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윤회 (2016120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1. 09:00

https://youtu.be/KtzE1dt7I3w

* 윤회 (20161202. 대구)

 

오늘의 주제는 「윤회」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 물어볼게요. 윤회가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의미라, 윤회가?

(수행자 : 흐른다, 돌고 돈다) 여기 글 보고 얘기하는 건가?

그런데 그 뒤에 그게 잘못됐다고 적어놨는데?

'상사라(saṁsāra)'라고 하는 것을 잘못 번역하면 '흐른다' 하는 의미가 되는데, 흐른다는 의미가 아니고 원래 상사라에서 상(saṁ)은 '함께'라는 뜻이고, 사라(sāra)라고 하는 것은 '변한다, 걸어다닌다, 나아간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변화된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변화되는 걸 윤회'라고 하는 거지, 그게 꼭 이 세상에서 죽고 나서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마음의 여러 요소들이 변화되는 것도 윤회의 영역에 속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봐야 되는 것이지 꼭, 죽음 이후에 다음 세상이라든지 이런 것만 볼 거 같으면 여러분이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죽어본 사람이 없잖아? 그리고 과거를 그렇게 기억해내고 하는 사람도 일반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와 미래를 모르는 상태에서 윤회를 단지 죽음 이후만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겁니다. 그건 넌센스에 해당이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윤회라는 것은 변화되는 것들을 얘기한다 할 때 윤회라는 개념을 쓰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 개념하고 많이 다르죠? 그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현재 내 몸과 마음이 변화되고 있고, 또 죽고 나서도 뭔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고 하는 것들을 다 포함해서 운회라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윤회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윤회가 있어요, 없어요? (수행자 : 있습니다.)

현재 상태를 보면 분명히 뭔가 변화되고 있으니까 윤회가 있는 것 같은데, 과거랑 미래를 보니까 내가 확인할 수 없으니까, 이걸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런 입장이 되죠?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처님도 분명히 오도송을 얘기할 때 윤회 부분을 얘기했거든. 끊임없이 내가 집 짓는 이를 봤다, 이제는 더이상 집을 짓지 못한다는 얘기는 윤회하는 원인을 알았다는 거거든. 그래서 윤회하도록 만드는 자를 내가 잡았으니까 인제 다시는 윤회하지 못한다 하는 거를 얘기한 거고,

부처님이 또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삼명을 분명하게 알 때 그때 한 가지 뭐가 있어요? 과거부터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하는 그것들, 자기뿐 아니라 중생들의 모습들을 다 봤다고. 그래서 부처님만 보더라도 분명히 윤회가 있는 거 같은데.

 

경전들을 보면 왕기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시인 같은 스님이었습니다. 그 스님은 자자할 때 아, 부처님을 찬탄하고 이렇게 좋은 상가가 있나 하고 찬탄하는 게송으로 유명한 스님이죠!

그 왕기사라고 하는 스님의 특징이 뭐냐면 죽은 사람들의 두개골을 손톱으로 톡톡톡 짚어보면 이 사람이 다음 세상에 어디에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거라. 그것뿐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 수행하는 자들 중에서도 윤회하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특히 파욱 센타 같은 경우에는 과거전생에 윤회하는 모습들을 깊은 삼매를 통해가지고, 보통 그거는 사선정에 이르렀을 때를 얘기합니다. 사선정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윤회하는 모습들을 분명하게 관찰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보더라도 과거부터 지금 현재까지도 윤회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알고 보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는 "윤회는 있다" 하고 얘기를 해야 되겠는데, 지금 당장 여러분들은 그걸 모르니까 대답을 못하는 거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비유를 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토끼뿔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돼요? (수행자 : 안 봤으니까 없다.) 토끼뿔 자체는 없기 때문에, 토끼뿔이 긴가 짧은가 물어보면? 뿔 자체가 없는데 길고 짧은 것을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을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길다고도 하지 못하고 짧다고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기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윤회는 무기(無記)다” 하고 얘기를 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기(無記)는 부처님이 열 가지 부분으로 분명하게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10가지 부분에 윤회 부분이 있습니까? 없죠!

