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붓다야나선원법문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번뇌는 무섭다. (20151211. 대구)

담마마-마까 2022. 1. 2. 09:00

https://youtu.be/UjhO6Yz8JHw

*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번뇌는 무섭다. (20151211. 대구)

 

오늘은 제목이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번뇌는 무섭다」 하는 것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일부러 녹음할 필요 없어요. 요즘 카톡인지 카카오인지 거기에 있대. 뭐지? 한국 테라와다 불교라고 해가지고. (수행자 : 밴드) 밴드라고 그러나? 나는 투지폰을 쓰니까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밴드. 밴드에 보면 다 올라와 있대. 그것도 투지폰이라도 그걸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모르죠? 투지폰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컴퓨터로 보는 거, 컴퓨터로 네이버로 들어가가지고 하는 게 있더라고. 누가 알려줘가지고 나는 ‘아, 이런 게 있구나’ 하고 알게 된 거라.

 

어쨌든 오늘은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번뇌는 무섭다」 하는 겁니다.

맨 첫머리에 보면 숲을 베어내라.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지 마라. 하고 되어 있습니다. '「와낭 친다타 마 룩캉(Vanaṁ chindatha mā rukkhaṁ)」' 그렇게 돼있습니다.

 

"숲을 베어내고 나무는 베어내지 마라."

어떤 한글 주석서에 보면 이걸 「나무만 베어내지 말고 숲을 베어내라」 이렇게 번역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나무도 베고 숲도 베고, 나무를 열심히 베다 보면 숲도 벤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데, 원래의 의미는 "나무는 베지 말고 숲만 베어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이걸 꼭 화두같다고 그렇게 얘기한다고 그러대.

숲은 나무가 여러 개 모여서 숲이 되는 건데, 그 나무 하나하나를 안 베고 숲을 어떻게 베어낼 거라? 베어내는 방법 한번 얘기해봐.

다른 말로 하면, 여기 마당에 잡초들이 많이 난단 말입니다. 그러면 잔디하고 있으니까 같이 싹 깍아버리면 또 좀 있으면 잡초는 계속 올라오게 되는 거라. 위에를 아무리 잘라내봐야 뿌리를 안 짤라내면 잡초는 계속 자라난다는 거라.

 

수행으로 따지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악한 것들, 탐심이나 진심이나 이런 것들을 그때그때 알아차려가지고 그걸 제거를 하는 것이, 꼭 이 잔디 깍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자라날 때마다 착착 짤라버리는 거라.

그러면 언제 그러면 이 뿌리는 짤리게 될까? 뿌리는 완전하게 제거가 될까? 여러분들로 얘기할 것 같으면 손으로 직접 밑에 뿌리를 캐가지고 뽑아내야 됩니다. 그래야 그 잡초는 다시는 자라지 않게 됩니다.

 

수행에서는 그게 언제가 될까? 지혜가 열렸을 때 그 뿌리는 제거가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작은 지혜가 열렸을 때는 작은 잡초의 뿌리가 없어지는 거고, 지혜가 조금 더 높은 지혜가 열릴 것 같으면 큰 뿌리도 제거를 할 수가 있는 거고, 그래서 종국에는 모든 잡초가 전부다 제거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 한 단계 올라가면 뭔가 하나 번뇌가 하나씩 툭툭 떨어진다는 얘기를 스님한테 들가끔씩 들었죠? 꼭 마찬가집니다. 번뇌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거 자체, 잡초가 완전히 뿌리 채 제거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뿌리 채 제거되는 잡초가 나중에는 더 이상 제거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아, 인제 나는 해탈에 이르렀다’ 하고 알게 됩니다. 스스로 아무리 둘러봐도 더 이상 제거할 잡초가 없거든. 그럼 인제 잡초 제거하는 거는 끝난 거라. 그래서 "나는 인제 해야 할 일들을 다 끝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수행을 안 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을 부처님이 얘기를 한 거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 같으면 큰 오산입니다.

실제로는 여러분들은 열심히 수행을 해서 위에 올라오는 잡초들은 빨리 빨리 제거를 시켜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잡초가 무성하게 될 거 같으면 옆에 있는 잔디까지 다 죽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을 땐 불선한 마음이 일어난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빨리 사라지게 만들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불선한 마음이 자꾸 다른 것들로 번져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올라오는 것들을 잘 깍아내고 있는데, 왜 계속 그렇게 올라오게 될까? 왜 이렇게 계속 올라오는 거라? 그건 뭔가 밑에서 영양분이 있고 뿌리로부터 받아먹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뿌리가 살아있으니까 올라올 거 아니라?

