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임종일화) (20151120. 대구)

담마마-마까 2021. 12. 31. 21:59

https://youtu.be/I_gZWkpsCN8

*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임종일화) (20151120. 대구)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저번에 이거 프린트물 언제 내준 적이 있든가요?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대구에서 한 건가, 어디서 한 거지? 내준적이 없어요? (수행자 : 아니 예. 스님한테 들었던 기억은 있는데..)

이거는 프린트를 안 해왔는데, 지금은 파일을 안 가져 왔는데, 나중에 끝나고 나서.

 

죽음이란 게 어떤 걸까? 보통 일반적으로 얘기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걸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죽음을 보통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얘기해요? 숨이 끊어지는 것.

또 죽음이란 게 어떤 것이 있을까? 죽고 나면 (수행자 : 싸늘해지고) 몸이 식고, 육근 오온이라고 하는 것이 제 기능을 못하는 거지. 의식할 수도 없고, 이 몸도 그냥 자연 상태가 돼버리는 거죠. 추우면 그대로 추워져버리고, 더우면 같이 몸도 더워지면서 팽창해버리는 거고, 오온이 무너져버리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보통 그렇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거는 여러분 이생에 시간이 다 됐다, 다 끝나버렸다는 것이지. 더 이상 이생에서의 시간은 없다는 거지.

그런 걸 보통 죽음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죽음을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자꾸 생각을, 여러분 앞에 남겨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자꾸 일으켜야만이 경각심을 가지고 자꾸 수행을 할려고 한다든지, 또 좀 더 좋은 공덕을 쌓고, 또 좀 더 바른 마음을 빨리 가지려고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번에 프린트물 거기에는 살아있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그 대신에 죽음은 반드시 죽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내가 얘기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그걸 항상 떠올리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스님들이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게 할 때 보통 말하는 것이 아홉 가지를 얘기합니다.

오늘 내가 얘기해드릴게요. 여러분들 필기할 수 있으면 필기하십시오. 그걸 항상 자꾸 읽어야 됩니다. 아홉 가지를.

 

첫 번째가 모두 죽어야만 한다고 숙고하는 것.

예외가 없다는 거라.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이 모두가 죽어야만 한다 하고 숙고 하는 것.

 

두 번째는 우리 수명은 계속하여서 감소하고 있다고 숙고하라.

수명은 늘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어쨌든 계속적으로 감소해간다는 거라.

 

세 번째, 그래서 우리 마음을 개발하기 위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숙고하는 것.

시간이 점점 나에게서 사라져가고 없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개발하고, 깨달음에 이르고, 좀 더 선행을 쌓고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 지금 주어진 시간 때 빨리 그것을 할려고 해야지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나중에 뒤에 미루게 될 것 같으면 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네 번째, 우리가 기대하는 수명은 불확실하다.

확정된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다가오기 때문에 수명은 불확실하다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죽음에는 많은 원인이 있다고 숙고하는 것.

어떤 원인으로 나에게 죽음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 많은 원인이, 그 한 가지가 나에게 안 닥친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느냐는 거라. 죽음의 원인은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진짜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병으로 죽어도 병도 가지가 많을 뿐 아니라 병만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요인으로 죽는다는 거라.

 

여섯 번째, 이 몸은 매우 깨지기 쉬운 유리장과 같다고 숙지하라.

몸은 금방 부서질 수 있는 것이지 이 몸이 단단하다고 생각하면은 고정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언제든지 몸은 깨져버리게 되고, 몸이 깨져버리면 당연히 의식은 달아나버리게 되는 거라.

 

일곱 번째, 우리가 소유하고 즐기는 것들이 죽음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고 숙고 하는 것.

내가 소유하고 있고 뭔가를 즐기고 있고 뭐 하고 있는 것들이 죽음에서 자기를 안 죽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거라.

 

여덟 번째, 우리의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들이 죽음에서 똑같이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가족들이든 뭐 어떤 것이든 나를 죽음으로부터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아홉 번째, 지금 상태에서는 자신의 몸조차도 죽음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다른 것보다도 자신의 몸, 자신의 몸조차도 자신의 죽음을 도와줄 수가 없다는 거라. 자기 것이라고 애지중지 한 것이지만 그걸 못한다는 거라.

 

이 아홉 가지는 항상 죽음에 대해서 숙고해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장례식에 가면 이렇게 번(幡)을 걸어둡니다.

