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전쟁은 어리석은 자들의 피난처 (20151204.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1. 09:00

https://youtu.be/uopGGG37TC4

* 전쟁은 어리석은 자들의 피난처 (20151204. 대구)

 

오늘은 「전쟁은 어리석은 자들의 피난처다」 하는 것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이번 주제는 수행하고는 좀 관계가 없는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잘 보면 나에게 어떤 역경들이 닥쳤을 때 내가 어떻게 헤쳐나가는 것이 바른 것인가 하는 것들을 조금 알 수가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곤란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어떤 경우든지 곤란함들은 항상 닥치게끔 돼있습니다.

 

먼저 얘기할려고 하는 게,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벌레 같은 거를 어떤 경우에는 장난삼아 다루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 저쪽에서 아이들이 막 작대기 가지고 뭘 건드리면서 낄낄거리고 놀고 있는 것을 부처님이 와서 보면서 “뭐하고 있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애들이 뱀이 있어가지고 뱀이 혹시 자기들을 물지 모르기 때문에, 그게 독사인지 뭔지 구분없이 단지 그것 때문에 뱀을 괴롭히고 있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했던 말이 어찌 보면 참 명언입니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남을 괴롭힌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빼앗는 것과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뱀을 괴롭히는 게 왜 자신의 행복을 빼앗는 것이 될까? 뱀하고 자신은 다른 거잖아. (수행자 : 속마음이 아마 안 괴롭겠습니까? 마음이 안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애들은 괴로운 거보다는 오히려 낄낄거리고 놀고 있는 거야. 재밌다고, 재밌다고 괴롭히고 있는 거라.

 

그걸 풀지 못하면 이 세상에 다툼이나 전쟁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내 종교가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죽여도 되고,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해도 되고, 그것이 정당화돼버리기 때문에.

 

그런 얘기 있죠? 강도가 집에 왔다. 그럼 강도가 나를 위협해가지고 돈을 내놔라! 그런 상황에서 총을 가지고 있든 칼을 가지고 있든 그럴 거 같으면 그 강도를 향해서 총을 쏜다든지 칼로 찌른다고 할 거 같으면 정당방위가 성립이 됩니다. 법에서는 그렇게 돼있습니다. 자신이 해침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상대방을 해코지했을 때 정당방위가 되는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거든.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걸 찔렀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죽었으면 살인자가 돼버립니다. 남을 해쳤으면 악한 업을 짓게 되는 거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말하는 거하고 부처님이 말하는 거하고는 참 차이가 많이 납니다. 어찌보면 부처님이 전도를 시작하면서 이미 예견된 테마들입니다.

불교가 이 세상에 퍼져나가면서 세상의 흐름하고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논리로 따르다 보면은 참 자신이 어찌 보면 바보같이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 많이 하죠? 뭐 할 거 같으면 그냥 자비롭게 해줘! 기독교인들은 뭐 조그만한 트러블이 있어도 그냥 고소한다고 그러나? 고소해갖고 문제를 푸는데, 또 아마 불교에서 스님들은 그렇게 얘기를 안 할 겁니다. 그냥 니가 참아라! 니가 참아라!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신을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바보같은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할까?

그래서 그 문제를 오늘은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과연 지금 내가 뭔가를 행위를 했을 때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까 그 애들같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뱀을 장난으로 괴롭히고 하는 것들이 그것이 과연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인가?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괴롭힘을 당하는 뱀은 당연히 괴로움을 겪을 것인데, 괴롭히는 당사자는 그럼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는가? 지금 깔깔대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언제든지 뱀이 나타나면 똑같은 상황이 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우리가 그걸 안 만나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안 만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든지 그 상황은 또 발생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문제는 결코 좋은 방법은 되지 못한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 그 로히니 강이라고 하는 강을 사이에 두고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한쪽은 부처님 종족인 석가종족이고, 한쪽은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비였던 마하마야 왕비의 아빠였던 꼴리야족이고. 그러니까 석가족하고 꼴리야족 두 종족이 로히니 강을 경계에 두고 분단되어 나뉘어져있거든. 그 강의 물을 대어야 농작물들을 재배를 하는데 가뭄이 들어가지고 강이 말라버렸어요. 그리고 비도 안 오고 하니까 서로 그 강의 강물을 댈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게 점점 다툼이 커져버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양쪽 종족의 농민들 간의 다툼이 됐다가 그게 문제가 점점 더 커지니까 나라 대 나라의 문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가지고 전쟁을 하는 상황이 돼버렸어요.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래도 전쟁은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 두 종족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가서 그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교재에 나와있는 겁니다.