여러분들은 뭐가 그 영양분이 될 거 같아요? 수행하는 사람이니까?

(수행자 : 집착하는 것이)

집착? 당연히 집착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크게 보면 그렇게 보면 됩니다.

 

수행에서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가 그 영양분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 뿌리라고 하는 것은 「무명」입니다. 무명!

 

그 무명을 계속 일으키게 만드는 원인은, 그래서 무명에 영양분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은 '다섯 가지 장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욕심부리고, 화내고, 게을러빠져있고, 들뜨는 거 있고 후회하고, 그다음에 수행이나 여러 가지 것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거기에 뿌리를 계속 자라게 해주는 영양분이 됩니다. 그 영양분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해서 제거를 해야 되는 거라. 제거를 하지 않으면 그 무명은, 그 뿌리는 죽지를 않는 거라.

그걸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양분이 자기 혼자서 일어나면 참 좋은데 대부분은 보면 결합을 해버린다는 거라.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성이 일어날 때는 욕심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성을 내고 욕심을 내고 하는 것이 동일 선상에 항상 올라와 있습니다. 올라와 있다가 뭔가 하나가 크면은 성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욕심이 일어나기도 하고, 꼭 동전 뒤집듯이 일어납니다. 항상 같은 라인에 올라와 있는 상태에서 어느 한쪽만 들어가지게 되는 그런 형태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욕심부리고 성내고 하는 것이 서로 결합해있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결합해 있는 것을 탁 떼버리고 나면 조금은 그래도 수월하게 된다는 거라.

 

왜 결합된 것이 위험한가?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스님 가사 이 색깔을 입습니다. 만약에 이 가사를 조금 더 붉은색으로 할려고 한다, 그러면 여기에다 뭔 색을 더 넣으면 됩니까? 나도 몰라. 이 색에서 뭔 색을 더 넣으면 좀 더 붉은색이 되는지. 어쨌든 색을 칠하면 칠할수록 이 색은 탁해지고 검은 색깔 형태로 점점 바뀌게 됩니다. 그게 색의 삼원소의 원리라고 그럽니다. 색의 삼원소는 보통 노랑, 빨강, 파랑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혼합하면 혼합할수록 색은 검은색으로 바뀌어집니다. 검은색이 되면 빛은 투과되기 더 힘들겠죠.

 

그런데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결합되면 결합 될수록 그것은 더욱더 제거하기 힘들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이게 만약에 검은색이 됐다. 그러면 검은색이 된 가사를 가지고 이걸 노란색으로 바꿔주시오 할 것 같으면 바꿔줄 수 있어요, 없어요? (안됩니다.)

안 돼. 그건 안되는 거라.

그런데 여기 지금 형광등 하고 빛이 있습니다. 빛의 삼원색은 빨강, 초록, 파랑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색의 삼원색 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빛의 색깔이 나는 것은 그 세 가지 색이 조합된 겁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색을 혼합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 것 같애요? 하얀색이 됩니다.

아까는 색깔은 혼합하면 혼합할수록 검은색이 되는데, 빛은 혼합하면 혼합할수록 하얀색이 된다고 그럽니다.

 

색과 빛의 비유를 들었지만 불선한 마음이 결합되면 결합될수록 제거하기는 힘들어지는 거고, 선한 마음은 결합하면 결합될수록 더 좋은 효과들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아까 다섯 가지 장애는 선한 마음이 아니죠? 불선한 마음입니다. 수행의 장애일 뿐아니라 무명에 영양분을 제공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결합되도록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뭘 가지고 결합 안 되게 할까? 뭘 하면 되겠어요? 무상한 성품으로 알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단적으로 얘기하면.

성냄을 알아차려가지고 성냄이 분명히 변화돼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러면 내가 ‘아, 성냄은 무상한 것이구나’ 분명히 알고, 그래서 그것이 탁 가슴에 박혔을 때는 그다음부터는 성냄이 안 일어나게 되는 거라. 어떤 것이든 성냄이든 아니면 욕심부리는 것이든 뭐든 간에 그것을 무상한 성품으로 분명히 알 것 같으면 그것은 떨어져나가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안 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냥 단순하게 이론적으로 그리고 경전 상으로 무상하다고 해서 그걸 무상하게 본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그게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어떤 것도 없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생겨났다가 자기 스스로 사라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또 다른 생겨나는 것이 있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라.

