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25.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31. 09:10

https://youtu.be/GGHvuG-zbaY

*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25. 대구)

 

프린트물 내준 것은 저번에 우리 테라와다불교 교단에 까티나 축제 때 스님이 법문한 프린트물 내준 겁니다. 그거 그대로입니다. 그거는 음성 부분들도 들어봤죠? 들어봤기 때문에 크게 할 건 없고, 다른 각도로써 조금 더 얘길 하겠습니다.

 

청정에 이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수행자 : 계를 잘 지켜야 됩니다.)

계를 잘 지켜야 된다? 그 얘기는 배워야 될 것들을 잘 배워라 하는 삼학(三學)이라고 하는 것 계·정·혜(戒定慧), 계도 배우고 지키고 그다음에 선정에도 이를려고 노력하고 항상 마음이 고요하게 만들고, 그래서 외부적인 자극에 휩쓸리지 않도록 만들고, 그러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알아서 지혜가 열리도록 해서,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살아가도록 하라 하는 그런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게 맞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 정 혜의 순으로 가는 것 같지만, 이것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가 한만큼 분명하게 그것이 드러나진다는 거라. 청정의 길이 만약에 확인이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참 어려울 거라. 그런데 내가 조금만 노력하니까 조금의 청정은 생겨나는 거고, 또 조금 더 마음이 향상되는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좋은 결과가 있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 청정의 길들은 그렇게 도달하지 못할 것도 아니고, 그리 험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지금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마만큼 좋은 게 어딨어? 다른 종교들 같이 그냥 이생에서 열심히 살고 나서 다음 생을 얘기한다든지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고 다른 어떤 것들도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특색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한만큼 그대로 효과가 나타난다고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이걸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윤회하지 않는다, 윤회는 부처님이 설하지 않았다 하고 오해하기에는 딱 쉬운 논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는 아닌 거고, 당연히 이생에서 열심히 할 것 같으면 다음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이생에서 좋은 결과들이 있고, 또 다음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좋은 결과들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원인·결과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윤회는 하게끔 돼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원인이 돼서 결과가 있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또 다른 윤회들이 있게끔 돼있습니다.

 

가장 좋은 게 그런 윤회하는 흐름들을 완전하게 탁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경전에 보면 '찐다솟땅 빠락깜마' 그렇게 나옵니다. 빠락깜마는 뭐냐면 죽을동 살동 노력하라는 거라. 죽을동 살동 노력해가지고 소따(sota) 흐름 자체를 끊어버려라. 흐름 자체를 끊어버릴 것 같으면 윤회를 안 하게 된다는 거죠. 그럼 당연히 청정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를 해서 더 이상 받아야 될 결과들이 없기 때문에 흐름은 끊어져 버린다는 거라.

보에 물이 아무리 가득 고인다고 하더라도 보가 튼튼하다고 할 것 같으면 보 밑으로 내려갈 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 보를 한 사람이 쌓을려면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될 거라. 그렇게 노력하지 않을 거 같으면 흐름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보를 쌓으면 쌓을수록 아, 이게 물이 덜 흘러가지게 되고 더이상 영향을 안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 같으면 더 튼튼하게 자꾸 쌓을려고 한다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겁니다. 직접 부처님이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그 보를 쌓아주는 것도 아니고, 또 여러분들의 흐름을 끊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부처님은 그 길을 잘 가르쳐준 것이라는 겁니다.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 말씀을 통해가지고!

이제 여러분들은 그 부처님 말씀을 토대로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자꾸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은 아, 부처님 말씀이 진리구나 하는 걸 스스로 증명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뭘 해야 그 흐름을 끊을 수 있을까? 여러분이 가장 하기 쉬운 게 뭐가 있어요?

가장 하기 쉬운 거, 감각적인 것들은 제거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감각적인 것들은. 뭔가 조금 더 먹고 싶다, 아니면 조금 더 아름다운 걸 보고 싶다, 아니면 싫은 것들에 대해서 배척할려고 한다, 전부 감각적인 것들입니다.

감각적인 것들을 끊어내지 못하면 흐름의 단추를 끼울 방법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적인 것을 끊을 수 있게끔 부단하게 자꾸 연습하고 훈련을 해야 되는 거라. 정 안되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되는 거라.

 

생활 패턴 자체가 만날 감각적인 것에 빠지는 쪽으로 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생활 패턴을 자꾸 노력해가지고 바꾸어야 되는 거고, 또 먹는 것에 대해서 자꾸 폭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일부러라도 눈 딱 감고라도 음식량을 줄이고, 먹는 것에 대해서 사량분별 안 일으키게끔 다 비벼 먹든지.

