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좋아함과 사랑의 뒤에는 괴로움과 공포가 있다. (20161021.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30. 09:00

https://youtu.be/pFbL165UQ00

* 좋아함과 사랑의 뒤에는 괴로움과 공포가 있다. (20161021. 대구)

 

오늘은 「좋아함과 사랑의 뒤에는 괴로움과 공포가 있다」 하는 내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사랑이라는 단어를, 불교에서는 용어를 굉장히 많이 씁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적어놓은 게 piya(삐야, 좋아)하고 pema(뻬마, 사랑) 라는 용어를 적어놓았습니다.

 

어떤 차이가 나느냐면 삐야(piya) 라고 할 경우에는 보통 보면 자기중심적인 것, 자기중심적으로 뭔가 혈연이나 가족이나 아니면 물건이나 이런 것에 연결돼있는 것에 대해서 사랑하는 것 그걸 얘기할 때 삐야(piy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집이 있다. 그러면 보통 보면 집을 '나의 집'이라고 얘기하는 것, 나의 집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고 누군가가 내 집을 파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거고, 아니면 내 집이 부서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고,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는 보통 삐야(piy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삐야라고 할 때는 보통 남자들이 그런 사랑의 감정을 가질 때 삐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것들을 얘기할 때.

 

그런데 뻬마(pema)라고 할 때는 똑같은 사랑이라도 그런 사랑하고는 좀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보통 여러분들 자식을 생각할 때 자식을 사랑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면 자기를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거라. 나를 위해서 너는 좋은 대학 들어가야 되고, 너는 나를 위해서 나쁜일 하지 말아야 되고, 물론 핑계는 댑니다. “너를 위해서!” 아니면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실제로는 깊숙히 들여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것들이, 그런 것으로 인해서 지탄받고 하는 것들을 싫어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크게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접착제 같이 딱 붙여놔놓고 뭔가를 할려고 하는 거라.

 

지금도 아마 어머니들은 자식이 결혼을 해도 죽을 때까지 아마 그 자식은 자기 자식일 거라. 자기한테 딱 붙여놓기 때문에. 그래서 뭘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뭔가를 보지, 다른 어떤 대상들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잘 없습니다.

그런 것들, 쉽게 말하면 오래도록 정성을 들여왔던 것으로 인해서 정이 쌓여가지고, 그 정을 한번에 탁 끊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딱 붙어있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들을 얘기할 때 보통 뻬마(pem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뻬마라는 단어는 여성들에게 부처님이 얘기할 때 뻬마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또 빨리어 단어 중에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 중에 '아누삐야'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누삐야 라고 하는 단어는 같은 삐야는 삐야인데 앞에서 얘기한 삐야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달콤한 것, 아첨하는 것, 사탕발림 식으로 이렇게 하는 것들을 얘기할 때 아누삐야 라는 단어를 씁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감언이설로 인해가지고 그걸 잘 포장을 하고 할 때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 아누삐야 라는 용어를 씁니다.

 

'칸띠'라는 단어를 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절제되어 있는 것들을 얘기할 때, 그래서 감정표현을 잘 못하고 하는데, 실제로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건데, 그런데 그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보면 이걸 사랑이라고 얘기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 할 때, 자기는 그런 절제하는 것을 잘 하는데,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많이 하죠. 그런 얘기도 안 하지만 “내가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데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표현하는 거나 이런 것들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고 할 때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칸띠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거 말고도 '시네하' 라는 그런 단어도 쓰고 하는데, 사랑이라는 단어에 불교에서는 굉장히 용어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냥 모든 걸 사랑이라고 해버리면 딱 끝나버리는데, 왜 이렇게 불교에서는 용어들이 많을까? 다른 종교하고는 다르게, 다른 종교에서는 가장 큰 사랑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거는 한 단어를 써도 됩니다.

그런데 불교는 신하고는 관계 없죠?

어떤 경우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부분들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부분들이기 때문에 각각의 감정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어떨 때는 이런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이런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부처님은 그 용어를 달리 표현을 합니다.