 

꼭 해안가에 파도가 탁 치고 나서 쓸려 내려가지 않으면 다음 파도가 올라오지 않는 거라. 그런데 그 파도는 자기가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거라? 그 힘에 인해서 그냥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꼭 무상을 것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이 관찰하면 그렇게 되는 거라. 부딪쳤다가 사라지고 또 부딪쳤다가 사라지고 이런 식으로 계속 되는 거라.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성품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무상한 성품뿐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런 상태인데 그런 상태를 알기가 참 힘이 든단 말이라. 호흡을 알아차리는데 그렇게 무수한 파도가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하는 성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되느냐는 거라.

안 될 때는 그럼 포기해야 돼? 그냥 무명을 강화시켜야 되는 거라?

 

그래서 그 대안으로 제시해 놓은 것이 뭐냐면 「자·비·희·사」라고 하는 겁니다.

자·비·희·사는 결합하면 결합할수록 좋은 거라. 내가 만약에 남들에 대해서 연민심만 계속 있다, 자애의 마음은 없다 할 것 같으면 고통스러운 것을 걱정하고 하는 것은 좋은데 그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해줄려고 하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 행복한 길을 찾아주지는 않는다는 거라.

인도 가면 사람들한테 애들한테 10원짜리 주는 거 그건 연민심에 해당이 됩니다. ‘아유, 저 불쌍한 것’ 하면서 하나씩 주는데 그애는 어떻게 돼요? 거기에 딱 프로그램화 돼가지고 자기 스스로 뭘 하려고 안 하고 그것 자꾸 먹을라고 하는 거라.

 

그런데 자비심이 곁들여져 있는 연민심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아이들이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다른 방법을 찾는 거라.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게, 쉽게 말하면, 만약에 "너가 이 짐을 들어줄 것 같으면 내가 10원을 주겠다" 할 것 같으면, 애는 "내가 노력한 만큼 댓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리고 그 아이는 노력하는 힘들도 생겨나는 거고, 그리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니까 또 거기서 오는 기쁨들도 일어나는 거고, 이런 식으로 바뀌어져 나가게 되는 거라.

 

마찬가지로 자·비·희·사는 하나씩 하나씩 더 결합을 할수록 더 좋은 효과들을 가져오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빛이 결합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점점 다섯 가지 장애들을 엷게 만들어나갈 수는 있습니다.

엷게는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 가지고 뿌리를 짜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뿌리를 어떻게 짜르게 될까?

 

첫머리에 얘기했습니다. 숲을 베어내라. 나무 베지 말고!

한 번 생각해봐요. 어떻게 하면 나무 안 베고 숲을 베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돼요? (수행자 : 나무끼리 연결이 안 되도록.. 지혜로..)

나무끼리 연결이 안 되도록 하는 게 뭐라? 어떻게 하면 되는 거라? (수행자 : 선악을 구분할 수 있으면...) 다들 선문답 하고 있네. 그런데 인제 그렇게 보면 됩니다.

아까 만약에 욕심이 일어난다. 욕심이 일어날 때마다 수행을 통해서 제거를 한다고 그랬죠? 그래도 욕심이 완전하게 제거되는 것은 아니잖아? 욕심이 왜 일어날까? 왜 일어나게 돼요?

다른 비유를 들어봅시다.

 

죽음에 이르는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누군가가 의사가 “너는 한 달 뒤에는 너는 죽어” 그러면 그 사람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충격이겠지. 그런데 ‘나는 이제는 죽는 갑다’ 하고 살려고 하는 마음을 탁 내려버리고 나면 그 사람은 되게 평온해집니다. 한 달 동안 어찌 살지 그것은 고민할 필요 없이, 어쨌든 지금 현재는 그걸 탁 내려놓고 나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습니다.

살려고 하는 욕구를 내려놓으면은 그와 같이 평온한 것이 탁 옵니다.