옛날에도 우리나라 장례식 출상할 때는 번(幡)을 걸어가지고 가죠?

그 번(幡)의 내용들이 뭐가 있느냐면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걸 되돌릴 수 있는 거는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렀다 해가지고 그것을 과거로 되돌려가지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적어놓은 게 우리는 잠을 자면 깨어나는데

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뜰 일이 없어져 버린다.’

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뜰 일이 없어져 버린다고 딱 적어놓았어요.

그다음에 또 뭐냐면 살아날 조건은 사라져버린다.’

그다음에 또 누구든지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다음에 또 하나 중요한 게 죽음은 순서가 없다.’

번호를 정해가지고 하는 것들은 없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번에다 내용을 딱 적어놓습니다.

 

죽은 사람이야 그 내용을 볼 수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그 내용을 본다는 거라. 그래서 아, 나에게도 죽음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꾸 느끼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피해야 될 것이 아니고 받아들여야 될 것들입니다. 받아들이고 그럼 내가 죽기 전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될 부분이지, 무섭고 두렵고 한다고 해가지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여러분들 그런 거 잘 속이죠? 최고 많이 속이는 게 뭐 있어요? 인제 막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한테 “괜찮다. 의사 말 믿고 그대로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야.” 하고 당장 죽어가는 사람한테 손 쓸 방법이 없는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 사람이 해야 될 일을 자신이 하지 못하게 돼버리는 거라.

 

죽음의 순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 때 인식하는 것들이 다음생을 좌우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참 기독교 같은 경우 좋은 게 뭐냐 하면 마지막 죽을 때 되면 교인들을 불러가지고 찬송가를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아, 너를 하느님이 인도한다 하고 사람을 안심시켜 줍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사람들이 개종하는 일들이 많다고 그럽니다.

사실은 그게 맞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아, 내가 인제 나쁜데 가지 않고 하느님 있는데 간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끔 해서 죽음을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거라. 그래서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옆으로 간다는데 그렇게 죽음을 거부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는 거라.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게끔 해서, 그런 의식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불교권에서도 전부 다 그렇게 합니다. 항상 죽음 직전에는 항상 스님을 초청합니다. 스님이 가면 다른 신도들도 같이 가는 거죠. 그러고 거기서 게송을 독송해주고. 그리고 스님이 좋은 생각을 일으키게끔 자꾸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고, 그렇지않으면 나를 따라 해보세요 하면서 의식이 있으면 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가지고 편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게끔 해줍니다.

물론 니가 죽고 나서 부처님 옆으로 간다 그런 얘기는 안 하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거고. 기독교도들도 하나님 옆으로 간다 해가지고 자기가 지은 죄가 어디 가겠어? 하나님 옆에 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임종의 순간에 그렇게 편한 마음을 일으켜줄 수 있다는 것은 종교가 가지는 어떤 면에서는 특권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죽고 나서 스님들이 가서 뭘 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어불성설이라. 그러니까 한국에도 그런 부분은 빨리 좀 바꾸어야 돼. 그렇게 할려면 일반 재가자들이 그런 마음을 자꾸 일으켜야 되는 거라.

 

그걸 왜 보여주기 싫은 부분으로 자꾸 인식하려 하느냐는 거라. 자기도 죽을 거면서. 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은 자기에게 오지 않는다고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누가 지금 죽어가더라도 그 모습을 안 보여줄려고 그러는 거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런다고 해가지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거 되도록이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편안하게 임종을 맞게끔 해주는 것이 바른길이라는 거라.

그래서 만약에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 의사가 만약에 삼개월 동안 살 수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정직하게 그분한테 얘기해야 되는 거라. 너는 앞으로 삼개월 밖에 못산다. 딱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그 삼개월 동안 열심히 한번 살아 보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 다른 것이 없다는 거라.

 

그걸 스님도 체험을 한 게 진주에 있는 모친이 암선고를 받고 삼개월도 못산다고 했어요. 삼개월 산다고 의사가 판정을 내렸어요. 그러니 가족들이 어떻겠어. 오만 방법을 다 써볼라고 할 거 아니라. 방사선치료 뭐뭐 무슨 뭐더라 아무튼 그걸 할라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차마 내가 그걸 반대를 못 하겠더라고, 스님이라서. 그게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래서 모친한테 물어봤어요. 삼개월 밖에 못산다.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할 거 같으면 생명은 조금 더 연장을 시킬 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뭐 확 연장시키고 뭐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당신이 선택해라. 방사선치료 받고 다른 무슨 암 뭐 이렇게 하는 치료들 받고 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거 안 받고 삼개월 후에 돌아가실 건지 당신이 선택하시오.