“지금 이 전쟁을 하는 목적이 뭐냐?” 뭣 때문에 전쟁을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이유없이 전쟁을 하지는 않을 거 아니라.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든지 아니면 자신의 것들을 되찾기 위한다든지 전쟁을 하는 이유들이 있다는 거라.

로히니강의 그 물을 대기 위해서, 그 물을 우리쪽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전쟁을 하고서라도 그 물을 가져오겠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이 물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느냐?” 물은 사실은 누구든지 공평하게 쓰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물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이 있는 경우에는 누구든지 공짜로 그 물을 대게 됩니다. 단지 지금은 물이 적어서 문제가 되는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그 물의 가치는 없는 것인데, 이 전쟁을 하면 틀림없이 사람들이 죽는데, 그럼 사람들의 목숨의 가치는 얼마나 되느냐?

사람 목숨의 가치가 훨씬 크지 그 물의 가치가 큰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왜 너희들은 이 가치없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벌여가지고 가치있는 사람을 죽일려고 하느냐?

조금 더 이성이 있는 사람이면 가치있는 게 뭔지 가치없는 게 뭔지를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가치 없는 것들을 가지고 목숨을 버리는 그런 일들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다른 말로 해볼까요? 누군가와 얘기하다가 말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싸움 해가지고 물론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겼을 때 얻어지는 이익이 과연 뭔가 하는 거라. 얼마만큼 되느냐는 거라. 그거보다 설혹 내가 진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아, 저 사람이 참 그래도 침착하고 좋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네’ 하는 마음을 가지게끔 만드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거라.

이기고 지고 하는 것들에 목적을 잡아버릴 것 같으면 문제는 커져버립니다. 어떤 것이 좀 더 가치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기준을 잡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진짜 자신도 모르게 악행들을 막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걸 중재를 하고 나서 그 두 종족은 되게 부끄러워하는 거라.

야, 이거 우리가 정신이 약간 잘못돼가지고 이거 뭐하는 짓을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사람을 죽일려고 하는 거라. 그 하찮은 물 때문에. 그 강물은 언젠가는 비가 오면 또 차게 되있는 거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지금 농작물이 말라간다고 해가지고 그 물을 댄다고 해가지고 그 농작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닌데도 조금 더 댈라고 그 가치없는 짓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그 얘기했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어? 그러고 나서 두 종족은 사이좋게 물을 요쪽에 한번 대고 적은 물이지만 저쪽에 한번 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기후라는 건 언젠가는 비가오게 돼있는 거고 비가 오니까 그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는 거라. 농작물도 다시 살아났고 사람도 죽이지 않고 두 종족은 아주 평화롭게 잘 지내게 된 거라. 만약에 거기서 전쟁이 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은 죽는 거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냥 원수돼가지고 그렇게 사는 거라. 저 사람하고 싸워가지고 다퉈갖고 내가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원수 돼가지고 많은 세월 동안 서로 앙금이 쌓이는 거 그게 뭐가 좋다고 그걸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참 가치 없는 것들을 본인은 가치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가끔 그런 게 있습니다. 요즘 옛날에 담마스쿨 했던 교재를 무슨 인터넷 미디어붓다 거기에 올라가 있는 게 있는데, 그 밑에 댓글 다는 게 있는데, 누가 하나 달면 누가 하나 또 반론하고, 왜 저러고 있느냐는 거라. 그것 가지고 그렇게 다툴 일이 전혀 아닌데. 만약에 그게 자신에게 안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견해도 있구나, 아니면 나하고는 안 맞는 것이다 치부해버리면 오히려 조금 더 편안할 건데 그걸 그냥 다투고 있는 거라.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참 쓸데없는 것들을 가지고 많이 시간을 보낸다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전도를 할 때,