 

살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오늘 당장 뭔가 뭔 치료도 해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고 이런 것들이 있는데, 완전히 살려는 욕구가 없을 거 같으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치료받을 땐 그냥 치료 받아버리는 거고, 밥 먹을 땐 그냥 밥 먹는 거고, 그런 형태로 바뀌어버립니다. 그 대신에 그 치료의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그것으로 인해서 갈애가 일어나질 안 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라. 그래서 그냥 단지 내가 이 몸을 한달 동안 유지를 해야 되면, 유지하는 동안에는 그냥 유지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냥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그냥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살려고 하는 욕구를 내려놓는 경우에! 그럴 경우에는 굳이 지금 현재 조그만 나무 하나씩을 안 베어내도, 이미 그 숲을 베어내는 상태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또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뭔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걸 한번은 참았다. 그런데 그다음에 또 보면은 또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계속 참았다.

그것보다는 아예 가질려는 마음 자체를 버려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러한 마음들은 일어나지를 않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것,

살고자 하는 것- 원하는 것들을 이룰려고 하는 것, 좋아하는 것들을 따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싫어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것들, 그 세 가지입니다.

그 세 가지를 분명하게 보고 그걸 내려놔 버릴 것 같으면, 그거에 대한 집착을 버려버릴 것 같으면 숲을 잘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 세 가지를 뭐라 그래요? 갈애(taṇhā)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갈애를 분명하게 보면 그 사람은 해탈에 이르게 되는 상태가 될 수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갈애를 알고 그걸 짤라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뭐 때문에 그럴까? 이 갈애라는 게 어떤 성질을 띠기 때문에 그럴까?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애는.

 

갈애를 한번 보십시오.

깨달은 사람의 공통적인 특색 중에 첫 번째가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나, 나의 것, 나의 견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틀린 견해를 제시한다고 해가지고 그것 가지고 싸울 필요도 전혀 없는 거고, 나를 비방한다고 해가지고 다시 또 내가 그걸 비방할 생각도 전혀 없는 거고, 내 거 가져가는 것뿐아니라 나를 어떻게 해코지를 한다고 해가지고 심지어 나를 죽인다 한다고 해가지고 '나'라고 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게 됩니다.

그게 깨달은 사람들의 첫 번째 공통적인 현상들입니다.

 

'나'를 강화시켜주는 것들을 뭐라고 생각해요? 범부들은 내가 강하면 굉장히 강합니다.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보통 우리는 무지하다그렇게 얘기합니다.

 

「무명」하고 「무지」하고 차이가 뭘까?

무명은 보통 아윗자(avijjā) 라고 빨리어로 얘기하고, 무지는 모하(moh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차이점은 뭘까?

무명은 투명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무지는 색깔이 있습니다.

탐심도 색깔이 있고, 진심도 색깔이 있고, 그다음에 무지라고 하는 어리석음도 색깔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탐심보다는 진심이 더 색깔이 강하고, 진심보다는 치심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이 색깔이 더 강한 거라. 그래서 투명한 것에 색깔이 입혀지는 것들이 탐·진·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색깔이 입혀진 건 발견하기 쉽거든. 그런데 색깔이 없으면 이걸 발견을 못해. 그런데 그걸 발견하는 것은 뭘 가지고 발견할 수 있겠어요?

 

지혜가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들이 색깔이 없는 것들이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제거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만이 무명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하고 경전에는 기록을 해놓았습니다.

 

밤에 불이 없을 때는 어둡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의 불이 탁 들어오면은 밝은 것이 탁 드러나게 됩니다. 그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어두움은 완전하게 몰아낼 수가 있게 됩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런 역할들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인제 어느 정도 이해를 했을 거라고 봅니다.

 

솔직히 부처님이 처음에 “숲을 베어내라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지 마라” 이렇게 얘기했을 때는, 현대 사람들은 그거를 잘 이해를 못합니다. 조금 전같이 그렇게 설명을 해주어야만 아는데, 옛날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고 금방 알아들어. 금방!