사람을 보면 자꾸 좋고 싫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대상들을 자꾸 피해야 되는 거라. 강제로라도 어쨌든 처음에는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욕망이 자꾸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나는 것들을 자꾸 끊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감각적인 욕망을 끊어내는데 가장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세상 생활을 안 하면 됩니다. 출가를 한다든지 아니면 숲에 어디 가서 근신해서 산다든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걸 끊기 위해서 조금 더 빠른 길을 스님들은 택하는 거고, 또 집중수행 들어가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가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출가와 다름없는 생활들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집중수행 들어가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집에서라도 그런 시간들을 자꾸 마련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어느 정도 이 흐름이 바뀔 수가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 그냥 놔둬버릴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하기 위해서 끊어야 될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이 깊어지고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이 더 많으면 많아질수록 가지는 견해들은 점점 더 적어져 버립니다. 그거는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뭔가에 대해서 자꾸 견해들이나 자신의 의견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내세우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자꾸 끊어낼려고 해야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견해들을 자꾸 들을려고 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자꾸 이해할려고 하는 것들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꾸준하게 선한 일들을 하고 수행을 하는 것들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거라. 그게 어리석음을 몰아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해야 되는 거고, 여러 가지들을 해야 됩니다. 그 감각적인 욕망을 끊기 위해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그런 데에 노출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노출되기 쉬울 때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끊어내기가 쉬워지는 겁니다.

일견 출가한 스님들이나 집중수행하는 사람들은 감각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잠재해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다시 튀어나오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일상 생활하면서 그러한 훈련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어떠한 마음의 상태가 돼있는가 하는 것을 자꾸 돌아보도록 그렇게 노력을 흔련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야 되는 것, '상카랑까양 랏뜨와'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조건지워진 것들이라는 겁니다. 조건지워진 것들은 항상 변하게 돼있고 그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여기 붓다야나 선원도 조건이 되어서 붓다야나 선원을 개원을 한 것이고, 또 변해나가게 돼 있는 거고, 조건이 다 되면 붓다야나 선원도 문을 닫고 또 다른 곳으로 간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이 되게 되는 것이지, 이게 항상 있을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러면 어떤 것이든 조건지워져 가지고 변화하게 돼있고 소멸하게 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목숨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 몸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 생각도 마찬가지고. 그럼 살아있을 동안에 어떻게 해야 돼요? 여기 붓다야나 선원이 있을 동안에 뭘 해야 돼요?

 

열심히 부처님 가르침 듣고 열심히 수행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소멸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대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가 취해야 될 것들 이익들이나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는 것들을 훈련해가지고 확립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사라지고 나서 후회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반드시 그걸 명심을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해야 될 것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사라진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지금 해야 될 일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뭔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가지고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그걸 쓸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걸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나눌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러한 재능들이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익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스스로 자꾸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소멸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계속 관찰만 하고 있는다고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힘써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첫 마디에 "힘써 노력해서 그 흐름을 끊어라." 흐름을 끊는 것은 힘써 노력하다 보면은 그 흐름은 끊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더 이상 붓다야나 선원이 없어도, 자기 마음에 붓다야나 선원이 있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그대로 따라간다고 할 것 같으면 선원은 실제적으로는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언제 어느 때에 있더라도 나는 항상 부처님 말씀이나 스님 가르침을 기억을 할 수 있고, 또 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그냥 마음에 법당을 짓고 있는 거라.

해야 할 일들 그리고 어떤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들을 자꾸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모든 조건지워진 현상들은 항상 변해서 소멸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 현재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할 것.

 

그다음에 또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최종적인 목표가 뭡니까? 열반입니다! 열반이 여러분들에게는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면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자꾸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열반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들은 극히 자제해야 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이거 한다? 그건 그 사람에게는 통용될 지 모르지만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바른 법에 대해서 이해나 확신을 갖는 사람일 거 같으면 누구든지 그 길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극히 자제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열반을 향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순간순간 자꾸 체험을 해야 됩니다. 무상한 것들을 체험하고,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들이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거고, 그러한 사실들을 자꾸 체험 해야 됩니다.

그걸 체험을 해야만이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들이 없고 열반들을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쌓였을 때 아, 나는 이제 완전하게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데는 어떠한 경우도 그것이 다른 어떤 것들이 장애가 되도록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이게 통상적으로 청정의 상태에 나아가는 그런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나아갈 길들에 대해서 반드시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까티나축제 때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동남아시아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반드시 어떤 일들을 하고 나면 자기가 서원을 한다고. 그런데 그 서원이 꼭 테라와다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그 계획들을 세운다는 거라.

‘아,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아니면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좀 더 부유롭게 돼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기를’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의 행위가 끝나고 나면은, 말을 하는 것이든 마음에 지니는 것이든 아니면 행동하는 것이든 그것이 끝나고 나면은 반드시 물을 나무에다 부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서원을 세웁니다.