그럼 부처님이 분명하게 윤회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려놓았다는 얘기거든. 자신이 보고 분명하게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무기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또 마찬가지로 그러면 나는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까 그것은 그냥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터부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수행을 해보면 여러분이 충분히 그것은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조금 수행했다고 칩시다. 조금만 했다고 치더라도 우리 완나가 네가 앞으로 삼개월 후에 죽는다 하고 탁 알 거 같으면 어떤 마음이 들 거 같애요? (수행자 : 겁날 거 같아요) 겁이 나지. 왜 겁이 나요? 죽는 게 두려워서? (예) 죽는 게 두렵고 살고 싶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러면 불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 이게 내가 살고자 하는 갈애구나’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 갈애가 없을 거 같으면 삼개월 후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삼개월 동안 열심히 살게 되는데, 갈애가 있으니까 두렵고 겁이 나고 살고자 하게 되는 거라. 아, 이게 내가 갈애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그런 갈애만 알고 있어도 자신은 분명하게 압니다. 아, 이 갈애로 인해서 다음 것이 생겨난다는 것을. 삼개월 후에 죽는다는 소리를 듣기 전에는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게 생겨난단 말이라. 그렇기 때문에 아, 이것은 변화되고 있구나, 마음이 변되고 있구나, 그럼 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갈애를 지닌 채 살아갈 것 같으면 틀림없이 마지막에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고, 그럼 그 마음은 어디로 가겠어? 다음에 태어나는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윤회하는구나 하는 걸, 이 갈애로 인해서 윤회하는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조금만 불교 공부를 해도 그 부분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서 부정하고 하는 것들은 사실은 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 머리에 적어놨지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살고자 하는 갈애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바방가 소따'라고 하는 것, 결생식 다음에 일어나는 바왕가 소따가 자꾸 조건지워서 변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에 한 열일곱번 정도 변한다고 그럽니다.

그게 보여야만이 뭔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똑같은 것이 아니고 변화된 모습으로 마음이 이렇게 바뀌고 또 저렇게 바뀌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데, 과연 바왕가 소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은 힘이 드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학계든 아니면 불교계 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게 됩니다.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그 얘기는 바꾸어 뒤집어 얘기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확인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논쟁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참 어찌 보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그냥 그대로 믿기만 하더라도, 열 가지 무기 중에는 분명히 윤회 부분은 없다, 그리고 그거는 분명히 부처님은 윤회 부분에 대해서는 밝혀놨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어야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자기 스스로 알려고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걸 시대적인 흐름으로 보면은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불교가 처해있는 입장이 너무나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하는 얘기라.

쉽게 말하면 "무아(無我)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라. 뭔가 진아를 얘기한다는 거라. 특정한 것이 윤회를 한다든지 아니면 영원히 사는 어떤 세상 극락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꾸 상정을 해두고, 그리고 의식 자체도 아뢰야식이나 뭐 무슨 식이다 하면서 육식 이외에 또 다른 식들을 또 들먹이고 있다는 거라.

그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식이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를 해야만이 육식(六識) 다음에 칠식(七識) 팔식(八識)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계속적으로 이런 식으로 바뀌다 보니까 사람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유하고 버터하고 있다고 칩시다. 우유가 열을 가해가지고 버터가 됩니다. 우유하고 버터는 분명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유하고 버터하고는 틀림없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에 윤회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유는 절대 버터가 될 수 없습니다. 또는 윤회하는 특정한 개체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우유는 절대 버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논리로 따지다 보니까 특정한 개체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윤회라고 하는 것들이 안 맞게 되는 거라. 불교 외적인 것들을 그걸 비아(非我) 라고 하는 용어로 쓴다든지 아니면 진아(眞我)라고 하는 용어를 쓴다든지 하면서 무아(無我)의 개념들을 자꾸 변형시켜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지금 한국불교는.

그러다 보니까 특정한 존재가 있으니까 변하지 않는 세상이 있어야 되는 거고, 뭔가 나를 좌지우지하는 특정한 존재가 있어야 되는 거고, 이렇게 힌두교적인 사상으로 자꾸 바뀌어져나가게 되는 거라.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거는 보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 뭔가 특정한 게 있어가지고 나를 좌지우지 한다고 생각 안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니다, 진아는 없다, 비아는 없다, 특정한 개체는 없다 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이게 단멸론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것이 없으면 당연히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윤회하지 않는다고 증명할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는 진아라고 하는 것 특정한 개체는 없다는 것을, 무아만 증명해주면 윤회는 없다 하고 증명하는 꼴이 돼버리는 상황이 되는 거라.