 

그러니까 모친이 “스님, 그러면 삼개월 동안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 “다른 거 하지 말고 숨쉬는 것만 열심히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딱 결정을 내리기를 그러면 내가 치료 안 받고 어차피 죽을 거니까 나는 삼개월 동안 숨 쉬는 거나 열심히 관찰하면서 죽겠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잘했다 그랬어요.

그전에는 태국에 있고 했을 때는 만날 내가 만든 책들이나 이런 것들 보내주고 그랬는데 그거 건성으로 읽었거든. 아마 여러분도 꼭 마찬가질 겁니다. 지금 프린트물 내주고 있지만 그걸 벌로 읽지 그걸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할 거라. 그러니까 그냥 읽고 놓아버리고 마음은 물론 편안해지고 좀 더 좋은 일을 하려고 하고 그런 거는 하지만 내 지금 목전에 죽음이 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숨쉬는 거 알아차리고 하는 거 안 한다는 거라.

 

우리 모친도 꼭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불교를 접해와서, 그래서 다른 불교는 인제는 관심이 없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수행해서 요만한 것 이룬 것도 없었다고. 그런데 마지막 그 삼개월 동안 진짜 열심히 하더라고.

마음은 물론 내가 그 삼개월 동안 열심히 노력할 거 같으면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마음으로 하겠지만 실제로 그거는 사실은 어려운 거라. 더구나 암환자들은 고통이 계속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걸 알아차리고 다스리기도 힘들기 때문에 사실은 장애를 지니고 있는 상태라. 그게 안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포기 안 하고 열심히는 하더라고. 계속적으로. 그렇게 한 육개월 정도 그렇게 암투병을 했거든.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죽는 순간을 아는 거라. 자신이 숨을 계속 관찰하니까 숨의 상태를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서 한 일주일 전부터 인제는 내가 더 이상 못버틸 것 같다 하는 얘기를 자꾸 해. 그러더니 하루 전날 그러더라고. 내일이 백중인데, 내일 내가 숨이 멎을 것 같다 얘기를 하더라고. 그런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숨이 가빠진다거나 그런 것도 전혀 없었거든. 그리고 계속적으로 통증이 오고 그런 것도 잘 다스렸어. 통증이 오더라도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그냥 그대로 관찰하는 거라.

그런 상태였는데 백중날은 내가 태종사에서 내가 할 일이 있는데, 그때는 태종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갈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모친한테 그랬어. 임종 순간에 내가 있어야지. 내 없이 죽음을 맞을 것이냐 하니까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거라. 그래도 스님이 옆에 있어 주면 나 참 좋겠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죽을 거라고 예측하는 시간에는 내가 틀림없이 없다. 한나절 정도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니까 해보겠다는 거라. 아침에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게, 나는 그 시간에 태종사에 있을 거고 태종사 일 다 끝나고 밥도 안 먹고 쫓아가더라도 오후가 된다고, 진주에 있었으니까.

오후 때 가니까 그때까지도 살아있는 거라. 딱 도착하고 나서 5분 뒤에, 5분도 안 지났지. 그러면서 마지막에 딱 부르던 게 “스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손을 꼭 잡아주더라고. 그러면서 숨을 편안하게 쉬어.

그전에 내가 오기 전에도 그걸 이겨낸다고 굉장히 고생한 거라. 그러니까 이미 숨이 멎을 상태인데도 스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라. 그러면서 내가 갔을 때 손을 꼭 잡고 “그래. 그냥 편안하게 쉬어” 그러고 나서 마지막 숨을 탁 거두시더라고. 편안하게 주무시듯이 이렇게 임종을 하게 되었어.

 

그랬는데 물론 깨달음에 이르렀는지 어떻는지 그거는 몰라. 그런데 인제 나중에 화장을 해보니까 화장에 사리가 굉장히 많이 나왔어. 사리야 그거야 뭐 수행을 해서 그런 건지 어떤 건지 그거는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래도 중요한 거는 뭐냐하면 그 마지막 삼개월 동안 자신의 할 일이 있었다는 거라, 내가 해야 될 일이 있었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고통없이 편안하게 숨을 거두시는 거라.