그마만큼 인간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하는 그런 것들은 굉장히 다이나믹하다 그럽니다. 다이나믹한데 그걸 부처님은 적절하게 잘 그 용어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쓰면서 그것에 대한 처방법도 또한 다르게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보통은 뭐 한국사회 같은 경우에는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면 그게 사랑이라는 형태로써 나타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거는 어찌 보면은 그 사람의 의무적인 것들이 되게 됩니다. 의무적인 걸 계속하다가 보면 어느 정도 자기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무뎌져 버리게 됩니다.

무뎌져 버리게 되는데, 그 어떤 사랑하는 대상이나 좋아하는 대상이 탁 없어진다든지 사라져 버린다 할 것 같으면, 그 무뎌지고 무지한 것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살을 하고 하는 확률이 높은 게 남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명예가 더럽혀지든지 아니면 뭔가 큰 충격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뭔가 없어졌다든지 이렇게 했을 경우에는, 그래서 그런 것이 무뎌져 있는 상태에서 무지한 상태에서 이걸 돌릴 방법이 없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자살을 하는 경우들이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보통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똑같은 패턴이라고 하더라도 내내 그것 가지고 자기 스스로 괴로워하게 되는 거라. 뭐 하나 없어졌다, 아니면 누가 돌아가셨다 해가지고 그걸 평생 가슴에 담아두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생활을 못하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면서도 그것에 내내 얽매여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들이라.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그것에 맞게끔 부처님은 지도를 하게 됩니다.

그게 여기 일화에서 나오는 부분들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그뒤에는 항상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 공포라고 하는 것이 뒤따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 그런 얘기들이 있죠.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도 말아라.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도 말아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마찬가지로 왜 그러냐면 그것은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변하고 없어지고 사라지게 돼있기 때문에, 그랬을 때는 그 괴로움들은 집착하는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괴로움들은 훨씬 더 많게 되는 거고, 집착하는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사라질 것들에 대해서 두려움들이나 공포감들은 더 크게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게 불교의 기본적인 방침입니다.

 

한번 봅시다.

그래서 보통 「좋아하는 대상에는 3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람이나 생명체, 보통 여러분들이 기르는 애완동물들이나 어떤 생명체든 그런 생명체에 대한 것.

• 그다음에 물건에 대한 것.

• 그다음에 사고·생각에 대한 것.

그게 보통 3가지입니다.

 

이 3가지에 대해서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을 계속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기 곁에 항상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도 지금 어릴 때부터 해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굉장히 많이 바뀌어왔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바뀌어가게 돼있는 것이 원래 여러분들 생각하는 사고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하고 맞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참 어리석은 거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들 또 여러분 곁에 있는 가족들 그것도 언젠가는 변해가고 떠나가고 또 없어지게 돼있다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괴로움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라.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계속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태어났으면 죽게 돼있는 거고, 또 내 곁에 뭔가가 생겨났으면 그것은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이 3가지 사람이나 생명체, 물건, 그다음에 사고라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그것을 집착할만한 대상은 되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과 공포는 일어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세상은 달리 이야기를 합니다.

보통은 보면 세상 사람들은 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뭔가를 판결을 내립니다. 만약에 예를 들면은 누군가가 내 물건 훔쳐갔다, 그럴 것 같으면 물건을 훔쳐간 그 사람에 대해서 그 대상에 대해서 뭔가 벌을 내리지, 그것을 훔쳐가도록 만든 나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거라.

누군가가 또 내 생각하고 다르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생각이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이고 어떤 것이 잘 된 것인지를 판결해가지고, 잘못된 것에 대해선 "네가 틀렸다" 하고 얘길한다는 거라. 그런데 세상의 관점은 이 집착하고 해야 될 대상이 아닌데도, 이 대상에 대해서 항상 판결을 내리게끔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거라.

그 대상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거라.

만약에 대상을 문제삼는다고 할 것 같으면 똑같은 판결이 나야 됩니다.

누군가가 이 물건 훔쳤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은 징역 1년을 때렸다, 그럴 것 같으면 똑같은 물건을 훔쳤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징역 1년을 때려야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라. 물건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는데도 여러 가지 상황이나 주변들을 보고 어떤 사람은 1년, 어떤 사람은 2년을 때린다는 거라.

그런데 대상을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동일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동일하지 않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부처님이 봤을 때는 뭔가 잘못돼있다는 거라.

