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불교 입문. 경전

여러 경전들..

담마마-마까 2013. 7. 11. 20:40



천수경이란 어떤 경전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원래의 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경≫인데, 우리말로 풀어보면 '한량없는 손과 눈을 가지신 관자재보살의 넓고 크며 걸림이 없는 대자비심을 간직한 큰 다라니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관자재보살이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으로서,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고 중생들의 어려운 속사정을 낱낱이 파악하여 적절하게 도와주는 보살입니다.

그리고 다라니는 진언 또는 주문이라는 뜻으로, 경전의 내용은 이것을 외우는 공덕이 넓고 크며 모난 곳이 없어 너그러우며 걸림이 없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이 경은 관자재보살이 '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게 하기 위하여, 모든 중생의 병을 없애주기 위하여, 그들이 수명과 풍요를 얻게 하기 위하여, 일체 악업중죄와 모든 작난을 여의고, 일체 청정한 법과 모든 공덕을 증장시키고, 일체 모든 착한 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모든 두려움을 멀리 여의고 구하는 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의 허락을 얻어 설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천수경≫은 중생들이 스스로 지은 죄업을 소멸하고 악한 귀신으로부터 보호받아 부처님을 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부귀영화를, 죽은 후에는 극락왕생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반야계통의 경전 중에서《반야심경》과 더불어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금강경》의 중심사상은 철저한 공사상에 입각한 윤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실천은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행을 뜻합니다.

그러므로《금강경》의 공의 개념은 윤리적 실천에 도달하기 위해 나와 너, 또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자아의 집착을 부정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이란 말도 자아의 집착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마땅히 머무를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의 뜻은 외적인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대상이나 내적인 나의 존재 어디에도 내 것이라 집착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므로 그러한 새로운 인식에서 청정한 실천행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강한 부정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부정은 모든 것에 분별, 집착, 망상을 끊으면 자연히 선행과 선심만이 남아 진리 그대로가 마음의 상을 일으키게 하는 논리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현실로 깨달아 보이신 법에 진실도 허망도 없다고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응무소주이생기심도 어떤 분별이나 집착, 망상이 없는 인식에서 선행과 선심의 보리행이 나오고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구도자가 만약 사람들을 전도했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는 진실한 구도자가 아니라고 하여 선행에 대한 자부심조차 버릴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생기심의 그 마음도 이타행을 하는 마음이지만 이타행조차 잊고 진리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의 실천으로 연결될 때 색이라는 현실세계와 진리인 공의 세계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장경이란 어떤 경전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이 경의 원래 이름은 ≪지장보살본원경≫인데, ≪대승대집지장십륜경≫ ≪점찰선악업보경≫과 함께 일반적으로 지장3부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장경≫과 ≪십륜경≫에서는 주로 지장보살의 사상과 그 원력이 설해져 있으며 ≪업보경≫에서는 중생의 업보를 점쳐 지장보살에게 참회함으로써 모든 업장을 소멸케하는 실천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미혹한 중생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비할 데 없이 큰 서원을 세우고 끊임없이 실천하고 계신 원력보살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난 뒤부터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이 출현하시기 전까지의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오탁악세에서 번뇌와 죄업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는 일을 부처님에게서 위촉받아 천상·아수라·인간·축생·아귀·지옥 등 육도의 어떤 곳에라도 몸을 바꾸어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하고 계신 분이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특히 가장 고통이 많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혹은 염라대왕으로, 혹은 지옥의 옥졸로, 혹은 함께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중생의 몸으로까지 몸을 나투어 설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장보살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들에게 가장 인연이 깊은 보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의 내용에서는 지장보살이 본생(本生)에서 세웠던 서원과 그 이익을 밝히면서 경전 자체가 지닌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이익을 강조합니다. 특히 ≪지장경≫ 의 일구일게를 독송하고 듣더라도 무량의 죄업을 소멸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장엄한 원력의 내용이 담겨 있는 ≪지장경≫을 지옥중생을 제도하는 이타정신의 극치로 여겨 영가천도 때 자주 독송하고 있습니다.

 

원각경이란 어떤 경전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원래의 이름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으로, 크고 바르고 광대한 내용을 가진 원각을 설명함이 모든 수다라 즉, 경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에는 문수, 보현 등 12만 명의 보살이 차례로 등장하여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습 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대원각의 묘한 이치와 그것을 깨닫기 위한 수행법을 상·중·하 근기의 중생에 맞추어 풍부한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원각은 큰 다라니를 나타냅니다. 다라니로부터 청정과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바라밀이 나와서 보살들을 가르치므로 모든 여래는 이 다라니인 원각을 원만히 비춤으로써 무명을 영원히 끊고 불도를 이룬다고 합니다. 원각은 모든 중생의 진리이자 근원이지만 무명이 중생을 덮고 있어서 중생에게 번뇌와 무지로부터 말미암은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명이라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눈병이 났을 때 허공에 꽃이 보이거나 달이 두 개로 보이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입니다. 그러므로 원각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다 타서 없어지면 재도 날아가고 연기까지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집착과 분별이 영원히 없어진 그 자리를 말합니다.

이런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선정을 쌓고 계행을 굳게 지키며 대중과 함께 살면서 집착을 떠난 지혜로운 관찰을 계속해야 합니다. 무명이 사라진 세계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바로 '방편없는 방편'이며,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깨달음을 성취하면 거기에는 닦을 것도 성취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특히 ≪원각경≫은 학문적 교학과 선정을 일치시키는 교선일치론(敎禪一致論)의 입장이어서 우리 나라의 불교계에서 는 매우 존중되는 경의 하나입니다.

 

 육조단경이란 어떤 경전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원래는 ≪육조법보단경≫인데, 줄여서 ≪법보단경≫ 또는 ≪단경 ≫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선사가 조계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인 경전입니 다. 원래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므로 조사의 어록은 엄밀하게 말하면 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교설이 언어로 표현되었으므로 모두 방편이라 보고 부처님의 종지는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전달된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헤능선사가 설하신 마음의 도리를 경의 차원까지 끌어올린 것 같습니다. 이 경은 어떠한 대승경전보다 중국과 한국불교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의 선정의 수행방법 을 중국적으로 적용시킨 것이 바로 선인데, 이런 중국적 선정을 확립시킨 사람이 선종의 6대 조사인 혜능선사입니다.

≪육조단경 ≫은 이러한 혜능선사가 돈오(頓悟)와 견성(見性)을 기치로 남종선을 부각시키는 경전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는 고려불교의 교종과 선종의 분열 속에서 혜능선사가 머물던 산의 이름을 딴 조계산의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열었습니다. 그때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삼았던 것 중에 하나가 ≪육조단경≫입니다.

우리 나라의 불교에서 육조단경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전통적인 소의경전이므로 이 경이 갖는 위치는 지대한 것입니다.

특히 육조단경은 일체법의 무상무념을 밝힌 구절이 유명합니다. '깨달음에는 본디부터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도 역시 바탕이 아니다. 본래 활짝 열려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나 티끌이 있을쏜가.' 이 구절의 뜻은 선은 어지러운 마음을 안정시키고 단단히 하여 본래 혼란하지 않은 자성 그것에 눈뜨고 그것을 밝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