그런데 칠십 평생 너머 살면서 거의 칠십년 너머는 그냥 그거 없이 살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 삼개월만 딱 그러고 산 거라.

자기 삶을 살고 간 거라.

 

그걸 보면서 아, 이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그 죽음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 죽음을 속여버릴 것 같으면 그나마 그 사람이 자신의 할 일들을 해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죽음을 맞게하는 원인을 내가 제공하게 되는 거라.

안 그래도 가족들도 의견이 많아서 그냥 얘기하지 말자 하는 게 거의 대부분 가족이였어. 그런데 강하게 내가 얘기했어요. 반드시 얘기해야 된다. 반드시 얘기해서 당신이 직접 그 죽음을 알도록 하고 그래서 죽음에 임했을 때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도리이다 하고 얘기했어요.

 

혹시라도 여러분도 주변 분들이 그런 상태가 되면은 반드시 알려야 됩니다. 충격이 올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도 본인이 할 일들을 하게끔 해줘야 된다는 거라.

물론 우리 모친 같이 그렇게 호흡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죽음을 알고 아, 죽음에 대해서 대비할 수 있도록 해줘야 되는 거라.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편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라는 거라.

 

그래서 제목같이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당사자도 불행하게 될 뿐아니라 본인도 그것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있어요. 물론 가족들이 암치료를 안 한 것에 대해서 ‘아, 내가 그걸 조금이라도 해봤으면 좋았을 걸’ 하는 그런 후회들은 들 수 있는데, 그런데 그거보다 더 큰 것이 뭐냐하면 그래도 모친이 편안하게 자기의 죽음을 맞았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상쇄돼버리는 거라.

만약에 그렇지 않고 마냥 암치료며 여러 가지들 하고 어쨌든 그러다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런다고 아쉬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조금 더해봤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들은 항상 있게끔 된다는 거라.

 

여기에도 ‘정육점 주인’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화는 여러분들이 쭉 읽어보면 다 될 겁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부분이 뭐냐하면, 정육점은 직접 소를 잡아서 그것을 부위별로 잘라가지고 파는 그런 곳입니다. 그럼 살생을 직접 본인이 하게끔 됩니다. 본인이 안 먹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본인이 직접 살생을 하게 되는 거라. 그 과보는 굉장히 큽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죽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좋은 일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였다는 행위 자체가 본인의 책임이 안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살생은 예외조항이 없습니다. 죽이는 행위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든 아니면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든 그래서 그것이 살생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바퀴벌레가 다른 사람에게 뭘 오염시키고 해가지고 해를 끼친다 해서 내가 그걸 죽였다 해가지고 그 살생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거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살생은 그 동물이 크고 작고 미미하고를 떠난 겁니다. 그 살생을 일으킬 때 마음은 살의가 얼마나 강하느냐? 죽일려는 마음이 없으면 죽일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거라도.

그런데 그렇게 살의를 일으키는 것이 크면 클수록 살생의 죄는 더 커져버리게 되는 거라. 큰 놈을 죽인다고 해가지고 살생을 하려는 의도가 그런 의도가 더 강하다고는 얘기를 못하는 거라. 작은 거라도 그냥 살의를 강하게 일으켜서 탁 한번에 죽였다고 해가지고 한번에 죽이면 뭐 그거는 죽는 줄 모르고 죽었다고 누가 얘기를 하는 거라. 그리고 나서 극락왕생하시오 할 것 같으면 그게 극락왕생이 돼? 말고 안되는 소리들을 지어내가지고 자꾸 그걸 합리화시킬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 법은 없어요. 그래서 죽이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거라.

 

죽이는 조건이 안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자신이 청결하지 못해가지고 바퀴벌레들이 온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 바퀴벌레만 죽일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말이 되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는 생명은 내가 그것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조건들은 없습니다. 그 나름대로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 부분을 항상 놓치지 마십시오.

 

그런데 어쨌든 이 소 정육점 주인은 그렇게 계속적으로 살생을 해왔기 때문에 그 업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그게 일어나느냐, 그 과보가 어떤 때 나타나느냐 하는 거라. 평상시 때는 그게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서 탐··치의 마음이 굉장히 강하게 일어날 때 그 과보가 탁 드러나는 거라.