 

쉽게 예를 들면은 여기에 만약에 마약이 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이 마약을 가져가서 피울려고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약은 두려운 것이다 해가지고 아예 피해버리게 됩니다. 만약에 대상을 문제 삼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대상으로 일어나는 것들도 동일해야 된다는 거라.

누구든지 피우게끔 된다든지 누구든지 멀리하게끔 된다든지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되는데, 그 대상으로 인해서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 것은, 이 대상은 항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가만히 있는 것이지, 그걸 만지고 건드리는 사람 각각에 따라서 이것은 틀리게끔 작용을 하게 된다는 거라. 술이 있다고 해서 누구든지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마시는 사람은 마시고 안 마시는 사람들은 안 마신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문제를 삼아야 되는 것은 술이 아니라 그걸 이용하는 것들이 문제가 되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할 때 그 대상은 항상 문제 삼지 말아라.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나쁜 말을 했다, '죽일놈 살릴놈'이라고 했다, 수행이 안 되어있을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되고 나면 ‘응, 그건 그냥 그때 일어나는 감정일 뿐이다’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차이가,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차이가 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들을 잘못하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항상 문제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무언가를 대응을 해야 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은 주고받고 하는 거래의 형식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데, 불교에서는 주고 받는 거래의 형식의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없다는 거라. 자기의 그것을 얼마만큼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대응하는 것들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것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들을 항상 문제 삼는다는 거라.

그래서 줬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리시브하는 형태, 그걸 받아들이는 것을 조금 더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좀 더 선한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부처님이 이 법을 설한 목적이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다툼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고, 자기 자신도 불선한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더 좋은 방법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방법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들을 항상 문제 삼게끔 돼있는 것이 불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접근법은 사회적인 접근법하고는 다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들,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들이라고 하는 것들로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불교적인 것들이라고 잘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해결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눠놓았습니다.

첫 번째, 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걸 가지지 마라, 이용하지 마라 하는 것이 아니고, 가지고 이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떼도록 만든다는 거라. 손을 뗀다는 것은 그걸 하지마라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도 가끔씩 차운전을 하다보면, 얼마 전에도 신호 기다린다고 차를 세워가지고 있는데 누가 뒤에 와서 탁 받았어요. 그래서 크게 부서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보니까 괜찮아. 그래서 가가지고 “괜찮습니까?” 하니까 그 사람이 오히려 당황하는 거라. 자기가 뒤에서 받았으니까 자기가 잘못한 거라. “아이고, 어떻게 보험처리 해드릴까요?” 그래서 저거 뭐 도색 좀 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괜찮습니다. 몸 안 다쳤으면 됐습니다. 그냥 가십시요” 하고 보내드린 거라.

그럴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그래도 충분히 되는데,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너가 잘못한 것이니까 이것은 배상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해버릴 것 같으면, 만약에 보험 처리한다 그러면 보험회사는 뭐 그걸 뻥튀기 안 할려고 그러나? 십만원 들어간 걸 20만원 한다고 그러지. 그럼 저 사람은 생각할 때 나는 십만원이면 고칠 줄 알았는데 이십만원이다 하니까 또 그 사람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되고 계속 이렇게 나쁜 관계들로써 바뀌어나가게 된다는 거라. 모든 것들이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해결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결코 좋은 방법은 되지 못한다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적어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이게 새 차다, 뭐 어떻다, 내 차다, 하는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으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먼저 그런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1차적인 방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그것에 대해서 의존하지 않아도 마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옛날 스님이 가지고 있던 차가 수동이었습니다. 누가 한 십년 타고 다니던 것을 스님이 차가 필요하겠다 싶으니까 갖다줬는데 에스페로라고 하는 수동 기아차였어요. 차를 계속 고치고 고치고 하다가 차가 도로에서 두 번 퍼졌어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내가 그 뒤로 한 칠년을 더 탔으니까 한 십칠년을 탄 거지. 그러고 나서 폐차를 시켰어요. 폐차를 시키고 나니까 나는 진주 가고 어디 가고 할 때는 불편해.