 

근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하는 사상하고 윤회라고 하는 사상은 충돌하지 않는 건데, 그런데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는 이게 충돌하는 상황이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많은 식자들은 "윤회는 없다" 하고 자꾸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이 변형되는 또 다른 형태로써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전에는 뭔가 특정한 개체가 있다 하는 무아가 아닌 진아를 얘기하는 상태에서, 지금은 윤회는 없다는 것으로써 바뀌는 기조로 지금 나가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잘못된 것이 또 다른 잘못된 것으로써 바뀌어나가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이거는 아주 위험할 수밖에 없는 사상입니다. 애초부터 불교적인 사상이 아닌 걸 가지고 그것들을 불교적으로 자꾸 해석하다 보니까 이런 오류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윤회라는 것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하는 것과 윤회라고 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을까?

어떻게 충돌하지 않을까? 아마 불교 사상사가 이것이 충돌하지 않는 것들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역사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래서 각각의 학설이 생겨나는 거고, 각각의 부파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합니다.

힌두교의 윤회와 불교의 윤회는 다르다는 걸 아까 맨 처음에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윤회한다고 했는데 윤회를 하는 것은 뭐가 윤회한다고 하는 거죠? 윤회하는 실체가 뭐라는 거라? 무아라고 했으니까 실체가 없는데, 윤회라고 할 것 같으면 실체가 없는데 윤회할 수는 없잖아.

 

이렇게 되니까 그 윤회하는 보편적인 실체가 뭔가 하는 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학설이 제기되게 됩니다. 그게 보통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로 그렇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불교에서 제기하는 것이,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 그런데 윤회는 있다" 하는 겁니다. 완전히 불교적인 입장입니다.

 

또 다른 것은 "윤회도 있고, 윤회하는 실체도 있다"고 하는 독자부 사상입니다. 뿌드갈라라고 하는 독자부 사상이 생겨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부처님은 분명히 실체가 없다고 했는데, 실체는 없다고 부정을 하는데 장소를 상정합니다.” 장소로써의 실체를 인정하는 그게 유식(唯識)입니다. 그게 아뢰야식이나 말리아식이나 하는 장소로써 설정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렇게 할려면 다른 거는 다 윤회를 안 하고 변화되는데, 식만은 오롯이 여기에서 저기로 오롯이 그대로 간다는 것을 전제를 해야만이 이 장소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교단 스님 중에도 한 분이 이런 분이 있어요. 이것도 굉장히 위험한 현상입니다. 지금 실체는 인정하지만 장소로써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 오온이라고 하는 것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중에 색(色)은 물질적인 거고, 수·상·행(受想行)은 마음의 요소, 그다음에 식(識)은 마음이다. 수·상·행은 변화되는 것들이고, 그런데 식은 실체로써 있어가지고 그것이 오롯이 다음으로 넘어간다고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식은 바꿔 얘기하면 수·상·행이 없이는 식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식도 수상행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요소로써, 그것도 마음이지만 요소로써 작용을 하게 돼있는 건데, 요것들을 분리해버리는 거라. 수·상·행(想行識)과 식(識)을.

그러다 보니까 식은 존재를 하고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를 해야만이 그 장소가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식(識)이 다른 데 갈 장소. 그게 유식사상하고 거의 흡사한 형태로써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여러분들이 보통 생각하는 막연하게 "극락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 뭔가 내가 죽고 나서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그거는 나는 전혀 모르겠고, 그리고 실제로 내가 그리 가는지 어떻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어쨌든 좋은 일 할 거 같으면 극락세계 간다는 막연한 입장, 그걸 윤회라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뭐냐면 지금의 식자들이 얘기하는 "없다! 윤회는 없다." 무아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윤회할 주체가 없다. 그래서 윤회는 없다. 그래서 니 맘대로 살아라. 지금 좋은 일 할 거 같으면 좋은 결과 있을 거고, 나쁜 일 할 거 같으면 나쁜 결과는 있는데 윤회는 없다. 하고 부정해버리는 형태라.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게 비단 지금에만 이런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해가지고 불교사상이 쭉 바뀌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돼왔던 거라.