 

만약에 예를 들어서 누군가 하고 다툼이 있었다, 그럼 다툼으로 인해서 평상시 같으면 그정도 다툼에서 화를 확 일으키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뒷머리를 잡고 그냥 쓰러져버린다든지, 아니면 남의 물건 보고 저건 내가 가져야지 하고 해가지고 도둑질을 탁 할려고 했는데, 그전에는 괜찮았는데 담을 넘다가 탁 떨어져가지고 죽어버린다든지. 이렇게 탐진치가 강하게 일어날 때 그런 과보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져버리는 거라.

그전에는 똑같은 거라도 괜찮았는데 인제는 그렇지를 않게 되는 거라.

가끔씩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다른 때는 뭐 괜찮았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서 미끄러져 죽었다든지, 아니면 평상시와 똑같았는데 갑자기 화를 내가지고 이게 뇌출혈이 있어가지고 돌아가셨다든지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별 문제 없었다고 그래요. 별 문제가 없었기는 왜 없었어. 그전에 자기가 저지른 행위들이 있었는데. 그게 탐·진·치가 강하게 일어날 때 일어날 가능성들이 커져버리는 거라.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악한 마음 악한 것들을 지어놓은 것들이 있단 말이라. 그러면 결합하는 것, 악은 악을 결합하는 힘들이 있습니다. 도둑놈들에게는 도둑놈 친구들만 있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러니까 악한 것들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는 이것이 요걸 끌어당기는 힘들을 가지는 거라. 그래서 그게 탁 결합이 되면 폭발이 일어나지는 거라. 결과로서 탁 나타나지게 되는 거라.

 

이 정육점 주인도 꼭 마찬가지라. 자신이 고기를 좋아해서 먹고 싶은데 고기가 없으니까 부인한테 왜 고기를 남한테 팔고 하나도 안 남겨뒀느냐고 화를 내면서, 내일 잡아가지고 팔 소한테 가서 죽이지도 않고 자기 먹을 부위만 혀를 탁 잡고 혀를 탁 잘라 오는 거라. 그 소는 살아있는 소가 아직 혀가 잘린다고 죽는 것은 아닌데 얼마나 그게 괴롭겠어. 그래가지고 소 혀를 가지고 요리를 해먹는데 그걸 먹는 순간에 자기 혀를 씹게 되는 거라. 소 혀를 먹으면서 화가 났으니까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냥, 여러분도 음식 먹다가 혀를 씹는 경우들이 많잖아요. 혀를 그렇게 씹어버리는 거라.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어요? 굉장히 크게 됩니다. 옛날에는 의학이 그렇게 발달이 안 됐기 때문에 출혈이 계속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죽게 되는 거라.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죽음을 맞게 될 때 그 사람 과보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죽음의 순간에 알아차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상시 때 선행을 한 것이 많아가지고 그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것은 다 소 죽인 살생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가는 데는 딱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런데 자칫 잘못 생각할 거 같으면 내가 그 살아있는 소의 혀를 잘라가지고 그 살아있는 소가 고통받게만 하지 안 했을 거 같으면 적어도 자기가 자기 혀를 깨무는 그런 실수는 안 저질렀을 건데 하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전에 지은 살생들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화가 일어난 상태에서 성냄이 있는 상태에서 그 전에 결과들을, 원인지어 놓은 것들을 탁 결합하게끔 돼어지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모친은, 모친은 그래도 똑똑한 편인 거지.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저렇게 남의 생명을 죽이는 일들을 내 아들한테 계속하게 했다가는 내 아들도 저렇게 죽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들한테 “너는 빨리 다른 데 가.”

그런데 인도라고 하는 곳은 카스트 제도이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그 일을 했을 거 같으면 아들도 그 일을 해야 되는 거고 대대손손 내려오는 거라. 그러니까 거기 있어가지고는 그 일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너는 빨리 다른 데로 가라는 거라. 다른 데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거라. 가난하게 살더라도 그 죽이는 일 하지 말고 살아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보내버립니다.

 

그런데 아들은 가서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선한 일도 할 여력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속여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 좋은 일 할 여력이 있어.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이 아들도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어. 결혼해가지고 다시 아들도 낳고 했지만 그럴 여력이 없이 불교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그냥 그렇게 살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낳은 아들은 그래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불교신자가 되는 거라. 그래서 시간만 되면 부처님이나 아니면 부처님 제자들을 초청해가지고 공양올리고 여러분 같이 이렇게 탁발을 하고 법문 듣고 그렇게 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아들이 무슨 수행력이 있었다든지 그런 것도 없어. 겨우 그거 좀 하고 했는데도 그래도 마음이 적어도 악한 것이 뭐고 선한 것이 뭔가는 분명하게 알고 있는 거라. 그러면서 자신이 그래도 시간만 나면 선한 일들을 많이 할려고 하고 그렇게 한 거라.