"내가 붓다가 되기를" 그러면서 끊임없이 붓다가 되기 위해서 바라밀들을 완성을 하는 거라. 열 가지 바라밀들을.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열 가지 바라밀들이 완성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럼 여러분들이 만약에 붓다가 되지 않고 아라한이 된다, 아니면 천상에 태어난다, 어떤 목표를 정해놨으면 그걸 위해서 얻어야 될 바라밀들은 나름대로 그 바라밀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집안이 화목해지기 위해서, 아니면 내가 조금 더 오래도록 살기를 바란다든지 그 목표를 위해서는 그 목표에 맞는 바라밀들이 형성돼야 됩니다. 그게 형성되지 않을 거 같으면 목표는 그냥 목표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반드시 목표를 세워라 하고 얘기합니다. 목표를 반드시 정해서 그것에 맞게끔 자꾸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노력하면은 그 목표는 이루어지는 거고, 그 목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목표가 바른 목표라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다음 단계로써 넘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수다원을 목표로 했을 거 같으면 수다원에 머물러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다음 단계의 목표가 또 생겨나게 됩니다. 목표하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는 아라한이 될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다음 목표들은 또 반드시 세워야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목표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설령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내가 나아가고 있는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 목표가 바뀌는 부분은 없고, 또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스스로 그것들에 대해서 만족을 하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지나온 길에 대해서 아, 내가 참 잘살았다 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돌아가시는 분들이나 아니면 돌아가실 것이 예정된 사람들이 있으면 스님이 일부러라도 가서 그런 얘기들을 해줍니다. 병원에서는 몇개월 남았다고 그러죠? “예, 스님.” 그러면 삼개월 동안 일단 목표로 잡아봐라. 보통 그 목표라는 게 삼개월 동안에 무슨 큰 좋은 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고, 삼개월 동안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적어도 그 삼개월 동안에 내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오더라도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견디면서 그것들을 관찰할려고 해본다든지, 그래서 고통스러운 느낌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마음이 되도록 목표를 잡는다든지, 저녁에 자기 전에 완전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한 채 잠자리에 들어서 깨어나자마자 알아차림을 지닌 채 깨어날 수 있도록 자꾸 훈련을 한다든지, 마지막 순간에 호흡을 놓치지 않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도록 노력한다든지, 이런 아주 사소한 것들을 얘기하게 되는 거라.

 

그걸 할려고 하더라도 진짜 죽을 힘을 다해서 해야 만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중간에 가서 한번 더 가보면 “아, 스님 그래도 내가 살아오면서 왜 그런 목표들을 세우지 못하고 인제사 그러한 목표를 세웠는지 참 후회됩니다” 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운 목표는 설령 내가 요 정도에서는 요 목표에 도달해야 되는데 도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지금 좋은 거라. 그렇게 자기 스스로 바뀌어나가는 모습들이 너무나 좋은 거라.

바른 목표는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딱 수명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얼마만큼 더 괴로움을 당해야 될지도 모르고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수명이 정해지고 죽어가는 사람보다도 훨씬 더 목표들을 세워가지고 그것을 하기에 더 용이한 조건들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좋은 조건이면 그것들을 잊어버릴 수가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 지금 현재 내가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바르게 살아갈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그 윤회하는 고리들을 끊는다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당연히 나아가는 길이 ‘아, 내가 바른길이고, 이것이 바로 내 스스로 청정에 이르는 길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집착하는 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떨어져 나갔구나, 또 내가 갈망하고 있는 것들이 참 필요 없는 것들인데 그런 갈애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더이상 나에게는 ‘어떻게 할까’ 하는 그런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지혜는 반드시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면 나중에는 결국 내가 열반을 체험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런 구조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잊지 말고, 나아가는 길이 멀다고만 자꾸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번에 사띠 삼보장가 하면서 참 힘들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힘들다 하고 놓아버릴 것 같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럼 우선에 사띠 삼보장가 진행되는 과정들을 분명하게 얘기를 했을 거 같으면, 나는 지금 현재 요거는 할려고 한다는 목표를 세워야 된다는 거라. 적어도 앉아있을 거 같으면 호흡이면 호흡에 사띠를 두어서 그 호흡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하겠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면서 왼발 오른발 하면서 그 움직임들을 놓치지 않도록 하겠다, 뭔가 물건을 집고 움직이고 할 때 그 하는 일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도록 하겠다.

먼저 가장 쉬운 거부터 목표를 잡고 하라는 거라. 하면 좋은데 어떡할 거라. 그러면 그게 완성되고 나면 그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또 목표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청정의 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고 반드시 청정의 길은 여러분 앞에 열려져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