부처님은 어찌 보면 이단자입니다. 본래 있던 힌두교로부터도 이단자고, 힌두교를 부정했기 때문에. 힌두교는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뭐라고 그래요? "신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하고 그걸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힌두교 입장에서는 부처님은 이단자라는 거라.

 

그런데 다른 사문들 사마나라고 하는 신흥종교가들의 입장에서도 부처님은 이단자인 거라. 신흥종교들은 가지고 있는 게, 고행으로 인해가지고 그런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할려고 합니다. 부처님은 "고행은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부처님은 이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현재 전 세계에 3대 종교 중에 하나가 불교입니다. 왜 불교가 이렇게 퍼졌을까? 그건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물론 그 진리가 뛰어나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조금 더 마음이 고요해지고, 또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고, 또 해탈에 이르게 되고, 그것은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걸 전하는 사람들의 침착성! 앗사지 존자를 봤을 때도 걸어가는 모습이 고요하고 침착해있다는 거라. 뭘 만나든 누가 돌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침착하게 자기 할일 할 것처럼 보인다는 거라.

부처님을 봐도 부처님을 보는 것만으로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환희심이 일어나는 거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자신이 마음이 고요해져있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드러나는 것들이 침착한 것들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침착하게 자신이 할 일만 꾸준하게 해나가는 거라. 그게 어찌보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일 겁니다.

 

불교가 그런 여러 가지 역경들을 헤치고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 그런 침착성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걸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은 어떠한 경우든지 침착성으로 부터 찾아야 됩니다. 마음이 고요해있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왜곡돼게끔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중요한 것들은 아까 같이 전쟁에서 가치있는 것들이 뭔지를 몰라버리는 거라. 그거 잊어버리고 그냥 싸움에서 이겨서 물을 끌어오는 것에만 치중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탁 돌이켜서 생각을 해보면 ‘아, 이것은 사람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거 안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전도에서 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그런 것들을 역경들을 헤쳐나가는 것이, 서로 얘기하는 것들. 문제에 부딪쳤을 때는 자꾸 얘기를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도 얘기를 해야 되고 자기 자신과도 계속적으로 얘기를 해야 됩니다. ‘아, 이거는 요렇고 그래서 그것이 이렇게 됐구나’ 스스로 그걸 자꾸 되짚어가지고 그 문제점들을 발견해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걸 발견했으면 그걸 개선하려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거고, 또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틀린 게 있으면 틀렸다고 분명하게 인정하고 바꾸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할 것 같으면 항상 문제가 발생해버립니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는 항상 자꾸 대화하라. 아마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꾸 사이가 안 좋아지고 문제가 되는 것들은 서로 대화하는 것들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뭔가 자꾸 말을 해가지고 그걸 조금 조금씩 풀어나가야 되는데, 그거 없이 자기 세계만 자꾸 몰두해버리는 거라. 그럼 이거는 나중에 메꾸기 힘들어져버리는 거라.