그런데 지금 스님과 마찬가지로 공양초청 받아서 공양을 하기 전이든 아니면 공양 후든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공양 후에 했습니다.

법문을 이렇게 스님들이 하게 되어 있는데, 그날 부처님이 법문을 안 하는 거라. 법문을 할 것 같으면 거기 가족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온 자기 아버지도 거기 있게 되는 거고, 그런데 그 아버지를 대놔놓고 뭐라 하는 거라. 부처님이. 곧 죽을 놈이 뭐하고 있느냐는 거라. 쉽게 말하면.

 

곧 죽을 놈이 왜 이렇게 허송세월 보내고 있느냐는 거라.

쎄가빠지게 공양 차려가지고 공양 잡숫게 해드렸더니 축복해주고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욕만 쎄가 빠지게 들으니까 기분이 별로 안 좋지.

부처님은 다른 사람들 하고 다르게 돌려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얘기하게 됩니다. 그냥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겠어? 쎄가 빠지게 뭐, 물론 자기 아들이 초청을 했지만 그 소리가 안 들어오는 거라. 곧 죽을 운명이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스님이 아무리 이렇게 얘기하더라도 죽음이 내 앞에 닥쳤다는 생각을 전혀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래가지고 그날 지나갔어.

그다음에 또 아들이 부처님하고 제자들을 초청을 해서 공양 올리고 하니까 부처님이 또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거라. 반복해서 계속 그러는 거라.

 

여기에 뒤에 있는 게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5페이지 보십시오. 5페이지 여섯째 줄에 보면

당신의 수명은 다하고 있다.

지금 죽음이 마중나오고 있다.

이제 죽음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여행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준비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라. 죽음이 코앞에 닥쳐 있는데도.

지금 즉시 노력하라.

모친과 같이 죽음이 딱 삼개월 남았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즉시 호흡을 알아차리든 뭘하든 지금 해야 되는 거라.

자기의 안전한 경지인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고통스러운 것이 있더라도 고통에 영향받지 않고 고통을 다스릴 수 있고,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탐·진·치가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고, 자신의 섬을 만들어야 되는 거라.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라.

마음의 더러움을 모두 버려라.

두 번 다시 생로병사의 세계에 윤회해서는 안된다.

해탈하라.

 

그렇게 해야 만이 자기 섬을 만들 수 있고 그리고 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지 지금 너 이대로 죽었다가는 맨날 마찬가지로 또 뺑뺑이 돌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 그 노인은. 부처님 말을 귀담아 들어서 예류과에 이르렀을까?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주석서 어디를 보더라도 그 부분은 없습니다. 대부분 보면 부처님이 그렇게 한번 얘기해도 예류과에 이르는 사람들, 중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은 그게 없어.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그게 없어. 부처님이 한번만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여러번 가가지고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죽음에 대한 준비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공양을 자기 아버지가 살아있을 동안에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해가지고 공양올릴 때마다 뭐라고 하느냐면 이 공양 올리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아버지를 위해서 공양을 올립니다. 쉽게 말하면 생전 예수제를 하는 거라.

생전예수제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거라.

이 공덕을 아버지께 회향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 생전예수제라고 하는 것은 그 마지막에 보면, 그렇게 공덕을 회향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러야만이 생전예수제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살아있는 자기 자신한테 한다 치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생전예수제를 한다, 그걸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공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공덕은 물론 되겠지. 그런데 그것이 열매를 맺는 것은, 그 생전예수제를 하는 것은 자신이 그 길을 따라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가가지고 자신이 무슨 깨달음에 조그만한 깨달음이라고 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생활패턴이 완전히 바뀌어서 다시는 나쁜짓 안 하고 선한 일들만 하게 되든지 이렇게 될 때 그 생전 예수제가 된다는 거라.

그냥 내가 무슨 생전예수제 하듯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생전예수제를 제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공덕을 쌓는 것으로 인해서 그것으로 끝난다 생각할 것 같으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생전예수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사람한테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뭐 때문에 지내는 거라? 돌아가신 사람이 극락에 가기를, 변화를 주기 위한 겁니다.