 

그런데 지금까지 결론은 뭘까? 테라와다의 입장은? 결론은 뭐라?

무아(無我)이지만 윤회는 한다! 윤회는 있다!

 

그러면 뭐를 가지고 증명할 거라? 무아인 것은 알겠는데, 윤회한다는 것은 뭐로 증명을 할 거라? 죽어봐야 알 거라? 그런 건 아니죠? 증명하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얘기한 우리 완나한테 얘기했지만, 자기가 스스로 갈애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봐야만이 윤회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갈애를 알아차리면 윤회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갈애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을 집중해서, 그 집중력이 어느 정도 키워진 상태에서 그 변화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봤을 때 아, 이게 갈애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또는 내가 선정삼매를 통해서 사선정까지 이르러서 다섯 가지 자재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음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 마음이 과거생을 보게 될 때 그럴 때 아, 내가 윤회가 있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럼 적어도 선정에서 일선정부터 해가지고 사선정까지 쭉 자유자재로 하면서 사선정에서 자재롭게 들고나고 하는 상태가 된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세 가지 갈애를 분명하게 알아서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실제적으로는 윤회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게 난제입니다.

그동안에 불교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이 문제가 끊임없이 불교 역사에서 수백 년간 지속돼 왔겠어요? 그마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피상적으로 흐른 결과가 이런 결과가 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과 그러면 동남아 사람들 하고의 차이점은 뭘까? 여러분은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오락가락 하는 거고, 저사람들한테 얘기하면은 어떠한 경우도 윤회를 부정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다 선정삼매에 다 이르든지 아니면 아라한들이라? 그건 아니잖아.

그게 뭐냐면 그 사람들은 나의 스승은 부처님이다 하는 확실한 믿음들이 있고 그리고 그 가르침들에 대한 확신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대로 분명하게 실천해나가고 있다는 거라.

스승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그 확신들도 있기 때문에,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들 것 같으면 적어도 경전에 써져있는 것 어느 하나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어찌 보면은 맹목적인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그렇지 않으면 불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었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들을, 쉽게 말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설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 같으면 윤회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의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적어도 삼보에 대한 확립들만 어느 정도 돼있어도, 사실은 이것을 논쟁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아직은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불교가 삼보에 대한 것들이 정립이 아직 안 되어 있다는 뜻이라.

그마만큼 지금의 한국불교는 사실은 위험한 상황이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위험하다고 해가지고 금방 없어지고 망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또 다른 어떤 사상으로 바뀔 가능성들이 생겨난다는 거라. 윤회없다고 하는 사상이 또 다른 것으로 안 바뀐다고 어떻게 얘기할 거라? 그전에는 진아라고 하는 사상이 대세를 이루었다가 지금은 윤회없다는 사상으로 바뀌고, 또 이게 어떤 또 다른 사상으로 바뀔지 모르게 된다는 거라.

 

이게 20몇페이지를 하면서 쭉 적으면서 스님이 어느 정도 그래도 여러분들이 윤회에 대한 것들을 이해를 하라는 입장으로 적어놓은 겁니다.

 

그 「윤회의 굴레 세 가지」,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 이런 식으로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윤회하는가」 하는 것도 아까 얘기했지만 각각의 학설이 윤회하는 주체가 뭔가 하는 것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들 쉽게 말하면 쓸데없는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얘기들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다음에 윤회를 받아들이고 나서 여러분들이 「윤회에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쭉 적어놓았습니다. 한번 읽어 보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닙니다.

 

갈애를 하나씩 끊어내는 훈련들을 자꾸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감각적인 욕망 중에 어떤 것 하나를 먼저 끊어냈다, 탐욕에 대한 걸 끊어냈다, 아, 그러면 탐욕이 분명히 끊어졌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탐욕으로 인해서 내가 그다음에 생겨나는 것들이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럼 뒤집어서 얘기할 것 같으면 탐욕으로 인해서 내가 다음생에 그것으로 인해서 과보를 받을 것이 없어지고, 탐욕으로 인해서 업을 짓는 것도 없어지는 거고, 탐욕으로 인해서 갈애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윤회하는 세 가지 조건이 완전히 끊어진 걸 압니다.