그게 "근기 차이"라고 그렇게 얘기하기도 하는데, 스님이 봤을 때는 근기 차이가 아니고 "환경조건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숲은 어떤 역할을 해요? 나에게 청량제 역할을 합니다. 숲에 가면 산소 마실 수 있고 내가 쉴 수 있고 마음도 쉴 수 있고 그런 역할을 하지, 옛날 같이 숲에 가면 도둑놈한테 물건 뺏기고 아니면 아니면 맹수들한테 해코지 당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것은 환경조건의 차이인 것이지, 그것을 근기의 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단지 이 글귀를 못 알아듣는 것은 그때하고는 조건이 달라져있기 때문에 잘 못 알아들어서 이걸 화두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사실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 이 얘기를 했을 때는 누구든지 다 알아듣습니다. 숲은 위험하다는 걸!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숲을 통과해야 되거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갈 때는 숲을 통과하지 않으면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이 갈 때는 항상 자기는 조심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조심해도 어쩔 수 없을 때는 자기가 해코지를 당하고 물건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숲을 통과할 때는 혼자 통과하지 말고 여러 사람이 모여가지고 통과하라고 왕이 칙령으로 내리는 그런 금족령도 있고 그렇거든. 그렇게 해야만이 조금 더 안전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부처님 당시 때 이것은 이해를 할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숲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실제적인 숲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숲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 것들, 나쁜 마음들이 여러 가지로 결합되어 있고, 장애들이 여러 가지로 결합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는 것들은 굉장히 위험하다 하는 사실로써 알아야 됩니다.

여기 예를 들어놨지만 아프리카 같은데 군대개미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한마리한테 쏘일 것 같으면 따끔하고 말지만 그 수십마리의 군대개미에게 습격을 당하면 죽습니다. 살아있을 때 도망칠 수 있을 때는 빨리 도망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하고 온 몸에 상처는 입겠지만, 나중에는 도망칠 수 있는 힘마저도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 같으면 군대개미가 몸을 완전히 먹어버린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뼈만 남게 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결합된 것들은 그런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거라.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같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라.

 

그런데 결합되는 게 어떤 것이 결합되기가 쉽겠어요?

여러분 같은 경우에 친구는 끼리끼리 모입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지 다른 부류끼리는 결합을 잘 안 합니다.

도둑놈 옆에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거고, 보시할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또 모이고 그렇습니다.

무의탁 노인들한테 밥을 나눠주는데 욕심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럼 만날 불란만 있습니다. 거기서는 만날 퍼줘야 되는데 욕심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사람한테는 더 많이 준다고 할 것 같으면 타박을 하고 할 것 같으면 서로 기분도 좋고 그거 받아먹는 사람들도 불편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끼리는 안 모이잖아.잘.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욕심은 욕심끼리 계속 스스로 결합을 하는 거라. 성내는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한 번으로 할 것 같으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만 조금씩 달라진다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그 성냄을 가지게 되는 거라. 남을 안 좋게 보는 것들도 사람이 달랐다 하더라도 그 마음 그대로 계속 안 좋게 보는 마음들은, 왜 그러냐 하면 이미 결합을 해버렸다는 거라. 결합돼있을 때는 그것은 이미 굉장히 힘들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동류의 것이 결합되지 않도록은 해야 됩니다. 성냄은 성냄끼리 결합하고, 욕심부리는 것은 욕심끼리 결합을 합니다.

 

그런데 이 결합하는 원인이 뭐 일거 같애요? 접착제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그것이 탐·진·치에서 말하는 치입니다. , 어리석음!

결합된 걸 결합되지 않게끔 노력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합을 하게 됩니다. 결합되는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을 못 할 거 같으면 결합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리석음을 경전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사성제에 대해서 모르는 것, 무상한 성품을 모르는 것, 그리고 팔정도에 대해서 모르는 것, 이런 것들을 어리석음에 해당이 된다고 그럽니다. 똑 마찬가집니다.

성냄이 있으면 성냄이 있다고 알고, '아, 이게 나쁜 것이다'라고 알 것 같으면, 적어도 사성제의 처음에 고(苦)라고 하는 진리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 괴로움이 있구나' 하고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냄이 있구나' 하고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르면 그 무지는 결합을 하게끔, 접착제의 역할을 하게 돼버립니다.

 

그래서 그걸 ‘아, 이게 성냄이 있다’ 그러면 성냄을 관찰해서 성냄이 사라지는 것을 봐야만이 성냄이 제거되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도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제거되는 길을 알아서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분명하게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현상이 일어났으면 그것들을 끝까지 알아차려서 사라지는 것까지 봐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어나는 것만 알아가지고는 그건 사성제의 고(苦)를 안다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일어나는 것만 알면 뭐 할 건데? 사라지는 것을 봐야지. 그것이 분명하게 무상하게 변하고 있어가지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만이 이것이 결합을 안 하는 거라.