생전예수제도 꼭 마찬가집니다. 생전예수제를 함으로 인해가지고 자기 자신이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마음이 바뀌든지 아니면 자신이 무슨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든지 뭔가가 바뀌어지는 상태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닐 것 같으면 제사도 헛제사가 되듯이 생전예수제도 헛생전예수제가 돼버린다는 거라.

 

이걸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냥 요거 한번 함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 공덕 쌓은 것이 다음생을 받는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선한 마음 한번 일으킨 것이 있었다 해가지고 다음 생에 좋은 몸을 받는다는 얘기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어져버린다는 얘기라. 그런 의미는 아니라는 거라. 생전예수제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런 법문들을 듣고 책을 읽고 뭔가를 해가지고 마음이 확 바뀌어져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뭔가 내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안 할 것들은 아예 안 한다고 결정이 딱 돼버리고, 그렇게 마음이 싹 바뀌어져 버려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거는 꼭 임종의 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공덕을 쌓는 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가끔씩 여러분들은 공덕을 쌓으면 공덕회향들을 마음속으로 했을 겁니다. 이렇게 스님한테 공양올리는 공덕들이 우리 가족에게도 회향되기를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게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도 이 노인에게 여러 차레 가가지고 법문을 했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생전예수제를 번번히 했는데도 의미가 없게 됐다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이 해마다 생전예수제를 한다고 해가지고 바뀌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걸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죽음을 알려줘서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해서 그래서 자신의 패턴이 바뀌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공덕 쌓았을 때는 그 공덕 쌓은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바뀌어지고 또 그래서 더 이상 후퇴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포인트를 한번 봅시다. 이번 포인트는

∙다만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천상에 갈 수는 없습니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삿짱바네(Saccaṃ bhaṇe) - 진실을 말하라.

두 번째, 나꿋제이야(na kujjheyya) - 화내지 말아라.

그다음에 닷사 압바스밍 삐야 찟또(dajjā appasmiṁ pi yācito) -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꾸 베풀어주는 것. 자신의 공덕을 나눠주는 것. 이런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 천상에 가는 것이지, 그것이 완전하게 완성이 됐을 때 천상에 가는 것이지, 그 천상에 생전예수제를 해서 간다? 여러분들이 말하듯 극락에? 아니면 죽고 나서 제사를 지내서 극락에 간다?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그리고 살아있을 동안에 이미 천상에 갈 수 있는 조건들을 지었을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당연히 천상에 간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사람은 노병사의 세 가지 괴로움의 규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늘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 것은 그것은 정해진 규칙 정해진 법칙이라는 거라. 그걸 피할 수가 없는데 그걸 피할려고 자꾸 해서는 안 되는 거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거짓말로 사람을 위로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죽음을 맞았을 때.

또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전예수제를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공덕이 돼서 뭔가 죽고나서 뭔가 어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부 거짓말이라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위로를 삼을려고 하지도 말고 그것으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싫어도 사실을 아는 것으로 행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드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노력하면 행복하게 된다는 거라. 바뀌어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집착함 없이 알아차림만 있으면 임종 때라도 길이 열립니다.

아까 제 모친 얘기하듯이 꼭 마찬가집니다. 반드시 그 길은 열립니다. 단 하루를 하더라도 그 길은 열리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자신이 할 수 있을 때 포기하지 말아라는 거라.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집착함이 없는 마음, 자유로운 마음을 만들 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본인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제 지금 얘기한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하는 그런 제목으로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 문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우리가 팔정도 할 때 올바른 직업을 가져라 그러는 것도 있는데요, 지금 여기 보면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역할이 살생에 들어가서 나쁘다는데 만약에 소를 키우는 사람들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스님 대답 : 그거는 해당이 안 됩니다. 살생이라는 것은 본인이 직접 죽이는 행위, 그러니까 살의가 있어야 되고 죽이는 행위가 있어야 되고 그리고 죽었다고 분명히 자신이 알게 될 때 그것이 살생의 행위에 들어가는 것이지, 물론 죽이는 목적으로 키우지만 본인이 직접 죽인다는 살의도 없는 거고 죽인 행위도 없는 거고 그리고 죽은 것도 없다는 거라. 그러면 살생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됩니다.

수행자 : 예, 열심히 키우는 동안에는 업이 상관이 없는 건가요?

스님 : 그렇죠. 됐습니까?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