 알게 되는 그런 형태를 띱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현상들을 무상 고 무아의 특성으로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수행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대상을 보는 것들이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 그걸 무상 고 무아의 특성으로 자꾸 보게 됩니다.

저번에 개를 비유를 들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개도 그전에는 나를 반기다가 내가 아무런 해코지도 안 했는데도 나를 피하고 무서워하는 것들, 그런데 이 개에게는 뭔가 집착하는 것이 있다는 거라. 나를 해코지 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보는 것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아, 저것이 무상 고 무아의 특성으로써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런 걸 알지 못하고 그거에 탁 매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 참 불쌍하다. 빨리 저런 것들을 알 수 있도록 해줘야 되겠다 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닙바-나 빠띠웨-다 냐-(nibbāna paṭivedha ñāṇ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 내가 인제 열반을 체험했다. 그걸 분명하게 아는 것. 더 이상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 그래서 그때야 그렇게 마음이 듭니다. 아, 나는 더 이상 인제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단지 이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야 되고 먹어야 되고 잠을 자고 해야 되겠지만 그것은 이 몸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지만 더 이상 나는 업을 쌓지 않는다는 거라. 그리고 내가 더 이상 도달해야 될 목표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런 식으로 쭉 부처님의 지혜가 진행이 되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은 부처님의 지혜 중에서 맨 첫 번째 고리 깜맛사까따 냐나 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깜맛사까따냐나가 뭔지를 잘 모르겠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한 모든 것들은 업이 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업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무엇이든 전부 다 업이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그 업이 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딱 나눠집니다. 선한 업이 되고 어떤 것은 불선한 업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업이 하나가 이뤄질 때 동시에 불선한 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어요. 선한 업이 이루어지고 나서 그게 끝나고 나야 또 다른 불선업을 내가 만들든지 이렇게 되는 것이지 선한 업과 불선한 업이 동시에 만들어지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계속해나가야 되는 것이지 선한 마음을 한 번 일으켰다 해가지고 끝나버리고 안한다 해가지고 그 선한 업이 계속 지속돼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알아차리는 것은 선한 업을 짓는 겁니다. 알아차림을 계속 지속해나가야 알아차려 나가는 것이지, 그래서 알아차림을 계속 지속해 나가야만이 아, 내가 분명하게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띠와 삼빠자나가 동시에 병행돼서 일어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지 그것을 한번 알았다고 해가지고 거기서 끝나버리는 경우는 없다는 거라.

모든 것들은 업이 되지만 그 업은 선한 업과 불선한 업으로 반드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인제 여러분들이 두 번째로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될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는데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불선한 것인지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어떨 땐 사람들이 그걸 구분하지 못할 경우들이 있습니다. 정당화시켜버리는 거라. 내가 너한테 화를 내고 있는데 그건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불선업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걸 정당화해가지고 불선업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어떠한 것이든 탐·진·치에 속하는 것들은 전부 불선한 업입니다. 그 반대적인 것들은 전부 선한 업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걸 분명하게 구분을 하는 것이지 아, 그리고 이것은 탐심의 업이다. 이것은 진심의 업이다. 하는 것을 낱낱이 구분을 하게 되는 것이지 그걸 두리뭉실하게 한다든지 아, 이거는 불선한 업이라고 그냥 한다든지 아니면 이것은 불선한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든지 이렇게 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가 그 업을 지은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내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전부 내가 받아야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일단 내가 지은 거는 내가 받아야 되는 거라. 아무리 애 잘되라고 뭐라 했다고 하지만 그건 애의 일이고 내가 화를 낸 것은 내 거라는 거라. 그럼 화를 낸 것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받게 돼있다는 거라. 애가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거라.

그래서 분명하게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 것이라는 거, 내가 받아야 되는 것들이고 내가 그것은 책임져야 되는 것들이라고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수행을 통해서든 아니면 일상 세간적인 것들이든 그런 것들이 자꾸 깊어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붓다의 지혜 첫 관문의 문을 열 수가 있게 됩니다. 그게 깜맛사까따냐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밑에 쭉 설명을 해놔놨습니다. 그래서 업에 대한 것, 업은 심소라고 하는 겁니다. 심소이기 때문에 좋은 작용을 할 때도 있고 나쁜 작용을 할 때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 이런 것을 쭉 얘기해놨습니다.

 

그러면서 아까 부처님의 지혜 다섯 가지를 쭉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은 뭔가 하는 겁니다.

그게 마지막 페이지에서 일곱개로써 구분을 해놨습니다.

 

첫 번째, 올바른 진리를 아는 지혜있는 사람에게 반복해서 질문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꾸 탐구를 해나가야 됩니다.

 

두 번째,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주위를 청결하게 해서 자꾸 살려고 해야 됩니다. 더럽게 하고 있는 사람, 정리할 수가 없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세 번째,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알아차림을 지니고, 노력을 하고, 바르게 집중하고 그래서 이 네 가지가 균형을 맞추도록 해야 됩니다.