그런 인간적인 부분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도 자꾸 대화를 해서 제거를 해나가야 됩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데 못 벌고 있다. 그러면 자꾸 얘기하라는 거라. 누군가한테라도. 그럼 자신이 몰랐던 문제점이나 자신이 몰랐던 일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라. 그렇지 않고 자기의 방식으로만 계속하면 그건 할 방법이 없습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얘기하는 상대가 적이라고 하더라도 적하고 얘기해라. 적을 아군같이 생각하고 저 사람이 나에게 도움 주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적과 아군의 개념이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나는 거기서 유익한 것들을 분명하게 얻을 수 있는 거라. 그러면은 그 문제는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아나간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가 부처님은 신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부처님은 절대 신이 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물어보니까? 아니요! 그럼 당신은 인간입니까? 아니요! 그럼 당신은 뭡니까? "나는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게 부처님의 방식입니다.

신이 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대장이 돼가지고 모든 것들을 통솔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 감히 부처님이 못하는 걸 자기가 할려고 한다는 게 말이 돼?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단지 부처님은 앞서나간 선배이고 똑같은 동료이지. 부처님은 공양을 할 때 다른 스님들하고 같이 안 나눠먹은 적이 없습니다. 공양을. 탁발을 해와서도 같이 모여가지고 앉아서 공양을 했습니다. 다른 스님들하고 같이.

 

딱 한번 안 나눠먹은 적이 있습니다. 언제? 마지막 열반할 때입니다.

열반할 때 춘다가 준 음식이 독이 들어가 있는걸 알고, 춘다의 공양을 안 먹을 수는 없었다는 거라. 안 먹으면 춘다가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어? 남이 마음 상하게 하는 것들은 바라지 않으니까 그걸 먹는데, 이걸 다른 사람들이 먹어가지고는 그거는 큰일 나겠다 싶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거를 못 먹게 하는 거라. 단지 자신만 그걸 먹게 되는 거라. 그때 외에는 전부 같이 나눠 먹는 거라. 신이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역경에 부딪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풀어나가는 우두머리라고 생각을 한다든지, 내가 이걸 뭘 어떻게 해야 된다 든지, 이렇게 생각할 것 같으면 그 문제를 못 푸는 거라.

똑같은 아주 어린아이도 같은 도반, 동반자, 동료라고 생각을 해야 되지, 그래서 그 모든 사람들하고 같이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불교의 특징이 다른 종교하고 다른 게 뭐냐면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우리 한국같이 신도 카드라고 그러나? 신도 카드라는 것이 어느 절에 가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내 절의 신도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한국 절은 절이 잘나가는 절일 거 같으면 신도카드가 몇만장 있고 어쩌고 합나다. 불교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나의 신도를 만들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종교 불교를 믿어야 된다는 강요도 없습니다. "지금 네가 이익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을 하라는 거라. 그리고 여기 와서 배울 것이 있을 거 같으면 배우라는 거라. 그리고 니가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라는 거라." 그래서 어디 가도 신도카드라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 붓다야나 선원도 신도카드 없잖아. 없어요. 그걸 갖고 스님이 축원을 해 줘? 아니면 그걸 가지고 신도 관리를 해? 전혀 없습니다. 가끔씩 부산사람들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 제발 선원식구들한테 가끔씩 전화라도 해가지고, 어려운 게 없는지 뭐 어쩌는지 그런 거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저들도 대승불교를 닮아가지고 신도카드가 없다는 거 뿐이지 스님보고 신도관리 하라고 그런다 속으로 이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얘기를 할 거 같으면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라. 당연히 스님이 신도들 잘 다독거리고 뭔 프로그램도 만들고 산사순례도 가고 이래가지고 신도들을 통솔했으면 좋겠는데 그거 안 하니까 섭섭해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아예 처음부터 그거 바라지 말아. 그거는 부처님 자신도 안 한 것이고, 그 이후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그걸 하지 않는 것들이라.

그래서 그게 부처님이 신이 되지 않을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혼자 그런 것들을 해결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교 외적인 것이 불교라는 옷을 입어버리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역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걸 바꿀려고 해야 됩니다.