 

그런데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거는 뭐냐면, 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차가 없는 동안에는 내가 조금 더 일찍 진주 출발하면 되는 거라. 버스 타고 와서 거기서 내려서 또 택시타고 가고, 안 그러면 사람이 나오면 거기서 차를 타고, 내가 조금만 서두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안 해.

그런데 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차가 없어지고 나면 다시 차를 뺄 때까지는 계속 아쉬운 거라. 그래서 뭔가에 의존하는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항상 그 문제에다가 마음이 걸리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의존하는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은 자꾸 불행해집니다. 그것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든 그것으로 인해 불행해지는 거라. 그래서 의존하는 대상을 점점 줄여나가야 됩니다.

 

하물며 스승에게 대해서 의지하는 것들도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의지하는 것은 오로지 출가한 스님들은 담마와 위나야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과 율을 의지해야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법을 의지해서 ‘아, 이게 법에 맞는가 안 맞는가’ 하는 것만 자꾸 가려내야 되는 것이지, 의지할 대상을 자꾸 가질 것 같으면 뭔가 계속 부딪칩니다. 아마 말리까님도 그럴 거라. 뭔가 의지할 대상이 있으니까 의지할 대상에게 뭔가를 해줄려고 하는데, 자꾸 다른 사람들하고 부딪치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거라. 의지할 대상이 없어져버릴 것 같으면, 법이 마음에 딱 자리를 잡고 있을 것 같으면 그걸 하든 안 하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전혀 마음은 불편하고 괴로움은 없게 되는 거라.

 

불교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이라.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상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도록 자꾸 만드는 거라.

그게 인제 그 뒤에 오는 괴로움과 공포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기 예를 들어놨듯이 남자와 여자의 경우, 사람이 죽었을 때의 예를 들어놨습니다.

자기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이 죽은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아들 묻어 놓은 곳에 가서 매일 거기 가서 아들 생각하고 지내는 거라.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어?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들을 좋아하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죽은 것을 살려낼 수는 없는 거 아니냐? 네 아들만 죽느냐, 다른 아들도 똑같이 죽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너는 다른 아들이 죽었을 때는 마음의 괴로움이 없다가, 네 아들이 죽었다고 해가지고 이 괴로움을 그렇게 겪느냐?

이성적으로 탁 돌려놓는 거라. 무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도리를 잘 하고 있다가, 그것이 탁 없어진 것으로 인해서 그냥 머리가 먹먹해져버린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괴로움을 당하기 때문에 다시 이것을 마음을 돌려놓는 거라. 그래서 ‘아, 내 아들이 죽음을 당할 상황이었으니까 죽었다’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어주는 거라. 그래서 ‘아, 아들이 죽듯이 나도 그렇게 죽음을 당하게 돼있다. 그럼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성의 경우에는 손녀가 죽었는데, 부처님은 다른 방법으로 얘기합니다. 여성은 아까 뭐라 했어요? 집착하는 것이 많고 정으로써 이렇게 맺어졌기 때문에.

그럼 한 사람이 있을 때는 행복했느냐? 행복했다는 거라. 그럼 만약에 두 사람일 거 같으면 더 행복했겠네? 더 행복하죠. 세 사람이면 더 행복하고, 그래서 여기 우리 선원에 모인 사람 같이 많은 식구일 것 같으면 더 많이 행복하겠네? 그럼 이 여성은 그 행복한 걸 자꾸 꿈꿉니다. 더 행복하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전에 자기 손녀가 죽은 것에 대해서 슬픔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행복한 것이 계속 늘어나는 상태라는 거라.

마음을 전환시켜주고 나서 부처님이 다시 얘기합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점점 빼나가는 거라. 열 사람이 됐을 때, 두 사람이 됐을 때는 조금 더 덜 행복하고, 한 사람이 됐을 땐 더 행복하지 않고, 그 한사람까지 없을 것 같으면 아예 행복이 없어지는 상황으로써 설정을 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정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부처님께서.

그래서 여성에게 대하는 것이 남성에게 대하는 것하고는 분명하게 다르게끔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여성에게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만들어주는 거라. 한 사람으로 인해서 행복하다는 것들은 두 사람이라 해서 더 행복해지고 세 사람이라고 해서 더 행복해지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행복해져 나가다 점점 더 불행해지고 하는 걸 그대로 자기는 몸소 겪고 있으니까. 그것은 사실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사실을 그대로 보라는 거라.