믿음이 지나쳐버려도 안 되고, 또는 집중하는 것이 지나쳐도 안 되고, 노력하는 것이 적어도 안 됩니다. 항상 균형이 맞춰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것이 자꾸 개발돼서 균형을 맞추도록, 그런데 어떤 경우든지 이 네 가지는 항상 존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든 일상생활을 할 때든 이 부분을 자꾸 개발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만약에 바른 길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 그건 내가 틀림없이 좋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믿고 그냥 해나가는 거라.

나쁜 거라고 할 거 같으면 그거 나쁜 결과가 온다는 거를 믿고 그냥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그리고 뭐든지 흐리멍텅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뭐든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마음이 고요할 때든 아니면 마음이 우울할 때든 노력하는 힘들이 없을 거 같으면 그거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뭐든지 열심히 게으름 부리지 말고 방일하지 않게끔 열심히 자꾸 노력을 해야 되고.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은 선한 방향으로 자꾸 할려고 해야 되고, 그리고 대상들에 대해서 자꾸 집중을 할려고 하고,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서 시작을 하면 그것을 끝까지 할려고 자꾸 해야 되고, 그런 것들을 자꾸 개발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지혜가 없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고 피하라.

지내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나쁜 방향으로 자꾸 몰고 가는데 왜 가까이 지낼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지혜있는 사람을 찾아서 근처에 살아가도록 하라.

한 일년 전인가 누가 서울에서 한 분이 내려왔어요. 그래서 거의 한 달 정도 계속 수행하고 법문 듣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어느 날 “스님, 스님 사는 옆에 어디 집 하나 얻어가지고 집을 옮길라 그럽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옆에 있어야지만 내가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 수행도 하고 그걸 따라가지 멀리 있으니까 서울에 있으니까 그게 힘들다는 거라. 한번 내려올라면 힘들어. 그건 맞아. 그건 맞기는 맞는데 출가한 사람 같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출가한 사람이 아닌데 모든 걸 팽개치고 와가지고 경제적인 기반이 되는가, 그리고 지금 해야되는 것들을 아예 무시해버리고 그리하는 것들은 아닌가, 그런 것들은 잘 살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조건들을 다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되도록이면 그 옆에서, 그 옆에 가서 살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자꾸 스님을 모시고 할려고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조건들이 충족될 때는 그렇게 옆에 있게 되고 모셔지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 여섯 번째, 깊은 진실한 것을 탐구할려고 해야 됩니다.

자꾸 여덟 가지 세간적인 것들에만 자꾸 따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나아가는데 윤회를 끊는 방향이 뭔가, 그리고 내가 나아가는데 선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서 그길로 자꾸 알아갈려고 하고 그 길을 갈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지금 사는데 급급해가지고 그것들을 팽개쳐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 올바른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선한 공덕들을 쌓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들이라는 거라.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들, 해탈하기 위한 것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목표를 잃어버려 놔놓으면 자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쪽저쪽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잊지 않도록 해서 진리를 구하는 마음들을 강하게 자꾸 내도록 해야 됩니다.

 

이 일곱 가지들을 적어도 해나가면은 부처님이 말한 지혜, 지혜의 길들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꼭 지혜의 길을 들어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는데 적어도 편안하게 그리고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생도 더 좋은 조건들로서 태어나게 되고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을 해서 세상적인 지혜, 세간적인 지식만 자꾸 얻을려고,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데 급급하게만 자꾸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 가지고는 항상 부족하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자꾸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아까 얘기한 다섯 가지 냐-나(ñāṇa)들을 단계적으로 밟아서 얻을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이 일곱 가지는 여러분들이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자꾸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프린트물로 준 깜맛사까따냐나는 페이지 수가 좀 되더라도 읽어보시고.

다음에는 부처님의 지혜 나머지 네 개 부분도 한번 정리를 해볼 생각입니다. 지금 이렇게 부처님의 지혜 부분을 한 차트씩 해가지고 한글로 나온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어가지고 그게 어떤 건지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회 될 때 언제든 그 부분을, 그런데 나한테 시간적인 여유를 줘야 되는데, 내일도 법회있지 모레도 있지 월요일도 있지 지속적으로 계속 있으니까, 어떨 때는 스님도 법회준비하고 또 법회하고 또 수행지도 하고 그거 하는데 급급해. 어떨 때는.

내가 해야 될 것들이 분명하게 있는데 나 말고 할 수 있는 분들이 많으면 좋은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고, 내가 해야 될 것들이 있는데 어떨 때 하지 못할 때는 아, 나한테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멀지 않은 시간에 요 부분들을 한번 정리를 해볼 생각입니다.

 

자! 오늘은 어쨌든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라 하는 의미로써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