부처님도 서른다섯 살에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나는 붓다다!”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머리 검은 놈이 무슨 놈의 완전한 해탈을 이루었느냐 하면서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랬어요. 자기들은 상상도 못하는 거니까. 머리 희끗희끗하고 그리해도 할동말동 하고 그런 사람도 없는데, 인제 새파란 젊은 사람이 나는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니까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 비웃음을 기회로써 활용을 하는 거라. 그런 사람들을 법으로써 딱 이끌어버리는 거라. 그러면 팔십된 당신하고 서른다섯살된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는 거라. 그러면 니가 뛰어난지 내가 뛰어난지 한번 보자는 거라. 실제로 말을 해보니까 게임이 안 되거든. 그러면 서른다섯살 짜리도 니가 내보다 더 뛰어나구나 하는 거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여러 가지 그런 역경들이 많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아는 것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그걸 적절하게 잘 이해시키는 거라. 실제 깨달음에 이르지 않아도 아, 깨달음이 뭔가 하는 걸 알 수 있게끔 해주는 거라. 그래서 아주 세밀하게 분석을 해가지고 법을 설합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들으면 “야, 이게 진짜 진리의 세계가 저렇게 있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되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질 겁니다. 법에 대해서 팔정도 이것은 정업이고 이것은 바른 노력이고, 바른 노력은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노력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는 거라. 그렇게 이해를 하니까 그 길을 따라가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전에 그 종교라든지 아니면 지금 또 다른 어떤 종교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라. 진리는 내 혼자만 알면 되는 거라. 다른 사람은 나를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추앙만 해주면 되는 거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진리를 알려고도 하지 않을 아니라 알아서도 안 되는 거라. 그러니까 추상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거라.

'진리는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면 깨달음에 관한 것들은 니가 깨달음의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그것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전부 이렇게 탁 차단을 해버립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그런 것들을 넘어가는 거라. 문제, 역경에 부딪쳤을 때는 그것은 나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 역경을 하나 탁 넘어설 때 불교는 굉장히 발전을 하게 되는 거라. 자기 자신이 발전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 기회를 ‘아,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쳤느냐’고 생각하지 말고 ‘아, 참 나에게 좋은 기회다’ 하고 생각하라는 거라.

그런 것들이 역경에 부딪쳤을 때 여러분들이 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참 어리석은 것들입니다. 아까 로히니 강에 비유를 했지만 거기에 전쟁이 일어났으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냐는 거라. 지금도 끊임없이 그럽니다. 어떻게 하면 그 전쟁을 없앨 수가 있을까? 전쟁은 누군가를 죽이는 겁니다.

만약 예를 들어서 쌍둥이들은 그런 것이 어릴 때 있다고 그러대. 옆에 한 애를 툭 찌르면 찔리지 않은 애도 같이 아파한다고 그러더라고. 나는 보지 못해서 모르겠는데 그런데 하여튼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그럽니다. 조금 더 친밀감이 있어서 그러겠지. 실제로 아픈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옆에 애가 아파하면 자기도 아파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아마 그랬을 거라고 봅니다. 실제 자기가 안 찔려도.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해코지 하는 것들이 자신이 아픈 거라고 할 거 같으면 그 해코지를 하게 될까? 안 합니다. 누구든지 생명 가진 존재들은 다 행복해지고 싶고 오래 살고 싶고, 죽고 싶어 하질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나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싫어하는 거라.

그런데 그걸 알면서 남을 그렇게 한다? 동일하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절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아까 부처님이 아이들이 뱀을 가지고 노는 데서 얘기했듯이 남의 행복을 빼앗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오히려 자신의 행복도 빼앗겨버리는 거라. 남을 죽이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도 죽는 상황이 돼버리는 거라. 누가 나에게 돌을 던졌다, 그럴 것 같으면 돌 맞은 사람은 그 돌 던진 사람에게 또 돌을 던질려고 한다는 거라. 돌을 던져가지고 자신이 행복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자기 자신이 돌을 맞는 불행을 겪는다는 거라. 왜 그걸 생각을 안 하냐는 거라.