실제로 나한테 열 명의 손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무 명의 손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걸 상상해나가느냐는 거라.

그리고 지금 현재 있는 손녀가 죽었다, 그건 사실이라는 거라.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자꾸 눈감고 행복이 없어지는 것만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사실은 사실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괴롭고 불행하고 하는 것들은 사라지게 된다는 거라. 왜 그것으로 인해서 네가 괴로움을 당해야 되느냐?

 

그게 부처님이 남성과 여성을 대할 때 쓰는 방법을 달리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어 용어로 남성에게는 ‘piya’라는 용어를 쓰고, 여성에게는 ‘pema’라는 좋아하는 마음을 그렇게 달리 표현을 하게 된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생명이나 대상이나 사고라고 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진정으로 대상을 대상으로써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 삐야나 뻬마의 마음을 가지고 있게 된다는 거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집착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써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은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마음이 적어도 좋아하고 사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으로 인해서 괴로움이나 고통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라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괴로움을 받는 것들을 보면, 보통 이 3가지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내가 그걸 받아들이고 그걸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괴로움을 받고 안 받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는 거라.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래서 그러한 마음들을 빨리 벗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자꾸 외부적인 대상을 문제를 삼아가지고 ‘너 때문에 이 아이가 죽었다’, ‘어떤 상황 때문에 이 아이가 죽었다’ 해서 그 외부적인 대상에다가 자꾸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자기의 마음, 마음이 어떻느냐는 것을 자꾸 보도록 하라는 거라.

 

수행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봤을 때, 그 대상을 분명히 내가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성장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되어나가는 거라. 그러면 지금 내가 호흡하고 있을 때는 호흡만 그렇게 하고, 그리고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보는 것 듣는 것에서만 그렇게 마음이 성장해나가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들도 다른 일반적인 생명체나 아니면 나의 사고들이나 아니면 나의 물건들도 똑 마찬가지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마음이 성장하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계속 다툼이 있게 되고 계속 그것으로 인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테라와다 불교를 똑바로 이해만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리적인 문제로 다투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좋고 싫은 것 가지고 사람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니 편 내 편' 가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항상 행복한 마음이 있게 됩니다. 어떠한 조건을 따지고 이런 것들은 성립이 되지를 않게 되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 불자의 바른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제 부산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화가 일어날 때는 자애의 마음을 가지라고 했는데, 자애가 안 일어나는 걸 어떻게 할 거라? 어제 경전 한 구절을 얘기했어요.

화를 내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하고 못을 박아라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는 거라. 화가 일어날 때마다 ‘아, 내가 부처님 제자가 아니구나’ 하고 자꾸 마음을 먹어라는 거라.

부처님은 화를 내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집착하는 것, 그리고 게으름 부리는 것 이런 것들도 전부 부처님 제자답지 않다고 얘기하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이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것들, 생명체들, 가족이라는 생명체든 아니면 물건이든 아니면 자기 사고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내가 불교도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그걸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이것들로부터 피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나 두려움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자! 이번 포인트는 봅시다.

• 「좋아」라고 하는 사랑한다는 말은 복수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항상 똑같은 감정이 되지 않는다, 복수의 감정이기 때문에 그것에 자기가 대처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서 대처를 하도록 만들듯이 자기도 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고민과 괴로움을 만든다.

그런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3가지 대상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단지 그것은 내가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이 세상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이 잘살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 좋아하는 것을 바꾸거나 심판해도 마음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외부적인 대상으로 자꾸 문제를 삼지 말아라는 겁니다. 사회적인 잣대로써 그것을 문제 삼을 거 같으면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 세상을 바꿀 것이 아니라 의존하지 않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을 바꿀 것이 아니라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마음을 자꾸 증장시키도록 해서, 어떠한 대상에도 의존하지 않도록.

스승에 대해서도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것들도 의존하지 않는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그것들로 인해서 바른 법이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그렇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이 여러분들이 좋아함과 사랑의 뒤에 괴로움과 공포가 일어나지 않게끔 된다는 것을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