 

그럼 그렇게 하나 되고, 그다음에는 성냄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또 하고, 업의 굴레가 되는 세 가지가 분명히 끊어졌다는 걸 자신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갈애 부분 중에 감각적인 욕망 중에서 쉽게 말하면 어떤 부분들이 떨어져나가고 그다음에 지금 살려고 하는 갈애들,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살고자 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끊어져 나가고 할 것 같으면, 존재하고자 하는 마음들 이런 것들도 사라져버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은 아, 내가 살 있을 동안에 해야 될 일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동안에 최선을 다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흐리멍텅하게 그냥 내가 해탈의 상태에서 그걸 즐기면서 살지 하는 마음들 이런 갈애 조차도 싹 끊어져버린다는 거라. 살아있을 동안에 최선을 다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갈애들도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은 세 가지 갈애가 분명하게 끊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아, 나는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윤회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한다든지,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윤회하는 주체가 누굽니까?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뭐로 만들어진 거라? 오온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면은 색·수·상·행·식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보게 될 것 같으면, 윤회하는지 안 하는지 하는 부분에 대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게 되는 거라.

지금 현재 오온에 대한 것들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게끔 되는 거라. 내가 호흡을 하고 있다, 물질적인 현상이다, 그럼 물질적인 현상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무슨 느낌이 있다, 그럼 그 느낌들만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가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있다 할 것 같으면 식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다 보면은 내 자신은 알아차림이 일상생활화 딱 되는 겁니다.

일상생활화하게 될 것 같으면 그런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느낌으로 인해가지고 그다음에는 내가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갈애가 없으면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화가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화가 일어난 것으로 인해서 내가 거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마만큼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자꾸 스님이 "느낌을 알아차리라" 하고 얘기합니다. 느낌으로 내가 모든 것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 느낌에는 움직임이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실감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 이게 무아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아를 체험해서 아는 사람들은 윤회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무아를 알 거 같으면 분명하게 나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오도송 같은 것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거는 일반적으로 수행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르는 길입니다.

 

그럼 부처님이 윤회에 대해서 얘기할 때 여러분들한테는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

무아라는 것들을 모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돼요? 윤회에 대해서 얘길 할 수밖에 없는 거라. 나쁜 행위를 지었으면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고, 좋은 행위를 했으면 좋은 결과를 받게 된다고, 성질낸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거친 말이나 거친 행위들을 하게끔 돼있다고, 원인·결과에 대해서 끊임없이 얘기를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그렇게 원인·결과이기 때문에, 죽고 나서도 당연히 원인을 지었으면 다른 결과들을 낳게 돼있다는 거라.

그걸 쉽게 말하면 부처님이 일반 범부중생에게 얘기하는 윤회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무아와 윤회는 양립될 수 있는 것이지,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무아라는 것을 모를 거 같으면 자꾸 다른 형태로 바뀌어져나가게 되는 거라. 바뀌어나가다 보니까 윤회에 대한 것들을 이러쿵 저러쿵하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는 거라.

그게 윤회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리해서 얘기할 것 같으면 「윤회」와 「무아」 그리고 「업」이라고 하는 것들은 부처님의 오리지날 사상이라는 거라.

불교에서만 있는 사상인 것이지 다른 것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는 거라. 똑같이 힌두교에서 윤회를 얘기하고 업을 얘기하고 무아를 얘기하더라도 불교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거라. 그것과 혼동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한테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지 않고 삼매를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서 결론 내린다는 것은 그거는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냥 그런 체험없이 오감으로 오는 정보에 인해서 윤회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단지 그런 윤회의 원인은 갈애다, 갈애가 윤회의 원인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갈애들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길밖에, 그게 바른 길인 것이지 논쟁거리로써 자꾸 이걸 치부해버려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님이 구구절절하게 26페이지를 윤회라고 하는 글을 적어놓았습니다. 아마 이것도 글로 쓴 것이기 때문에 이걸 읽어도 윤회에 대해서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안 하면 헷갈릴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고 쓸데없는 것들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갈애들을 하나씩 끊어내는 일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길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