 

남을 해코지를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자기는 행복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문제가 없어.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과보로써 돌아오는데 어떡할 거라?

내가 부유해지기 위해서 남의 물건을 빼앗았다, 그럼 네 물건은 누군가가 안 뺏아갈 거 같애? 똑 마찬가지라는 거라. 전쟁으로 인해 사람을 죽였다, 그럼 나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전쟁을 일으켜서 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인과법칙은 분명한 겁니다. 그래도 A를 행했으면 A가 돌아와야 되는 것이지 안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럼 자신이 행복해지고 자신이 오래도록 살려고 할 거 같으면 남들에게 해코지 하고 죽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오계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불살생!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아라는 거라. 사람만 그렇게 해코지하고 죽일려고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입니다! 벌레 하나라도 개미 하나도 그렇게 죽이려고 하지 말아라. 거기에도 꼭 마찬가지로 행복할 권리가 있고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건데, 그거 죽인다고 해가지고 나는 안 죽고 죽임당하지 않을 거 같애? 꼭 마찬가집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거라. 아무리 자기가 주장하는 것들이 맞다고, 또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남을 해치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수단은 되지 못한다는 거라.

 

요즘은 IS라고 하는 것 때문에 상당히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는 것들을 보면 똑같애요. IS나 IS들을 없앨려고 하는 곳에서나 똑같은 대응들을 하고 있다는 거라. 참 어리석게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거라. 서로 인정해주고 받아들일 거면 받아들여주고, 적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감싸안아 줘버릴 것 같으면 문제는 간단할 걸 왜 적이라고 보느냐는 거라.

 

여기 3페이지에 보면 나와있습니다.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적어놓았습니다.

다섯 번째 줄, 자신을 모델로 해서 다른 생명을 관찰하면, '살아가고 싶은', '죽이기를 원하지 않은' 이라고 하는 기분은 모든 생명에 보편적인 것이라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해치고 죽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협력, 버팀목 등이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른 생명으로부터의 버팀목, 협력, 도움 등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 그럴 것 같으면 점점 더 행복해진다는 거라. 그런데 그러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을 자꾸 제거해 나간다? 자신은 점점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 하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라.

행복한 사람들은 보면 자기 주위에 자기를 위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어떨 때 선원에 있다 보면 누가 뭘 부쳐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물론 필요하다 생각되어서 부쳐주는데 내가 필요 없는 것들도 있어. 그런데 그 부쳐주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어?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많으면 나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그걸 또 선원 식구들하고 나누면 되게 좋아해.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 있음으로 해서 주변 사람들도 같이 다 행복해지는 거라.

자신의 주위에 자신을 서포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굉장히 행복해지는 거라. 그래서 자기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제거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아무리 내하고 관계가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음하나 탁 바꾸고 나면 그 사람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걸 탁 끊어버리면 그런 조건을 아예 없애버리게 되는 거라. 내가 불행해지는 길을 스스로 자꾸 가게 된다는 거라.

 

마지막 포인트 한번 보겠습니다.

• 모든 전쟁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악행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성냄에서도 정당한 이유가 없고 욕심내는 것에도 정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도 정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 심약하고 어리석은 자는 싸우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을 내고 욕심을 부립니다.

• 어리석은 자는 싸우는 것이 평화롭다고 생각합니다.

착각한다는 겁니다.

• 사람의 성공은 다른 것들의 협력에 의합니다.

• 다른 생명을 괴롭히고 죽이는 사람들의 행동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탐 진 치를 그대로 드러내게 됩니다.

• 자신이 살해당하고 싶지 않은 생명은 다른 생명을 결코 죽여서는 안 됩니다.

• 현명한 자는 괴로워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도 행복하게 삽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형태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탐진치에 의해서 행동할 거 같으면 어리석은 겁니다. 그거 없는 상태에서 여러분들이 행동해나갈 때 다른 사람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주위에는 항상 그 사람을 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게 됩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