 

그 어리석음을 만들어 주는 것들은 가장 대표적인 것, 어리석음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뭐일 거 같애요? 쉽게 말하면,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할 것 같으면 "게을러빠져서 뭔가 하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하기 싫은 사람들은 대부분은 보면, 그렇다고 하기 싫다고 해가지고, 마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는 아니잖아.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그럼 마음은 지는 뭐 하겠어요? 뭔가 행동하기는 싫은데, 싫으니까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을 굴리고 있는 거라. 계속 망상하는 패턴들을 가진다는 거라.

 

생각을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를 하긴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고와 망상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됩니다. 그래서 망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리석음은 더욱 더 강화되는 거라. 어리석은 마음은 그게 접착제라서 같은 동류끼리 자꾸 결합하게끔 한다는 거라.

 

망상과 사고는 어떻게 구분할까?

 

첫 번째 요게 나한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망상은 아무리 해봐야 나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사고하는 것은 분명하게 ‘내가 요거하면 뭐 어떻게 된다’ 할 것 같으면 나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망상은 아무리 계속해봐야 망상만 계속하지 결론에 도달하질 않습니다.

망상이 끝나는 게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멈추는 것뿐입니다. 사고는 어떤 경우든지 뭔가를 실행해야 되기 때문에 딱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서 그걸 안 하게 되는 거고, "이것은 해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결론에 도달해서 뭔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론에 도달 안 하면 그거는 망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살아가는데 방해를 주는가 하는 겁니다. 망상은 망상을 할 동안에는 다른 거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게 쓸모가 있을 거면 몰라도 쓸모가 없는 건데도 계속 그거 하면서 내가 지금 생활하고 하는데 굉장한 방해를 가져온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 망상은 하면 할수록 감정이 더욱더 소용돌이 치게 됩니다. 감정을 진정시켜야 되는데, 온화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감정을 오히려 더 북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거라.

 

이 4가지 중에 하나에 해당이 된다, 그럴 것 같으면 ‘아, 이것은 망상이다’ 해서 그것은 분명하게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은 내가 바른 사유에 해당이 되는구나’ 해서 바른 사유일 경우에는 그것들을 행해나갈 수 있게끔 되게 되는 거고. 그걸 분명하게 구분해서 망상하는 습관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가지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중에는 진짜 끊기 힘든 탐·진·치를 견고하게 만들어주게 됩니다. 그건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이 부분을 쭉 적어놨습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은 갈애라고 하는 세 가지 갈애, 갈애가 나를 끊임없이 윤회하게끔 만들어주고, 그것들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 역할을 합니다. 계속 살아가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갈애를 보지 못할 거 같으면 숲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항상 그 갈애를 조심해야 됩니다. 들끓고 있는 갈애! 내가 더욱 더 존재할려고 하고, 또 더욱 더 내가 뭔가를 파괴할려고 하고, 그리고 뭔가를 집착하는 성향들을 가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을 보고 그것을 빨리 제거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 탐·진·치라고 하는 의심이나 뭐 이런 것들만 계속 제거하는 데만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게을리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 숲이라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은 언제든지 잡초는 또 일어나게 됩니다. 그걸 항상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자! 밑에 한번 봅시다.

• 악업도 하나라고 하면 힘이 약하다.

• 악한 마음이 결합을 해서 무리를 만들면 끝없이 위험하게 된다.

• 선한 마음은 결합을 해서 무리를 만들면 해탈을 이루게 한다.

• 무리를 만들기 때문에 그 미세한 번뇌도 조심해야 한다.

 

조그만한 잘못들 그걸 저지르는 것들에 대해서 그걸 관대하게 봐주면 안 됩니다. 그것들이 결합을 하게끔 되면 큰 힘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항상 부족한 자다. 자신은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항상 여러분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가 올바르다든지 뭐 어떤 경우든지 올바르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거는 굉장한 착각입니다. 그거는 맞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올바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혹시 실수를 하고 뭔가 나에게 나쁜 말을 했다 해가지고 그것을 미워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올바르지 않듯이 다른 사람들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 마음들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은 조그만한 잘못도 그것들을 용서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만이 더 큰 번뇌로써 바뀌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 마음들을 항상 가져야 되고,

 

또 하나는 일상 생활을 하면서 어떤 것이든 만족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없든 아니면 적게 가지든 아니면 많이 가지든, 그것을 만족하고 그것들을 잘 이용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나에게 독이 됩니다. 없어도 독이 되고, 있어도 독이 되고. 그래서 그 두 가지는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